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정조 16) 1월 24일, 정조가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해 한강 배다리를 건널 때 수행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배다리의 제작 과정과 구조를 간단히 서술하고, 정조가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으로 참배하러 가는 효성을 예찬하였다. 정조는 1월 25일 현륭원에 참배하고, 1월 26일 환궁하였다.
용주사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板)은 목판 42판, 동철판 7판, 석판 24판의 세 종류가 있다. 모두 73판으로 1796~1799년 사이에 조성되었다. 목판은 변상도, 과판(科判), 한문본, 국문본 등이 양면으로 양각되어 있으며, 동철판은 변상도 7판이 단면에 양각되어 있다. 특히 목판의 도각(刀刻)형태까지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석판은 과판과 한문본 등으로 단면에 음각되어 있다.
이 경판들은 정조의 명으로 조성되어 주자소에 내입(內入)되었다가 화성 용주사에 보내진 기록이『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수록되어 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매우 정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변상도에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화풍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으며 본문은 당대의 명필이던 오수(寤修) 황운조(黃運祚, 1730~1800) 서풍(書風)의 명품 경판(經版)이다.
오늘날 용주사 간행의『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것은 정조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혼심을 쏟아 조성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종류의 경판들은 당대 최고 장인들의 예술성까지 곁들여져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더욱이 보존상태가 온전하다는 점, 18세기 말의 국어사 자료가 된다는 점, 이전의 판화와는 달리 경판의 변상도는 공간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충분하다.
1950년대 버디 할리(Buddy Holly)의 음악을 들으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돈 맥클린(Don McLean)은 비범한 작곡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 34곳의 레이블에서 앨범 제의를 거절당한 후에야 데뷔작을 발표하는 무명의 설움을 겪은 아티스트였다. 1945년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스물 여섯이 되던 해인 1971년 빅히트 앨범 <American Pie>를 발표한다.
동명 타이틀곡인 'American pie'는 1972년 신년벽두를 강타, 빌보드 차트 정상을 4주간이나 점령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 3분 언저리의 곡들이 라디오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 8분27초 짜리 대곡이 전파를 정복한 것부터가 이변이었다. 이 곡은 1999년 여걸 마돈나(Madonna)가 테크노 감성으로 손질하여 다시 익숙해졌다(가사를 많이 생략하긴 했지만).
그 친숙한 멜로디의 'American pie'는 실은 초기 로큰롤의 거장 버디 할리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비틀스를 포함한 1960년대 대부분의 뮤지션들에게 그 모범이자 모델로 자리했던 버디 할리는 록음악과 록 밴드의 기초적인 형태를 완성시키며 록 역사상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936년 텍사스에서 태어난 그는 13살의 나이에 기타, 바이올린, 피아노, 벤조, 만돌린을 연주했고, 독학으로 부기우기(Boogie woogie) 음악을 터득했던 신동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곡으로 직접 노래한 백인 최초의 인기 뮤지션이었고, 최초로 펜더 기타를 사용했으며, 크리케츠(The Crickets)라는 밴드를 이끌며 4인 체제 록 밴드의 형식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컨트리, 블루스, 로커빌리, 흑인 영가를 조합하여 록의 정체를 확립하는데 기여했고 록음악에 있어서 흑백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가치를 부여받지만 그의 활동기간은 단 3년에 불과했다. 1959년 영화 <라밤바>로 잘 알려진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 빅 바퍼(The Big Bopper) 등과 함께 투어에 들어간 그는 1959년 2월3일 위스컨신(Wisconsin) 주의 그린 베이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지로 이동하던 중 탑승한 경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고 만다. 이 때 나이 22세였다. 버디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아쉬움은 10년이 더 흐른 1970년까지 돈 맥클린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70년대의 시작과 함께 그는 1959년 2월로 돌아가 지난 10년의 음악을 8분여의 서사곡으로 담아내게 됐고 그리하여 'American pie'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가 회상하는 1960년대는 그리 달갑지 않은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관우(關羽,간체: 关羽,: Guān Yǔ 관위, ? ~219년)는 중국 훈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운장( 雲長, 간체 云长,Yúnzhǎng 윈장)이다. 의제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히며, 한대 이후로 남송의 악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 장비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1]
의리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이나 민간전승과 전설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신격화되어 관제묘(關帝廟)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명나라 시기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國忠義大帝)[2] 로써 황제에 추존되었고, 청나라 시기 신(神)의 시호인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추존되었다. 최종적으론 황제의 시호인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로 추존되었으며[3][4] , 한국에서는 대하네국 고종이 황제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하였다,[5]
생애
생애 초반
사례 하동군 해현(解縣) 사람이다. 관우가 고향을 떠나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관우가 현상수배당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보호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책임지여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장비와 같이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평원의 상(相)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백마 전투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6].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게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6].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6]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적벽 대전 이후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이 때 감녕은 단지 300여명의 병력만 가지고 있었는데 노숙이 추가로 증원해준 천여명의 병력을 더하여 강을 사이로 관우와 대치하였다. 이에 관우는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였고,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 한다.[7]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髯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삼국지에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며 마량과 바둑을 두는 중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말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이 사건으로 우금이 조조에게 비난을 듣는다. ("그대는 누구시오? 40년 동안 날 따른 사람은 아니겠지? 난 방덕은 아오만 그대는 모른다네, 어찌 목숨이 아까워 주인을 버린단 말이냐?")그 사이 손권은 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내고[8] 여몽이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이때 관우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는데 우금을 생포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금과 그 부하들이 먹는 식량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우금의 부하들이 먹어치우는 군량 때문에 관우의 군량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관우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9]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 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 사마 조루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총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목후(壯繆侯)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충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10]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또는동묘(東廟)는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 종로구에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제142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왕릉과 함께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된 동묘(오른쪽)와 남묘(왼쪽 아래) (《대동여지도》 제1첩 8면)
임진왜란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장수들은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하고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
이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동대문 밖에 1599년 공사를 시작하여1601년(선조 34년)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였다.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정(丁)' 자 모양과 '일(一)'자 모양이 합쳐진 '공(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남관왕묘는 조정에서 관리하며 왕실에서도 제사를 지냈으나 1908년(융희 2년) 향사이정령 등으로 제사를 폐지하고 동관왕묘는 지방 관청으로 이괄했다.
남대문 밖에는 동묘보더 먼저 생긴 남관왕묘가 있었으며, 고종 때에는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를 지었다. 남관왕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는 조선총독부가 철거했다.
인근에 수도권전철 1호선 6호선 동묘앞역이 있다. 2011년 10월 동묘의 금동 관우상 뒤편 이월오악도뒤에서 운룡도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운룡도는 조사를 받고 원래대로 일월오악도로 가려졌다.[1]
관성묘(關聖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정유의 왜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남관왕묘
1598년(선조 31) 처음으로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선조실록』 31년 4월 기묘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접반관(接伴官) 이흘(李忔)의 서계(書啓)에 남관왕묘의 건립에 따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진유격은 그가 거처하는 뒤뜰에 있는 낡은 집을 이용하여 관왕묘를 건립하고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시설이 완비되지는 못하였는데, 그 때 이흘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양노야(楊老爺:명나라의 장수 楊鎬)를 찾아서 관왕묘의 건립에 관한 것을 물어보니 찬성하면서 더 넓은 곳에 크게 건립할 뜻을 비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흘에게 조선의 도움을 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반드시 우리 군사를 쓰겠지만 목수·미장이 등은 조선의 공인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일만은 아니고 조선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니 국왕에게도 알려야 할 것이다.”
이렇듯 관왕묘의 건립은 명나라의 장수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왕실에서도 그 건축비용을 보조하였으며, 따로이 관왕묘의 건립을 맡아보는 도감관(都監官)을 정하여 돕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61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의 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신병(神兵)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 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왕묘가 건립되자 양호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의 생일이 5월 13일이므로 이날 제례를 올리자고 하였으며, 선조의 참례를 강요하였다. 결국은 선조가 직접 묘에 나가 분향하고 잇달아 삼작(三爵)을 올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의 대신들은 관왕묘의 제례를 비판하게 되었다. 중국의 일개 장수인 관우에게 조선의 국왕이 배례함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논쟁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동관왕묘
남관왕묘가 건립된 이듬해인 1599년에 또 하나의 관왕묘인 동관왕묘를 세울 계획이 수립되었다. 건립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헌부의 장계에 의하면 “동관왕묘의 건립은 중국의 건의에 의한 부득이한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동관왕묘의 건립도 사실상 명나라의 종용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관왕묘 건립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뒤따랐다. 『선조실록』 32년 4월 무인조에 관왕묘의 위치 선정에 관한 기사가 있다. 선조는 정원(政院)에 보낸 비밀전교에서 새로운 관왕묘의 위치에 대해서 “전일에는 흥인문 밖에 건립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남대문에 설치한다고 하니 무슨 까닭이냐, 전일의 계획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남대문에는 이미 관왕묘가 있으니 동대문에 설치하도록 명나라의 섭정국(葉政國)에게 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서울의 동쪽이 지리적으로 허(虛)하다는 도참사상에 의한 것이었다. 선조는 끝내 동대문 밖이 안 된다면, 차라리 훈련원에 건립하여 무사들이 관왕의 정신을 이어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 끝에 관왕묘는 동대문 밖에 건립하도록 하였다.
동관왕묘의 건립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서 백성과 군사를 부역시켜야 하는 문제였다. 동관왕묘는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마침내 1602년 봄에 준공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의 관왕묘
서울에 있는 남·동관왕묘 외에 지방에서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을 전후하여 지방에서는 강진·안동·성주·남원 등 네 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지방의 관왕묘 건립시기에 관해서는 『연려실기술』 별집 권4와 『해동성적지(海東聖蹟志)』의 묘사조(廟祠條), 『증보문헌비고』,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다만, 건립연도는 문헌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건립자에 대해서는 일정하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라도의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명나라의 장수 진린(陳璘)이 건립하였으며, 1684년에 개수하면서 이순신(李舜臣)과 진인을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안동의 관왕묘는 명나라의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하였다. 묘 안에는 석상(石像)을 봉안하였으며, 처음에는 안동 성내에 있었으나 1606년 서악(西岳)의 동대(東臺)로 이안(移安)하였다.
성주의 관왕묘 또한 명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하였다.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성주성 동문 밖에 있다가 1727년(영조 3)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겼다.
남원의 관왕묘는 서문 밖에 있었다. 명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건립하였다. 1698년에 신상(神像)을 개건하였는데 모두 중국의 관왕묘를 모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장수인 총부중군(摠府中軍) 이신방(李新芳)·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 등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고종 때에 와서 다시 서울에 북묘·서묘, 지방에는 전주·하동 등에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종 당시의 위태로운 정세에서 관왕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신을 일깨운 것으로 보인다.
1901년 조서에서 “관왕묘를 숭상한 것이 지금까지 3백여 년이다. 관왕의 충의는 천추에 길이 빛난다.”고 하고, 관왕의 호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고 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과 용산구 후암동에 동묘와 남묘가 남아 있다.
관왕묘의 참례와 음악
선조 이래로 관왕묘에 특히 관심을 보인 왕은 숙종이다. 숙종은 무안왕(武安王)의 충의는 진실로 가탄할 만하며 관왕묘를 지나면 감회가 일어난다고 하여, 관왕묘에 역림(歷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우의정과 좌의정에게 관왕묘 참례에 관한 절목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그때 배례와 수읍(手揖)의 의견이 나왔는데, 숙종은 수읍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 같은 관왕묘 참례에 관한 문제는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709년(숙종 35)에 왕은 사관에게 명하여 선조조에 관왕묘에서 행하던 행례의절(行禮儀節)을 실록에서 찾아내라고 하였다.
사관이 “선조 때에는 관왕묘에서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자, 숙종은 자신도 이에 따르겠노라고 하였다 한다. 『숙종실록』 36년 3월 정묘조에 의하면, 숙종은 당시의 좌의정 서종태(徐宗泰)와 판부사(判府事) 이순명(李順命)에게 “선조는 배례하였는데 나도 배례를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서종태는 선조 당시에는 명나라의 장수들의 압력에 못이겨서 한 것인 만큼 이제는 읍례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 또한 관우는 일개 장수였으므로 국왕이 배례를 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관우의 호가 무안왕이며 축문에도 ‘감소고우무안왕(敢昭告于武安王)’이라고 하였으니 배례가 좋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 관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1701년에 숙종은 모든 지방의 관왕묘의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으며, 매년 경칩과 상강일에 향축하도록 하였다. 제수는 변두(籩豆)이고 헌관(獻官)은 고을의 영장(營將) 또는 당상무수령(堂上武守令) 등이 하도록 하였다.
정조도 관왕묘에 관심을 기울여, 1786년에 친히 「관묘악장(關廟樂章)」을 지어 처음으로 관왕묘의 행례(行禮)에 쓰게 하였다. 1832년에는 순조가 남관왕묘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남관왕묘
1598년(선조 31) 처음으로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선조실록』 31년 4월 기묘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접반관(接伴官) 이흘(李忔)의 서계(書啓)에 남관왕묘의 건립에 따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진유격은 그가 거처하는 뒤뜰에 있는 낡은 집을 이용하여 관왕묘를 건립하고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시설이 완비되지는 못하였는데, 그 때 이흘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양노야(楊老爺:명나라의 장수 楊鎬)를 찾아서 관왕묘의 건립에 관한 것을 물어보니 찬성하면서 더 넓은 곳에 크게 건립할 뜻을 비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흘에게 조선의 도움을 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반드시 우리 군사를 쓰겠지만 목수·미장이 등은 조선의 공인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일만은 아니고 조선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니 국왕에게도 알려야 할 것이다.”
이렇듯 관왕묘의 건립은 명나라의 장수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왕실에서도 그 건축비용을 보조하였으며, 따로이 관왕묘의 건립을 맡아보는 도감관(都監官)을 정하여 돕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61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의 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신병(神兵)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 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왕묘가 건립되자 양호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의 생일이 5월 13일이므로 이날 제례를 올리자고 하였으며, 선조의 참례를 강요하였다. 결국은 선조가 직접 묘에 나가 분향하고 잇달아 삼작(三爵)을 올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의 대신들은 관왕묘의 제례를 비판하게 되었다. 중국의 일개 장수인 관우에게 조선의 국왕이 배례함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논쟁은 뒤에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