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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걸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 또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 및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렸다는 양귀비 등등 중국 4대 미인들의 미모에 얽힌 고사들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1)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西施)


침어(浸魚)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2) 한나라의 왕소군 (王昭君)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3)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폐월(閉月) -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 "달도 내 딸에 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4)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림"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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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녀, 4대 추녀는 누구?

◆ 중국의 4대 미녀란?중국 역사상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옥환(楊玉環)이란 4대 미녀가 있다는 건 동양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들의 영광과 굴욕은 다분히 당시 국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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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어(浸魚)’의 화용(花容), 서시

낙안(落雁)의 전설, 왕소군

폐월(閉月)의 미모, 초선

수화(羞花)의 주인공, 양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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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미인을 표현 하는 대표적인 어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이다.그중에서 각각 "침어(沈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의 대명사 격인4명의 여인을 골랐으니 이들을 일컬어 중국4대미인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식스맨, 아니 화이브우먼이라고 해야하려나....-_-a아무튼 아쉽게 4대미인에서 탈락한 미녀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조비연(趙飛燕)이다.탈락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녀의 특징이 아름다움보다 가벼움에 치우쳤기 때문인 듯 싶다.

 

대신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었고,양귀비[본명: 양옥환(楊玉環)]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였다.

 

또한 흔히 일컬어조비연(趙飛燕)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臨風楊柳)형 미인,
양귀비(楊貴妃)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富貴牡丹)형 미인.
이라 한다.중국의 미녀 왕소군(王昭君)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 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 때 지은 글은 다음과 같다.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왕소군은 흉노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총(靑塚 )"이라 하였다고 한다.

서시 [西施]

 

중국 춘추시대 월국(越國)의 미녀. 효빈(效顰)·방빈(倣顰)이라는 말이 서시의 미모에서 유래했고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나라의 충신 범려가 서시를 오왕 부차에게 바쳐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저라산(苧羅山) 근처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절세미녀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효빈(效顰)·방빈(倣顰)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서시는 평소 속앓이병이 있어 자주 이마를 찡그렸는데 동네 여인들이 미인은 이맛살을 지푸리나 보다 이해하고는 모두 이마를 찌푸렸다고도 한다.

또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范蠡)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후에 서시는 범려와 함께 오호(五湖)로 도피했다고도 하고 또는 강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왕소군(王昭君) - "낙안(落雁)"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서시(西施) - "침어(沈魚)"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초선(貂嬋) - "폐월(閉月)"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

 

양귀비(楊貴妃) - "수화(羞花)"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조비연(趙飛燕) - "작장중무(作掌中舞)"
"가볍기 그지 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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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路難
(三首中 其一)
살아가기 어려워라

-李白

金樽淸酒斗十

금항아리 맑은 술 한 말에 만냥

玉盤珍羞値萬

옥반의 좋은 안주 그 값이 만냥이라.

停杯投筯不能食

잔 멈추고 젓가락 던지며 먹지 못하고 ⋅筯저;젓가락

拔劍四顧心茫

칼 빼어 사방을 둘러봐도 마음은 아득해라.

欲渡黃河氷塞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이 내를 막고 ⋅塞변방새,막을색

將登太行雪暗

태행산 오르자니 눈내려 암울한 하늘.

閑來垂釣碧溪上

한가로이 푸른 시내에 낚싯대 드리우다

忽復乘舟夢日

홀연히 배타고 장안 가는 꿈을 꾼다.

行路難 行路[先韻]

살아가기 어려워라 살아가기 어려워라.

多歧路 今安

갈림길도 많았으니 지금 어디 있는 거냐?

長風破浪會有時

그 큰 뜻 때가 오리니

直挂雲帆濟滄[上聲 賄韻]

높은 돛 바로 달고 창해를 건너리라.

 

*장풍파랑;소년이 大志 품은 것을 비유.

乘風破浪.종각의 희망;願乘長風 破萬里波.

⋅賄회;뇌물.회뢰(賄賂)]

 

[섬서성 화산]









이백 [, 701~762]

중국 최대의 성당 기() 시인. ‘성당()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만고()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시문집은 송 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청대() 왕기()의 《이태백전집()》 등이 있다.

 

자 태백(). 호 청련거사(). 두보()와 함께 ‘이두()’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 룽시현[隴西]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인 촉()나라의 장밍현[]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을 따라서 장난[] ·산둥[] ·산시[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 ·남릉(:) 동로(:)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 ·원단구()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의 부름을 받아 창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 오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調)》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이라 평한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으로 향하여 뤄양[] ·카이펑[]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西)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西] ·허베이[]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현재의 ) ·금릉(:)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祿)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 영왕() 인()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西)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의 친척 이양빙()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하기도 하였으며, 민산()에 숨어 선술()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의 비상()’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까지도 그것을 혼돈화()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와 신선()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이다. 두보의 오언율시()에 대하여, 악부() 칠언절구()를 장기로 한다.

‘성당()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청대() 왕기()의 《이태백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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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치원이 접시꽃을 소외당한 꽃이라니 국화와 모란을 사랑한 중국인들, 중국문화 특히 유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불교의 논리에 맞먹는 논리를 개발한 송대 성리학의 개조 주염계 선생이 생각나네요. 아이러닉한 것은 석가가 개발한, 염화미소(捻華微笑)의 상징물인 연꽃을 사랑한 거지요. 위의 사진은 내집 거실의 바람벽 장식용 그림이다. 하단의 연꽃 사진은 작년도 서대문에 있는 봉원사에서 찍은 것이다.

愛蓮說 (애련설)
주돈이 [周敦頤, 1017~1073]호는 濂溪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晉陶淵明, 獨愛菊,
自李唐來, 世人甚愛牡丹, 予獨愛蓮之出於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妖, 中通外直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翫焉.
予謂 菊花之隱逸者也, 牡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者也.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蓮之愛, 同予者 何人,
牡丹之愛, 宜乎衆矣.
- 『古文眞寶』 -

애련설
주돈이(호 렴계)

물과 뭍의 초목의 꽃에는 사랑할만한 것이 대단히 많다.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홀로 국화(菊花)를 사랑하였고,
이세민의 당나라 이래로(自李唐來) 세상 사람들이 모란(牧丹)을 매우 사랑했으나,
나만은 연꽃(蓮花)이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 잔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며, 속은 통해 있고 밖은 쪽 곧아,
넝쿨지지 아니하고 가지도 없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 깨끗하게 서 있으니,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만만하게 다룰 수 없음을 사랑한다.
나는 국화는 꽃 가운데 은일(隱逸)한 것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富貴)한 것이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君子)라고 말하겠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도연명 이후엔 들은 적이 없고,
연꽃을 사랑함은 나와 같은 이가 몇 사람인가!
모란을 사랑함은 많을 것이 당연하리라.

連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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