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자(莊子)

莊子者,蒙人也,〔一〕名周。

장자는 몽(蒙)4) 출신으로 이름은 주(周)다.

 

周嘗為蒙漆園吏,〔二〕

장주는 일찍이 송나라의 몽읍(蒙邑) 칠원성(漆園城)의 관리를 지냈다.

 

與梁惠王、齊宣王同時。

양혜왕(梁惠王)과 제선왕(齊宣王)과 같은 시대에 활약한 사람이다.

 

其學無所不闚,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

그의 학문은 언급하지 않은 분야가 없지만

그 요체는 노자의 설에 귀착된다.

 

故其著書十餘萬言,大抵率寓言也。〔三〕

그래서 10여 만 자로 된 그의 저서는

거의 대부분이 우화로 채워져 있다.

 

作漁父、盜跖、胠篋,〔四〕

以詆訿孔子之徒,〔五〕以明老子之術。

그의 저서 중

<어부(漁夫)>, <도척(盜拓)>, <거협(胠篋)> 등의 편은

공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배척하고

노자의 도를 밝혔다.

 

畏累虛、亢桑子之屬,皆空語無事實。〔六〕

<외루허(畏累虛)>, <항상자(亢桑子)> 등과 같은 편은

모두 꾸며낸 이야기로써 사실들이 아니다.

 

然善屬書離辭,〔七〕指事類情,用剽剝儒、墨,〔八〕

雖當世宿學不能自解免也。

其言洸洋自恣以適己,〔九〕故自王公大人不能器之。

그러나 문장을 잘 짓고 문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뿐만 아니라

사물을 생동감 있고 묘사하는 방법으로 당대의 유가와 묵자를 밝히 공격했으나

당대의 이름 높은 학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여 그의 비난을 밝히 벗어날 수 없었다.

장자가 밝히려 한 말들은 바닷물과 같이 양양하고

스스로 자유분방하고 자기 멋대로였으므로

비록 왕공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를 부릴 수 없었다.

 

  〔一〕集解地理志蒙縣屬梁國。索隱地理志蒙縣屬梁國。劉向別錄云宋之蒙人也。正義郭緣生述征記云蒙縣,莊周之本邑也。

  〔二〕正義括地志云:「漆園故城在曹州冤句縣北十七里。」此云莊周為漆園吏,即此。按:其城古屬蒙縣。

  〔三〕索隱大抵猶言大略也。其書十餘萬言,率皆立主客,使之相對語,故云「偶言」。又音寓,寓,寄也。故別錄云「作人姓名,使相與語,是寄辭於其人,故莊子有寓言篇」。正義率音律。寓音遇。率猶類也。寓,寄也。

  〔四〕索隱胠篋猶言開篋也。胠音袪,亦音去。篋音去劫反。正義胠音丘魚反。篋音苦頰反。胠,開也。篋,箱類也。此莊子三篇名,皆誣毀自古聖君、賢臣、孔子之徒,營求名譽,咸以喪身,非抱素任真之道也。

  〔五〕索隱詆,訐也。詆音邸。訿音紫。謂詆訐毀訾孔子也。

  〔六〕索隱按:莊子「畏累虛」,篇名也,即老聃弟子畏累。鄒氏畏音於鬼反,累音壘。劉氏畏音烏罪反,累路罪反。郭象云「今東萊也」。亢音庚。亢桑子,王劭本作「庚桑」。司馬彪云「庚桑,楚人姓名也」。正義莊子云:「庚桑楚者,老子弟子,北居畏累之山。」 成云:「山在魯,亦云在深州。」此篇寄庚桑楚

以明至人之德,%生之經,若槁木無情,死灰無心,禍福不至,惡有人災。言

莊子雜篇庚桑楚已下,皆空設言語,無有實事也。

注[七]正義屬音燭。離辭猶分析其辭句也。

注[八]正義剽,疋妙反。剽猶攻擊也。

注[九]索隱洸洋音汪羊二音,又音晃養。亦有本作「瀁」字。正義洋音翔。己

音紀。

 

楚威王聞莊周賢,[一]使使厚幣迎之,許以為相。

초위왕(楚威王)이 장주가 현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에게 많은 예물을 주어 그를 맞이해 오도록 하여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莊周笑謂楚使者曰:

장주가 듣고 웃으면서 초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千金,重利;卿相,尊位也。

子獨不見郊祭之犧牛乎?

“예물로 보낸 천금은 많은 재물이고,

경상(卿相)의 자리는 매우 존귀한 자리요.

그런데 그대는 교제(交祭)를 지낼 때

희생(犧牲)으로 바치는 소를 보지 못했소?

 

養食之數歲,衣以文繡,以入大廟。

當是之時,雖欲為孤豚,豈可得乎?[二]

맛 잇는 음식으로 몇 년 동안 먹이고

아름답게 수놓은 비단 옷을 몸에 두르고 태묘에 끌려갑니다.

그때는 비록 그가 어린 돼지가 되고 싶다한들 어찌 가능하겠소?

 

子亟去,[三]無污我。[四]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세속의 일로 더럽히지 마시오.

 

我寧游戲污瀆[五]之中自快,無為有國者所羈,

終身不仕,以快吾志焉。」[六]

나는 정녕코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구속받지 않겠고.

종신토록 벼슬을 하지 않으며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살 것이오.”

 

注[一]正義威王當周顯王三十年。

注[二]索隱孤者,小也,特也。願為小豚不可得也。正義不也。豚,小豬。

臨宰時,願為孤小豚不可得也。

注[三]索隱音棘。亟猶急也。

注[四]索隱污音烏故反。

注[五]索隱音烏讀二音。污瀆,潢污之小渠瀆也。

注[六]正義莊子云:「莊子釣於濮水之上,楚王使大夫往,曰:『願以境內累莊

子。』持竿不顧,曰:『吾聞楚有神龜,死二千歲矣,巾笥藏之廟堂之上。此龜

寧死為留骨而貴乎?寧生曳尾泥中乎?』大夫曰:『寧曳尾塗中。』莊子曰:『往

矣,吾將曳尾於塗中。』」與此傳不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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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와 <회사부(懷沙賦)>도 나온다.

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屈原者,名平,楚之同姓也。〔一〕

為楚懷王左徒。〔二〕

博聞彊志,明於治亂,

嫺〔三〕於辭令。

入則與王圖議國事,以出號令;

出則接遇賓客,應對諸侯。

王甚任之。

굴원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나라 왕족 출신이다.

초회왕(B.C.328년- B.C.296년 재위) 때 좌도(佐徒)였다.

위인이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밝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왕과 함께 국사를 논한 후에

호령을 내렸으며

밖으로 나와서는 제후들이 보내는 빈객들을 접대하고

제후들을 상대했다.

이에 왕이 그를 매우 신임했다.

  〔一〕正義屈、景、昭皆楚之族。王逸云:「楚王始都是,生子瑕,受屈為卿,因以為氏。」

  〔二〕正義蓋今(在)左右拾遺之類。   〔三〕集解史記音隱曰:「音閑」。

上官大夫與之同列,爭寵而心害其能。

굴원이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과 같은 반열에 오르자

근상은 초왕의 총애를 차지하고자

마음속으로 굴원의 능력을 시기하여 해치려했다.

懷王使屈原造為憲令,

屈平屬草稿〔一〕未定。

上官大夫見而欲奪之,〔二〕

屈平不與,因讒之曰:

회왕이 굴원에게 명하여 나라의 율령을 제정하라고 했다.

굴원이 율령의 초안을 미처 완성하기 전에 상관대부가 알고

그 일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원이 그 일을 넘겨주지 않자 상관대부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참소했다.

  〔一〕索隱屬音燭。草稿謂創制憲令之本也。漢書作「草具」,崔浩謂發始造端也。

  〔二〕正義王逸云上官靳尚。

「王使屈平為令,眾莫不知,

每一令出,平伐其功,(曰)以為「非我莫能為」也。」

“ 대왕께서 굴원을 시켜 율령을 제정하라고 명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령이 나올 때마다 그는 자기의 공이라고 자랑하며

‘ 내가 아니면 율령을 제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王怒而疏屈平。

屈平疾王聽之不聰也,讒諂之蔽明也,

邪曲之害公也,方正之不容也,

故憂愁幽思而作離騷。

이에 초왕은 노하여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왕이 한쪽의 말만 듣고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것과,

아첨과 모함하는 말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과,

사악하고 비뚤어진 무리가 공명정대한 사람을 해치려는 것과,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우수와 근심에 잠겨 <이소(離疎)>를 지었다.

〔一〕離騷者,猶離憂也。

이소는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음을 말한다.

夫天者,人之始也;

父母者,人之本也。

대저 하늘은 사람의 시초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人窮則反本,故勞苦倦極,未嘗不呼天也;

疾痛慘怛,〔二〕未嘗不呼父母也。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근본을 돌이켜보는 까닭에

힘들고 피곤할 때에 하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참담해지면

부모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屈平正道直行,〔三〕竭忠盡智以事其君,

讒人閒之,可謂窮矣。

굴원은 올바른 도리를 곧게 실천하여

충성을 다 바치고 지혜를 다 발휘하여

그 임금을 섬기었는데,

도리어 군주와 그의 사이가 이간질 당하여,

궁지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信而見疑,忠而被謗,能無怨乎?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았고,

충성을 바쳤으나 비방을 당하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屈平之作離騷,蓋自怨生也。

굴원이 지은 <이소(離騷)>는

본디 이런 원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國風好色而不淫,小雅怨誹而不亂。〔四〕

若離騷者,可謂兼之矣。

<국풍(國風)>은 미인을 읊으면서도 음탕하지 않았고,

<소아(小雅)>는 원망과 비난을 담고 있으나 반란의 내용이 아니었다.

이 이소와 같은 것은 그 두 가지를 다 겸한 것이라고 하겠다.

上稱帝嚳,下道齊桓,

中述湯武,以刺世事。

위로는 제곡(帝嚳)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환공(齊桓公)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에 대해 기술하여

그것으로써 세상일을 풍자한 것이다.

明道德之廣崇,治亂之條貫,

靡不畢見。

도덕의 넓고 높음과

나라의 흥망성쇠의 인과관계를 밝혀

모두 자세히 드러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其文約,其辭微,

其志絜,其行廉,

其稱文小而其指極大,

舉類邇而見義遠。

其志絜,故其稱物芳。

그 문장은 간략하나 자세하고,

그의 정신은 정결하며 그의 행동은 청아하다.

그 문장은 비록 작은 것을 세세하게 묘사했으나

그것이 뜻하는 바는 지극히 크고 깊으며

예로 든 것은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오(深奧)하다.

그의 정신은 고결했음으로

그는 즐겨 그 자신을 향초(香草)로 비유했다.

其行廉,故死而不容自疏。

濯淖〔五〕汙泥〔六〕之中,

그는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죽어서도 소인배들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몸은 진흙 구덩이 속에서 있으나

능히 더러운 것을 씻을 수 있고,

蟬蛻於濁穢,〔七〕

以浮游塵埃之外,不獲世之滋垢,

皭然〔八〕泥而不滓者也。〔九〕

마치 매미가 더러운 오물 속에서 허물을 벗어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듯이

세속의 먼지구덩이 밖으로 헤엄쳐 나와

더러운 세상의 떼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청백하고 고결하여 진흙 속에 있어도

결코 물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推此志也,雖與日月爭光可也。〔一0〕

이에 그의 지조를 추측해 본다면

그는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一〕索隱,亦作「騷」。按:楚詞「」作「騷」,音素刀反。應劭云「離,遭也;騷,憂也」。

又離騷序云「離,別也;騷,愁也」。

  〔二〕正義上七感反,下丁達反。慘,毒也。怛,痛也。

  〔三〕正義寒孟反。   〔四〕正義誹,方畏反。

  〔五〕索隱上音濁,下音鬧。

  〔六〕索隱上音烏故反,下音奴計反。

  〔七〕正義蛻音稅,去皮也,又他臥反。

  〔八〕集解徐廣曰:「皭,疏淨之貌。」索隱皭音自若反。徐廣云「疏淨之貌」。

  〔九〕索隱泥亦音涅,滓亦音淄,又並如字。

  〔一0〕正義言屈平之仕濁世,去其汙垢,在塵埃之外。推此志意,雖與日月爭其光明,斯亦可矣。

屈平既絀,

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一〕

굴원이 배척되어 왕과 사이가 소원해진 뒤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었다.

惠王患之,乃令張儀詳去秦,厚幣委質事楚,曰:

진혜왕(秦惠王)이 이를 근심하여

장의를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을 바치게 하고

위질(委質)의 예를 행하여 초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秦甚憎齊,齊與楚從親,

楚誠能絕齊,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

“ 우리 진나라는 제나라에 많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초나라가 진실로 제나라와 절교를 한다면

우리 진나라는 상오(商於)의 600리 땅을 할양하겠습니다.”

楚懷王貪而信張儀,

遂絕齊,使使如秦受地。張儀詐之曰:

초회왕은 욕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장의의 말을 믿고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한 후에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상오의 땅 600리를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가 사술을 부려 말했다.

「儀與王約六里,不聞六百里。」

“ 이 장의가 초왕과 주기로 한 땅은 6리이지

600리를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楚使怒去,歸告懷王。

懷王怒,大興師伐秦。

秦發兵擊之,

大破楚師於丹、淅,〔二〕斬首八萬,

虜楚將屈,[三]遂取楚之漢中地。[四]

초나라 사자가 화를 내며 돌아와 회왕에게 보고했다.

분노한 회왕이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도 군사를 보내 반격했다.

초군을 단수(丹水)와 석수(淅水)에서 대파한 진군은

그 군사 8만의 목을 베었으며

초장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한중(漢中) 땅을 점령했다.

懷王乃悉發國中兵 以深入擊秦,

戰於藍田。

회왕이 다시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가

남전(藍田)에서 진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魏聞之,襲楚至鄧。[五],

楚兵懼自秦歸。

이에 위나라가 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기습하여 등(鄧)에 이르렀다.

이를 두려워한 초군은 할 수 없이 진나라로부터 회군했다.

而齊竟怒不救楚,楚大困。

합종을 파기한 초나라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제나라는

초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아

이로써 초나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注[一]正義上足松反。

注[二]索隱二水名。謂於丹水之北,淅水之南。丹水﹑淅水皆縣名,在弘農,

所謂丹陽﹑淅。正義丹陽,今枝江故城。

注[三]索隱屈,姓。,名,音蓋也。

注[四]索隱徐廣曰:「楚懷王十六年,張儀來相;十七年,秦敗屈。」正義梁

州。

注[五]索隱按:此鄧在漢水之北,故鄧侯城也。

明年,秦割漢中地 與楚以和。楚王曰:

「不願得地,願得張儀 而甘心焉。」

다음 해에 진나라가 한중의 땅을 떼어 초나라에 돌려주겠다며

강화를 청해왔다. 이에 초회왕이 진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한중의 땅이 아니오.

내가 장의만 얻는다면 그것으로써 매우 만족하겠소.”

張儀聞,乃曰:「

以一儀而當漢中地,臣請往如楚。」

장의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 이 장의 한 사람으로 한중의 땅을 감당할 수 있다면,

제가 초나라에 들어가겠습니다.”

如楚,又因厚幣用事者臣靳尚,

而設詭辯於懷王之寵姬鄭袖。

懷王竟聽鄭袖,復釋去張儀。

이윽고 장의가 초나라에 당도하여

많은 뇌물을 초나라의 권신 근상(靳尙)에게 바쳤다.

근상은 초왕의 총희 정수(鄭袖)로 하여금

궤변으로 초왕을 현혹시키게 했다.

초왕은 정수의 말에 미혹되어

장의를 석방하여 진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是時屈平既疏,不復在位,使於齊,

顧反,諫懷王曰:

「何不殺張儀?」

이때 굴원은 이미 초왕과 사이가 소원하여

관직에 다시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 있었다.

이윽고 제나라에서 돌아온 굴원이 초왕에게 물었다.

“ 어째서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懷王悔,追張儀不及。[一]

회왕이 후회하고

추격군을 보내 장의를 잡으려고 했으나

장의는 멀리 달아난 후였다.

注[一]索隱按:張儀傳無此語也。

其後諸侯共擊楚,大破之,殺其將唐眛。[一]

그 후에 제후들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물리치고 그 대장 당매(唐眛)를 죽였다.

注[一]集解徐廣曰:「二十八年敗唐眛也。」正義眛,莫葛反。

時秦昭王與楚婚,欲與懷王會。懷王欲行,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 소양왕(昭襄王)이 혼인을 맺어

양국이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초회왕과 회합을 갖자고 했다.

屈平曰:

「秦虎狼之國,不可信,不如毋行。」[一]

이에 굴원이 회왕에게 말했다.

“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나라입니다.

결코 믿을 수 없으니 가시면 안 될 것입니다.”

懷王稚子子蘭勸王行:「柰何絕秦歡!」

懷王卒行。

그러나 회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이

“ 어째서 진나라의 호의를 물리치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자

결국은 회왕은 진왕을 만나러갔다.

入武關,秦伏兵絕其後,因留懷王,[二]

以求割地。

회왕이 무관을 통하여 진나라 땅에 들어가자

진나라가 군사를 매복시켜 그 퇴로를 끊고 회왕을 억류시켰다.

진나라는 회왕에게 초나라 땅을 떼어 할양하라고 강요했다.

懷王怒,不聽。

亡走趙,趙不內。

復之秦,竟死於秦 而歸葬。

회왕이 노하여 진나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후에 회왕은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조나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의 후환을 두려워한 조왕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회왕은 다시 진나라에 끌려가

결국은 그곳에서 죽었다.

진나라는 회왕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注[一]索隱按:楚世家昭睢有此言,蓋二人同諫王,故彼此各隨錄之也。

注[二]集解徐廣曰:「三十年入秦。」

長子頃襄王立,[一]以其弟子蘭為令尹。

楚人既咎子蘭 以勸懷王入秦而不反也。

회왕의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고

그의 동생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환국하지 못한 것은

모두 자란의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注[一]索隱名橫。

屈平既嫉之,

雖放流,睠顧楚國,

繫心懷王,不忘欲反,

冀幸君之一悟,

俗之一改也。

굴원도 자란이 행한 옛날 행위에 대해

매우 통탄스럽게 생각했다.

비록 몸은 이미 추방되었음에도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초회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음에

언젠가는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왕이 어느 날 갑자기 깨우쳐서

나쁜 습속이 개량되기를 기대했다.

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

一篇之中三致志焉。

然終無可柰何,故不可以反,

卒以此見懷王之終不悟也。

그는 왕을 모시고 나라를 부흥시켜

쇠퇴해 가는 국세를 역전시켜 보고자

한 편의 시 중에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하여 그 뜻을 전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노력도 모두 허사가 되고

진나라에 들어간 회왕은 돌아오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 회왕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人君無愚智賢不肖,[一]

莫不欲求忠以自為,

舉賢以自佐,

남의 군주가 되는 자는

그 자신이 총명하거나, 우둔하거나,

재주가 있거나, 재주가 없거나를 불문하고

모두가 충신을 찾아 자기를 위하도록 하고

또한 현인을 임용하여 자기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보좌토록 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然亡國破家相隨屬,

而聖君治國累世而不見者,

其所謂忠者不忠,

而所謂賢者不賢也。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가문이 절단 나는 것이 끊이지 않고

성군이 대를 이어 나타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보기 힘든 것은

소위 충신이란 자는 충성을 다하지 않고,

현명하다는 자는 어질지 않은 것에 기인한 것이다.

懷王以不知忠臣之分,

故內惑於鄭袖,外欺於張儀,

疏屈平而信上官大夫﹑令尹子蘭。

회왕도 역시 충신들을 구분하지 못했음으로

안으로는 정수에게 현혹되었고,

밖으로는 장의에게 속임을 당했으며,

충신인 굴원을 멀리하고

탐욕스러운 상관대부 근상(靳尙)과 자란(子蘭)을 가까이 한 것이다.

兵挫地削,亡其六郡,

身客死於秦,為天下笑。

此不知人之禍也。

군사들은 꺾이고 영토는 잠식당해

무려 6개 군에 달하는 영토를 진나라에 빼앗겼으며

자신의 몸은 진나라에 사로잡혀 객사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입은 화인 것이다.

易曰:「井泄不食,[二]為我心惻,[三]可以汲。[四]

王明,並受其福。」[五]

王之不明,豈足福哉![六]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 우물 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은,

이 물은 가히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명철하다면,

또한 그 복을 받는 법이다.”라고 했으니

왕이 밝지 못하니,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注[一]索隱此已下太史公傷懷王之不任賢,信讒而不能反國之論也。

注[二]集解向秀曰:「泄者,浚治去泥濁也。」索隱向秀字子期,晉人,注易。

注[三]集解張璠曰:「可為惻然,傷道未行也。」索隱張璠亦晉人,注易也。

注[四]索隱按:京房易章句言「我道可汲而用也」。

注[五]集解易象曰:「求王明受福也。」索隱按:京房章句曰「上有明王,汲我

道而用之,天下並受其福,故曰『王明並受其福』也。」

注[六]集解徐廣曰:「一云『不足福』。」正義言楚王不明忠臣,豈足受福,故

屈原懷沙自沈。

令尹子蘭聞之大怒,

卒使上官大夫短屈原於頃襄王,

頃襄王怒而遷之。[一]

영윤 자란은 굴원의 그러한 태도를 전해 듣고 대노하여

마침내 상관대부 근상을 시켜 굴원을 경양왕에게 모함했다.

경양왕도 노하여 굴원을 도성 밖으로 쫓아냈다.

注[一]集解離騷序曰:「遷於江南。」

屈原至於江濱,(굴원지어강빈)

굴원이 강수의 강변에 이르자

被髮行吟澤畔。(피발행음택반)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수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배회했다.

顏色憔悴,(안색초췌)

안색은 초췌하고

形容枯槁。(형용고고)

몸은 비쩍 말라 야위어 있었다.

漁父[一]見而問之曰(어부견이문지왈):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보고 물었다.

「子非三閭大夫歟?(자비삼려대부여?)[二]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닌가?

何故而至此?」(하고이지차?)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屈原曰:(굴원왈)

굴원이 대답했다.

「舉世混濁而 我獨清,(거세혼탁이아독청)

온 세상이 모두 탁했으나 나 혼자만은 맑았으며

人皆醉而 我獨醒,(인개취이아독성)

세상 사람들은 모두 취했으나 나 혼자만은 깨어 있었소.

是以見放。」(시이견방)

그래서 나는 추방당했소.

漁父曰:(어부왈)

어부가 말했다.

「夫聖人者,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부성인자,불응체어물이 능여세추이)

옛날 성인들께서는

어느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시지 않고

세상의 돌아가는 추이에 따랐소.

舉世混濁,何不隨其流[三]而 揚其波?

(거세혼탁,하불수기류이 양기파)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그 세상 사람들이 빠져 있는 흐름을 따라

그 흙탕물을 튀겨서 파고를 일으키지 않는가?

人皆醉,何不餔其糟而 啜其醨?

(인개취,하불포기조이 철기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어찌하여 술지게미를 배불리 먹고

그 거른 술을 같이 마시지 않는가?

何故懷瑾握瑜[四]而 自令見放為?」

(하고회근악유이 자령견방위?)

얼마나 아름다운 옥 같은 생각을 품었기에

스스로 화를 취하여 쫓겨나게 되었는가?

屈原曰:(굴원왈)

굴원이 대답했다.

「吾聞之,(오문지)

내가 들기에

新沐者必彈冠,(신목자필탄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필히 관을 벗어서 털어야 할 것이며

新浴者必振衣,(신욕자필진의)

새로이 몸을 씻은 사람은

필시 자기의 옷을 벗어 흔들어야 한다고 했소.

人又誰能以身之察察,

(인우수능 이신지찰찰)[五]

어찌 이 맑고 깨끗한 몸으로

受物之汶汶者乎!

(수물지문문자호!)[六],

더럽고 욕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常流[七]而 葬乎江魚腹中耳,

(녕부상류이 장호강어복중이)

차라리 내가 설사 상수에 빠져

수장되어 고기들의 밥이 된다 할지언정

又安能以晧晧之白 而蒙世俗之溫蠖乎!」[八]

(우안능이호호지백이 몽세속지온확호!)

어찌 희고 깨끗하며 결백한 마음의 내 몸에

이 속된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습니까.

[<漁父辭>의 누락부분]

遂去 不復與言.

어부는 마침내 가 버렸다. 그후로 다시는 그와 얘기하지 못했다.

注[一]索隱音甫。

注[二]集解離騷序曰:「三閭之職,掌王族三姓,曰昭﹑屈﹑景,序其譜屬,率

其賢良,以厲國士。」

注[三]索隱按:楚詞作「滑其泥」。

注[四]索隱按:楚詞此「懷瑾握瑜」作「深思高舉」也。

注[五]集解王逸曰:「己靜絜。」

注[六]集解王逸曰:「蒙垢。」索隱汶汶者,音閔。汶汶猶昏暗也。

注[七]索隱常流猶長流也。

注[八]索隱蠖音烏廓反。溫蠖猶惛憤。楚詞作「蒙世之塵埃哉」。

乃作懷沙之賦。[一]其辭曰:

그리고 나서 굴원은 <회사(懷沙)>라는 부(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注[一]索隱按:楚詞九懷曰「懷沙礫以自沉」,此其義也。

陶陶孟夏兮,草木莽莽。[一]

傷懷永哀兮,汩徂南土。[二]

眴兮窈窈,[三]孔靜幽墨。[四]

冤結紆軫兮,離愍之長鞠;[五]

撫情效志兮,俛詘以自抑。

陶陶孟夏兮(도도맹하혜)

햇볕이 따가운 초여름이라

草木奔奔 (초목망망)

초목이 무성도 하구나.

傷懷永哀兮(상회영애혜)

쓰라린 마음에 영원한 슬픔 안고

汩徂南土(율조남토)

유유히 흘러서 남쪽 땅으로 가련다.

瞬兮杳杳(순혜묘묘)

쳐다만 보아도 아득하고 멀어서

孔靜幽黙(공정유목)

조용한 것이 소리조차 없구나.

鬱結紆軫兮(울결우진혜)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

離愍而長鞠(이민이장국)

시름에 겨우니 못내 괴롭다.

撫情效志兮(무정효지혜)

정(情)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寃屈而自抑(원굴이자억)

원통함을 삼키고 스스로 참네.

注[一]集解王逸曰:「陶陶,盛陽貌。莽莽,盛茂貌。」索隱音姥。正義莫古反。

注[二]集解王逸曰:「汩,行貌。」索隱王師叔曰:「汩,行貌也。」方言曰:「謂

疾行也。」

注[三]集解徐廣曰:「眴,眩也。」索隱眴音舜。徐氏云:「眴音眩。窈音烏鳥

反。」

注[四]集解王逸曰:「孔,甚也。墨,無聲也。」正義孔,甚。墨,無聲。言江

南山高澤深,視之眴;野甚清淨,歎無人聲。

注[五]集解王逸曰:「鞠,窮。紆,屈也。軫,痛也。愍,病也。」索隱離湣。

湣,病。鞠,窮。

刓方以為圜兮,常度未替;[一]

易初本由兮,君子所鄙。[二]

章畫職墨兮,前度未改;[三]

內直質重兮,大人所盛。[四]

巧匠不斲兮,孰察其揆正?

玄文幽處兮,矇謂之不章;[五]

離婁微睇兮,瞽以為無明。[六]

變白而為黑兮,倒上以為下。[七]

鳳皇在笯兮,[八]雞雉翔舞。[九]

同糅玉石兮,槪面而相量。[一0]

夫黨人之鄙妒兮,羌不知吾所臧。[一一]

刓方以爲圜兮(완방이위환혜)

모난 것을 깎아서 동그라미 만들어도

常度未替(상도미체)

일정한 규범은 바꾸지 않는데,

易初本廸兮(이초본적혜)

근본(根本)이나 초지(初志)를 고치는 것은

君子小鄙(군자소비)

군자(君子)가 얕보는 것이라.

章畫志墨兮(장화지묵혜)

먹으로 분명히 그려 놓은

前圖未改(전도미개)

옛날의 설계는 고치지 않으며,

內厚質正兮(내후질정혜)

충정이 후덕하고 성질이 올바르기를

大人所盛(대인소성)

대인(大人)이 기리는 바요.

巧倕不斲兮(교수불착혜)

교수(巧倕)라도 자르지 않는데

孰察其揆正(수찰기규정)

누가 그 칫수의 바름을 알겠나?

玄文處幽兮(현문처유혜)

검은 무니가 어두운데 놓이면

矇睡謂之不章(몽수위지부장)

청맹과니는 불분명타 하고

離婁微睇兮(이루미제혜)

이루(離婁)가 실눈을 뜨더라도

瞽以爲無明(고이위무명)

소경은 못 보는 줄로 여기지.

變白以爲黑兮(변백이위흑혜)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倒上以爲下(도상이위하)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鳳凰在笯兮(봉황재노혜)

봉황(鳳凰)은 새장 속에 있는데

雞鶩翔舞(계목상무)

닭과 집오리는 나다니며 춤을 추네.

同糅玉石兮(동류옥석혜)

옥(玉)과 돌을 한 곳에 섞어 놓고

槪面相量(일개면상량)

하나의 평미래로 재려고 하니

夫惟黨人之鄙固兮(부유당인지비고혜)

저 도당들의 비천함이여!

羌不知余之所藏(강부지여지소장)

내가 가진 것의 값어치를 모른다.

注[一]集解王逸曰:「刓,削;度,法;替,廢也。言人刓削方木,欲以為圓,

其常法度尚未廢也。」索隱刓音五官反。謂刻刳方木以為圓,其常法度尚未廢。

注[二]集解王逸曰:「由,道也。」正義本,常也。鄙,恥也。言人遭世不道,

變易初行,違離光道,君子所鄙。

注[三]集解王逸曰:「章,明也。度,法也。言工明於所畫,念其繩墨,修前人

之法,不易其道,則曲木直而惡木好。」索隱章,明也。畫,計畫也。楚詞「職」

作「志」。志,念也。餘如注所解。

注[四]集解王逸曰:「言人質性敦厚,心志正直,行無過失,則大人君子所盛美

也。」

注[五]集解王逸曰:「玄,黑也。矇,盲者也。詩云『矇瞍奏公』。章,明也。」

注[六]集解王逸曰:「離婁,古明視者也。瞽,盲也。」正義睇,田帝反,眄也。

注[七]索隱音戶。

注[八]集解徐廣曰:「笯,一作『郊』。」駰案:王逸曰「笯,籠落也」。索隱笯

音奴,又女加反。徐云一作「郊」。按:籠落謂藤蘿之相籠絡。正義應瑞圖云:

「黃帝問天老曰:『鳳鳥何如?』天老曰:『鴻前而麟後,蛇頸而魚尾,龍文而

龜身,燕而?喙,首戴德,頸揭義,背負仁,心入信,翼俟順,足履正,尾

繫武,小音金,大音鼓,延頸奮翼,五色備舉。』」

注[九]索隱楚詞「雉」作「鶩」。

注[一0]集解王逸曰:「忠佞不異。」

注[一一]集解王逸曰:「莫昭我之善意。」索隱按:王師叔云「羌,楚人語辭」。

言卿何為也。正義羌音彊。

任重載盛兮,陷滯而不濟;[一]

懷瑾握瑜兮,窮不得余所示。[二]

邑犬之群吠兮,吠所怪也;

誹駿疑桀兮,固庸態也。[三]

文質疏內兮,衆不知吾之異采;[四]

材樸委積兮,莫知余之所有。

重仁襲義兮,謹厚以為豐;[五]

重華不可牾兮,[六]孰知余之從容!

古固有不並兮,豈知其故也?[七]

湯禹久遠兮,邈不可慕也。

懲違改忿兮,抑心而自彊;

離湣而不遷兮,願志之有象。[八]

進路北次兮,[九]日昧昧其將暮;

含憂虞哀兮,[一0]限之以大故。[一一]

任重載盛兮(임중재성혜)

무거운 짐을 많이도 실어

陷滯而不濟(함체이부제)

바퀴가 빠져서 움직이질 않네.

懷瑾握瑜兮(회근악유혜)

아름다운 보석을 품고 있지만

窮不知所示(궁부지소시)

길이 막혔으니 보일 데를 모르겠다.

邑犬之群吠兮(읍견지군폐혜)

마을 개들이 떼지어 짖는 것은

吠所怪也(폐소괴야)

이상한 사람있어 짖는 것이고

非俊疑傑兮(비준의걸혜)

영웅과 호걸을 비방하는 건

固庸態也(고용태야)

본래가 용렬해서 그렇다.

文質疏內兮(문질소내혜)

무늬와 바탕은 안으로 갖췄으니

衆不知余之異采(중부지여지이채)

중인(衆人)들은 이채로운 걸 모르고

材朴委積兮(재박위적혜)

재목과 원목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莫知余之所有(막지여지소유)

내 것인 것을 모르는 구나.

重仁襲義兮(중인습의혜)

어짐(仁)이 겹치고 정의가 이어지고

謹厚以爲豊(근후이위풍)

근신과 온후함이 풍성하여도

重華不可迕兮(중화불가오혜)

순임금님은 만날 수 없으니

孰知余之從容(숙지여지종용)

누가 나의 거동을 알아나 줄까?

古固有不竝兮(고고유불병혜)

옛적에도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같이 나지 않는

豈知其何故(기지기하고)

그 까닭을 알기나 하랴?

湯禹久遠兮(탕우구원혜)

탕(湯)과 우(禹)는 먼 옛날이야기

邈而不可慕(막이불가모)

아득하여 생각할 수도 없다.

懲違改忿兮(징위개분혜)

잘못을 뉘우치고 원한을 삭이고

抑心而自强(억심이자강)

마음을 억눌러서 스스로 참아

離愍而不遷兮(이민이불천혜)

시름이 겨워도 변하지 않으리니

願志之有像(원지지유상)

이 뜻을 본보기로 하리라.

進路北次兮(진로북차혜)

길을 나아가 북쪽에 다달으니

日昧昧其將暮(일매매기장모)

해는 뉘엿뉘엿 어두워진다.

舒憂娛哀兮(서우오애혜)

시름을 풀고 서글픔을 달래며

限之以大故(한지이대고)

지나간 큰일들을 마감하리라.

注[一]集解王逸曰:「言己才力盛壯,可任用重載,而身陷沒沈滯,不得成其本

志也。」

注[二]集解王逸曰:「示,語也。」

注[三]集解王逸曰:「千人才為俊,一國高為桀也。庸,賤之人也。」索隱按:

尹文子云「千人曰俊,萬人曰桀」。今乃誹俊疑傑,固是庸人之態也。

注[四]集解徐廣曰:「異,一作『奧』。」駰案:王逸曰「采,文采也」。

注[五]集解王逸曰:「重,累也。襲,及也。」

注[六]集解王逸曰:「牾,逢也。」索隱楚詞「牾」作「」,並吳故反。王師

叔云「牾,逢也」。

注[七]索隱楚詞作「莫知其何故」。

注[八]集解王逸曰:「象,法也。」

注[九]正義北次將就。

注[一0]索隱楚詞作「舒憂娛哀」。娛音虞。娛者,樂也。

注[一一]集解王逸曰:「娛,樂也。大故謂死亡也。」

亂曰:[一]

浩浩沅﹑湘兮,[二]分流汨兮。[三]

脩路幽拂兮,[四]道遠忽兮。

曾吟恆悲兮,永歎慨兮。

世既莫吾知兮,人心不可謂兮。[五]

懷情抱質兮,獨無匹兮。

伯樂既歿兮,驥將焉程兮?[六]

人生稟命兮,各有所錯兮。[七]

定心廣志,餘何畏懼兮?[八]

曾傷爰哀,永歎喟兮。[九]

世溷不吾知,心不可謂兮。

知死不可讓兮,願勿愛兮。

明以告君子兮,吾將以為類兮。[一0]

亂曰(난왈)

노래 끝에 이르기를,

浩浩沅湘(호호원상혜)

넘실거리는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分流汩兮(분류율혜)

두 갈래로 굽이쳐 흐르고

脩路幽蔽(수로유폐혜)

닦아 놓은 길은 깊숙이 가리워져

道遠忽兮(도원홀혜)

멀고도 먼 길은 끝이 없네.

曾吟恆悲兮(증음긍비혜)

이렇게 읊조리며 슬퍼하며

永歎慨兮(영탄개혜)

길이 개탄하여도

世既莫吾知兮(세기막오지혜)

세상에 이미 나를 알아주는 이 없으니

人心不可謂兮(인심불가위혜)

인심이란 말할 것도 없네.

懷情抱質(회정포질혜)

가슴에 품은 도타운 정은

獨無匹兮(독무필혜)

비할데 없이 우뚝하지만

伯樂旣沒兮(백락기몰혜)

백락(伯樂)이 이미 죽었으니

焉程兮(기장언정혜)

천리마를 어찌 알아보리오?

人生稟命兮(인생품명혜)

인생은 천명을 받아

*[萬民之生(만민지생):만민(萬民)이 한 세상에 태어나]라고 한 곳도 있음.

各有所錯兮(각유소착혜)

각기 제자리가 있거늘

定心廣志(정심광지)

마음을 정하고 뜻을 넓히면

余何畏懼兮(여하외구혜)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增傷爰哀(증상원애)

상심이 더하여 서럽게 울며

永歎喟兮(영탄위혜)

길게 한숨을 쉰다.

世溷濁莫吾知(세혼탁막오지)

세상이 혼탁하여 알아주는 이 없으니

人心不可謂兮(인심불가위혜)

사람의 마음을 일깨울 수 없구나.

知死不可讓(지사불가양혜)

죽음을 물릴 수 없음을 알았으니

願勿愛兮(원물애혜)

애석하다 여기지 말아라.

告君子(명이고군자v)

분명히 군자에게 고하노니

吾將爲類兮(오장이위류혜)

내 이제 충신의 본보기가 되리라!

注[一]索隱王師叔曰:「亂者,理也。所以發理辭指,撮總其要,而重理前意也。」

注[二]索隱二水名。按:地理志湘水出零陵陽海山,北入江。沅湘之後流也。

正義說文云:「沅水出牂柯,東北流入江。湘水出零陵縣陽海山,北入江。」按:

二水皆經岳州而入大江也。

注[三]集解王逸:「汨,流也。」

注[四]索隱楚詞作「幽蔽」也。

注[五]集解王逸曰:「謂猶說也。」索隱楚詞無「曾」已下二十一字。

注[六]集解王逸曰:「程,量也。」

注[七]集解王逸曰:「錯,安也。」

注[八]索隱楚詞「餘」並作「余」。

注[九]集解王逸曰:「喟,息也。」

注[一0]集解王逸曰:「類,法也。」正義按:類,例也。以為忠臣不事亂君之

例。

於是懷石 遂自*(投)**[沈]*汨羅以死。[一]

그리고는 마침내 가슴에 돌을 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注[一]集解應劭曰:「汨水在羅,故曰汨羅也。」索隱汨水在羅,故曰汨羅。地

理志長沙有羅縣,羅子之所徙。荊州記「羅縣北帶汨水」。汨音覓也。正義故羅

縣城在岳州湘陰縣東北六十里。春秋時羅子國,秦置長沙郡而為縣也。按:縣

北有汨水及屈原廟。續齊諧記云:「屈原以五月五日投汨羅而死,楚人哀之,每

於此日以竹筒貯米投水祭之。漢建武中,長沙區回白日忽見一人,自稱三閭大

夫。謂回曰:『聞君常見祭,甚善。但常年所遺,並為蛟龍所竊,今若有惠,可

以練樹葉塞上,以五色絲轉縛之,此物蛟龍所憚。』回依其言。世人五月五日

作,并帶五色絲及練葉,皆汨羅之遺風。」

屈原既死之後,楚有宋玉﹑唐勒﹑景差[一]之徒者,

皆好辭而以賦見稱;

然皆祖屈原之從容辭令,終莫敢直諫。

其後楚日以削,數十年竟為秦所滅。

굴원이 죽은 후

초나라에는 송옥(宋玉), 당륵(唐勒), 경차(景差)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문학을 좋아하여 부(賦)로써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굴원과 같이 완곡하고 함축적인 문체에는 능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직간을 행하지 않아

결국은 초나라는 날이 갈수록 국세가 약화되어

굴원이 죽고나서 몇 십년 후에 진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注[一]集解徐廣曰:「或作『慶』。」索隱按:楊子法言及漢書古今人表皆作「景

瑳」,今作「差」是字省耳。又按:徐﹑裴﹑鄒三家皆無音,是讀如字也。

自屈原沈汨羅後百有餘年,

漢有賈生,為長沙王太傅,

過湘水,投書以弔屈原。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진 이래 100년여 년이 지나자

한나라에 가의(賈誼)란 사람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가 되어

상수(湘水)를 지나다 제문을 지어 물속에 던져 굴원을 애도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第22

 

[주]흔히 왕촉의 말로 알려진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가운데

烈女不更二夫貞女不更二夫의 잘못이다

물론貞女의 문맥상의 뜻은烈女이다

사마천 <사기>열전 제22 전단열전 전문 완역을 통해 이를 밝힌다

1

田單者

(전단자) :전단(田單)은

齊諸田疏屬也

(제제전소속야) : 제나라 여러 전씨 중의 먼 일족이다

湣王時

(민왕시) : 제나라 민왕 때

單爲臨菑市掾

(단위임치시연) : 도읍 임치(臨菑)의 시장을 감독하는 관리였으나

不見知

(불견지) :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及燕使樂毅伐破齊

(급연사락의벌파제) : 연나라가 악의를 시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깨드리니

齊湣王出奔

(제혼왕출분) : 제나라 민왕은 달아나서

已而保莒城

(이이보거성) : 거성(莒城)을 보전했다.

燕師長驅平齊

(연사장구평제) : 연나라 군대는 제나라의 성을 차례로 평정해 나갔다.

而田單走安平

(이전단주안평) : 전단은 안평(安平)으로 달아났다.

令其宗人盡斷其車軸末

(령기종인진단기차축말) : 전단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집안 사람들에게 수레바퀴 축의 양 끝을 잘라 버리고

而傅鐵籠

(이부철롱) : 쇠로 테를 씌우라고 하였다.

已而燕軍攻安平

(이이연군공안평) : 연나라 군대가 안평을 공격하여

城壞

(성괴) : 성이 함락되자

齊人走

(제인주) : 안평에 있던 제나라 사람들은

爭塗

(쟁도) : 길을 다투어 도망가려 했으나

以軎折車敗

(이세절거패) : 바퀴 축의 양끝이 부러져 수레가 부숴 지는 바람에

爲燕所虜

(위연소로) : 연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었다.

唯田單宗人以鐵籠故得脫

(유전단종인이철롱고득탈) : 전단의 집안 사람들만이 바퀴 축을 쇠로 싸 두었기 때문에 탈출에 성공하여

東保卽墨

(동보즉묵) : 동쪽으로 즉묵(卽墨)에 이르러 몸을 보존했다.

燕旣盡降齊城

(연기진강제성) : 연나라 군대는 모든 성을 함락시켰다.

唯獨莒卽墨不下

(유독거즉묵불하) : 오직 거성과 즉묵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燕軍聞齊王在莒

(연군문제왕재거) : 연나라 군대는 제나라 민왕이 거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幷兵攻之

(병병공지) : 군대를 모아 거성을 공략하였다.

淖齒旣殺湣王於莒

(뇨치기살혼왕어거) : 요치가 이미 거성에서 민왕을 살해하였는데도

因堅守

(인견수) : 제군은 거성을 굳게 지키며

距燕軍

(거연군) : 연군을 방어하여

數年不下

(수년불하) : 몇 년이나 항복하지 않았다.

燕引兵東圍卽墨

(연인병동위즉묵) : 그러자 연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동으로 가서 즉묵을 포위하였다.

卽墨大夫出與戰

(즉묵대부출여전) : 즉묵의 대부가 성을 나와 싸우다가

敗死

(패사) : 패하여 죽으니

城中相與推田單

(성중상여추전단) : 즉묵의 백성들은 서로 전단을 추천하여

曰安平之戰

(왈안평지전) : 안평의 싸움에서

田單宗人以鐵籠得全

(전단종인이철롱득전) : 전단의 일족만이 철롱으로 안전함을 얻었다

習兵 立以爲將軍

(습병 입이위장군) : 병법에 익숙하다고 하여 추대하여 장군으로 하고

以卽墨距燕

(이즉묵거연) : 즉묵을 방패로 연군을 방어하였다.

2

頃之

(경지) : 얼마 뒤에

燕昭王卒

(연소왕졸) : 연나라 소왕이 죽고

惠王立

(혜왕입) : 혜왕이 서니

與樂毅有隙

(여락의유극) : 낙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田單聞之

(전단문지) : 전단은 이 소식을 듣고

乃縱反閒於燕

(내종반한어연) : 연나라에 간첩을 놓아

宣言曰

(선언왈) : 선언하기를

齊王已死

(제왕이사) : “제나라 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城之不拔者二耳

(성지불발자이이) : 제나라에서 함락되지 않은 성은 거성과 즉묵 두 곳뿐이다.

樂毅畏誅

(락의외주) : 낙의는 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서

而不敢歸

(이불감귀) :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以伐齊爲名

(이벌제위명) : 악의가 겉으로 제나라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實欲連兵南面

(실욕연병남면) : 사실은 전쟁을 오래 끌다가 자신이 남면하여

而王齊

(이왕제) : 제나라의 왕이 되고자 한다.

齊人未附

(제인미부) : 그러나 제나라 백성들이 순순히 부복하지 않기 때문에

故且緩攻卽墨以待其事

(고차완공즉묵이대기사) : 잠시 천천히 즉묵을 공격하며 그 일을 기다리고 있다.

齊人所懼

(제인소구) : 제나라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唯恐他將之來

(유공타장지래) : 오직 다른 장군이 와서

卽墨殘矣

(즉묵잔의) : 즉묵이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다.”

燕王以爲然

(연왕이위연) : 연나라 혜왕은 이 소문을 믿고

使騎劫代樂毅

(사기겁대락의) : 기겁(騎劫)으로 하여금 낙의를 대신하게 하였다.

3

樂毅因歸趙

(락의인귀조) : 그러자 낙의는 조나라에 귀순했으며

燕人士卒忿

(연인사졸분) : 연나라 군사들은 혜왕의 조치에 분개하였다.

而田單乃令城中人食

(이전단내령성중인식) : 전단은 성중인으로 하여금 음식을 먹을 때마다

必祭其先祖於庭

(필제기선조어정) : 반드시 뜰에서 그 선조를 제사지내게 했다.

飛鳥悉翔舞城中下食

(비조실상무성중하식) : 나는 새들이 다 성중을 날다가 내려와 음식물을 먹으니

燕人怪之

(연인괴지) : 연나라 사람들은 이상히 여겼다.

田單因宣言

(전단인선언) : 전단은 인하여 선언하기를,

曰神來下敎我

(왈신래하교아) : “신이 내려와서 나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乃令城中人曰

(내령성중인왈) : 성중 사람들에게 명령하기를,

當有神人爲我師

(당유신인위아사) : “마당히 신인이 나타나 나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有一卒曰

(유일졸왈) : 그러자 한 졸병이,

臣可以爲師乎

(신가이위사호) : “신이 스승이 될 수 있을까요?” 하고는

因反走

(인반주) : 도리어 달아났다.

田單乃起

(전단내기) : 전단은 곧 일어나

引還

(인환) : 그를 인도하여 돌아와

東鄕坐

(동향좌) : 동향하여 앉게 한 뒤에

師事之

(사사지) :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卒曰

(졸왈) : 졸이 말하기를,

臣欺君

(신기군) : “신이 군을 속였습니다.

誠無能也

(성무능야) : 진실로 무능합니다.“고 했다.

田單曰

(전단왈) : 전단이 말했다.

子勿言也

(자물언야) : “그대는 말하지 말라.”

因師之

(인사지) : 인하여 그를 스승으로 하였다.

每出約束

(매출약속) : 약속을 낼 때마다

必稱神師

(필칭신사) : 반드시 신사라 칭하였다.

乃宣言曰

(내선언왈) : 곧 선언했다.

吾唯懼燕軍之劓所得齊卒

(오유구연군지의소득제졸)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연나라군대가 포로가 된 제나라 병졸의 코를 벤 후

置之前行

(치지전행) : 그들을 전열 앞줄에 세워

與我戰

(여아전) : 우리와 싸워서

卽墨敗矣

(즉묵패의) : 즉묵이 함락되는 것이다.”

燕人聞之

(연인문지) : 연나라에서는 그 말을 듣고

如其言

(여기언) : 전단의 말대로 하였다.

城中人見齊諸降者盡劓

(성중인견제제강자진의) : 성 안의 백성들은 항복한 제나라 병사들이 모두 코를 잘리는 형벌을 당하는 것을 보자

皆怒堅守

(개노견수) : 모두 성을 내어 성을 굳게 지키며

唯恐見得

(유공견득) : 오직 적에게 붙잡힐까 두려워했다.

單又縱反閒曰

(단우종반한왈) : 전단은 또 간첩을 놓아 말했다.

吾懼燕人掘吾城外冢墓

(오구연인굴오성외총묘) : “나는 연나라 군대가 성 밖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쳐

僇先人

(륙선인) : 조상들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可爲寒心

(가위한심) : 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친다.”

燕軍盡掘壟墓

(연군진굴롱묘) : 연나라 병사들은 무덤을 모두 파헤치고

燒死人

(소사인) : 시체들을 불살라 버렸다.

卽墨人從城上望見

(즉묵인종성상망견) : 이 일로 즉묵 백성들은 성 웨에서 바라보고

皆涕泣

(개체읍) : 모두 눈물을 흘리고

俱欲出戰

(구욕출전) : 다함께 나가 사우고자 했으며

怒自十倍

(노자십배) : 분노는 절로 십 배나 더하였다.

4

田單知士卒之可用

(전단지사졸지가용) : 전단은 당장에라도 사졸들이 쓸 만하다는 것을 알고

乃身操版揷

(내신조판삽) : 곧 자신도 판자와 삽을 잡고

與士卒分功

(여사졸분공) : 사졸들과 노역을 분담하고

妻妾編於行伍之閒

(처첩편어행오지한) : 집안의 처첩들까지 군대의 대오에 편입시키고

盡散飮食饗士

(진산음식향사) : 음식은 죄다 나누어서 병사들을 먹였다.

令甲卒皆伏

(령갑졸개복) : 정예 병사들은 모두 숨게 하고

使老弱女子乘城

(사노약녀자승성) :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성 위로 올려 보낸 후

遣使約降於燕

(견사약강어연) : 사신을 보내 연나라에 항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燕軍皆呼萬歲

(연군개호만세) : 연나라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田單又收民金

(전단우수민금) : 전단은 도 백성들에게 금을 거두어

得千溢

(득천일) : 천일을 만들고

令卽墨富豪遺燕將

(령즉묵부호유연장) : 즉묵의 부자들로 하여금 연나라 장수에게 뇌물로 바치게 하였다.

曰卽墨卽降

(왈즉묵즉강) : “만일 즉묵이 항복하게 되면

願無虜掠吾族家妻妾

(원무로약오족가처첩) : 저희 가족들과 처첩은 포로로 삼지 말고

令安堵

(령안도) :안도하게 해 주십시오.”

燕將大喜

(연장대희) : 연나라 장수는 매우 기뻐하며

許之

(허지) : 허락했다.

燕軍由此益懈

(연군유차익해) : 연나라 군사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더욱 해이해졌다.

5

田單乃收城中得千餘牛

(전단내수성중득천여우) : 전단은 소 1,000여 마리를 모은 후

爲絳繒衣

(위강증의) : 붉은 비단 옷을 만들어 소에게 입히고

畫以五彩龍文

(화이오채룡문) : 오색으로 용무늬를 그렸다.

束兵刃於其角

(속병인어기각) : 칼날을 쇠뿔에 묶고

而灌脂束葦於尾

(이관지속위어미) : 기름을 부은 갈대를 쇠꼬리에 매달아

燒其端

(소기단) : 그 끝에다 불을 붙였다.

鑿城數十穴

(착성수십혈) : 성벽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고

夜縱牛

(야종우) : 야음을 틈타 소떼를 놓아

壯士五千人隨其後

(장사오천인수기후) : 장사 5,0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牛尾熱

(우미열) : 소는 꼬리가 뜨거워지자

怒而奔燕軍

(노이분연군) : 분노가 치밀어 연나라 진영을 향해 돌진하니

燕軍夜大驚

(연군야대경) : 연나라 군대는 밤중에 크게 놀랐다.

牛尾炬火光明炫燿

(우미거화광명현요) : 쇠꼬리에 붙은 횃불은 광채를 내며 눈부신데다가

燕軍視之皆龍文

(연군시지개룡문) : 연군이 바라보니 소의 몸통은 모두 용의 무늬였다.

所觸盡死傷

(소촉진사상) : 소에 부딪히기만 해도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五千人因銜枚擊之

(오천인인함매격지) : 제나라 군사 오천 명은 함매하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而城中鼓譟從之

(이성중고조종지) : 선안에서는 북치고 고함을 지르고

老弱皆擊銅器爲聲

(노약개격동기위성) : 노약자들은 모두 구리 그릇을 두드려 소리를 내니

聲動天地

(성동천지) :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燕軍大駭敗走

(연군대해패주) : 연군은 몹시 놀라 패주하엿다.

齊人遂夷殺其將騎劫

(제인수이살기장기겁) : 제나라 사람들은 드디어 장수 기겁을 무질러 죽이니

燕軍擾亂奔走

(연군요란분주) : 연군은 소란스럽게 달아났다.

齊人追亡逐北

(제인추망축북) : 제나라 군대가 도망가는 연군을 추격하니

所過城邑皆畔燕而歸田單

(소과성읍개반연이귀전단) : 지나가는 성읍마다 모두 연나라를 배반하고 전단에게 귀순하였다.

兵日益多乘勝

(병일익다승승) : 군대가 날마다 더욱 많아져 승세를 타고

燕日敗亡

(연일패망) : 연군은 날마다 패하여 도망하니

卒至河上

(졸지하상) : 마침내 황하가에 도달하였다.

而齊七十餘城皆復爲齊

(이제칠십여성개복위제) : 제나라 칠십여 성이 모두 다시 제나라 땅이 되엇다.

乃迎襄王於莒

(내영양왕어거) : 곧 양왕을 거에서 맞이하여

入臨菑而聽政

(입임치이청정) : 임치로 들어가 정사를 돌보았다.

6

襄王封田單

(양왕봉전단) : 양왕은 전단을 봉읍하고

號曰安平君

(호왈안평군) : 호를 안평군이라 했다.

7

太史公曰

(태사공왈) : 태사공은 논평한다

兵以正合

(병이정합) : 전쟁이란 처음에는 정면으로 대치하여 싸우지만

以奇勝

(이기승) : 뒤에는 불의에 기습하여 승리를 얻는 것이다.

善之者

(선지자) : 이것을 잘하는 자는

出奇無窮

(출기무궁) : 기계를 내는 방법이 무궁하여

奇正還相生

(기정환상생) : 기습과 정공이 서로 이어지는 모습이

如環之無端

(여환지무단) : 마치 고리에 끝이 없는 것과 같다.

夫始如處女

(부시여처녀) : 대체로 처음엔 처녀처럼 약하게 보여

適*人開戶(적인개호) : 적이 업신여기고 문을 열어 방비하지 않게 하고

*適音敵. 若我如處女之弱 則敵人輕侮 開戶不爲備也.

後如脫兎

(후여탈토) : 뒤에는 그물을 벗어난 토끼처럼

適不及距

(적불급거) : 빨리 달려서 敵人이 방어할 겨를이 없게 한다고 한 것은

其田單之謂邪

(기전단지위사) : 저 전단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8

初淖齒之殺湣王也

(초뇨치지살혼왕야) : 처음에 뇨치가 민왕을 죽이니

莒人求湣王子法章

(거인구혼왕자법장) : 거읍 사람들이 민왕의 아들 법장을 찾았는데

得之太史嬓之家

(득지태사교지가) : 태사교의 집에서 그를 찾아내었다.

爲人灌園(위인관원) : 그 때 법장은 남의 집 전원에 물을 대주고 있었다.

嬓女憐而善遇之

(교녀련이선우지) : 교의 달이 그를 가엾게 여겨 잘 대우하였다.

後法章私以情告女

(후법장사이정고녀) : 뒤에 법장은 사사로이 자신의 실정을 그녀에게 말하였고

女遂與通(녀수여통) : 그녀는 드디어 그와 소통했다.

及莒人共立法章爲齊王

(급거인공입법장위제왕) : 거읍 사람들이 함께 법장을 세워 제왕으로 하고

以莒距燕

(이거거연) : 거읍으로 연나라 군대를 방어하게 되었으므로

而太史氏女遂爲后

(이태사씨녀수위후) : 태사시의 딸이 드디어 후가 되니

所謂君王后也

(소위군왕후야) 이른바 군왕후이다.

9

燕之初入齊

(연지초입제) : 연군이 처음 제나라에 침입하였을 때에

聞畫邑人王蠋賢

(문화읍인왕촉현) : 획읍 사람 왕촉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令軍中曰

(령군중왈) : 군중에 명령하였다.

環畫邑三十里無入

(환화읍삼십리무입) : 힉읍 둘레 삼십리 안에는 들어가지 말라

以王蠋之故

(이왕촉지고) : 왕촉을 위하기 때문이었다.

已而使人謂蠋曰

(이이사인위촉왈) :이미 사람을 시켜 왕촉에게 말하기를,

齊人多高子之義

(제인다고자지의) : 제나라 사람들은 그대의 절의를 존중하는 이들이 많소.

吾以子爲將

(오이자위장) :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하고

封子萬家

(봉자만가) : 그대에게 일만호를 봉작하고자 하오.

蠋固謝

(촉고사) : 왕촉이 고사했다.

燕人曰

(연인왈) : 연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子不聽

(자불청) : 그대가 듣지 않는다면

吾引三軍而屠畫邑

(오인삼군이도화읍) : 내 삼군을 이끌고 와서 획읍을 무찌를 것이오.

王蠋曰

(왕촉왈) : 왕촉이 말했다.

忠臣不事二君

(충신불사이군)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貞女不更二夫

(정녀불갱이부) : 열녀는 두 남편을 바꾸지 않습니다.

齊王不聽吾諫

(제왕불청오간) : 제나라 왕이 나의 간언을 듣지 않으므로

故退而耕於野

(고퇴이경어야) : 물러나와 초야에서 농사짓는데

國旣破亡

(국기파망) : 나라는 이미 깨어지고 망하였소.

吾不能存

(오불능존) : 내가 보존할 수 없었소.

今又劫之以兵爲君將

(금우겁지이병위군장) : 이제 또 군대를 가지고 나를 위협한다고 하여 그대의 장수가 된다면

是助桀爲暴也

(시조걸위폭야) : 이는 걸임금을 도와 포악하게 하는 것이오.

與其生而無義

(여기생이무의) : 살아서 의를 잃는 것보다

固不如烹

(고불여팽) : 진실로 삶겨 죽는 것이 낫소.

遂經其頸於樹枝

(수경기경어수지) : 드디어 목을 나뭇가지에 매달고

自奮絶脰而死

(자분절두이사) : 스스로 흔들어 목을 죄어 죽었다.

齊亡大夫聞之曰

(제망대부문지왈) : 제나라의 도망친 사대부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王蠋布衣也

(왕촉포의야) : 왕촉은 포의한사(布衣寒士)다.

義不北面於燕

(의불북면어연) : 의리로 연나라에 북면하지 않았거늘

況在位食祿者乎

(황재위식록자호) : 하물며 벼슬하며 녹봉을 먹은 사람들이겠는가?

乃相聚如莒

(내상취여거) : 이에 서로 모여 거읍으로 가서

求諸子

(구제자) : 제나라 諸子를 찾아

立爲襄王

(입위양왕) : 세워 양왕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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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자서 05

태사공자서 5-5

1099. 苞河山(포하산),

하수와 화산을 차지하고

1100. 圍大梁(위대량),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1101. 使諸侯斂手而事秦者(사제후렴수이사진자),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비비며 진나라를 받들게 한 것은

1102. 魏 之功(위염지공).

위염(魏 )의 공이다.

1103. 作<穰侯列傳>第十二(작<양후열전>제십이)

이에 <양후열전>제십이를 지었다.

1104. 南拔  (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 都)를 함락시키고

1105. 北 長平(북최장평),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1106. 遂圍邯鄲(수위한단),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1107. 武安爲率(무안위솔);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108. 破荊滅趙(파형멸조),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1109. 王 之計(왕전지계),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1110. 作<白起王 列傳>第十三.(작<백기왕전열전>제십삼)

이에 <백기왕전열전>제십삼을 지었다.

1111. 獵儒墨之遺文(엽유묵지유문),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남긴 글을 섭렵한 맹자는

1112. 明禮義之統紀(명례의지통기),

예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기강을 밝혔고

1113. 絶惠王利端(절혜왕리단),

양혜왕(梁惠王)의 이익에만 집착한 마음을 끊게 만들어

1114. 列往世興衰(열왕세흥쇠).

지난 옛날의 흥망성쇠를 열거했다.

1115. 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작<맹자순경열전>제십사

이에 <맹자순경열전>제십사를 지었다.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설(薛) 땅으로 모여들었다.

▶설(薛)/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 위치했던 제나라 성읍으로 맹상군(孟嘗君)의 봉읍이었다.

1118. 爲齊 楚魏(위제한초위).

그는 그 선비들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이었다.

1119. 作<孟嘗君列傳>第十五(작<맹상군열전>제십오)

이에 <맹상군열전>제십오를 지었다.

1120. 爭馮亭以權(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여초이구한단지위),

초나라로 가서 구원군을 얻어 한단의 포위를 풀고,

1122. 使其君復稱于諸侯(가기군복칭우제후).

그 군주로 하여금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드높이게 했다.

1124. 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작<평원군우경열전>제십육

그래서 <평원군우경열전> 십육을 지었다.

1125.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1126. 賢能 于不肖(현능굴우불초),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굽혔으니

1127. 唯信陵君爲能行之(유신릉군위능행지).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1128. 作<魏公子列傳>第十七(작<귀공자열전>제십칠)

그래서 <위공자열전>제십칠을 지었다.

1129. 以身徇君(이신순군),

그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1130. 遂脫强秦(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터 고열왕을 빼내었고

1131. 使馳說之士南鄕走楚者(사치설지사만향초자),

유세하던 선비들을 남쪽의 초나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1132. 黃歇之義(황헐지의).

황헐의 의로운 마음에서 였다.

1133. 作<春信君列傳>第十八(작<춘신군열전>제십팔)

이에 <춘신군열전>제십팔을 짓는다

1134. 能忍 于魏齊(능인구우위제),

능히 위제(魏齊)로부터 당한 굴육을 참아내고

1135. 而信威于强秦(이신위우강진);

강포한 진나라에서 신임을 받아 위엄을 떨쳤다.

1136. 推賢讓位(추현양위),

이어서 물러날 때가 되자 어진 사람을 대신 추천하고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니

1137. 二子有之(이자유지).

1138. 作<范 蔡澤列傳>第十九(작<범수채택열전>제십구)

그래서<범수채택열전>제십구를 지었다.

1139. 率行其謀(솔행기모),

군사를 일으켜 계책에 따라 행하였으며

1140. 連五國兵(연오국병),

이웃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연계하여

1141. 爲弱燕報强齊之仇(위약연보강진지구),

국력이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성한 제나라에 원수를 갚아

1142. 雪其先君之恥(설기선군지치).

그 모시선 군주의 치욕을 씻었다.

1143. 作<樂毅列傳>第二十(작<악의열전>제이십)

그래서 <악의열전>제이십을 지었다.

1144. 能信意强秦(능신의강진),

강포한 진나라 왕에게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었고

1145. 而屈體廉子(이굴체염자),

또한 염파에게는 능히 몸을 굽혀

1146. 用徇其君(용순기군),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게끔 하였다.

1147. 俱重于諸侯(구중우제후).

이윽고 그 두 사람은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중시되었다.

1148. 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작<염파인상여열전>제이십일)

이에<염파인상여열전>제이십일을 지었다.

1149.  王旣失臨淄而奔去齊(민왕기실임치이분거제),

민왕이 이미 나라 임치성을 빼앗기고 거( ) 땅으로 도망쳤다.

1150. 唯田單用卽墨破走騎劫(유전단용즉묵파주기겁),

그러나 전단만이 즉묵을 굳게 지키다가 연나라 장수 기겁(騎劫)을 격파하여

1151. 遂存社稷(수존사직).

결국은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했다.

1152. 作<田單列傳>第二十二(작<전단열전>제이십이)

이에<전단열전>제이십이를 지었다.

1153. 能說詭說解患于圍城(능설궤설해환우위성),

달변과 궤변으로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된 성의 포위망을 풀고

1154. 輕爵祿(경작록),

작위에 봉록도 개의치 않았으며

1155. 樂肆志(악사지).

단지 자기들의 뜻한 바를 성취한것 만을 즐거워하였다.

1156. 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작<노중련추양열전>제이십삼)

이에 <노중련추양열전> 제이십삼을 지었다.

1157. 作辭以諷諫(이사이풍간),

초사(楚辭)라는 시부를 창조하여 정치를 풍자하여 간하고

1158. 連類以爭義(연류이쟁의),

그와 비슷한 것들을 비유함으로써 의로운 일을 주장했다.

1159. <離騷>有之(<이소>유지).

그가 지은 <이소>라는 시가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

1160. 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작<굴원가생열전>제이십사)

그래서 <굴원가생열전>제이십사를 지었다.

1161. 結子楚親(결자초친),

조나라의 포로가 된 자초(子楚)와 가까워져 지내더니

1162. 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사제후지사비연쟁입사진).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진나라에 들어가 모시도록 했다.

1163. 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작<여불위열전>제이십오)

<여불위열전>제이십오를 지었다.

1164. 曹子匕首(조자비수),

조말(曺沫)은 비수를 가슴에 품고 회맹장에 들어가

1165. 魯獲其田(노획기전),

제환공을 위협하여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되찾고

1166. 齊明其信(제명기신);

제환공으로 하여금 그 말을 지켜 신의라는 것을 밝히게 했으며

1167. 禮讓義不爲二心(예양의불위이심).

예양은 의를 지켜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1168. <刺客列傳>第二十六(작<자객열전>제이십육)

이에 <자객열전>제이십육을 지었다.

1169. 能明其畵(능명기화),

진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듯 그 계책을 명확히 세웠고

1170. 因時推秦(인시추진),

시의에 맞게 시행하였다.

1171. 遂得意于海內(수득의우해내),

결국은 그는 해내에서 뜻을 얻은

1172. 斯爲謀首(사위모수).

진나라 참모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173. 作<李斯列傳>第二十七(작<이사열전>제이십칠)

<이사열전>제이십칠을 지었다.

1174. 爲秦開地益衆(위진개지익중),

진나라를 위해 영토를 더욱 넓혀 백성들의 수효를 증가시켰고

1175. 北靡匈奴(북미흉노),

북으로는 흉노를 막았으며

1176. 据河爲塞(거하위색),

하수에 의지해서는 요새를 쌓았다.

1177. 因山爲固(인산위고),

견고한 산악의 험지를 이용하여

1178. 建楡中(건유중).

유중을 건설했다.

▶유중(楡中)/고대의 지명으로

1179. 作<蒙恬列傳>第二十八(작<몽염열전>제이십팔)

<몽염열전>제이십팔을 지었다.

1180. 塡趙塞常山以廣河內(전조색상한이광하내),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常山)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윽고 그 세력을 하내군(河內郡)까지 넓혀

▶상산(常山)/ 한나라 초기에 설치한 군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하(唐河) 이남과 내구(內丘) 이북......

▶하내군(河內郡)/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과 급현(汲縣) 서쪽의 땅으로 한(漢)과 초(楚)가 다툴 때 중립지역을 두기 위해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1181. 弱楚權(약초권),

이윽고 초나라의 세력을 약화시켜

1182. 明漢王之信于天下(명한왕지신우천하).

한왕(漢王)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1183. 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작<장이진여열전>제이십구).

<장이진여열전> 제이십구를 지었다.

1184. 收西河(수서하),

위표(魏豹)는 서하(西河)와

1185. 上黨之兵(상당지병),

상당의 병사들을 이끌고

1186. 衆至彭城(중지팽성);

팽성으로 달려가 한왕(漢王)을 도왔다.

1187. 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월지침략양지이고항우).

팽월(彭越)은 양(梁)을 공격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1188. 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작<위표팽월열전>제삼십)

이에 <위표팽월열전> 제삼십을 지었다.

1189. 以淮南叛楚歸漢(이회남반초귀한),

경포는 회남의 땅을 차지했다가 초나라를 반하고 한나라로 돌아섰으며

1190. 漢用得大司馬殷(한용득대사마은),

한나라는 그를 이용하여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얻어서

1191. 卒破子羽于垓下(졸파자우우해하).

결국은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했다.

▶해하(垓下)/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靈壁縣) 남쪽에 있던 전적지로 한신이 이끄는 한군이 항우의 초군을 격파하여 중국은 유방이 차지하게 되었다.

1192. 作< 布列傳>第三十一(작<경포열전>제삼십일)

이에 <경포열전> 제삼십일을 지었다.

1193. 楚人迫我京索(초인박아경색),

초나라가 한나라를 경성(京城)과 색성(索城)에서 압박할 때

1194. 而信拔魏趙(이신발위조),

한신(韓信)은 그 뒤를 돌아 위(魏)와 조(趙)를 점령하고

1195. 定燕齊(정연제),

다시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했다.

1196. 使漢三分天下有其二(사한삼분천하유기이),

천하는 한신에 의해 삼 분 되었으나 그 중 하나를 한나라에 바쳐 한나라는 그 둘을 차지하게 되어

1197. 以滅項籍(이멸항적).

그 힘으로써 항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1198. 作<淮陰侯列傳>第三十二(작<회음후열전>제삼십이)

<회음후열전> 제삼십이를 지었다.

1199. 楚漢相距鞏洛(초한상거공락),

초나라와 한나라가 공성(鞏城)과 낙읍(洛邑)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1200. 而韓信爲塡潁川(이한신위전영천),

한왕 신(信)은 영천(潁川)의 길을 메워 퇴로를 차단하고

1201. 盧 絶籍糧饗(노관절적양향).

노관은 항우의 양도를 끊었다.

1202. 作<韓信盧 列傳>第三十三(작<한신노관열전>제삼십삼)

<한신노관열전> 제 삼십삼을 지었다.

1203. 諸侯畔項王(제후반항왕),

제후들이 항우를 배반했을 때

1204. 唯齊連子羽城陽(유제연자우성양),

제왕만이 유독 성양에 있으면서 항우와 연계하였다.

1205. 漢得以間遂入彭城(한득이간수입팽성).

한왕은 이 틈을 타서 즉시 팽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206. 作<田 列傳>第三十四(작<전담열전>제삼십사)

이에 <전담열전> 제삼십사를 지었다.

1207. 攻城野戰(공성야전),

성을 공략하고 들판에서 적군과 싸움에 임하여

1208. 獲功歸報(획공귀보),

공을 세우고 돌아와 첩보를 전하는데는

1209.  , 商有力焉(쾌, 상유력언),

번쾌(樊 )와 역상( 商)이 제일 힘을 발휘했다.

1210. 非獨鞭策(비독편책),

그들은 단지 싸움을 위해 말채찍을 잡고 달렸을 뿐만 아니라

1211. 又與之脫難(우여지탈난).

한왕과 함께 위난을 같이 당하다가 벗어나기도 했다.

1212. 作<樊 列傳>第三十五(작<번역열전>제삼십오)

<번역열전>제삼십오를 지었다.

1213. 漢旣初定(한기초정),

한나라가 서고 처음으로 안정이 되었으나

1214. 文理未明(문리미명),

문물은 밝히지 못했다.

1215. 蒼爲主計(창위주계),

장창(張蒼)이 주계(主計)가 되어

1216. 整齊度量(정제도량),

도량형을 정비하여 통일하고

1217. 序律歷(서율력).

법률과 역법을 바로 잡았다.

1218. 作<張丞相列傳>第三十六(작<장승상열전>제삼십육)

<장승상열전>제삼십육을 지었다.

1219. 結言通使(결언통사),

말로서 결맹을 맺고 사신이 되어 통호하여

1220. 約懷諸侯(약회제후);

제후들과 조약을 맺어 품에 안았다.

1221. 諸侯咸親(제후함친),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와 친해졌으며

1222. 歸漢爲藩輔(귀한위번보).

결국은 귀속되어 번신(藩臣)과 보신(輔臣)이 되었다.

1223. 作< 生陸賈列傳>第三十七(작<역생육가열전>제삼십칠)

<역생유가열전>제삼십칠을 짓는다.

▶역생( 生)/ 진한(秦漢) 교체기 지금의 하남성 서남부에 있던 진류(陳留) 고양향(高陽鄕)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을 찾아가 계책을 바쳐 진류(陳劉)를 쳐부수고 광야군(廣野郡)에 봉해졌다. 초한 전쟁 동안에 그는 제왕 전광(田廣)에게 유세하여 한나라에 귀속시켰으나, 이어서 한신(韓信)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제왕 전광(田廣)은 역생을 끓는 물에 삶아 죽였다. 육가(陸賈)는 초나라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따라 다니며 변설로써 이름을 얻었다. 한고조 11년 남월왕(南越王) 조타(趙 )를 설득하여 한나라를 섬기게 하여 한나라 황제의 위엄을 남해(南海)에까지 미치게 했다고 해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1224. 欲詳知秦楚之事(욕상지진초지사),

진나라 말기 한과 초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알고 싶다면

1225. 維周 常從高祖(유주설상종고조),

오로지 주설만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고조 곁을 붙어 다니며

1226. 平定諸侯(평정제후).

제후들을 평정한 것을 보았다.

1227. 作<傅  成列傳>第三十八(작<부근귀성열전>제삼십팔)

<부근귀성열전>제삼십팔을 지었다.

1228. 徒强族(도강족),

강성한 족속들을 다른 곳으로 소개시키고

1229. 都關中(도관중),

관중에 도읍을 정했으며

1230. 和約匈奴(화약흉노);

흉노와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1231. 明朝廷禮(명조정례),

조정에 의례를 갖추어

1232. 次宗廟儀法(차종묘의법).

종묘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법으로 정해 황실의 존귀함을 높였다.

1233. 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작유경숙손통열전>제삼십구)

<유경숙손통열전> 제삼십구를 지었다.

1234. 能 剛作柔(능최강작유),

계포(季布)는 강직한 성격을 유순하게 고칠 수 있어

1235. 卒爲列臣(졸위열신);

마침내 한나라의 열후에 반열에 설 수 있었고

1236. 欒公不劫于勢而倍死(란공불겁우세이배사).

란포(欒布)는 한고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다.

1237. 作<季布欒布列傳>第四十(작<계포난포열전>제사십)

<계포란포열전>제사십을 지었다.

1238. 敢犯顔色以達主義(감범안생이달주의),

감히 천자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펼쳤으니

1239. 不顧其身(불고기신),

이는 자기 일신상의 몸도 돌보지 않으며

1240. 爲國家樹長畵(위국가수장화).

나라를 위해 백년대계의 계책을 세운 것이다.

1241. 作<袁 晁錯列傳>第四十一(작<원앙조착열전>제사십일)

<원앙조착열전>제사십일을 지었다.

1242. 守法不失大理(수법불실대리),

법을 지켰으나 대의를 잃지 않았으며

1243. 言古賢人(언고현인),

옛날 현인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1244. 增主之明(증주지명).

자기 군주의 지혜를 더욱 밝게 만들었다.

1245. 作<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작<장석지풍당열전>제사십이)

<장석지풍당열전> 제사십이를 지었다.

1246. 敦厚慈孝(돈후자효),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자애롭고 효성스러웠다.

1247. 訥于言(눌우언),

말을 함에는 어눌했으나

1248. 敏于行(민우행),

행동을 옮김에는 재빨라

1249. 務在鞠躬(무재국궁),

몸을 낮춰 남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여

1250. 君子長者(군자장자).

군자나 장자의 풍모를 갖췄다.

1251. 作<萬石張叔列傳>第四十三(작<만석장숙열전>제사십삼)

<만석장숙열전>제사십삼을 지었다.

1252. 守節切直(수절절직),

절개를 지켜 강직하며

1253. 義足以言廉(의족이언렴),

의기는 족히 청렴함을 말할 수 있었다.

1254. 行足以 賢(행족이려현),

그 행동은 족히 어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만 했다.

1255. 任重權不可以非里撓(임중권불가이비리효효).

막중한 자리에 임명되어도 옳지 않으면 행하지 않았다.

1256. 作<田叔列傳>第四十四(작<전숙열전>제사십사)

<전숙열전>제사삽사를 지었다.

1257. 扁鵲言醫(편작언의),

편작은 의술을 말하여

1258. 爲方者宗(위방자종),

의자(醫者)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1259. 守數精明(수수정명);

그의 의술은 정밀하고 고명하여

1260. 後世(修)(循)序(후세수순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 치료의 순서를 따랐을 뿐

1261. 弗能易也(불능이야),

결코 바꿀 수 없었다.

1262. 而倉公可謂近之矣(이창공가위근지의).

그러나 창공 한 사람만이 편작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으니

1263. 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작<편작창공열전>제사십오).

이에 <편작창공열전>제사십오를 지었다.

1264. 維仲之省(유중지성),

유중(劉仲)은 흉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대왕의 자리에 쫓겨났으나

▶유중(劉仲)/ 한고조 유방의 형이다. 한나라가 서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합양후( 陽侯)에 봉해졌다.

1265. 厥 王吳(궐비왕오),

그 아들 유비(劉 )는 오왕에 봉해졌다.

1266. 遭漢初定(조한초정),

한나라가 처음 서고 나라의 안정을 취해가고 있는 와중에

1267. 以塡撫江淮之間(이전무강회지간).

그는 강수와 회수 사이의 제후국들을 진무하였다.

1268. 作<吳王 列傳>第四十六(작<오왕비열전>제사십육)

<오왕비열전>제사십육을 지었다.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 賢而喜士(종속유영현이희사),

황실의 외척들 중에 오직 두영(竇 )만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으며

▶두영(竇 )/두태후(竇太后)의 조카로 오초칠국의 란 당시에 대장군에 임명되어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에 대항했다. 칠국의 란이 진압되자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무제 즉위 초에 승상에 올라 유학을 숭상하고 도학을 배척하여 두태후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이어서 죄를 얻어 목숨을 잃었다.

1271. 士鄕之(사향지),

선비들의 마음도 역시 그에게 쏠렸다.

1272. 率師抗山東滎陽(솔사항산동형양).

군사를 인솔하고 나아가 산동의 형양(滎陽)에서 오초의 반란군을 막았다.

1273.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작<위기무안열전>제사십칠)

이에 <위기무안군열전> 제사십칠을 지었다.

1274. 智足以應近世之變(지족이응근세지변),

지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았고

1275. 寬足用以得人(관족용이득인).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족했다.

1276. 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작<한장유열전>제사십팔)

<한장유열전>제사십팔을 지었다.

▶한장유(韓長孺)/지금의 하남성 민권현(民權顯)인 성안(成安) 사람으로 이름은 안국(安國)이다. 한나라 초기에는 양효왕 밑에서 중대부를 지냈으나 오초칠국의 란 때 오나라의 군사를 격퇴한 공로를 세워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무제 때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위(衛尉)의 직을 지냈다. 후에 재관장군(材官將軍)에 임명되어 흉노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싸움에 패하고 이어서 병사했다.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했다.

1279. 號令不煩(호령불번),

또한 호령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여

1280. 師徒鄕之(사도향지).

장수들이나 군졸들의 마음을 얻었다.

1281.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작<이장군열전>제사십구)

그래서 <이장군열전> 제사십구를 지었다.

1282. 自三代以來(자삼대이래),

삼대이래로

1283. 匈奴常爲中國患害(흉노상위중국환해);

흉노는 항상 중국에 해를 끼치는 우환의 대상이었다.

1284. 欲知强弱之時(욕지강약지시),

흉노의 세가 강하고 약할 때의 시기를 알기 위해

1285. 設備征討(몰비정토),

만반의 준비 끝에 정벌에 나섰다.

1286. 作<匈奴列傳>第五十(작<흉노열전>제오십).

이에 <흉노열전>제오십을 지었다.

1287. 直曲塞(직곡색),

구불구불한 변새의 길을 똑바르게 했으며

1288. 廣河南(광하남),

하남의 땅을 넓혔다.

1289. 破祁連(파기련),

또한 기련산에서 적을 격파하여

1290. 通西國(통서국),

서쪽의 나라들과 길을 통하게 만들었으며

1291. 靡北胡(미북호).

북방의 오랑캐의 남하를 저지했다.

1292. 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작<위장군표기열전>제오십일)

<위장군표기열전>제오십일을 지었다.

1293. 大臣宗室以侈靡相高(대신종실이치미상고),

조정대신들이건 황실의 종친들이건 서로 다투어 사치를 일삼았으나

1294. 唯弘用節衣食爲百吏先(유홍용절의식위백리선).

오로지 공손홍만이 의식을 절약하여 백관들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1295.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작<평진후열전>제오십이)

<평진후열전>제오십이를 지었다.

1296. 漢旣平中國(한기평중국),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1297. 而 能集楊越以保南藩(이타능집양월이보남번),

남월왕(南越王) 조타(趙 )는 양월(楊越)에 흩어진 세력들을 능히 수습할 수 있어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의 번국(藩國)이 되었며

1298. 納貢職(납공직).

종실에 공물을 바쳤다.

1299. 作<南越列傳>第五十三(작<남월열전>제오십삼)

이에 <남월열전>제오십삼을 지었다.

1300.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1301.  人斬 (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머리를 베어 한나라에 바쳤다.

1302.  守封 爲臣(보수봉우위신).

이어서 봉우산에 봉해져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1303. 作<東越列傳>第五十四(작<동월열전>제오십사)

이에 <동월열전>제오십사를 지었다.

1304. 燕丹散亂遼間(연단산란요간),

연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진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달아난 틈을 이용하여

1305. 滿收其亡民(만수기망민),

위만은 그 유민들을 수습하여

1306. 厥聚海東(궐취해동),

해동으로 데리고 가서

1307. 以集眞藩(이집진번),

진번 등의 땅을 안정시키고

1308.  塞爲外臣(보색위외신).

한나라 황실의 외번을 지키는 외신이 되었다.

1309. 作<朝鮮列傳>第五十五(작<조선열전>제오십오)

<조선열전>제오십오를 지었다.

1310. 唐蒙使略通夜郞(당몽사략농야랑)

당몽(唐蒙)을 사자로 보내 야랑(夜郞) 국과 통호하고

1311. 而  之君請爲內臣受吏(이공착지군청위내신수이).

공( )과 착( )의 군장들이 내신이 되어 한나라에서 보낸 관리들을 받아 들였다.

1312. 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작<서남이열전)제오십육).

<서남이열전>제오십육을 지었다.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대인>부설),

<대인부(大人賦)>에 실린 글은

1315. 靡麗多 (미려다과),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1316. 然其指風諫(연기지풍간),

그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를 풍자하며 간언을 올려

1317. 歸于無爲(귀우무위).

무위(無爲)로 귀의하려는 노자의 사상에 귀의하려는 생각에서 였다.

1318. 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작<사마상여열전>제오십칠)

<사마상여열전> 제오십칠을 지었다.

1319.  布叛逆(경포반역),

경포가 반역을 일으키자

1320. 子長國之(자장국지),

고조의 아들 유장(劉長)이 그 땅을 봉지로 삼고

▶유장(劉長)

1321. 以塡江淮之南(이전강회지남),

강회의 남쪽을 평정했다.

1322. 安剽楚庶民(안표초서민).

유안(劉安)은 사납기로 유명한 초나라 백성들을 차지했다.

▶유안(劉安)

1323.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작<회남형산열전>제오십팔)

<회남형산열전> 제오십팔을 지었다.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이 세운 공로와 재능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1326. 百姓無稱(백성무칭),

그들은 또한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공적에 대한 칭찬도,

1327. 亦無過行(역무과행).

그들의 과실에 대한 비난도 받지 않는다.

1328. 作<循吏列傳>第五十九(작<둔리열전>제오십구)

<둔리열전>제오십구를 지었다.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허튼 소리를 하지 못했다.

1331. 長孺矜焉(장유긍언);

장유(長孺)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유(長孺)/ 급암(汲 )의 자(字)이다.

1332. 好 人(호천인),

사람을 천거하기를 좋아했으며,

1333. 稱長者(칭장자),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라고 칭송을 받은 것은

1334. 壯有漑(장유개).

정장(鄭壯)에게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335. 作<汲鄭列傳>第六十(작<급정열전>제욱십).

<급정열전>제육십을 지었다.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1338. 唯建元元狩之間(유건원원수지간),

단지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연간에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한무제 때의 연호로 건원은 140년부터 135년 원수는 기원전 122년부터 115년까지임. 따라 건원과 원수지간이 함은 기원전 140년부터 115년까지의 기간을 말함.

1339. 文辭粲如也(문사찬여야).

학문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

1340. 作<儒林列傳>第六十一(작<유림열전>제육십일).

<유림열전>제육십일을 지었다.

1341. 民倍本多巧(민배본다교),

백성들이 본분을 잃고 간사스럽게 되며

1342. 奸軌弄法(간궤농법),

간교함을 일삼아 법률을 농단하니

1343. 善人不能化(선인불능화),

아무리 선인들일지라도 그들을 교화할 수 없었다.

1344. 唯一切嚴削爲能齊之(유일절암삭위능제지).

오직 모든 것을 엄혹하게 다스림으로서 그들을 능히 다스릴 수 있었다.

1345. 作<酷吏列傳>第六十二(작<혹리열전>제육십이)

<혹리열전>제 육십이를 지었다.

1346. 漢旣通使大夏(한기통사대하),

한나라가 서자 처음으로 대하(大夏)에 사절을 보내

1347, 而西極遠蠻(이서극원만),

까마득하게 먼 서쪽의 오랑캐가

1348. 引領內鄕(인령내향),

모두 중국의 안쪽으로 목을 늘이고

1349. 欲觀中國(욕관중국)

중원의 땅을 살펴보고자 했다.

1350. 作<大宛列傳>第六十三(작<대완열전>제육십삼)

<대완열전>제육십삼을 지었다.

1351. 救人于厄(구인우액),

위난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1352. 振人不贍(진인불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니

1353. 仁者有乎(인자유호)

인자라고 불릴만 하다.

1354. 不旣信(불기신),

또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1355. 不倍言(불배언),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지 않으니

1356. 義者有取焉(의자유취언),

이 역시 의로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357. 作<游俠列傳>第六十四(작<유협열전>제육십사)

<유협열전>제육십사를 지었다.

1358. 夫使人君能說主耳目(부사인군능설주이목),

군주를 모시고 능히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며

1359. 和主顔色(화주안색),

그 임금의 얼굴에 즐거움이 깃들게 하여

1360. 而獲親近(이획친근),

그 군주를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1361. 非獨色愛(비독색애),

그들이 단지 미색으로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1362. 能亦各有所長(능역각유소장).

그들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363. 作< 幸列傳>第六十五(작<영행열전>제육십오).

<영행열전>제육십오를 지었다.

1365. 不流世俗(불류세속),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1365. 不爭勢利(불쟁세리),

권세와 이익을 쫓지 않았으며

1366. 上下無所凝滯(상하무소응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걸림이 없이

1367. 人莫之害(인막지해),

아무에게나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은

1368. 以道之用(이도지용).

그것도 하나의 도(道)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1369. 作<滑稽列傳>第六十六(작<활계열전>제육십육)

<활계열전>제육십육을 지었다.

1370. 齊,楚, 秦, 趙爲日者(제,초,진,조위일자)

제, 초, 진, 조의 점복가들은

1371. 各有俗所用(각유속소용).

각기 그 나라의 풍속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방법이 이었다.

1372. 欲循觀其大旨(욕둔관기대지)

그들의 대체적인 방법을 살펴보고자

1373. 作<日者列傳>第六十七(작<일자열전>제육십칠)

<일자열전>제육십칠을 지었다.

1374. 三王不同龜(삼왕부동귀),

삼대에 있어서 거북등으로 점을 치는 방법은 서로 달랐으며

1375. 四夷各異卜(사이각이),

주변의 사이들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점을 쳤다.

1376. 然各以決吉凶(연각이결길흉).

그러나 길흉화복은 각기 자기들 방법대로 판단하였다.

1377. 略窺其要(략규기요),

그래서 대략 그 요지를 살펴보기 위해

1378. 作<龜策列傳>第六十八(작<귀책열전>제육십팔)

<귀책열전>제육십팔을 지었다.

1379. 布衣匹夫之人(포의필부지인),

포의를 입은 일반 백성 신분으로

1380. 不害于政(불해우정),

정치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1381. 不妨百姓(불방백성),

귀족들의 일에 방해를 하지 않으며

1382. 取與以時而息財富(취여이시이식재부),

시를 맞추어 재산을 증식하여 부를 쌓았다.

1382. 智者有采焉(지자유채언).

지혜있는 자라면 이것들로부터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1383. 作<貨殖列傳>第六十九(작<화식열전>제육십구).

<화식열전>제육십구를 지었다.

1384. 維我漢繼五帝末流(유아한계오제말류),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으며

1385. 接三代(統)(絶)業(접삼대(통)(절)업).

삼대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1386. 周道廢(주도폐),

주나라의 도가 폐하게 되니

1387. 秦拔去古文(주발거고문),

진나라가 서서 옛날의 고적들을 없애고

1388. 焚滅<詩><書>(분멸<시><서>),

<시(詩)>와 <서(書)>를 불살랐다.

1389. 故明堂石室金櫃玉版圖籍散亂(고명당석실금궤옥판도적산란).

그 결과 명당(明堂)의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금궤와 옥판의 지도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엉망이 되어버렸다.

1390. 于是漢興(우시한흥),

이어서 한나라가 흥기하자

1391. 蕭何次律令(소하차율령),

소하가 율령을 차례로 발하고

1392. 韓信申軍法(한신신군법),

한신(韓信)은 군법을 밝혔으며

1393. 張蒼爲章程(장창위장정),

장창은 법규를,

1394. 叔孫通定禮儀(숙손통정예의),

그리고 숙손통은 예의를 정했다.

1395. 則文學彬彬稍進(즉문학빈빈초진),

이로써 한나라는 문학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고

1396. <詩><書>往往間出矣(<시><서>왕왕간출의).

<시(詩)>와 <서(書)>가 세상에 나돌기 시작했다.

1397. 自曹參 盖公言黃老(자조참천개공언황노).

조참은 개공을 무제에게 천거하여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398. 而賈生(이가생),

또한 가생과

1399. 晁錯明申, 商(조착명신, 상),

조착은 신자와 상군의 법가사상을 밝혔다.

1400. 公孫弘以儒顯(공손홍이유현),

공손홍은 유학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고

1401. 百年之間(백년지간),

그 백년 동안의

1402.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천하유문고사미불필집태사공).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날 전적들이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1403.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태사공잉부자상속찬기직.

태사공의 직책에는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계속해서 임명되었다.

1404. 曰: "於戱! (왈 : "어희)

사마천이 말했다. " 아아!

1405. 余維先人嘗掌斯事(여유선인상장사사),

우리들 선조들께서 이 이일을 일찍이 맡아하여

1406. 顯于唐虞(현우당우),

우임금 때 벌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1407. 至于周(지우주),

주조에 이르러

1408. 復典之(복전지),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1409. 故司馬氏世主天官(고사마씨세주천관).

이런 연고로 사마씨는 대를 이어 천관을 맡아하다가

1410. 至于余乎(지우여호),

이윽고 나에게까지 이른 것인가?

1411. 欽念哉!(흠념재)"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12. 罔羅天下放失舊聞(망라천하방실구문),

이미 없어진 구문들을 천하에서 모아서

1413. 王迹所興(왕적소흥),

왕들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흥함의 처음을 찾고

1414. 原始察終(원시찰종),

끝을 살펴서

1415. 見盛觀衰(견성관쇠),

흥망성쇠를 보고자 하였으며

1416. 論考之行事(논고지행사),

그 일의 진행을 사실적으로 고찰하여

1417. 略推三代(략추삼대),

삼대의 일을 간략히 추정하였으며,

1418. 錄秦漢(록진한),

진한시대의 기록에 유추하여

1419. 上記軒轅(상기헌원),

위로는 황제부터 기록하여

1420. 下至于玆(하지우자),

지금의 금상폐하에 이르기까지

1421. 著十二本紀(저십이본기),

모두 12본기를 지은 것은

1422. 旣科條之矣(기과조지의).

모두 조례를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423. 幷時異世(병시지세),

시대가 같기도 하고, 세대가 다르기도 하여

1424. 年差不明(연차불명),

그 연차가 확실하지 않아

1425. 作十表(작십표).

모두 10개의 연표를 만들었다.

1426. 禮樂損益(예악손익),

예와 악은 없어지고 혹은 더하여지기도 하였으며

1427. 律歷改易(율력개이),

율력은 새로 바뀌어 졌다.

1428. 兵權, 山川, 鬼神(병권, 산천, 귀신),

또한 병사와 권모의 일, 지방제도, 제사에 관한 일

1429. 天人之際(천인지제),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1430. 承 通變(승폐통변),

그 폐단을 밝혀 변화에 응하게하고자

1431. 作八書(작팔서).

<서(書)> 팔편을 지었다.

1432. 二十八宿環北辰(이십팔수환북신),

28팔 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있고

1433. 三十輻共一 (삼십복공일곡),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한 개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으나

1434. 運行無窮(운행무궁)

그 운행의 법측은 무궁하듯이

1435. 輔拂股肱之臣配焉(보불고굉지신배언),

왕들을 보필하던 고굉지신들을 이것에 빗대어

1436. 忠信行道(충신행도),

충신들이 도를 행하고

1437. 以奉主上(이봉주상),

그 임금을 받든 사람들에 관하여

1438. 作三十世家(작삼십세가).

세가 30편을 지었다.

1439. 扶義  (부의숙당),

의를 부양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1440. 不令己失時(불령기실시),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1441. 入功名于天下(입공명우천하),

공명을 세상에 세운

1442. 作七十列傳(작칠십열전).

사람들 70명에 대한 열전을 지었다.

1443. 凡百三十篇(범백삼십편),

모두 백삼십편에

1444. 五十二萬六千五百字(오십이만육천오백자),

52만6천5백자로

1445. 爲<太史公書>(위<태사공서>.)

<태사공서>라 이름 짓는다.

1446. 序略以拾遺補藝(서략이습유보예),

이 서문은 개략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수습하여

1447. 成一家之言(성일가지언),

일가의 말을 이루어

1448. 厥協<六經>異傳(궐협<육경>이전),

육경 외에 전하여지는 것을 보충하여

1449. 整齊百家雜語(정제백가잡어),

백가와 잡어를 정리한 것이다.

1450. 藏之名山(장지명산),

정분은 명산에 보관하고

1451. 副在京師(부재경사),

부본은 서울에 두어

1452. 俟后世聖人君子 第七十(의후세성인군자 제칠십)..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것으로 열전 70을 삼는다.

1453. 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한다.

1454. 余述曆黃帝以來至太初而訖(여술력황제이래지태초이흘),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여

1455. 百三十篇(백삼십편)

130편의 역사서를 지었다."

太史公自序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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