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 스님의 신통력

釋惠空 天眞公之家傭嫗之子 小名憂助(盖方言也)

혜공(惠空) 스님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였다.

憂助, 방언(方言)인 듯하다.

公嘗患瘡濱於死 而候慰塡街 憂助年七歲

謂其母曰 家有何事 賓客之多也

천진공이 종기를 앓아 거의 죽을 지경에 빠졌다.

그러자 문병하는 사람으로 거리가 메워질 정도가 되었다.

이때 우조의 나이 7세였는데, 어머니에게 물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요? 웬 손님이 이렇게 많아요?”

母曰 家公發惡疾將死矣 爾何不知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어르신[家公]께서 몹쓸 병이 걸려 곧 돌아가시게 생겼구나.

뭘 하느라고 넌 그것도 알지 못했니?”

家公, 보통은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부르는 말.

여기서는 제가 섬기는 주인을 가리킨다

助曰 吾能右之

우조가 말하였다.

“제가 그 병을 고쳐[右] 보겠습니다.”

母異其言 告於公 公使喚來 至坐床下 無一語

須庾瘡潰 公謂偶爾 不甚異之

어머니가 이상하게 여겨 공에게 아뢨더니 공이 그를 오라고 불렀다.

오더니 침상 아래 앉았는데 한 마디도 뻥긋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앓고 있던 공의 종기가 갑자기 터졌다.

공은 우연이려니 싶어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旣壯 爲公養鷹 甚愜公意 初公之弟 有得官赴外者 請公之選鷹歸治所

우조는 천진공을 위해 매를 길렀는데, 그 솜씨가 공의 마음에 썩 들었다.

한 번은 공의 아우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공이 골라 준 좋은 매를 가지고 임지로 갔다.

一夕公忽憶其鷹 明晨擬遣助取之 助已先知之 俄頃取鷹 昧爽獻之

公大驚悟 方知昔日救瘡之事 皆叵測也 謂曰

어느 날 밤이었다. 공이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 새벽이 오면 우조를 시켜

매를 가져오게 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우조가 이것을 미리 알고 단걸음에 달려가 새벽녘에 매를 공에게 바쳤다.

공은 화들짝 놀라 깨닫고는, 그제야 지난번에 종기를 고쳤던 일이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고 말하였다.

僕不知至聖之托吾家 狂言非禮汚辱之 厥罪何雪

而後乃今願爲導師 導我也 遂下拜

“우리 집에 덕이 지극한 성인(聖人)께서 와 계신 것도 모르고 몹쓸 말을

지껄이고 무례한 짓을 저질러 욕을 보였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부디 도사(導師)가 되어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공은 마당으로 내려가 절을 올렸다.

靈異旣著 遂出家爲僧 易名惠空

常住一小寺 每猖狂大醉 負簣歌舞於街巷 號負簣和尙

所居寺因名夫蓋寺 乃簣之鄕言也

이렇게 신령스럽고 이상한 영험을 나타낸 탓에 우조는 승려가 되어 이름도 고쳐

혜공(惠空)

이라 하였다. 스님은 작은 암자에 살았다. 매양 미친 듯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면

삼태기를 진 채 거리를 나돌아 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이 때문에 그를 사람들은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불렀다.

또 그가 있는 절은 부개사(夫蓋寺)라 불렀데, ‘부개’는 우리말로 삼태기다.

每入寺之井中 數月不出 因以師名名其井

每出有碧衣神童先湧 故寺僧以此爲候 旣出 衣裳不濕

암자에 있는 우물 속에 들어가서는 몇 달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우물도 이름을 스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우물 속에 있다가 나올 때면 푸른 옷을 입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 나왔기

때문에 사찰 승려들은 이것으로 스님이 언제 나올지 짐작하였다.

스님은 우물에서 나왔어도 옷은 젖지 있지 않았다.

晩年移止恒沙寺(今迎日縣吾魚寺 諺云恒沙人出世 故名恒沙洞)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다.

세상에서는 항하사(恒河沙)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했기 때문에 항사동

(恒沙洞)이라 한다고 하였다)에 가 지냈다.

時元曉撰諸經疏 每就師質疑 或相調戱*

이때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여러 불경(佛經)들의 소(疏)를 찬술(撰述)

하고 있었는데, 궁금한 점이 있으면 혜공 스님에게 가서 묻고

또 서로 장난을 치기도하였다.

調戱, 말로 서로 희롱함.

一日二公沿溪掇魚蝦而啖之 放便於石上

公指之戱曰 汝屎吾魚

어느 날 혜공 스님과 원효 스님이 절 앞을 흐르는 시내를 따라 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서 대변을 보았다.

혜공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조로 말하였다.

“그대가 싼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

故因名吾魚寺 或人以此爲曉師之語 濫也 鄕俗訛呼其溪曰芼矣川

그러므로 사찰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로 고쳐 불렀다.

어떤 이는 이 말을 한 사람이 원효 스님이라 하지만 잘못이다.

세상에서는 그 시내를 모의천(芼矣川)이라 잘못 부르고 있다.

吾魚寺,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 운제산에 있는 사찰

瞿旵公嘗遊山 見公死僵於山路中 其屍⺼逢脹 爛生虫蛆

悲嘆久之 及廻轡入城 見公大醉歌舞於市中

어느 날 구참공(瞿旵公)이 산에 갔다가 혜공 스님이 산길에서 죽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시체는 살이 부어터지고 썩어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이 꼴을 본 그는 한참을 슬피 탄식하다가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왔다.

그랬는데 혜공 스님은 술에 만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又一日將草索綯 入靈廟寺 圍結於金堂 與左右經樓及南門廊廡

告剛司 此索須三日後取之

또 한 번은 풀로 새끼를 꼬아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 금당(金堂)과 좌우에 있는

경루(經樓), 남문의 낭무(廊廡)를 묶더니 강사(剛司)에게 말하였다.

“사흘 뒤에 풀도록 하라.”

剛司異焉而從之 果三日善德王駕幸入寺

志鬼心火出燒其塔 唯結索處獲免

강사가 이상히 여겼지만 그 말을 좇았다. 과연 사흘 만에 선덕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탑을 불태웠는데,

새끼로 묶어둔 곳만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志鬼, 신라 선덕여왕 때 사람. 여왕을 사모하다 야위어갔다.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여왕을 기다리던 지귀는 탑 아래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자 여왕은 팔찌를 벗어 지귀의 가슴에 얹어놓고 갔다.

잠에서 깨 팔찌를 발견한 지귀는 잠든 사이 여왕이 다녀간 것을 알고 사모의 정이

불타 불귀신이 되었다. 이를 들은 여왕이 술사(術士)에게 주문을 짓게 하였다.

又神印祖師明郎 新創金剛寺 設落成會 龍象畢集 唯師不赴

朗卽焚香虔禱 小選公至

또 신인종(神印宗)*의 조사 명랑(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많은 고승들이 모였지만 유독 혜공 스님만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스레 기도를 올렸더니 조금 후 스님이 왔다.

神印宗, 신인은 범어 문두루(文豆婁)의 번역. 신라의 명랑(明朗)이 632년

(진덕여왕 1) 당나라에 가서 법을 배우고 돌아와 세운 종파다)

金剛寺, 경북 경주시에 있던 사찰.

時方大雨 衣袴不濕 足不沾泥

마침 소나기가 쏟아지는 중이었는데, 스님의 옷은 전혀 젖지 않았을뿐더러

발에도 진흙이 묻지 않았다.

謂明朗曰 辱召懃懃 故玆來矣

혜공 스님이 명랑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은근히 부르기에 왔소이다.”

靈迹頗多 及終 浮空告寂 舍利莫知其數

이처럼 스님에게는 신령스러운 행적이 자못 많았다. 세상을 떠날 때는 공중에

떠서 입적했는데, 사리(舍利)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嘗見肇論曰 是吾昔所撰也

일찍이 스님이 <조론(肇論)>*을 보더니 말하였다.

“이건 내가 옛날에 지은 글이야.”

肇論, 후진(後秦)의 승조(僧肇)가 지은 책.

물불천론(物不遷論)과 불진공론(不眞空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열반무명론

(涅槃無名論)의 넷으로 되어 있다.

삼론종(三論宗)에서 말하는 만유제법(萬有諸法)이 자성이 없어 공하지만

상대적 공이 아니고, 언어사려가 끊어진 절대적 묘공(妙空)이라는 이치를

말한 책.

乃知僧肇之後有也

이것으로 스님이 승조(僧肇)*의 후신인 것을 알 수 있다.

僧肇, 383-414. 중국 스님. 장안 사람. 구마라집 문하 4철(哲)의 하나.

讚曰

찬(讚)한다.

草原縱獵床頭臥

풀밭에서 마구 사냥하다 침상 위에 누웠고

酒肆狂歌井底眠

술집에서 미친 듯 노래하더니 우물 속에서 잠을 자네.

隻履浮空*何處去

한 짝 신발 남기고 공중에 떠서는 어디로 가셨는지

一雙珍重火中蓮

한 쌍의 귀하고 귀한 불꽃 속의 연꽃이로다.

隻履척리(-혜공이 죽은 후에 무덤에 남아있던 신발 한짝)

浮空부공(혜공이 죽은후 공중에 떠서 사라진 것을 이름)

[참고]심화요탑설화 또는 지귀설화로 알려진 <삼국유사>의 내용은 이 조항 속의

영묘사의 화재사건과 관련된 아래의 내용뿐이다.

又一日將草索綯 入靈廟寺 圍結於金堂 與左右經樓及南門廊廡

告剛司 此索須三日後取之

또 한 번은 풀로 새끼를 꼬아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 금당(金堂)과 좌우에 있는

경루(經樓), 남문의 낭무(廊廡)를 묶더니 강사(剛司)에게 말하였다.

“사흘 뒤에 풀도록 하라.”

剛司異焉而從之 果三日善德王駕幸入寺

志鬼心火出燒其塔 唯結索處獲免

강사가 이상히 여겼지만 그 말을 좇았다. 과연 사흘 만에 선덕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탑을 불태웠는데,

새끼로 묶어둔 곳만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二惠同塵 [삼국유사 권4,義解 5]

혜숙 · 혜공 스님, 풍진세상[속세]에 함께 살다

 

http://blog.daum.net/every-thing/8535693

 

혜숙(惠宿) 스님

 

釋惠宿 沉光於好世郞徒 郞旣讓名黃卷 師亦隱居赤善村(今安康縣有赤谷村)二十餘年

  석혜숙 침광어호세랑도 랑기양명황권 사역은거적선촌(금안강현유적곡촌)이십여년

혜숙(惠宿) 스님은 화랑 호세랑(好世郞)의 무리 속에 있다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호세랑은 황권(黃卷, 화랑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 버렸고, 혜숙이 적선촌(赤善村)*에

숨어서 산 지도 20여 년이나 지났다.

 

時國仙瞿旵公嘗往其郊 縱獵一日 宿出於道左 攬轡而請曰

 

시국선구참공상왕기교 종렵일일 숙출어도좌 람비이청왈

어느 날 국선(國仙) 구참공(瞿旵公)이 적선촌 들판에서 하루종일 사냥을 한 덕이 있었다.

혜숙 스님이 길가[道左]에 나가 말고삐를 잡고 부탁하였다.

*赤善村(적선촌), 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

 

庸僧亦願隨從 可乎

용승역원수종 가호

“용승(庸僧)*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어떠신지요?”

*庸僧(용승), 용렬한 승려. 자신을 낮추어 부른 말.

 

公許之 於是縱橫馳突 裸袒相先 公旣悅

공허지 어시종횡치돌 라단상선 공기열

  공이 허락하자, 스님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달리며 옷을 벗어부치고[裸袒] 앞을 다투니

공이 몹시 기뻐하였다.

 

及休勞坐 數炮烹相餉 宿亦與啖囓 略無忤色 

급휴로좌 수포팽상향 숙역여담설 략무오색 

잠시 앉아 쉬면서 잡은 짐승의 고기를 굽고 삶아 주거나 받거니 하는데, 혜숙 스님 역시

같이 먹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旣而進於前曰 今有美鮮於此 益薦之何

기이진어전왈 금유미선어차 익천지하

이윽고 공의 앞에 나가 말하였다.

“맛있고 신선한 고기가 여기 있어 좀 더 드리려는데 어떠신지요?”

 

公曰,善. 宿屛人割其股 寘盤以薦 衣血淋漓

공왈선 숙병인할기고 치반이천 의혈림리

공이 좋다고 말하자,

스님은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소반에 올려 바쳤다.

스님의 옷에서는 선혈(鮮血)이 줄줄 흘러내렸다.

 

公愕然曰 何至此耶

공악연왈 하지차야

공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宿曰 始吾謂公仁人也 能恕己通物也 故從之爾

숙왈 시오위공인인야 능서기통물야 고종지이

스님이 대답하였다.

“처음에 저는 공은 어진 분이어서 능히 자기 몸을 미루어 짐승에까지 미치리라 생각하고

따라왔던 것입니다.

 

 

今察公所好 唯殺戮之耽 篤害彼 自養而已

금찰공소호 유살륙지탐 독해피 자양이이

그런데 지금 공께서 좋아하시는 바를 보니,

그저 죽이는 것만을 즐겨 자기 몸만 봉양할 뿐입니다.

 

豈仁人君子之所爲 非吾徒也 遂拂衣而行

기인인군자지소위 비오도야 수불의이행

이것이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도리겠습니까.

이는 우리와 뜻을 함께 하는 무리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더니 옷깃을 떨치며 가버렸다.

 

公大慚 視其所食 盤中鮮胾不滅 

공대참 시기소식 반중선자불멸 

공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스님이 먹던 고기를 보니 소반 위의 고기는 한 점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公甚異之 歸奏於朝 

공심이지 귀주어조 

공이 몹시 기이하게 여겨 돌아와 조정에 아뢰자

 

眞平王聞之 遣使徵迎 

진평왕문지 견사징영 

진평왕(眞平王)이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였다. 

 

    

宿示臥婦床而寢 中使陋焉 返

숙시와부상이침 중사루언 반

그런데 스님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 자고 있는 것을 본 중사

(中使)*가 더럽다 여겨 말도 전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行七八里 逢師於途 問其所從來

행칠팔리 봉사어도 문기소종래

그런데 7·8리쯤 걸어가는데 혜숙을 만났다.

중사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니,

 

曰 城中檀越家 赴七日齋 席罷而來矣

왈, 성중단월가 부칠일재 석파이래의

스님이 대답하였다.

“성 안에 있는 시주(施主)집에 가, 칠일재(七日齋)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네.”

*中使(중사), 궁궐에서 명령을 전하는 내시.

 

中使以其語達於上 又遣人檢檀越家 其事亦實 

중사이기어달어상 우견인검단월가 기사역실

중사가 전말을 왕에게 아뢰자 사람을 보내어 시주 집에 알아보니 과연 사실이었다.

 

未幾宿忽死 村人轝葬於耳峴(一作硎峴)東

 미기숙홀사 촌인여장어이현(일작형현)동

 

얼마 뒤 혜숙 스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이현(耳峴, 형현(硎峴)이라고도 한다)

동쪽에 장사를 지냈는데, 

 

其村人有自峴西來者 逢宿於途中 問其何往 

기촌인유자현서래자 봉숙어도중 문기하왕 

그때 마을 사람 가운데 이현 서쪽에서 오는 이가 

도중에 혜숙 스님을 보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曰 久居此地 欲遊他方爾

왈 구거차지 욕유타방이

대답하였다.

“내가 이곳에 워낙 오래 산 터라 그만 다른 동네도 유람하러 간다네.”

 

相揖而別 行半許里 躡雲而逝

상읍이별 행반허리 섭운이서  

그렇게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반 리(里)쯤 가다가

스님은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其人至峴東 見葬者未散 具說其由 

기인지현동 견장자미산 구설기유 

그가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開塚視之 唯芒鞋一隻而已

개총시지 유망혜일척이이

사정을 들은 그가 좀 전의 일을 말하고 급히 무덤을 파헤쳐 보니,

안에는 짚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今安康縣之北 有寺名惠宿 乃其所居云 亦有浮圖焉

금안강현지북 유사명혜숙 내기소거운 역유부도언

  지금 안강현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스님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그곳에 부도(浮圖)도 있다.

 


[주]귀토설화를 다시 읽어본다.

龜兎說話,『삼국사기』권41,열전제1,金庾信 上.

[설화 앞부분 요약]

선덕여왕 16년(642) 백제가 침공하여 신라군이 패배함.

이때 김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陁炤娘)도 그 남편 품석(品釋)과 함께 전사.

김춘추는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여 백제의 원수를 갚으러 고구려에 갔다.

어떤 이가 신라의 사자는 고구려의 형세를 염탐하려 온 것이니 죽여 후환을 없앰이 옳을 것이라 함.

그렇게 욕보일 수는 없어 마목현(麻木峴,聞慶)과 죽령(竹嶺)은 우리 땅이니 돌려 달라고 함.

김춘추“나라의 땅은 한 臣子로서 전단할 수 없으므로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다가 미처 죽이지 않고 있었다.

춘추는 푸른 베 3백 보를 왕의 총신 선도해(先道解)에게 몰래 주었다.

도해가 음식을 준비해 와서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자 농담으로 말했다.

“그대도 일찌기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오.”

昔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에 병이 났는데, 의사가 ‘토끼의 간을 얻어 약에 섞어 먹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였소.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白龍王言

“吾能得之.”

그러나 바다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소.

그 때 마침 거북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었다오.

‘제가 그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遂登陸. 見兎言

그리고 거북이는 마침내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했소.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之 可以安居無患.”

‘바다에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맑은 샘과 흰 돌이 있고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실이 있다.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맹금도 침범할 수 없다.

네가 갈 수만 있다면 근심걱정 없이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그리고 거북이는 토끼를 등에 업고 2-3리쯤 헤엄쳐 갔다오.

그제서야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말했다오.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지금 용왕의 딸이 병에 걸렸는데 토끼 간으로 약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수고를 마다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

兎曰

토끼가 말했다오.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臟 洗而納之

‘아! 나는 천지신명의 후예인지라 오장을 꺼내어 씻어서 다시 넣을 수 있다.

日者 少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低

일전에 속이 약간 불편한 듯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어 씻은 후에 잠시 바위 밑에 두었다.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그런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 바로 오는 바람에 간이 아직도 거기에 있으니,

어찌 돌아가서 간을 가지고 오지 않으리오?

則汝得所求 吾雖無肝 尙活 豈不兩相宜哉?”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려는 약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더라도 살 수 있으니

어찌 둘이 서로 좋은 일이 아니랴?’

龜信之而還 纔上崖 兎脫入草中 謂龜曰

거북이 그 말을 곧이 듣고 돌아갔는데, 언덕에 오르자 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뛰어들어가면서 거북에게 말했다오.

“愚哉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어리석기도 하구나. 네놈은! 어찌 간이 없이 사는 놈이 있겠느냐?’

龜憫黙而退.

거북은 멍청히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오.”

[설화 뒷부분]

춘추는 이 말을 듣고 그의 뜻을 알아 차렸다. 그는 왕에게 글을 보내 말했다.

“두 영(嶺)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여 우리 왕에게 이를 돌려 보내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미덥지 않다면 저 태양을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왕은 그 때서야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간 지 60일이 지나도록 안돌아오자 유신은 국내의

용사 3천 명을 선발하여 놓고 말했다.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움을 당하면 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고

나는 들었다. 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백 명을 대적하고, 백 명이 목숨을 바쳐서 천 명을 대적하고,

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만 명을 대적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타국에 구금되어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일을 도모하지 않겠느냐?”

이에 모든 사람들이 말했다.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아갈지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유신은 마침내 왕에게 떠날 날짜를 정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간첩인 중 덕창이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고구려의 왕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고구려 왕은 전날 춘추의 맹세를 들었고, 또한 첩자의 말을 들은지라 그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후한 예로 대우하여 춘추를 귀국케 하였다.

고구려 국경을 벗어나자 춘추가 전송하러 나온 자에게 말했다.

“내가 백제에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구려에 와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전에 대왕에게 보낸 글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주]거북과 토끼 이야기[귀토설화]의 원형을 육도집경에서 찾아보았다.

여기서는 원숭이와 자라 이야기였는데 한국에는 원숭이가 없으니 자연스레 토끼로 바뀌었다.

본디 남전경전에서는 원숭이와 악어였던 것이 漢驛에서는 원숭이와 자라로 바뀌었다.

「昔者菩薩,無數劫時,兄弟資貨求利養親。之于異國,令弟以珠現其國王。王覩弟顏華,

欣然可之,以女許焉,求珠千萬。弟還告兄,

예전에 보살이 수없는 겁 전에 형제가 벌이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다른 나라에 가서 아우를 시켜 구슬을 가지고 그 국왕에게 알현하게 하였다.

왕이 아우의 얼굴이 빛남을 보고 기쁘게 그 딸을 주었다.

구슬을 많이 구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형에게 고하였다.

兄追之王所,王又覩兄容貌堂堂,言輙聖典,雅相難齊。王重嘉焉,轉女許之。女情泆豫,

형이 따라서 그 왕의 처소에 갔더니 왕이 또 형의 용모가 당당하고,

말이 성인의 경전에 맞았으며, 우아한 품이 그와 같기 어려움을 보고,

왕이 거듭 칭찬하고 그 딸을 다시 그에게 준다고 하니, 여자도 좋아하였다.

兄心存曰:『壻伯即父,叔妻即子,斯有父子之親,豈有嫁娶之道乎?斯王處人君之尊,

而為禽獸之行。』

형이 생각하였다.

'남편의 형이면 곧 아버지와 같고 아우의 아내면 곧 자식과 같은 것이다.

부자의 윤리가 있는데 어디 시집가고 장가드는 도리가 있겠느냐?

이 왕은 사람의 임금이라는 높은 자리에 처하여 있으나 금수의 짓을 한다.'

即引弟退。女登臺望曰:『吾為[(魅-未+舌)-ㄙ]蠱,食兄肝可乎?』

곧 아우를 이끌고 물러가니, 여자가 대(臺)에 올라서 바라보고 말하였다.

"내가 독충이 되어서 형놈의 간을 먹을 것이다."

展轉生死,兄為獼猴,女與弟俱為鼈。鼈妻有疾,思食獼猴肝,雄行求焉。覩獼猴下飲,

그 뒤로 생사(生死)에 전전하여 형은 원숭이가 되고, 여자는 아우와 함께 자라가 되었다.

자라의 아내가 병이 들어서 원숭이의 간을 먹고 싶다고 하니,

수컷이 다니며 구하였는데 마침 원숭이가 내려와서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鼈曰:『爾甞覩樂乎?』

자라가 말하였다.

"너는 일찍이 음악을 들은 적이 있느냐?"

答曰:『未也。』

"없다."

曰:『吾舍有妙樂,爾欲觀乎?』

"내 집에 묘한 음악이 있는데 네가 보고자 하느냐?"

曰:『然。』

"그렇다."

鼈曰:『爾昇吾背,將爾觀矣。』

"그러면 내 등에 오르라. 너를 데리고 가서 보여 주겠다."

昇背隨焉。半谿,鼈曰:『吾妻思食爾肝。水中何樂之有乎?』

원숭이가 등에 올라서 물로 반쯤 따라갔는데 자라가 말하였다.

"내 아내가 네 간을 먹고 싶어한다. 물 속에 무슨 음악이 있겠느냐?"

獼猴心恧然曰:『夫戒守善之常也,權濟難之大矣。』

원숭이는 마음으로 부끄러워 이렇게 생각하였다.

'대체로 계율은 선을 지키는 데 떳떳한 것이요, 방편[權]은 난을 건지는 데 큰 것이다.'

曰:『爾不早云?吾以肝懸彼樹上。』

그리고는 자라에게 말하였다.

"너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간을 저 나무 위에 걸어 놓았다."

鼈信而還。獼猴上岸曰:『死鼈蟲,豈有腹中肝而當懸樹者乎?』」

자라가 믿고 되돌아가니 원숭이가 언덕에 올라가서 말하였다.

"죽어라. 자라야, 어떻게 뱃속에 있는 간을 나무에다 걸어 놓을 수 있겠느냐?"

佛告諸比丘:「兄者,即吾身是也,常執貞淨,終不犯淫亂,畢宿餘殃墮獼猴中。

弟及王女俱受鼈身,雄者調達是,雌者調達妻是。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형이었던 자는 나였는데 항상 바르고 청정함을 지켜 끝까지 음란함을 범하지 않았으나

숙세의 남은 업장[餘殃] 때문에 원숭이 속에 떨어졌고,

아우와 왕녀는 함께 자라의 몸을 받은 것인데,

수컷은 조달이었고 암컷은 조달의 처였느니라."

菩薩執志度無極行持戒如是。」

보살은 뜻을 견고히 지켜 저 언덕에 이르렀으니, 지계를 행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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