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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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사마천은 어떤 인물들을 입전의 대상으로 삼았는가를 알기 위해 열전 70편의 서문을 통해 입전동기 및 그들 삶의 특징을 살펴본다. 앞에서 밝혔듯이 ‘오제본기(五帝本紀)’ 이하에서는 130편에 달하는 각편의 집필동기 및 그 내용을 밝혔으나 너무 번잡하여 본 블로그에서는 열전 70편에 대한 것만 수록하기로 한다.


1049. 末世爭利(말세쟁리),
세상이 말세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익을 다투게 되나


1050. 維彼奔義(유피분의)
오로지 그들만은 의를 추구하여

1051. 讓國餓死(양국아사),
나라의 군주 자리도 마다하고 결국은 굶어 죽었으니

1052. 天下稱之(천하칭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1053. 作<伯夷列傳>第一(작<백이열전>제일)
이에 <백이열전>제1일을 지었다.

▶백이(伯夷)/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는 형이고 숙제는 동생으로 지금의 천진시 복쪽의 창려(昌黎)시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군주가 차자인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생전에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백이가 자기 부친의 뜻을 알고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 주기 위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숙제도 형을 제치고 동생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왕자리에 앉지 않고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후 두 사람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하의 나라가 주인 되는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며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비록 곡식일지라도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먹지 않고 고사와 고비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다.

1054. 晏子儉矣(안자검의),
안자(晏子) 평중(平仲)은 검소했으며

1055. 夷吾則奢(이오즉사);
관자(管子) 이오(夷吾)는 사치하여 두 사람은 서로 행하는 바가 달랐으나

1056. 齊桓以覇(제환이퍠),
이오는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1057. 景公以治(경공이치).
평중은 제경공으로 하여금 치세를 이루게 만들었다.

1058. 作<管晏列傳>第二(작<관안열전)제이)
이에 <관안열전>제2를 지었다.

1059. 李耳無爲自化(이이무위자화),
노자(老子) 이이(李耳)는 무위(無爲)를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하게 만들게 하고

▶무위(無爲)/ 도가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060. 淸淨自正(청정자정);
마음을 깨끗하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마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1061. 韓非 事情(한비췌사정),
한비자는 각기 일마다의 정황을 헤아려

1062. 循勢理(순세리).
세력과 도리가 움직이는 이치에 따랐다.

1063. 作<老子韓非列傳>第三(작<노자한비열전>제삼)
이에 <노자한비열전>제3을 짓는다.


1064. 古王者而有<司馬法>(고왕자이유<사마법>)
옛날 왕들에게도 <사마법>이라고 있었으나

1065. 穰 能申明之(앙저능신명지).
사마양저(司馬穰 )가 그 병법의 쓰임새 넓히고 분명히 밝혔다.

1066. 作<司馬穰 列傳>第四(작<사마양저열전>제사)
이에 <사마양저열전>제4를 지었다.


1067.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비신렴이용불능전명논검),
신(信), 염(廉), 인(仁), 용(勇)이 아니고는 병법과 검술에 대해 논할 수 없으며

1068. 與道同符(여도동부),
부절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맞아야

1069. 內可以治身(내가이치신),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1070. 外可以應變(외가이응변),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1071. 君子比德焉(군자비덕언).
군자가 이것에 더하여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덕이라고 했다.

1072. 作<孫子吳起列傳>第五(작<손자오기열전>제오).
이에 <손자오기열전>제5를 지었다.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1075. 尙旣匡夫(상기광부),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1076. 伍員奔吳(오원분오),
그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달아나 그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1077. 作<伍子胥列傳>第六(작<오자서열전>제육)
이에
<오자서열전>제6을 지었다.


1078. 孔氏述文(공씨술문),
공자는 학문과 문학을 논하고

1079. 弟子興業(제자흥업),
그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일으켰다.

1080. 咸爲師傅(함위사부),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1081. 崇仁 義(숭인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1082. 作<仲尼弟子列傳>第七(작<중지제자열전>제칠)
이에 <중니제자열전>제7을 지었다.


1083. 去衛適秦(앙거위적진),
상앙은 위(衛) 땅을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1084. 能明其術(능명기술),
그가 배운 술법을 능히 펼칠 수 있어

1085. 强覇孝公(강패효공),
진효공(秦孝公)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1086. 後世遵其法(후세준기법).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높였다.

1087. 作<商君列傳>第八(작<상군열전>제팔)
이에 <상군열전>제8을 지었다.


1088. 天下患衡秦毋 (천하환형진무염),
천하가 근심하고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강포함이었으나

1089. 而蘇子能存諸侯(이소자능존제후),
소진은 능히 제후국들을 존립하게 하고

1090. 約從以抑貪强(약종이억탐강).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러운 진나라를 제어 하였다.

1091. 作<蘇秦列傳>第九(작<소진열전>제구)
이에 <소진열전>제9를 짓는다.

1092. 六國旣宗親(육국기종친),
육귝이 서로 합종을 맺어 친하게 지내게 되자

1093. 而張儀能明其說(이장의능명기설),
장의는 그 잘못을 능히 지적할 수 있어

1094. 復散解諸侯(복산해제후).
다시 합종책을 깨고 제후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095. 作<張儀列傳>第十(작<장의열전>제십)
이에
<장의열전>제10을 짓는다.


1096. 秦所以東攘雄諸侯(진소이동양웅제후),
진나라가 동쪽의 제후들을 물리치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1097. 樗里, 甘茂之策(저리, 감무지책).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계책 덕분이었다.

1098. 作<樗里甘茂列傳>第十一(작<저리감무열전>제십일)
이에 <저리감무열전>제11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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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 苞河山(포하산),
하수와 화산을 차지하고

1100. 圍大梁(위대량),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1101. 使諸侯斂手而事秦者(사제후렴수이사진자),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비비며 진나라를 받들게 한 것은

1102. 魏염之功(위염지공).
위염(魏염)의 공이다.

1103. 作<穰侯列傳>第十二(작<양후열전>제십이)
이에 <양후열전>제12를 지었다.


1104. 南拔언령(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呈+우부방都)를 함락시키고

1105. 北최長平(북최[손수+崔]장평),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1106. 遂圍邯鄲(수위한단),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1107. 武安爲率(무안위솔);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108. 破荊滅趙(파형멸조),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1109. 王 之計(왕전지계),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1110. 作<白起王[前+羽]列傳>第十三.(작<백기왕전열전>제십삼)
이에 <백기왕전열전>제13을 지었다.


1111. 獵儒墨之遺文(엽유묵지유문),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남긴 글을 섭렵한 맹자는

1112. 明禮義之統紀(명례의지통기),
예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기강을 밝혔고

1113. 絶惠王利端(절혜왕리단),
양혜왕(梁惠王)의 이익에만 집착한 마음을 끊게 만들어

1114. 列往世興衰(열왕세흥쇠).
지난 옛날의 흥망성쇠를 열거했다.

1115. 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작<맹자순경열전>제십사
이에 <맹자순경열전>제14를 지었다.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설(薛) 땅으로 모여들었다.

▶설(薛)/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 위치했던 제나라 성읍으로 맹상군(孟嘗君)의 봉읍이었다.

1118. 爲齊 楚魏(위제한초위).
그는 그 선비들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이었다.

1119. 作<孟嘗君列傳>第十五(작<맹상군열전>제십오)
이에 <맹상군열전>제15를 지었다.


1120. 爭馮亭以權(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여초이구한단지위),
초나라로 가서 구원군을 얻어 한단의 포위를 풀고,

1122. 使其君復稱于諸侯(가기군복칭우제후).
그 군주로 하여금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드높이게 했다.

1124. 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작<평원군우경열전>제십육
그래서 <평원군우경열전> 제16을 지었다.


1125.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1126. 賢能 于不肖(현능굴우불초),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굽혔으니

1127. 唯信陵君爲能行之(유신릉군위능행지).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1128. 作<魏公子列傳>第十七(작<귀공자열전>제십칠)
그래서 <위공자열전>제17을 지었다.


1129. 以身徇君(이신순군),
그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1130. 遂脫强秦(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터 고열왕을 빼내었고

1131. 使馳說之士南鄕走楚者(사치설지사만향초자),
유세하던 선비들을 남쪽의 초나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1132. 黃歇之義(황헐지의).
황헐의 의로운 마음에서 였다.

1133. 作<春信君列傳>第十八(작<춘신군열전>제십팔)
이에 <춘신군열전>제18을 짓는다


1134. 能忍 于魏齊(능인구우위제),
능히 위제(魏齊)로부터 당한 굴육을 참아내고

1135. 而信威于强秦(이신위우강진);
강포한 진나라에서 신임을 받아 위엄을 떨쳤다.

1136. 推賢讓位(추현양위),
이어서 물러날 때가 되자 어진 사람을 대신 추천하고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니

1137. 二子有之(이자유지).


1138. 作<范 蔡澤列傳>第十九(작<범수채택열전>제십구)
그래서 <범수채택열전>제19를 지었다.


1139. 率行其謀(솔행기모),
군사를 일으켜 계책에 따라 행하였으며

1140. 連五國兵(연오국병),
이웃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연계하여

1141. 爲弱燕報强齊之仇(위약연보강진지구),
국력이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성한 제나라에 원수를 갚아

1142. 雪其先君之恥(설기선군지치).
그 모시선 군주의 치욕을 씻었다.

1143. 作<樂毅列傳>第二十(작<악의열전>제이십)
그래서 <악의열전>제20을 지었다.


1144. 能信意强秦(능신의강진),
강포한 진나라 왕에게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었고

1145. 而屈體廉子(이굴체염자),
또한 염파에게는 능히 몸을 굽혀

1146. 用徇其君(용순기군),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게끔 하였다.

1147. 俱重于諸侯(구중우제후).
이윽고 그 두 사람은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중시되었다.

1148. 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작<염파인상여열전>제이십일)
이에<염파인상여열전>제21을 지었다.


1149.  王旣失臨淄而奔去齊(민왕기실임치이분거제),
민왕이 이미 나라 임치성을 빼앗기고 거( ) 땅으로 도망쳤다.

1150. 唯田單用卽墨破走騎劫(유전단용즉묵파주기겁),
그러나 전단만이 즉묵을 굳게 지키다가 연나라 장수 기겁(騎劫)을 격파하여

1151. 遂存社稷(수존사직).
결국은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했다.

1152. 作<田單列傳>第二十二(작<전단열전>제이십이)
이에<전단열전>제22를 지었다.


1153. 能說詭說解患于圍城(능설궤설해환우위성),
달변과 궤변으로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된 성의 포위망을 풀고

1154. 輕爵祿(경작록),
작위에 봉록도 개의치 않았으며

1155. 樂肆志(악사지).
단지 자기들의 뜻한 바를 성취한것 만을 즐거워하였다.

1156. 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작<노중련추양열전>제이십삼)
이에 <노중련추양열전> 제23을 지었다.


1157. 作辭以諷諫(이사이풍간),
초사(楚辭)라는 시부를 창조하여 정치를 풍자하여 간하고

1158. 連類以爭義(연류이쟁의),
그와 비슷한 것들을 비유함으로써 의로운 일을 주장했다.

1159. <離騷>有之(<이소>유지).
그가 지은 <이소>라는 시가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

1160. 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작<굴원가생열전>제이십사)
그래서 <굴원가생열전>제24를 지었다.


1161. 結子楚親(결자초친),
조나라의 포로가 된 자초(子楚)와 가까워져 지내더니

1162. 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사제후지사비연쟁입사진).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진나라에 들어가 모시도록 했다.

1163. 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작<여불위열전>제이십오)
<여불위열전>제25를 지었다.


1164. 曹子匕首(조자비수),
조말(曺沫)은 비수를 가슴에 품고 회맹장에 들어가

1165. 魯獲其田(노획기전),
제환공을 위협하여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되찾고

1166. 齊明其信(제명기신);
제환공으로 하여금 그 말을 지켜 신의라는 것을 밝히게 했으며

1167. 禮讓義不爲二心(예양의불위이심).
예양은 의를 지켜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1168. <刺客列傳>第二十六(작<자객열전>제이십육)
이에 <자객열전>제26을 지었다.


1169. 能明其畵(능명기화),
진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듯 그 계책을 명확히 세웠고

1170. 因時推秦(인시추진),
시의에 맞게 시행하였다.

1171. 遂得意于海內(수득의우해내),
결국은 그는 해내에서 뜻을 얻은

1172. 斯爲謀首(사위모수).
진나라 참모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173. 作<李斯列傳>第二十七(작<이사열전>제이십칠)
<이사열전>제27을 지었다.


1174. 爲秦開地益衆(위진개지익중),
진나라를 위해 영토를 더욱 넓혀 백성들의 수효를 증가시켰고

1175. 北靡匈奴(북미흉노),
북으로는 흉노를 막았으며

1176. 据河爲塞(거하위색),
하수에 의지해서는 요새를 쌓았다.

1177. 因山爲固(인산위고),
견고한 산악의 험지를 이용하여

1178. 建楡中(건유중).
유중을 건설했다.

▶유중(楡中)/고대의 지명.

1179. 作<蒙恬列傳>第二十八(작<몽염열전>제이십팔)
<몽염열전>제28을 지었다.


1180. 塡趙塞常山以廣河內(전조색상한이광하내),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常山)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윽고 그 세력을 하내군(河內郡)까지 넓혀

▶상산(常山)/ 한나라 초기에 설치한 군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하(唐河) 이남과 내구(內丘) 이북......

▶하내군(河內郡)/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과 급현(汲縣) 서쪽의 땅으로 한(漢)과 초(楚)가 다툴 때 중립지역을 두기 위해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1181. 弱楚權(약초권),
이윽고 초나라의 세력을 약화시켜

1182. 明漢王之信于天下(명한왕지신우천하).
한왕(漢王)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1183. 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작<장이진여열전>제이십구).
<장이진여열전> 제29를 지었다.


1184. 收西河(수서하),
위표(魏豹)는 서하(西河)와

1185. 上黨之兵(상당지병),
상당의 병사들을 이끌고

1186. 衆至彭城(중지팽성);
팽성으로 달려가 한왕(漢王)을 도왔다.

1187. 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월지침략양지이고항우).
팽월(彭越)은 양(梁)을 공격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1188. 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작<위표팽월열전>제삼십)
이에 <위표팽월열전> 제30을 지었다.





태사공자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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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壺遂曰(호수왈):
호수가 말했다.

411.“ 孔子之時(공자지시),
공자께서 살아계실 때

412.上無明君(상무명군),
위에는 밝은 임금이 없었고

413.下不得任用(하부득임용),
아래로는 그 자신이 임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414.故作<春秋>(고작춘추),
춘추를 지어,

415.垂空文以斷禮義(수공문이단예의),
내용이 없는 글을 나열하여 예와 의를 규정지어

416.當一王之法(당일왕지법).
당대의 제왕들로 하여금 법전으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417.今夫子上遇明天子(금부자상우명천자),
그러나 지금 그대는 위로는 밝은 천자를 만났고

418.下得守職(하득수직),
아래로는 관직에 있으니

419.萬事旣具(만사기구),
만사가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420.咸各序其宜(함각서기의),
게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각기 그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질서가 정연하게 적당함을 얻고 있는데,

423.夫子所論(부자소론),
그대가 지금 논하는 바는

424.欲以何明(욕이하명)?”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것입니까?”

425.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했다.

426.“ 唯唯, 否否, 不然(유유, 부부, 불연).
“ 아, 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427.余聞之先人曰(여문지선인왈):
저는 돌아가신 선친이 말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428.‘ 伏羲至純厚(복희지순후),
옛날 복희(伏羲)씨는 지극히 순박하고 후덕하여

■복희(伏羲)/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三皇) 중 태호(太昊)를 말하며 그는 자기의 형매인 여왜(女?)와 혼인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었고 주역의 팔괘를 만들었으며, 백성들에게 어업과 목축을 가르쳤다. 삼황은 복희씨와, 신농(神農) 염제(炎帝), 황제(皇帝) 헌원(軒轅)을 말한다.

429.作<易>八卦(작역팔괘).
백성들을 위하여 주역의 팔괘를 만들고

430.堯舜之盛(요순지성),
요순시대의 번성함은

431.<尙書>載之(상서재지),
상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432.禮樂作焉(예악작언).
예와 악이 만들어 졌으며

433.湯武之隆(탕무지융),
탕임금과 무왕이 새로이 나라를 일으킨 것은

434.詩人歌之(시인가지).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다.

435.<春秋>采善貶惡(춘추채선폄악),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쳐

436.推三代之德(추삼대지덕),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덕을 추앙하고

437.褒周室(포주실),
주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438.非獨刺譏而已也(비독자기이이야).’
단지 풍자와 비방만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439.漢興以來(한흥이래),
한나라가 새로 일어난 이래

440.至明天子(지명천자),
영명한 천자가 나타나시니

441.獲符瑞(획부서),
하늘에서 상서로운 징조 있어

442.封禪(봉선),
태산과 양보산(梁父山)에 봉선을 행하게 되었고

443.改正朔(개정삭),
해와 달의 시작하는 날을 바꿔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으며

■정삭(正朔)/ 정(正)은 한 해의 첫째 달이고, 삭(朔)은 한 달의 초하루이다.

444.易服色(역복색),
관복의 색을 바꿔

■관복의 색을 바꾼 것은 오행설에 의해 진나라 때 시작된 수덕(水德)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관복을 화덕(火德)을 의미하는 적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말한다.

445.受命于穆淸(수명우목청),
하늘로부터 미덕으로 교화를 이루라는 천명에 따라

■목청(穆淸)/미덕(美德)으로 교화(敎化)를 이루는 것을 이름

446.澤流罔極(택류망극),
사방으로 베푼 은혜는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447.海外殊俗(해외수속),
나라 밖의 습속이 같지 않은 이민족 국가들이

448.重譯款塞(중역관색),
통역에 통역을 거치며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우리 중국의 변방을 지키는 관문에 당도한 다음

449.請來獻見者(청래헌견자),
천자께 조현을 드리고자 청한 자들의 숫자는

450.不可勝道(불가승도),
하도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451.臣下百官力誦聖德(신하백관력송성덕),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성상 폐하의 높으신 덕을 힘껏 칭송하고 있다고는 하나

452.猶不能宣盡其意(유불능선진기의).
아직도 그 뜻을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453.且士賢能而不用(차사현능이불용),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어질고 유능한 선비들을 불러서 다 쓰지 못하고 있음은

454.有國者之恥(유국자지치),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는 치욕이며

455.主上明聖而德不布聞(주상명성이덕불포문),
주상께서 밝고 성스러운 덕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고하고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456.有司之過也(유사지과야).
바로 관원들의 잘못입니다.

457.且余嘗掌其官(차여상장기관),
그러함에도 내가 이미 그 일을 맡아 하는 관리가 되었으나

458.廢明聖盛德不載(폐명성성덕부재),
밝고 어진 성상폐하의 크나 큰 성덕을 폐하고 기록하지 않으며

459.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멸공신세가현대부지업불술),
공신, 세가, 현대부들이 이룩한 업적을 인멸하고 기술하지 않는다면

460.墮先人所言(타선인소언),
선친께서 나에게 당부한 유언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되어

461.罪莫大焉(죄막대언).
내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클 것입니다.

462.余所謂述故事(여소위술고사),
내가 기술하려고 하는 소위 옛날 일은

463.整齊其世傳(정제기세전),
대대로 전승해 온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지

464.非所謂作也(비소위작야),
내가 지어내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465.而君比之于<春秋>(이군비지우),
그런 까닭에 대부께서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을 춘추와 대비하는 것은

466.謬矣(유의).
잘못 된 일입니다.

태사공자서(13)

467.于是論次其文, (우시논차기문)
그래서 그 사서의 문장을 차례로 논하게 된 것이다.

468.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 (칠년이태사공조이릉지화)
사서를 논하기 시작해서 7년 째 되는 해에 태사공은 이릉(李陵)의 화를 당하여

▶이릉지화(李陵之禍)
기원전 88년 한무제(漢武帝) 2년에 기도위(騎都衛)였던 이릉(李陵)이 흉노를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렀을 때 한나라 군사들보다 몇 배나 많은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은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한무제가 중국에 남아 있던 이릉의 가족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하자 사마천이 나서 이릉을 변호하자 한무제가 노하여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궁형에 처했다. 이 일에 대해 사마천의 심경을 자세하게 토로한 글이 한서의 사마천열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실려있다.

469.幽于縲紲(유우유설).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470.乃 然而嘆曰:(내위연이탄왈)
감옥에 갇힌 태사공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471." 是余之罪也夫! (시여지죄야부)
이것은 나의 죄로다!

472.身毁不用矣."(신훼불용의)
몸은 망가져 이젠 쓸모 없게 되었구나!"

473.退而深惟曰: (퇴이심유왈)
태사공은 물러 나와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474." 夫<詩>, <書>隱約者, (부시서은약자)
무릇 시경과 서경의 내용이 깊고 그윽하면서도 간략한 것은

475.欲遂其志之思也.(욕수기지지사야)
그 지은이가 마음속에 뜻하고 있던 바를 이루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고

476.昔西伯拘 里,(석서백구유리)
옛날에 서백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에게 잡혀 유리( 里)에 갇혀 있으면서

▶서백(西伯)/주문왕 창(昌)을 말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주무왕(周武王)에 이르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유리( 里)/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남 탕음현(湯陰縣) 경내에 있었던 은나라 때의 성읍 이름.

477.演<周易>; (연주역)
주역을 더하여 풀이하였고

▶주역(周易)의 성립은 확실한 것은 아니나 복희씨(伏羲氏)가 8괘를 만들고 다시 신농씨(神農氏)가 64괘로 나누었으며 주문왕(周文王)은 각 괘에 사(辭)를 붙였다고 했다. 이어서 주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丹)이 효사(爻辭)를 공자가 십익(十翼)을 붙였다고 했다. 주문왕이 유리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역에 괘사(卦辭)를 만들어 붙인 것을 말한다.

478.孔子厄陳蔡, (공자액진채)
공자는 진(陳)과 채(蔡)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곤경에 처해진 와중에서

▶주경왕(周敬王) 31년, 기원전 489년 초소왕(楚昭王) 진(珍)이 채(蔡)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479.作<春秋>; (작춘추)
<춘추>를 지었으며

480.屈原放逐, (굴원방축)
굴원은 추방되어 상수(湘水) 강변을 배회하면서

▶굴원(屈原)/굴평(屈平)을 말한다. 평(平)은 이름이고 원(原)은 자(字)이다.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초회왕(楚懷王) 밑에서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좌도(左徒)의 벼슬을 살면서 내정과 외교에 많은 활약을 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았다. 초회왕이 진(秦)나라의 계교에 빠져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객사하자 회왕의 장남이 경양왕(頃襄王)으로 즉위하고 막내아들인 자란(子蘭)이 초나라 상국이 되었다. 자란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갔음으로 굴원은 자란을 비난하였다. 자란은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여 대부의 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자 굴원은 초왕을 걱정하며 지금의 동정호(洞庭湖)와 상수(湘水) 부근을 배회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품고 빠져 죽었다. 고대 시가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사문학을 창시한 사람으로 저작에는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詞)>, <천문(天問)>, <구장(九章)> 및 <초혼(招魂)> 등이 있다.

481.著<離騷>; (저이소)
이소를 노래했다.

▶이소(離騷)/이소는 모두 2490자로 된 굴원의 대표적인 서사이다. 이(離)는 별(別), 소(騷)는 수(愁) 즉 '이별의 슬픔'이라는 왕일(王逸) 설과 '근심을 만나다'라는 반고(班固) 설이 있다. 굴원은 이소의 시에서 그의 충정과 비탄, 애국과 원망, 참회와 절망, 끝으로 절명의 심정을 노래했다.

482.左丘失明, (좌구실명)
좌구명은 실명을 했음에도

▶좌구(左丘)/ 춘추 때 노나라의 태사(太史) 좌구명(左丘明)을 말한다. 공자 직전 혹은 동시대 인. 두 눈을 실명한 장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작자이며 또한 <국어(國語)>의 작자라는 설도 있다.

483.厥有 <國語>; (궐유국어)
국어(國語)를 지을 수 있었으며

▶국어(國語)/국어(國語)가 사마천의 작품이라는 설은 본 구절 때문인데 본서의 기술 내용과는 달리 그 작자가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국어의 집필 연대는 전국시대로 보고 있다. 모두 21권으로 되어 있으며 주(周), 노(魯), 제(齊), 진(秦), 정(鄭), 초(楚), 오(吳), 월(越) 등의 나라로 나누어 편집되었으며 주나라 목왕(穆王 : 재위 기원전 10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어 노도공(魯悼公 : 기원전 466- 429)까지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서술방법은 춘추좌전과 같은 편년체이다.

484.孫子 臏脚,(손자빈각)
손빈은 다리의 슬개골이 잘려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손빈(孫 )/동문수학한 방연(龐涓)의 음모로 무릎의 슬개골(膝蓋骨)을 제거 당하여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후에 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의 군사가 되어 계릉(桂陵)과 마릉(馬陵) 싸움에서 방연이 이끌던 위(魏)나라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위나라는 이 싸움에서 패함으로서 전국시대 초반에 확보했던 주도권을 상실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손자병법은 원래 손자라고 불리우던 춘추 초기의 손무(孫武)의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1972년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 조성된 묘에서 손빈이 저술한 병서 13편의 죽간이 출토되었다. 손무의 병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그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가치가 높은 병서이다.

485.而論兵法; (이논병법)
책을 써 병법을 논했고

486.不韋遷蜀,(불위천촉)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되어 불우하게 되었음에도

▶여불위(呂不韋)/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35년에 죽었다.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대신이며 위(衛)나라 복양( 陽) 사람으로 원래는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 있었던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공자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화(奇貨)로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당시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유세하여 이인(異人)을 그녀의 적자로 삼게 만들었다. 화양부인과 안국군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다. 진소양왕(秦昭陽王)이 죽고 안국군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이인은 그의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의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자 이인이 그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진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그 식읍으로 10만호를 내렸다. 장양왕에게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죽고 진시황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계속 상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부르다가 여불위가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천거한 노애(  )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를 연루시켜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사천으로 유배 시켰다. 여불위는 사천으로 가던 도중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국으로 재직 중에 모두 26권으로 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사천으로 유배가서 지었다는 사마천의 기술은 잘못이다.

487.世傳<呂覽>; (세전여람)
만세에 전해질 여람을 편찬했고

▶여람(呂覽)/여씨춘추(呂氏春秋)를 말함. 여불위가 진나라 상국으로 있을 때 심혈을 기우려 만든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그가 거느린 3000여명의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갖고 있던 견문과 학설 및 설화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처음 편찬할 때에는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되어 있어 이 책의 이름을 여람(呂覽)이라고 했으나 후에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으로 그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십이기의 마지막 편인 <서의편(序意篇)>에 '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인륜 규범을 깨닫고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혔다. 12기는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 맹하(孟夏), 중하(仲夏), 계하(季夏),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각 5편 씩과 서의편(序意篇)을 합한 61편과, 팔람(八覽)은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의 각 8편과 유시(有始)의 각 7편 씩을 합하여 63편 및 육론의 개춘(開春), 신행(愼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의 각 6편 씩의 36편을 합하여 여씨춘추는 모두 160편으로 되어있다. 또한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어 진나라 시대 때의 사상 연구을 위한 귀중한헤 자료이다.

488.韓非囚秦,(한비수진)
한비자는 진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

▶한비(韓非)/ 중국 전국시대 때의 사상가. 법가의 대표적 인물. 원래 한나라의 공족 출신으로,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던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 즉 순자(荀子)에게서 동문수학했다. 도가(道家), 유가(儒家), 묵가(墨家)의 사상을 흡수하여 뒤에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조국 한나라의 쇠약함을 한탄하며 한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변법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설에 능하지 않아 등용되지 못했으나 현실 분석과 대책에 뛰어나 탁월한 저서를 남겼다.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여 군신, 부자, 부부관계 등 인간의 일체의 행위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는 인성이기설(人性利己說)을 주장하였다. 도를 모든 사물이 운동하는 객관적 법칙으로, 이(理)를 구체적 사물이 운동하는 특수법칙으로 보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다 같이 사물 속에 존재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인류사회 역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에 따라 법률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또한 유가적 덕치를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시대착오라고 비판하고, 주관적인 지(智)나 신(信)이 아니라 객관직인 법과 세에 의존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 실무본위(實務本位)의 법치를 주장하였다. 상앙(商 )의 법, 신불해(申不害)의 술, 신도(愼到)의 세를 도모하였으며, 노자의 무위허정(無爲虛靜)을 근본으로 군주의 통치술을 제시하였다.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영향을 주었다. 화평사신으로 진나라에 갔을 때 진시황이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사(李斯), 요가(姚賈)의 무고(誣告)로 옥사하였다.

489.<說難><孤憤>;(세난고분)
세난과 고분을 저술했다.

▶세난(說難)/세란 다른 사람을 말로써 설득하여 동감하게 만드는 유세의 의미이다. 그래서 세난이라 하면 남을 유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전국시대에 유세의 행위란 재주 있는 자들이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였으니 한비 또한 그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자 이 글을 지었다.
▶고분(孤憤)/외롭게 홀로 울분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고립무원에 처한 법술가(法術家)들이 권신들의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비 자신이 처한 불만의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490.<詩>三百篇, (시삼백편)
시 삼백편도

▶시삼백편(詩三百篇)/공자가 편찬한 시경을 말한다. 정확히 시경에는 305 수의 시가(詩歌)가 실려있다.

491.
大抵賢聖發憤之所爲作也.(대저현성발분지소위작야)
대체로 현인과 성인들이 모두 자기 마음속에 맺혀 있던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책을 저술한 것이며
,

492.此人皆意有所郁結,(차인개의유소욱결)
그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혀 있는

493.不得通其道也, (부득통기도야)
자기의 이상과 주장을 풀어 버릴 방법을 얻지 못한 나머지

494.故述往事, (고술왕사)
옛날 일을 말하여

495.思來者." (사래자)
미래의 일을 생각한 것이다."


496.于是卒述陶唐以來,(우시졸술도당이래)
그래서 결국은 요임금과 순임금이래

497.至于麟止,(지우린지)
획린(獲麟)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저술했다.

498.自黃帝始.(자황제시)
그래서 본서는 황제(黃帝)부터 시작했다.


▶황제(黃帝)
중국이 원시사회를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의 부족국가의 추장으로 성은 희(姬)이고 씨는 헌원(軒轅) 혹은 유웅(有熊)이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다스리던 부족은 원래 중국의 서북 고원에 거주했던 소전씨(少典氏) 출신으로 염제(炎帝)와 같은 종족이다. 후에 동쪽으로 나아가 탁록( 鹿)에 살고 있던 구여족(九黎族)의 추장 치우(蚩尤)를 공격하여 죽이고 다시 판천(阪泉)에서 염제(炎帝)와 싸워 패퇴시키고 염제가 이끌던 종족을 규합하여 그들의 부족장이 되었다. 그 부락이 후에 발전하여 중화족(中華族)의 전신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시조라 받들어 졌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를 고안해 행한 것이 전설상으로 내려온다. 창힐(倉 )을 시켜 문자(文字)를 만들게 하였고, 누조( 祖)에게는 양잠술(養蠶術)을, 공(共)에게는 북 만드는 법을, 화적(貨狄)에게는 배 만드는 법을, 희화(羲和)에게는 해를 보고 점치는 법을, 상의(常儀)에게는 달을 보고 점치는 법을, 유구(臾區)에게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알아내게 하였다. 또한 예수(隸首)에게는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내게 했으며, 용성(容成)에게는 달력을 만들게 하고 영(伶)에게는 도덕에 대한 규범을 만들게 했으며, 영장(榮將)에게는 음율(音律)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제를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은자주]아래의 오제본기 이하에서는 130편에 달하는 각편의 집필동기 및 그 내용을 밝혔으나 너무 번잡하여 본 블로그에서는 열전 70편에 대한 것만 수록하기로 한다.










태사공자서 4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2.htm

[은자주]일부 일련번호가 앞의 것과 중복되지만 원문과 대조해 보니 빠진 곳은 없다.

그냥 제시된 순서대로 읽어 나가면 원문의 기술순서와 일치한다.



312.上大夫壺遂曰(대부호수왈):
대부 호수(壺遂)가 물었다.

■호수(壺遂)/전한 무제 때 사람으로 양(梁), 즉 지금의 개봉시(開封市) 출신이다. 사마천과 함께 율력을 제정하여 무제에게 건의하였다.

313.“昔孔子何爲而作<春秋>哉(석공자하위이작)?”
“ 옛날 공자께서는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으셨는가?”

314.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대답했다.

315.“余聞董生曰(여문동생왈):
“나는 동중서(董仲舒)에게서 듣기를

■동중서(董仲舒)/전한 때의 유학자.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학문은 오직 유학뿐이라고 무제에게 건의하여 한나라가 유학을 통치철학으로 삼게 만들었다. 이후로 유학은 2000여 년 이상 중국 봉건 사회의 정통적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의 학설은 기존의 유학에 음양오행설을 가미시킨 것으로 사람의 인성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선해진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했다.

316.‘ 周道衰廢(주도쇠폐),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여 행하여지지 않으매

317.孔子爲魯司寇(공자위노사구),
공자께서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었으나

■사구(司寇)/춘추전국 시대 때 관직이름으로 주로 관리의 규찰과 형옥을 담당한 관서의 장(長)을 말한다.

318.諸侯害之(제후해지),
제후들은 해치려 하고

319.大夫雍之(대부옹지).
대부들은 공자님의 뜻을 펼치시려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320.孔子知言之不用(공자지언지불용),
공자께서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321.道之不行也(도지불행야),
추구하려는 도도 세상에 행해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322.是非242年之中(시비242년지중),
242년에 걸친 역사의 시비를 따짐으로서

■242년/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는 노은공(魯隱公) 원년인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14년 기원전 481년까지의 242년 동안의 역사책이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서 춘하추동(春夏秋冬) 방식으로 저술되어 그것을 줄여 춘추라 한 것이고 이어서 동주가 시작된 기원전 771년부터 지금의 산서성에 있던 북방의 강국 당진(唐晋)이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어 전국시대가 열린 기원전 453년까지의 기간을 춘추시대라 명명한 것이다. 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自治通鑑)은 춘추와 같은 편년체 사서(史書)로서 춘추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323.以爲天下儀表(이위천하의표),
천하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셨다.

324.貶天子(폄천자),
비록 천자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깎아 내리고

325.退諸侯(퇴제후),
옳지 않은 제후들은 물리치며

326.討大夫(토대부),
직분을 지키지 못한 대부들은 성토하여

328.以達王事而已矣.’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일을 달성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329.子曰 : “我欲載之空言(자왈, 아욕재지공언),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내가 실제적이지 않은 말로 기록하려고 했으나,

330.不如見之于行事之深切著明也(불여견지우행사지심절저명야)”
그 보다는 차라리 재위에 있는 자들이 행한 일의 시시비비를 거론함으로서, 그 결과 그 일을 더욱 더 절실하고도 명백하게 할 수 있었다.

331.夫<春秋>(부 <춘추>)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은

332.上明三王之道(상명삼왕지도),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삼왕(三王)/ 하(夏) 나라를 세운 우(禹)임금,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임금,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을 말한다.

333.下辯人事之紀(하변인사지기),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논하여

334.別嫌疑,
의심스러운 것을 밝히고

335.明是非,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했으며,

336.定猶豫,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을 확실히 하게 했고

337.
善善惡惡,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338.賢賢賤不肖,
어진 사람은 어질다 하고, 불초한 자는 천하다고 했다.

339.存亡國,
망한 나라의 이름은 보존하게 하여

340.繼絶世,
그 끊어진 대를 계속 잇게 만들었으며

341.補弊起廢
낡아서 해진 것을 보충하고 폐하여 없어진 것은 다시 일으켜 세웠으니

342.王道之大者也.
가장 큰 왕도를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43.<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
역경(易經)을 저술한 것은 천지(天地), 음양(陰陽), 사시(四時), 오행(五行)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344.故長于變:
변화를 아는데 그 뛰어난 장점이 있고

345.<禮>經紀人倫,故長于行;
예경(禮經)은 인륜의 기강에 대해 서술하여, 인간의 행위를 밝히는데 뛰어나며

346.<書>記先王之事,
서경(書經)은 선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

347.故長于政;
정치 방면에 대한 기술이 뛰어난 것이다.

348.<詩>記山川谿谷禽獸草木牝牡雌雄,
또한 시경(詩經)은 산천(山川)과 계곡(溪谷), 들짐승과 날짐승, 초목, 빈모(牝牡)와 자웅(雌雄)에 관하여 기록을 한 것이기 때문에

349.故長于風;
풍토와 사람들 사이의 애증에 관한 기술에 장점이 있는 것이다.

350.<樂>樂所以立,
악경은 음악을 논술함으로서 사람이 서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경전인 관계로

351.故長于和;
화목하게 하는데 뛰어난 점이 있다.



태사공자서(11)

352.<春秋>辯是非,
춘추는 옳고 그름을 판별한 책이기 때문에

353.故長于治人.
정치하는 사람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며

354.是故<禮>節人,
그런 이유로 예경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제하게 만들고

355.<樂>以發和,
악경은 그 소리로서 화합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356.<書>以道事,
서경은 그 글로서 정사를 말하고

357.<詩>以達意,
시경은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편찬한 뜻이 있으며

358.<易>以道化,
주역은 세상사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359.<春秋>以道義.
춘추는 세상의 도의를 논한 것이다.

360.撥亂世反之正,
그런 까닭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돌려놓아 올바르게 만드는 데는

361.莫近于<春秋>.
춘추만한 책이 없다.

362.<春秋>文成數萬,
춘추는 수만 자의 글로 쓰여 진 것에 불과하나

■춘추는 실제로 16,500자에 불과하다.

363.其指數千.
그 뜻하는 바는 수천가지이다.

364.萬物之散聚皆在<春秋>.
만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 안에 있으며

365.<春秋>之中,
춘추의 기록에는

366.弑君三十六
살해당한 군주는 36명이며

377.亡國五十二
망한 나라는 52개국에

368.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
그 사직을 보존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달아난 제후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369.察其所以,
그런 일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370.皆失其本已.
모두가 그 본분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371.故<易>曰‘失之豪厘,
그런 까닭에 역경에서 말하기를 ‘ 잃은 것은 터럭이나

372.差以千里’.
그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크다고 했다.‘

373.故曰‘臣弑君,
또한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374.子弑父,
아들이 그 아비를 죽인 것은

375. 非一旦一夕之故也,
단지 하루아침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76.其漸久矣.
오랫동안의 일이 점차적으로 쌓였다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77.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
그런 까닭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위정자들은 춘추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78.前有讒而弗見,
춘추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서 아첨하는 자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379.後有賊而不知.
뒤에 숨어서 역심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아지 못한다.

380.爲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
남의 신하가 되려고 하는 자도 춘추를 모르면 안 될 것이며

381.守經事而不知其宜,
춘추를 알지 못한 관계로 평상시의 일만을 알뿐 적절하게 대처할 줄 모르고

382.遭變事而不知其權.
변고를 만났을 때는 그 임기응변의 기지를 발휘할 줄 모른다.

383.爲人君父而不通于<春秋>之義者,
사람이 군주나 그 아비가 되었음에도 춘추가 말하는 대의에 통하지 못한다면

384.必蒙首惡之名.
그 사람은 필시 악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385.爲人臣子而不通于<春秋>之義者,
남의 신하나 자식이 된 자가 춘추를 읽어 대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386.必陷纂弑之誅,
필시 찬역이나 시해의 일에 연루되어 주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387.死罪之名.
죽을죄를 지었다는 악명을 얻게 될 것이다.

388.其實皆以爲善,
사실은 그들은 옳다고 여겨 행한 것이지만

389.爲之不知其義,
춘추의 대의를 아지 못하고 행한 것이기 때문에

390.被之空言而不敢辭.
사가들로부터 사실이 아닌 말로 시역죄를 저질렀다고 단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변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391.夫不通禮義之旨,
무릇 예와 의의 요지를 모른다면

392.至于君不君,
결국은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게 되고

393.臣不臣,
신하는 신하답지 못할 것이며

394.父不父,
아비 되는 자는 아비답지 못하고

395.子不子.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되어

396.夫君不君則犯,
대저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들로부터 범함을 입게 되고

397.臣不臣則誅,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그 군주로부터 주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398.父不父則無道,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399.子不子則不孝.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식이 되는 것이다.

400.此四行者,
이 네 가지를 행위야말로

401.天下之大過也.
천하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있다.

402.以天下之大過予之,

이 천하의 가장 큰 죄과를

403.則受而弗敢辭.
뒤집어쓰면서도 감히 아무런 대꾸도 못할 것이다.

404.故<春秋>者,
그런 까닭에 춘추는

405.禮義之大宗.
예와 의를 밝히는 가장 큰 근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6.夫禮禁未然之前,
무릇 예란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407.法施已然之後;
법이라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408.法之所爲用者易見,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소용되는 바는 누구든 쉽게 알고 있으면서

409.而禮之所爲禁者難知.”
예란 것이 소용되는 바는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는 2번 본선(封禪)

 

태사공자서3

-사마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2.htm

 

240.而太史公留滯周南(이태사공유체주남),
그러나 태사공은 주남(周南)에 머물러

♣주남(周南)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241.不得與從事(부득여종사),
봉선을 행하기 위해 태산으로 간 천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242.故發憤且卒(고발분차졸).
그것 때문에 울화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243.而子遷適使反,(이자천적사반)
이때 마침 그의 아들 사마천이 천자의 사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244.見父于河洛之間.(견부우하락지간)
하수와 락수 지간에 그의 부친을 뵙자

245.太史公執遷手而泣曰:(태사공집천수이읍왈)
태사공은 사마천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246.“ 余先周室之太史也.(여선주실지태사야)
우리들의 선조들은 주나라의 태사였다.

247.自上世嘗顯功名于虞夏, (자상세상현공명우우하)
우리 종족들은 까마득한 옛날인 하나라 때부터 공명을 세상에 들어낸 이래

248.典天官事. (전천관사)
하늘에 관한 일을 주관해왔다.

249.後世中衰, (후세중쇠)
그러나 후세에 이르자 쇠락해지기 시작하더니

250.絶于予乎?(절우예호)
나의 대에 이르러 끊어지려 하고 있지 않느냐?

251.汝復爲太史,(여복위태사)
너는 다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

252.則續吾祖矣. (즉송오조의)
우리들 조상들이 해 왔던 일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253.今天子接千歲之統, (금천자접천세지통)
지금 천자께서는 천년 대통을 이어 받아

254.封泰山, (봉태산)
태산에 봉선을 행하시려고 가셨는데

255.而余不得從行, (이여부득종행)
나는 부득이 따라가 수행할 수 없었다.

256.是命也夫, (시명야부)
이것은 천명이로다!

257.命也夫! (명야부)
진실로 천명이로다!

258.余死, (여사)
내가 죽으면

259.汝必爲太史;(여필위태사)
너는 반드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260.爲太史, (위태사)
너는 태사가 되어

261.無忘吾所欲論著矣 (무망오소욕론저의),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결코 잊으면 안 될 것이다.

262.且夫孝始于事親, (차부효시우사친)
무릇 효도라는 것은 그 부친의 뜻을 받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263.中于事君, (중우사군)
출사하여 그 군주를 섬기다가

264.終于立身. (종우입신)
입신하는데서 끝나며

265.揚名于後世, (양명우후세)
후세에 이름을 남겨

266.以顯父母, (이현부모)
그 부모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267.此孝之大者. (차효지대자)
효도의 가장 큰 도리라 할 것이다.

태사공자서(8)

268.夫天下稱誦周公,
무릇 천하 사람들이 주공을 칭송하고 있는 것은

♣주공(周公)/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앉아 주나라를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예악을 정비하고 전장(典章)제도를 만들어 주나라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269.言其能論歌文武之德,
그가 능히 문왕과 무왕의 덕을 시가(詩歌)로서 논했으며

■문왕(文王)/원래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 일대에 거주하던 주족(周族)의 수장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졌다.

270.宣周邵之風,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노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시경 국풍(國風)에 실려 있는 장의 이름이며 주공(周公) 단(丹)과 소공(召公) 석(奭)이 함께 문왕의 명을 받들어 남쪽의 양자강 유역에 원정을 나갔다가 그곳의 시가를 수집해 왔는데 주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주남, 소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소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271.達太王王季之思慮,
결국은 태왕(太王)과 왕계(王系)의 사려 깊은 지혜에 통하게 되고

■태왕(太王)과 왕계(王季)/태왕은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말한다. 원래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서남의 빈( ) 땅에 살았으나 이민족인 훈육(燻 )의 침입을 받자 고공단보는 주족을 이끌고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기산 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고공단보는 아들을 셋을 두었다. 장자가 태백, 둘째는 우중이고 막내는 계력(季歷)이다.. 그러나 고공단보는 주족들을 번성하게 할 사람은 왕계의 아들인 창(昌)(후에 주문왕)이 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족장 자리를 계력에게 넘기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은 남쪽으로 달아나 오랑캐의 습속으로 바꾸고 그곳의 추장이 되었다.

272.爰及公劉,
마침내는 공유의 공적에 미치고

■공유(公劉)/후직의 자손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주족을 다시 일으키고 후직이 시작했던 농사의 일을 부흥시켰다. 다음은 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 공유 부분이다.

<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 )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사(農事)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불줄이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되자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유(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유(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273.以尊后稷也.
후직까지 높인 까닭이다.

■후직(后稷)/ 주족의 시조로 요임금과 순임금 때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기(棄)를 말한다. 후직은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벼슬 이름이다. 다음은 사기 주본기의 후직에 관련된 부분이다.

<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며 이름을 기(棄)다. 그의 모친은 유태씨(有邰氏) 부족의 딸로써 이름을 강원(姜原)이라고 했다. 강원은 제곡(帝?)의 정비가 되었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것 같이 되었다. 실제로 애를 밴지 10 달이 되자 아들을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다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나 소 등이 아기의 주위를 돌며 몸을 피하며 밟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시 그 아이를 깊은 숲 속으로 데려가 버리도록 하였더니 이번에는 인적이 드물던 숲 속에 사람의 왕래가 갑자기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그 아기를 얼어붙은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그 날개로 아기의 밑을 깔아 주기도 하고 위를 덮어 주기도 하였다. 강원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아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棄)라고 부른 것이었다.

기(棄)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마음속에 높은 뜻과 원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놀 때는 항상 삼나무나 콩 종류의 작물을 즐겨 심었으며 그가 심은 삼나무와 콩은 크게 자라서 무성하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농사를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살펴 좋은 종자를 파종하여 많은 량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백성들이 기에게 와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요 임금이 기를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였다. 천하가 기(棄)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워 많은 이를 얻게 되어 기는 큰공을 세우게 되었다. 순(舜) 임금이 말했다.

“ 기(棄)는 백성들이 굶기 시작하자 농사를 관 장하는 관직을 맡아 백곡(百谷)을 골라 파종하여 백성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 ”
순임금이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관직을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후직(后稷)이라 하고 희(姬)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를 거치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274.幽?之后,
유왕과 여왕 이후

■유왕/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을 받아 유왕은 싸움 중에 살해 되었고 그의 아들 평왕이 그 도읍을 지금의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 동주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여왕( 王)/ 서주의 11대 왕으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기원전 841년 국인(國人)들의 반란으로 지금의 산서성 곽현인 체( ) 땅으로 달아나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편 서주는 달아난 려왕을 대신해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서로 협력하여 왕대신 나라를 다스리다가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려왕의 아들인 선왕을 왕으로 추대했다. 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이 서주의 마지막 왕이다.

275.王道缺,
왕도가 무너지고

276.禮樂衰,
예악이 쇠하게 되자

277.孔子脩舊起廢,
공자께서 옛것을 고치고 버려진 것을 다시 일으켜

278.論<詩>, <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논하셨고

279.作<春秋>
춘추(春秋)를 논하자

280.則學者至今則之.
후세의 학자들이 그것을 규범으로 삼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281.自獲麟以來四百有餘歲,
획린한 이래 400여 년 동안

♣획린(獲麟)/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춘추시대 때인 노은공(魯隱公) 식고(息姑) 원년 기원전 722년에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 장(將) 39년 기원전481년에 끝나는 240년 간의 노나라 역사책이다. 노애공 치세 때 노나라에 기린이 나타났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자 공자는 그것은 군주들이 무도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하며 춘추를 끝냈다. 이를 획린(獲麟)이라고 한다. 공자는 2년 후인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282.而諸侯相兼,
제후들은 서로 다투어 나라를 넓히는 일에만 몰두하여

283.史記放絶,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284.今漢興,
지금 한나라가 흥기하여

285.海內一統,
온 세상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286.明主賢君忠信死義之士,
밝고 어진 임금과 충신들과 의로운 선비들이 가득하니

287.余爲太史而弗論載,
내가 태사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논평하여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288.廢天下之史文,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폐하고 말았구나!

289.余甚懼焉,
나는 이를 심히 두려워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290.余其念哉!”
너는 나의 이 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91.遷俯首流涕曰:
사마천이 머리를 수그리며 눈물을 흘리며 그의 부친에게 말했다.

292.“ 小子不敏,
소자가 불민하나

293.請悉論先人所次舊聞,
선조들이 정리하여 놓은 옛날의 기록들을 논하여 기록하도록 하고,

294.弗敢闕.”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309.卒三歲而遷爲太史公(졸삼세이천위태사공),
사마천은 그 부친이 세상을 뜬지 삼 년 후에 태사공이 되어,

310.紬史記石室金櫃之書(유사기석실금궤지서).
역사 기록과 석실의 금궤 속에 보관되어 있던 서책들을 편철(編綴)하였다.

311.五年而當太初元年,
그리고 5년 뒤인 태초(太初) 원년,

■태초(太初) 원년/ 한무제 37년인 기원전 104년이다. 진나라가 통일한 역법은 그 시작을 매년 10월로 했으나 1월을 그 해의 시작으로 고쳐 태초력이라 하고 연호를 원봉(元封)에서 태초(太初)로 개원했다. 태초력은 그때부터 1911년 신해혁명까지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陰曆)을 말한다. 한무제(漢武帝)는 그의 재위 54년 동안 연호를 모두 11번 바꿨다. 태초(太初)는 한무제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1까지 사용했던 한무제의 7번 째 연호이다.

312.十一月甲子朔旦冬至,
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짓날에

313.天曆始改,
역법을 개정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314.建于明堂,
명당을 세워

■명당(明堂)/중국 고대에 있어서 천자나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곳으로, 조회, 제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다음은 명당을 노래한 명당부(明堂賦)이다.

‘ 빛나는 명당은 양지 녘에 자리 잡고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 천하를 내려다본다. 하늘 아래 한 명뿐인 천자가 정령을 발하면 만국의 제후들이 달려와 배알하며 조공을 바친다. 명당의 내부는 종횡(縱橫)으로 각각 세 개씩의 방을 만드니 모두 아홉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고 정 가운데의 큰방에 태묘(太廟)를 모시고 태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태실(太室)을 두었다. 또한 각 태실의 한 가운데는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溜)를 두었다. 열고 닫는 단짝 문으로 36개의 문을 내고 72개의 창문을 열을 지어 달았다. 왼쪽 것과 오른 쪽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그 직분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명당의 윗 모습은 둥글고 아래 모양은 네모진 것은 하늘과 땅이 기수(奇數)와 우수(隅數)로 이루어진 법칙에 따른 것이다. 관리들이 서는 곳을 여러 군데 만들어 놓은 것은 관리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삼공(三公)이라 마땅히 명당의 가운데 계단에 늘어서서 여러 군신들과는 같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며, 작위가 후작(侯爵)인 제후들은 동쪽 계단의 동쪽 편에 서서 서쪽을 쳐다보다가 천자가 나타나면 북쪽으로 몸을 돌려 절을 올리고, 백작(伯爵)들은 서쪽 계단의 서쪽으로 서서 동쪽을 바라보며 천자에게 절을 올린다. 자작(子爵)들은 정문의 동쪽 편에 늘어서고, 남작(男爵)들은 자작들의 서쪽 맞은편에 도열한다. 융족은 금(金)이니 서문 밖에, 이(夷)족은 목(木)이니 동문 밖에, 북문 밖에는 화(火)의 종족인 적(狄)족이, 남문 밖에는 수(水)의 종족인 만(蠻)족이 선다. 천하 구주(九州)의 지방 관원들은 명당 담장 밖에서 오른 쪽으로 열을 서서 도열하고, 변경을 지키는 수장들은 담장 밖에 도열하여 지방 관원들의 맞은편인 왼쪽에 서서 도열한다. 주홍색 방패와 옥으로 자루를 장식한 의장용 도끼들은 마치 수많은 나무들이 우뚝 솟아나서 앞 다투어 천자에게 배알하듯이 하고, 표범 가죽으로 깃대를 장식한 용이 그려진 천자의 깃발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며 또한 엄숙하고 무성한 모습에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이룬 듯 하다. 연기가 걷히고 여러 백관들이 일제히 도열하면 하늘에서 태양이 나타나면, 천자께서 주옥을 꿰어 늘어뜨린 면류관을 쓰시고 임하시어 명당의 용좌에 앉으신다. 비단에 도끼의 문양을 수놓은 병풍을 뒤에 둘러치시고, 남쪽을 향하여 앉으시어 천하 제후들과 구름 같은 관리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것을 굽어보시면서 온 천하가 복종하고 있음을 아신다.

315.諸神受紀.
여러 신들에게 기년이 바뀌어 천하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고했다.

■제신수기(諸神受紀)/남북조 때 남송(南宋)의 배인(裵 馬+因)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의 “ 告于百神, 與天下更始, 著紀于是”를 따랐다.

316.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했다.

317.“ 先人有言:
돌아가신 부친께서 나에게 당부하시기를

318.‘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
“ 주공이 죽고 5백 년이 지나 공자(孔子)가 태어나셨고

■주공(周公)의 정확한 사망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기원전 11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보며 고 공자의 탄생은 기원전 551년이다.

319.孔子卒后至于今五百歲,
다시 공자가 돌아가신 이래 지금 500년이 되었으니,

■공자는 춘추 후기인 기원전 479년에 죽고 사마담이 사마천을 만나 죽을 때 유언을 한 시점은 기원전 113년의 일이니 공자탄생부터 사마담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 500년이 아니라 사실은 363년 만의 일이다.

 

320.而能紹明歲,
누가 나타나 능히 그 뜻을 이어받아 밝은 시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321.正<易經>,
주역(周易)과 그 해설서들을 바르게 하고

322.繼<春秋>,
춘추를 계승하여 끊어진 역사기록을 잇게 할 것이며

323.本<詩>, <書>, <禮>, <樂>, 之際.’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의 근본을 밝힐 시기로다." 라고 말씀하셨다.


324.意在斯乎! 意在斯乎!
아버님의 뜻이 여기에 있도다!
여기에 있도다!

325.小子何敢讓言.”
소자가 어찌 감히 그 일을 사양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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