모델은 나폴레옹이 세운 파리 개선문

1890년대에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직접 프랑스의 개선문 사진을 보고, 이를 참고하여 독립문의 모양새를 직접 스케치했다. 이는 1896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에게 보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P30VZ_Sp7qM

 

 

 

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B%A6%BD%EB%AC%B8

 

독립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에 착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1] 영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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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에 착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1]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2][3]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서재필의 원작을 배경으로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사파진), Sabatin, 흔히 사바틴)이 설계했고, 심의석이 시공 감독하였다.[4][5][6][7] 현판은 김가진의 작품이다.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뒷편에 건립되었으며, 독립문 전면에는 영은문이 서 있던 기둥돌이 함께 남아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KpQB8jATkE

 

 

 

독립선언기념탑. 후면에 선언문을 낭독했던 탑골공원처럼 기미독립선언문을 조각함.

 

https://kydong77.tistory.com/18185

 

최남선 - 기미독립선언서/ 해설

최남선 작성 기미독립선언서/천도교 손병희의 요청에 의함. 낭독자 정재용/탐골공원 팔각정  기미독립선언문에 목숨 걸고 서명하신 ​민족대료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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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宣 言 書(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이 되어, (우리나라의) 역사가 생긴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고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꺽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우르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회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軸)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번 한 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이 이 한 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1.천도교 측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2.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李承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의 16명,

불교측 대표로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成)의 2명이 서명·날인했다.

독립선언의 방법을 구상한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은 처음에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를 알게 된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어 3교단이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 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지방은 물론 3월 중순 이래의 남부지역에서 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33인 자신은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대표자들과의 사전 합의를 어기고, 명월관지점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했다.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추진했다. 현재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3가지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8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탑골공원

https://kydong77.tistory.com/19186

 

한룡운, 신념을 실천한 민족시인/ 룡운당대선사비 전문

*아래 책이 수록된 만해 선생의 일화가 낯선 것이어서 옮겨 봅니다. 장석주편,나는 문학이다.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책보러가기 장석주 외 17인, 나무이야기 한국문학 100년을 빛낸 작가들!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yEO3NNOvaXk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hOcB0pngL6g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26/2014032600457.html

 

안중근 의사의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보도한 영어매체 기사 첫 발견

안중근 의사의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보도한 영어매체 기사 첫 발견

www.chosun.com

 

 1909년 스트레이츠 타임즈에 보도된 안중근 의사의 "내가 이토를 처단한 열 다섯가지 이유"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https://kydong77.tistory.com/21378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공원과 김구 백범광장/‎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 양력 2월14일은 우리나라에는 또 다른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지난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는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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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Xa3WlH9ptGA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B%B4%89%EA%B8%B8

 

윤봉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같은 이름을 가진 배우에 대해서는 윤봉길 (배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윤봉길 의사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윤봉길 의사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윤봉길(尹奉吉, 1908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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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 폭탄 투척 사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입니다.
 
김구와 윤봉길
 
일본 가나자와에 있는 윤봉길 선생 위령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3], 협의 끝에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홍커우 공원에는 상하이 일본군 1만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명, 그밖에 각국사절, 각계 초청자 등 2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4]

당시 폭탄은 도시락하고 물통 모양으로 만든 급조폭발물이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하고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천황탄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는데, 바로 그 허점을 노렸던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하고 나서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하고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하고 내빈은 퇴장하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그 틈을 노려 도시락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키고 나서 힘차게 던진 찰나에, 단상으로 정확하게 명중이 되었다.[5] 그 틈을 노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폭하기 위해 물통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물통 폭탄이 불발되는 그 찰나에 일본 헌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면서 윤봉길을 덮쳐 제압하였다. 윤봉길은 제압을 당하면서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6]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3],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가 잘려 절름발이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내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윤봉길을 극찬하였으며,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도화선이 된 것이다[7].

반면, 일본 헌병대하고 순사들이 조선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다는 주장 있으나 이는 일제의 복수에 불과할 뿐 의사의 탓이라 탓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8].

▲ 양력 2월14일은 우리나라에는 또 다른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지난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는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약 4개월만의 일이다(사진=안중근기념사업회제공)

출처 : 내외통신(http://www.nwtnews.co.kr)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hOcB0pngL6g 

 

 1909년 스트레이츠 타임즈에 보도된 안중근 의사의 "내가 이토를 처단한 열 다섯가지 이유"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26/2014032600457.html

 

안중근 의사의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보도한 영어매체 기사 첫 발견

안중근 의사의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보도한 영어매체 기사 첫 발견

www.chosun.com

 

1909년 스트레이츠 타임즈에 보도된 안중근 의사의 "내가 이토를 처단한 열 다섯가지 이유"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https://wisdomagora.com/novel-%EC%95%88%EC%A4%91%EA%B7%BC%EC%9D%B4-%EC%9D%B4%ED%86%A0-%ED%9E%88%EB%A1%9C%EB%B6%80%EB%AF%B8%EB%A5%BC-%EC%A3%BD%EC%9D%B8-15%EA%B0%80%EC%A7%80-%EC%9D%B4%EC%9C%A0/

 

[Social]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Illustration by Junhyeon Cho (DAA Grade 11) by Jihoo Ha (DIA Year 8) 1868년, 일본을 다스리는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을 현대화 시켰고,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제국주의처럼 식민지를 가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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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O_DH2C8FF64 

 

 

https://www.youtube.com/watch?v=Io5AG-BA3po 

 

https://lucyhangaround.tistory.com/1856

 

선을넘는녀석들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동상 '조선의 신궁'이 있었던 자리

MBC <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 서울 편 > 3회 서울 다시보기 - 빛과 그림자 2탄  안중근의사동상 '조선신궁의 자리'  장소 이름 위치 정보 2019년 9월 1일 방송에서는 서울 남산에서 이야기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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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C%A4%91%EA%B7%BC

 

안중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1](Thomas, 도마,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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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1](Thomas, 도마,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2][3]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9시30분에 암살하여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KnSANrKAsDI 

 

https://kydong77.tistory.com/20668

 

남산 안중근기념관공원

홍매 동영상 www.youtube.com/watch?v=CV6XQKAOfVk ko.wikipedia.org/wiki/%EC%95%88%EC%A4%91%EA%B7%BC 안중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중근(安重根, 1879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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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T6taKr6FZ8w  

 

백범광장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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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대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양반가의 후손[1]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2][3]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4],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5][6]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4egwQmwm2o 

 

https://www.youtube.com/watch?v=jij6WC1wKJo 

 

[참고]

https://kydong77.tistory.com/20580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 족보 찾기

인천대공원 http://www.ulj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79 안동김씨(安東金氏)편 - 김알지계의 신라 왕족 - 울진신문 [조회수 : 1871] 민족의 지도자 白凡을 배출 ▶신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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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은 구안동 김씨 현대 인물중 가장 저명한 분이시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B%9C%EC%98%81_(1868%EB%85%84) 

 

이시영 (1868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시영(李始榮, 1868년 12월 3일 ~ 1953년 4월 17일)은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1], 호는 성재(省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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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李始榮, 1868년 12월 3일 ~ 1953년 4월 17일)은 조선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1]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1]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 부제조상의원 부제조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임정 수립 이후 김구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임정 요인이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으로 나뉘었을 때는 단정론에 참여하였다. 1948년 7월 24일부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후손으로, 영조 때의 정승 이종성의 5대손이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과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아들이며, 이건영(李健榮), 이석영(李石榮), 이철영(李哲榮), 이회영(李會榮)의 동생이자 이소영(李韶榮), 이호영(李護榮)의 이복 형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신익희와도 인척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8SDbmuG2Ko 

 

 

 

https://kydong77.tistory.com/21378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공원과 김구 백범광장/‎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 양력 2월14일은 우리나라에는 또 다른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지난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는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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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brbr4muNIo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C%A6%9D%EC%99%95

 

지증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증왕(智證王, 437?~514년, 재위: 500년~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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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智證王, 437?~514년, 재위: 500년~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중국식 군주의 칭호인 의 칭호를 사용하였다.[1]

즉위 전 갈문왕에 책봉되어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 되고, 소지 마립간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즉위하였다. 그는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던 순장 풍습을 최초로 폐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기도 하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이다.[2] 그는 6촌 형제간인 소지 마립간과 사돈이었고 즉위 전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확인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C%A0%9C%EB%B6%80%EC%9D%B8

 

연제부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연제부인 박씨(延帝夫人 朴氏)는 신라 중기의 왕족, 왕비로 지증왕의 부인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찬(伊飡) 등흔(登欣)의 딸이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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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부인 박씨(延帝夫人 朴氏)는 신라 중기의 왕족, 왕비로 지증왕의 부인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찬(伊飡) 등흔(登欣)의 딸이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모량부(牟梁部) 대인의 딸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체구가 커서 배우자가 없었던 지증왕에게는 즉위초 알맞은 배우자가 없었는데, 사신을 보내 신라 국내를 수소문하게 하던 중 연못가의 대변이 큰 것을 보고, 체구가 클 것이라 하여 수소문하여 연제부인(延帝夫人)을 발견하고 배우자로 삼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실제로 연제부인은 여자이면서도 당대의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체격이 좋았다.

 

법흥왕 김원종(金原宗) 

https://namu.wiki/w/%EB%B2%95%ED%9D%A5%EC%99%95

1. 개요  2. 호칭  3. 생애

3.1. 즉위 전
3.2. 중앙 집권 국가 체제 확립(율령 반포)
3.3. 불교 공인
3.4. 금관국(금관가야) 편입
3.5. 연호 제정   3.6. 사망

4. 평가  5삼국사기 기록  6. 둘러보기

 

*(은자주) ' 3.3. 불교 공인 ' 에 대하여

붓다는 죽는 날까지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4성제 8정도에 입각한 수행을 멈주지 않은 위대한 스승이다.

4성제란 인생에 대한 해석과 그 해답이라 할 수 있다. 苦의 원인이 集이라면 죽는 날까지 8정도를 실천해야만 한다.

팔정도(八正道)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6362 

 

불교의 핵심교리 -사성제와 팔정도 - 불교신문

사성제(四聖諦)는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인 동시에 일생의 설법으로, 고(苦).집(集).멸(滅).도(道)를 말한다. 부처님은 성도 후 자신의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다섯 비구를 찾아 최초

www.ibulgyo.co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220 

 

성기숭배(性器崇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기본적인 생계수단의 생산 및 인류 자신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을 해결해야만 한다. 이러한 생산과 재생산은 인류 사회가 존속하고 발전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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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성신앙에 대한 역사적 문헌기록은 『삼국유사 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의 옥문지(玉門池)에 얽힌 여근곡(女根谷) 전설을 비롯하여, 『중종실록』 6년 기묘조(己卯條) 및 12년 병진조(丙辰條)의 부근(付根) 기록,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의 부군당(府君堂)에 목제남근을 당 안의 네 벽에 봉안하였다는 내용과 『지봉유설 芝峰類說』에 보이는 부군당 기록 등이 있다.
성에 대한 숭배는 생식 숭배, 생식기 숭배, 성교 숭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성숭배는 인간의 긴 역사 속에서 상호 밀접한 영향을 받으면서 전승되어 왔다. 특히 생식기에 대한 숭배 형태는 신앙 형태에 따라 다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남자의 생식기를 인위적으로 조각하여 세우거나 비슷한 형태의 자연암석을 대상으로 하여 기자나 풍년, 풍어, 자손만복 등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역신(疫神)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어 신앙하는 형태,
둘째는 여성기와 모양이 흡사하거나 여성기를 상징하는 암석을 신체로 상정하여 신앙하는 형태,
셋째는 바위의 외형이 남녀성기와 모양이 유사하거나 남녀성기를 상징하는 암석을 신체로 하여 신앙하는 형태 등을 들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기숭배(性器崇拜))]

 

https://kydong77.tistory.com/2098

 

지철로왕 설화

https://www.youtube.com/watch?v=XkZ4JUkF3WQ [주]삼국유사의 성담론을 다시 소개한다. 설화의 세계에는 금기가 없다. 현대판으로 고치면 이 설화는 대물왕 강쇠와 대물왕비 옹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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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제1 지철로왕

지철로왕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제 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이며

名智大路, 又智度路,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 하였다.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시호는 지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 때부터 시작하였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이라고 한 것은 이 왕 때부터 시작하였다.

 

[은자주]마립간을 처음 사용한 왕은 第十七奈勿麻立干이다. 왕통이 김씨로 자리잡고 새시대를 연 것을 공포한 것이다.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10월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 것을 설화[역사]기술자가 착각한 듯하다. 일연이 주석을 달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麻立干과 王의 위치를 맞바꾸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辛巳則三年也.)

왕은 영원 2년(500년)에 왕위에 올랐다.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 冬老樹下,

그래서 사자를 三道에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는데,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니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 한덩어리 하나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개들은 양끝을 물고 싸웠다.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했다.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누고 간것입니다."

 

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보니 그녀의 신장이 일곱자 다섯치나 되었다.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封爲皇后, 群臣皆賀.

책봉하여 황후로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경하했다.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

또 아슬라주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가 있었다.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이 섬은 둘레가 2만6천7백30보였다.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아니했다.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박이종(신라장군 이사부)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협했다.

「不降則放此獸」,

"너희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섬의 오랑캐는 두려워서 항복을 하였다. 이에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그 주의 장관인 주백으로 삼았다.

 

http://egloos.zum.com/tntv/v/895734

 

세계에서 가장 큰 거시기와 머시기

알려지기를세상에서 가장 큰 거시기라고 합니다.중국 사천성 단샤[단하]산의양원석[陽元石, 즉 남성의 근본]인데요,높이 28m, 직경이 7m라고 합니다.이 바위는세상에서 가장 큰 여성생식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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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천성 단샤[단하]산의 양원석(陽元石).

높이 28m, 직경이 7m라고 합니다.

 

 중국 사천성 단샤산의 음원석(陰元石).

바위에 난 틈이 마치 생식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음원석이라 한다.
길이 10m, 너비 4m, 동굴의 길이는 4.8m,

가장 넓은 틈이 74cm, 동굴의 깊이는 4m란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98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참고] 신라 왕표

https://namu.wiki/w/%EC%8B%A0%EB%9D%BC/%EC%99%95%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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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P94SfHo2Gts 

 

 

https://www.youtube.com/watch?v=ucavaVKooKo&list=RDMM&start_radio=1&rv=P94SfHo2Gts 

 

 

https://www.youtube.com/watch?v=d6hc1mmE3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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