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벚꽃이 지니 연산홍과 산아가위꽃[과꽃]이 세상을 밝히네요.

꿈도 일회성(一回性)인가?

나는 동일한 이미지의 꿈을 꾼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꿈도 우리네 인생처럼 일회성인가?

흔히 인생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명제는 우리의 경험세계를 제공하는

현실이 일회성을 지니기 때문에 재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한다. 우리의 삶에 시간과

공간 개념을 대입해 보면 인생은 일회성이 확실하다.

그 화사하던 벚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비에 떨어지고 바람에 쓸려갔는가? 돌이켜 생각

해보면 비바람이 아니더라도 벚꽃잎들은 가시적 세계에서 사라질 운명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것은 벚꽃잎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모든 존재의 숙명이기도 하다.


다시 봄이 오면 벚꽃은 다시 그 화사함을 자랑하겠지만 그것은 이미 금년의 벚꽃잎은 아니고

지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존재로서의 벚꽃이다. 그것이 존재의 일회성이다.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고도 말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에겐 엄연한 현실이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또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자주 원용하곤 했다.
삼국유사에는 조신의 꿈 애기가 있는데 춘원 이광수 선생은 이를 확대부연하여 <꿈>이라는

소설을 지었다.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과제물로 <조신설화>의 한문 원문을 적고 번역문을

달아 제출하게 한다. 현상 외에 본질은 있는 것인지,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한 번쯤 생각케

하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호접몽(胡蝶夢)’의 출처는 아래와 같다.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1)栩栩(후후):기뻐하는 모양, 황홀한 모양. 2)蘧蘧(거거):놀라 깨닫는 모양, 마음 든든한 모양.

3)物化(물화):사물의 변화, 곧 만물의 끝없는 流轉.


(엣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그는 훨훨 나는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마음대로 날아다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조금 후 문득 깨어보니 자신은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건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건지 알지 못하겠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물화라고 한다.)


내가 즐겨하는 장자의 말 중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함축적으로 극명하게 표현한 다음

진술도 절창에 속한다.

오리다리가 비록 짧으나 이으면 근심이요 학의 다리가 비록 기나 끊으면 섧다.

--≪莊子≫--

이것은 내가 생긴 대로 사는 게 몸에는 가장 좋다는 주장을 할 때 원용하는 말이다.


배우, 탈렌트, 모델 등은 상품이다. 그들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를 버리고

미의 눈높이에 맞추어 자기몸을 만들어간다. 말하자면 이미 그네들은 생활인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도 일반 아이들이 그들을 기준으로 자기 모습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데에 문제의

단초가 있다. 오리는 오리다리로, 학은 학의 다리로 살아야 제격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예쁜 아이들이 성형 생각에 골목하는가 말이다.


건강이 먼저고, 다이어트는 2차적 문제이다.


20세 전후의 나이에는 육체적으로 종족 보존의, 다윈의 법칙에 따라 생기발랄하여 어느

여성이나 할 것없이 눈길만 주면 사내들이 따라온다. 모든 동물들이 짝짓기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봄을 빙자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생리적 변화에

따른 동물적, 생태적 본능에 속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콩깍지니 명태껍질이니 하는 말은 실상 페파민인가 하는 물질이 뇌 속에 생성되어

모든 걸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 관대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인데, 그게 동물적 본능의

다른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육신은 생태적으로 그렇게 창조되었다.

미래의 가능성, 잠재력까지 포함한, 자신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 -유가들은 이를 仁이라고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佛性이라고 한다-을 신장하고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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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 러시아 소녀는 해맑은 피부에 분홍 셔츠까지 입혀 내 눈에는 석모도 제일의 진달래꽃으로 비쳤다. 갈매기의 환대도 가관이었고, 보문사 사진은 내가 보문사에 가면 매양 사진 짝는 그림 풍경이다. 아래 사진은 여름에 찍은 그림이다.

뜨락에 핀, 장미를 닮은 동백꽃을 한 컷 추가했다. 동백꽃의 빈틈없는 꽃잎의 조화와 분배도 이 러시아 소녀의 완벽한 이목구비의 볼륨과 배치를 당해내지 못했다. 보문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왼쪽 계곡의 소나무숲도 장관이었다.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 근처에서나 만날 수 있는 솔향기여, 솔바람이여!

<석모도 진달래꽃>


Seoul International Hiker's Club 회원 30명과 석모도 해명산, 낙가산 트래킹에 나섰다.
회원들은 한국땅에서 밥벌어 먹고 사는 외국인들인데.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멤버 중에는 한국외대에서 스칸디아어(?)를 가르치는 중년의 스웨덴 아줌마, 서강대 교단에 서는, 외모가 인도인처럼 보이는 카나다인 가족, 그집 딸내미는 12 살이라고 했는데, 내가 초등학교인가 물었더니 미들스쿨이라고 답했다.
그 외에도 보문사에서 얘기를 나눈 스코틀랜드 아가씨는 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러시아인 가족. 포도를 걸을 때는 꼬맹이 딸을 목말 태우기도 했는데, 딸아이는 목말에 숙달이 된 듯, 동행한 러시아인이 아이의 팔을 잡고 위로 올리니 자동으로 중년 사내의 머리 위로 다리를 오무려 내려왔다.


그리고, 저번 금단산 산행에서 만났던 신디. 지난 번엔 오리건주인가 미국 같은 주에 사는 남자 친구와 동행했었는데 그는 지방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못 왓다고 했다. 신디는 강남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데 28세의 거구이지만 친밀감이 가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원기 왕성하여 네 시간이 넘는 산행 중에도 계속 영어를 쏟아냈다. 아무래도 그 파워펄한 에너지는 든든한 몸집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회원들은 고정멤버가 아니라 홈피의 공고를 보고 매주 토요일 모이는 사람들인지라 출신 국가나 연령층이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스스럼없이 만나서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신촌역 7번 출구에서 모여 시외버스로 강화도 외포리까지 이동, 거기서 석모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다. 말이 승선이지 승선 거리는 1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었다. 배의 갑판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동자로 가득차 있어 차량 사이를 비집고 객실로 이동했다. 객실은 비워둔 채 승객들은 대부분 뱃가에 붙어서서 갈매기와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


꼬마들이이나 연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새우깡을 갈매기가 입으로 나꿔채 가는 바람에 바로 눈앞을 스쳐가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갈매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향행 날아오는 갈매기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비행 속도가 빨라 갈매기의 꼬리나 머리가 잘려나가기 일수였다.
크게 소리지르며 날아드는 갈매기떼는 정말 장관이었다. 갈매기는 배의 스크루프로펠러[screw propeller]가 바다 물속을 갈아엎는 바람에 물고기가 올라오는지 갈매기떼는 소리를 내지르며 스크루가 일으키는 포말 줄기로 모여들기도 했다.

한 칸자리 콘세트 안의 버스 매표원 할아버지는 7분이면 등산로 입구에 내려 준댔지만 여자 코디 박선생은 논길을 걷자는 제안을 선택했다. 해안을 바라보고 봄바람을 맞으며 들길을 걷는 운치도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정겨움이었다. 4월의 훈풍이 폐부에 쌓인 오염된 공기를 바닷바람, 산바람, 들바람으로 교체할 요량으로 심호흡도 해 보았다. 들길에서 중학동기 병근님은 더 전진하자고 했지만 내가 마을로 들어가자고 우겨 30분 중 절반 이상은 포장도로를 걸어서 이동했다.

해명산 등산로 입구에서 네시간 반에 걸친 등산이 시작되었다. 한길가 해명산 등산로 진입로에서부터 정상을 거쳐 낙가산 보문사로 하산, 4시간 반이 넘는 등산로는 평지 흙길이 많아 걷기에 그만이었다.
고려산 같은 진달래꽃밭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기대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런 꽃밭은 없었다. 무더기로 핀
진달래꽃을 만나면 나는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이 4시간 반이 넘는 산행길에 글쎄 6살이 될까말까한 이 러시아 소녀가 완주했다. 이 러시아 소녀는 해맑은 피부에 분홍 셔츠까지 입혀 내 눈에는 석모도 제일의 진달래꽃으로 비쳤다.
또래의 캐나다에서 온 소녀도 물론 완주했다.

눈 아래 서해안뻘을 내려다보며 이젠 완연한 봄바람을 호흡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길을 잘못 들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으나 코디 박선생은 천하태평이었다. 실제로 보문사쪽길이 안 보여 잠시 옆길로 새기도 했었다. 누가 잡은 코스인가 물었더니, 아니 글쎄 그녀는 차랑으로 한 번 와 봤는데 “강화도인데요, 뭐”하고 웃어넘겼다. 내 귀에는 길을 잃어봤자 강화도 안이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앞장서 걸으며 가끔 카메라 탐스런 진달래꽃 더미를 만나면 샷터를 눌러대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는졸지에 아무도 인정 안하는 산행 가이드를 자청한 꼴이 되었다. 보문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일행보다 10분 내지 20분 거리는 앞서가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천하태평의 느긋한 코디 때문에 보문사가 나타나기까지 조바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병근이는 같이 가지 왜 혼자 앞질러가냐고 몇 번이나 소리치더니 나중에는 그 일로 왜 혼자 다니냐고 신경질까지 부렸다. 나는 가이드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드디어 보문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산마루 너럭 바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한껏 안도감을 즐겼다. 보문사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70도는 되었으나 거기를 벗어나면 편안한 산길로 변했다. 길 양켠으로 군데군데 진달래밭이 풍성했으나 카메라로 포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카메라에 포착되는 건 시야에 들어온 것과 영 딴판으로 볼품 없었다.사찰 경내에 도착하여 보문사에 가면 매양 사진 찍는 사찰 풍경도 추가했다. 향나무 뒤의 석굴암자, 산중턱의 마애불쪽을 향해 샷터를 몇 방 눌렀다.


나는 영어를 할 줄 모르니, "Where from?" "what is your occupation ?" 잘 못 알아들으면 'Your job?"하고 묻거나 "Whom from do you learn Korean language?" 구문이 잘못된 듯하여, "Who teach you Korean language?"하고 묻는 게 내 질문의 전부였다. 그리고 자기 나라를 말하면 "Oh, very beautiful country." 하거나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는"Oh yes,"가 고작이었다. 그리곤 꿀먹은 벙어리였다.
말하자면 그이후론 부모 때려죽인 원수처럼 눈길을 외면한 채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보문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왼쪽 계곡의 소나무숲도 장관이었다.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 근처에서나 만날 수 있는 솔향기여, 솔바람이여!

그런데 코디의 느긋함은 저녁식사 후 돌변했다. 포구로 나오는 버스가 끊어져 포구쪽에 전화로 불렀다. 그나마 30명의 승객이 있어 버스를 보내주었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지만 거기가 섬이라는 걸 아무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섬이란 이름을 무시하다가 당한, 당해도 싼 봉변이었다.


8시 가까이 되니 석모도 포구의 밤의 바닷바람이 냉기를 끼쳐 배낭 속의 겨울 조끼도 꺼내입었지만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바다 건너 눈앞의 외포리 포구쪽에는 불빛이 아름다웠지만 배는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관리인 말로는 8시반, 9시 배가 있다고 했다.

통화를 한 아내는 버스가 끊겼다는 나의 답변을 듣고는 강화도로 차를 가져갈까 물어왔다. 싱거운 병근님은 핸드폰에 대고 자고 갈거라고 외쳤다.

결국 강화섬 외포리로 건너긴 했으나 강화읍에 나가는 버스가 없어 박선생은 또 전화를 해대며 동동걸음을 쳤다. 강화읍에 나오니 신촌행 버스는 9시반, 10시편이 있었다. 두 번째의 안도감이 피로를 몰고와 잠을 퍼부었다. 신촌서 전철로 바꿔타고 11시가 지나 귀가했다.

내일 춘천 삼악산 가는 중학동기들의 산행이 잡혀 있었지만 새벽 1시반을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9시 뉴스를 보며 잠자리에 드는 나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이른 기상시각에 해당하는 시각이었다.

봄꽃 화원 & 꽃다발을 가슴 가득 앵겨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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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무수한 쇳조각의 결정체인 에펠탑 아래에서 찍음. '07.10.18.그날은 구름도 예술이었습니다. <사진1>에서 사실 철탑은 배경이고 포커스를 맞춘 건 구름이었습니다. 쌀쌀맞은 날씨때문에 구름은 더욱 선명해 보였습니다. 맨아래 사진은 2000년 밀레니엄 기념사업으로 세운 런던 템즈강변의높이 135미터의 관람차 London Eye.[펌]

[주]사업을 하는 중학동기가 "Times"지를 주머니에 꽂고 다니기에 존경한다는 글을 적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를 주선했던, 마케팅을 하는한 친구는매일 "BusinessWeek"를 읽고"CNN"을 보고있음을 고백해 왔다. 나는 이 친구에게 이 자리를 빌어 ‘존경한다’는 말을 남긴다. 자신에게 새로운 지식의 물꼬를 열어둔다는 것은 세상에서 젤로 아름답다. 꼬리글의 내용을 부연하여 적어보았다.


개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의 용량을 얼마나 될까?

헤아릴 수 없는 수를 표현할 때 인도인들은 항하사수(恒河沙數)를 언급하지만, 항하사 자체가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의 모래밭을 의미하니, 다만 헤아릴 수 없을 뿐이지 무수한 것은 아니다.

지구가 소속된 태양계를 포함한 은하계가 우주 공간에는 수없이 많다고 한다. 대단한 명상가들인 인도 사람들은 3천 개의 大天세계인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 말했다.

하긴 한자문화권에서도33천(天) 28수(宿)라 하였다. 33과 3,000이라. 확실히 무량의 수를 생각하는 사람들과 황하유역 사람들은 생각의 스케일이 다르다. 그런데 33천 28수도 불교문화의 유산이다. 종루나 범종의 타종회수가 모두 여기에서 유래한다. 제야의 종도 33회를 치지 않는가? 새날이 밝고, 새해가 오고, 새 세상이 열리는 것을 경축함이지요.

천당이나 극락은 어느 별에, 아님 어느 은하계에 있을까?

나는 일단 인간에 대한 사마천의 아래의 해석을 믿는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70 ‘태사공 자서’에 나오는 말이다,


凡人所生者神也 所託者形也. 神大用則竭하고 形大勞則敝 .

범인소생자신야 소탁자형야 신대용즉갈 형대로즉폐

形神離則死. 死者不可復生하고 離者不可復反 故聖人重之.

형신리즉사 사자불가부생 리자불가불반 고성인중지


由是觀之컨대 神者生之本也요 形者生之具也. 不先定其神[形]하고서

유시관지 신자생지본야 형자생지구야 불선정기신[형]

而曰「我有以治天下.」라 하면 何由哉?

이왈 아유이치천하 하유재


무릇 사람이란 살아 있는 것은 정신이고,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육신이다.

정신은 크게 쓰면 고갈되고, 육신은 크게 쓰면 무너진다.

육신과 정신이 분리되면 죽는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분리된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을 중히 여긴다.

이로써 보건대, 정신은 생명의 근본이고 육신은 생명의 도구이다.

먼저 그 정신[육신]을 정하지 않고서 「내가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무엇을 말미암을 것인가?


사마천은 전한 시대 사람인데 어떻게 정신과 육체를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정리했을까요?

과연 춘추시대를 지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제자백가 시대인 전국시대를 거친지라

인생에 대한 지혜가 많이 축적되었나 보다. 사마천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현실론자

였나 보다.


지식이란 자기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 게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표준시간 측정은 세종 19년(1437)때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에서 비롯되었고, 그 시기에 현주일구, 천평일구(휴대용)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날씨가 흐리면 해시계는 쓸모가 없으므로 태조7년(1398)에는물시계인 경루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은 철탑인 에펠탑 [Eiffel Tower] 은 파리에 세계인에게 자랑할 만한 구경거리가 없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약 300m의 이 탑은 프랑스의 교량기술자 A.G.에펠( 1832.12.15. - 1923,12.28.)이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보바리 부인>을 쓴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1850.8.5-1893.7.6)

얘기인데, 그는 건물들 자체가 예술인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 그런 흉물스런 철탑을 세우는데 극단적인 반대파였다고 한다.

그런데 박람회가 끝나고 나서 그의 태도는 표변했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그 탑의 식당만

이용했다고 한다.

런던 시내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2000년에 템즈강변에 런던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놀이동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에다 의자를 매달아 관광객을 받고 있다. London Eye라고 케이블카처럼 조망이 가능한, 30개가 넘는 차가 매달렸는데, 한차 안에 25명이 들어간다고 한다.---

파리 시내는 전체가 바다 같은 대평원이어서 이전에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몽마르뜨 언덕이래야 동네 동산 높이도 되지 않으니, 그가 에펠탑에 오른 건 세느강을 길이대로 볼 수 있는 등 순전히 조망권 확보 차원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 친구가 그의 이중성을 비아냥거리자 모파상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 놈의 탑이 너무 높아 시내 어느 식당에서도 보인단 말이야. 이 탑이 보이지 않는 곳은 이곳밖에 없거던,”

---만해 선생이 생각나는군요. 북한산 기슭의 ‘심우장’ 말인데요. 산정을 향해 집을 앉혔잖아요.

별꼴이라고 꼬집자 만해 선생은 한 마디 명언을 남겼잖아요.

“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어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그 건물 부수고 지붕 꼭대기만 잘라다 독립기념관 마당에 갖다 놓은 걸

아시면 아마 좋아서 지하에서도 벌떡 일어나실 것 같군요.---

그래서 에펠탑 가까운 곳에 있는 모파상 동상은 에펠탑을 등지고 앉았다 한다.
아, 파리장(parisian)들의 유머여, 재치여!

---개성이 살아야 문화가 빛난다 카이---

두 천재가 동시대에 산다는 건 어쨌든 유쾌, 상쾌, 통쾌한 일입니다요.

살아 숨쉬는 지식은 "日日新 又日新"할 때 가능함을 믿습니다.



[주1]

사마천 (BC145~BC86)

BC 108년 태사령 임명

BC 104년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

BC 99년 이릉의 패전을 합리화하는 발언하다가 궁형(宮刑) 당함.

BC 95년 중서령(中書令) 임명

BC 90년 사기(史記) 완성. 부명(父命)에 따른 수성(守成)의 업적임.



[주2]

<28수>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202&eid=LDOnoghgWzX2YsywN4K4H4mtJYquU8Ps&qb=Mji89g==

동방 창룡(蒼龍) 7수(宿)-30성(星)

북방 현무(玄武) 7수-25星

서방 백호(白虎) 7수-47星

남방 주작(朱雀) 7수-59星


<33천>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0302&eid=474iYg1Rxf8C9m6J1iI95tuGddtH+TdI&qb=MzPDtQ==

3界-천상계 28天

[욕게-6天, 색계-18天, 무색계-4天]

6道-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

---불교의 육도윤회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개인이 쌓은 업(業,까르마)에 따라 위
6가지 세계 중 한 세계에 다시 태어나 육신을 다시 얻는다는 거지요, 정각(正覺)을 얻어

부처가 되기까지 6도윤회는 계속된다고 합니다.---

33天이란- 천상계 28天 + 욕계천과 별도의 5天, 곧 인간, 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


<인경과 바라>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OFr5F+r4oGYDT5pb45k9A8hgjO1BW2UG&qb=MzPDtQ==

보신각 종루에서 28수 33천에 따라 타종함

초경에는 28회 인경(人定)-통금

오경에는 33회 바라(罷漏)-통금 해제

나와 동명의 국악작곡가의 <상주모심기> 노래입니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내 고향도 상주 함창인데.....

http://kr.blog.yahoo.com/tjs5899/26206


<어디로 갈까나>

http://blog.daum.net/m2025/15945058

아래의 창에런던아이 [London Eye] 에 대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827506

커다란 자전거바퀴 모양을 한 회전 관람차이다. 높이 135m로순수 관람용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바퀴에 32개의 관람용 캡슐이 설치되어 있고 바퀴가 회전하면서 다양한 방향에서 런던 시내를 관람할 수 있다. 1개의 캡슐에는 총 25명이 탑승 가능하고 한 바퀴 회전하는 데 약 30분이 소요된다. 런던아이를 중심으로 반경 40㎞ 이내의 도시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 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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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로마 시내 관광지인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입구 정문.

중앙사진의 외부 자국은 2차세계대전시의 총탄 자국./ 아래는 콜로세움 내부[펌]

[주]중학 동기의 “제대로 못배웠”다는 발언에 충격을 받아 써 보았습니다.
아래 꼬리글이 못 미더워 조금 길게 썼습니다.

"제대로 못배웠"다는 것은 자조적 표현입니다. 남에게도 유쾌한 말은 아니지만
자신에게도 득될 게 없지요. 배움은 공공교육기관에서만 주는 것도 아니고 또
그곳에서 개인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지요. 필요에 의해서
개인이 습득한다는 말이 올바른 표현이 되겠군요. 인생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큰 깨달음은 개인 각자의 몫입니다.

석가모니는 설산에서, 예수는 광야에서 독각(獨覺)했잖아요.

단언컨대, 인생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결국 인생은 아무도 가르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동기님의 표현에 충격을 받아

'학문의 바다'라는 글을 올립니다. 모조록 이글이 판단의 오류를 수정하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지식의 습득도 삶의 일환으로 이와 마찬가지인데, 필요하면 공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부한 얘기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나요?
대학생활의 첫 관문으로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게 있는데, 나는 촌놈이어서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따랐습니다. 도회의 아이들은 그 시간에 극장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소수의 아이들과 중강당 청중석에 앉아 있었지요.

그날 첫 연사는 불교학자 홍정식 교수로 기억합니다.
그는 학해(學海)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의 바다, 지식의 바다, 학문의 바다는 넓고 넓어서 한 개인이 기여하는 활동이란
항하사(恒河沙) 모래밭에서 조약돌 하나를 찾아 학문의 세계로 옮기는 작업이라 했습니다.
내가 과장해서 보충해 보면 수미산 같은 탑이 학문의 세계라면 학자 개인의 역할이란
그 탑에 벽돌 한 장 얹는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뭐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요즘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고 있는 국무위원 후보지명자의 논문 말인데요.
논문은 독창성과 참신성을 요구하는데 어떤 종교의 경전에도 있잖아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공자님도 논어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했는데,
그 의미는, 내가 한 말들은 기존의 가치 있는 진술들을 부연한 것이지 내가 독창적으로

창조한 것은 없다, 뭐 그런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비난받는 후보지명자를 옹호할 의도로

한 말은 아님을 밝힙니다.

학생들에게 힘 안 들이고 논문 작성법은 설명하지만, 실제로 논문의 참신성과 독창성을

확보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요즈음은 도토리 키재기의

논문들을 게재된 학술지의 등급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거던요. 미국식 논문평가법을

받아들여 계량화하는거죠.

실험 결과를 정리한 자연과학 논문이야 시비가 명료하겠지만, 철학 부근의 인문과학쪽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활동의 결과물을 저울 위에 얹어 놓고 질량의 계산과 평가를

기다리는 수모를 당하고 삽니다. 논문의 질량은 그 글을 쓴 본인자신이 가장 잘 알 텐데

말이죠. 뭐, 객관화시켜야 한다나요?

불교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음을 표현할 때 ‘항하사 [恒河沙]’라 합니다.
항하의 모래라는 뜻이지요. 이를 항하사수(恒河沙數)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알아야 할 지식도 많고 대인관계에서 지켜야 할 덕목도 많지만

그런 걸 충족시키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그런 것들이 황하사수처럼 많아서 성인군자가

아니면 그런 걸 실천하는 인격체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공공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체계적 지식을 전달 학습하는 행위에 그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격에 대해서는 말뿐이지 실제로 가르치고 평가하는 곳은 없다고 봅니다.

항하(恒河)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하지요.

‘항하는 복덕이 있는 강으로 이곳에 몸을 씻게 되면 죄와 허물이 모두 없어진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항하는 물론 항하사도 신성시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인들의 장례풍속을 보면 황하 백사장에서 장작불에 화장하고 그 유해를 항하에 뿌리는
것을 사진에서 보게 됩니다. 위생적으로는 불결하겠지만 그 물에 몸도 씻고, 그 물을 아무
거리낌없이 마시기도 하잖아요. 그야말로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를 실천하는 분들이죠.

일반상대성이론을 정리하여 블랙홀 이론의 근거를 제공한 A.아인슈타인이나 ‘블랙홀은 검은
것이 아니라 빛보다 빠른 속도의 입자를 방출하며 뜨거운 물체처럼 빛을 발한다’는 학설을
내놓았으며, ‘특이점 정리’ ‘블랙홀 증발’ ‘양자우주론’ 등 현대물리학에 3개의 혁명적
이론을 제시하였고, ‘양자중력론’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영국의 우주물리학자 호킹
[Stephen William Hawking, 1942.1.8~] 박사 같은 분들이야 벽돌몇백 장 도 더 쌓은 공적이
있으시겠지만, 사실 나는 벽돌 반의 반 장도 버거움을 고백합니다. 그때는 설마, 하고 그 말을
비웃었는데 말입니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마지막 연이 생각나네요.

(전략)

바람이 분다, 나도 한 번 살아봐야겠다.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가 다시 닫고,
포말로부서진 파도는 바위에 부딪쳐 용솟음치고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아!
부숴라 파도여, 부숴 버려라 네 희열의 물살로
삼각돛배들 모이 쪼던 저 고요한 지붕을!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전문의 원문과 번역을 소개한 사이트입니다

http://blog.naver.com/gene_kim?Redirect=Log&logNo=120013296811


아래 창에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가 있네요.
http://blog.naver.com/wisophia?Redirect=Log&logNo=80043829271

아래 창에는 베이컨의 유명한 학문론이 있네요.

http://blog.paran.com/perfume1/2531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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