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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 망여산폭포1

여산폭포 바라보며서쪽 길로 향로봉 오르니남쪽에 커다란 폭포가 있네.떨어지는 물줄기 삼백 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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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망려산폭포()〉 其一

西登香爐峰 
서등향로봉, 서쪽 길로 향로봉 오르니 

南見瀑布水
 남견폭포수, 남쪽에 커다란 폭포가 있네.

掛流三百丈 
괘류삼백장, 떨어지는 물줄기 삼백 장이라.

噴壑數十里 
분학수십리, 수십리 골짜기 온통 물보라.

 


欻如飛電來 
훌여비전래, 느닷없이 번갯불 치는 것 같고 

隱若白虹起
 은약백홍기, 흰 무리 숨어있다 일어난 것 같네.

初驚河漢落 
초경하한락, 처음에는 은하수 떨어졌나 놀랐는데

半洒雲天裡 
반쇄운천리, 절반은 구름 속에 숨은 것 같네.



仰觀勢轉雄 
앙관세전웅, 올려다 볼수록 생긴 모습 장하니

壯哉造化功 
장재조화공, 이야말로 신령스러운 조화로구나.

海風吹不斷 
해풍취불단, 세상 끝에서 부는 바람 그침이 없고

江月照還空 
강월조환공, 강에 든 달빛은 하늘 비치네.

 


空中亂潀射 
공중란종사, 공중에서 어지러이 튀는 물줄기

左右洗青壁 
좌우세청벽, 양쪽에 이끼 낀 벽 씻어내리네.

飛珠散輕霞 
비주산경하, 흩어진 물방울 무지개되고 

流沫沸穹石
류말비궁석.
흘러내린 물보라 바위에서 솟구친다. 

 


而我樂名山 
이아악명산, 나는 본래 이름난 산 즐기는 사람.

對之心益閑
대지심익한, 
그것들 보고나니 마음 더 넒어지네.


無論漱瓊液 
무론수경액, 신선들 마시는 물 무슨 필요 있을까.

且得洗塵顏 
차득세진안, 이 물로 세상의 때 씻어버렸는데,

且諧宿所好 
차해숙소호, 이야말로 내가 오래 바라왔던 것

永願辭人間 
영원사인간,
속세떠나 이곳에서 오래 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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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시]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수 2수 중 제2수) - 李白(이백)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 <望廬山瀑布水二首 중 제2수>  李白(이백)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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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망려산폭포()〉 其二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해가 향로봉을 비추니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고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멀리 폭포를 바라보니, 긴 강이 걸려 있네.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하늘 높이 솟구쳤다 직하강하는 폭포 높이 삼천 척이니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락구천) :은하수가 구만리 아득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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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廬山瀑布 二首(망려산폭포) - 이백(李白)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비류직하삼천척

作者简介 李白(701~762),字太白, 号青莲居士。 역사 기록은 이백李白이 당의 서역 영토였던 안서 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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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廬山高(여산고:여산의 높음을 읊다) - 歐陽修(구양수)

 古文眞寶 前集 제7권 長短句 181.廬山高(여산고) - 歐陽修(구양수) <여산의 높음을 읊다> 廬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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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眞寶 前集 7 長短句

181.廬山高(여산고)/ <여산의 높음을 읊다>

ㅡ 歐陽修(구양수)

 

廬山高贈同年劉中允歸南康

<여산고를 지어 동년 유응지가 남강으로 돌아갈 때에 주다>

廬山高哉幾千仞兮)
(여산고재기천인혜, 여산(廬山)의 높음이여! 몇 천길이나 되는가

根盤幾百里
(근반기백리)산기슭은 몇 백리에 서려 있어

長江西來走其下
(장강서래주기하) 장강이 서쪽에서 흘러 그 아래로 달려오니 

是爲揚瀾左里兮
(시위양란좌리혜)이것이 물결 일렁거리는 좌리호(左里湖)가 되어

洪濤巨浪日夕相舂撞
(홍도거랑일석상용당)
큰 파도와 물결 밤낮으로 서로 부딪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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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廬山(여산) :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명산으로 경관이 빼어나고 폭포가 유명하다. 이덕홍(李德弘)艮齋集(간재집) 속집(續集) 4권에 여산(廬山)은 강동도(江東道) 남강군(南江軍) 북쪽에 있는데, 큰 강(양자강)이 그 서쪽을 경유하고 팽려호(彭蠡湖)가 그 동남쪽에 있으며, 예장(豫章)과 심양(潯陽)은 모두 그 옆에 있다.” 하였다.

 左里(좌리) : 호수 이름으로, 혹은 左蠡(좌려)라고도 한다. 그 곁에 좌려산(左蠡山)이 있는데 팽려산(彭蠡湖) 왼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아래가 좌리(左里)이다.

 相舂撞(상용당) : 서로 부딪친다. () : 찧을용, () : 칠당

  

雲消風止水鏡淨

(운소풍지수경정)구름 사라지고 바람 멈추자 물결 거울처럼 깨끗한데

泊舟登岸而遠望兮

(박주등안이원망혜)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上摩青蒼以晻靄
(상마청장이엄애)위로는 푸른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下壓后土之鴻龐
(하암후토지홍방)아래로는 대지를 넓고 커다랗게 누르고 있누나.

試往造乎其間兮
(시왕조호기간혜)시험 삼아 그 사이를 가보려
攀緣石磴窺空谾
(반연석등규공곡)

바위 부여잡고 올라가 빈 골짝 엿보았네.

千岩萬壑響松檜

(천암만학향송회)천 바위와 만 골짜기에 소나무와 전나무 소리 들리고

懸崖巨石飛流淙
(현애거석비류종)공중에 매달린 절벽과 큰 바위엔 날아 흘러내리는 물소리.

水聲聒聒亂人耳
(수성괄괄란인이)물소리는 요란하여 사람의 귀 어지럽히니
六月飛雪灑石矼
(유월비설쇄석강)유월에도 눈발처럼 물보라 돌다리에 뿌려지네.

------------------------------------------

 晻靄(엄애) : 어둡고 자욱하다

 后土(후토) : 토지의 신, 

 鴻龐(홍방) : 넓고 크다

 聒聒(괄괄) : 떠들썩하다, 와글와글 무지한 모양.

 

仙翁釋子亦往往而逢兮

(선옹석자역왕왕이봉혜)신선 노인과 승려들 또한 간간이 만나지만

吾嘗惡其學幻而言哤
(오상오기학환이언방)내 그들의 학문 허황되고 말이 잡됨 싫어하노라.
但見丹霞翠壁遠近映樓閣
(단견단하취벽원근영루각)다만 보이는 것은 붉은 노을과 푸른 절벽 멀고 가까이 누각에 비추고
晨鍾暮鼓杳靄羅旛幢
(신종모고묘애라번당)새벽 종소리와 저녁 북소리 들리고 아득한 안개 속에 깃발이 늘어서 있네.
幽花野草不知其名兮

(유화야초부지기명혜)이름 알 수 없는 그윽한 꽃과 들풀들

風吹露濕香澗谷
(풍취로습향간곡)바람 불고 이슬 젖으니 골짜기 향기롭고
時有白鶴飛來雙
(시유백학비래쌍)때로 백학(白鶴)이 짝지어 날아온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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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丹霞(단하) : 붉은 노을

 翠壁(취벽) : 푸른 빛깔로 뒤덮인 절벽

 旛幢(번당) : 깃발

 

幽尋遠去不可極
(유심원거불가극)그윽한 곳 찾아 멀리 가나 다할 수 없으니
便欲絕世遺紛厖
(편욕절세유분방)곧 세속을 단절하여 복잡한 것들 잊고자 하노라

羨君買田築室老其下
(선군매전축실노기하)부러워라 그대 밭 사고 집지어 그 아래에서 늙으니
插秧盈疇兮
(삽앙영주혜)모를 심어 밭두둑에 가득하고 
釀酒盈缸
(양주영항)술 빚어 항아리에 가득하네.
欲令浮嵐曖翠千萬狀
(욕령부람애취천만상)떠있는 아지랑이와 희미한 푸른빛의 온갖 모양들을
坐臥常對乎軒窓
(좌와상대호헌창)앉으나 누우나 항상 창가에 마주하려 한다오.

君懷磊砢有至寶
(군회뢰라유지보)그대의 회포 우뚝하여 지극한 보배 지녔으나
世俗不辨珉與玒
(세속불변민여강)세속에서는 옥돌과 옥 분별하지 못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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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紛厖(분방) : 어지럽게 섞이다.

○ 插秧(삽앙) : 모를 심다

○ 浮嵐(부람) : 떠있는 아지랑이

 

策名爲吏二十載
(책명위리이십재)이름을 적()에 올려 관리된 지 이십 년에
青衫白首困一邦
(청삼백숙곤일방)푸른 적삼에 백발되어 한 고을에 곤궁하게 살고있지만
寵榮聲利不可以苟屈兮
(총영성일불가이구굴혜)영광과 명성과 이익에 구차하게 굽힐 수 없음이여!
自非青雲白石有深趣
(자비청운백석유심취)자신은 청운(靑雲)과 백석(白石)에 깊은 취미가 있으니
其意矹硉何由降
(기의올률하유강)그 뜻의 비범함이 어디서 내려왔겠는가?
丈夫壯節以君少
(장부장절사군소)대장부의 큰 지절(志節그대와 같은 이 적으니

嗟我欲說安得巨筆如長杠
(차아욕설안득거필여장강)내 이것 말하고자 하나 어찌 긴 깃대 같은 큰 붓 얻겠는가!   

----------------------------------- 

 自非靑雲白石有深趣(자비청원백석유심취) 

     其意矹硉何由降(기의올률하유강) : 

이덕홍(李德弘) 이 사람이 강직하여 세상에 굽히지 않고 오직 청운(靑雲)과 백석(白石)에 깊은 취미가 있어 그 마음이 비로소 가라앉아 즐거워한다. 

이 밖에는 비록 천사(千駟)와 만종(萬鍾)이라도 만일 털끝만큼의 의롭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 기개가 호방하여 맞설 것이니, 어찌 굽혀서 따르겠는가.” 하였다.

--------------------------- 

歐陽永叔集(구양영숙집)2 5권에 실려 있는 바, 황우(皇祐) 3(1051)에 지은 것이다.詩林廣記(시림광기) 후집 1권에는 제목이여산고를 지어 동년 유응지가 남강으로 돌아갈 때에 주다[廬山高贈同年劉凝之歸南康]로 되어 있다. 유응지(劉凝之)는 이름이 환()이며 응지(凝之)는 그의 자이다. 그는 절조가 높아 시속(時俗)에 굴하지 않고 여산(廬山) 낙성저(落星渚)에 은거하였는데, 구양수(歐陽修)가 남강(南康)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유중윤(劉中允)은 자가 응지이니 구양공(歐陽公)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영상령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여산(廬山) 남쪽으로 옮겨가 거하니, 구양공이 그 절개를 고상하게 여겨 여산고를 지어서 찬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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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歐陽脩, 1007 ~ 1072)는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시인문학자역사학자이다. 자는 영숙(永叔)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산문에서는 한유의 예()를 모방하고 소위 고문 부흥 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醉翁亭記(취옹정기)는 아주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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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 및 당시삼백수 여산(廬山) 관련 시>

 

고문진보 150.여산(驪山) - 蘇軾(소식:소동파)

http://blog.naver.com/swings81/220858253039

 

驪山(여산-양귀비 놀던 곳) - 蘇軾(소식:소동파)[고문진보]

고문진보古文眞寶 前集 제5권 七言古風 短篇 150.여산(驪山) - 蘇軾(소식:소동파)    <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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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 53.여산요 기노시어허주(廬山謠 寄盧侍御虛舟) - 李白(이백)

http://blog.naver.com/swings81/220911711312

 

[당시삼백수]여산요 기노시어허주(廬山謠 寄盧侍御虛舟)-이백(李白)

당시삼백수 권2 칠언고시 053.여산요 기노시어허주(廬山謠 寄盧侍御虛舟)-이백(李白) <여산의 노래를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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廬山謠 寄盧侍御虛舟(여산요 기노시어허주)

여산의 노래 시어사 노허주에게 부치다

 ㅡ 李白(이백)

我本楚狂人

(아본초광인), 나는 본래 초()나라 광인(狂人)

鳳歌笑孔丘

(봉가소공구). 봉새노래 불러 공자(孔子)를 비웃으며

手持綠玉杖

(수지녹옥장), 손에는 녹색 옥 지팡이를 쥐고

 朝別黃鶴樓

(조별황학루). 아침에 황학루(黃鶴樓)를 떠났다오

五岳尋仙不辭遠

(오악심선불사원), 오악(五嶽)의 신선을 찾아 먼 길 마다않고

一生好入名山游

(일생호입명산유). 평생 명산에 들어가 노니길 좋아 한다네.

廬山秀出南斗傍

(여산수출남두방), 여산은 남두성(南斗星) 옆에 우뚝 솟아있고

屛風九疊雲錦張

(병풍구첩운금장) 병풍구첩(屛風九疊)은 구름 비단이 펼쳐있는 듯

影落明湖靑黛光

(영락명호청대광). 그림자 드리운 밝은 호수엔 짙푸른 산색이 빛난다

 

金闕前開二峰長

(금궐전개이봉장). 금궐암(金闕巖) 앞에는 두 봉우리가 길게 솟아 있는데

銀河倒挂三石梁

(은하도괘삼석량). 은하수가 세 개의 돌다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고

香爐瀑布遙相望

(향로폭포요상망). 향로봉 폭포가 저 멀리 보이고

回崖沓嶂凌蒼蒼

(회애답장능창창).  둘러선 절벽, 겹쳐있는 봉우리는 푸른 하늘을 찌른다

 

翠影紅霞映朝日

(취영홍하영조일), 푸른 산빛, 붉은 놀, 아침 햇빛이 비치니

鳥飛到吳天長

(조비불도오천장).새도 날아 못가는 오() 땅의 먼 하늘이로다

登高壯觀天地間

(등고장관천지간), 산에 올라 보니 천지간의 장관이니

大江茫茫去不還

(대강망망거불환). 큰 강물은 도도히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黃雲萬里動風色

(황운만리동풍색),누런 구름 만 리에 퍼져 하늘색을 바꾸고

白波九道流雪山

(백파구도류설산). 흰 물결 아홉 줄기 설산(雪山)을 이루며 흐른다

 

好爲廬山謠

(호위려산요),  즐거워 여산 노래를 부르니

興因廬山發

(흥인려산발). 흥취는 바로 여산에서 일어난다

閑窺石鏡淸我心

(한규석경청아심), 석경(石鏡)을 조용히 들여다보니 내 마음 맑아지는데

謝公行處蒼苔沒

(사공행처창태몰). 사공(謝公)의 노닐던 곳은 푸른 이끼 속에 묻혀있다

 

早服還丹無世情

(조복환단무세정), 아침에 단약(丹藥)을 먹어 세속의 마음이 사라지고

琴心三疊道初成

(금심삼첩도초성). 금심삼첩(琴心三疊)으로 도()를 처음 이루니

遙見仙人彩雲裏

(요견선인채운리), 아득히 채색구름 속 선인이 보이는데

手把芙蓉朝玉京

(수파부용조옥경). 부용꽃 손에 들고 옥경(玉京)에 조회를 하고 있다.

 

先期汗漫九垓上

(선기한만구해상), 먼저 구천(九天) 위에서 한만(汗漫) 만날 기약했으니

願接盧敖游太淸

(원접노오유태청). 노오(盧敖)를 만나 태청(太淸)에서 노니길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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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7377

 

053 李白, 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御虛舟)

053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御虛舟)-이백(李白;701-762) 여산의 노래를 노시어 허주에게 부침 我本楚狂人(아본초광인), ;나는 본래 초나라 미친 사람 鳳歌笑孔丘(봉가소공구). ;봉황새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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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시(全唐詩) 180 망여산폭포수2(望廬山瀑布水二首) - 李白(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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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시]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수 2수 중 제2수) - 李白(이백)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 <望廬山瀑布水二首 중 제2수>  李白(이백)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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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 181.여산고(廬山高) - 歐陽修(구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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廬山高贈同年劉中允歸南康皇祐三年〉】

 廬山高哉幾千仞兮根盤幾百里峨然屹立乎長江長江西來走其下是為揚瀾左裏兮洪濤巨浪日夕相舂撞雲消風止水鏡淨泊舟登岸而遠望兮上摩青蒼以晻靄下壓后土之鴻龐試往造乎其間兮攀緣石磴窺空谾千岩萬壑響鬆檜懸崖巨石飛流淙水聲聒聒亂人耳六月飛雪灑石矼仙翁釋子亦往往而逢兮吾嘗惡其學幻而言嚨但見丹霞翠壁遠近映樓閣晨鍾暮鼓杳靄羅幡幢幽花野草不知其名兮風吹露濕香澗穀時有白鶴飛來雙幽尋遠去不可極便欲絕世遺紛痝羨君買田築室老其下插秧盈疇兮釀酒盈缸欲令浮嵐曖翠千萬狀坐臥常對乎軒窗君懷磊砢有至寶世俗不辨瑉與工策名為吏二十載青衫白首困一邦寵榮聲利不可以苟屈兮自非青雲白石有深趣其氣兀硉何由降丈夫壯節以君少嗟我欲說安得巨筆如長杠

 <원문출처 :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歐陽修集 居士集卷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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廬山高(여산고)

ㅡ 歐陽修(구양수)

 

여산(廬山)의 높음이여! 몇 천길이나 되는가

산기슭은 몇 백리에 서려있어

깍아지른 듯 우뚝 솟아 장강(長江) 곁에 서 있네.

장강이 서쪽에서 흘러 그 아래로 달려오니

이것이 물결 일렁거리는 좌리호(左里湖)가 되어

큰 파도와 물결 밤낮으로 서로 부딪친다오.

 

구름 사라지고 바람 멈추자 물결 거울처럼 깨끗한데

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위로는 푸른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아래로는 대지를 넓고 커다랗게 누르고 있누나.

시험 삼아 그 사이를 가보려

바위 부여잡고 올라가 빈 골짝 엿보았네.

천 바위와 만 골짜기에 소나무와 전나무 소리 들리고

공중에 매달린 절벽과 큰 바위엔 날아 흘러내리는 물소리.

물소리는 요란하여 사람의 귀 어지럽히니

유월에도 눈발처럼 물보라 돌다리에 뿌려지네.

 

신선 노인과 승려들 또한 간간이 만나지만

내 그들의 학문 허황되고 말이 잡됨 싫어하노라.

다만 보이는 것은 붉은 노을과 푸른 절벽 멀고 가까이 누각에 비추고

새벽 종소리와 저녁 북소리 들리고 아득한 안개 속에 깃발이 늘어서 있네.

이름 알 수 없는 그윽한 꽃과 들풀들

바람 불고 이슬 젖으니 골짜기 향기롭고

때로 백학(白鶴)이 짝지어 날아온다오.

 

그윽한 곳 찾아 멀리 가나 다할 수 없으니

곧 세속을 단절하여 복잡한 것들 잊고자 하노라

부러워라 그대 밭 사고 집지어 그 아래에서 늙으니

모를 심어 밭두둑에 가득하고 술 빚어 항아리에 가득하네.

떠있는 아지랑이와 희미한 푸른빛의 온갖 모양들을

앉으나 누우나 항상 창가에 마주하려 한다오.

그대의 회포 우뚝하여 지극한 보배 지녔으나

세속에서는 옥돌과 옥 분별하지 못한다오.

 

이름을 적()에 올려 관리된 지 이십 년에

푸른 적삼에 백발되어 한 고을에 곤궁하게 살고있지만

영광과 명성과 이익에 구차하게 굽힐 수 없음이여!

자신은 청운(靑雲)과 백석(白石)에 깊은 취미가 있으니

그 뜻의 비범함이 어디서 내려왔겠는가?

대장부의 큰 지절(志節) 그대와 같은 이 적으니

! 내 이것 말하고자 하나 어찌 긴 깃대 같은 큰 붓 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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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고문진보 후집/고문관지] 82.朋黨論(붕당론) - 歐陽修(구양수)

고문진보 후집 82.朋黨論(붕당론) - 歐陽修(구양수) 고문관지 <당송문> 9권 20.朋黨論붕당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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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聞朋黨之說,自古有之

(신문붕당지설) (자고유지),

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

(유행인군변기군자소인이이)。

大凡君子與君子,以同道為朋

(대범군자여군자)(이동도위붕) ;

小人與小人,以同利為朋;此自然之理也

(소인여소인) (이동리위붕)  (차자연지리야)。

신이 듣기에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예부터 있었으니,

오직 임금(人君)께서는 군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의(道義)를 함께 함으로써 붕당을 이루며,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이 같아서 붕당을 결성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然臣謂小人無朋      惟君子有之     其故何哉

(연신위소인무붕)(유군자유지)(기고하재)

그래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오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小人所好者利祿也所貪者財貨也

(소인소호자리록야) (소탐자재화야)

當其同利時暫相黨引以為朋者偽也

(당기동리시(잠상당인이위붕자) (위야)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과 녹봉으로 재화를 탐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익을 같이 할 때는 잠시 서로 끌어들여 당을 만들고 한 무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及其見利而爭先或利盡而交疏

(급기견리이쟁선) (혹리진이교소)

則反相賊害雖其兄弟親戚不能相保

(즉반상적해) (수기형제친척) (불능상보)

故臣謂小人無朋其暫為朋者偽也

(고신위소인무붕) (기잠위붕자) (위야)

그 이익을 보고 먼저 쟁취하려 하며, 혹 이익이 다하면 서로 교류가 소원해져서는,

오히려 서로 해치려 하니, 비록 그 형제 친척이라도 능히 서로 보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그들이 잠시 붕당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것이고 생각합니다.

 

君子則不然   所守者道義      所形者忠義      所惜者名節

(군자즉불연) (소수자도의)(소형자충의)(소석자명절)

군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 행하는 것이 충성과 신의이며, 아끼는 것은 명예와 절조입니다.

 

以之修身則同道而相益

(이지수신)(즉동도이상익)

以之事國則同心而共濟終始如一

(이지사국(즉동심이공제) (종시여일)

此君子之朋也

(차군자지붕야)

이것으로 자신을 닦으면 도가 일치되어 서로 이익을 줄 수 있고,

이로써 나라의 일을 하면 한마음이 되어 서로 도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습니다. 

이는 군자의 붕당입니다.

 

故為人君者但當退小人之偽朋

(고위인군자) (단당퇴소인지위붕)

用君子之真朋則天下治矣

(용군자지진붕)(즉천하치의)

그러므로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소인의 거짓된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당을 중용하면 곧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堯之時,小人共工、驩兜等四人為一朋
(요지시) (소인공공)(환두등사인위일붕),

君子八元)、八愷十六人為一朋
(군자팔원   (팔개십육인위일붕)。

舜佐堯,退四凶小人之朋
(순좌요) (퇴사흉소인지붕),

而進元、愷君子之朋,堯之天下大治
(이진원) (개군자지붕)(요지천하대치)。

及舜自為天子,而皋、夔、稷、契等二十二人
(급순자위천자) (이고, 기,   직,   설등이십이인),

並立於朝,更相稱美,更相推讓
(병립어조)  (경상칭미)(경상추양),

凡二十二人為一朋
(범이십이인위일붕);

而舜皆用之,天下亦大治
(이순개용지)(천하역대치)。

 

()임금 시절에 소인배인 공공(共工)환두(驩兜) 등 네 명이 한 붕당을 만들고,

군자인 팔원(八元)팔개(八愷) 등 열여섯 명이 한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이 요임금을 보좌하여 네 사람의 흉악한 소인의 무리를 물리치고

팔원팔개 등 군자의 붕당을 천거하였으니 요의 천하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순 자신이 스스로 천자가 됨에 이르러 고요(皐陶), (), 후직(), () 등 스물두 명이

조정에 나란히 늘어서서 서로 번갈아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추천하고 양보하며,

모두 스물두 명이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순임금이 그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가 역시 잘 다스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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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共工) : 신농씨(神農氏)의 후예로 물의 신으로 물과 관련된 사업을 담당한 수관(水官), 9개의 머리와 뱀의 몸을 가진 하인 상유(相繇)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환두(驩兜) : 요순시대에 제위를 노렸던 요의 아들을 말한다. 홍수의 신 공공(共工), 요순시대에 제위를 노린 요의 아들인 단주 환두(驩兜), 단주와 함께 역란을 일으킨 남방의 만족 삼묘(三苗), 동이 부족의 신이었던 곤(鯀)을 사죄(四罪)라 불리운다.

 팔원(八元)팔개(八愷) : 제곡 고신씨에 재능이 뛰어난 신하가 여덟 명 있었는데 팔원이라 불렀고, 전욱 고양씨에게도 팔개가 있었다. 원개는 어진 신하나 재능이 뛰어난 자를 지칭한다.

 皋夔稷契等二十二人(이고기직설등이십이인) : 고요(皐陶), (), 후직(), () 등 스물두 명. 고요(皐陶)는 우순(虞舜) 당시의 형관(刑官)이며, ()는 우순 당시의 악관(樂官), 후직(后稷)은 농업을, ()은 교육을 관장하였다.

 

《書》曰「紂有臣億萬,惟億萬心
(서)왈   (주유신억만) (유억만심);

周有臣三千,惟一心
(주유신삼천)(유일심)。」

紂之時,億萬人各異心
(주지시) (억만인각이심),

可謂不為朋矣,然紂以亡國
(가위불위붕의)(연주이망국)。

周武王之臣三千人為一大朋,而周用以興
(주무왕지신삼천인위일대붕)(이주용이흥)。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신하가 억만 명이 있었는데 억만 가지의 마음이 있었으나,

() 무왕에게 삼천 명의 신하가 있었지만, 마음은 오직 하나였다.”고 합니다.

주왕(紂王) 시절에는 억만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달라

결코 붕당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주()왕이 이 때문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나라 무왕의 신하들은 삼천 명이 하나의 큰 붕당을 이루니, ()나라가 그들을 등용하여 나라가 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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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경 제4 <주서>에 나오는 말이다.

서경(상서) <第四篇 周書> >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紂王)을 벌하고자 할 때 한 말이다.

<泰誓第一> 태서 제 1

受有臣億萬, 惟億萬心, 予有臣三千, 惟一心. : 상의 왕 수에게는 억만의 신하가 있으나, 억만의 마음으로 흩어져 있으며, 나에게는 삼천의 신하가 있으나 한 마음으로 뭉쳐 있다.

 주왕(紂王) : 은나라의 제31대 왕으로 마지막 군주이다. 주나라 성립 이후에, 제신(帝辛)은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비공식 설화에 전해지는 그는 달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성격이 난폭하여 간언을 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으며, 궁궐이 초라하다고 해서 화려하게 만들고, 술로 만든 호수를 만드는 등(酒池肉林 : 주지육림) 국가예산을 많이 낭비하였으며,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炮烙之刑 : 포락지형)을 새로 제정하여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위키백과>

 周武王(주 무왕) : 주나라의 제1대 왕이다. 성은 희(), 이름은 발()이다. 주 문왕의 아들이다. 주 무왕은 주 문왕(周文王)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상나라()의 격파였는데 무왕은 현명한 관료를 등용하였고, 특히 재상으로 강태공을 기용하였다. 그는 군사(軍師)였다. 결과적으로 주나라는 강대화되었다. 무예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는 파괴되었고 상나라의 주왕(紂王, 제신)은 궁을 불태우고 분사하였다.

 

 
後漢獻帝時(후한헌제시),盡取天下名士囚禁之(진취천하명사수금지),
目為黨人(목위당인);
及黃巾賊起(급황건적기),漢室大亂(한실대란),後方悔悟(후방회오),
盡解黨人而釋之(진해당인이석지),然已無救矣(연이무구의)。
唐之晚年(당지만년),漸起朋黨之論(점기붕당지론)。
及昭宗時(급소종시),盡殺朝之名士(진살조지명사),
惑投之黃河(혹투지황하),曰(왈):
「此輩清流(차배청류),可投濁流(가투탁류)。」 而唐遂亡矣(이당수망의)。
 

 

후한 헌제(獻帝) 때에 천하의 명사들을 모두 잡아들여 감금시키고,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였습니다.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한()나라 황실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비로소 뉘우치고

모두 당인들을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의 논의가 점차 일어났습니다.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를 다 죽여서

혹은 그들을 황하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청류(淸流)이니 탁류(濁流)에 던질만하다고 말하더니,

이에 당나라도 마침내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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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獻帝(후한헌제) : 한나라 효헌황제 유협(漢 孝獻皇帝 劉協, 181년 ~ 234년)은 후한(後漢)의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자는 백화(伯和)이다

 昭宗時(소종시) : 당 소종 이엽(昭宗 李曄, 867년-904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19대 황제(재위 888년-900년, 901년 ~ 904년)이다. 당 의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공헌황후(恭憲皇后) 소생이며 당 희종의 이복 동생이었다. 원래 이름은 걸(傑)이었다가 즉위 후 엽(曄)으로 개명하였다. 나중에 다시 이름을 고쳐 민(敏)이라 하였다. 생전 존호는 성문예덕광무홍효황제(聖文睿德光武弘孝皇帝)이다.

 

 

 唐之晚年(당지만년)漸起朋黨之論(점기붕당지론) : 당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의 논의가 점차 일어났다. 당나라 말에 있었던 '우이당쟁(牛李黨爭)'을 말하며, 우이당쟁은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등을 영수로 하는 '우당(牛黨)'과 이덕유(李德裕)정담(鄭覃) 등을 영수로 하는 '이당(李黨)' 사이에 약 40여 년간 벌어졌던 당쟁을 말한다.

 

 
夫前世之主(부전세지주),能使人人異心不為朋(능사인인이심불위붕),莫如紂(막여주);
能禁絕善人為朋(능금절선인위붕),莫如漢獻帝(막여하헌제);
能誅戮清流之朋(능주륙청류지붕),莫如唐昭宗後世(막여당소종후세);
然皆亂亡其國(연개란망기국)。
 

 

대저 앞 시대의 군주 중에 능히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게하여 붕당을 하지 못하게 함은 (은나라) ()왕 만 한 이가 없을 것이요,

선인(善人)이 붕당을 만듦을 금하고 단절시킨 것은 후한의 헌제(獻帝)만 한 이가 없을 것이며,

청류(清流)의 붕당을 베어 죽인 것은 당나라 소종(昭宗)의 시대만 같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모두 혼란해져 멸망하였습니다.

 

 
更相稱美,推讓而不自疑(경상칭미,추양이부자의)莫如舜之二十二臣(막여순지이십이신)
舜亦不疑而皆用之(순역불의이개용지)
然而後世不誚舜為二十二朋黨所欺(연이후세불초순위이십이붕당소기)
而稱舜為聰明之聖者(이칭순위총명지성자)以能辨君子與小人也(이능변군자여소인야)
 

 

서로 번갈아 칭찬하고 양보하여 스스로 의심하지 않음은 순임금의 스물두 명의 신하만한 이가 없었고, 순임금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순임금이 스물두 명의 붕당에게 속았다고 비웃지 않았고,

또 순임금을 총명한 성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였기 때문입니다.

 

 
周武之世(주무지세)舉其國之臣三千人共為一朋(거기국지신삼천인공위일붕)
自古為朋之多且大莫如周(자고위붕지다차대막여주)
然周用此以興者(연주용차이흥자)善人雖多而不厭也(선인수다이불염야)
嗟乎(차호)治亂興亡之跡(치란흥망지적)為人君者可以(위인군자가이감의)
 

 

주나라 무왕의 시대에는 그 나라의 신하 삼천 명이 모두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붕당을 이룸에 많고 또한 큰 것은 주()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지만,

주나라가 오히려 이 때문에 흥한 것은 선인이 비록 많았지만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 흥하고 망하고 다스림과 혼란의 자취를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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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출처>

朋黨論 / 作者歐陽脩

本作品收錄於:《歐陽文忠公集廬陵文鈔/14

 

臣聞朋黨之說自古有之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大凡君子與君子以同道為朋 小人與小人以同利為朋此自然之理也

然臣謂小人無朋惟君子有之其故何哉小人所好者利祿也所貪者財貨也當其同利時暫相黨引以為朋者偽也及其見利而爭先或利盡而交疏則反相賊害雖其兄弟親戚不能相保故臣謂小人無朋其暫為朋者偽也君子則不然所守者道義所形者忠義所惜者名節以之修身則同道而相益以之事國則同心而共濟終始如一此君子之朋也故為人君者但當退小人之偽朋用君子之真朋則天下治矣

 堯之時小人共工驩兜等四人為一朋 君子八元八愷十六人為一朋舜佐堯退四凶小人之朋而進元愷君子之朋堯之天下大治 及舜自為天子而皋契等二十二人並立於朝更相稱美更相推讓凡二十二人為一朋而舜皆用之天下亦大治。《:「紂有臣億萬惟億萬心周有臣三千惟一心。」紂之時億萬人各異心可謂不為朋矣然紂以亡國周武王之臣三千人為一大朋而周用以興 後漢獻帝時盡取天下名士囚禁之目為黨人及黃巾賊起漢室大亂後方悔悟盡解黨人而釋之然已無救矣唐之晚年漸起朋黨之論及昭宗時盡殺朝之名士咸投之黃河:「此輩清流可投濁流。」而唐遂亡矣 

夫前世之主能使人人異心不為朋莫如紂能禁絕善人為朋莫如漢獻帝能誅戮清流之朋莫如唐昭宗後世然皆亂亡其國更相稱美推讓而不自疑莫如舜之二十二臣舜亦不疑而皆用之然而後世不誚舜為二十二朋黨所欺而稱舜為聰明之聖者以能辨君子與小人也周武之世舉其國之臣三千人共為一朋自古為朋之多且大莫如周然周用此以興者善人雖多而不厭也

 嗟乎治亂興亡之跡為人君者可以鑒矣

 

신은 듣기에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예부터 있었으니, 오직 임금(人君)께서는 군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의(道義)를 함께 함으로써 붕당을 이루며,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이 같아서 붕당을 결성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小人)에게는 붕당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오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과 녹봉으로 재화를 탐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익을 같이 할 때는 잠시 서로 끌어들여 당을 만들고 한 무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 이익을 보고 먼저 쟁취하려 하며, 혹 이익이 다하면 서로 교류가 소원해져서는, 오히려 서로 해치려 하니, 비록 그 형제 친척이라도 능히 서로 보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그들이 잠시 붕당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것이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 행하는 것이 충성과 신의이며, 아끼는 것은 명예와 절조입니다. 이것으로 자신을 닦으면 도가 일치되어 서로 이익을 줄 수 있고, 이로써 나라의 일을 하면 한마음이 되어 서로 도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습니다. 이는 군자의 붕당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소인의 거짓된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당을 중용하면 곧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임금 시절에 소인배인 공공(共工)환두(驩兜) 등 네 명이 한 붕당을 만들고, 군자인 팔원(八元)팔개(八愷) 등 열여섯 명이 한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이 요임금을 보좌하여 네 사람의 흉악한 소인의 무리를 물리치고 팔원팔개 등 군자의 붕당을 천거하였으니 요의 천하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순 자신이 스스로 천자가 됨에 이르러 고요(皐陶), (), 후직(), () 등 스물두 명이 조정에 나란히 늘어서서 서로 번갈아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추천하고 양보하며, 모두 스물두 명이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순임금이 그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가 역시 잘 다스려졌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신하가 억만 명이 있었는데 억만 가지의 마음이 있었으나, () 무왕에게 삼천 명의 신하가 있었지만, 마음은 오직 하나였다.”고 합니다. 주왕(紂王) 시절에는 억만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달라 결코 붕당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주()왕이 이 때문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나라 무왕의 신하들은 삼천 명이 하나의 큰 붕당을 이루니, ()나라가 그들을 등용하여 나라가 흥하게 되었습니다. 후한 헌제(獻帝) 때에 천하의 명사들을 모두 잡아들여 감금시키고,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였습니다.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한()나라 황실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비로소 뉘우치고 모두 당인들을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의 논의가 점차 일어났습니다.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를 다 죽여서 혹은 그들을 황하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청류(淸流)이니 탁류(濁流)에 던질만하다고 말하더니, 이에 당나라도 마침내 멸망하였습니다. 

대저 앞 시대의 군주 중에 능히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게하여 붕당을 하지 못하게 함은 (은나라) ()왕 만 한 이가 없을 것이요, 선인(善人)이 붕당을 만듦을 금하고 단절시킨 것은 후한의 헌제(獻帝)만 한 이가 없을 것이며, 청류(清流)의 붕당을 베어 죽인 것은 당나라 소종(昭宗)의 시대만 같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모두 혼란해져 멸망하였습니다. 서로 번갈아 칭찬하고 양보하여 스스로 의심하지 않음은 순임금의 스물두 명의 신하만한 이가 없었고, 순임금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순임금이 스물두 명의 붕당에게 속았다고 비웃지 않았고, 또 순임금을 총명한 성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무왕의 시대에는 그 나라의 신하 삼천 명이 모두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붕당을 이룸에 많고 또한 큰 것은 주()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지만, 주나라가 오히려 이 때문에 흥한 것은 선인이 비록 많았지만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 흥하고 망하고 다스림과 혼란의 자취를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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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양수(歐陽脩, 1007년 ~ 1072년)는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ㆍ시인ㆍ문학자ㆍ역사학자이다. 자는 영숙(永叔)ㆍ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범중엄(范仲淹)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仁宗)의 신임을 잃었고 1045년 (경력 5년)에는 비방(誹謗)받아 안후이 성의 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산문에서는 한유의 예(例)를 모방하고 소위 고문부흥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醉翁亭記(취옹정기)〉는 아주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위키백과>

 

<구양수 주요 작품> 

[고문진보 후집/고문관지] 76.취옹정기(醉翁亭記)-구양수(歐陽修)

http://blog.naver.com/swings81/220898199291

[고문진보 후집/고문관지] 77.추성부(秋聲賦) - 구양수(歐陽修)

http://blog.naver.com/swings81/220849625036

[고문진보 후집] 79.鳴蟬賦(명선부)/鳴蟬賦 並序(명선부 병서)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1058494116

[고문진보] 181.廬山高(여산고)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0918783784

[고문진보] 238.明妃曲(명비곡)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0963529960

[고문진보] 239.明妃曲和王介甫(명비곡화왕개보)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095950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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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B%8B%B9%EC%86%A1%ED%8C%94%EB%8C%80%EA%B0%80

 

1. 개요

중국 당나라송나라 때 활동한 문학가 8명. 중국 근현대 이전의 문장 형식과 내용, 산문 이론을 정립하여 퍼트린 업적이 있는 인물들로, 당송팔대문학가(唐宋八大文學家)라고도 불린다.

2. 상세

중국의 산문은 춘추전국시대 굴원의 초사(楚辭)에서 시작되어 한나라 때 황제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행간의 음절 수를 정하고 압운(押韻)을 적극 활용한 형식주의적 글인 부(賦)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중국 산문은 삼국시대(중국)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산문의 내용을 더욱 경시하고 적절한 미사여구나 문학적 표현의 사용만을 중시하는 변려문(騈儷文)으로 변화하였다.

변려문은 수필임에도 4자 · 6자의 대구를 많이 사용하여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대우[1]와 대구[2]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각 글자를 음률(성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열하여 노래처럼 읊을 수 있도록 한 수필이다. 격식과 수식을 차려 지배층 간의 소통에 사용하기에 좋은 문체였으나 형식에만 신경을 써서 문맥이 뚜렷하지 않고 글 뜻은 애매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문체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조금씩 생겨났으나 상당수의 학자가 모두 변려문에 익숙하여 문체 개혁의 움직임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변려문의 주 사용 계층이었던 귀족과 상류층이 몰락하고, 반대급부로 상인·부농 등 중하위 계층 출신 인물이 글을 배워 출세하는 경향이 늘어나자 변려문을 대체할 이해하기 쉬운 글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며, 때마침 한유와 유종원이 등장함으로써 중국 산문은 전환기를 맞았다.
문장력이 뛰어났던 한유는 옛 문인들이 정립한 문학 이론을 집대성하여 문장으로서 유교의 전통을 회복하는 고문(古文)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유종원 역시 그와 함께 고문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다만 유교만을 숭상하고 글의 내용만을 중시하여 문장의 미적 형식을 배척하고 유교적 도리가 글의 내용에 담겼는지만을 고려한 한유와 달리, 유종원은 문장을 접하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을 오래 간직하도록 하려면 문장의 일정한 형식을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비단 유교가 아니어도 올바른 도리를 포괄한다면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내용을 품고 있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이토록 사상에 큰 차이가 있던 두 사람이었으나 한유와 유종원은 서로를 최고의 벗이자 협력자로 여겼으며, 그들의 고문운동은 당 말기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으로 다시 유미주의가 확산되며 잠시 주춤하였으나 북송대에 이르러 구양수가 다시 유미주의를 비판하며 한유의 문집을 모범으로 삼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유창하게 읊고 쓸 수 있는 산문을 유행시킴으로써 다시 주목받는다. 또한 소순소식(시인)소철(시인)이 그에 동조하여 각자의 스타일로 고문을 집필하여 고문운동의 주도권을 이어받고, 또 왕안석증공이 임천(臨川)[3] 출신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문운동을 독자적으로 이해하여 확산시켜 완전히 성공시킨다.

이들이 활동한 이후 송나라 때의 진덕수(眞德秀, 1178-1235)[4] 처음으로 이들 8인을 대가라고 평가했고, 이 평가가 그대로 명나라 이후의 문인들에게 수용되어 모곤(茅坤)이라는 문인이 이들의 산문들을 약간 편집하여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라는 160권짜리 문집을 만들어 보급한 이래 지금의 당송팔대가라는 명칭으로 남았다.

현재 중국은 소프트파워 융성을 위해 이 당송팔대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바이두 등 중국 웹 사이트에서도 이들에 대한 자료가 많이 올라온다.

3. 문제점

진덕수가 무슨 근거로 당송팔대가를 선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무늬만 당송이지 여덟 명 중 당나라 사람은 두 명뿐이고, 소씨 가문에서 세 명이나 차지하고 있다. 이 셋 중 소식의 문학적 성취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소순, 소철은 소식의 가족이라는 것 외에 크게 대단한 업적이 없는데도 한유, 유종원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4. 인물 일람

愈之爲古文,豈獨取其句讀不類於今者耶? 思古人而不得見,學古道則欲兼通其辭。通其辭者,本乎古道者也。

유(愈)가 고문을 하는 것이 어찌 그 구두(句讀)가 지금의 것과 같지 않음만을 취하련가? 고인을 생각해도 뵐 수가 없으니, 고도(古道)를 배움에 그 문사에까지도 통하고자 함이라. 그 문사에 통하는 것은 본디 고도에 뜻을 둠이라.

- 제구양생애사후(題歐陽生哀辭後)
 
 
고문운동을 본격적으로 촉발시킨 인물. 스스로 맹자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할 정도로 유교를 크게 숭상하였고, 그의 고문운동 또한 변려문의 지나친 형식미가 유교의 도리가 세상에 퍼지지 못하도록 하므로 유교의 도통을 복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행된 것이다. 그 때문에 도교불교 등의 가르침은 이단시[5]하였고 유교의 오경자사, 그리고 한나라 때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토록 곧고 일관된 주장과 사상 덕에 후세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文之用,辭令褒貶,導揚諷諭而已。雖莫言鄙埜,足以備於用,然而闕其文采,固不足以竦動時聽,夸示後學,立言而朽,君子不由也。

문장의 쓰임은 사령(辭令), 포폄(褒貶), 도양(導揚), 풍유(諷諭)[6]에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 말이 비루하다 해도 쓰임에 대비하기에는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채가 없다면 본디 세상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여 뒷날에 배우려는 이들에게 뜻을 드러내는 수가 없어 생각을 표현한 말이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군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 양평사문집후서(楊評事文集後序)
 
한유와 더불어 간결하고도 산뜻한 고문체의 글을 지어 고문운동을 이끌어 나간 인물. 그러나 형식미를 완전히 배제한 한유와 달리 꾸밈없는 문체는 읽는 이의 관심을 끌지 못하여 그 도리를 전파하지 못한다고 여겨 어느 정도의 미사여구는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사상적 측면에서도 유교 외길을 걸었던 한유와 달리 불교나 도교 등 다른 학문의 가르침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수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唐之文涉五代而弊,至修復起

당대의 문장이 오대를 거치면서 피폐해졌는데 구양수에 이르러 다시 일어났다.

-《사조국사(四朝國史)》
 
한유와 유종원이 활동한 당 중기 이후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러 또다시 유미주의적 문체인 태학체(太學體)가 확산되어 북송대까지 이어지자, 당대의 고문운동에 다시금 주목하여 한유[7]의 산문을 참고하여 명확한 산문이론을 정립하고 실제 창작을 통해 그 이론을 실천함으로써 중국산문사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과거 시험관 등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발굴하였는데, 아래의 나머지 당송팔대가 일원들이 모두 구양수의 도움을 최소 한 번쯤은 받은 인물들이다.
아래의 소식과 소철의 아버지로, 자식들과 함께 삼소(三蘇)로 엮이며 이에 따로 노소(老蘇)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책(幾策)', '권서(權書)', '형론(衡論)' 등 22편의 문장을 구양수에게 보여 주고 그의 추천을 받아 정계에 진출했다.
구양수의 제자이자 소순의 아들로, 별명인 소동파로 유명한 인물. 대표작으로 일유(日喩)가 있다.
위 소식의 동생으로 마찬가지로 구양수의 제자였다.
 
 
삼소(三蘇), 소순 3父子들은 구양수의 제자로 후세에 두드러진 문학 작품을 남긴 이는 소식이다,
 
 
 
 

소식(蘇軾),《赤壁賦》&《後赤壁賦》

赤壁賦 기(起)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

kydong77.tistory.com

가족들 중에도 이름난 문인이 6명 더 있었기 때문에 남풍칠증(南豐七曾)의 일원으로도 불린다. 주요 저서로 월주조공구멸기(越州趙公救災記) 등이 있다.
법률 개혁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지만 시와 산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요 산문으로 곤설(鯀說), 맹상군(讀孟嘗君傳), 상중영(傷仲永) 등이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40318118800005

 

<당송팔대가의 문장은 왜 위대할까>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재능이 붓 위로 떨어지면, 사해가 이미 모두 전하며 외웠고, 아래로는 여염집과 농가에서, 밖으로는 이적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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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문장혁신'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재능이 붓 위로 떨어지면, 사해가 이미 모두 전하며 외웠고, 아래로는 여염집과 농가에서, 밖으로는 이적의 나라까지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군재독서지' 중)

어떻게 글을 썼기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칭찬을 받았을까.

찬사를 받은 주인공은 중국 북송 때 문장가인 소식(蘇軾)이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실제로 소식은 시, 산문, 사부(詞賦), 서화 등에서 두루 최고경지에 다다랐다고 한다. 생활 속의 한 형상을 뛰어난 문장으로 포착해 냈고, 산문의 작법으로 시를 짓기도 했다. '적벽부'(赤壁賦)라는 걸작을 남겼다.

동생 소철(蘇轍)도 대단한 문장가였다. 현실문제를 지적한 논설문으로 유명한 아버지 소순(蘇洵)과 함께 세 사람은 '삼소'(三蘇)라고 불리며 문장가들의 추앙을 받았다.

삼부자는 동시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했다. 당송팔대가에는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修),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까지 아우른다.

이들 당송팔대가의 작품은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작품은 필독 고전이 됐고, 이후 문인들은 문체를 본뜨기에 바빴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이들 문학을 종합적으로 집중 연구한 서적이 많지 않았다.

최근 국내 번역된 '문장혁신'은 당송팔대가의 문학을 비롯해 그들의 삶과 사상을 조망하는 흔치 않은 책이다.

중국문학과 문헌학을 연구한 저자 우멍푸는 이 책에서 당송팔대가의 생애를 요약하면서 그들의 산문이 거둔 성취를 예술과 역사적 차원에서 짚어냈다.

저자는 당송 이전의 진부한 문학을 혁신하려 한 당송팔대가의 시도에 주목했다.

후대에서 '고문운동'(古文運動)이라고 부른 이런 움직임은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궁정 권력에 아부하느라 빈말을 쏟아낸 변려문에 저항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했고, 어투는 통속적이었다.

문장이 난삽해 사리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변려문과 달랐다. 분석과 논리가 시원했다.

저자는 당송팔대가라는 명칭의 유래와 역사적 지위를 살펴본 뒤 8명 각각을 소평전, 문학론, 문장비평, 예술적 성취 등으로 나눠 분석했다.

당나라 명문가 출신인 한유와 관련해서는 "진보적인 정치관이 문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며 "인습에 젖지 않고 진부한 말을 힘써 물리쳤으며, 오히려 잡스러운 이야기를 즐겨 예술적 자양분이 풍부했다"고 평가했다.

구양수에 대해서는 "형식과 기교에 치중한 송대 초기의 산문 풍조에 반발해 통속적 어투와 일상어를 사용함으로써 산문의 외연을 넓히는 데 힘썼다"는 평을 남겼다.

'신법'(新法)으로 유명한 왕안석이 문예 분야에서는 어떤 글쓰기를 남겼는지 소개하는 대목 등도 흥미롭다.

'당송팔대가의 글쓰기는 왜 고전이 되었는가'라는 부제처럼 일반인에게는 이름만 익숙한 당송팔대가의 삶과 글을 묶어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김철범 옮김. 글항아리. 516쪽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570

 

고문(古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정의

한문으로 쓰여진 산문체의 문장.
내용

국문학주1이나 국어학에서는 중세국어로 표기된 글을 현대문과 대칭해서 부르고 있다. 또, 중국에서는 일상어인 ‘백화(白話)’와 대립하여 문언(文言)으로 쓰인 산체문(散體文)을 ‘고문’이라 병칭하기도 한다. 근대 이전의 한문학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고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문자인 고대자체(古代字體)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과두문(蝌蚪文)주2이나 전서(篆書)같은 문자를 통칭하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허목(許穆)이 편찬한 『고문운율(古文韻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체(字體)로서의 개념이 고문이 가지고 있던 본래적인 뜻이다.

두 번째는 고대 전적(典籍)주3이나 학파로서의 고문이다. 한나라 사람들이 유가주4의 전적을 공자(孔子)주5의 옛 집에서 발견하여 ‘벽중서(壁中書)’라 불렀던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후대에 경학연구자들 사이에서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문의 개념이 학파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문체개념으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당나라주6 이전에는 문체적인 뜻으로 고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당나라 때에 와서 당시 유행하던 조작적이고 수식이 많은 사륙변려의 변체문(騈體文)주7과 다른 산문 체제를 독립적으로 유지한 문체가 출현하였다.

이것을 한문학에서는 보편적으로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문체를 고문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석주(金錫胄)가 편집한 『고문백선(古文百選)』의 내용들이 문체적 개념으로서의 고문을 수용하여 구성되고 있다. 문체적 개념으로서의 고문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한유(韓愈)주8를 중심으로 한 당나라 고문운동가들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문학 역사상의 새로운 산물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고문은 낱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복고적인 면모 내지 사조에 영향을 받아 나타났다는 점이다. ‘선진고문(先秦古文)’을 전범으로 생각한 고문운동가들의 처지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고문운동가들이 실천한 고문은 우수한 고대의 문학전통과 정신을 성공적으로 계승하면서 전혀 새로운 문학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나라의 고문운동가들이 가졌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이은 참신한 문학관의 형성에서 비롯되었다.

고문은 문학사의 발전에 따라 그 시대의 요구에 적합한 문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복고 한 방면에만 치중한 고문가들도 있었다. 명나라주9에 와서는 하나의 풍조를 이루기도 하였다. 문장은 반드시 진한의 것을 표방해야 한다는 의고문가(擬古文家)가 그것이다. 그 원인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주11의 문체가 점차로 평이하고 위약(萎弱)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여 형식에 치우친 ‘대각체(臺閣體)’주12나 ‘팔고문(八股文)’주13이 풍미하게 된 것에 있었다. 이것에 반동하여 새로운 문체혁신운동으로서 의고문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명나라의 한편에서는 당송고문을 존숭하는 왕신중(王愼中) · 당순지(唐順之) · 귀유광(歸有光)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당송을 배우는 데에 그치고 창신(創新)의 경지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청나라주14에 와서 당송고문파가 문단에서 큰 세력을 떨쳤다. 중반에는 절충파로서 방포(方苞)주15가 중심이 된 동성파(桐城派)주16가 출현하였다.

방포는 ‘고문의법(古文義法: 고문을 본받는다.)’과 ‘문도합일(文道合一: 글과 도를 하나로 합한다.)’을 내세워 도학가주17의 의리와 고문가주18의 문장 및 진한의 성조(聲調)와 의 규구(規矩: 법도)를 융합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고문관은 요내(姚鼐)주19 · 증국번(曾國藩)주20 등의 명청팔대가(明淸八大家)에게 이어져 청나라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이상 문체개념으로서 고문의 변모양상을 살펴보았다. 결국 진한의 고문과 당송의 고문이 당나라 시대의 고문운동 이후 서로 대립, 갈등하면서, 각 시대 풍기(風氣)에 따라 특징을 달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이 수입된 이래로 줄곧 『문선(文選)』의 영향을 받아 고려 초기까지 변체문이 주로 쓰였다. 한국한문학의 비조(시조)로 불리는 최치원(崔致遠)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산문체의 고문을 사용하여 성공적인 문학 활동을 한 이로는 고려 중엽의 김부식(金富軾)을 꼽는다.

그의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고문체의 문학성이 풍부한 문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송고문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처음 제창된 것은 고려 말엽의 이제현(李齊賢)부터였다. 그의 고문관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과문(科文)의 폐단을 지적한 점 등으로 보면 확고한 고문관이 정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한유와 같은 고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운동은 계기적으로 상당한 인원에 의하여 뚜렷한 양상을 보일 때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제현의 경우는 하나의 고문가로서 뒷날의 고문가들에게 모범이 된 인물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오면 성리학이 도입됨에 따라 고문론자들이 꺼리는 어록체(語錄體)주21 · 주소체(註疏體)의 문장이 보급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체가 대개 이러한 면모를 닮게 되었다. 이수광(李睟光)이 “ 김종직(金宗直)은 동방의 거벽(巨擘)이었지만 속하문자(俗下文字)를 많이 썼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문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그와 같은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최립(崔岦)은 이러한 문풍을 타파하기 위하여, 명나라의 의고문파의 고문이론을 흡수하여 진한고문을 본받고자 하였다. 윤근수(尹根壽) · 신유한(申維翰) 등도 약간 다르지만 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상당한 세력으로 문단을 지배하였다.

허균(許筠)은 의고문을 반대하는 고문이론을 주장하여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고문론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문설(文說)」에서 문답형식을 동원하여 고문을 회복하기 위하여, 옛 명문을 표절하고 험사교어(險辭巧語)주28하는 것은 진정한 고문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송고문의 진정한 가치는 복고에 있지 않고, 바로 자기 시대의 문체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상용어를 그대로가 아닌, 갈고 다듬어 창조하여 사용하는 것이 참다운 고문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허균의 뒤로 장유(張維) · 이식(李植) · 김창협(金昌協) 등이 계속 나타났다. 그들은 종래의 부솔(膚率)주29, 이속(俚俗)주30, 용미(冗靡)주31하던 누습에서 탈피하였다. 그리고 다양하고 참신한 문장을 구사하여 후세 고문가들의 전범(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이 되었다. 이들의 고문관은 의고문을 배격하고, 한결같이 개성 있는 고문론을 강조한 것에서 처지를 같이하고 있다. 장유는 진부한 말을 버리고 창조된 언어로 작문할 것을 강조하였다. 형식보다는 내실을 기할 것과 문장의 화려함보다는 이승(理勝)주22한 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김창협은 『잡지(雜識)』에서 당나라의 한유가 진언(陳言)주23을 버릴 것을 강조한 것은 세속의 용상어(庸常語)만이 아니라 경서주24에 보이는 글이라 해도 옛 사람들이 일단 말하였던 것은 모두 진언으로서 버려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문관에서 보다 강도 있는 개성추구정신을 나타내었다.

이식은 「작문모범(作文模範)」에서 현실적인 문체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시대마다 풍속과 사정이 현격히 차이가 있기에 그 시대에 맞는 고문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의고문파를 배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문가들의 고문관을 계승하면서 보다 혁신적인 내용과 표현을 통한 문학세계를 창조한 이는 박지원(朴趾源)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역사 흐름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체를 창출하여 당시 정조의 ‘문체반정’의 대상인물의 하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의 고문이론은 한마디로 ‘법고이창신(法古而創新 : 옛 것을 기준으로 새것을 만든다.)’이라 하겠다. 이는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그는 복고를 주장하는 의고문파들의 퇴영적 역사의식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발전적으로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고자 하는 최초의 고문운동가들의 정신을 당대의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박지원은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고정 불변하는 예(禮)나 악(樂)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현실에 맞는 문체를 쓰게 되면 오늘날의 글(今文 금문)이 곧 고전적인 가치를 획득한 글(古文 고문)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 결국, 세월의 흐름과 풍속의 변천 속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과 자신의 문제를 진실하게 다루면 자연히 금문이 곧 고문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금문을 통한 고문이론의 설법이다. 매우 독창적이고도 현실성이 강한 점이 특징이다. 그는 실제로 『열하일기』를 통하여 그의 이와 같은 고문관을 구현하고 있다.

홍석주(洪奭周)는 전통적인 주자학을 옹호하면서 청나라의 고증학을 비판하였던 인물이다. 「답이심부서(答李審夫書)」에서 진한고문을 추앙하는 의고문가들을 공격하여 모방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앞서의 고문가들과 맥이 통한다. 그는 도학가적인 취향이 있으면서도 문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많은 논문들이 고문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김매순(金邁淳)은 선대인 창협의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홍석주와 같이 도문일치(道文一致)주25의 문학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답사심서(答士心書)」에서 복고를 함은 형세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적인 소재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당송고문을 통하여 문장의 묘리를 터득하고 나아가 진한고문의 진수를 체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근대의 이건창(李建昌)과 김택영(金澤榮) 또한 모방과 표절을 배격하고 개성 있는 문장을 강조한 사람들이다. 이건창은 글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에 맞게 지을 뿐이라 하였다. 글은 마음에 흡족하면 그만이지 천하후세를 염두에 둘 것이 없다. 더구나 당대의 기림을 바랄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독자성이 강하고 주체적인 관점에 선 문학관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것들과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는 이와 같은 그의 문학관을 실천하기 위하여, 말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 하는 조사(措辭)에 신중을 기하였다.

김택영은 신기(神氣)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글이란 엄정한 구조가 중요하기는 하나 일정한 법칙만을 고수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글에는 변(變)의 묘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 이유는 변하지 않는 중에서도 크게 변해야만 그 법이 생명력을 갖게 되고 문장이 묘한 경지에 이르러 신기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대에 편집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는 앞서의 문인들의 고문선(古文選)으로 한국 고문연구의 지침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하여 본 한국 고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문이란 스스로 일가를 이룬 글이다. 둘째, 시대 현실에 적합한 글로서 그 시대의 진실된 감정을 담고 있는 글이다. 셋째, 진부한 어구나 표현을 쓰지 않고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도(道)를 싣고 있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쓴 글을 고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는 보편적 산문체로서의 고문일반이 가지는 통시적 ·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한문학에서 고문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일정 정도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결된 상태는 아니다. 고문에 대한 심도 있는 개념 정립, 고문가들의 작품 분석, 문학 현상의 출현 배경과 과정을 탐색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각 시대별로 독서계층이 즐겨 읽었던 고전작품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면으로 고문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도 폭넓게 연구해야 한다. 아울러 고문 연구가 옛말의 연구에만 그쳐서는 연구의 의의가 반감될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문체론 내지는 작문론에까지 그 이론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도록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고문 연구가 곧 금문 연구임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연구방향은 자명하다 하겠다.

주석

주1

그 나라 고유의 문학. 또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 우리말샘

주2

고대 중국에서 쓰였던 한자 서체의 하나. 필묵이 쓰이기 전에 쪼갠 대나무 같은 것으로 옻을 묻혀 썼다. 글자 모양이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늘어서 올챙이를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3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 우리말샘

주4

공자의 학설과 학풍 따위를 신봉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학파. 우리말샘

주5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ㆍ학자(B.C.551~B.C.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여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시경≫과 ≪서경≫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에 그의 언행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말샘

주6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7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문 문체.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한다. 우리말샘

참고문헌
『중국문학비평사』(곽소우(郭紹虞), 문사철출판사(文史哲出版社), 1982)
『한국문학사상사시론』(조동일, 지식산업사, 1978)
『연암소설연구』(이가원, 을유문화사, 1965)
『한국한문학사』(이가원, 민중서관, 1961)
『중국문학사』(호문익(胡雲翼), 장기권(張基槿) 역,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61)
「고문의 원류와 성격」(김도련, 『한국학논총』 2,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79)
「영재 이건창과 창강 김택영의 고문관」(김도련, 『한국학논총』 3,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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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 이상은, 한비(韓碑)

https://blog.naver.com/swings81/220888714741 韓碑(한비:한유의 평회서비찬) - 李商隱(이상은) 당시삼백수 권1 칠언고시 73. 韓碑(한비) - 李商隱(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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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碑(한비:한유의 평회서비찬) - 李商隱(이상은)

당시삼백수 권1 칠언고시 73. 韓碑(한비) - 李商隱(이상은) <한유의 평회서비를 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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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회서비(平淮西碑)-한유(韓愈)

평회서비(平淮西碑)-한유(韓愈) 天以唐(천이당) : 하늘은 당나라가 克肖其德(극초기덕) : 선왕의 덕을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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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韓愈), 평회서비(平淮西碑)

 

天以唐

(천이당): 하늘은 당나라가

克肖其德

(극초기덕): 선왕의 덕을 잘 따르고

聖子神孫

(성자신손): 신성한 자손들이

繼繼承承

(계계승승): 연이어 왕업을 계승하여

於千萬年

(어천만년): 천만 년을 두고라도

敬戒不怠

(경계불태): 공경하고 경계하며 게을리 하지 않을 듯 하여

全付所覆

(전부소복): 온 천하를 전부 맡기시었으니

四海九州

(사해구주): 사방 바다 안 중국 땅의

罔有內外

(망유내외): 안팎을 논할 것 없이

悉主悉臣

(실주실신): 전체를 다스리어 모두가 신하노릇을 하게 되었다

高祖太宗

(고조태종): 고조와 태종께서

旣除旣治

(기제기치): 잘 정리하시고 다스리시고

高宗中睿

(고종중예): 고종과 중종 그리고 예종이

休養生息

(휴양생식): 백성들을 쉬면서 보양케 하여 나라의 생산성이 번성하게 되었으며

至于玄宗

(지우현종): 현종에 이르러서는

受報收功

(수보수공): 그 결과를 받아들이어 발전시키니

極熾而豐

(극치이풍): 지극히 왕성하고 풍부해 졌으나

物衆地大

(물중지대): 물산이 많고 땅이 커서

蘖牙其間

(얼아기간): 그 사이에 혼란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肅宗代宗

(숙종대종): 숙종과 대종과

德祖順考

(덕조순고): 덕종, 순종께서는

以勤以容

(이근이용): 부지런하고 너그러이 다스리시어

大慝適去

(대특적거): 큰 죄인 안녹산은 잘 제거하였으나

稂莠不薅

(랑유불호): 가라지풀 같은 잔적은 다 뽑아버리지 못하였다

相臣將臣

(상신장신): 그러나 재상들이나 장수들은

文恬武嬉

(문념무희): 문인으로서 편안히 지내고 무인으로서 즐기기만 하려 하여

習熟見聞

(습숙견문): 보고 듣는 일들에 익숙하여져서

以爲當然

(이위당연): 당연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睿聖文武皇帝

(예성문무황제): 성스러운 문무의 덕을 갖추신 헌종 황제께서는

旣受群臣朝

(기수군신조): 여러 신하들의 입조를 맞이하여

乃考圖數貢

(내고도수공): 여러 고을의 지도를 연구하고

曰嗚呼

(왈오호): 공물을 따져보신 다음 말씀하셨다

天旣全付予有家

:(천기전부여유가) “아! 하늘은 이미 우리에게 온 천하를 내려주시고 다스리게 하시어

今傳次在予

(금전차재여): 지금은 차례를 따라 내게로 왕위가 전하여졌다

予不能事事

(여불능사사): 내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其何以見于郊廟

(기하이견우교묘): 어떻게 하느님과 조상들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群臣震懾

(군신진섭): 이에 여러 신하들은 떨리고 두려워서

犇走率職

(분주솔직):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明年平夏

(명년평하): 다음 해에는 하주의 반적을 평정하고

又明年平蜀

(우명년평촉): 또 다음 해에는 촉 땅의 반적을 평정하고

又明年平江東

(우명년평강동): 다시 다음 해에는 강동을 평정하고

又明年平澤潞

(우명년평택로): 또 다음 해에는 택주와 노주를 평정하고

遂定易定(수정이정)

(수정이정): 다시 역주와 정주를 평정한 뒤에는

致魏博貝衛澶相

(치위박패위단상): 위주, 박주, 패주, 위주, 전주, 상주가 항복해서

無不從志

(무불종지): 뜻을 따르지 않는 일이 없게 되었다

皇帝曰

(황제왈): 황제께서는 이르기를

不可究武

(불가구무): “무력을 끝까지 쓸 수는 없으니

予其少息

(여기소식): 나도 좀 쉬어야 하겠다.”고 하시었다

九年蔡將死

(구년채장사): 원화 9년에 채주의 장수 오소양이 죽자

蔡人立其子

(채인립기자): 채주 사람들이 그의 아들을 내우고자 하였으나

不許遂燒舞陽

(불허수소무양): 윤허가 나지 않자 마침내 무양을 불태우고

犯葉襄城

(범섭양성): 섭과 양성을 침범하여

以動東都

(이동동도): 동도 낙양을 소동케하며

放兵四劫

(방병사겁): 군사들을 풀어 사방을 약탈하였다.

皇帝歷問于朝

(황제력문우조): 황제께서는 조정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대책을 물으셨으나

一二臣外

(일이신외): 한 두 신하 이외에는

皆曰

(개왈): 모두 말하기를,

蔡帥之不庭授

:(채수지부정수) “패주의 장수가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于今五十年

(우금오십년): 지금까지 오십 년이나 됩니다

傳三姓四將

(전삼성사장): 그 사이 세 성의 네 장수에게 전하여지며

其樹本堅

(기수본견): 그 뿌리가 굳게 박히었고

兵利卒頑

(병리졸완): 무기가 좋은 위에 병졸들도 완고해서

不與他等

(불여타등): 다른 곳과 같지 않습니다

因撫而有

(인무이유): 그러니 잘 달래어 거느리어야

順且無事

(순차무사): 순종하게 되고 무사할 것입니다.” 하였다

大官臆決唱聲

(대관억결창성): 대관들이 멋대로 결단을 내리고 소리쳐 아뢰니

萬口和附

(만구화부): 모든 사람들의 입이 이에 부화하여

幷爲一談

(병위일담) 다 같이 한가지 이야기만 하여

牢不可破

(뢰불가파): 그 굳은 뜻을 깨칠 수가 없을 듯하였다.

 

皇帝曰

(황제왈):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惟天惟祖宗

(유천유조종): “하늘과 조상들께서

所以付任予者

(소이부임여자): 내게 막중한 책임을 부여한 까닭은

庶其在此

(서기재차): 아마도 이런 때를 위해서일 것이니

予何敢不力

(여하감불력): 내 어찌 노력하지 않겠는가

況一二臣同

(황일이신동): 하물며 한 두 명의 신하들은 내게 찬동하고 있으니

不爲無助

(불위무조): 돕는 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曰光顔

(왈광안): 이광안이여,

汝爲陳許帥

(여위진허수): 그대를 진주와 허주를 함께 다스리는 충무절도사에 임명하니

維是河東魏博郃陽三軍之在

(유시하동위박합양삼군지재행자) : 하동의 위주, 박주, 함양의 행영 중에 있는 삼군을

汝皆將之

:(여개장지) 그대가 모두 통솔하도록 하시오

曰重胤

(왈중윤): 오중윤이여,

汝故有河陽懷

(여고유하양회): 그대는 본시 하양과 회주를 맡고 있었으나

今益以汝

(금익이여): 이제 여주도 그대에게 덧붙여주니

維是朔方義成陝益鳳翔

(유시삭방의성섬익봉상): 북방의 의주, 성주, 협주, 익주, 봉상,

延慶七軍之在行者

(연경칠군지제행자)를: 연주, 경주의 행영 중에 있는 칠군을

汝皆將之

(여개장지): 그대가 모두 통솔하도록 하시오

曰弘

(왈홍): 한홍이여,

汝以卒萬二千

(여이졸만이천): 그대는 만이천 명의 군사로

屬而子公武

(속이자공무): 그대의 아들 공무와 연락하여

往討之

(왕토지):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오

曰文通

(왈문통): 이문통이여,

汝守壽

(여수수): 그대는 수주를 수비하고 있으니

維是宣武淮南宣歙浙西四軍之行于壽者

(유시선무회남선흡절서사군지행우수자): 선무, 회남, 선섭, 절서의 사군으로써 수주에 행영하고 있는 군대를

汝皆將之

(여개장지): 그대가 모두 통솔하도록 하시오

曰道古

(왈도고): 이고도여,

汝其觀察鄂岳

(여기관찰악악): 그대는 악주와 악주의 관찰사의 소임을 맡으시오

曰愬

(왈소): 이소여,

汝帥唐鄧隨

(여수당등수): 그대는 당주, 등주, 수주의 절도사이니

各以其兵

(각이기병): 따로 그 곳 군대로서

進戰

(진전): 나아가 싸우도록하시오

曰度

(왈도): 배도이시여

汝長御史

(여장어사): 그대는 어사중승이니

其往視師

(기왕시사): 가서 군사들을 돌보도록 하시오

曰度

(왈도): 배도여,

惟汝予同

(유여여동): 그대야말로 나와 뜻이 같으니

汝遂相予

(여수상여): 그대는 내 재상이 되어

以賞罰用命不用命

(이상벌용명불용명): 명을 잘 받드는가 받들지 못하는가를 따져 상이나 벌을 내리도록 하시오

曰弘

(왈홍): 한홍이여,

汝其以節度

(여기이절도): 그대는 절도사로서

都統諸軍

(도통제군): 제군도통도 겸하도록하시오

曰守謙

(왈수겸): 양수겸이여,

汝出入左右

(여출입좌우): 그대는 내 가까이 출입하는 벼슬로써

汝惟近臣

(여유근신): 가까운 신하이니 가서

其往撫師

(기왕무사): 군사들을 선무토록 하시오

曰度

(왈도): 배도여,

汝其往

(여기왕): 그대는 가서

衣服飮食予士

(의복음식여사): 의복과 음식을 군사들에게 대어주어

無寒無飢

(무한무기): 헐벗고 굶주리지 않도록 함으로써

以旣厥事

(이기궐사): 그 일을 완수하여

遂生蔡人

(수생채인): 채주 사람들을 잘 살게해주기를 바라오

賜汝節斧(사여절부)

(사여절부): 그대에게 절부와

通天御帶

(통천어대): 통천어대와

衛卒三百

(위졸삼백): 위졸 삼백 명을 내리는 바이오

凡玆廷臣

(범자정신): 여러 조정의 신하들은

汝擇自從

(여택자종): 그대가 택하여 자신을 따르도록 하되

惟其賢能

(유기현능): 오직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택할 것이며

無憚大吏

(무탄대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꺼리지 말고 택하시오

庚申予其臨門送汝

(경신여기임문송여): 경신 날에 내가 문 앞에서 그대를 전송토록 하겠소

曰御史

(왈어사): 어사여,

予閔士大夫戰甚苦

(여민사대부전심고): 사대부들이 싸움에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나는 매우 가엾게 여기고 있으니

自今以往

(자금이왕): 지금부터는

非郊廟祭祀

(비교묘제사): 교묘의 제사를 제외하고는

其無用樂

(기무용락):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顔胤武

(안윤무): 이광안과 오중윤과 한공무가

合攻其北

(합공기북): 그들의 북방을 함께 공격하여

大戰十六

(대전십육): 열 여섯 번 크게 싸우며

得柵城縣二十三

(득책성현이십삼): 성책과 고을 스물세 곳을 뺏고서

降人卒四萬

(강인졸사만): 만 명의 군졸을 항복케 하였다.

道古攻其東南

(도고공기동남): 이도고는 그들의 동남쪽을 공격하여

八戰降卒萬三千

(팔전강졸만삼천): 여덟 번 싸우면서 군졸 삼천 명을 항복케 하고

再入申

(재입신): 다시 신주로 들어가

破其外城

(파기외성): 그 외성을 파괴하였다

文通戰其東

(문통전기동): 이문통은 그 곳 동쪽에서

十餘遇

(십여우): 십여 차례나 싸워

降萬二千

(강만이천): 만 이천명을 항복케 하였다

愬入其西

(소입기서): 이소는 그 곳 서쪽으로 처들어가

得賊將

(득적장): 적장들을 사로잡았으나

輒釋不殺

(첩석불살): 그 때마다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는데,

用其策

(용기책): 그러한 계책을 씀으로써

戰比有功

(전비유공): 싸움에는 더욱 큰 공을 끼쳤었다.

十二年八月

(십이년팔월): 원화 십이 년 팔월에

丞相度至師

(승상도지사): 승상 배도가 군중에 이르니

都統弘

(도통홍): 도통인 한홍은

責戰益急

(책전익급): 더욱 다급히 싸움을 독촉하였다

顔胤武

(안윤무): 이광안, 오중윤, 한공무가

合戰益用命

(합전익용명): 합쳐 싸우며 더욱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니

元濟盡幷其衆洄曲以備

(원제진병기중회곡이비): 오원제는 그의 무리들을 모두 모아 희곡에서 대비하였다

十月壬申

(십월임신): 시월 임신일에

愬用所得賊將

(소용소득적장): 이소는 그가 잡은 적장을 이용하여

自文城

(자문성): 문서으로부터

因天大雪

(인천대설): 큰 군이 내리는 날에

疾馳百二十里

(질치백이십리): 백이십리나 급히 달려가

用夜半到蔡

(용야반도채): 한 밤중에 채주에 이르러

破其門

(파기문): 그 성문을 깨뜨리고

取元濟以獻

(취원제이헌): 오원제를 잡아 바친 뒤에

盡得其屬人卒

(진득기속인졸): 그의 부하들도 모두 사로잡았다

辛巳丞相度入蔡

(신사승상도입채): 신사일에 승상 배도가 채주로 들어와서

以皇帝命

(이황제명): 황제의 명으로

赦其人

(사기인): 그 곳 사람들을 용서하니

淮西平

(회서평): 회서지방이 평정되었다

大饗功 

(대향뢰공): 크게 잔치를 벌이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師還之日

(사환지일): 군대가 개선하는 날에는

因以其食

(인이기식): 그 때 장만했던 음식들을

賜蔡人

(사채인): 채주 사람들에게도 내려 주었다.

凡蔡卒三萬五千

(범채졸삼만오천): 그리고 채주의 군졸 삼만오천 명 중

其不樂爲兵

(기불락위병): 병졸 노릇을 좋아하지 않고

願歸爲農者十九

(원귀위농자십구): 돌아가 농사를 짓기 바라는 자들이 열 명에 아홉 명 꼴이었는데

悉縱之

(실종지): 그들을 모두 놓아주었다

斬元濟於京師

(참원제어경사): 오원제는 경사에서 목이 잘리었다

冊功

(책공): 공로를 따져

弘加侍中

(홍가시중): 한홍에게는 시중 벼슬이 가해지고

愬爲左僕射

(소위좌복사): 이소는 좌복야가 되어

帥山南東道

(수산남동도): 산남동도의 절도사도 겸하였다

顔胤皆加司空

(안윤개가사공): 이광안, 오중윤에게는 모두 사공 벼슬이 보태어지고

公武以散騎常侍

(공무이산기상시): 한공무는 산기상시로써

帥鄜坊舟延

(수부방주연): 부방단연의 절도사도 겸하게 되었다

道古進大夫

(도고진대부): 이도고는 대부로 승진하였고

文通加散騎常侍

(문통가산기상시): 이문통은 산기상시 벼슬이 보태어졌다

丞相度朝京師

(승상도조경사): 승상 배도가 경사로 돌아와

進封晉國公

(진봉진국공): 황제께 나아가니 진국공으로 봉해지고

進階金紫光祿大夫

(진계금자광록대부): 금자광록대부로 승진한 뒤

以舊官相

(이구관상): 옛 벼슬대로 승상 직책을 그대로 맡게 되었으며,

而以其副摠

(이이기부총): 그의 부사였던 마총은

爲工部尙書

(위공부상서): 공부상서가 되어

領蔡任

(령채임): 채주를 다스리는 자사가 되었었다

旣還奏

(기환주): 돌아와 전공을 상주하고 나자

群臣請紀聖功

(군신청기성공): 여러 신하들이 위대한 공로를 기록하여

被之金石

(피지금석): 쇠나 돌에 새겨놓을 것을 요청하였다

皇帝以命臣愈

(황제이명신유): 황제께서는 그것을 나 한유에게 명하셨으니

臣愈

(신유): 나[한유]는

再拜稽首而獻

(재배계수이헌문):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올리게 된 것이다

 

曰唐承天命

(왈당승천명): 당나라가 천명을 받들어

遂臣萬方

(수신만방): 온 천하를 신하로 삼았으니

孰居根土

(숙거근토): 누가 가까운 땅에 살면서

襲盜以狂

(습도이광): 반란과 도둑질로 미쳐 날뛰랴

往在玄宗

(왕재현종): 지난 날 현종 때에는

崇極而圮

(숭극이비): 극도로 흥성했다 무너졌었네

河北悍驕

(하북한교): 하북 지방엔 악독하고 교만한 자들 생기고

河南附起

(하남부기): 하남 지방에선 이를 따라 반란을 일으키니

四聖不宥

(사성불유): 숙종, 대종, 덕종, 순종의 네 성왕께선 용서치 않으시고

屢興師征

(누흥사정): 여러 번 군사 일으키어 정벌하셨고

有不能克

(유불능극): 다 평정하지 못한 경우엔

益戍以兵

(익수이병): 병졸로써 수비를 강화하였네

夫耕不食

(부경불식): 남자들은 농사지어도 먹지 아니하고

婦織不裳

(부직불상): 부인들은 길쌈하여도 입지 아니하며,

輸之以車

(수지이거): 그것들을 수레로 날라다가

爲卒賜糧

(위졸사량): 병졸들의 군량으로 대어주었었네

外多失朝

(외다실조): 그러나 밖으로는 내조하지 않은 자가 많아져서

曠不嶽狩

(광불악수): 오랜 동안 사악을 순수하지 않게 되었고

百隷怠官

(백례태관): 여러 관리들은 업무에 태만하여

事亡其舊

(사망기구): 나라 일 옛날 같지 않게 되었네

帝時繼位

(제시계위): 현종 황제께서는 이런 때 왕위를 이으시어

顧膽咨嗟

(고담자차): 사방을 도아보고 한탄하셨네

惟汝文武

(유여문무): “그대들 문무 백관들이여

孰恤予家

(숙휼여가): 누가 우리 왕실을 구제해 주겠는가?”

旣斬吳蜀

(기참오촉): 그리고 오와 촉 지방을 평정하시고

旋取山東

(선취산동): 곧 산동 지방도 되찾았으며

魏將首義

(위장수의): 위박 절도사가 가장 먼저 의로움을 깨달아

六州降從

(육주강종): 여섯 주를 가지고 항복해 왔었네

淮蔡不順

(회채불순): 회서, 패주만은 순종하지 않고

自以爲强

(자이위강): 스스로 강하다 여기고서

提兵叫讙

(제병규환): 군사를 이끌고 시끄러이 굴며

欲事故常

(욕사고상): 옛날대로 버티려 하였었네

始命討之

(시명토지): 비로소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지니

遂連姦鄰

(수연간린): 그들은 마침내 이웃의 간사한 자들과 결탁하고

陰遣刺客

(음견자객): 몰래 자객을 보내어

來賊相臣

(래적상신): 재상 무원형을 해쳤었네

方戰未利

(방전미리): 막 싸우기 시작하자 불리한 일이 생기니

內驚京師

(내경경사): 안으로 온 장안을 경동시켰고

群公上言

(군공상언): 여러 신하들은 상주하여

莫若惠來

(막약혜래): 은혜로써 달래는게 좋을 것이라 하였었네

帝爲不聞

(제위불문): 황제께서는 듣지 아니하고

與神爲謀

(여신위모): 천신에게 의논하시어

乃相同德

(내상동덕): 뜻이 같은 이들을 재상으로 삼으시고

以訖天誅

(이흘천주): 하늘의 주벌을 내리게 하셨네

乃勅顔胤

(내칙안윤): 이에 이광안, 오중윤과

愬武古通

(소무고통): 이소, 한공무, 이도고, 이문통에게 명을 내리어

咸統於弘

(함통어홍): 모두 한홍의 통솔을 받으며

各奏汝功

(각주여공): 각각 자신들의 공로를 발휘하게 하셨네

三方分攻

(삼방분공): 이들이 세 방향으로 나뉘어 공격하니

五萬其師

(오만기사): 그 군대는 오만 명이었고

大軍北乘

(대군북승): 대군이 북쪽에서 가세하니

厥數倍之

(궐수배지): 병력은 두 배가 되었다네

嘗兵洄曲

(상병회곡): 회곡을 치고 나니

軍士蠢蠢

(군사준준): 적병들은 어지러워졌고

旣翦陵雲

(기전릉운): 능운을 뺏고 나니

蔡卒大窘

(채졸대군): 채주의 졸개들은 크게 궁지에 몰렸었네

勝之邵陵

(승지소릉): 소릉에서도 싸워 이기니

郾城來降(언성래강)

(언성래강): 언성이 항복하여왔으나,

自夏及秋

(자하급추):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는

複屯相望

(복둔상망): 거듭 군대를 머물게 관망하기만 했었네

 

兵頓不勵

(병돈불려): 싸움 멈추고 힘쓰지 않자

告功不時

(고공불시): 보고되어 오는 전과가 불리해졌는데

帝哀征夫

(제애정부): 황제께서는 출정한 군인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命相往釐

(명상왕리): 승상에게 명하시어 가서 돌보아주도록 하시니

士飽而歌

(사포이가): 군사들은 배불리 먹고 노래하며 사기 드높고

馬騰於槽

(마등어조): 말도 말구유 위로 뛰어오르며

試之新城

(시지신성): 싸우려하게 되었네. 그들을 신성에서 싸우도록 하여보니

賊遇敗逃

(적우패도): 적은 마나자마자 패하여 달아났네

盡抽其有

(진추기유): 그 곳에 있는 적들을 모두 무찌르고

聚以防我

(취이방아): 다시 군사를 모아 우리 편을 방위하게 하고는

西師躍入

(서사약입): 서편 군대로 하여금 쳐들어가게 하니

道無留者

(도무유자): 길에는 남아있는 적이 없게 되었네

頟頟蔡城

(액액채성): 편안할 날 없던 채주성은

其疆千里

(기강천리): 그 땅이 사방 천리인데

旣入而有

(기입이유): 쳐들어가 점령하자

莫不順俟

(막불순사): 순종하며 처분을 기다리지 않은 자가 없었네

帝有恩言

(제유은언): 황제께선 은혜로운 말씀을

相度來宣

(상도래선): 승상 배도로 하여금 와서 선포하게 하니

誅止其魁

(주지기괴): 처벌은 그들 괴수에게만 그치고

釋其下人

(석기하인): 그 아래 사람들은 모두 놓아 준다는 것이었네

蔡人卒夫

(채인졸부): 채주의 졸개들은

投甲呼舞

(투갑호무): 갑옷을 벗어던지고 소리치며 춤추고

蔡之婦女

(채지부여): 채주의 부녀자들은

迎門笑語

(영문소어): 문 앞에 나와 마주보며 웃고 이야기하였네

蔡人告飢

(채인고기): 채주의 사람들이 굶주림을 호소하자

船粟往哺

(선속왕포): 배로 곡식을 나라다가 먹여주고

蔡人告寒

(채인고한): 채주의 사람들이 헐벗음을 호소하자

賜以繒布

(사이증포): 비단과 무명을 나누어 주었네

始時蔡人

(시시채인): 처음엔 채주 사람들이

禁不往來

(금불왕래): 서로 왕래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今相從戱

(금상종희) 이제는 서로 희롱까지 하면서

里門夜開

(리문야개): 마을 문을 밤에도 닫지 않고 열어놓게 되었네

始時蔡人

(시시채인): 처음엔 채주 사람들이

進戰退戮

(진전퇴륙): 싸우러 나갔다간 죽어 돌아왔는데

今旰而起

(금간이기): 이제는 늦게 일어나

左餐右粥

(좌찬우죽): 밥도 먹고 죽도 먹게 되었네

爲之擇人

(위지택인): 그들 위해 사람을 골라주어

以收餘憊

(이수여비): 남은 피곤을 회복시켜주도록 하고

選吏賜牛

(선리사우): 관리들을 골라 뽑아 소도 내려주며

敎而不稅

(교이불세): 잘 교화하되 세금은 거둬들이지 아니했네

蔡人有言

(채인유언): 채주 사람들은 말하기를

始迷不知

(시미부지): 전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했으나

今乃大覺

(금내대각): 지금에 와서야 크게 깨닫고 보니

羞前之爲

(수전지위): 전날의 행위가 부끄럽다 하였네

蔡人有言

(채인유언): 채주 사람들이 말하기를

天子明聖

(천자명성): 천자께서 명철하고 성스러우시니

不順族誅

(불순족주): 순종하지 않으면 온 집안이 처벌받을 것이나

順保性命

(순보성명): 순종하면 생명을 잘 보존하게 된다 하였네

汝不吾信

(여불오신): 그대들 나를 못 믿겠거든

視此蔡方

(시차채방): 이 채주지방을 보라

孰爲不順

(숙위불순): 그 누가 순종 않으리오

往斧其吭

(왕부기항): 가서 그의 목을 도끼질 할 것인데

凡叛有數

(범반유수): 반란을 꾀하는 자 아직도 여럿 있어

聲勢相倚

(성세상의): 기세를 믿고 서로 의지하고 있으나

吾强不支

(오강불지): 우리의 강함을 의지하지 못하겠다 하면서

汝弱奚恃

(여약해시): 그대들의 약함을 어찌 의존하겠는가

其告而長

(기고이장): 가서 그대들 어른과

而父而兄

(이부이형): 그대들 부형들에게 고하여

奔走偕來

(분주해래): 급히 함께 달려와

同我太平

(동아태평): 우리와 함께 태평을 누리세

淮蔡爲亂

(회채위란) 회서의 채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天子伐之

(천자벌지): 천자께서 이들을 토벌하셨고

旣伐而飢

(기벌이기): 토벌한 뒤 이들이 굶주리자

天子活之

(천자활지): 천자께선 이들을 먹여 살리셨네

始議伐蔡

(시의벌채): 처음 채주 토벌을 의논할 적에는

卿士莫隨

(경사막수): 대신들이 아무도 따르지 아니하였고

旣伐四年

(기벌사년): 토벌을 시작한지 4 년이 되어도

小大幷疑

(소대병의): 위 아래 신하들이 모두 의심만 했었네

不赦不疑

(불사불의): 반란을 용서치 않고 토벌을 의심치 않은 것은

由天子明

(유천자명): 천자의 명철하심으로 말미 암은 것이었네

凡此蔡功

(범차채공): 이 채주 정벌의 공은

惟斷乃成

(유단내성): 오직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일세

旣定淮蔡

(기정회채): 회서의 채주를 안정시키고 나니

四夷畢來

(사이필래): 사방의 오랑캐들까지도 모두 내조하게 되었네

遂開明堂

(수개명당): 이에 명당을 열어놓고 앉아서

坐以治之

(좌이치지): 나라 다스리게 된 것일세

 

<참고>

▲한유(韓愈;768년~824년)는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 정치 · 사상가.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평회서비(平淮西碑)는

당나라 헌종(憲宗)이 배도(裵度)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오원제의 반란을 토벌한 뒤의 회서선무처치사로 가게 했는데

이때 한유가 배도의 행군사마로 참전했다

난을 토벌한 후 헌종은 한유에게 平淮西碑文을 짓게 해서 지은 글이다

평회서비 동영상

https://youtu.be/FfxMH2vGl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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