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갑야화(玉匣夜話)

-열하일기 25편 중 한 편임.

그 구성은 아래와 같으므로 앞에 실은 허생전 작품을 제외하고 작품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전 작품을 읽어본다. 허생전은 앞에서 소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한다. [ ]속은 내용 이행를 도우려고 은자가 적었다. 행간이 좁으니 한글창에다 복사하여 읽기 바란다.


[구성]

1.옥갑야화(玉匣夜話)


2.허생전(許生傳)


3.허생후지(許生後識)


4.허생후지(許生後識)

<진덕재야화>란 표제로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민족문화추진회 열하일기 번역에 후지2로 추가함.


5.차수평어(次修評語)



1.옥갑야화(玉匣夜話)


비장들의 이야기들. [제5화]에는 변승업의 이야기가, [제6화]에는 내가 허생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잇다.



[서언]

옥갑(玉匣)에 돌아와서 모든 비장들과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밤들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연경은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하여 역관배가 말하면 비록 만 금이라도 무난히 빌려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모두 사기로써 능사를 삼으니 이는 실로 잘못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제1화]

지금으로부터 서른 해 전에 한 역관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연경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제 그 단골 주인을 보고서 울었다.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강을 건널 때에 가만히 남의 은(銀)을 가지고 왔더니 일이 발각되자 제 것까지 모두 관(官)에 몰수되었습니다. 이제 빈 손으로 돌아가려니 무엇으로도 생활할 수 없겠기에 차라리 이곳에서 죽고자 합니다.”

하고는 곧 칼을 빼어 자살하려 하였다. 주인이 놀라서 급히 그를 껴안고 칼을 빼앗으면서,

“몰수된 은이 얼마나 되는지요.”

하였더니, 그는,

“삼천 냥입니다.”

하였다. 주인은,

“사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음이 걱정이지, 은이 없기로 무엇이 근심이요. 이제 이곳에서 죽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당신의 처자에게 어떻게 하려는 거요. 이제 내가 당신에게 만 금을 빌려 드릴 테니 다섯 해 동안을 늘이면 아마 만 금은 남겠지요. 그때 가서 본전으로 나에게 갚아 주시오.”

하고는, 그를 돌보면서 위안하였다. 그는 이미 만 금을 얻자, 곧 물건을 많이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그 일을 아는 이가 없었으므로 모두들 그의 재능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과연 다섯 해 만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곧 역원(譯院)의 명부에서 자기의 이름을 깎아버리고는 다시 연경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친구 하나가 연경에 들어가기에, 그는,

“연경 저자에서 만일 아무 단골 주인을 만나면 그는 응당 나의 안부를 물을 테니 자네는 그의 온 집안이 몹쓸 유행병을 만나서 죽었다고만 전해 주게.”

하고, 가만히 부탁의 말을 던졌다. 그 친구는 이 말이 너무나 허황함으로 곤란한 빛을 보였다. 그는,

“만일 그렇게만 하고 돌아온다면 마땅히 자네에게 돈 일백 냥을 바치겠네.”

하고, 단단히 부탁하였다. 그 친구가 연경에 들어서자 그 단골 주인을 만났다. 주인이 역관의 안부를 묻기에, 그 친구의 부탁한 바와 같이 답하였더니, 주인은 곧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한바탕 슬피 울면서,

“아아, 하느님이시여. 무슨 일로 이다지 좋은 사람의 집에 이렇듯 참혹한 재앙을 내리셨나요.”

하고는, 곧 백 냥을 그에게 주면서,

“그이가 처자와 함께 죽었다니 주장할 이도 없을 테니, 당신이 고국에 돌아가시는 그 날로 나를 위하여 오십 냥으로 제물을 갖추고, 또 나머지 오십 냥으로 재(齋)를 벌여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어 주시오.”

하였다. 그 친구는 몹시 아연했으나 벌써 거짓말을 하였는지라, 하는 수 없이 백 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역관의 온 집안은 벌써 역질을 만나서 몰사하였다. 그는 크게 놀라는 한편 두렵기도 하여 그 일백 냥으로 그 단골 주인을 위하여 재를 드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 연행(燕行)을 폐기하고는, 말하기를,

“내 무슨 낯으로 그 단골 주인을 만나겠어.”

라고 하였다.


[제2화]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지사(李知事) 추(樞)는 근세에 이름 있는 통역관이었으나 평소에 입에는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40여 년을 연경에 드나들었으되 그 손에는 일찍이 은을 잡아본 적이 없었으며, 근실한 군자(君子)의 풍도를 지녔다.”

한다.


[제3화]
어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은 명(明) 만력(萬曆) 때의 이름난 통역관으로서 명경(明京)에 들어가 어떤 기생 집에 놀러 갔었다. 기생의 얼굴에 따라서 놀이채의 등급을 매겼는데, 천 금이나 되는 비싼 돈을 요구하는 자가 있었다. 홍(洪)은 곧 천 금으로써 하룻밤 놀기를 청하였다. 그 여인은 나이 바야흐로 16세요, 절색을 지녔다. 여인은 홍과 마주 앉아서 울면서 하는 말이,

‘제가 애초 이다지 많은 돈을 요청한 것은 실로 이 세상에는 모두들 인색한 사나이가 많으므로 천 금을 버릴 자 없으리라 생각하고서 당분간의 모욕을 면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을 지나면서 관 주인을 속이는 한편, 이 세상에 어떤 의기를 지닌 남자가 있어서 저의 잡힌 몸을 속(贖)하여 사랑해 주기를 희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창관(娼館)에 들어온 지 닷새가 지났으나 감히 천 금을 갖고 오는 이가 없었더니, 이제 다행히 이 세상의 의기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公)은 외국 사람인 만큼 법적으로 보아서 저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시기에는 어렵사옵고, 이 몸은 한번 더럽힌다면 다시 씻기는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한다.

홍은 그를 몹시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창관에 들어온 경로를 물었더니, 여인은 답하기를, ‘저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 아무개의 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장물(贓物)에 얽매였으므로 이를 갚기 위하여 스스로 기생 집에 몸을 팔아서 아버지의 죽음을 속하고자 하옵니다.’ 한다.

홍은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실로 이런 줄은 몰랐소이다. 이제 내가 당신의 몸을 속해 줄 테니 그 액수(額數)는 얼마나 되는지요.’ 했다.

여인은 말하기를, ‘이천 냥이랍니다.’ 하였다.

홍은 곧 그 액수대로 그에게 치르고는 작별하기로 하였다. 여인은 곧 홍을 은부(恩父)라 일컬으면서 수없이 절하고는 서로 헤어졌다.

그 뒤에 홍은 이에 대하여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그 뒤에 또 중국을 들어갔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모두들 ‘홍순언이 들어오나요.’ 하고 묻기에, 홍은 다만 괴이하게 여겼을 뿐이었더니, 연경에 이르자, 길 왼편에 공장(供帳)을 성대하게 베풀고 홍을 맞이하면서, ‘병부(兵部) 석 노야(石老爺)께서 환영하옵니다.’ 하고는 곧 석씨(石氏)의 사저로 인도한다.

석 상서(石尙書)가 맞이하여 절하며, ‘은장(恩丈)이시옵니까. 공의 따님이 아버지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답니다.’ 하고는 곧 손을 이끌고 내실로 들었다. 그의 부인이 화려한 화장으로 마루 밑에서 절한다. 홍은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석 상서는 웃으면서, ‘장인(丈人)께서 벌써 따님을 잊으셨나요.’ 한다.

홍은 그제야 비로소 그 부인이 곧 지난날 기생 집에서 구출했던 여인인 줄을 깨달았다. 그는 창관에서 나오게 되자 곧 석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었던 바, 전보다 귀하게 되었으나 그는 오히려 손수 비단을 짜면서 군데군데 보은(報恩) 두 글자를 무늬로 수놓았다.

홍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에 그는 보은단(報恩緞) 외에도 각종 비단과 금은 등을 이루 헤아리지 못할 만큼 행장 속에 넣어 주었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성이 병부에 있으면서 출병(出兵)을 힘써 주장하였으니, 이는 석성이 애초부터 조선 사람을 의롭게 여겼던 까닭이다.”


[제4화]

어떤 이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사람 장사치들과 친하고도 단골 주인인 정세태(鄭世泰)는 연경에서의 갑부(甲富)였다. 그러던 것이 세태가 죽자, 그 집은 곧 일패도지(一敗塗地)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만 손자 하나가 있었는데, 뭇 사내 중에 절색(絶色)이었으나 어려서 극장(劇場)에 몸을 팔았다.

세태가 살아 있을 적에 회계(會計)를 보던 임가(林哥)는 이때에 와서 이름난 부자가 되었는데, 극장에서 어떤 미남자가 연극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퍽 애처롭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정씨(鄭氏)의 손자인 줄을 알고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곧 천 금으로 그를 속(贖)해 집에 데리고 돌아와 집 사람들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잘 대우하렷다. 이 이는 우리 집 옛 주인이니 결코 배우의 몸이라 해서 천시하지 말라.’ 하고는 그가 자라난 뒤에 그 재산의 절반을 나눠서 살림을 시켰다.

그는 몸이 살찌고 살결이 몹시 희며,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도 화려하였다. 그는 아무런 일도 없이 다만 연(鳶) 날리기로써 성 안을 노닐 따름이었었다.”

옛날 이곳에서 물건을 매매할 때는 봇짐을 끌러 검사하지 않고, 곧 연경에서 싸보낸 그대로 갖고 와서는 장부와 대조해 보아도 조금도 그릇됨이 없었다. 어느 때인지 흰 털감투로써 겉을 싼 것이 있었는데 돌아와서 끌러 본즉 모두 흰 모자였다. 그러나 저쪽에서 고의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저곳에서 검사해 보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 후회하였더니, 정축년(1517년)에 두 번이나 국상(國喪)을 당하자 도리어 배나 되는 값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역시 그네들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전조(前兆)인 것이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화물을 반드시 스스로 단속하고, 단골집 주인에게 맡기지 않는다 한다.


[주D-001]국상(國喪)을 당하자 : 2월에는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국상이 있었고, 3월에는 인원 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국상이 있었다.


[제5화]
어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승업(卞承業)이 중한 병에 걸리자 곧 변돈 놀이의 총계를 알고자 하여 모든 과계(夥計) 장부(帳簿)를 모아 놓고 통계를 내어본즉, 은(銀)이 모두 50여 만 냥이나 적립되었다. 그의 아들이 청하기를,

‘이를 흩는다면 거두기도 귀찮을 뿐더러 시일을 오래 끌면 소모되고 말 테니 그만 여수(與受)를 끊는 것이 옳겠습니다.’ 했을 때

승업은 크게 분개하면서,

‘이는 곧 서울 안 만호(萬戶)의 명맥(命脈)이니 어째서 하루아침에 끊어버릴 수 있겠느냐.’ 하고는, 곧 빨리 돌려 보내게 하였다.

승업이 이미 나이 늙으매 그의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일찍이 공경(公卿)들을 섬겨본 적이 많은데 그들 중에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자기의 사사 이익을 꾀하는 이 치고 그 권세가 삼 대를 뻗는 이가 없더란 말이야. 그리고 온 나라 사람 중에서 재물을 늘리는 이들이 으레 우리 집 거래를 표준 삼아서 오르내리는 것도 역시 국론(國論)인 만큼, 이를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재앙이 미칠거야.’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 자손이 번창하면서 모두들 가난한 것은, 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많이 흩어버린 까닭이다.”


[제6화]

나도 역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일찍이 윤영(尹映)이란 이에게 변승업의 부(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부는 애초부터 유래가 있어서 승업의 조부 에는 돈이 몇 만 냥에 지나지 않았더니, 일찍이 허씨(許氏) 성(姓)을 지닌 선비의 은 십만 냥을 얻어서 드디어 일국의 으뜸이 되었던 것이 승업에게 이르러서 조금 쇠퇴된 셈이다.

그가 처음 재산을 일으킬 때에 역시 운명이 있는 듯싶었다. 허생(許生)의 일로 보아서 이상스러우니, 허생은 끝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제 윤영의 이야기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은자주]<허생전>의첫 구는 "윤영이 말하기를[映之言曰]" 에 이어 시작된다.


[주D-002]
승업의……드디어 : 옥갑야화(玉匣夜話)로 되어 있는 여러 본에는 이 부분이 누락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옥류산관본(玉溜山館本)’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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