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득은 흑산도에서 나주를 오가는 홍어상인(당시 25세)
https://www.youtube.com/watch?v=PtbzZYTKYZo
정약전, 문순득의 <표해시말> 원본 총95쪽
https://www.youtube.com/watch?v=cD8P8tMzl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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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slP6wGsKN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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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 필리핀 중국인 도예 일터에서 중국인과 어울림. 또 직물공장의 실로 노끈을 꼬아 팔기도 함.
1803년 중국 광동성 마카오에 도착. 30여일 머물다. 김대건 신부보다 30년 정도 앞섬.
120여 일에 걸쳐 베이징을 거쳐 고향 우이도에 도착.
다산초당. 정약용은 문순득에게서 화폐사용의 편리함을 듣고 화페계혁안을 주장함.
다산의 제자 이강회 <운곡선설(雲谷船說)> 저술에도 도움을 줌.
이강회는 큰 배를 만들어 국제 해상무역을 주창함.
조선 순조 때 정약전(丁若銓)이 대필(代筆)한 어상(魚商) 문순득(文淳得)의 표해기행록(漂海紀行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0291
1801년 12월 우이도에서 문순득과 그의 작은아버지 문호겸(文好謙)과 마을사람인 이백근(李白根)·박무청(朴無碃)·이중원(李中原), 나무꾼 아이 김옥문(金玉紋) 등 6명이 흑산도 남쪽 수백리에 있는 태사도(太砂島)로 홍어를 사러 갔다.
이듬해 1월 18일(1802년) 돌아오는 길에, 우이도 서남 수백리에서 표풍(飄風)을 만나 표류하다가 2월 2일에야 유구국(琉球國) 큰 섬의 양관촌(羊寬村)에 닿았다. 10월 7일 3척의 배로 중국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나 10월 7일 또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하였다.
11월 1일 여송(呂宋)주 01)에 닿아 머무르다가 1803년 3월 16일 다른 사람들은 먼저 출발하고, 문순득과 김옥문은 남은 복건인(福建人) 25명과 같이 광둥(廣東)·아오먼[澳門]·북경(北京)·의주(義州)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1805년 1월 8일 귀가하였다.
https://www.ekn.kr/web/view.php?key=309524
송도항 선착장, 뒤로 사옥도와 연결되는 임자대교[임자도~지도]
https://www.youtube.com/watch?v=Xa526qFeocI
https://www.youtube.com/watch?v=haotx0j44uk
[송도 선착장 풍경]
https://www.youtube.com/watch?v=5aFpaV0rCX8
https://www.youtube.com/watch?v=0MS2Xl4KNDI
https://kydong77.tistory.com/20875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82%B0%EC%96%B4%EB%B3%B4
https://www.youtube.com/watch?v=IkUQfsVl90g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BD%EC%A0%84
1758년(영조 34년) 음력 3월 1일, 경기도 광주부 마재(또는 마현(馬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재원의 두 번째 부인인 윤소온(尹小溫, 윤두서의 손녀)이다. 정약현은 이복형, 정약종과 정약용은 동복동생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BD%EC%9A%A9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249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김건순(金健淳)·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왕족인 송씨(宋氏)주 01)와 신씨(申氏)주 02)도 사사(賜死)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유박해(辛酉迫害))]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875
https://m.blog.naver.com/joonho1202/222174798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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