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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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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의 승리 - 나무위키

Pyrrhic Victory "천하가 어지러울 때 5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재앙을 면치 못하고, 4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피폐해지고, 3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패자가 되고, 2번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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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가 어지러울 때 5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재앙을 면치 못하고, 4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피폐해지고, 3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패자가 되고, 2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왕자(王者)가 되고, 1번 싸워 승리를 결정지은 나라는 제자(帝者)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여러 번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써 천하를 손에 넣은 자는 드물고, 오히려 망한 자가 더 많았던 이유다.

키네아스는 이탈리아 원정 준비로 바쁜 피로스를 찾아왔다.
"전하, 로마는 대단히 호전적인 나라라고 합니다. 만약 그런 나라를 물리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 아닌가.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리스인이건, 다른 야만인들이건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우리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

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키네아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이탈리아를 정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키네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탈리아 옆에는 아주 부유한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곳은 지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손에 넣기에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편안히 쉬면서 날마다 즐거운 이야기나 나누지 뭐......"[1]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온 키네아스는 말했다.
"전하는 지금도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과 고통 그리고 위험 없이도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시려고 합니까?"

 

고대의 유명한 일화이자 시사용어. 

이겨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승리를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 북서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최고의 전략·전술가로 회자되었고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발발한 피로스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를 여러 번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거둔 승리에 비해 아군의 손실이 너무 많았다.

로마군과 첫 결전을 벌인 헤라클레아 전투에서는 휘하 병력 3만 5천 중 4천을, 그 다음 해에 치른 아스쿨룸 전투에서는 병력 4만 명 중 3천 명을 잃는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2]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피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로마인들과 싸워 한 번 더 승리를 거둔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승리자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겨 결국에는 패배를 안길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피로스는 전투에서는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그에 따르는 손해를 자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했던 데다 동맹이었던 이탈리아 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원 태만으로 손해를 메우지 못해, 결국 끝내 전쟁에서 패하고 에페이로스로 물러나게 된다. 물론 이기지도 못한 로마군의 피해는 산술적으로 볼 때 훨씬 더 컸지만, 로마는 자신들의 본토이고 이탈리아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로마는 멀리 원정온 데다 본국의 규모도 훨씬 작았던 피로스에 비해 물량에서 훨씬 우위여서 이 손해를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

언뜻 파비우스 전략과 비슷하거나, 같은 결과에 대한 다른 해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양측 모두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는다는 공통점을 보이기 때문. 하지만 피로스의 승리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의도했던 전략적 목적(예: 영토 쟁탈, 적의 정치적 굴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를 나타낸다.

3. 역사상의 실제 사례

  • 피로스 전쟁 (기원전 280 ~ 기원전 275) :피로스 1세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와의 전투에서 계속 이겼지만 로마와 결속한 동맹시들은 여전히 로마를 지지했고, 피로스의 병력은 계속 소모되었다. 거기에 시칠리아에도 개입하는 바람에 카르타고마저 적으로 돌려버렸다. 결국, 베네벤툼 전투 이후 더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잃어버린 피로스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피로스는 전투에서는 계속 이겼음에도 결과적으로는 로마가 남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병력만 잔뜩 소모한 채 물러난 것이 이 전쟁이 남긴 전부였다. 피로스는 동원한 3만 5천의 병력 중 2만 이상을 잃어버렸다. 이 전쟁은 나중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두고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는 피로스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다.

    • 헤라클레아 전투 (기원전 280): 이 표현의 직접적 유래. 다만, 이 전투의 승리로 지금까지 도움을 주지 않던 남 이탈리아 지역에서 피로스에게 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술적 승리와 더불어 전략적인 승리도 이룬 것이기에 이 전투 자체만 따지면 피로스의 승리 사례라 부르기는 힘들다.

  •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 ~ 기원전 202) - 한니발의 로마 원정군은 로마 진입 시까지 연전 연승을 거두고 있었으나, 소수 정예인 한니발 군의 특성상 전투마다 병력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고, 한니발을 제외한 카르타고군은 전체가 로마에게 탈탈 털리던 상황이라, 지원다운 지원 따윈 하나도 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한니발은 이런 전투 속에서 악전고투 해왔으나,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참패를 당한다. 위의 간략한 서술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 이 전쟁은 피로스의 승리와는 좀 거리가 먼 편이다. 한니발은 완벽한 전략에 입각해서 전투를 치렀고, 모든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조국에게 못 먹으면 바보인 수준의 완벽한 판을 깔아주었다. 한니발의 잘못은 그가 카르타고의 무능함을 과소평가했다는 점밖에 없다.

  • 초한전쟁 (기원전 206 ~ 기원전 202) - 한(유방)의 '파비우스의 승리' 사례이면서, 초패왕 항우의 '피로스의 승리'로도 볼 수 있다. 항우 문서 2.6.7.단락의 '패왕의 최후' 항목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항우는 최후의 전투인 해하 전투 이전까지 근 70번의 전투에서 한번도 지지 않았지만 이기면 이길수록 도리어 항우가 불리해지고 결국 마지막까지 패배를 모르는 상태로 자결했다. 이후 초는 망했고 한은 400여 년을 남아 중국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다만 항우가 패배한 건 유방과 싸우다가 손해를 보아서라기보단, 항우가 없는 전역에서 팽월이나 한신 등이 입히는 피해가 쌓이다보니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 되어버린 탓이라서 해석하기에 따라선 어긋나는 면도 있다. 항우 한명만 무적이었지 초나라 전체로 따지면 엄청나게 패배했기 때문.

  • 유철의 흉노 정벌 - 자존심이 강력한 유철의 입장에서 한나라가 맨날 흉노한테 비단을 갖다 바치는 게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곽거병이라는 걸출한 무장도 있겠다 병력을 일으켜 흉노를 정벌로 했는데. 곽거병은 무려 바이칼 호까지 진격하며 흉노를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 놓았다. 곽거병이 쓰러뜨린 흉노족 고관대작들만 하더라도 흉노왕 7명, 흉노 승상, 흉노 황태자에 심지어는 흉노 황후(선우의 정실부인)까지 있을 정도로 진짜 일방적으로 무찔렀다. 이게 왜 피로스의 승리냐 하면 당대 최고의 부국이었던 한나라는 흉노를 때려잡느라 국고를 완전히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트로피를 얻으려고 집을 팔아버린 꼴이었다.

  • 헤라클리우스와 동로마 제국 - 헤라클리우스 즉위 당시 로마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밀려 시리아와 이집트를 잃고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수년간 힘을 비축한 뒤, 과감한 군사 원정으로 적군을 연파하며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고 성십자가와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로마 제국은 얼마 뒤 새롭게 일어난 이슬람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도로 상실하고 만다.[5][6]

  • 북송과 남송 - 북송은 금나라와, 남송은 몽골과 연합하여 숙적이었던 요나라와 금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이 때문에 완충지대가 없어져 북송과 남송도 결국 각각 금나라와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망하게 된다. 특히 해당 전쟁에서 송나라가 요나라를 상대로 졸전하였기 때문에 금나라는 북송을 만만하게 보게 된다.

  • 임진왜란(1592) - 명나라 한정.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막대한 재정소모로 후에 후금에게 멸망하게 되는 간접적인 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 다만 히데요시가 처들어온 명목이 명나라 정벌도 있긴 했고, 명나라 입장에서는 동쪽 국경을 일본보다 훨씬 우호적인 조선으로 남겨두는 것이 확실히 이득인 건 사실이며 한편 명나라의 멸망은 4대 암군들의 지속적인 삽질이 근본적인 원인이었고 여기에 자연재해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였으니 반드시 피로스의 승리라고 단정짓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물론 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조선이었으나 조선입장에선 전쟁에 지면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될 판국이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겨야 했으므로 피로스의 승리는 아니다.

  • 뤼첸 전투(1632) -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과 신성 로마 제국[7] 사이의 전투. 스웨덴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작센 지방에서 가톨릭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스웨덴 측의 전사자는 구교측보다 많았고 정예 고참병들이 다수 희생되었으며, 무엇보다 뛰어난 장군이자 국왕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8] 이후 스웨덴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페인에게 대패하면서 전쟁에서의 우위를 상실한다. 물론 요한 바네르, 레나르트 토르스텐손의 활약으로 다시 전쟁의 우위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 말플라케 전투 (1709) -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프랑스 말플라케에서 일어난 전투로 영국오스트리아덴마크네덜란드 등을 위시한 연합군과 프랑스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동맹군은 8만 6천 명의 병력에 포 100문, 프랑스 측은 7만 5천 명의 병력과 포 80문을 동원했다. 전투 자체는 연합군의 승리였지만 연합군의 손실이 더 커서 (사상자 2만 1천 명. 동원 병력의 약 25%가 전투불가 상태가 되어버렸다) 피로스의 승리에 해당한다.

  • 7년 전쟁영국과 프로이센 등이 이기긴 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가 역사에 길이 남을 뻘짓을 해서 프로이센이 마지막 일격을 가할 수 있던 것에 가까웠고, 그나마 프로이센은 국력이 완전히 고갈되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고립되었다.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큰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역시 막대한 재정부담이 발생해서 북아메리카 지역에 증세를 시도하다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켜 버렸다. 그 외의 국가들도 제대로 된 승자가 없는 패자뿐인 싸움이었다.

  • 미국 독립 전쟁(1775~1783) - 프랑스 한정. 패자인 영국도 일단 전쟁 자체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지키느냐 상실하느냐가 달린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GDP는 대영제국 전체 GDP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으며, 식민지 거주인들의 1인당 GDP는 영국 본토인의 그것을 상회할 지경이었다. 훗날 세계 초강대국이 되는 미국의 경제력은 이미 식민지 시절부터 수치상으로 나타났다. 미국 입장에서도 전쟁에 이기면 독립을 하는 것이고, 지면 그대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므로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즉 영국은 알짜배기 땅덩어리를 사수하느냐 마느냐, 미국은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되느냐 마느냐가 걸린 사생결단 매치업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경우 여기에 끼어들어야 할 명분이 일단 없지는 않았다. 독립 전쟁의 결과로 경쟁상대인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독립한 미국을 친프랑스 성향으로 돌렸는데 그 효과는 작지 않았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개입 자체는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규모의 전쟁 비용과 미국 지원금으로 인한 재정 소모 그 자체였다. 이미 7년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크게 소모한 프랑스는 이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인한 재정 소모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고, 그렇지 않아도 기울어가는 프랑스의 경제는 파탄 상태에 빠졌다. 결국 재정 소모에다 대대로 사치벽[9]을 부린 프랑스 왕실의 최후는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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