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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 & 녕릉(寧陵)/ 신미대사, 산스크리트어> 한글창제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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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장릉

男左女右 (남좌여우)의 의미: 음양설(陰陽說)에서, 왼쪽은 양이고 오른쪽은 음이라 함. 한자 읽기는 좌에서 우 방향.

 

https://www.youtube.com/watch?v=f1wp7JT7UIY

 

*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英陵)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구 영릉 석물 - 세종대왕 신도비(舊 英陵 石物 - 世宗大王 神道碑)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200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42-1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이수(螭首)를 포함한 비신(碑身)만 5.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비(大理石碑)로서 2년여의 공역(工役) 끝에 문종(文宗) 2년(1452년) 2월 21일 구 영릉(舊英陵) 내에 건립되었다. 앞면의 비명(碑銘)은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의 비음기(碑陰記)는 김요(金銚)가 지었고, 전액(篆額)과 비명(碑銘)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썼다. 제작에는 150여 명의 석공(石工)이 동원되었다.

 

녕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녕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세종릉은 태종릉인 헌릉 곁에서 여주로 이전

https://www.youtube.com/watch?v=aU32rJCxTN0

 

 

 

 

https://www.youtube.com/watch?v=da4avcU_k94 

 

 

 

 

https://www.youtube.com/watch?v=3E0ZbQAVF84 

 

https://royaltombs.cha.go.kr/html/HtmlPage.do?pg=/new/html/portal_05_01_02.jsp&mn=RT_05_01_02

 

조선왕릉의 입지 및 구성

왕릉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조성된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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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입지

왕릉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조성된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국장도감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약 5개월)동안 전체 상례에 대한 재정과 문서 등을 관리하고, 재궁(梓宮, 관), 크고 작은 가마(대여(大輿) 등), 각종 의장(儀仗)을 제작하며, 발인(發靷)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염습(殮襲), 성빈(成殯), 성복(成服)에 관한 업무를 하며, 장례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의 신주와 혼백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특히 빈전도감은 왕릉을 조성한 후 혼전도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삼년상 후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부묘).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으로 건물 및 석물제작, 왕릉 자리 주변 정리 등 능 조성에 필요한 인원 관리 및 감독하는 기관이다. 보통 하나의 능을 완성하는 데에는 약 5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능역(陵役)에 동원되는 인원은 6천명에서 많게는 1만 5천명 정도가 필요하다.

능지(陵地)는 보통 상지관(相地官)이 택지하게 되는데, 능지로서 적합한 자리 후보를 선정하고, 새로 즉위한 왕에게 천거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한다. 때로는 왕이 친히 답사하기도 하며, 생전에 미리 능지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풍수 사상에 기초

조선왕릉의 입지는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다. 조선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터를 선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크기나 구성에 있어 자연친화적이며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릉은 크게는 도읍지인 한양(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과 남쪽의 지형인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택지되었다. 그리고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은 조선의 풍수사상에서 길지라고 일컫는 사신사(四神砂)가 갖추어진 곳과 잘 부합하게 된다. 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 주산(主山)을 뒤로 하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루며 좌우로는 청룡(靑龍, 동)과 백호(白虎, 서)의 산세를 이루고 왕릉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앞에는 안산(案山)이 멀리는 조산(朝山)이 보이는 겹겹이 중첩되고 위요(圍繞)된 곳이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들어있는 현궁(玄宮)이 묻혀있는 봉분은 혈처(穴處)에 위치한다. 혈처는 땅의 기운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봉분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岡)이 땅의 기운을 저장하고 능의 뒤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잉(孕)은 그 기운을 주입시켜주는 역할을 맡아 혈처를 이룬다.

그래서 조선왕릉은 전체적으로 야지(野地)도 아니며 산지(山地)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자리에 입지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야지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의 왕릉이나 산지를 선호했던 고려의 왕릉과는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도성과 가까운 입지조건 - 효(孝)의 실천

왕릉의 입지선정에는 풍수지리 이외에도 지역적 근접성을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왕궁이 있던 도성(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의 최적지였다. 이와 같이 접근성이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는 것은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자 하는 효심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융건릉 건설시 조선시대 왕릉은 임금의 행차를 고려하여 80리, 지금의 40㎞ 안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임금의 원행도 80리를 넘을 수가 없었다. 현륭원은 도성과 88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정조는 이러한 현륭원을 자주 왕래하였다. 1795년(정조 20)에는 어머니인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행행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현륭원에 갈 때에는 과천 주정소에 머물렀는데, 이때 인덕원(仁德院) 주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충을 묻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1790년(정조 14) 용주사를 창건하여 현륭원의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 창건에 앞서 정조가 직접 부지를 답사하였고, 건축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도성에서 80리보다 8리가 더 많다고 하자 정조는 신하들에게 수원까지는 80리라고 일렀다. 어명에 따라 그후로 도성에서 수원까지는 80리가 되었다는 구전도 전한다.

[운영자 注] 용주사 창건도 정조의 효심의 발로.

본래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정조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할 때 무덤을 돌보는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같이 창건하였다. 용주사에서는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해 근처에 있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창건은 정조 임금이 하였다. 조선 전기의 세조랑 비슷한 이미지.

*세조: 누구보다 불심이 깊었던 세조는 원당사찰의 운영에도 가장 열성적이었다. 그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변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 하에 국가적 사업으로 원각사를 건립했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조선왕릉은 공간의 성격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공간이므로, 동선의 처리에 있어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진입공간 - 능역의 시작 공간

진입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 또는 영)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석조물이 있는데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그 밖에 진입공간 부근에는 음양사상과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은 연지(蓮池)를 조성하였다.

제향공간 -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의 공간

제향공간은 산 자(왕)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부터 본격적으로 제향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판위(版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이다.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향·어로 중간 즈음 양 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능침공간 - 죽은 자의 공간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능침공간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 상계(上階)

초계(初階)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단이다.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경우에 따라 병풍석을 생략하는 경우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봉분 주위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능을 등지고 있는데, 보통은 네 쌍씩 배치하였으며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 외곽으로는 풍수지리의 바람막이와 담장 역할을 하는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이 앉아서 노니는 공간인 혼유석(魂遊石, 석상(石牀))이 놓여져 있고, 그 좌우에는 기둥 모양의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제2단: 중계(中階)

능침공간의 가운데 단이다. 중계의 가운데 8각 또는 4각의 장명등(長明燈)이 놓여져 있는데,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좌우에는 왕과 왕비를 모시는 문석인(文石人)이 있으며 그 옆이나 뒤에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제3단: 하계(下階)

능침공간의 가장 아랫단으로, 왕과 왕비를 호위하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왕조의 특성상 문석인을 무석인보다 한 단 높게 배치하였으나, 영조의 원릉에서부터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무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사상

조선왕릉에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인물상과 동물상을 비롯하여 봉분의 둘레와 전면에 능주의 영혼을 위한 의식용 석물들을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음양사상과 풍수지리를 기본으로 하여 신인(神人)과 신수(神獸), 신비한 힘을 지닌 신령한 도구와 상서로운 물건 등으로 꾸며 능실을 보호하고 왕의 영원한 안식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간절한 기원은 왕릉 주위를 장식하거나 주변에 배치된 석조 의례물의 모든 요소에 체계적으로 배어있다. 이것이 조선 왕릉 제도에서 석물의 역할로, 한국인의 내세관과 수호적 성격이 상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석물은 거의 능침공간에 배치되어 있으며 왕릉으로서 장엄함을 강조하고 주변 경관과 조형적으로도 조화를 이루어 선조(先祖)의 사후 세계를 위한 격조 높은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42능에 1300여 점의 조각이 동일한 유형으로 끊임없이 조성되었고 대부분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고유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예술미의 완전한 보존

조선왕릉의 석물조각은 한국미술사에서는 불교 조각 이외의 조각풍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와 조각사를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정해진 규범 속에서 조선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과 조상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표현하였고, 현재까지 거의 훼손(도굴)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의 왕릉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과 유택에 대한 존엄성을 지켰던 덕택일 뿐 아니라, 왕릉 조성과 의식 그리고 부장품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둠으로써 도굴로 인한 훼손을 미리 방지하는 지혜가 있었다.

이러한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조선왕릉 석물에 대하여 내용적인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특성
배치
  • 잔디 언덕 위에 조각을 배치하여 자연경관과의 조화
  • 모든 조각을 봉분 주변에 집중시켜 화려한 공간 구성
  • 모든 배치와 조각을 대칭 구도로 하여 엄숙함 강조
  • 석수를 바깥으로 향하게 배치하여 봉분수호의 의미 강조
고유장식
  • 병풍석과 난간석 조각으로 잔디 봉분을 장식
  • 12지신상 부조를 수관인신(獸冠人身)의 형태로 병풍석에 장식
  • 혼유석이 있으며, 이를 고석으로 받쳐 공간에 띄워 놓은 형식
  • 망주석의 형태가 독특하며 세호를 장식
예술성
  • 오랜 세월에 걸쳐서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하여 하나의 형식 창조
  • 화강석의 색상과 질감으로 은은하며 신비한 분위기 창출
  • 머리를 크게 과장한 인체조각으로 능묘의 수호신상 성격 부여
  • 석호의 인상을 한국 민화의 그림과 같이 해학적으로 표현
상징성
  • 모든 부분의 석물이 고유의 상징성을 담고 있음
  • 석물의 배치를 상징에 맞게 체계적으로 배치
재료와 규모
  • 대리석, 석회암, 사암, 화산암에 비해서 영구적인 화강석 사용
  • 백성의 피해를 덜기 위해서 사람 크기로 조성하여 애민사상을 보임
역사 / 기록
  • 의궤 등을 통한 제작 과정에 대한 기록과 도상이 존재
  • 규범서, 역사서, 문집을 통한 다양한 기록 존재
보존
  • 600년 동안 두 번의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 양호

 

https://www.youtube.com/watch?v=lKjNPrY9vR0 

 

 

https://www.youtube.com/watch?v=74KNK6l1wfM 

 

 

https://www.youtube.com/watch?v=F4i2dbX_E3M 

 

 

 

https://www.youtube.com/watch?v=Kc4gFLl2MHw 

 

 

https://www.youtube.com/watch?v=LtV86CaF6as 

 

 

 

https://www.youtube.com/watch?v=9HhRZwHmpU4 

 

 

https://www.youtube.com/watch?v=TmQmhKveFww 

 

 

https://www.youtube.com/watch?v=DVXJNDBMs6o 

 

 

https://www.youtube.com/watch?v=Zyz_3ZRvMik 

 

                                                                                       세종신도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861

비의 이수(螭首)는 비신과 같은 돌인 것으로 전해오며, 귀부(龜趺)는 현지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현재 자연석으로 이를 대용하고 있다. 비는 조선 초기의 석비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수의 중앙 아래쪽에 ‘世宗英陵之碑(세종영릉지비)’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비문은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우나, 비문의 내용『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 『전주이씨선원보첩(全州李氏璿源譜牒)』에 실려 있다. 앞면의 비문은 당대의 명신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은 김조(金銚)가 지었으며, 전액과 글씨는 안평대군이용(李瑢)이 썼다.

총 4,886자에 달하는 큰 비석으로, 비문의 내용은 세종대왕의 어진 업적을 찬양하고 왕후·빈(嬪) 및 그 소생들에 관한 약력 등을 적은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시대 27대 왕들의 왕릉

https://www.youtube.com/watch?v=uR0aNANES1w

 

 
 

‘조선왕릉’이 한국의 9번째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7일 새벽(한국시각)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33차 회의를 열어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최종 확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경주 석굴암ㆍ불국사,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서울 종묘·창덕궁, 수원 화성

(이상 1997년 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지정)에 이어

조선왕릉을 8번째 세계 문화유산으로 추가했다.

2007년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까지 합쳐 한국의 세계유산 총수는 9건으로 늘었다. 또 2004년 문화유산에 등재된 북한·중국의 고구려 고분군을 포함하면 남북한의 세계유산은 모두 10건이 된다.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해 서울, 경기, 강원도 지역에 흩어진 조선시대 왕릉 42기 가운데 북한 개성 부근에 있는 제릉(1대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를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바 있다.

뒤이어 지난 4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왕릉 40기를 사전 실사하고 제출한 평가결과 보고서에서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려 세계유산 등재가 유력시돼 왔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포함해 30건을 등재신청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LJO4oxRX_g

 

 

 

於戱師之道其詣於極者與 佛祖合

其寓於跡者若張子房之受書於神

釋寳誌之預言未兆

一行之精貫術數者耦歟

師所傳陰陽說數篇世多

有後之言地理者皆宗焉

銘曰

오호라! 스님의 도덕은 극치에 이르러 佛祖와 더불어 합일하였으며,

자취를 나타낸 것은 마치 장자방이 神으로부터 兵書를 받은 것과 같고,

釋寶誌公 스님이 징조가 나타나기 이전에 예언한 것은

一行禪師가 음양 術數에 정통한 것과 같은 것이다.

스님께서 전하신陰陽說 數篇이 세상에 많이 유포되었는데,

후세의 지리가들이 모두 이것을 依宗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過去諸佛

有微妙法

非文字詮

非思修攝

지난 세상 나타나신 모든 부처님!

無上甚深 微妙法을 연설했으니

그 법문은 文字로써 다툴 수 없고

聞思修인 三慧로도 얻지 못할새        ①

超然直指

一念千刼

惟我國師

優入其域

直指人心그 자리는 초연한 境地

一念卽是 千劫이라 長短이 없네!

위대하신 고려조의 우리 國師여!

禪悅世界 우유하게 自在하시네.        ②

善學無學

眞空不空

眞正法眼

四闢六通

達磨宗旨 禪思想을 善學하시어

眞空이나 空아니고 有도 아닐새

투철하신 眞正法眼 터득하시고

四通으로 자재하신 六神通이여!        ③

推其緖餘

寓數術中

不憑蓍筮

懸解無窮

無碍自在 확철하온 그 여력으로

陰陽數術 兼硏하여 교화하시다.

시서(蓍筮)로써 점복함을 依支치 않고

사건전에 미리 알아 적중하도다.        ④

舊邦俶擾

新命猶閟

先終知終

未至知至

후삼국을 평정하지 못하였으며

天의 명령 아직까지 닫혀 있으나

오래전에 지나간 일 모두 알았고

미래일을 미리 알아 예언하였다.        ⑤

譔書預獻

國祚攸始

作周興漢

如掌斯指 

책을 지어 王隆에게 전해 주면서

고려국이 개국됨을 예언하였다.

周文王이 周나라를 건국하듯이

후삼국을 통일함이 손 펴듯 하다.        ⑥

聖人聿起

膺籙受圖

乃眷所屬

發之自吾人

지리산속 구령에서 異人을 만나

地理書인 金壇玉笈 전해 받았다.

그로부터 각종 음양 연구하여서

上通天文 下達地理 自在하였네!         ⑦

雖隔世事

若合符殊

功偉績與

山河俱歷

장자방과 도선국사 때는 다르나

두 사람이 예언함은 다르지 않네!

위대하신 그 공적은 비길 데 없고

산하처럼 높고 깊어 다할 수 없다.        ⑧

歲三百

風流如在

瞻仰高躅

掀天磊

열반한 후 오늘까지 삼백년이나

바람 불고 물 흐름은 다르지 않네

높은 德을 瞻仰하는 四部衆이여!

그 도덕이 높고 높아 하늘 같도다.        ⑨

勒碑舊祠

揭示千載

咨爾山君

守護無怠

偉業行狀 돌에 새겨 舊祠에 세워

천년 만년 지나도록 보여주려고

산신령인 山君에게 부탁하노니

길이 길이 수호하여 게을리 마오.   

天德二年歲次庚午七月乙亥九日癸未立

    頴悟三重大師臣處實奉宣刻字

[출처] 🍎🍎도선국사 비기(道詵秘記)|작성자 Paxs

도선의 주요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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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답산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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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답산가 언어 추가 문서 토론 읽기 편집 역사 보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는 도선 이 지었다고 전하는 감여서(堪輿書)이다. 음양지덕(陰陽地德)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을 설명하고, 도선의 답산가, 산론수파법(山論水破法) 외에 감여론을 수록한 것으로 고려 문종 (文宗)· 숙종 (肅宗)대에 많이 읽혔다고 한다. 전해지는 내용 [ 편집 ] 도선 대사는 그의 어머니가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태어났다고 한다.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는 칠언이구(七言二句)씩 모두 삼십팔련(三十八聯)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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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 대사는 그의 어머니가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태어났다고 한다.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는 칠언이구(七言二句)씩 모두 삼십팔련(三十八聯)으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頭圓朱雀如鼓起

(두원주작여고기)

玄武垂頭兩水間

(현무수두량수간)

주작사(朱雀砂·혈처의 앞산)는 북소리 은은히 일어나듯 그 산등성이 원만하고

현무사(玄武砂·혈처의 뒷산으로 주산을 말함)는 두 물길이 모이는 사이에 우뚝 솟았네.

明堂可得容萬馬

(명당가득용만마 )

吉谷正欲平且尖

(길곡정욕평차첨)

그 안에 명당은 가히 만마(萬馬)를 싸안을 만하고

좋은 산곡(山谷)은 평탄함과 첨예함이 조화를 이루어 바르고 온순하구나.

靑龍蛇蛇頭高起

(청룡사사두고기 )

白虎徐行不欲殘.

(백호서행불욕잔)

청룡사(靑龍砂)는 뱀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듯하고

백호사(白虎砂)는 조급하지 않아 사나운 줄 모르겠구나

ㅡ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중 일부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ogaewon&logNo=220135587123

주작이 북소리와 같이 일어나면

명당으로 일만 마리의 말을 부리고

현무가 양수간에 머리를 드리우면

계곡이 좋고 편안하며 안온 하다.

청룡이 북방으로 어리를 높이 들면

건·곤·감·리 등의 팔수가 충만하고

진사축미 간에 룡을 부리지 않고

백호를 향해 천천히 움직여 해함이 없으나

계축 간의 산 아래에는 자손이 없고

인신사해 간이 또한 막히지 않아

인간에 봉우리가 웅크리고 있으면 호환이 없고

명당 뒤에 돌이 있으면 관직이 따른다.

진사 간에 돌이 쌓여있으면 호환이 두렵고

산 능성이 게 눈 같으면 물난리가 있다.

명당 앞에 돌이 있으면 형벌을 받고

기대는 것이 흉한 돌이면 병난이 없다

자축 간에 오 척 정도의 돌이 있고

분묘 가에 돌이 있으면 마음공부를 이룬다.

미간에 괴이한 돌이 있으면 장녀가 음하고

둘째아들이 고향을 등지는 신세이며

자손은 팔 지옥을 면하기 어렵고

서쪽(兌)에 흉한 돌이 있으면 소녀가 음하다.

두 돌이 활과 같이 굽은 산꼭대기를 이루면 시정이 되어

도시 우두머리와 함께 하나 흐린 날과 진흙땅으로

장자는 불에 잃고 오간에 돌이 떨어진다.

다른 돌이 떠다니면 객사를 하고

대대로 요절하게 된다.

오간에 돌 셋이 있으면 반드시 귀인이 나고

주산이 원만한 봉우리면 장수가 셋 나와

분묘에서 젖이 나와 기운이 이웃 나라를 접한다.

주산이 층층한 봉우리로 구슬을 꿴듯하면

그 가운데 높고 두터운 것이 명당이다.

주산이 층층 봉우리이면 대대로 등과 하고

만대 조에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쌍봉이 머리를 들어

앞뒤로 참새가 날아 눈이 피로하면

자손 가운데 뾰쪽한 것에 찔리는 형을 받고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며 옳고 마당하게 행해

자손이 문장에 특출한 이가 나온다.

주산이 파쇠 되어 새로운 것을 대하거나

주산의 모습이 파하여 풀이 나지 않은데

거듭해 묶은 무덤을 쓰면 종 사리를 하고

그 땅에 샘이 있으면 음수로

비가 와도 진흙이 없어 말라버린다.

전통이 무너져 부녀자가 해를 입고

슬픔은 많고 기쁨이 적으니 고래로 이어졌다.

주산이 멀고 그 봉우리가 높은데

진사 간에 칼 봉우리가 있으면 형벌을 입고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면 다분히 부귀해

금상 옥포 같은 미인이 나온다.

무해 간에 높은 봉우리는 부귀영화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면 노인이 없다.

총명하고 지혜롭고 재주가 있으면 신무 간이 높고

인 묘간의 산이 높으면 귀한 아들이 나온다.

청룡이 중중으로 누각과 같은 지세는

우마가 장성하나 우 간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축미 간이 길게 얽히어 있으면 이치에 밝은 사람이 있고

자손 중에 왕후 됨을 얻는다.

봉우리가 셋으로 우뚝 솟아

두 손을 마주 잡아 읍한 듯 고리를 이루면

산허리에 젖샘이 있으면 직위가 높아지고

좋은 문필가와 문장가를 얻어

부귀와 온전한 이름을 드날린다.

활과 같이 굽은 지세는 부귀하고

용과 호랑이가 구슬을 잡은 듯하면 모두가 부자이며

청룡이 약하고 물이 봉우리로 향하고

백호가 거듭되면 금과 옥을 아우르고

청룡이 뾰쪽해 달리는 듯 하면 고향을 여이고

부귀가 급히 이르러 총애를 받는다.

형세가 수레를 덮은 것 같으면 참으로 아름답고

백호의 봉우리가 원만하면 창고가 생기고

용의 모양이 누각과 반석 같으면 부귀하다

백호의 모양이 굴곡이 심하면 몰록 망하고

봉우리가 셋이면 문장가로 출세한다.

백호가 꽉 꼬여 있으면 여자가 목을 매고

자손이 장차 시정 거렁뱅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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