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나라인 경주는 운영자가 1980년대 초부터 주거하던 땅이었으니 지명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게다가 어제 찍은 삼릉계곡의 석가여래좌상 마애불을 만나다니 고마운 마음 그지없다. 좌상의 높이가 7m라니 서 계신 키는 몇 미터일까? 입상이 아닌 좌상을 조상한 것도 부처님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신라인들의 불심과 예술혼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이 계곡이 특히 운영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앞 꼭지에서도 소개한 매월당 김시습님께서 34세 때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5편을 저술한 곳인 용장사지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윤열수 교수의 안내로 오출세 교수와 함께 처음으로 남산을 찾은 것도 내 속내는 용장사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서툰 동영상 한 꼭지와 함께 올릴, 멋진 칠불암 등 경주의 마애불 동영상도 유튜브에서 골라 보았다.
번역에 '금오산'은 운영자가 덧붙임.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 그래서 기존 번역의 제목인 '나의 초상에 쓰다'를 바꾸어 '자화상 찬'이라 했다.
작품집 이름에 '금오'를 얹은 것은 금오산에서 유래함.
김시습은 34세 때 경주 남산 삼릉계곡 용장사 거소에서 <금오신화> 5편을 창작함.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에 요절한 당대 천재시인.
문맥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이 글의 하단에 그의 시 <將進酒>를 소개한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김시습의 '自寫眞贊'부터 그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젊은 날의 자기 모습에다 노년의 오만상을 찌푸린 모습까지 그렸으나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젊은 날의 모습은 노추에도 변함없다. 허나 주름 때문인가 많이 온화한 모습이다
자화상이야 서구에도 많지만 찬을 쓴다는 게 희귀한 발상이다.
贊(찬)이란 찬양, 찬미의 의미다. 자기 자랑 해 봤자 듣는이는 귓전으로 듣는다. 그래서인지 내용인즉 찬이 아니라 자기 비하다. 5세 때 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비단 필을 허리에 묶어 끌고 나오던 神童의 그런 호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47세 때 환속하여 재혼했으나 1년도 못견뎌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참으로 별난 천재고, 그의 삶은 별난 인생살이였다. 우리는 이를 험한 산길에 비유하여 흔히 기구하다(崎嶇--) 고 말한다. '69다방'까지 경영했던 <날개>의 작가 이상도 그렇거니와 왜 천재들은 박복하고 불행한가? 그것이 알고 싶다.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의 병향(幷享)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사람의 제향을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 되었다.
死六臣
성삼문(成三問:1418~56)·하위지(河緯地:1387~1456)·이개(李塏:1417~56)·유성원(柳誠源:?~1456)·박팽년(朴彭年:1417~56)·유응부(兪應孚:?~1456) 등을 일컫는다.
단종 복위 꾀하며 불의에 저항하다 수레에 팔다리를 묵여 문자 그대로 사지를 찢겨 죽임을 당한 분들이 사육신이시다. 모든 이들이 겁에 질려 있을 때 김시습은 분연히 나서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 주셨다.
유가에서는 유자니 불자니 말이 많지만 생유신을 강조하다 보니 나온 말이고 그는 단연코 불자였다. 그가 34세 때 몰두했던 인귀교환설화와 <십현담요해>가 그 증거다. 유자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는 비난의 대상 1순위에 해당한다.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충격을받고 과거시험의 '立身揚名'을 포기하고 삼각산 사찰에서 하산하여 경주 용장사에서 승려가 되어 <금오신화>를 집필하셨다. 작품집명인 '금오'는 경주남산의 주봉을 지칭한다. 중국 구우의 <전등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인귀교환 설화를 선택한 것은 운영자의 추측으로는 자기의 시에 화답할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본다. 동시대에 최치원 같은 문재라도 만났으면 모를까. 그래서 스스로 본인이 준 시에 이상적인 혼령의 여인을 만나 화답하는 형식으로 자작할 수밖에. 이후 47세 대 속인으로 돌아와 잠시 혼인한 적도 있었지만 곧 가출하여 무량사에서 입멸하기까지 그의 일생은 방랑의 연속이었다.
십현담의 ⑥ 還鄕曲(환향곡) 에이끌렸다가 ⑦ 破還鄕曲(파환향곡)이 인생의 바른 길이라고 판단한 걸까?
알 수 없어요.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 때엔 '십현담요해'를 집필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생명의 뿌리를 회의하고 고심한 영원한 자유인이고 불자였다.
중국 당나라의 선승(禪僧) 동안상찰(同安常察)이 조동종(曹洞宗)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게송(偈頌).
중국 선종(禪宗)의 한 종파인 조동종의 승려 동안상찰이 지은 게송으로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29권에 실려 있다.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의 10수로 지은 것인데, 각 수의 제목은 심인(心印)·조의(祖意)·현기(玄機)·진이(塵異)·연교(演敎)·달본(達本)·환원(還源)·회기(廻機)·전위(轉位)·일색(一色)이다.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하는 말을 타고 가면서 시구를 1줄씩 종이에 끄적거려 수놓은 자루에 넣었다가, 밤에 이것들을 모아 불멸의 명시를 지은 귀재로 전해지고 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시를 짓기 시작했던 그는 과거시험에 쉽게 합격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