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본토 결전에서 승리를 외치던 일본 정부와 군부의 숨통을 누른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 이어 9일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경과,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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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2.제2차 세계대전의 경과

3.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

 

1.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다.

그 많던 식민지를 전쟁에서 지고 나서 모두 잃었다.

독일 내의 물가는 치솟았고 국민들의 정서가 매우 안 좋아졌다.

그런 와중에 히틀러가 나왔다. 독재자의 탄생이다.

히틀러는 배상금은 물론 연합군에 대해서도 무시했다.

그리고 군대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일본이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부터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지나 중국으로 진출하고 싶었기에

독일과 손잡을 수 있었다.

 

2. 제2차 세계대전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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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시작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 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으로 싸운 폴란드는

독일 영토 일부분을 차지하였다.

이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

구영토의 반환을 폴란드에 여러 차례 요구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도리어 폴란드 내에선 독일을 공격해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 환경은 히틀러에겐 무척 곤혹스런 일이었다.

왜냐하면 독일 내에선 범독일 민족주의의 발언권이 커짐에 따라

과거 독일 제국의 영토를 되돌려 받길 원하는데

폴란드는 그걸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군사적인 해결책 외에는 히틀러에게 주어진 선택은 없었다.

하지만 군사적인 해결책도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는데,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와 상호 방위조약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을 불러오게 되고

독일은 동시에 2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럴 경우 독일은 제 1차 세계 대전처럼

물량에 압도당해 전쟁에 패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히틀러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히틀러와 독일은

전쟁 준비로 날을 샌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히틀러가 독일의 재무장을 천명한 것이 1935년으로

폴란드전까지 겨우 4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을 뿐이었다.

히틀러의 전선 사령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롬멜은

이제 준장으로 진급하여 히틀러와 함께

폴진(Polzin) 이라는 폴란드 국경 근처에서 폴란드 침공을 맞게 되었다.

결국 독일군 지휘부는 2개의 전선을 형성하지 않기 위해

속전속결을 목표로 다음과 같은 작전을 계획했다.

후에 전격작전 이라 불리는 블리츠크리그 (Blitzkrieg)의 개시였다.

먼저 독일군을 2개의 주력 부대로 나눴다.

북부 방면군과 남부 방면군 이다.

이 2개 부대의 전략 목표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였다.

 

2개 주력부대가 북쪽과 남쪽에서 바르샤바로 진공 했다.

국경선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는 폴란드군은

당연히 수도를 지키러 갈 수가 없었다.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폴란드군 지휘부의 실책이 나타났다.

당시 폴란드군은 독일쪽 국경과 러시아쪽 국경,

그리고 수도 바르샤바를 지키는 3개의 큰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다.

일단 숫적으로 약 2:1 열세인 폴란드군은

부대를 3개로 나눠서는 승산이 없었다.

당연히 국경에 위치한 부대들을 수도로 불러들이면서

독일군에 대한 지연 작전을 실시해 시간을 버는 게 순서였다.

그러면서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독일의 서쪽을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게

전력상 열세인 폴란드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폴란드군 지휘부는 반대로 나왔다.

독일군을 향해 역습으로 나왔던 것이다.

당연히 전력상 열세인 데다가 독일 공군의 기습으로

항공 지원도 받지 못한 폴란드군의 역습은 실패 했다.

또 숫자는 적지만 최신예 전차로 무장한 독일군 전차 부대를

막을 방법이 폴란드군에겐 없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대전차 무기를 보유한

폴란드군에게 독일 전차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결국 국경선 근처의 폴란드군이 궤멸을 당할 쯤에야

폴란드군 사령부는 바르샤바 사수를 위해 부대를 불러 모으지만

이미 상황은 결정난 후였다.

 

그후 수도 바르샤바는 독일군 공격을 단 2일을 버티고 함락됐다.

폴란드 침공 시작부터 총 23일 만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 서쪽 국경을 공격할 부대를

제대로 모을 시간도 없이 폴란드가 항복을 해버린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승리 축하 행진 후

히틀러는 롬멜을 일선 부대 사단장으로 보내기로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 기념으로 롬멜에게 원하는 부대 종류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다.

 

롬멜은 자신이 폴란드에서 감명 깊게 지켜보았던

전차 부대를 지휘하기를 소망한다.

당시 프랑스의 방어선이었던 마지노선1)을 우회하여

중립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아르덴 지역을 돌파하여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압박하던중

연합군은 덩케르크 해안으로 철수하고

독일군은 적진 깊숙히 들어가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면서 프랑스 점령을 마친다.

프랑스의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대독항전을 호소했지만

독일군은 프랑스 남쪽에 패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정부2)를 수립하게 된다.

 

주(註)

 1) 마지노 선(Maginot Line) : 프랑스가 독일 국경에 만든 난공 불락을 자랑하던 대요새선. 1930년부터 약 200억 프랑의 비용을 들여 근대 과학의 정수를 모아 구축하였다. 건설을 주장한 당시 육군상 A.마지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프랑스는 라인란트의 주둔군을 철수시킨 후 이 요새선에 의해 독일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려 했으나, 독일도 곧 지이크프리이트 선(線)을 구축하여 대항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1940년 6월 독일군에게 어이없이 돌파되어 전차 공격에는 견고하나 공군력에는 무력함을 드러냈다.

 2) 비시 괴뢰 정부(Gouvernement de Vichy; 1940-1944) : 2차 대전 중의 프랑스의 친독일 정권.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의 파리 점령으로 페탱(Petain) 장군은 22일 히틀러와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나찌스에 협력할 것을 서약한 다음 북부 프랑스는 독일에 양도하고, 남부 프랑스에는 휴양지로 유명한 비시를 수도로 하여 제1차 대전의 영웅 패탱을 원수로 하는 친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웨강, 다를랑, 뒤에 라발이 참가하였다.

 

한편 영국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히틀러는

일단 도버해협을 지나가야 하는 과제에 부딪히게 되고,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영국공군은 독일공군을 맞아 선전했고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을 견디며 본토 방어에 성공한다.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히들러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고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게 된다.

독일은 이어 발칸 작전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일제히 소련으로 진격했다.

동유럽에 있어서의 이해의 충돌과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프카즈의 유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소련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국토의 서반부가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고

자그만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의 3.5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1940년 9월 독일·일본·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동아 건설을 외치며 남방 진출에 나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 대전으로

전화는 전지구 표면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국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 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까지 필리핀, 말레이지아, 미얀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 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 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급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

 

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라인 강으로 진격,

1945년 4월 소련군과 엘베 강에서 만나 독일 진격을 눈앞에 두었다.

같은 달 30일 히틀러가 자살하였고,

연합군의 압박을 받던 독일이 1945년 5월에 마침내 항복하였다.

 

독일이 항복함에 따라 연합군은 이제

그들의 관심을 일본 제국을 정복하는 데 돌렸다.

한편 45년 3월에 이오 섬의 일본군이 전멸당하고

4월에는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전후 처리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하였는데,

여기서 채택되었던 포츠담 선언의 내용

일본의 항복 조건은 제국주의적 지도 세력의 제거,

전쟁 범죄인의 처벌, 연합국에 의한 점령,

일본 영토의 제한, 철저한 민주화 따위이며,

한국의 독립도 이 선언에서 약속되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은 이제 국제적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소련도

옵서버 자격으로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여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연합국에 약속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독일전선에 투입한 병력이

극동 방면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8월 상순으로 결정하였다.

 

한편 일본의 스즈끼 내각은 포츠담 선언에 대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약 10일을 보냈고,

일본 내각은 막후접촉을 통해

소련이 연합국과의 평화협상을 중재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일본이 오랫동안 포츠담 선언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미국은 더 기다릴 수 없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1시 45분 에노라게이라고 이름 붙인

미국의 초공위 요새 B-29 폭격기 한대가 태평양상의

미국 테니만 기지에서 조용히 발진하였다.

8월 6일 일본인들의 눈에는 하늘을 높은 고도로 날아가던

B-29 폭격기에서 떨어지고 있는 조그만 낙하산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보게 된 마지막 풍경이 되고 말았다.

핵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일본은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3. 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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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차 세계 대전도

제1차 세계 대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인류의 5분의 4를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1억 10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1945년 11월의 교황청의 발표에 의하면

전사자는 총 2206만 명, 부상자가 3440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 수치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3배나 되는 것이라고 한다.

 

1945년 10월 24일 국제 연합(UN)이 창설되었다.

얄타 회담에서 합의한 지 8개월 만이었는데,

이 국제 연합은 1946년 해체되었던 국제 연맹을 계승한 것으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먼저 국제 연맹의 경우는 미국과 소련 등의 강대국이 불참하였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경제적인 제재만 가할 수 있고

무력에 의한 제재가 불가능 하였다.

그러나 국제 연합은 경제적 제재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군에 의한 무력 제재도 가능 하였고,

유엔 안보리의 5개 상임이사국

(미국 ․ 영국 ․ 소련 ․ 프랑스 ․ 중국)의 거부권이 인정 되었다.

국제 연합의 창설뿐만 아니라

제 2차 세계 대전 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식민지가 독립하였고,

우리나라 또한 일본의 항복을 계기로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정치의 구조적 요인이 크게 바뀌었다.

대전 전의 국제적 고립과 독 · 소 전쟁 등으로 인하여

일찍이 붕괴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소련은,

연합국의 대독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내외의 신뢰와 위신을 높이게 되었으며,

대전 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서의 국제적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대독전쟁의 반격 과정에서 동유럽과 중부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나치 독일과 결탁했던 전통적 지배층이 일소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반파시즘세력이 정권을 장악,

인민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제를 수립하였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권이 확대되었다.

서유럽 쪽에서는 이를 소련의 팽창으로 보고 반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체제의 일각을 허물고

혁명운동·민족해방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체제를 더욱 약화시키고

혁명운동·민족해방운동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항일전쟁을 이겨낸 중국은 세계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 대립은 내전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동남아시아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스·네덜란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식민지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의 야욕에 대한 저항을 통하여

민족해방운동이 비약적으로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도로부터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어 독립국이 잇따라 생겨났다.

동유럽·중부유럽에서의 영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는 무너졌으며,

유럽대륙에 대한 전통적인 세력균형책의 전제는 상실되었다.

더욱이 대전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는 역전되어 미국에 대한 종속만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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