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두 천재는이백 44세, 두보 33세 때 장안에서 조우하고, 이듬해 이백이 장안을 떠났을 때도 만나 시를 수작했다지만 과문의 탓인지 아직 이백이 두보에게 준 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도가적 삶과 유가적 삶에 익숙한 성격 차이도 있겠지만, 나이차로 보나 유가의 현실에 얽매인 두보의 모습이 귀여운 '알라'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부귀공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빈부귀천의 인생살이, 시름도 많겠지만 멀쩡한 사람들이 자신의 재기를 주체하지 못하여 세상을 등지고 술이나 퍼마시자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싶다. 취생몽사가 인생의 목표인가?
하지만 백발과 주검에 이르러서는 위로할 말이 없다. 생명을 한번 타고나면 늙어 죽는 것은 왕후장상도 벗어날 수 없는 일이나 그것이 목숨의 이치인 걸 어찌하랴! 그래서 1,300년에 걸쳐 완성한 신화에 따라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종교도 생겨나고, 모든 인간은 천성이 부처이니 정진수도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취생몽사보다야 종교쪽이 훨씬 바람직한 대안으로 보인다. 이참에 술을 찬미하는 노래까지 전해오는 술꾼들의 재주 자랑이나 한번 비교해 보자.
시선 이백의 '장진주'에서
五花馬,千金裘,
(오화마)(천금구) : 오화마 천금구를 :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 아이 불러 맛있는 술로 바꿔오게나
與爾同消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 자네와 술 마시며 만고 시름 삭여보세
에 이르면 취기는 절정에 달한다.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에 이르면 우리가 마시는 한 잔 술은 오히려 미덕에 속한다.
현실참여에서 벗어나는 것도 동양에서는 지절(志節)의 표상으로 추앙받았다.
죽림칠현들은 문장에도 뛰어난 재주를 과시했지만 음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빼어난 '장진주(將進酒)" 몇 수를 비교해서 감상해 본다.
하단에 의외에도 삶의 어려움을 노래한 이백의 <촉도난(蜀道難)> 작품을 소개한다.
시선(詩仙)이 삶의 어려움을 노래한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뜻밖이라는 놀라움을 불러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실상은, 58세 무렵, 安綠山의 난이 발발하여아들 安慶緖에게 피살당한 정변이 발생했는데(후에 안경서는 史思明에게 피살당함).
永王 李璘의 토벌군에 참모로 참여했으나 이린이 그의 형 李亨에게 반역죄로 몰리는 바람에
이백은 투옥되고 사형 선고 받았으나.
지기들의 주선으로 감형되어 야랑(현 귀주서 동자현)으로 유배 당했다.
그는 무협(巫峽)까지 갔다가 대사면으로 방면되었다,(58세)
심경호 교수가 그에게 '영원한 자유인'의 모자를 씌운 건 그가 도가(道家)에 기울어 천성적으로 구속을 싫어하고 떠돌이 생활에 익숙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친은 서역에 장사하는 상인이었고, 서역의 관문인 사천성에서 출생한 그는 젊은 시절 아미산에서 도교의 도술을 닦던 전력으로 인하여 싸움에도 능했다. 실상 그는 험난한 촉도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잠시 현종의 궁전에서 양귀비에게 먹을 갈게 했다는 전설도 전하나 갈등과 비방에 시달리던 그는 자유를 찾아 방랑의 길을 결심하고 궁전을 나왔다.
중국에 죽림칠현의 고사가 있다. 위(魏)나라에서 진(晋)나라로 왕조가 바뀌자(266년경) 그 혼란을 피하여 죽림으로 들어가 세속과 교제를 끊고 술잔을 나누며 청담(淸談)에 열중했다고 하는 완적(阮籍)·산도(山濤)·혜강(嵇康)·향수(向秀)·유령(劉伶)·원함(院咸)·왕융(王戎) 등 7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를 죽림칠현 또는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 불렀다.
죽림은 탁한 속계와는 멀리 떨어진 장소로서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 담론, 이른바 청담(淸談)을 논의하는 데는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이후 죽림은 속진(俗塵)을 싫어하는 고결한 선비가 애호하는 것으로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 죽림칠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죽고칠현(竹高七賢, 海東七賢)이 있었다. 죽고칠현이란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黃甫沆)·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를 말하며, 이들은 죽림칠현의 풍류운사(風流韻事)를 사모하여 화조월석(花鳥月夕)에 시주(詩酒)를 벗삼아 진외(塵外)에 초연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죽림고회(竹林高會)라 하였다고 한다.
죽림고회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의 〈열전〉,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또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등에 보인다. 이규보의 〈칠현설(七賢說)〉에 보면 이들은 서로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호탕하게 즐겨서 세인의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는데, 무신정권하에서의 불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세재가 죽은 뒤 이담지가 이규보에게 가입을 권하자 이규보는 이를 거절하면서 "칠현 가운데 핵심이 될 인물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여 좌중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죽림칠현(竹林七賢)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주)넥서스)
정철 - 장진주사[將進酒辭]
조선 중기에 정철(鄭澈)이 지은 사설시조로 초·중·종장 모두 평시조의 틀에서 일탈하였으되, 중장에서 특히 길어지는 사설시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노래는 내용의 측면에서 본다면 권주가(勸酒歌)로 분류된다. 인생이란 허무한 것이니 후회하지 말고 죽기 전에 술을 무진장 먹어 그 허무함을 잊어 버리자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적인 우수(憂愁)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서정성과 낭만성이 교차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장진주사 [將進酒辭]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2006. 11. 5., (주)신원문화사)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하는 말을 타고 가면서 시구를 1줄씩 종이에 끄적거려 수놓은 자루에 넣었다가, 밤에 이것들을 모아 불멸의 명시를 지은 귀재로 전해지고 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시를 짓기 시작했던 그는 과거시험에 쉽게 합격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실의에 빠져 병을 얻게 되었으며, 몇 년 뒤에 죽었다. 이하의 시는 생생한 표현, 이상한 어투, 두드러진 병렬, 짙은 염세주의 등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