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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는 3문3조의 정연한 권역 외에도 수많은 부속건물이 있었다.
1868년 대원군에 의해 복원된 건물만 해도 500여 동에 이르렀다.
구중궁궐이란 말은 예서 나왔다.
오늘날의 청와대․행정부․사법부․국회 기능을 합친 국정을 수행하던 곳이었으니 당연한 규모였다.
그 가운데 유홍준은 집경당과 함화당의 아름다운 내부 구조를 침이 마르도록 찬미한다.
빈궁들의 거처였으나 고종 때 외빈을 접견하는 장소로 활용된 건물이다.
이런 건물은 비워두는 것보다 활용하는 게 보존에 유리하므로 찻집을 열어 관람객들에게 내부의 아름다움을 개방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제시했다.
경직된 사고를 탈피하지 못하는 당국자들은 펄쩍 뛰겠지만 나는 공감이 간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은 제풀에 쉬 허물어지는 법이다.
경회루는 근정전, 종묘 정전과 함께 조선의 3대 목조건물로서 경복궁의 꽃이다.
3문3조의 엄숙한 공간배치에서 한 발 벗어나 여유와 멋을 극대화한 공간이다.
누마루의 넓이는 298평으로 왜정시대 때 최대 1800명이 연회에 참석했던 기록이 있다.
누각에 올라서면 경복궁의 주요 전각은 물론 북악산․인왕산․남산이 한눈에 보인다.
왜정 36년 동안 조선통치의 연회장으로 오욕을 뒤집어썼던 경회루는 해방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승만은 경회루 북쪽 입수구(入水口) 곁에 하향정이라는 육각정을 짓고 낚시를 즐겼다.
이 작은 정자는 지금도 남아 있다.
경회루 연못은 겨울이면 일반에게 스케이트장으로 개장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5․16혁명 이후 일반 공개가 금지되었던 경회루는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경기 등 국가적 중요 행사 때 외국을 비롯한 귀빈들의 연회장소로 제공되었다.
외국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체험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고궁의 야경에 흠뻑 취해 찬사를 연발하곤 했다.
나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공식보고서」를 집필하면서 취재 차 경회루를 둘러본 적이 있는데, 어린이들이 청사초롱을 들고 귀빈들을 안내했다는 동선(動線)을 따라 걸으며 야경의 아름다움에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고궁은 이처럼 국가적 중요 행사에 활용함으로써 비로소 그 생명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경회루는 현재 인터넷 예약을 통해 하루 100명 한정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사정전 행각 밖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는 수정전도 답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건물이다.
수정전은 세종 때의 집현전으로 훈민정음의 산실이다.
수정전 뜨락을 거닐면서 조선 500년을 통틀어 가장 충직하고 지혜로웠던 관리들이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여러 국정을 진지하게 논의하던 시절을 한번쯤 음미해볼 일이다.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은 집현전을 폐하고 예문관으로 사용했다.
수정전은 대원군 때 복원된 뒤에는 편전으로 쓰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대원군이 복원할 때까지 273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나자 군국기무처를 여기에 설치했으며, 갑오경장도 수정전에서 배태(胚胎)되었다.
향원정도 규모가 작아 자칫 스쳐 지나가기 쉽다.
고종은 건청궁을 지으면서 습지로 방치되어 있던 연못을 되살리고 한쪽에 향원정을 지었다.
향원정은 경회루와 대비되는 고종 내외의 사적 공간으로, 창덕궁의 부용정과 함께 빼어나게 아름다운 정자다.
향원정은 연못 속에 조성한 섬에 세워져 있는데, 취향교(醉香橋)라는 멋진 이름의 다리를 통해 건너다니도록 되어 있다.
향기에 취해 건너는 다리, 고종은 무슨 향기를 연상하면서 그 이름을 붙였을까?
1895년 아내인 민비가 왜놈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자 고종은 신무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조선 말기의 벼랑외교가 빚어낸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2년 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을 떠났으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이로써 경복궁은 조선 법궁(法宮)의 소명을 실질적으로 종료한 것이다.
1904년 왜국은 경복궁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명분으로 경복궁의 무수한 전각을 헐어버렸다.
고종 내외가 기거하던 건청궁을 헐어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세웠다.
그리고 1927년, 왜제는 조선 통치의 본산인 근정전 앞에 총독부 건물을 세워 조선의
맥을 끊어버렸다.
경복궁은 1996년 김영삼 정부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계획을 추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 복원된 건물은 모두 125동으로 대원군이 복원했던 500여 동의 4분의 1 수준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다.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에서 10시 방향으로 꺾어들면 멀리 북악산을 배경으로 광화문의
위용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유홍준은 광화문의 역사와 구조와 복원과정, 그리고 광화문광장 조성에 무려 30쪽을 할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