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156화 - 궁하면 통한다 (窮則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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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어느 고을에 만수(萬壽)라는 총각이 가세가 빈한(貧寒)하고
조실부모하여 글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나이 20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해서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칭칭 땋아 늘이고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으로 영리한 편이고 또 부지런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만은 잃지 않았다.
만수의 유일한 소원은 장가를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편이 이 모양인지라 누구 하나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 같은 동네 부잣집 김좌수(金座首)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얌전하기로도 으뜸이요, 인물 또한 으뜸이어서
웬만한 혼처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그만 혼기(婚期)를 놓쳤던 것이다.
김좌수의 딸을 마음에 두었던 만수에게 어느 날 좋은 묘책이 떠올랐다.
초여름이라 한참 농사짓기에 바쁜 때였지만
장가드는 일이 급한 만수는 김좌수 댁을 찾아갔다.
다행히 몇몇 하인들은 모두 농사일로 들에 나간 모양이라
거침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처녀가 거처하는 방 앞에 가서 가만히 동정을 살폈다.
처녀는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만수는 서슴치 않고 처녀의 방문을 홱 열고는 다짜고짜로,
"궁(宮)?"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와 버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처녀는 어리둥절하여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더구나 '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더욱 알 까닭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만수는 위 아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퍼뜨렸다.
"나는 우리 동네 김좌수 댁 따님과 '궁'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인근에 퍼졌다.
"여보게들, 만수가 김좌수 댁 따님과 궁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것도 모르겠나? 만수가 그 댁 따님과 정을 통했다는 말이겠지 뭔가?"
"그게 사실일까?"
"만수가 무식하긴 해도 거짓말은 안한다네. 노총각이니 있을 법도 한 일이고..."
"김좌수가 만수에게 딸을 줄까?"
"아니 주면 별 수 있겠나?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도리가 없겠지."
드디어 이 소문이 김좌수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김좌수는 노여움에 치를 떨면서 딸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소녀는 그런 일을 저지른 일이 없사와요. 아버님."
눈물짓는 딸의 모습을 보고 귀여운 딸에 대한 누명을 벗기고자
김좌수는 고을 관가에 송사(訟事)를 걸었다.
송사(訟事)가 시작되자 사또는 세 사람 앞에서 추상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거라,본관이 묻는 말에 이실직고(以實直告)하지 않으면
관명(官命)을 좇지 않은 죄로 호된 벌을 면치 못하리라. 알겠느냐?"
"예!"
세 사람은 사또 앞에서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 만수에게 먼저 묻노니,너는 아무 날 아무 시에
김좌수의 딸이 거처하는 방으로 가서 궁한 사실이 있느냐?"
"그러한 사실이 있사옵니다."
"궁이라 함은 김좌수의 딸과 관계를 맺었단 말이렸다?"
"사또께서 통촉하옵소서."
"다음, 김좌수의 딸에게 묻노니
만수가 모일 모시에 너의 방으로 와서 궁한 사실이 있느냐?'
"네, 그런 사실은 있사옵니다."
딸의 대답은 다만 만수가 다짜고짜로 자기 방문을 열고
말로써 '궁'하고 달아나 버린데 대한 사실만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과년한 처녀가 춘정(春情)을 못 이기어
총각인 만수를 불러들여 관계를 맺은 것으로도 들리는 대답이었다.
이윽고 사또는 만수와 김좌수의 딸이 혼인하라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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