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다

장자 외편 제16장 秋水편

※ 본문 위 ( )속의 숫자는 莊子今註今譯(王雲五편, 대만상무인서관)의 頁數임.


*제물론편의 萬物齊同론과 소요유편의 至人의 倜儻不覊(척당불기, 대범하여 얽매이지 아니함)의

경지를 조술(祖述)함. 장자 외편 중 압권임.

정저지와(井底之蛙)

①우물 밑의 개구리 ②소견(所見)이나 견문(見聞)이 몹시 좁은 것

한단지보(邯鄲之步)

한단에서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뜻으로, 제 분수()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다가

이것저것 다 잃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하루살이에게 한 달을 설명할 수는 없다

(452)

井蛙不可以語於海者

우물 속의개구리는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

拘於虛也.

우물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요

夏蟲不可以語於冰者

여름에만 사는 벌레가 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篤於時也.

자기가 사는 여름만 시절인 줄 굳게 믿기 때문이며,

曲士不可以語於道者

촌스런 선비가 도를 말할 수 없는 것은

束於敎也.

속된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477-478)公孫龍이 魏나라 牟에게 장자의 말을 듣고 茫然自失한 이유를 물었다.


公子牟가 隱机大息하고 仰天而笑曰

위나라 公子 모는 책상에 기대어 크게 탄식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그의 즐거움을 자랑하다

"子獨不聞夫埳井之蛙아?"1) 1)埳(감):구덩이. 蛙(와):개구리.

"그대는 홀로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을 듣지 못했는가?"

謂東海之鱉하여2) 曰 2)鱉(별):자라.

이 개구리가 동해의 자라에게 일러 말하기를,

"吾樂與로다!

"나는 즐겁도다.

出하여는 跳梁乎井幹之上하고

나가면 우물 난간 위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入하여는 休乎缺甃之崖하며:3) 3)甃(추):벽돌담, 우물 벽돌.

들어오면 깨어진 벽돌 가에 쉬기도 하며,

赴水하면 則接腋持頤하고

물에 들면 수면에 겨드랑이를 접하여 턱을 내밀고

蹶泥하면 則沒足滅跗하니:4) 4)跗(부):발등.

진흙을 차면 발이 묻혀 발등이 안 보이지.

還視虷蟹與科斗가5) 5)虷(간):장구벌레. 科斗:올챙이.

돌이켜 보건대, 저 장구벌레, 게, 올챙이 따위는

莫吾能若也라.

나의 능함과 같지 못하네.

且夫擅一壑之水하여

한 골짜기의 물을 마음대로 하여

而誇跱埳井之樂하니6) 6)誇跱(과치):盤據之意. 跱(치):머뭇거리다.

우물의 즐거움을 독차지하니

此亦至矣.

이 즐거움 또한 지극하다네.

夫子奚不時來入觀乎!󰡕

당신은 어찌하여 때때로 와서 구경하지 않는가?󰡕 라고 말했다.

 

동해의 자라가 광대무변의 동해바다를 설명하다

東海之鱉[鼈]이 左足未入하여

동해의 자라가 왼 다리가 미쳐 들어가지 아니하여서

而右膝이 已縶矣라.7) 7)縶(집):매다.

오른 다리가 [우물턱에] 걸려버렸다.


於是에 逡巡而卻하여 告之海하여 曰

이에 엉금엉금 기어 물러나와 그에게 바다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夫千里之遠로도 不足以擧其大하고:

"대저 천리의 먼 거리로도 그 크기를 거론할 수 없고,

千仞之高로도 不足以極其深.

천 길의 높이로도 그 깊이를 다 잴 수 없네.

禹之時에 十年九潦나8) 8)潦(료):水淹, 곧 洪水.

우임금 때에 10년 동안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지만

而水弗爲加益하고:

바닷물이 더 늘어나지 않았고

湯之時에 八年七旱이나

탕왕 때에는 8년동안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들었지만

而崖不爲加損하다.

언덕에 물이 더하거나 즐어들지 않았다네.


夫不爲頃久推移

경각과 오램에 의해 추이(변화)하지 않고

不以多少進退者가

물의 다소에 따라 증감하지 아니하는 것이

此亦東海之天樂也."

이것이 또한 동해의 즐거움이라네."

 

우물안 개구리,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다

於是埳井之와가 聞之러니

이에 우물안 개구리가 듣더니

適適然驚하고9) 9)適適然(적적연):驚怖之貌.

깜짝 놀라

規規然自失이라.10) 10)規規然(규규연):自失之貌.

멍하니 정신을 잃었다.

 

(478)

且夫知不知是非之竟하면서

또한 대저 지혜가 시비의 한계임을 알지 못하면서

而猶欲觀於莊子之言하면

장자의 말을 알려고 한다면

是猶使蚊蝱負山하고1) 1)蝱(맹):등에.

이것은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고

商蚷馳河也니2) 2)商蚷(상거):노래기, 馬蚿蟲.

노래기에게 강을 건너가라는 격이니

必不勝任矣라.

반드시 다 책임질 수 없다.


且夫知不知論極妙之言하면서

또한 대저 지혜가 극히 미묘한 말을 논할 줄 모르면서

而自適一時之利者

한 때의 口舌의 승리에 만족하는 이는

是非埳井之䵷與?

이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닌가?

且彼方跐黃泉하고3) 3)跐(차):踏.

저것(장자의 말)은 아래로 황천을 밟고

而登大皇한지라4) 4)大皇(대황):天

위로는 하늘에 이르러

无南无北히 奭然四解하여

남북이 없이 훤히 사방으로 통달해 있어

淪於不測하고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까지 잠기고,

无東无西히 始於玄冥하여

동서도 없이 유현(幽玄)한 근원에서 시작하여

反於大通하다.

大道의 통달함에 돌아온다.



(478)

子乃規規然히 而求之以察하고

너는 자잘하게 네가 본 데서 찾고

索之以辯하니

변론으로 그것을 찾는다.

是直用管闚天하고

이것은 곧바로 가는 관으로 세상을 보고

用錐持地也하니

송곳으로 땅을 재어 보는 것과 같으니

不亦小乎인저!

또한 좁은 소견이 아닌가?

 

한단에서 걸음걸이를 배우다


且子獨不聞壽陵餘子之擧行於邯鄲與아?5) 5)餘子(여자):少年人.

또한 자네는 홀로 수릉의 소년이 한단에 거행했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未得國能하고 又失其故行矣한지라

그는 조나라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배우지 못하고 게다가 옛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리고

直匍匐而歸耳니라.

곧바로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왔다.

今子不去하면 將亡子之故하고

이제 너는 떠나지 않으면 너의 옛것도 잃어버리고

失子之業하리라.6) 6)業:本業.

너의 본업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융프라우 & 카프리섬& 폼페이 유적]








붕새 & 뱁새 -생각의 차이

◊장자 內篇

莊子 생몰연대 B.C.369-B.C.286으로 추정.

1. 소요유(逍遙遊)편

속세를 초월하여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절대적으로 지유로운 인간의 생활을 의미한다. 逍遙:優遊自在. 여유롭게 노닐어 거리낌이 없음.


北冥1)有魚하여 其名爲鯤. 1)冥:通溟 訓海, 바다, 남북의 極.

북명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이다.

鯤之大가 不知其幾千里也.

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化而爲鳥하니 其名爲鵬.

변화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은 붕새다

鵬之背가 不知其幾千里也.

붕새의 등 길이도 몇 천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다.

2)而飛하면 其翼若垂天之雲. 2)怒=努.

붕새가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 같다.

是鳥也는 海運하면3) 3)海運:謂海風動.

이 새는 바다 바람이 불면

則將徙於南冥하는데

남명으로 옮아가려 한다.

南冥者는 天池也.4) 4)天池:天然大池.

남명은 바다다.


齊諧5)者는 志怪者也. 5)齊諧:一說謂人名, 一說謂書名.

제해란 기괴함을 적은 책이다.

諧之言曰

제해에 말하기를

「鵬之徙於南冥也에

붕새가 남극으로 옮겨가는데

水擊이6) 三千里요 6)水擊:水激. 激격:물결이 부딪쳐 흐르다. 激浪.

물결을 친 것이 삼 천리요,

搏扶搖而上者가7) 九萬里라 7)搏:잡다, 취하다. 扶搖:暴風. 회오리바람.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간 것이 구만리다.

去以六月하여 息者也.」

육 개월을 가서야 쉬는 자이다.」

野馬也와8) 塵埃也는9) 8)野馬:空中遊氣 곧 아지랭이. 9)塵埃:空中遊塵.

공중에 떠도는 기운과 티끌은

生物之以息相吹也.10) 10)息:숨, 호흡.

활동하는 물체가 모두 바람으로 말미암아 서로 불어서 움직인다.

天之蒼蒼은 其正色邪?

하늘이 저렇게 푸른 것은 본래의 빛깔인가?

其遠而無所至極邪?

너무 멀어서 끝 간 데가 없는 것은 아닌가?

其視下也에 亦若是則已矣.11) 11)則已:而已.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蜩與學鳩는12) 笑之曰 12)蜩매미조. 學鳩메[산]까치.

매미와 산까치는 이를 비웃는다.

「我決起而飛하여13) 13)決起而飛:奮起而飛, 盡力而飛.

「우리는 힘을 다해 날아올라

搶楡枋而止하여도14) 14)搶:닿다, 이르다. 楡느릅나무. 枋박달나무.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가려해도

則不至하고 而控於地而已矣.15) 15)控:投.

때로는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고 마는데

奚以之九萬里而南爲?」

어찌하여 구만리를 날아올라 남으로 가는가?

適莽蒼者는16) 16) 莽蒼(망창)푸릇푸릇한 근교의 경치.

가까운 들판에 가는 자는

三湌而反하여도 腹猶果然.17) 17)果然:飽然.

세 끼만 먹고 돌아와도 배가 오히려 든든하지만

適百里者는 宿舂糧하고18) 18)宿舂糧:舂擣糧食 爲一宿之借. 곧舂一宿之糧.

백리를 가는 자는 하루 밤 자고 올 수 있는 양식을 찧어야 하고

適千里者는 三月聚糧.

천리를 가는 자는 삼 개월 동안의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之二蟲이 又何知!

그 두 마리의 벌레[매미와 산까치]가 또한 무엇을 알겠는가?)

[철원 복계산][펌]











사기열전 제70 자서

[사마천 자서의 변]

52만6천5백자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은자주)‘사기(史記)’의 처음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남북조시대부터 ‘사기’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384. 維我漢繼五帝末流(유아한계오제말류),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으며

1385. 接三代(統)(絶)業(접삼대(통)(절)업).
삼대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1386. 周道廢(주도폐),
주나라의 도가 폐하게 되니

1387. 秦拔去古文(진발거고문),
진나라가 서서 옛날의 고적들을 없애고

1388. 焚滅<詩><書>(분멸<시><서>),
<시(詩)>와 <서(書)>를 불살랐다.

1389. 故明堂石室金櫃玉版圖籍散亂(고명당석실금궤옥판도적산란).
그 결과 명당(明堂)의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금궤와 옥판의 지도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엉망이 되어버렸다.

1390. 于是漢興(우시한흥),
이어서 한나라가 흥기하자

1391. 蕭何次律令(소하차율령),
소하가 율령을 차례로 발하고

1392. 韓信申軍法(한신신군법),
한신(韓信)은 군법을 밝혔으며

1393. 張蒼爲章程(장창위장정),
장창은 법규를,

1394. 叔孫通定禮儀(숙손통정예의),
그리고 숙손통은 예의를 정했다.

1395. 則文學彬彬稍進(즉문학빈빈초진),
이로써 한나라는 문학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고

1396. <詩><書>往往間出矣(<시><서>왕왕간출의).
<시(詩)>와 <서(書)>가 세상에 나돌기 시작했다.

1397. 自曹參 盖公言黃老(자조참천개공언황노).
조참은 개공을 무제에게 천거하여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398. 而賈生(이가생),
또한 가생과

1399. 晁錯明申, 商(조착명신, 상),
조착은 신자와 상군의 법가사상을 밝혔다.

1400. 公孫弘以儒顯(공손홍이유현),
공손홍은 유학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고

1401. 百年之間(백년지간),
그 백년 동안의

1402.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천하유문고사미불필집태사공).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날 전적들이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1403.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태사공잉부자상속찬기직.
태사공의 직책에는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계속해서 임명되었다.

1404. 曰: "於戱! (왈 : "어희)
사마천이 말했다. " 아아!

1405. 余維先人嘗掌斯事(여유선인상장사사),
우리들 선조들께서 이 이일을 일찍이 맡아하여

1406. 顯于唐虞(현우당우),
우임금 때 벌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1407. 至于周(지우주),
주조에 이르러

1408. 復典之(복전지),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1409. 故司馬氏世主天官(고사마씨세주천관).
이런 연고로 사마씨는 대를 이어 천관을 맡아하다가

1410. 至于余乎(지우여호),
이윽고 나에게까지 이른 것인가?

1411. 欽念哉!(흠념재)"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12. 罔羅天下放失舊聞(망라천하방실구문),
이미 없어진 구문들을 천하에서 모아서

1413. 王迹所興(왕적소흥),
왕들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흥함의 처음을 찾고

1414. 原始察終(원시찰종),
끝을 살펴서

1415. 見盛觀衰(견성관쇠),
흥망성쇠를 보고자 하였으며

1416. 論考之行事(논고지행사),
그 일의 진행을 사실적으로 고찰하여

1417. 略推三代(략추삼대),
삼대의 일을 간략히 추정하였으며,

1418. 錄秦漢(록진한),
진한시대의 기록에 유추하여

1419. 上記軒轅(상기헌원),
위로는 황제부터 기록하여

1420. 下至于玆(하지우자),
지금의 금상폐하에 이르기까지

1421. 著十二本紀(저십이본기),
모두

12본기

를 지은 것은


1422. 旣科條之矣(기과조지의).
모두 조례를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423. 幷時異世(병시지세),
시대가 같기도 하고, 세대가 다르기도 하여

1424. 年差不明(연차불명),
그 연차가 확실하지 않아

1425. 作十表(작십표).
모두
10개의 연표
를 만들었다.

1426. 禮樂損益(예악손익),
예와 악은 없어지고 혹은 더하여지기도 하였으며

1427. 律歷改易(율력개이),
율력은 새로 바뀌어 졌다.

1428. 兵權, 山川, 鬼神(병권, 산천, 귀신),
또한 병사와 권모의 일, 지방제도, 제사에 관한 일

1429. 天人之際(천인지제),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1430. 承 通變(승폐통변),
그 폐단을 밝혀 변화에 응하게하고자

1431. 作八書(작팔서).
<서(書)> 8편
을 지었다.

1432. 二十八宿環北辰(이십팔수환북신),
28팔 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있고

1433. 三十輻共一 (삼십복공일곡),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한 개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으나

1434. 運行無窮(운행무궁)
그 운행의 법측은 무궁하듯이

1435. 輔拂股肱之臣配焉(보불고굉지신배언),
왕들을 보필하던 고굉지신들을 이것에 빗대어

1436. 忠信行道(충신행도),
충신들이 도를 행하고

1437. 以奉主上(이봉주상),
그 임금을 받든 사람들에 관하여

1438. 作三十世家(작삼십세가).
세가 30편
을 지었다.

1439. 扶義  (부의숙당),
의를 부양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1440. 不令己失時(불령기실시),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1441. 入功名于天下(입공명우천하),
공명을 세상에 세운

1442. 作七十列傳(작칠십열전).
열전 70편
을 지었다.

1443. 凡百三十篇(범백삼입편),
모두 130편에



1444. 五十二萬六千五百字(오십이만육천오백자),
52만6천5백자



1445. 爲<太史公書>(위<태사공서>.)
<태사공서>라 이름 짓는다.


1446. 序略以拾遺補藝(서략이습유보예),
이 서문은 개략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수습하여

1447. 成一家之言(성일가지언),
일가의 말을 이루어

1448. 厥協<六經>異傳(궐협<육경>이전),
육경 외에 전하여지는 것을 보충하여

1449. 整齊百家雜語(정제백가잡어),
백가와 잡어를 정리한 것이다.

1450. 藏之名山(장지명산),
정본은 명산에 보관하고

1451. 副在京師(부재경사),
부본은 서울에 두어

1452. 俟后世聖人君子
第七十

(의후세성인군자 제칠십)..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기로 했다.
열전 제70.

[은자주] 열전 제70은 ‘태사공 자서’이다.

1453. 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한다.

1454. 余述曆黃帝以來至太初而訖(여술력황제이래지태초이흘),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여

1455. 百三十篇(백삼십편)
130편의 역사서를 지었다."

[太史公自序 大尾]

 

 

 

https://kydong77.tistory.com/21581

 

사마천, 사기열전 太史公 自序 -열전 제70편 국역/swings81

편액의 전서체 글씨를 인쇄용 한자로 바꾸면 편액 아래의 적색 글씨가 됩니다. 전서체는 해서체 붓글씨 이전의 글씨체이다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

kydong77.tistory.com

 

 

 

 

사기열전 제31-제69 자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5.htm


1189. 以淮南叛楚歸漢(이회남반초귀한),
경포는 회남의 땅을 차지했다가 초나라를 반하고 한나라로 돌아섰으며

1190. 漢用得大司馬殷(한용득대사마은),
한나라는 그를 이용하여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얻어서

1191. 卒破子羽于垓下(졸파자우우해하).
결국은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했다.

▶해하(垓下)/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靈壁縣) 남쪽에 있던 전적지로 한신이 이끄는 한군이 항우의 초군을 격파하여 중국은 유방이 차지하게 되었다.

1192. 作< 布列傳>第三十一(작<경포열전>제삼십일)
이에
<경포열전> 제31을 지었다.


1193. 楚人迫我京索(초인박아경색),
초나라가 한나라를 경성(京城)과 색성(索城)에서 압박할 때

1194. 而信拔魏趙(이신발위조),
한신(韓信)은 그 뒤를 돌아 위(魏)와 조(趙)를 점령하고

1195. 定燕齊(정연제),
다시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했다.

1196. 使漢三分天下有其二(사한삼분천하유기이),
천하는 한신에 의해 삼 분 되었으나 그 중 하나를 한나라에 바쳐 한나라는 그 둘을 차지하게 되어

1197. 以滅項籍(이멸항적).
그 힘으로써 항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1198. 作<淮陰侯列傳>第三十二(작<회음후열전>제삼십이)
<회음후열전> 제32를 지었다.

1199. 楚漢相距鞏洛(초한상거공락),
초나라와 한나라가 공성(鞏城)과 낙읍(洛邑)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1200. 而韓信爲塡潁川(이한신위전영천),
한왕 신(信)은 영천(潁川)의 길을 메워 퇴로를 차단하고

1201. 盧 絶籍糧饗(노관절적양향).
노관은 항우의 양도를 끊었다.

1202. 作<韓信盧 列傳>第三十三(작<한신노관열전>제삼십삼)
<한신노관열전> 제33을 지었다.


1203. 諸侯畔項王(제후반항왕),
제후들이 항우를 배반했을 때

1204. 唯齊連子羽城陽(유제연자우성양),
제왕만이 유독 성양에 있으면서 항우와 연계하였다.

1205. 漢得以間遂入彭城(한득이간수입팽성).
한왕은 이 틈을 타서 즉시 팽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206. 作<田 列傳>第三十四(작<전담열전>제삼십사)
이에 <전담열전> 제34를 지었다.


1207. 攻城野戰(공성야전),
성을 공략하고 들판에서 적군과 싸움에 임하여

1208. 獲功歸報(획공귀보),
공을 세우고 돌아와 첩보를 전하는데는

1209.  , 商有力焉(쾌, 상유력언),
번쾌(樊 )와 역상( 商)이 제일 힘을 발휘했다.

1210. 非獨鞭策(비독편책),
그들은 단지 싸움을 위해 말채찍을 잡고 달렸을 뿐만 아니라

1211. 又與之脫難(우여지탈난).
한왕과 함께 위난을 같이 당하다가 벗어나기도 했다.

1212. 作<樊 列傳>第三十五(작<번역열전>제삼십오)
<번역열전>제35를 지었다.

1213. 漢旣初定(한기초정),
한나라가 서고 처음으로 안정이 되었으나

1214. 文理未明(문리미명),
문물은 밝히지 못했다.

1215. 蒼爲主計(창위주계),
장창(張蒼)이 주계(主計)가 되어

1216. 整齊度量(정제도량),
도량형을 정비하여 통일하고

1217. 序律歷(서율력).
법률과 역법을 바로 잡았다.

1218. 作<張丞相列傳>第三十六(작<장승상열전>제삼십육)
<장승상열전>제36을 지었다.


1219. 結言通使(결언통사),
말로서 결맹을 맺고 사신이 되어 통호하여

1220. 約懷諸侯(약회제후);
제후들과 조약을 맺어 품에 안았다.

1221. 諸侯咸親(제후함친),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와 친해졌으며

1222. 歸漢爲藩輔(귀한위번보).
결국은 귀속되어 번신(藩臣)과 보신(輔臣)이 되었다.

1223. 作< 生陸賈列傳>第三十七(작<역생육가열전>제삼십칠)
<역생유가열전>제37을 짓는다.

▶역생( 生)/ 진한(秦漢) 교체기 지금의 하남성 서남부에 있던 진류(陳留) 고양향(高陽鄕)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을 찾아가 계책을 바쳐 진류(陳劉)를 쳐부수고 광야군(廣野郡)에 봉해졌다. 초한 전쟁 동안에 그는 제왕 전광(田廣)에게 유세하여 한나라에 귀속시켰으나, 이어서 한신(韓信)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제왕 전광(田廣)은 역생을 끓는 물에 삶아 죽였다. 육가(陸賈)는 초나라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따라 다니며 변설로써 이름을 얻었다. 한고조 11년 남월왕(南越王) 조타(趙 )를 설득하여 한나라를 섬기게 하여 한나라 황제의 위엄을 남해(南海)에까지 미치게 했다고 해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1224. 欲詳知秦楚之事(욕상지진초지사),
진나라 말기 한과 초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알고 싶다면

1225. 維周 常從高祖(유주설상종고조),
오로지 주설만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고조 곁을 붙어 다니며

1226. 平定諸侯(평정제후).
제후들을 평정한 것을 보았다.

1227. 作<傅  成列傳>第三十八(작<부근귀성열전>제삼십팔)
<부근귀성열전>제38을 지었다.


1228. 徒强族(도강족),
강성한 족속들을 다른 곳으로 소개시키고

1229. 都關中(도관중),
관중에 도읍을 정했으며

1230. 和約匈奴(화약흉노);
흉노와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1231. 明朝廷禮(명조정례),
조정에 의례를 갖추어

1232. 次宗廟儀法(차종묘의법).
종묘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법으로 정해 황실의 존귀함을 높였다.

1233. 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작유경숙손통열전>제삼십구)
<유경숙손통열전> 제39를 지었다.


1234. 能 剛作柔(능최강작유),
계포(季布)는 강직한 성격을 유순하게 고칠 수 있어

1235. 卒爲列臣(졸위열신);
마침내 한나라의 열후에 반열에 설 수 있었고

1236. 欒公不劫于勢而倍死(란공불겁우세이배사).
란포(欒布)는 한고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다.

1237. 作<季布欒布列傳>第四十(작<계포난포열전>제사십)
<계포란포열전>제40을 지었다.


1238. 敢犯顔色以達主義(감범안생이달주의),
감히 천자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펼쳤으니

1239. 不顧其身(불고기신),
이는 자기 일신상의 몸도 돌보지 않으며

1240. 爲國家樹長畵(위국가수장화).
나라를 위해 백년대계의 계책을 세운 것이다.

1241. 作<袁 晁錯列傳>第四十一(작<원앙조착열전>제사십일)
<원앙조착열전>제41을 지었다.


1242. 守法不失大理(수법불실대리),
법을 지켰으나 대의를 잃지 않았으며

1243. 言古賢人(언고현인),
옛날 현인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1244. 增主之明(증주지명).
자기 군주의 지혜를 더욱 밝게 만들었다.

1245. 作<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작<장석지풍당열전>제사십이)
<장석지풍당열전> 제42를 지었다.


1246. 敦厚慈孝(돈후자효),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자애롭고 효성스러웠다.

1247. 訥于言(눌우언),
말을 함에는 어눌했으나

1248. 敏于行(민우행),
행동을 옮김에는 재빨라

1249. 務在鞠躬(무재국궁),
몸을 낮춰 남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여

1250. 君子長者(군자장자).
군자나 장자의 풍모를 갖췄다.

1251. 作<萬石張叔列傳>第四十三(작<만석장숙열전>제사십삼)
<만석장숙열전>제43을 지었다.


1252. 守節切直(수절절직),
절개를 지켜 강직하며

1253. 義足以言廉(의족이언렴),
의기는 족히 청렴함을 말할 수 있었다.

1254. 行足以 賢(행족이려현),
그 행동은 족히 어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만 했다.

1255. 任重權不可以非里撓(임중권불가이비리효효).
막중한 자리에 임명되어도 옳지 않으면 행하지 않았다.

1256. 作<田叔列傳>第四十四(작<전숙열전>제사십사)
<전숙열전>제44를 지었다.


1257. 扁鵲言醫(편작언의),
편작은 의술을 말하여

1258. 爲方者宗(위방자종),
의자(醫者)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1259. 守數精明(수수정명);
그의 의술은 정밀하고 고명하여

1260. 後世(修)(循)序(후세수순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 치료의 순서를 따랐을 뿐

1261. 弗能易也(불능이야),
결코 바꿀 수 없었다.

1262. 而倉公可謂近之矣(이창공가위근지의).
그러나 창공 한 사람만이 편작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으니

1263. 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작<편작창공열전>제사십오).
이에 <편작창공열전>제45를 지었다.


1264. 維仲之省(유중지성),
유중(劉仲)은 흉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대왕의 자리에 쫓겨났으나

▶유중(劉仲)/ 한고조 유방의 형이다. 한나라가 서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합양후( 陽侯)에 봉해졌다.

1265. 厥 王吳(궐비왕오),
그 아들 유비(劉 )는 오왕에 봉해졌다.

1266. 遭漢初定(조한초정),
한나라가 처음 서고 나라의 안정을 취해가고 있는 와중에

1267. 以塡撫江淮之間(이전무강회지간).
그는 강수와 회수 사이의 제후국들을 진무하였다.

1268. 作<吳王 列傳>第四十六(작<오왕비열전>제사십육)
<오왕비열전>제46을 지었다.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 賢而喜士(종속유영현이희사),
황실의 외척들 중에 오직 두영(竇 )만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으며

▶두영(竇 )/두태후(竇太后)의 조카로 오초칠국의 란 당시에 대장군에 임명되어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에 대항했다. 칠국의 란이 진압되자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무제 즉위 초에 승상에 올라 유학을 숭상하고 도학을 배척하여 두태후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이어서 죄를 얻어 목숨을 잃었다.

1271. 士鄕之(사향지),
선비들의 마음도 역시 그에게 쏠렸다.

1272. 率師抗山東滎陽(솔사항산동형양).
군사를 인솔하고 나아가 산동의 형양(滎陽)에서 오초의 반란군을 막았다.

1273.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작<위기무안열전>제사십칠)
이에 <위기무안군열전> 제47을 지었다.


1274. 智足以應近世之變(지족이응근세지변),
지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았고

1275. 寬足用以得人(관족용이득인).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족했다.

1276. 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작<한장유열전>제사십팔)
<한장유열전>제48을 지었다.

▶한장유(韓長孺)/지금의 하남성 민권현(民權顯)인 성안(成安) 사람으로 이름은 안국(安國)이다. 한나라 초기에는 양효왕 밑에서 중대부를 지냈으나 오초칠국의 란 때 오나라의 군사를 격퇴한 공로를 세워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무제 때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위(衛尉)의 직을 지냈다. 후에 재관장군(材官將軍)에 임명되어 흉노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싸움에 패하고 이어서 병사했다.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했다.

1279. 號令不煩(호령불번),
또한 호령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여

1280. 師徒鄕之(사도향지).
장수들이나 군졸들의 마음을 얻었다.

1281.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작<이장군열전>제사십구)
그래서 <이장군열전> 제49를 지었다.


1282. 自三代以來(자삼대이래),
삼대이래로

1283. 匈奴常爲中國患害(흉노상위중국환해);
흉노는 항상 중국에 해를 끼치는 우환의 대상이었다.

1284. 欲知强弱之時(욕지강약지시),
흉노의 세가 강하고 약할 때의 시기를 알기 위해

1285. 設備征討(몰비정토),
만반의 준비 끝에 정벌에 나섰다.

1286. 作<匈奴列傳>第五十(작<흉노열전>제오십).
이에 <흉노열전>제50을 지었다.


1287. 直曲塞(직곡색),
구불구불한 변새의 길을 똑바르게 했으며

1288. 廣河南(광하남),
하남의 땅을 넓혔다.

1289. 破祁連(파기련),
또한 기련산에서 적을 격파하여

1290. 通西國(통서국),
서쪽의 나라들과 길을 통하게 만들었으며

1291. 靡北胡(미북호).
북방의 오랑캐의 남하를 저지했다.

1292. 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작<위장군표기열전>제오십일)
<위장군표기열전>제51을 지었다.


1293. 大臣宗室以侈靡相高(대신종실이치미상고),
조정대신들이건 황실의 종친들이건 서로 다투어 사치를 일삼았으나

1294. 唯弘用節衣食爲百吏先(유홍용절의식위백리선).
오로지 공손홍만이 의식을 절약하여 백관들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1295.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작<평진후열전>제오십이)
<평진후열전>제52를 지었다.


1296. 漢旣平中國(한기평중국),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1297. 而 能集楊越以保南藩(이타능집양월이보남번),
남월왕(南越王) 조타(趙 )는 양월(楊越)에 흩어진 세력들을 능히 수습할 수 있어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의 번국(藩國)이 되었며

1298. 納貢職(납공직).
종실에 공물을 바쳤다.

1299. 作<南越列傳>第五十三(작<남월열전>제오십삼)
이에 <남월열전>제53을 지었다.


1300.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1301.  人斬 (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머리를 베어 한나라에 바쳤다.

1302.  守封 爲臣(보수봉우위신).
이어서 봉우산에 봉해져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1303. 作<東越列傳>第五十四(작<동월열전>제오십사)
이에 <동월열전>제54를 지었다.


1304. 燕丹散亂遼間(연단산란요간),
연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진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달아난 틈을 이용하여

1305. 滿收其亡民(만수기망민),
위만은 그 유민들을 수습하여

1306. 厥聚海東(궐취해동),
해동으로 데리고 가서

1307. 以集眞藩(이집진번),
진번 등의 땅을 안정시키고

1308.  塞爲外臣(보색위외신).
한나라 황실의 외번을 지키는 외신이 되었다.

1309. 作<朝鮮列傳>第五十五(작<조선열전>제오십오)
<조선열전>제55를 지었다.


1310. 唐蒙使略通夜郞(당몽사략농야랑)
당몽(唐蒙)을 사자로 보내 야랑(夜郞) 국과 통호하고

1311. 而  之君請爲內臣受吏(이공착지군청위내신수이).
공( )과 착( )의 군장들이 내신이 되어 한나라에서 보낸 관리들을 받아 들였다.

1312. 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작<서남이열전)제오십육).
<서남이열전>제56을 지었다.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대인>부설),
<대인부(大人賦)>에 실린 글은
1
315. 靡麗多 (미려다과),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1316. 然其指風諫(연기지풍간),
그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를 풍자하며 간언을 올려

1317. 歸于無爲(귀우무위).
무위(無爲)로 귀의하려는 노자의 사상에 귀의하려는 생각에서 였다.

1318. 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작<사마상여열전>제오십칠)
<사마상여열전> 제57을 지었다.


1319.  布叛逆(경포반역),
경포가 반역을 일으키자

1320. 子長國之(자장국지),
고조의 아들 유장(劉長)이 그 땅을 봉지로 삼고
▶유장(劉長)

1321. 以塡江淮之南(이전강회지남),
강회의 남쪽을 평정했다.

1322. 安剽楚庶民(안표초서민).
유안(劉安)은 사납기로 유명한 초나라 백성들을 차지했다.
▶유안(劉安)

1323.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작<회남형산열전>제오십팔)
<회남형산열전> 제58을 지었다.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이 세운 공로와 재능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1326. 百姓無稱(백성무칭),
그들은 또한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공적에 대한 칭찬도,

1327. 亦無過行(역무과행).
그들의 과실에 대한 비난도 받지 않는다.

1328. 作<循吏列傳>第五十九(작<둔리열전>제오십구)
<둔리열전>제59를 지었다.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허튼 소리를 하지 못했다.

1331. 長孺矜焉(장유긍언);
장유(長孺)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유(長孺)/ 급암(汲 )의 자(字)이다.

1332. 好 人(호천인),
사람을 천거하기를 좋아했으며,

1333. 稱長者(칭장자),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라고 칭송을 받은 것은

1334. 壯有漑(장유개).
정장(鄭壯)에게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335. 作<汲鄭列傳>第六十(작<급정열전>제욱십).
<급정열전>제60을 지었다.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1338. 唯建元元狩之間(유건원원수지간),
단지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연간에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한무제 때의 연호로 건원은 140년부터 135년 원수는 기원전 122년부터 115년까지임. 따라 건원과 원수지간이 함은 기원전 140년부터 115년까지의 기간을 말함.

1339. 文辭粲如也(문사찬여야).
학문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

1340. 作<儒林列傳>第六十一(작<유림열전>제육십일).
<유림열전>제61을 지었다.


1341. 民倍本多巧(민배본다교),
백성들이 본분을 잃고 간사스럽게 되며

1342. 奸軌弄法(간궤농법),
간교함을 일삼아 법률을 농단하니

1343. 善人不能化(선인불능화),
아무리 선인들일지라도 그들을 교화할 수 없었다.

1344. 唯一切嚴削爲能齊之(유일절암삭위능제지).
오직 모든 것을 엄혹하게 다스림으로서 그들을 능히 다스릴 수 있었다.

1345. 作<酷吏列傳>第六十二(작<혹리열전>제육십이)
<혹리열전>제62를 지었다.


1346. 漢旣通使大夏(한기통사대하),
한나라가 서자 처음으로 대하(大夏)에 사절을 보내

1347, 而西極遠蠻(이서극원만),
까마득하게 먼 서쪽의 오랑캐가

1348. 引領內鄕(인령내향),
모두 중국의 안쪽으로 목을 늘이고

1349. 欲觀中國(욕관중국)
중원의 땅을 살펴보고자 했다.

1350. 作<大宛列傳>第六十三(작<대완열전>제육십삼)
<대완열전>제63을 지었다.


1351. 救人于厄(구인우액),
위난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1352. 振人不贍(진인불섬),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니

1353. 仁者有乎(인자유호)
인자라고 불릴만 하다.

1354. 不旣信(불기신),
또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1355. 不倍言(불배언),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지 않으니

1356. 義者有取焉(의자유취언),
이 역시 의로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357. 作<游俠列傳>第六十四(작<유협열전>제육십사)
<유협열전>제64를 지었다.


1358. 夫使人君能說主耳目(부사인군능설주이목),
군주를 모시고 능히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며

1359. 和主顔色(화주안색),
그 임금의 얼굴에 즐거움이 깃들게 하여

1360. 而獲親近(이획친근),
그 군주를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1361. 非獨色愛(비독색애),
그들이 단지 미색으로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1362. 能亦各有所長(능역각유소장).
그들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363. 作< 幸列傳>第六十五(작<영행열전>제육십오).
<영행열전>제65를 지었다.


1365. 不流世俗(불류세속),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1365. 不爭勢利(불쟁세리),
권세와 이익을 쫓지 않았으며

1366. 上下無所凝滯(상하무소응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걸림이 없이

1367. 人莫之害(인막지해),
아무에게나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은

1368. 以道之用(이도지용).
그것도 하나의 도(道)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1369. 作<滑稽列傳>第六十六(작<활계열전>제육십육)
<활계열전>제66을 지었다.


1370. 齊,楚, 秦, 趙爲日者(제,초,진,조위일자)
제, 초, 진, 조의 점복가들은

1371. 各有俗所用(각유속소용).
각기 그 나라의 풍속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방법이 이었다.

1372. 欲循觀其大旨(욕둔관기대지)
그들의 대체적인 방법을 살펴보고자

1373. 作<日者列傳>第六十七(작<일자열전>제육십칠)
<일자열전>
제67
을 지었다.


1374. 三王不同龜(삼왕부동귀),
삼대에 있어서 거북등으로 점을 치는 방법은 서로 달랐으며

1375. 四夷各異卜(사이각이),
주변의 사이들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점을 쳤다.

1376. 然各以決吉凶(연각이결길흉).
그러나 길흉화복은 각기 자기들 방법대로 판단하였다.

1377. 略窺其要(략규기요),
그래서 대략 그 요지를 살펴보기 위해

1378. 作<龜策列傳>第六十八(작<귀책열전>제육십팔)
<귀책열전>
제68
을 지었다.

1379. 布衣匹夫之人(포의필부지인),
포의를 입은 일반 백성 신분으로

1380. 不害于政(불해우정),
정치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1381. 不妨百姓(불방백성),
귀족들의 일에 방해를 하지 않으며

1382. 取與以時而息財富(취여이시이식재부),
시를 맞추어 재산을 증식하여 부를 쌓았다.

1382. 智者有采焉(지자유채언).
지혜있는 자라면 이것들로부터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1383. 作<貨殖列傳>第六十九(작<화식열전>제육십구).
<화식열전>
제69
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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