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b-_ypHbT8PU
https://www.youtube.com/watch?v=Ul-b_h-zwY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377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 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쳤으며, 문신으로도 진출하지 않은 채 포의서생(布衣書生)으로 생애를 마쳤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벽(李蘗))]
https://www.youtube.com/watch?v=a3aRMZryVZ4
Matteo Ricci 한문명 이마두利瑪竇
1552년 10월 6일 ~ 1610년 5월 11일 (향년 58세)
1.3. 천주실의(天主實義)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유교 경전을 인용하면서 선교를 벌였고, 체계적인 내세관 교리가 있어 천주교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불교를 공박하여 천주교의 우위를 알리는 한편[3], 유교에 대해서는 종교보다 철학 사상에 가깝게 보아 관대한 태도를 취해 제사와 같은 유교 행사도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인정하여 예수회가 중국에서 포교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조상제사 문제는 이후 70여년 넘게 이것이 미신적 요소를 분리할 수 없는 조상숭배인지, 용인가능한 수준의 조상에 대한 공경일 뿐인지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극심했으며, 결국 조상숭배, 미신적 요소를 분리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교황청의 결정에 의해 18세기 초 부터는 200여년간 동아시아권에서 조상제사를 금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청나라 시기의 가톨릭 박해와 조선에서의 여러 가톨릭 박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현대에 들어 1939년 이후의 현대 교황청에서는 이제는 과거와 달리 조상제사에서 조상숭배적 가치관이 많이 옅어졌다고 판단하고, 단순한 가문의 전통의 선에서 '천주교에서 인가한 양식'으로 신주 같은 유교적 요소를 뺀 조상제사를 치르는 것은 조건부로 허용해주고 있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한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는 중국어의 어떤 단어도 기독교의 신 개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마테오 리치는 오랜 고민 끝에 유교 경전에 나오는 천주와 상제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 선택은 풍응경(馮應京)이 ‘천주실의(天主實義)’ 서문에 썼듯이 리치가 ‘이중화중(以中化中)’의 태도, 중국을 빌려 중국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마테오 리치의 사후 40년 동안 중국인 가톨릭 신자 수는 1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글은 조선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기하원본>을 저술하여 조선에 전해졌고, 저서 <천주실의> 역시 조선에도 널리 퍼져, 천주교가 자연스레 전해지는 가교가 되었다. 유학자들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교를 불교와 같은 허망한 종교라 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 때문에 이후 이익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서파와 종교로 신봉하게 되는 신서파로 나뉘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과 상제 개념을 천주와 함께 사용했는데, 이에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서는 말이 되냐고 반발했고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여서 천주 이외의 호칭을 금했다.
하지만 그건 100년이 지난 뒤고, 당대에는 이러한 선교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 실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하상 바오로가 쓴 상재상서에서 당대 조선인들이 상제/천을 천주와 동일시했으며 혼용해 사용하는 것으로 신앙을 설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현대 한국 가톨릭에서는 '천주'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한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는 중국어의 어떤 단어도 기독교의 신 개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마테오 리치는 오랜 고민 끝에 유교 경전에 나오는 천주와 상제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 선택은 풍응경(馮應京)이 ‘천주실의(天主實義)’ 서문에 썼듯이 리치가 ‘이중화중(以中化中)’의 태도, 중국을 빌려 중국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마테오 리치의 사후 40년 동안 중국인 가톨릭 신자 수는 1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글은 조선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기하원본>을 저술하여 조선에 전해졌고, 저서 <천주실의> 역시 조선에도 널리 퍼져, 천주교가 자연스레 전해지는 가교가 되었다. 유학자들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교를 불교와 같은 허망한 종교라 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 때문에 이후 이익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서파와 종교로 신봉하게 되는 신서파로 나뉘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과 상제 개념을 천주와 함께 사용했는데, 이에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서는 말이 되냐고 반발했고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여서 천주 이외의 호칭을 금했다.
하지만 그건 100년이 지난 뒤고, 당대에는 이러한 선교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 실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하상 바오로가 쓴 상재상서에서 당대 조선인들이 상제/천을 천주와 동일시했으며 혼용해 사용하는 것으로 신앙을 설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현대 한국 가톨릭에서는 '천주'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P1NWrnobgQ
https://www.youtube.com/watch?v=dvyB_rZecD4
https://www.youtube.com/watch?v=Ue2bgDr_c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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