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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문의 원문과 국역

▲ 2002년 7월 광개토대왕릉비. 유리관을 씌우기 직전의 모습 https://www.news1.kr/articles/?2227363 순천대, 개교 80주년 기념 '광개토대왕릉비탁본전' 특별展 사실 앞에 겸손한 민영 종합 뉴스통신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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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거란의 염수는 어디? (출처 : 바람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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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거란의 염수는 어디- 고구려 역대 영토 변화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거란의 염수는 어디? (출처 : 바람님의 블로그) 담덕이 농산물을 들고 거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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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덕이 농산물을 들고 거란으로 출정을 떠난다. 그들을 정벌하는 것인지 친구로

삼는것인지는 본방을 봐야 알겠지만 역사스페셜에서 거란 염수를 아래와 같이

풀이해 놓았다.

18회에서 대신들과 이야기 한것도 고구려의 농산물,,,,,거란의 소금.....

위현과 들판족의 말.....

소금을 필요로 하는 숙신, 농산물을 필요로 하는 거란

역사스페셜이란 프로그램을 다시 재방송 해주면 안될까? 소중한 자료들이 너무도 많다.

 

 

 
태왕사신기 18회 참조 http://blog.naver.com/rhsstar2/20043839834

 
 

 

4세기말 이후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해양 강국 고구려.

 

 

 

 

광개토태왕 호우, 왜 경주에 묻혔나?(출처 : '책을 벗 삼아' 블로그)

 

[ K B S 역 사 추 적 ]

 

옛 신라의 영토로 알려진 곳에 심상치 않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신라인의 무덤인줄 알았던 순흥 고분 벽면엔 고구려 무덤에서나 볼 수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명식 명예교수 대구대학교

“심지어 무덤의 주인공도 고구려 인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라왕의 목숨까지 고구려 손에 좌우됐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김현숙 박사 동북아역사재단

‘이미 신라는 나의 속국이고 신라왕은 나의 속민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1946년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인의 무덤에서 수수께끼의 열쇠를 지고 있는 뜻밖의 유물이 출토됐다. 청동그릇에 새겨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름 ‘광개토지 호태왕’, 그렇다면 당시 신라는 광개토대왕의 지배를 받았던 것일까.

 

<광개토대왕 호우 왜 경주에 묻혔나>

 

 

 

 

광개토왕 청동 호우는 해방과 더불어서 우리 국립박물관에서 최초로 발굴한 고분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옛 영토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질 않았겠죠. 헌데 이 광개토왕 청동 호우가 발굴된 곳이 바로 경주였습니다. 지금 보시는 바로 이것이 신라의 왕도 경주에서 발굴이 된 광개토왕 청동 호우입니다. 얼핏 보면 밥을 지을 때 사용하는 청동제 솥처럼 보이죠. 헌데 어떤 이유로 이 그릇에 광개토왕의 이름이 있는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신라왕도에 광개토왕 청동 호우가 묻혀 있었던 걸까요. 오늘 이 시간엔 광개토왕 청동 호우에 담긴 수수께끼를 함께 추적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우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서 광개토대왕 청동 호우를 분석해 보기로 했다. 뚜껑과 함께 나란히 전시되고 있는 이 청동그릇세트가 경주에서 발굴된 청동 호우다. 명문은 청동 호우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16자의 명문 속에 들어있는 선명한 글자 분명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청동호우는 어디서 만든 걸까. 청동호우에 담긴 보다 세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X선 촬영을 의뢰했다. X선 촬영을 하면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는 자세한 정보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X선 사진을 판독한 결과 청동호우를 만든 제작 방법이 드러났다.

 

청동호우 바닥은 명문을 새긴 그릇의 틀을 미리 마련한 뒤에 청동을 구워서 주조한 흔적이 희미한 선으로 남아 있었다.

 

박학수 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아주 깔끔한 잘 만들어진 주조된 상태입니다. 보통 다른 유물들 같은 경우에 거푸집을 합쳤을 때 그 합친 부위가 이젠 튀어 나온다든지 마무리가 덜된 경우인데 이 유물은 내면이나 바깥쪽이나 모두 전부 마무리가 잘 돼있습니다.”

 

 

X선 사진 상의 글씨체를 분석하던 도중 우리의 의문을 풀어줄 단서를 발견했다. 우린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던 길림성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 비석의 글씨체와 비교해 보기로 했다. 보존 유리 각을 씌워 놓은 상태였지만 웅장한 규모의 비석에 새겨진 글씨체는 확인이 가능하다. 높이가 6m 39cm에 이르는 광개토대왕의 비석엔 1700여자의 명문이 적혀 있는데 동북아에서 독특하고 아름다운 글씨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 비문의 서체와 청동호우의 글씨체가 너무나 비슷하게 닮았다. 필획을 단순화 시켜 놓은 모양까지 같다.

 

우린 고대 금석문 서체 전문가에게 명문의 글씨체 분석을 의뢰했다. 탁본한 광개토대왕 비문의 글씨와 비교분석한 결과 청동호우의 명문은 광개토대왕 비문의 서체와 동일한 서체로 확인됐다.

 

손환일 박사 경기대 연구교수

“광개토왕비의 서체와 유사성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건너온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를 무덤까지 갖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신라인일까, 고구려인일까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는 경주 대릉원과 연결된 노서동 고분지역에 묻혀있다. 이미 지상의 봉분이 무너지고 없는 무덤이라 호우총을 발굴하기 전까진 누구도 이 유적이 엄청난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무덤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주헌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 전에 이미 호우총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은 여러 채 민가가 있었고요. 이 호우총의 봉분은 이미 상당히 낮게 깎여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우총의 봉분 위에도 한 채의 초가집이 남아 있었습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최초로 결성된 우리 발굴단이 민가의 마당을 파내려가자 놀라운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흥분과 설렘 속에 수습된 유물 중 하나가 칼의 손잡이에 용이 조각된 환두대도였다. 황금으로 만든 화려한 장식품들은 호우총의 주인이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린 무덤 주인의 국적을 밝히기 위해서 호우총 발굴보고서를 살펴보기로 했다. 보고서에는 광개토대왕 청동호우가 묻힌 호우총의 구조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무덤 바닥에는 일정한 크기에 맷돌이 깔려져 있었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한 목관과 부장품 공간을 마련한 다음 다시 돌로 채운 뒤에 봉분을 쌓아 올린 이른바 적석목곽분이었다.

 

송의정 고고부장 국립중앙박물관

“무덤 자체의 형태가 신라의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이고 또 무덤 속에 그 피장자가 쓰고 묻힌 그 장신구 자체가 신라 스타일이고 특히 그중에서도 모자가 금동관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신라 왕족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청동호우와 함께 묻힌 사람은 신라의 왕족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는 그 신라왕족과 죽음까지 함께한 특별한 물건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강 이남에서 지금까지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발굴된 것은 청동호우가 유일한 경우인데요. 왜 하필 신라왕족의 무덤에서 이것이 나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청동호우의 바닥을 보면 광개토 호태왕이라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죠.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지역을 개척했던 인물이 바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란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했을 때 이런 광개토왕의 이름이 그릇에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그만큼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유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유물이 왜 신라왕족의 무덤에서 나왔을까요. 광개토왕과 신라 이들은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요.

 

수수께끼의 단서를 추적하던 도중 우린 일본서기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고구려왕이 군사 백 명을 신라 땅에 파견해서 신라를 지켜주었다는 기록이다.1) 더더욱 놀라운 것은 고구려군의 신라 주둔지로 언급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일본서기가 고구려군 주둔지로 밝힌 국내는 신라 땅 어디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정운용 교수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그 기사의 ‘國內’라는 것은 지금의 慶州를 의미합니다. 우리 고대 사서에는 국인일 경우에는 글자 그대로는 나라 사람을 지칭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의 대신들 또는 수도 서울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국내라는 것도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안이 국내이지만 고대 사서에서는 수도를 의미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신라의 수도 경주에 고구려 군이 주둔했다는 선뜻 믿기지 않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사실일까. 그런데 옛 신라의 영토로 알려진 지역에서 심상치 않은 흔적들이 드러났다. 경주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우린 이곳의 한 무덤에서 뜻밖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의 유적지를 조사하던 이명식 교수는 이 무덤에서 우연히 도굴구멍을 발견했다. 무덤 방 벽면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명식 명예교수 대구대학교

“벽에 이제 그림이 특히 이제 서벽 쪽에 있는 역사상 이제 이게 눈에 확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벽화구나.”

 

 

목이 잘린 인골이 수습된 무덤방 벽면에서 벽화 그림이 확인된 것이다. 고분의 무덤방으로 들어가자 고구려고분에서나 볼 수 있는 벽화 그림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벽화의 그림 양식까지 고구려 귀족의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고분벽화와 매우 흡사하다. 널길벽면에 그려진 수호신의 모습은 고구려 사신총 벽화의 수호신과 닮아 있다. 덕흥리 고분의 양광도를 연상케 하는 새 그림도 있었다. 왜 신라 지역에 고구려 식 벽화 무덤이 있는 것일까.

 

이명식 명예교수

“무덤의 주인공도 고구려와 관련된 고구려에 당시 변방 장수의 무덤이 아닌가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고구려와 관련 있는 무덤으로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구려 군이 신라 지역에 주둔했던 걸까. 영남대 박물관엔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만든 고구려 영토지도가 보관돼 있었다.

 

김정숙 교수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지금 영주, 특히 예안 이런 쪽은 굉장히 경상도 밑인데 내려와서 청송 지금 여기의 이 지도가 어디까지 내려와 있냐면 청하, 지금의 포항 위까지 고구려 영토로 돼 있는데 요 전체 지명으로 이 부분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명칭과 일치를 하고 있습니다.”

 

 

서해의 남양만에서 동쪽으로는 포항 일부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토로 돼 있었다. 고분벽화가 발견된 순흥을 비롯해 고구려 영토로 표기된 지역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 지명과도 거의 일치한다. 과연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린 서기 399년 신라의 심각한 상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을 찾아냈다.2) 은유적으로 표현해 놓은 사건의 내막은 광개토대왕 비문에 자세히 적혀 있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왜의 공격으로 수도를 점령당하는 위기에 몰린 신라의 내물왕이 사신을 보내 광개토대왕에게 고구려의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3)

 

주보돈 교수 경북대학교 사학과

“사실은 왜와 가야의 연합군이 들어와 가지고 신라 왕성인 금성을 함락 시킨다. 함락 시키고 당시 신라왕이 내물왕인데 내물왕이 북쪽으로 이제 도망을 간다. 고구려 영역 경계선까지 도망을 가면서 이제 병력을 요청하게 된다.”

 

 

광개토대왕이 5만의 고구려 군을 파병한 것은 그 이듬해인 서기 400년. 막강한 기마군단을 주력군으로 하는 고구려 군은 거침없이 남진한다. 고구려군은 신라를 위협했던 가야지역까지 휩쓸었다. 우린 가야의 영토였던 부산시 복천동 고분에서 고구려 군이 남기고 간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3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가야의 지배층 무덤이다. 그런데 이들 무덤에서 4C까지는 가야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마용 무기들이 출토되었다. 기마무사가 착용한 목가리개를 포함해서 전쟁터를 달리는 말을 무장시킬 때 사용한 말 얼굴가리개도 들어 있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중무장한 기마병이 입고 있는 갑옷과 같은 찰갑도 발굴됐다. 고구려 기마군단은 기마병은 물론 말도 철제 갑옷으로 무장시켰는데 말 얼굴가리개 역시 고분벽화에서 보던 것과 같은 형태였다.

 

이현주 조사보존실장, 복천박물관

“고구려 군을 보게 되는 가야인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고구려 군들의 중무장한 기병의 모습이라든지 창이라든지 전술의 방법들은 그 가야인에게 있어서는 다시 새로운 변혁, 그 사회 전반에 그 시스템에 어떤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생각 자체부터 아마 사고를 크게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던 같습니다.”

 

강성했던 철의 나라 가야를 굴복시킨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은 이때부터 신라의 주요 거점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보돈 교수

“왜와 가야 세력이 준동할 염려가 있으니까 고구려의 군사력이 일부 중요한 거점 지역에 주둔을 하고 나아가서는 왕경인 경주에도 아마 일정한 병력이 주둔하면서 정치적?군사적으로 신라의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울산시 울주군에도 주둔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마치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것 같은 유적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을 쌓아 놓은 유적의 둘레가 60미터, 높이도 6미터에 달하는데 적석총이라 불리는 고구려 돌무지무덤에 형식과 비슷하다. 유적지 담장으로 보이는 둘레석도 남아 있었다. 둘레석까지 두른 것으로 볼 때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일 가능이 커 보인다.

 

 

전형적인 고구려 식 돌무지 무덤 양식은 중국 길림성 집안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공원처럼 깨끗하게 정비돼 있는 산성하 고분군엔 크고 작은 1500여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다듬지 않은 강돌을 쌓아 올려서 만든 이 무덤은 고구려 무덤의 초기 형태다. 초기 고구려 땅이었던 지역에선 어김없이 돌무지무덤이 남아 있다. 땅 위에 시신을 안치하는 석실을 만들고 그 위도 돌을 쌓아 올려 봉긋한 무덤의 형태를 만든 구조다. 쌓아 올린 강돌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무덤 아래쪽에 기단을 만들어 놓은 무덤도 있다. 이른바 기단식 돌무지무덤이다. 그런데 울산의 돌무지 유적4)의 아래쪽에도 기단식이 조성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백승옥 박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 연구소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밑 부분 바닥 돌 큰 돌이 열을 지어서 있습니다. 이 돌과 이 돌이 다른 돌인데 열을 지었죠. 열이 끝까지 보이죠.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가장 밑쪽의 바닥 돌은 열을 지어서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돌들은 위에서 무너져 내려온 것들이다. 이게 ‘무덤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고구려의 적석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은 고구려 적석총이 영남지역에 그것도 남쪽인 울산지역에 있는 이유가 뭔가, 그것은 400백년 고구려 남정과 연관시킬 수가 있다고 봅니다.”

 

 

고구려 군의 신라주둔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금석문 기록도 남아 있었다. 충주시 입석마을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석이다. 이 중원고구려비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새겨져 있다. ‘新羅土內幢主(신라토내당주)’라는 글귀는 신라영토 안에 당주가 있었다는 뜻인데 당주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서영수 교수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보통 당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를 지위하는 깃발을 의미하는 것인데 거기서 당주는 군사령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라토내당주’는 신라 땅에 있는 ‘고구려군사령관이다’라는 뜻이죠.”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고구려왕의 군사를 뜻하는 王幢이라는 명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일 때 ‘신라토내幢주’는 신라영토에 주둔했던 고구려군 사령관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일본서기에 고구려군 주둔기사를 보면 고구려 군사가 휴가 가는 장면이 등장한다.1) 신라의 주둔하던 고구려군은 휴가 때 신라인을 말잡이로 삼아 고구려에 갔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주둔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어쩌면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는 고구려 군이 신라에 주둔했던 바로 이 시기 신라왕족에게 전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는 왕도까지 점령당하는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고구려군의 신라주둔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주에서 출토가 된 이 광개토왕 청동호우는 고구려 군이 신라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에 신라로 건너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단서가 바로 이 청동호우에 있습니다. 이 ‘을묘년’이라는 글자인데요. 이 을묘년은 청동호우가 만들어진 제작년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이 을묘년은 몇 년도를 말할까요. 그리고 청동호우를 경주까지 가지고 온 신라왕족은 누구일까요.

 

 

우린 광개토대왕의 신하였던 모두루 묘지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집안에서 발굴된 모두루 묘지명에는 광개토대왕 청동호우에 새겨진 명문과 거의 유사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광개토왕의 이름 앞에 부쳐진 ‘국강상’이란 명문은 무슨 뜻일까.

 

정운용 교수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고구려왕의 시호에 고구려왕의 묻힌 곳을 자기 시호로 가졌습니다. 그래서 가령 예를 들어서 고국양왕, 고국원왕 그러면 고국양이라는 곳, 고국원이라는 곳에 묻혔던 왕이라는 뜻이죠. 그런 것으로 비교해 보면 국강상이라는 표현은 ‘광개토왕이 국강상이라는 곳에 묻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청동호우는 광개토왕이 국강상에 묻힌 뒤에 만든 그릇이란 얘기다. 따라서 을묘년은 광개토대왕 사망 이후인 시기에 해당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대왕의 사망연도는 412년이다. 고구려 장례풍습을 전하는 중국기록에는 3년 상을 지낸 것으로 실려 있는데2) 광개토왕 3년 상을 치르고 첫 제사를 지낸 415년이 바로 을묘년이다. 그렇다면 청동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제사용 그릇이 아닐까.

 

서영수 교수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그 호우의 경우는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그 호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광개토대왕과 관련되는 광개토왕을 추모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지 일상용기라면 아무 때나 쓸 수 있지만 이것은 광개토왕의 추모할 때 쓰는 의식기가 분명하다고 봅니다.”

 

광개토왕의 첫 제사 때 만든 제기라면 고구려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린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청동호우의 명문에 주목했다. 16자의 명문 가운데 발굴단이 끝내 해석하지 못한 글자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호우십’이라는 글자다. 의문의 단서를 추적하던 도중 우린 중국 정부가 광개토대왕 무덤으로 확정한 태왕릉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집안시에서 가장 넓은 묘역을 차지하고 있는 태왕릉은 멀리서도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무덤 기단부 한 변의 길이가 66m, 높이는 아파트 6층 높이다.

 

 

이 청동 방울은 이곳 태왕릉 주변에서 출토된 것인데 여기에도 구십육이란 숫자가 적혀있다. 청동방울의 구십육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백승옥 박사

“제작된 방울의 전체 개수가 96개라는 의미거나 또는 이 방울이 96번째로 제작된 방울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청동호우의 새겨진 숫자 역시 같은 뜻으로 쓰였는지도 모른다. 혹시 이 숫자는 10개 남짓 한정에서 특수 제작한 그릇이란 뜻이 아닐까.

 

최광식 관장 국립중앙박물관

“뭔가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숫자, 요즘말로 말하면 넘버링을 했다는 뜻이죠. 많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극히 몇 개 잘해야 열개라는 숫자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봅니다.”

 

이처럼 귀한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를 고구려로부터 하사 받은 신라왕족은 누굴까. 우린 삼국사기에서 당시 고구려에 머물고 있던 신라왕족을 찾았다. 광개토대왕이 세상을 떠난 412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왕족의 이름은 卜好였다. 복호는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내물왕의 아들이다. 신라의 왕자인 복호가 고구려에 인질로 머문 기간은 6년이다. 418년에 귀국한 것으로 볼 때 복호가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를 갖고 들어온 것이 아닐까.

 

 

우린 호우총에서 발견된 환두대도를 정밀하게 분석해 보기로 했다. 환두대도에 모양에 따라 그 무덤 주인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X선 촬영을 하면 부식이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문양도 판독할 수 있다. 녹슨 환두대도의 칼날에서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화려한 문양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문양이다. 게다가 금실의 용으로 밝혀져 호우총의 주인이 신라의 왕자 급에 준하는 신분임을 말해주고 있다.

 

송의정 고고부장 국립중앙박물관

“복호가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시기 청동호우가 제작되었다. 복호가 호우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호우총 발굴 당시 신분의 상징이었던 환두대도는 시신의 왼쪽 머리 쪽에 놓여 있었고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는 오른쪽 머리 쪽에서 발견됐다. 이 청동호우가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첫 제사 때 특수 제작한 열개 남짓한 제사 용기의 하나라는 점도 그 신분을 짐작케 한다.

 

지금까지의 추적결과 이 청동호우는 광개토대왕의 첫제사 때에 고구려의 머물고 있었던 신라왕자 복호가 직접 가지고 경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니까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구려가 신라에게 이 귀한 청동호우를 줄 만큼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전쟁으로 시작된 고구려 군의 신라주둔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요. 단순히 신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태화강 지류에 자리한 울주군 천전리 계곡. 계곡을 따라 늘어선 암벽엔 수많은 바위그림과 문자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천전리 서석3)이라 불리는 암벽에서 우린 신라인들이 남긴 뜻밖의 단서를 찾았다. 전문가가 아니면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大兄’이란 글자, 대형은 고구려 관직명의 하나인데 왜 여기에 새겨져 있는 걸까.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도 같은 글자가 있다. 무덤방 벽면엔 무덤 주인이 역임한 관직명이 적혀 있다. 그중 하나가 대형이다. 환도산성에서 발굴된 기와인 小兄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역시 고구려 관직명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이 남긴 울주 천전리 서석에서 왜 고구려 관직명이 등장하는 걸까.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걸까.

 

주보돈 교수

“고구려의 직제가 사람이 와서 그것을 칭했을 수도 있고 고구려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의 직제의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명문들 속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면 ‘고구려 영향이 여기에 강하게 미치고 있다’라고 하는 그 하나의 흔적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에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춰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었다.4) 신라의 18대 왕인 실성이 고구려에서 볼모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사람은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청했던 내물왕이었다. 그런데 내물왕이 세상을 떠나자 고구려에서 돌아온 실성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돼 있다.5) 실성이 신라로 귀국한 시점은 내물왕이 죽기 7개월 전이었다. 고구려는 왜 이 시기에 실성을 돌려보낸 걸까. 내물왕은 왕위를 이어갈 아들이 없었던 것일까.

 

우린 신라 김씨 왕족의 족보에서 내물왕의 직계자손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족보에 올라 있는 내물왕의 아들은 3명6)이나 된다. 어떻게 내물왕의 직계 아들을 제치고 실성이 신라의 왕위를 계승했던 걸까. 혹시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던 걸까.

 

주보돈 교수

“사실은 실성은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국내의 세력기반이 약해졌지만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실성이 즉위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상당한 기간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실성왕 역시 자객에게 피살되고 만다. 삼국유사엔 실성왕의 죽음에도 고구려 군이 개입돼 있는 것으로 적혀져 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417년. 실성이 왕위에 오른 지 16년째 되던 해였다. 실성왕은 고구려 군을 동원해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눌지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그 칼날에 피살되고 만다.

 

주보돈 교수

“눌지를 내세워서 실성을 죽이게 되는 것도 역시 고구려였고 눌지를 왕위에 내세운 것도 역시 고구려였다. 여기까지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이 사실상 얼마나 신라에 크게 미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그런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라의 왕경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고구려는 내정까지 깊숙이 개입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5C초까지 백제와 가야의 공격에 휘청거리던 약소국 신라를 지원한 배경엔 신라를 통해 고구려의 후방을 노리는 백제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광개토대왕 군대의 파병이후 급변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비문은 전엔 신라왕이 직접 찾아와 고구려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서 신라왕이 스스로 찾아와 조공을 받쳤다고 해석될 수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서길수 교수

“동아시아 역사에서 외교관계 중에서 親朝라는 것은 예속도가 가장 강한 것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이 광개토왕의 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은 바로 중원고구려비에 잘 나타나고 있죠.”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중원고구려비에도 나와 있었다. 고구려 왕이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구절이다.7) 이것은 신라를 고구려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의식이었다.

 

서길수 교수

“의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조공관계를 의미합니다. 중원비에 있는 그 표현은 신라 그 매금이 고구려에 복속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복속의 정도는 신라 매금이 친위 와 가지고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것이니까 단순한 외교관계가 아니라 바로 복속국, 신하국의 맹세를 한 것을 의미합니다.”

 

백제와 가야의 공격에 시달렸던 신라는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고구려의 속국이 됐던 것이다. 어쩌면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는 고구려의 막강한 힘을 상기 시키는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린 광개토대왕 청동호우의 담긴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에는 이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 단 한 줄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광개토왕의 신라구원 전쟁을 기점으로 신라는 정치?군사적으로 고구려에게 예속된 사실상에 속국이 돼 있었던 것입니다. 광개토왕의 첫제사 때 추모용으로 제작했던 이 청동호우가 신라 왕족의 무덤에서 출토된 배경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신라는 언제 쯤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걸까요.

 

경주시 동쪽에 자리한 명활산성은 급변하게 시작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신라왕이 왕궁인 월성을 버리고 명활산성으로 피신한 것은 서기 475년. 왜 신라왕은 이곳으로 피신한 것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창호 교수 경주대 문화재학부

“한성 백제가 망했다하는 것은 신라로선 일종의 충격이 아니겠습니까. 그 충격을 대비한 예비 책으로 소위 명활산성으로 왕성을 옮겨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던 것이죠.”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에게 함락됐다.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면 신라가 놀랄 일이 아닌데 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 걸까. 우린 일본서기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신라왕이 집안에 있는 수탉을 제거8)하라는 이상한 기록이다. 수탉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린 고분벽화에서 고구려 병사가 쓴 모자에 깃털이 꽂혀 있는 것에 주목했다. 혹시 수탉제거 지시는 깃털 모자를 고구려 주둔군을 겨냥한 암호가 아닐까.

 

이도학 교수

“수탉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고구려 병사를 빗대서 말하고 있습니다. 수탉에 보면 벼슬이 있지 않습니까. 고구려인들의 모자 절풍모자, 깃을 양쪽에 꼽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이제 수탉에 견주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로 이제 신라인들이 고구려군대를 신라 땅에서 퇴출시키는 몰아내는 그런 상징적인 사건을 집약해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 신라가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을 464년 모두 제거했다고 전한다. 이 사건을 전후로 고구려와 신라는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切齒腐心, 독립의 길을 찾아온 신라는 백제와 협력하는 나제동맹을 선택한다. 그리고 크고 작은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친다. 충북 보은에 삼년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와 싸우던 470년에 쌓은 성이다. 1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삼년산성을 축조한 신라는 더 이상 한반도 남부의 약소국이 아니었다. 5C 후반 격변의 수용돌이 한 가운데서 삼년산성을 쌓은 신라는 이곳을 한강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삼는다.

 

양기석 교수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신라도 나름대로의 자립 성장하려는 그런 기운이 5C 중반부터 일어나길 시작합니다. 바로 이 삼년산성이 그런 그 신라가 고구려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려는 그러면서도 신라가 삼국에서의 중심세력으로 발돋움 하려는 그런 측면에서의 의미를 가진 그런 산성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백제와 가야에 밀리던 한반도 남부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는 5C 거치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경주 호우총은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한 신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무덤이었다. 이곳에 묻힌 광개토대왕 청동호우는 신라가 한 때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품이었다.

 

신라의 수도에서 발굴된 광개토왕 청동호우는 1500여 년 전 예속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와 신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청동호우는 어쩌면 신라인들에게 고구려의 강한 힘을 상기시켜주는 상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신라인들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키우고 저항했으며 마침내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이 청동호우도 그 생명을 다했습니다. 어쩌면 경주 호우총에 묻힌 신라왕족은 신라의 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기원하는 바람으로 이 청동호우를 무덤 속까지 가져갔던 것은 아닐까요.

 

 

※ 제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금합니다.

 


1)일본서기 웅략 8년.

 

2)‘왕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 傳 : 三國史記 奈勿王 45년.

 

3)이 내용은 광개토왕릉비에 적혀 있다.

 

4)은현리 적석유구는 기단식 적성총일 가능성이 큼.

 

 


 

1)일본서기 웅략 8년.

 

2)북사.

3)http://blog.daum.net/kelim/13427835 에 들어가시면 자세한 내용 설명과 이미지가 있습니다.

4)‘실성을 볼모로 보내다’ 삼국사기 내물왕 37년.

5)삼국사기 실성왕 원년.

6)미사흔, 복호, 눌지.

7)寐錦之衣服 … 賜

8)계지웅사(수탉).

 

담덕이 거란땅에 세운다는 고구려 무역시장

 

역사스페셜에 중요한 자료가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지두우까지 진출했다.

태왕사신기 참고 21회링크

http://blog.naver.com/rhsstar2/20044100898

태왕 담덕이 거란인의 땅에 세워준다고 약속한 교역시장은 실제 광개토대왕이 이룬 업적이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던 ceo....태왕 담덕은 정복지를 고구려 발아래 놓아 짓밟고자 했던 정복군주가 아니라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역시장을 세워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킨 것이다.

 

한 형제되어 100년의 평화를 누릴수 있다면...대신들 앞에서 안타까워 하던 담덕의

말은 드라마의 멋을 위해 내뱉은 말이 아니라 정말로....고구려말 수나라와 싸우기 전까지큰 전쟁을 치루지 않고 평화를 누렸다.

 

광개토대왕은 알면 알수록 태왕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뛰어난 지략가....뛰어난 정치가....뛰어난 외교가...뛰어난 ceo....위대한 태왕 광개토대왕.

 

 

 

 

 

 

 

 

 

 

 

 

[기고/신용철]물에 잠기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동아일보 / 기사입력2006-05-22 02:59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의 긍지인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일어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는 동명성왕의 개국 설화에는 우발수(), 압록강, 졸본천(), 비류(), 엄류수(), 곤연(), 하백() 등의 강이나 물과 관계되는 단어가 무려 9개나 나온다. 이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 백두산뿐만 아니라 압록강이나 호수 등의 물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바다이름 발)’자 역시 물과 관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2360기의 고분이 중국 압록강변 운봉(·중국 발음으로는 윈펑)댐의 수몰지구에서 발견됐다. 이곳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50km, 고구려의 수도인 지안()에서 45km라고 하니 실로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물속에서 새로운 고구려의 역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고분들이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의 침략으로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함락되어 247년 동황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우리의 관심을 의식해서인지 발굴을 하지 않은 채 댐에 물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측이 공동조사를 제의하기 전에 서둘러 다시 수몰시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중국의 장푸유() 창바이산()문화연구회장은 성()의 축조 양식이 고구려나 발해 등의 것과 차이가 있으므로, 중국 한대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의 전문가들은 흙으로 쌓은 한대의 것과 달리 돌로 쌓은 성은 당연히 고구려의 것임을 주장하지만, 중국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상태라 발굴을 통한 입증은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이미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려는 판국에 우리의 주장이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선 운봉댐의 공동 소유자(1964년에 공동 건설)인 북한은 왜 중국 측에 아무런 주장이나 항의를 못하느냐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태도와는 달리 중국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항의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우리와 미국 등에 대해 그처럼 강경하게 ‘주체()’를 외치는 북한이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중국 앞에만 서면 왜 그리 약해지는지…. 물론 6·25전쟁 때 남한이 미국의 도움을 받았듯이 북한 측은 중국에 신세를 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역사나 영토 문제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지금 중국이 북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두만강 하구와 나선의 공동 개발, 동북 3성()의 역점 개발, 발해(·보하이)만 유역 대개발 등으로 인해 우리 영토의 자주권이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해체 위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끈질긴 소수민족 정책 즉, 최근의 ‘동북공정’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만이라도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지키는 데 자기의 목소리를 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서, 그리고 미래의 생존을 위해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견제와 균형을 잃지 않는 지혜와 용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고분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시 물속으로 잠겨 버렸다. 한편 중국은 상하이() 푸둥() 지구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발해만 유역의 대개발’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중국과 오랫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랴오둥() 반도를 비롯하여 허베이() 성, 랴오닝() 성 등의 연안과 우리 한반도의 북부 서해안 일대가 모두 그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은 뻔하다. 그러면 고구려의 역사가 물에 잠기듯이 ‘발해왕국’은 겨우 바다 이름에서나 찾게 될 것이니 서글픈 일이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중국사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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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 themChinese

 

 

몽골 L.A Face의 갱스터 힙합

 

몽골인들의 쥐나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다.특히 1911년 만주국이 망하면서 자신들을 지금의 몽골과 쥐나자치주인 내몽골로 찢어놓은 것에 대한 분노.지금도 독립국인 몽골마저 강탈하려는 야심에 대한 저주와 두려움. 핍박받고 있는 내몽골 자치주의 몽골족에 대한 절망.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짱골라들에 대한 미움 등이 표현.

 

그렇다.

쥐나를 겪어본 나라는 안다.

쥐나가어떠한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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