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ydong77.tistory.com/22378

 

구안동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行列表)

중시조 忠烈公 김방경(金方慶)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174 김방경(金方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0%A9%EA%B2%BD 김방경 - 위키백과, 우리 모

kydong77.tistory.com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김씨 사연

https://www.youtube.com/watch?v=JGjV_APTPA0

 

[구(舊)안동김씨]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外

https://www.youtube.com/watch?v=TAk3P_I33Js

 

https://kydong77.tistory.com/22378

 

구안동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行列表)

중시조 忠烈公 김방경(金方慶)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174 김방경(金方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0%A9%EA%B2%BD 김방경 - 위키백과, 우리 모

kydong77.tistory.com

 

남산 안중근기념관공원

 

인천대공원

 

 

http://www.ulj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79

 

안동김씨(安東金氏)편 - 김알지계의 신라 왕족 - 울진신문

[조회수 : 1871] 민족의 지도자 白凡을 배출 ▶신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시향(음력10월10일)에 참석한 울진 종친회원들이 시조묘소에서 기념촬영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www.uljinnews.co.kr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안동의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의 둘째 아들로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중시조(1세)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의 명장으로 삼별초와 왜구를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으로 벼슬이 시중,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판전리사사, 도원수에 이르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구안동’은 방경의 아들과 손자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흔은 찬성사,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윤(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선의 아들 승용(承用)은 대제학, 승택(承澤)은 평장사, 영돈(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영후(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었는데, 특히 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안동’의 세계(世系)는 방경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영후의 손자들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사렴(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 %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 : 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九容)·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 : 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질, 영의정 수동(壽童), 이조판서 찬(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제갑(悌甲)과 그의 조카 시민(時敏)·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시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휘(徽), 숙종 때의 시인 득신(得臣 : 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응하(應河)와 훈련대장 응해(應海) 형제, 훈련대장 중기(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 구(九)가 있다.

출처 : 울진신문(http://www.uljinnews.co.kr)

[운영자 첨가]

김구 선생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된 시호 충렬(忠烈)인 중시조(中始祖) 상락공(上洛公)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좌의정을 역임한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시다. 



 

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_%EA%B9%80%EC%94%A8

 

안동 김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를 달리 하는 구(舊) 안동 김씨와 신(新) 안동 김씨가 있다. 구 안동 김씨[편집]

ko.wikipedia.org

 

구 안동 김씨

이 부분의 본문은 구 안동 김씨입니다.

구(舊) 안동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이다.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이 고려 고종 때 몽골이 침략하자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서 위도(葦島)로 들어갔고, 삼별초를 토벌한 공으로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으며, 1283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ko.wikipedia.org/wiki/%EA%B5%AC_%EC%95%88%EB%8F%99_%EA%B9%80%EC%94%A8

 

구 안동 김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구 안동 김씨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신 안동 김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구 안동 김씨 (舊 安東 金氏)관향경상북도 안동시시조김숙승

ko.wikipedia.org

《김씨 분관록》과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등에 의하면 시조 김일긍(金日兢)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태사대광(太師大匡)를 역임했다고 한다. 일운 시조의 아버지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라 한다.

후손 김효인(金孝印)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토벌한 공으로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으며, 1283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후손들이 김방경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다. 혹칭 상락 김씨(上洛金氏)라고도 한다.

 

ko.wikipedia.org/wiki/%EA%B9%80%EB%B0%A9%EA%B2%BD

 

김방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방경(金方慶, 1212년 ~ 1300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 말기 원종 때부터 봉공한 무신이자 문신이다.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은

ko.wikipedia.org

 

김방경(金方慶, 1212년 ~ 1300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 말기 원종 때부터 봉공한 무신이자 문신이다.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추증되고,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다. 안동(安東)을 식읍으로 받아 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lhyunn&logNo=22150710075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 본관 분파 족보 항렬 돌림자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 본관 분파 족보 항렬 돌림자 1.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blog.naver.com

 

www.surname.info/gim/an_dong1.html

 

성씨정보 | 구 안동김씨 (舊安東金氏) -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 www.Surname.iNFO

구 안동 김씨 (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시조 김숙승(叔承)은 신라 경순왕(敬順王) 의 넷째 아들 김은열(殷說)의 둘째 아들로 고려 때

www.surname.info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순(淳) ○근(根) ○병(炳) ○규(圭) ○진(鎭) ○한(漢) ○동(東)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현(顯) ○년(年) ○일(鎰) ○구(求) ○모(模) ○연(然) ○배(培)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선(銑) ○원(源) ○영(榮) ○사(思) ○준(埈) ○선(善) ○택(澤)
43세 44세 45세        
○식(植) ○환(煥) ○철(喆) - - - -

*운영자는 대동 항렬표에 따르면 28세손이다.

 

항렬표(行列表)

1) 통일(統一)된 항렬표(行列表)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원(源) 영(榮) 묵(默) 재(在) 회(會) 태(泰) 식(植) 용(容) 교(敎) 종(鍾)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우(雨) 병(秉) 희(熙) 기(基) 현(鉉) 수(洙) - - - -

*운영자는 통일된 항렬표에 따르면 25세손이다.

 

 

신 안동 김씨

이 부분의 본문은 신 안동 김씨입니다.

신(新)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고창성주(古昌城主)였는데, 930년(고려 태조 13년) 고창군(高昌郡)에서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대광(大匡)으로 임명되었다.

조선 말 세도정치의 중심으로 종묘배향공신을 무려 6명이나 배출했다. 이밖에도 정승 15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 호당 1명, 청백리 1명을 배출하였다.

조선 인조 때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이 우의정을 지냈고, 김상헌은 좌의정을 지냈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순조 비 순원왕후헌종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철종 비 철인왕후에 이르기까지 세도가문이 되었다.

본관

안동은 경상북도 중북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고창녕국(古昌寧國)이었는데, 신라에 정복되어 고타야군(古陀耶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古昌郡)으로 개칭되었다. 930년(고려 태조 13년)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이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980년(경종 5년) 영가군(永嘉郡)으로 개칭되었다. 1197년(명종 27) 안동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204년(신종 7)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308년(충렬왕 34) 복주목(福州牧)으로 개편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 온 공민왕을 섬긴 공으로 다시 안동대도호부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토성(土姓)으로 (權)·김(金)·강(姜)·조(曺)·(張)·고(高)·이(李) 7성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경상북도 안동군으로 개편되었고, 1963년 안동시로 승격되었다.

 

 

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345812486&qb=5rqQwoA=&enc=utf8&section=kin.qna&rank=120&search_sort=0&spq=0

 

안동 김씨 족보및 무슨파 인지 궁금해요

제가 안동 김씨인데요아버님이 조실부모 하시고 성북구 일대에서 살아오셨습니다.(삼선교, 돈암동, 동소문동, 정릉 등등)증조부 성함이 김 달 순조부 성함이 김(金) 영(英) 식(植)아...

kin.naver.com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에 대(對)하여

1.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중시조(中始祖) 김방경(金方慶)은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世孫)

  ㅡ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封)해짐.

2.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유래(由來)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은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손자(孫子)이며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高麗) 때에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중시조(中始祖) 김방경(金方慶)은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世孫)이며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高麗) 원종 때 명장(名將)으로 삼별초(三別抄)의 난(難)과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定難定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에 치사(致仕)되었다. 그 후(後)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封)해졌다. 그 후(後) 후손(後孫)들이 김숙승(金叔承)을 시조(始祖)로,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1 ○源(원) 22 榮(영)○ 23 ○黙(묵) 24 在(재)○ 25 ○會(회)
26 泰(태)○ 27 ○植(식) 28 容(용)○ 29 ○敎(교) 30 鍾(종)○
31 ○雨(우) 32 秉(병)○ 33 ○熙(희) 34 基(기)○ 35 ○鉉(현)
36 洙(수)○ 37 ○동(東) 38 연(然)○ 39 ○혁(赫) 40 진(鎭)○
41 ○영(泳) 42 근(根)○ 43 ○병(炳) 44 효(孝)○ 45 ○용(鏞)
46 택(澤)○ 47 ○목(穆) 48 희(熹)○ 49 ○규(圭) 50 련(鍊)○
51 ○준(浚) 52 - 53 - 54 - 55 -

​파별 항렬표 (2001. 3. 13. 문온공파 영환씨 제공)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

 중시조 김방경(상락공(上洛公))

ㅡ 좌의정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도 족보상으로는 위 항렬표와 동일함.

 

*익원공파 - 좌의정 사형(士衡)

ko.wikipedia.org/wiki/%EA%B9%80%EC%82%AC%ED%98%95

 

김사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사형(金士衡, 1341년 ~ 1407년)은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1] 본관은 구 안동(舊 安東)이며 자(字)는 평보(平甫), 호(號)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ko.wikipedia.org

 

*익원공파 - 좌의정 사형(士衡) 계보

ㅡ 구안동의 시조 김숙승(金叔承) 

ㅡ 중시조(1세)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

ㅡ 좌의정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운영자는 구안동 항렬표로는 25세손이고, 신안동 항렬표로는 28세손, 통일된 항렬표로는 25세손으로 구안동에 속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한성판윤을 역임하신 조부께서는 초명에 ○黙(묵) 字를 쓰시다가 관계에 진출하게 되어 판윤에 오르셨다. 이때 신안동 분들과 항렬을 따지기 쉽게 부득이 신안동의  진(鎭) 를 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야욕이 법적으로 본격화하고 조선 국왕이 무력했던 을사조약 직전 진도로 귀양가신 걸 보면 조부님께서는 조선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족보 표기]

*조부 O묵(默)[初名, O鎭]

* 父 : 在o [初名,o] 

o會[初名,o東

* 운영자의 후손들은 아들의 작명시, 위의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적용이 바람직하다.  이 항렬표를 다른 자료에서 확인하여 아래에 재록한다.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에 대(對)하여

 

1.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2.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유래(由來)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은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손자(孫子)이며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高麗) 때에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중시조(中始祖) 김방경(金方慶)은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世孫)이며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高麗) 원종 때 명장(名將)으로 삼별초(三別抄)의 난(難)과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定難定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에 치사(致仕)되었다. 그 후(後)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封)해졌다. 그 후(後) 후손(後孫)들이 김숙승(金叔承)을 시조(始祖)로,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재록합니다.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1 ○源(원) 22 榮(영)○ 23 ○黙(묵) 24 在(재)○ 25 ○會(회)
26 泰(태)○ 27 ○植(식) 28 容(용)○ 29 ○敎(교) 30 鍾(종)○
31 ○雨(우) 32 秉(병)○ 33 ○熙(희) 34 基(기)○ 35 ○鉉(현)
36 洙(수)○ 37 ○동(東) 38 연(然)○ 39 ○혁(赫) 40 진(鎭)○
41 ○영(泳) 42 근(根)○ 43 ○병(炳) 44 효(孝)○ 45 ○용(鏞)
46 택(澤)○ 47 ○목(穆) 48 희(熹)○ 49 ○규(圭) 50 련(鍊)○
51 ○준(浚) 52 - 53 - 54 - 55 -

파별 항렬표 (2001. 3. 13. 문온공파 영환씨 제공)  

군사공파 : 21세0相, 22세應0 23세0默, 24세在0, 25세0鏞, 26세灐0, 27세0植, 28세景0

도평의공파 : 21세0裕, 22세 壽0 23세0鍾 24세浩0, 25세0秀, 26세熙0, 27세0相

제학공파 : 21세由0, 22세0年, 23세0浩, 24세相0, 25세0應, 26세奎(泰)0, 27세0植, 28세容0

안렴사공파 : 21세0基, 22세好0, 23세思0, 24세0演, 25세0卿, 26세0振, 27세起0,

서운관정공파 : 21세0憲, 22세會0, 23세0善, 24세在0, 25세0永, 26세圭0, 27세0浩, 28세周0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에 대(對)하여

1.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선평(金宣平)

2.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유래(由來) :

원 비조(鼻祖) 김알지(金閼智)의 후손(後孫)이며 경순왕(敬順王)의 후손(後孫)인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 시조(始祖)는 김선평(金宣平) 36세 때 고창군주(古昌郡主)로 군병(郡兵)을 일으켜,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견훤(甄萱)을 병산(甁山)에서 대파(大破), 그 훈공(勳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아부(太師亞父)에 올랐다.

'태사공(太師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보면, 그는 신라(新羅)말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공(公)이 권행(權幸)·장길(張吉) 등(等)과 더불어 군(郡)을 들어 귀부(歸附), 병산(甁山)의 승첩(勝捷)을 있게 했다고 하였다.

그 공(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號)를 주고 고창(古昌)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昇格)시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삼게 되었다.

안동(安東)(신(新))김씨(金氏)의 선계(先系)는 신라김씨(新羅金氏) 곧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한다. 그러나 김알지계(金閼智系)인지 혹(惑)은 경순왕계(敬順王系)인지는 상고(詳考)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라김씨선원보(新羅金氏璿源譜)'에서도 그의 상계(上系)를 알 수 없다 하여 김선평(金宣平)을 관조(貫祖)라고 표시(表示)하였다.

또 하나 세계정오(世系正誤)에 관한 문제(問題)다. 시조(始祖)공 이후(以後)의 소목(昭穆)이 한동안 7세 김득우(金得雨)사이가 분명(分明)치 않아 전농정공(典農正公) 김득우(金得雨)를 기세조(起世祖)로 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전농정공(典農正公)의 호장(戶帳)이 발견(發見)되어 공수부정공(公須副正公)까지의 계대(系代)가 알려져 '기해구보(己亥舊譜)'이후(以後) 기세조(起世祖)를 공수부정공(公須副正公)으로 하고 있다.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순(淳) ○근(根) ○병(炳) ○규(圭) ○진(鎭) ○한(漢) ○동(東)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현(顯) ○년(年) ○일(鎰) ○구(求) ○모(模) ○연(然) ○배(培)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선(銑) ○원(源) ○영(榮) ○사(思) ○준(埈) ○선(善) ○택(澤)
43세 44세 45세
○식(植) ○환(煥) ○철(喆) - - - -

항렬표(行列表)

1) 통일(統一)된 항렬표(行列表)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원(源) 영(榮) 묵(默) 재(在) 회(會) 태(泰) 식(植) 용(容) 교(敎) 종(鍾)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우(雨) 병(秉) 희(熙) 기(基) 현(鉉) 수(洙) - - - -

제학공파 항렬표(行列表)

세(世) 21 22 23 24 25
항렬자(行列字) 유(由)○ ○년(年) ○호(浩) 상(相)○ ○응(應)
세(世) 26 27 28 - -
항렬자(行列字) 규(奎)○
태(泰)○
식(植) 용(容) - -

*이름은 대체로 항렬자를 따랐으니 본관이 안동인 김가분들은 위의 항렬표를 참고 바랍니다.

 

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302927226&qb=5rqQwoA=&enc=utf8&section=kin.qna&rank=178&search_sort=0&spq=0

 

안동김씨 돌림자

제 4대조 할아버님은 김복한 할아버님이구요3대조 할아버님께선 '동'2대조할아버님께선 '현'할아버지께서는 '중' 자 돌림이시고아빠는 '일'자 돌림이십니다저는 여자아이기도 하고해서 제...

kin.naver.com

 

 

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의 승려교사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정치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남북통일 활동가이다. 항일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김방경의 25대손으로 태어났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부친 3년상을 탈상한 뒤엔 기독교에 입문하였다.[1][2]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을 역임했고, 안악양산학교, 재령보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안악양산학교 재직 중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에 연행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 정부(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개편)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 내무부 경무국장 등을 지냈다. 임정 내 좌우이념 갈등이 극심했을 때 임정고수파(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있었다. 1924년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노동국 총판, 국무령, 내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등을 거쳤다.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거윤봉길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은 일본 제국의 표적이 되어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외무부장, 재무부장 등을 지냈다. 1938년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1940년 10월 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정 주석을 역임하였다.[3][4][5][6][7]

광복 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정 법통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합작이 태동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격에 서거하였다.

본관은 구 안동(安東), 자(字)는 연하(蓮下), 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8] 초명은 창암(昌巖)이고,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즉 9인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임정 이동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고, 부친상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사후에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백범 선생님 이라고 불렸다.

출생과 가계 (1876 ~ 1949)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9][10][11][12] 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郭樂園, 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mediahub.seoul.go.kr/archives/1287924?tr_code=snews

 

남산 '역사문화길' 산책…민족의 얼을 찾아서

서울시대표소통포털 - 내 손안에 서울

mediahub.seoul.go.kr

 

[남산 역사문화길] 백범기념관 광장에 가면 김구 선생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의미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자신을 취조했던 검찰관에게 써 준 글귀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남산 둘레길 역사문화길에 조성된 백범광장 ⓒ이봉덕

남산둘레길 역사문화길에 백범광장 공원이 넓게 조성돼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애국 지사를 위해 아름답게 단장된 널따란 공원에 들어오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남산 백범광장에 세워진 백범 김구 동상 ⓒ이봉덕

백범 김구는 한국 독립 운동가이고 교육자이자 정치가다. 그의 항일구국 운동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상이 설립되었다. 동상 앞으로 넓은 잔디밭이 조성돼 있고 남산으로 오르는 길과 서울 한양도성 길이 있다. 뜨거운 햇빛 아래였지만 꼼꼼하게 비문을 읽어 내렸다.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528

 

김좌진(金佐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encykorea.aks.ac.kr

 

 

kydong77.tistory.com/20583

 

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 - 金宣平, 權幸, 張貞弼(장정필)

www.tsm3.or.kr/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tablet 삼태사의 위패와 배향 1 페이지" data-og-description="고려시대는 삼태사(三太師)의 위패를 부(府)의 삼공신묘(三功臣廟)에 모시다가 조..

kydong77.tistory.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