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책이 수록된 만해 선생의 일화가 낯선 것이어서 옮겨 봅니다.

장석주편,나는 문학이다.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책보러가기

장석주 외 17인, 나무이야기

한국문학 100년을 빛낸 작가들! 이광수에서 배수아까지 111명의 작품을 만나본다. 작가 111명의 생애와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다룬 인문교양서,

 

1. 한국문학의 맹아기(1900-1929)
이광수, 김동인, 김소월, 염상섭, 한용운

룡운당대선사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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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불굴의 저항정신] 3·1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고,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독립 운동가이자, 한국 현대 시사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는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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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저항정신

3·1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고,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독립 운동가이자, 한국 현대 시사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는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그의 작품 「님의 침묵」은 한 일간지에서 실시한 “20세기에 발표된 한국의 예술 작품 중에서 고전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단연 첫 번째로 “21세기에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문화사적 의미가 큰 작품”에 뽑힌다. 「님의 침묵」은 “시문학 사상 가장 넓고 높으며 깊은 인간성을 표현한 절실한 시”라는 호평 속에 한국인 정서의 정화(精華)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21세기에 남을 한국의 고전」, <한국일보>(1999. 1. 4.)

일제 치하의 조선 불교는 조선 총독부의 사찰령에 떼밀려서 어용화의 길을 걷는다. 어느 해 태고사 대법당에서 주지 대회의가 열리게 되는데, 한용운은 그 자리에 나와 강연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몇 번의 거절 끝에 전국에서 모인 중진 승려 앞에 선 한용운은 좌중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이번에도 좌중은 얼어붙은 듯 침묵을 지켰다.
“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용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좌중을 압도했다. 조선 불교를 대표한다는 자긍심을 지니고 점잖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승려들은 한용운의 어조에서 뭔가 불길함을 감지했다. 그러나 감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용운의 물음이 떨어졌다.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들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법당 안에는 딱딱하고 불길한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그러자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의 한용운이 법상을 박살 낼 듯 주먹으로 두들기며 뇌성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일갈을 한 한용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법당을 나가버렸다. 일제의 어용정책을 수용하는 대가로 감투와 재산을 챙긴 주지들이 한용운의 뇌성벽력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뒷날 변절한 최남선과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한용운의 단호하고 직선적인 성격은 그대로 표출된다.
“만해, 오랜만이올시다.” 최남선이 한용운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당신 누구시오?” 한용운은 쌀쌀맞게 되물었다.
“나, 육당 아니오.”
“육당이 누구시던가?”
“육당 최남선이오. 그새 잊으셨을 리는 없고.”
“내가 아는 육당은 벌써 죽어서 장송해버렸소.”
한용운은 최남선의 보는 앞에서 이렇게 쏘아붙이고 등을 돌려버렸다.

어릴 적 서당에 다닌 것이 학력 전부인 한용운은 철학과 문학을 스스로 공부하고 동인 활동도 전혀 거치지 않는다. 한용운은 자신의 글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학벌이나 유학 이력을 장식처럼 걸친 채 입으로만 민족애를 외치며 학연이나 유파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기존의 문단에 경종을 울린다.

법명인 만해(萬海)로 더 많이 불리던 한용운은 1879년 음력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다. 한용운은 어린 나이에 한학을 접하게 되는데, 기억력이 매우 좋고 남달리 암송을 잘하여 인근에서는 그의 집을 ‘신동 집’이라고 부른다.

마을 서당에서 10여 년 동안 한학을 익히던 한용운의 불교 입문은 무단가출로부터 비롯된다. 이미 열네 살 때 성혼한 몸이었으나 범속한 시정의 살림에 충실한 가장이 되기에는 그가 품은 뜻이 너무 크고 웅혼했다. 동학란과 갑오경장을 겪으며 부모·형제를 모두 잃은 그는 열여덟 살 나던 해에 무작정 집에서 나와 설악산의 오세암으로 들어간다. 절의 땔감을 장만하며 불목하니 노릇을 하던 그는 이윽고 불교의 기초 지식을 익히며 선(禪) 수행에 정진한다. 그러나 세속과 격리된 두멧구석의 절집은 그의 뻗쳐오르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모험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얼마 뒤 오세암에서 나온 그는 개화 문물과 개화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가득 품고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로 돌아다닌다.

방랑생활을 하며 독서로 불교와 동·서양의 철학을 깨친 한용운은 스물일곱 살 때 다시 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불문에 든다. 백담사에서 그는 거의 독학으로 대장경을 익히며 한문으로 된 불경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한다. 1909년부터 집필, 1910년에 탈고하고 1913년 들어 회동서간을 통하여 펴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한국 불교의 교학·제도·의식 전반에 걸친 개혁 방안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은 교계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일본 불교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공포하여 불교 통제를 강화하고 있던 터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받는다.

1910년 경술국치 때 한용운은 만주로 가서 의병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 사업에 나선다. 1911년에 귀국한 그는 1913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고, 1914년에는 범어사의 대장경을 열람하고서 『불교대전』을 발간하며, 1917년에는 「정선강의 채근담」을 주해한다. 그는 사찰을 돌며 강의와 담론을 주도하고, 1918년 불교 잡지 《유심(唯心)》을 만들어 여기에 시 「심(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대중불교에 힘쓴다.

1919년 3·1운동 때, 한용운은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그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는 등의 단호한 결의를 밝힌 공약 3장을 덧붙인다.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은 한용운은 갖은 고문을 당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書)」2)를 집필하여 비밀리에 상하이로 보낸다.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진보의 길을 가로막는 일제의 군력·철포 정치는 결국 무력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담은 이 글은 「독립선언서」 못지않은 명문으로 평가된다.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서도 그의 저항 정신은 전혀 굽힘이 없어 반일 모임이나 강연에는 빠짐없이 참가한다. 사상이나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출옥하고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열렸을 때 세 명의 종교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빙된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한용운이 강연하자 청중이 극도로 열광하는 바람에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는 같은 해 9월 《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고,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대한불교청년회’의 총재로 취임하여 활동하던 그는 1926년 들어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다.

1927년 한용운은 좌·우파의 합작 노선에 따라 결성된 ‘신간회’ 발족에도 앞장서 중앙집행위원과 서부 대표를 맡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조병옥과 함께 지원에 나서고, 1930년에는 불교계 청년들을 모아 비밀 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한다. 1931년 6월부터 1933년 9월까지 2년 남짓 동안은 친일파로 전락한 권상로에게 인수한 《불교》를 발간하는 일에 전념한다.

한용운은 일생에 걸쳐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황병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는다.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한 거의 모든 문인이 변절하고 말지만, 그만은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이다. 신사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아예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는 등 그는 일제의 어떤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평생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만해 한용운은 광복을 1년 남짓 앞둔 1944년 6월,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숨을 거둔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일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전문, 『님의 침묵』(1926)

1918년 《유심》에 발표한 「심」과 1922년 《개벽》에 발표한 「무궁화 심으라」를 빼놓고 지상에 시를 발표한 적이 없던 한용운이 1926년 기념비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한다. 여기에는 서두의 「군말」을 비롯하여 「하나가 되셔오」, 「칠석(七夕)」, 「의심하지 마셔오」, 「나의 길」, 「이별」, 「잠 없는 꿈」, 「참말인가요」, 「당신의 편지」, 「당신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표제인 「님의 침묵」 등 총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처음 이 시집이 나왔을 때 님이 누구인지를 두고 의견이 구구했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님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종교적 해탈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고난에 찬 우리 민족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일관한 『님의 침묵』에 실린 88편의 시는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한용운, 「군말」, 『님의 침묵』(1926)

1925년 내설악 백담사에서 씌어 1926년 회동서관에서 처음 펴내고,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다시 펴낸 『님의 침묵』은 한국 현대 시사에 드높이 솟아 있는 한 봉우리다. 『님의 침묵』에는 “향가, 고려 가요, 시조, 가사는 물론, 한시, 불경에 흐르는 정신사적 형질과 시적 방법”이 계승되고 있다.3) 시집 앞에 창작 동기를 밝힌 「군말」과 뒤에 일종의 후기로 보이는 탈고 소감이 「독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서 이채롭다.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며 그 빼어난 시적 성취를 자랑하는 『님의 침묵』은 민족 전체가 마치 ‘길을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처럼 떠돌던 일제강점기, 님이 침묵하던 시절의 시들을 담고 있다. 이 시절의 님은 한용운이 뛰어나게 갈파했듯이 자신의 부재로써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랫동안 한용운의 ‘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됐다.

평론가 김우창에 의하면 한용운의 ‘님’은 “그의 삶이 그리는 존재의 변증법에서 절대적인 요구로서 또 부적응의 원리로서 나타나는 한 한계 원리를 의미”하며, 그것은 “정적(靜的)으로 있는 민족이 아니라 억압된 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민족을, 사회적으로 억압된 민중에 대하여 자유로워진 민중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법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진리”를 말한다.4)

한용운의 시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김소월의 시와 맥락을 같이하지만, 시적 대상과 이를 형상화하는 과정은 전혀 다르다. 사랑과 이별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님’은 시집 서두의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모두 다 님”이라고 지은이 스스로 밝혔듯이, 특정한 개체를 뜻하기보다 복합적인 존재론적 대상의 응축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별은 비록 님은 떠났어도 보내지 않은 이별이며, 언제나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이별이다. 낙관성이 깃든 이별법이다. 이것을 구태여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바 끊임없는 자기 부정에 의한 달관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민족 차원에서는 언젠가 이루어질 조국의 해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개인 차원에서는 완전을 추구해나가는 시인 자신의 이상향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쉽게는 남녀 사이의 에로스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읽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또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중첩된 이미지의 끈을 찾아가는 것이 곧 만해 시 읽기의 묘미다. 이 점은 사색적 물음을 거듭 던지는 구조로 되어 있는 또 하나의 걸작 「알 수 없어요」에서 다시 확인된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전문, 『님의 침묵』(1926)

더러 질질 끄는 어투나 선명하지 못한 관념적 이미지의 나열이 있기는 하지만, 섬세한 시어와 적절한 리듬의 사용으로 전체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동양적 사고에 근거하면서도 결코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 또한 만해 시의 특징이다.

만해 한용운은 그 스스로 시대와의 불화를 피하지 않은 ‘님’이었다. 불교 개혁을 부르짖은 승려요,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요, 빼어난 서정시들을 남긴 위대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시집 『님의 침묵』 외에도 《신인 문학》과 《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實際)」, 《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薄命)」, <조선중앙일보>에 미완성 연재소설 「후회」와 중편소설 「죽음」 등 갖가지 글을 남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용운 [韓龍雲] - 사상과 실천이 하나로 일치하는 민족시인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장석주)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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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9142

 

한룡운의 글쓰기/ 룡운당 대선사비, 원각사지 탑골공원

https://www.youtube.com/watch?v=Iyr3VEy0_os https://kydong77.tistory.com/19048 금강반야바라밀경/ 영인스님, 우리말 독송 https://www.youtube.com/watch?v=ic-IhdTd0tQ https://namu.wiki/w/%EA%B8%88%E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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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만해용운당대선사(卍海龍雲堂大禪師碑)/ 탑골공원 * 한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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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용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

2) 만해용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 韓國末年에 山中佛敎를 都市로 끌어내려 大衆化하고 아울러 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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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조 3수로 마감한 비문의 작성자는 운허 룡하스님임. / "碑銘에 代한다."는 자작시조 3수가 더없이 멋지다. 대선사의 讚을 뭐라고 쓰겠는가?

 

 

* 아래에서 만해 대선사의 자작시 <繡의 秘密>을 알아 봅니다. 마지막 구절의 반어와 역설이 헷갈립니다. 곧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체질화 된 거지요.

 

繡의 秘密

ㅡ  한룡운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도 짓고, 포도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 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프고 쓰런 때에는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은 것입니다.

 



형식에 얽매임이 없는 이 비문을 찬하신 분은 운허 룡하 스님이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9727

 

용하(龍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세부터 1907년까지 고향의 회보재(會輔齋)에서 사서(四書)를 배우고, 1909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평양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2학년까지 수학하였다. 1912년 1월에 만주로 건너가서 봉천(奉天)에

encykorea.aks.ac.kr

 

 

 

https://www.youtube.com/watch?v=Am_2VeKmd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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