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군락[펌]. 무거운 사진기 메고 나도 이런 사진 찍고 시퍼!



[사진2]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의 강남고교 교정의 벚꽃이 꽃구름을 이루었네요.

<그녀는 예뻤다>


어제는 아차산을 산행했다. 145,000볼트 고압선을 지나 용마산에도 올랐다. 나는 정상에서 용마역쪽으로 하산했다. 하산길엔 온통 가파른 바윗길이어서 발에 한참 동안 흙을 묻히지 않았더니 신선이 되는 게 아닌가,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느낌이었다.

웬지 지난 해 봄날 지천으로 피었던 강화도 고려산의 진달래 군락지가 그리워졌다. 그날은 바다안개가 자욱히 차올라 원거리를 조망할 수 없는데다 선명한 화면을 만들겠다고 자동카메라의 서투른 조작이 화근이 되어 그날 찍은 사진이 몽땅 먼 옛날의 추억처럼 아득하고 희미하기만 했다.

새로난 대명포구앞 다리를 빠져나오기 직전에, 길상면 온수리의 강남고등학교의 교정 둘레를 가득 메운 벚꽃 군락을 만난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낭만, 몽환,환상 등 감상적 단어들로 뇌리를 채우게 하는 풍경이었다. 벚꽃나무 띠가 운동장 둘레를 온통 빼곡히 감싸 안았는데, 학교 건물 앞 야트막하게 경사진 언덕에줄지어 서 있는 십여그루남짓한 나무들과 운동장 주위의 십여 그루는 수령이 거의 50년은 넘어 보였다. 검은 나무둥치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하이얀 벚꽃 꽃잎의 무리가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오월 햇살을 받아 화사하게 빛났다.

금년 진달래 축제땐 위의 사진 같은 그림을 몇 장 남기고 싶다.

교정의 환상적 벚꽃도....


진달래 하면 소월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약산 동대지만 나는 본 적이 없으니
유사이래 가장 예뻤던 신라 성덕왕대의 수로 부인을 생각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대잖아요.---


삼국유사의 수로부인(水路夫人)조 강독을 마치고, "이 글의 주제는?" 하고 물으면 별 반응이 없다가 내가“그녀는 예뻤다”고 하면, 학생들은 그제야 감을 잡았는지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린다.

이 글의 핵심어인‘자용절대(姿容絶代)’를 풀이하면

“그녀는 지금껏이 세상에서 젤로 예뻤다.”이다.


이 작품은 글쓰기 구성의 전형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다.

[라]의 <해가(海歌)>는 ‘公從之.’ 다음에, <헌화가>는 “亦作歌詞獻之.” 다음에 위치한 것이어야 하나 삼국유사 작품 전체의 균형에 맞추어 끝으로 뺐다.

불경의 기본구성이 강창(講唱), 곧 형식적으로는 ‘산문+운문’이므로 산문을 요약한 운문은 구성상 맨 뒤에 위치한다. 이러한 구성방식은 고려조 각훈의 <해동고승전>은 물론, 가장 오래된 <梁고승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일연의 인물 찬(讚)도 예외없이 이런 구성을 취하고 있다.


[가]에서는 강릉태수 부임길에 천 길 낭떠러지 위에 핀 철쭉꽃을 수로부인이 갖고 싶어하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암소를 몰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설화에서 "不知何許人"은 대개 세속을 초월하여 신성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지시할 때사용하는 표현이다.---

노인에게 그런 초능력을 발휘하게 한 힘이 무엇일까요?

시인 고 미당 서정주 선생은 이 대목에서 신바람이 나서 본문에도 없는

“다람쥐처럼 기어올랐다.”는 표현을 기워 넣으셨다.


[나] 이틀 뒤 임해정에서 점심 먹는데 느닷없이바다의 용이 수로부인을 납치해 갔다.

한 노인이 화엄경에 나오는 중구삭금(衆口鑠金)의 지혜를 일러주었다.

---삼국유사 <南白月二聖 努肹不得 달달朴朴>조에는 ‘수순중생(隨順衆生

亦菩薩行之一也)이라는 표현도 나온다.누구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요.

성인군자도 시속을 따르는데 누가 감히 민초들의 꿈을 짓밟을 수있나요?---

민초들의 동의를 얻은 태수와 용왕과의 대결에서 용왕은 백기를 들고 수로부인을 지상으로 되돌려 주었다.


[다]

수로부인은 지금껏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당했다.


요약하면,

[가]에서는 노인이 초능력을 발휘하다. 극적 장면의 확대이다.

[나]에서는 이상향인 용궁에도 그런 미인은 없었다.

지상과 용궁의 역동적 줄다리기에서지상의 승리였다.

---지상이 불국토(佛國土,부처님 나라)고 낙원이라 카이!---

 

[다]에서는 그 뒤로도 번번히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당했던 것이다. 흔한 일이어서 굳이 예시가 필요없다.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신들도 못 가진 자용절대(姿容絶代)

水路부인을 인간 세상 사람들은 소유한 거라요.

맞습니다. 지상이 낙원 맞고요.

수로부인과 동시대에 살았던 신라 성덕왕대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잉?

그녀의 몸에서 세상에는 없는 기이한 향기가 풍겼대잖아요.

아래 포스트 <꽃구름 속에>에는 조수미의 탄력있는 목소리에 실려나오네요.

 

조수미 - "꽃구름 속에" /박두진 작사, 이흥렬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NsF-3RrpzFg


[사진] 현지가이드가 중학교 유니온 영어교과서 표지에 나왔던 다리라고 총기를 자랑한

런던의 템즈강 다리를 배경으로 한 방 박았습니다. 큰배가 통과하면 부산 영도다리처럼

다리 한가운데가 갈라져 위로 들린다는군요. 한 관광객이 제일 높은 곳이 들리냐고 물어

한바탕 웃었습니다. 가운데다리 말고요. 맨아래쪽 다리가 들리겠지요. 저 다리에 가운데

다리는 본시없었군요. 해거름에 찍어 너무 어두워 다른 사진 한 장 펌했습니다.

강 반대편에서 찍었군요.

[주]운영자님이 자기 아명이 '실갱이'라고 소개한 데 힘입어 관심있는 다른 독자를 위해,

그리고 꼬리글이 너무 무거워 답글로 이사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명문 호서남 출신들은 '시렁'을 '실강'이라 하는군요.
함창에서는 '살강, 실강, 설강 "을 두루 다 씁니다. 그 왜 있잖아요.

동요 "살강 밑에 다람쥐"라구요.
아니, "살강 밑에 새양쥐"군요.

달강달강 달강달강우리애기 잘도 잔다
서울 가서 산 밤 한되 살강 밑에 묻었더니
머리 감은 새양쥐가들락날락 다까먹고
껍데기만 남았구나.

이런 자장가 들었거나 불렀던 기억 안 나나요?
'살강'의 표준말은 '시렁'입니다.

사전의 풀이를 옮깁니다.

설강 (정지에서 설거지를 한후) [그릇을 엎어 두는곳]을 이르는 경상도 사투리.

시렁 [명사]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사전에서, '토박이 이름과 한자 이름' 에 대한 설명을 옮긴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28896


처음에는 토박이말로 지었던 이름이 한자의 유입과 함께 한자 이름으로 지어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이름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아명(兒名) ·관명(冠名) ·자(字) ·

호(號) ·시호(諡號) 등이 그것이다.

아명은 어린아이 때의 이름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경우 이(珥)는 관명이지만,

아명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꿈에 용을 보았다 하여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 외에도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이 있다.

관명은 장성해서 그 집안의 항렬에 따라 짓는 이름이고, 자는 대체로 혼인한 후에

본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에서는 어른 아닌 사람들이 이 자를 불렀다.

--[편자주]字는 혼인과 상관없이 관례 시에 부여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꼬리글에서 처리한다.
그러나 자는 남자에게만 주어지고 역(役)도 관명도 없는 여자에게는 자가 없다.

편자는 과문하여 여성의 자를 본적이 없다.--

호는 자 이외에 쓰는 아명(雅名)으로 학자 ·문인 ·서화가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이름이었고, 시호는 경상(卿相)이나 유현(儒賢) 등이 죽은 뒤 임금이 그 행적을

칭송하면서 추증하는 이름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중에서 아명 등은 거의 없어지고 관명 ·호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아명은 대체로 무병장수를 염원하면서 천하게 짓는 경향이 있어 개똥이 ·

쇠똥이 ·말똥이 등의 이름도 흔했다. 관명이 ‘熙’였던 고종 황제의 아명이

개똥이였고, 황희(黃喜)의 아명은 도야지(都耶只)였음이 그 사례이다.

아명이 그대로 관명으로 되어 한자로 ‘介東 ·啓東 ·召東 ·蘇同 ·馬銅 ·馬東’으로

되기도 하였다.

--위의 이름은 모두 개똥, 쇠똥, 말똥을 한자로 음사한 것임다--

이상은 사대부 집안 남자의 경우이고, 서민들은 아명으로 평생을 살다 가기도 하였다.

여성의 경우, 특별한 사례 외에는 출가와 함께 아명은 없어지고 대신 택호(宅號)가

따랐다. 이름을 한자로 지을 경우의 성명 3자 가운데에서 선택권은 1자밖에 없다

(외자이름도 있지만).

성과 항렬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남은 1자도 같은 항렬의 동명이인을 피해야 하고

가까운 조상의 이름에 나오는 글자도 피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의 이름은 토박이말이었으나, 한자의 유입과 성(姓)의 보급에

따라 한자식 이름으로 차츰 바뀌어 내려오는 현상은 땅이름의 경우와도 상통한다.

사람의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것은 땅이름이 한자화했던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부터 심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이름에서도

그것이 토박이 이름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신라의 시조왕 ‘赫居世’부터가 그렇다. ‘불거뉘’의 한자 표기이기 때문이다.

또 3대왕 ‘儒理’와 14대왕 ‘儒禮’는 똑같은 ‘누리’의 음사(音寫)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고, 백제의 3대왕 ‘己婁’나 20대왕 ‘蓋鹵’도 같은 토박이말의 다른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상류계급에도 토박이 이름이 있으면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자식 이름을 썼던 듯하다.

박제상(朴堤上)의 경우, 또다른 이름인 ‘毛末’이 그 토박이 이름이었다고 하고,

김유신(金庾信)의 두 누이동생인 보희(寶姬) ·문희(文姬)에게도 ‘阿海’ ‘阿之’와 같은

토박이 이름이 있었음이 이를 말해 준다.

백제왕의 경우도 시조왕 ‘溫祚’로부터 23대 ‘三斤’까지는 토박이 이름의 한자

표기이고, 24대 ‘東城’부터가 한자식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토박이 이름과 한자 이름의 혼재(混在)는 고려시대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이 더 많이 보급되고, 한자식 이름 또한 그에 따라

많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1910년 5월 10일에 완성된 사상 최초의 민적부(民籍簿)에

의할 때, 그때까지 성이 없는 사람의 수가 있는 사람에 비하여 1.3배였으니,

토박이 이름인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까지의 토박이 이름은 주로 하층계급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 토박이 이름의 기준은

① 출산 장소에 따른 것(부엌손 ·마당쇠),

② 간지(干支)나 달 이름에 따른 것(갑돌이 ·정월이),

③ 성격에 따른 것(억척이 ·납작이),

④ 기원을 곁들인 것(딸고만이 ·붙드리),

⑤ 순서에 따른 것(삼돌이 ·막내),

⑥ 복을 비는 천한 것(개똥이 ·돼지),

⑦ 동식물 ·어류 이름에 따른 것(강아지·도미)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 동물 이름이다.

아래의 글에서 옮겼습니다.

http://www.munjung13.com/board/read.php?table=m13sarang&no=2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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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중시조 이전의 족보는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실재 중시조 이상의 혈통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주]족보는 씨쪽의 뿌리이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이고 보면 그 이전의 혈통은 집안에 따라 기록문화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조를 신라 경순왕에 줄을 댄다든가 하는 것은 기억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허구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대개 중시조를 고려조 중기 이후로 정하는데, 거기서부터는 어느 정도 사실성을 인정할 수 있겠다.

사전에서 족보의 ‘연원 및 발간’항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35800

[연원 및 발간〕

족보는 서양에서도 있었다고 하나 동양의 족보와 같은 것이라기보다 대체로 개인의 가계사(家系史)와 같은 것이다. 동양에서 족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족보가 등장하고 있다. 족보의 연원을 살핌에 있어 족보의 편성·간행을 촉진시킨 우리 나라 고유의 사회적 정세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두헌(金斗憲)은 “한국에 있어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현저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계급적 의식과 당파관념이 자못 치열해짐에 따라 문벌의 우열을 명백히 하려고 하였음에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으로는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펀자주]소목질서(昭穆秩序)란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에 모시고, 3세, 5세, 7세는 목에 모신다. ---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시대의 묘지명 등의 사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필사(筆寫)된 계보는 이미 고려시대 이래로 귀족 사이에 작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두번째 족보인 1562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 嘉靖譜≫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1476년 발간의 ≪안동권씨세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조선 초기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족보이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족보는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는데 모든 동족이 같은 시기에 족보를 간행한 것은 아니다. 어떤 종족은 16세기에, 어떤 종족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비로소 족보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사진] 위는 순천 송광사의 손질이 마악 끝난정갈한 뒷뜰. 접시꽃도 좋아라 반기네요.

아래는 팝아트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팝아트는 만화의 한 장면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된 '행복한 눈물' 보다 더 잘 그린 만화는

우리나라 만화 중에도 많다. 그럼에도 이 만화 한 장으로 온 나라가 몇 달째 시끄럽다."

http://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77393&section=section4

에서 인용함.

노천명,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여자에겐 본시 이름이 없었다

[주]<자[字] 호[號] 시호[諡號] 에 대하여 >의 꼬리글 주석을 달다가 대입을 준비하면서
읽은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라는 작품이 생각나서 나의 교양국어 강의노트
일부분을 소개한다.

1896년 9월 1일 칙령 61호로 '호구조사규칙'을, 같은 해 9월 3일 내부령(內部令) 8호로

'호구조사세칙'을 공포했다고 하니, 그 이전에 태어났다면 시에서 표출한 무명의 욕망도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그 꼬리글 주석은 아래와 같다.

1909년 이전에는 여자에겐 대체로 기록된 이름인 관명(관명)이 없었다. 굳이 이름이라고
한다면 어릴 적 부르던 아명이 있었다. 아명이란 토박이말이어서 보통명사이거나 이에 가까워
유사한 이름이 많아 고유명사라 하기엔 부족하다. 김유신(金庾信)의 두 누이동생인 보희(寶姬) ·
문희(文姬)에게도 ‘阿海’ ‘阿之’와 같은 토박이 이름이 있었다고 하나, "아해'든 '아지'든
'아이'를 뜻하는 말이고 보면 다른 집 아이도 그 집안에서는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기록해 보았자 고유명사로서의 기능은 없다고 보면 된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한국의 성씨는 274개로 기록되었는데, 족보를 가진 집안도
상당수에 달하지만, 족보를 들여다보면 여성의 실명기록은 1909년 이후로 보면 된다.
물론 개화기 지식인들은 그 이전에도 딸아이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여성의 경우,
특별한 사례 외에는 친정에서는 출가와 함께 남편의 성씨 뒤에 '--실'을 붙여 아명조차 없어지고
시가에서는 고향마을 이름에다 '--댁'을 붙여 택호(宅號)로 불리웠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일부 양반계층 중에는 남정네들처럼 당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자연, 노비 신분이거나 설화의 주인공이 아니면 여성의 이름이 기록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909년 3월 법률 6호로 민적법(民籍法)이 공포됨으로써 여성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10년 5월 10일에 완성된 사상 최초의 민적부(民籍簿)에 의거하면,
그때까지 성이 없는 사람의 수가 있는 사람에 비하여 1.3배나 되었다고 하니, 여자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은 아예 성명 없이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나 보다..

그 이유를 나는 여성에게는 사회적 역할이나 역[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시의 선구자; 노천명


노천명(盧天命,1912-1957)

황해도 출생. 이화여전.

본명 기선. 병마에 시달려 天命으로 바꿈.

불우한 일생. 자전적 문학- 서정시의 기본.

작품 <사슴>은 처녀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에 수록된 초기 시작품.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

여성적 지적 시풍으로 생의 고뇌와 현실의 차가움을 주로 노래한 시인.


독신으로 지낸 건 짝사랑한 유부남 때문임.

(아래 기록을 보면 노천명의 처절한 사랑이 짐작될 겁니다.)

<사슴>에서도 情人(애인) 기다림.

애인은 유부남. 보성고보. 노동경제학 전공자.

노천명이 연극에 참여했는데 관객으로 와서 만나기 시작.

친일 훼절- “조선의 딸들이여”- 정신대 권장.

해방 후 연인 월북. 6.25때 도강 안하고 애인 기다림.

애인은 고위층으로 서울에 내려옴. 사회과학원 원사.

전쟁이 끝나고 20년 징역형 받음.

김광섭의 구명운동으로 전국교도소 돌며 친공 친일 참회.

[참고] 시집 《사슴》(1936)은 백석의 시집.


1.자전적 문학세계

- 사회 역사의식 부족

“댓돌 밑에 우는 귀뚜라미처럼 나는 그대를 기다린다.”

2.민속연희 풍물시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3.현실적 수난과 고통 <면회>

옥중시. “언니 앞에 머리를 숙이다”

4.평범한 여인의 행복론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현실도피, 패배의식. 이름 때문에 수난.

절망적 몸부림 통해 찾은 평등의식

[결론] 여성시를 개척한 선구자


<사슴 >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 하겠오.

(1938)



김종찬, 당신도 울고 있네요.
http://blog.daum.net/cc1024/13896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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