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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구외이문(口外異聞)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구외이문(口外異聞)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구외이문(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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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구외이문(口外異聞)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구외이문(口外異聞)

 

1. 반양(盤羊)

2. 채요(彩鷂)호접(蝴蝶)

3. 고려주(高麗珠)

4. 숭정상신(崇禎相臣)

5. 이상아(伊桑阿)서혁덕(舒赫德)

6. 왕진묘(王振墓)

7. 조조수장(曹操水葬)

8. 위충현(魏忠賢)

9. 양귀비사(楊貴妃祠)

10. 초사(樵史)

11. 주각해(麈角解)

12. 하란록(荷蘭鹿)

13. 사답(砟答)

14. 입정승(入定僧)

15. 별단(別單)

16. 등즙교석(籐汁膠石)

17. 조라치(照羅赤)

18. 원사천자명(元史天子名)

19. 만어(蠻語)

20. 여음리(麗音離)동두등절(東頭登切)

21. 병오을묘년 원조의 일식[丙午乙卯元朝日食]

22. 육청(六廳)

23. 삼학사가 성인하던 날[三學士成人之日]

24. 당금의 명사[當今名士]

25. 명련자봉왕(明璉子封王)

26. 고아마홍(古兒馬紅)

27. 동의보감(東醫寶鑑)

28. 심의(深衣)

29. 나약국서(羅約國書)

30. 불서(佛書)

31. 황명마패(皇明馬牌)

32. 합밀왕(哈密王)

33. 서화담집(徐花潭集)

34. 장흥루판(長興鏤板)

35. 주한(周翰)주앙(朱昻)

36. 무열하(武列河)

37. 옹노후(雍奴侯)

38. (𢘿)

39. 순제묘(順濟廟)

40. 해인사(海印寺)

41. 사월팔일방등(四月八日放燈)

42. 오현비파(五絃琵琶)

43. 사자(獅子)

44. 강선루(降仙樓)

45. 이영현(李榮賢)

46. 왕월시권(王越試券)

47. 천순칠년회시 때 공원의 화재[天順七年會試貢院火]

48. 신라호(新羅戶)

49. 증고려사(證高麗史)

50. 조선모란(朝鮮牡丹)

51. 애호(艾虎)

52. 십가소(十可笑)

53. 자규(子規)

54. 경수사대장경비략(慶壽寺大藏經碑略)

55. 황량대(謊糧臺)

56. 호원이학지성(胡元理學之盛)

57. 배형(拜荊)

58. 환향하(還鄕河)

59. 계원필경(桂苑筆耕)

60. 천불사(千佛寺)

 

 

 

반양(盤羊)

반양은 사슴의 몸에 가는 꼬리가 있으며 두 뿔이 구부러졌고, 또 등에는 겹친 무늬가 있었다. 밤이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자서 다른 짐승의 침범을 예방한다. 그 모양은 마치 노새처럼 생겼으며, 더운 날씨에 떼를 지어 다니므로 티끌과 이슬이 서로 엉기어 뿔 위에 풀이 나곤 한다. 혹은 그를 영양(麢羊)이라 하고, 또는 원양(羱洋)이라 부른다. 설문(說文 () 허신(許愼) ),

 

영양은 커다란 양()에게 가는 뿔이 돋친 놈이다.”

하였고, 육전(陸佃 () 학자. 자는 농사(農師))의 비아(埤雅)에는,

 

원양은 마치 오()의 양과 같이 생겼으면서도 커다랗다.”

하였다. 이제 만수절(萬壽節)을 맞이하여 몽고에서 이를 황제께 드려서 반선(班禪)에게 공양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채요(彩鷂)호접(蝴蝶)

 

 

강희(康熙) 40(1701)에 황제가 구외(口外)에서 피서(避暑)할 제 날리달번두(喇里達番頭 번족(蕃族)의 이름) 사람이 채요(彩鷂 장끼같이 생긴 새매) 한 둥주리와 파란 날개 호접(蝴蝶) 한 쌍을 바쳤는데, 채요는 범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호접은 새를 잘 잡았다. 이 기록은 왕이상(王貽上 왕사진(王士稹). 이상은 자) 향조필기(香祖筆記)에 실려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고려주(高麗珠)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진주를 보배롭게 여겨서 고려주(高麗珠)라 부르고 있다. 빛이 희맑기가 차거(硨磲)와 같으며, 이제 모자 챙 앞뒤에 한 낱씩을 달아서 남북을 표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진주로서 무게가 8푼 이상이면 벌써 보물로 인정되었다. 황제가 가진 것은 7돈이나 되는 무게였는데, 이로써 악한 꿈을 누르는 보물로 삼았고, 황후(皇后)의 것은 6 4푼인데, 흰 가지처럼 생겼다. 건륭 30(1765)에 황후가 그 진주를 잃었을 제 회후(回后 회회(回回族) 출신의 황후)가 황후를 고자질하여 수사한 끝에 궁중 호위 군졸 집에서 나타났으므로 황후가 곧 폐출(廢黜)을 당하여 냉궁(冷宮)에 갇히었다.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 기풍액(奇豐額)이 모자 끝에 우리나라 진주를 달긴 하였으나 빛깔이 몹시 좋지 못하였다. ()는 말하기를,

 

이 진주는 두께 육칠 리(六七釐)에 값이 마흔 냥이라오.”

하기에, 나는,

 

이 진주, 토산(土産)이 아니어요. 혹시 홍합(紅蛤)을 먹다가 입 안에서 발견되는데, 이를 육주(陸珠)라 하나 너무 가늘어서 보배로울 것 없고, 부녀들의 머리꽂이와 귀이개 따위에 꾸민 것은 대체로 왜산(倭産)이며 붉은 빛깔이 제법 보배롭더군요.”

하였더니, 기 안찰(奇按察),

 

아니어요. 이건 조개 껍질을 둥글게 간 것이었고 진주는 아니라오. 귀국의 진주를 사랑함은 조개 기운이 없이 천연적으로 보배로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지요.”

하고 웃는다. 이 말이 매우 이치에 맞는 것이기는 하나 나는 알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진주가 어디에서 나며, 또 누가 캐어서 이처럼 세상에 널리 깔려 있게 되었는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숭정상신(崇禎相臣)

 

 

숭정제(崇禎帝)가 위에 오른 지 17년 사이에 상신(相臣)들의 임면(任免)이 모두 50명이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조금이라도 임금의 명령을 어긴다면 곧 그 머리를 잘라 구변(九邊)에 돌렸으니, 그때 군율(軍律)의 엄격함이 역대에 드물었으나 역시 승패(勝敗)와 존망(存亡)의 운수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고 말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상아(伊桑阿)서혁덕(舒赫德)

 

 

강희 때의 상업(相業)문장(文章)학문(學問)이 갖추어진 이를 논하면 모두 이상아(伊桑阿)를 추천하게 된다. 그는 만주 사람이었으며 강희 무진(1688)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로서 대배(大拜)하여 상위(相位)를 누린 지 열다섯 해 만에 죽으니, 나이는 여든여섯이요,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그는 예순세 살에 구양(歐陽 구양수(歐陽修))이 걸휴(乞休)하던 예를 이끌어서 서른 번이나 소장을 올렸으나, 그 사의(辭意)가 갈수록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윤허(允許)를 얻었다. 그리고 근년에 이르러 상업(相業)의 상한 이로서는 서혁덕(舒赫德)이 으뜸인데, ()는 역시 만주 사람이었으며, 상부(相府)에 있은 지 40여 년 만인 지난해에 죽으니, 나이는 여든여덟이었으며, 남들은 그를 문로공(文潞公 ()의 명신 문언박(文彦博). 노공은 봉호)에 비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왕진묘(王振墓)

 

 

지난해 곧 건륭 기해(1779)에 왕진(王振)의 무덤을 서산(西山)에서 발견하여 그 관()을 쪼개어 수죄(數罪)하면서 시신을 찢고, 그 파당들의 20여 무덤을 모두 파헤쳐 목을 잘랐었다. 명사(明史)를 상고하면,

 

임금이 토목(土木 ()의 이름)에 이르자 왕진의 수레와 짐바리가 천여 대나 되었다. 적병(敵兵)의 사면 추격을 입어 일시에 종관(從官)과 장병들이 모두 함몰되었다.”

하였으니, 왕진이 어찌 혼자서 빠졌으며, 또 당시에,

 

왕진의 한 집안을 다 베고 마순장(馬順長)을 때려 죽이고, 왕진의 조카 왕산(王山)까지 거리에서 시신을 찢었다.”

하였으니, 그 파당이 어찌 무덤이 있었으리. 그러나 천순제(天順帝 () 명종. 천순은 연호)가 복위(復位)되자 왕진의 벼슬을 돌리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은즉, 그의 무덤이 남아 있었음도 괴이함은 아니리라.

 

 

[D-001]왕진(王振) : 명 영종(明英宗) 때 환관으로서 정권을 잡아 폭정을 행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조조수장(曹操水葬)

 

 

건륭 무진(1748)에 황제가 장하(漳河)에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헤엄치는 자가 별안간 허리가 끊어져 물 위에 떠오른다. 황제가 군졸 수만 명을 풀어 그 냇물 옆을 파서 물을 돌리고 살펴보니, 물 속에는 수많은 쇠뇌에 살이 메워져 있고 그 밑에는 무덤이 있었다. 드디어 발굴하여 한 관()을 얻었는데, 은해(銀海)와 금부(金鳧) 등의 부장품(副葬品)도 있거니와 황제의 면류관(冕旒冠)과 옷차림을 갖추었으니, 곧 조조(曹操)의 시신이었다. 황제가 친히 관묘(關廟) 소열(昭烈)의 소상(塑像) 앞에 나아가 그 시신을 꿇리고 목을 잘랐었다. 이는 비단천고 신인(神人)의 분통을 씻은 것뿐만이 아니라, 쾌히 70()의 의안(疑案)을 깨쳤다.

 

 

[D-001]70() …… 깨쳤다 : 조조가 후세에 무덤이 파헤쳐질까 두려워하여 죽은 뒤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위충현(魏忠賢)

 

 

숭정(崇禎) 초년에 위충현(魏忠賢)을 봉양(鳳陽)에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籍沒)시켰다. 충현이 군졸을 거느려 몸을 옹위하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명령을 내려서 충현을 체포하였다. 충현이 면치 못할 것을 짐작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 시신을 하간(河間)에서 찢었으니 충현이 어찌 무덤이 있으리요. 강희 때 강남도 감찰어사(江南道監察御史) 장원(張瑗)이 소장을 올렸으되,

 

황제께옵서 지난해 남으로 거둥하실 제, 명령을 내려 악비(岳飛)의 무덤을 수축하시고, 또 우겸(于謙)의 비()에 글을 쓰셨사오니, 이는 실로 두 신하의 충성이 일월(日月)을 꿰뚫으며, 정의가 산하(山河)보다 장한 까닭으로 이를 표창하여 온 천하 사람에게 선전하심이 아니옵니까. 제가 칙명을 받들어 서성(西城)을 돌보고 앞으로 나아가 서산(西山)의 일대를 거쳐 향산(香山)벽운사(碧雲寺)에 이르렀답니다. 절 뒤에 높은 집과 둘린 담장이 몇 리나 덮이고, 성한 숲이 뻗쳤으며 단청이 어리었으니, 이는 곧 옛 명()의 역신(逆臣) 위충현의 무덤이었습니다. 그 위에 우뚝한 두 개의 높은 비()가 나란히 섰는데, 두 비면(碑面)에는 흠차총독 동창관기판사 장석신사 내부공용고 상선감인무 사례감병필 총독남해자 제독보화등전 완오 위공충현지묘(欽差總督東廠官旗辦事掌惜薪司內府供用庫尙膳監印務司禮監秉筆總督南海子提督保和等殿完吾魏公忠賢之墓)’라 쓰여 있었사오니, 수도가 가까운 곳에 오히려 이런 더럽고 포악한 자취가 남아 있은즉 장차 어떻게 대악(大惡)을 징계하며, 공법(公法)을 밝히겠사옵니까. 하물며 장차 칙명을 받들어 명사(明史)를 수찬(修纂)하게 되었사온즉, 무릇 명말(明末)의 화를 입은 충량(忠良)한 모든 신하를 위하여 전()을 쓰지 않을 수 없겠사옵니다. 그렇다면 밝은 하늘 햇빛 아래 어찌 간신(奸臣)의 남은 패당이 대담하게도 하늘을 모르고 법을 무시한 일을 용서하겠나이까. 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陛下)께서 지방의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그 비를 엎고 무덤을 깎게 하옵소서. 책명을 내리시면 그 고을 관원들과 함께 그 일을 치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것으로 따진다면 왕진(王振)도 의당 무덤이 있었으리라 생각되기에 이에 아울러 기록하여서, 이로써 명말(明末)에 법률 숭상이 몹시 엄격하였건만 기강(紀綱)이 이렇게 서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양귀비사(楊貴妃祠)

 

 

()이 나라를 세울 제 오로지 어진 사람을 표창하고 악한 자를 누르는 법전으로써 천하 민심을 가라앉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주(薊州) 반산(盤山)에 안녹산(安祿山)의 사당이 있음은 물론이요, 동탁(董卓 동한 때의 역신)조조(曹操)오원제(吳元濟 ()의 역신)황소(黃巢) 따위까지도 가끔 사당이 있으니, 어찌 있는 곳에서 헐어 버리지 않았을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구외(口外) 길가에 양귀비(楊貴妃)의 사당이 있는데, 안녹산의 소상(塑像)도 있다 한다. 마부들이 들어가 보니 양귀비의 상은 요염(妖艶)하기가 마치 살아 있는 듯싶고, 안녹산의 상은 뚱뚱보에다 흰 배가 드러난 채 갖은 추태가 보이더라 한다. 이러한 음사(淫祠)를 헐어 버리지 않음은 이로써 뒷사람들을 경계함이 아닐까 싶었다.

 

 

[D-001]황소(黃巢) : 당 희종(唐僖宗) 때 농민을 대표하여 폭동을 일으킨 사람.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초사(樵史)

 

 

 초사(樵史) 한 권은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명()의 황실(皇室)이 망한 연유를 기록하여 그 비분(悲憤)한 생각을 붙인 것이다. 그 중 객씨(客氏) 및 웅정필(熊廷弼 ()의 장수)을 죽인 일은 특히 이문(異聞)이 많았으며, 또 그 중에는 만력제(萬曆帝 () 신종(神宗). 만력은 연호)가 조선(朝鮮)을 구원하다가 창고가 텅 비고, 인민이 유리되었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그 순간에 한 망령된 자가 시임(時任) 상신(相臣)에게 채광(采礦)하기를 헌책(獻策)하자, 그는 흔연히 받아들였으므로 인민이 더욱 크게 곤궁하고 모두 도적으로 변하여 나라가 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말에 애절한 곳이 많아서 정사(正使)와 함께 읽으니, 눈물이 저절로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만 갈 길이 바빠서 베끼지 못하였으며, 이는 금서(禁書)이기 때문에 다만 이 등본(謄本) 한 책이 있을 뿐이라 한다.

 

 

[D-001]객씨(客氏) : 명 희종(明熹宗)의 유모(乳母)로서 위충현과 간통하여 악정을 함께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주각해(麈角解)

 

 

오직 천자(天子)만이 한 나라의 예법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황제가 월령(月令)을 고쳤으니 이를 보아서 증빙할 수 있으리라. 나의 연암초당(燕巖艸堂)에 일찍이 푸른 사슴이 와서 앞 냇물을 마시는데, 머리는 마치 물레처럼 되었기에 가만가만 가서 자세히 그 털과 뿔을 살펴보려는 차에 사슴이 크게 놀라 뛰어가 버려서 마침내 그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내 장성(長城) 밖을 나와 날마다 진공한 사슴 떼를 구경하였는데, 큰 놈은 노새처럼 생겼고, 작은 놈도 나귀처럼 되었을 따름이었다. 새문(塞門) 안에 돌아와 한 약포(藥舖)에 앉았을 제 사슴 뿔이 성기면서도 길이가 모두 네댓 자나 되는 것이 집안에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이 모두 녹용(鹿茸)이라 한다. 나는,

 

이건 모두 미용(麋茸)이요, 녹용을 좀 보여 주시오.”

하였더니, 약포 주인은,

 

()는 녹()의 큰 놈이란 말을 들은 일은 없습니까. 녹의 큰 놈이 미라면 미의 작은 놈은 녹이 될 것인즉 그 뿔이 무엇이 다르겠어요.”

하며 깔깔댄다. 나는,

 

하지(夏至)에 녹각(鹿角)이 빠지므로 역경(易經)에 있어서 구괘(姤卦 역경(易經)에 나오는 64괘의 하나)가 되는 동시에 일음(一陰)이 나므로 그것이 보음(補陰)의 제()가 되고, 동지(冬至) 미각(麋角)’이 빠지므로 역경에 있어서 복괘(復卦)가 되는 동시에 일양(一陽)이 나므로, 그것이 보양(補陽)의 제가 되는 법인즉 둘의 효과와 쓰임이 아주 다르다 하오.”

하였더니, 포주는,

 

선생은 아직 시헌서(時憲書 책력)를 보시지 못하셨나요. 벌써 월령(月令)이 고쳐졌답니다. 황제께서 일찍이 미와 녹의 뿔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으므로 온 천하에 명령을 내려 글자 중에서 녹() 변을 지닌 것으로서 뿔이 돋친 놈은 모두 사로잡아다가 해자(海子 남해자(南海子). 동산 이름) 중에 길러서 따로 갈라 놓고 서로 흘레하지 말게 하였더니, 하지(夏至)에 이르러 미()나 녹()은 모두 같은 때에 뿔이 빠지고, 동지(冬至)에 뿔이 빠지는 놈은 주() 하나뿐이므로 곧 동짓달 월령 중의 미각해(麋角解)를 주각해(麈角解)라 하였답니다.”

한다. 이로 따진다면 우리나라 관북(關北)에서 나는 녹용(鹿茸)이 반드시 녹용이라 할 수 없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녹용이 날이 갈수록 귀해지니, 어찌 이상하지 않으랴. 나는 또,

 

()라니, 그 모양이 어떠하오.”

하고 물었더니, 포주는,

 

일찍이 보진 못했습니다만 혹은 말하기를, ‘앞은 녹()인데 뒷치레는 말이라 합디다.”

한다. 대체로 월령을 고치더라도 천자의 위세(威勢)가 아니라면 온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어려운 일일 것이므로,

 

오직 천자라야 예법을 고쳐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던 것이다.

 

 

[D-001]월령(月令) : 예기(禮記)의 편명. 옛날 천자가 실시할 일을 열두 달에 배정한 일종의 연중행사표.

[D-002]() …… 큰 놈 : 맹자(孟子)양혜왕 상(梁惠王上) ()에 나오는 구절.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하란록(荷蘭鹿)

 

 

그 포주(舖主)가 또 말하기를,

 

() 중에도 극도로 작은 놈이 있더군요.”

하며, 스스로 제 주먹을 보이면서,

 

이에 불과하더군요. 일찍이 하란(荷蘭 화란(和蘭))에서 바쳐 온 녹() 한 쌍을 보았습니다만 푸른 바탕에 흰 무늬가 놓였습디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사답(砟答)

 

 

나는 또 포주에게,

 

귀포(貴舖) 중엔 희귀한 약료(藥料)가 갖추어져 있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포주가,

 

초목(草木)과 금석(金石)을 논할 것 없이 이름을 지적하신다면 곧 올려 드리렵니다.”

한다. 나는,

 

희귀한 진품(珍品)이 별안간 생각에 떠오르지 않는구려.”

하였더니, 포주가 동편 바람벽 밑 붉게 칠한 궤짝을 가리키며,

 

이 속에 사답(砟答) 하나가 있는데, 참 희귀해서 얻기 어려운 자료지요.”

한다. 나는,

 

사답이란 무슨 물건이어요.”

하고 물었더니, 포주는 웃음을 짓고 일어나면서,

 

구경하시는 것이야 관계하지 않겠죠.”

하고 궤를 열더니, 둥근 돌 하나를 끄집어낸다. 크기는 두어 되들이 바가지와 같고 모양은 흡사 거위알처럼 생겼다. 나는,

 

이건 수마석(水磨石)이 아뇨. 무슨 희롱이요.”

하였더니, 포주는,

 

어찌 감히 짐짓 오만 무례하오리까. 이건 타조의 알인데 이름지을 수 없는 괴상한 병을 치료할 수 있답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입정승(入定僧)

 

 

장성(長城) 밖 백운탑(白雲塔)의 돌 감실 속에 요() 때에 입정(入定)한 중이 있는데, 그는 육신(肉身)이 이제까지 허물어지지 않고, 약간 따사로우며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나, 다만 눈을 감은 채 기식이 없을 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별단(別單)

 

 

북경(北京) 사람 하류(下流) 중에 글자를 아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 소위 필첩식(筆帖式) 서반(序班 () 때의 하급 관리)에는 남방의 가난한 집 아들이 많았는데, 얼굴이 초라하고 야위어서 하나도 풍후한 자가 없었으며, 비록 봉급을 받기는 하나 극히 적어서 만리 객지에서 생계가 쓸쓸하고, 가난하고 군색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었다. 우리 사행이 갈 때면 서책이나 필묵의 매매는 모두 서반패가 이를 주장하여 그 사이에서 장쾌[駔儈]의 노릇을 하여 그 남은 이문을 먹었다. 그리고 역관들이 그 사이의 비밀을 알려고 들면, 반드시 서반을 통해야 하므로 이들이 크게 거짓말을 퍼뜨리되, 일부러 신기하게 꾸며서 모두 괴괴망측하여 역관들의 남은 돈을 골려 먹는다. 시정(時政)을 물으면 아름다운 업적은 숨기고 나쁜 것들만을 꾸며서 천재(天災)와 시변(時變)과 인요(人妖)와 물괴(物怪) 따위에도 역대에 없던 일을 모았으며, 심지어 변새의 침략과 백성들의 원망에 이르기까지 한때 소란한 형상의 표현이 극도에 달하여, 마치 나라 망하는 재화가 조석에 박두한 듯이 장황하게 과장 기록하여 역관에게 주면, 역관은 이것을 사신에게 바친다. 서장관이 이를 정리하여, 듣고 본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사실이라 하여 별단(정식이 아닌 별지의 예단(禮單))에 써서 임금께 아뢴다. 그 거짓이 이러하였으며 임금께 아뢰는 말씀이 얼마나 근엄한 일이기에, 어찌 함부로 돈만 허비하여 허황하고 맹랑한 말들을 사서 반명(反命)의 자료를 삼으랴. 사신이 자주 드나든 지 백 년이 되도록 겨우 이러하였을 뿐이었다. 가장 염려되는 일은 이 따위 문서가 불행히 유실된 채 저들에게 끼쳐진다면 그 피해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번 열하(熱河)에 오가는 일로 말한다면 모두 목격(目擊)한 일이어서 가장 사실적인 기록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먼저 보내 드린 장계(狀啓) 끝에 붙여 아뢴 한두 가지의 사건(事件)에는 시휘(時諱)에 저촉될 만한 것이 없지 않은즉,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는 줄곧 걱정으로 날을 보내곤 하였다. 내 생각에는 저들의 정세에 대해서 허실(虛實)을 논할 것 없이, 장계 끝에 붙여 아뢰는 글은 모두 언서(諺書)로 써서 장계가 도착되는 대로 정원(政院)에서 다시 번역하여 올림이 좋을 듯싶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등즙교석(籐汁膠石)

 

 

왕삼빈(王三賓)의 말에 의하면,

 

( 운남성의 별칭)( 귀주성의 별칭) 지방에 깨어진 돌을 붙이는 대나무가 있는데, ‘양도등(羊桃籐)’이라 하며 그 즙()을 내어 돌을 붙여서 공중에 걸쳐 다리를 놓는다. 그러면 비록 수십 길이라도 한 번 이어지면 끊어지지 않고, 마치 종이에 풀칠하고 널판에 아교칠한 것 같아서 검주(黔州) 사람들은 이를 점석교(黏石膠)’라 부른다.”

한다. 그 말이 몹시 황당하긴 하나 우선 그대로 기록하여 다른 이의 참고로 삼으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조라치(照羅赤)

 

 

번역된 몽고(蒙古) 말 중에 필자치(必闍赤)는 서생(書生)이요, 팔합식(八合識)은 사부(師傅)를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삼청(三廳) 하인(下人) 조라치(照羅赤)’라 하니, 아마 고려(高麗) 때의 옛 말인 듯싶다. 그때는 외올(畏兀)의 말을 많이 배웠은즉, 조라치도 역시 몽고 말이리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원사천자명(元史天子名)

 

 

원사(元史)를 읽어보면 천자의 호와 이름부터 몹시 이상하여 늘 읽기 어려움이 딱하였다. 구외(口外)에 원 나라 때 세운 황폐한 절 하나가 있어서 허리가 잘린 빗돌에 원 나라 모든 임금의 공덕을 빠짐없이 새겼는데, 성길사(成吉思)라 한 것은 태조(太祖), 와활태(窩濶台)는 태종(太宗)이요, 설선(薛禪)은 세조(世祖), 완택(完澤)은 성종(成宗)이요, 곡률(曲律)은 무종(武宗)이요, 보안독(普顔篤)은 인종(仁宗)이요, 격견(格堅)은 영종(英宗)이요, 홀도독(忽都篤)은 명종(明宗)이요, 역련진반(亦憐眞班)은 중종(中宗)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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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어(蠻語)

 

 

만어(蠻語) 중에 애막리(愛莫離)는 중국말의 유숙연(有宿緣)이요, 낙물혼(落勿渾)은 중국말의 몰염치(沒廉恥), 예락하(曳落河)란 만주말의 장사(壯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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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음리(麗音離)동두등절(東頭登切)

 

 

역졸(驛卒)이나 구종군 따위가 배운 중국말은 그릇됨이 많았다. 그들의 말은 저희도 모르는 채 그대로 쓰고 있다. 냄새가 몹시 악한 것을 고린내[高麗臭]’라 한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으므로 발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쁜 까닭이다. 그리고 물건을 잃고는 뚱이[東夷]’라 한다. 이는 동이가 훔쳐 갔다는 말이다. 그러면 려()의 음은 리(), () 터우떵[頭登]’의 절음(切音)임에 불과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 채 나쁜 냄새가 나면,

 

아이, 고린내.”

하고,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될 때에는,

 

아무개가 뚱이[東夷]’.”

한다. 그리하여 뚱이는 곧 물건을 훔쳤다는 별명인 양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병오을묘년 원조의 일식[丙午乙卯元朝日食]

 

 

황제가 등극하는 날에 향안(香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하느님께 감사하였다. 그날 밤 꿈에 옥황(玉皇)께서 황제에게 백년 장수(長壽)를 점지한다 하였다. 황제는 다시금 향안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기를,

 

저는 오는 을묘년(1795)에 이르러서 이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러하오면 저의 통치하는 햇수가 황조(皇祖 강희 황제)보다 한 해가 적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한다. 올해에 흠천감(欽天監 기상대(氣象臺)의 장())이 여쭈기를,

 

이 뒤 6년 만인 병오년(1786) 원조(元朝)에 일식(日蝕)이 있고,  10년 만인 을묘년 원조에도 역시 일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므로, 황제는 계획을 변경하여,

 

만일 을묘년에 선위(禪位)한다면 새 천자 원년(元年)에 마침내 일식을 맞이할테니, 원조의 조하(朝賀)는 그로 하여금 정지하게 될 것이다.”

한다. 이것은 송 고종(宋高宗)이 명색으로 선위를 선언하였으나, 그 실은 금 나라 사람과 맞서지 않으려는 의도에 다름없는 일이다. 황제는 또 그 뒤를 이어서,

 

만일 을묘년을 지나면 짐이 통치하는 햇수가 황조보다 도리어 두 해가 많을 테니, 이는 미안한 일이다.”

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극히 요망한 말이어서 반드시 황제의 말이 아니리라 생각된다.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등극한 지가 오래되면 사방에서 다투어 상서로운 물건을 바침은 물론이요, 모든 신하들이 뜻을 엿보아 경축을 꾸미자니 저절로 지나친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마는, 그렇다 해서 어찌 오늘 미리 미래에 일식할 것을 점쳐서 그 선위할 해를 앞당겼다 물렸다 할 수 있으리요. 이는 반드시 천하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한낱 옛 성인(聖人)의 꿈일을 빌려서 황제의 옳지 못한 점을 덮어 버리는 일이리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육청(六廳)

 

 

열하태학(太學)의 대성문(大成門) 밖 동쪽 바람벽 속에 건륭(乾隆) 43(1778)에 내린 글을 모셔 놓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수도 동북 4백 리에 열하가 있다. 그 지점은 고북구(古北口) 북녘에 있는데, 곧 우공(禹貢) 기주(冀州)의 변두리였으며, ()()() 때의 유주(幽州) 지경이다. ()() 이후엔 판도(版圖)에 들지 않았고, 원위(元魏) 때엔 안주(安州)영주(營洲) 두 고을을 세웠고, ()에서는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를 두었으나, 불과 잠깐 기관(機關)을 내지(內地)에 두었을 뿐이요, ()()과 원()에 이르러서는 시향(始薌)이라 하였으나, 옛 땅은 곧 황폐하게 되었고, ()에선 대령(大寧)을 버려서 이역(異域)으로 보았었다. 앞서 승덕주(承德州)를 세웠으니, 이제 의당 이를 부()로 승격시켜 다시금 시설을 더하고, 그 나머지 육청(六廳)도 객랄하둔청(喀喇河屯廳)은 난평현(灤平縣)으로, 사기(四旗)는 풍녕현(豐寧縣)으로 고치고, 팔구청(八溝廳)은 그 땅이 비교적 넓으므로 평천주(平泉州)를 만들고, 오란합달청(烏蘭哈達廳)은 적봉현(赤峰縣)으로, 탑자구청(塔子溝廳)은 건창현(建昌縣)으로, 삼좌탑청(三座塔廳)은 조양현(朝陽縣)으로 각기 고쳐서 아울러 승덕부(承德府)에 통할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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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가 성인하던 날[三學士成人之日]

 

 

미관첨사(彌串僉使) 장초(張超)의 일기(日記) 중에,

 

오 학사(吳學士) 달제(達濟)와 윤 학사(尹學士) ()이 정축년(1637) 4 19일에 피살되었다.”

하였으므로, 그 양가(兩家)가 일기를 빙거하여 19일에 제사를 올리었다. 정축은 곧 명()의 숭정(崇禎) 10년이었으며, 두 학사가 살해를 당한 때는 청인(淸人)들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였다. 그리고 홍 학사(洪學士) 익한(翼漢)에 대한 일은 그 일기(日記) 중에 실리지 않았으니, 그 성인(成仁)한 날이 명확히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므로 역시 두 학사와 같이 19일에 제사를 올리었다. 이제 청인이 엮은 청 태종 문황제(淸太宗文皇帝)의 사적 중에,

 

숭덕(崇德) 2(1637) 3월 갑진(甲辰)에 조선(朝鮮)의 신하 홍익한(洪翼漢) 등을 죽여서 두 나라의 맹세를 깨뜨리고, 군사를 일으켰으며 물의를 빚어내어 명 나라를 우단(右袒)한 죄를 밝혔다.”

하였으니, 숭덕은 곧 청 태종의 연호(年號)였으며 3월 갑진은 일간(日干)을 따져 보면 초엿새에 해당되고, 그 중의 등()이란 글자가 있음을 보아서 오()() 두 학사의 죽음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인 3월 초엿새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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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금의 명사[當今名士]

 

 

당세 해내(海內)의 명사(名士)로서는 양국치(梁國治)팽원서(彭元瑞)와 기균(紀勻)의 호 효람(曉嵐)과 오성흠(吳聖欽) 또는 대구형(戴衢亨) 및 그의 형 심형(心亨) 등은 모두 오() 땅의 사람이었고, 축덕린(祝德麟)이조원(李調元) 등은 촉()의 면죽(綿竹) 사람이다. 내게 대심형이 쓴 주련(柱聯) 한 쌍이 있다. ‘개질군언수기아(開帙群言守其雅), 무금육기위지청(撫琴六氣爲之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명련자봉왕(明璉子封王)

 

 

인조(仁祖) 갑자년(1624)에 귀성 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이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과 함께 반()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왔다가 군사가 패하자, 모두 달아나다가 사로잡혀 죽게 되었는데, 명련(明璉)의 두 아들 윤()()은 눈 위에 짚신을 거꾸로 신고, 도망하여 건주(建州)에 들어가 장군이 되었다. 그 뒤 13년에 청 태종(淸太宗)을 따라 동쪽으로 왔다 한다. 이는 당시의 전설(傳說)에서 나왔으므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새로 간행된 태종실록(太宗實錄)을 보니, 과연,

 

조선(朝鮮) 장수 한명련이 그 부하에게 피살당하였으므로, 그 아들 윤()과 의()가 와서 항복하기에, ()를 봉하여 이친왕(怡親王)을 삼았다.”

는 기록이 있으니, 이는 아마 난()이 이름을 의()라 고친 듯싶다. 소대총서(昭代叢書 () 장조(張潮) )중 시호록(諡號錄)에 의당 그의 이름이 실려 있을 테니, 뒷날에 상고해 보기로 하겠다. 아아, 슬프도다. 우리 조선이 나라 세운 지 4백 년 동안 역적으로 죽음을 당한 자가 없지 않았으나, 이 두 역적처럼 군사를 일으켜 대궐 안을 범한 자는 없었던 것이거늘, 그 흉특한 놈이 뒤에 투항하여 장수가 되자, 군사를 빌려서 멋대로 날뜀이 이에 이르렀을 뿐더러 당시 건주 일대는 망명(亡命)으로 모여드는 숲이 이룩되었으니, 평소부터 족히 변문(邊門)의 경비가 엄하지 못하였던 것과 압록강 연변 수어가 허술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고, 또 억센 이웃 나라가 얕보고 업신여기는데, 그 앞에서 일하는 장수의 성명조차 무엇인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인재와 용맹과 슬기 등이 나온 곳일까보냐. 이러고서도 한갓 헛된 말로서만 큰 대적을 꺾으려 하며, 한손으로 대의(大義)를 붙들려고 하니, 아아, 어려운 일이 아니겠느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고아마홍(古兒馬紅)

 

 

고아마홍이라는 자는 곧 의주(義州) 관노(官奴) 정명수(鄭命壽)이며, 강공렬(姜功烈)이라는 자는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이름이다. 그들은 모두 이름을 고치고 뒤에 귀화하였는데, 명수(命壽)는 가장 흉악하여 제 부모의 나라를 모욕함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이 분개를 이기지 못하고 명수를 찔러 죽이려 하던 나머지 그 원리(院吏) 강효원(姜孝元)과 의논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명수의 모든 간리(姦利)에 관한 일을 청인(淸人)에게 고발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도리어 글월 올린 자를 베고 정뇌경과 강효원도 사형에 처할 제, 명수로 하여금 형장을 감독하게 하여 극히 참혹하였다. 그 뒤 청인 역시 명수가 우리나라에 죄가 컸음을 깨닫고 참하였다. 강홍립은 광해군(光海君) 때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어서 심하(深河) 싸움 뒤에 항복하였더니,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그의 온 가족이 도륙되었다는 헛된 소문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도로 군사를 이끌고 평산(平山)까지 이르렀으므로,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홍립의 가족을 군문 앞에 내세웠다. 그의 숙부 진()이 홍립의 잘못을 꾸지람하매 홍립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청인도 역시 홍립의 거짓을 깨닫고, 강화(講和)한 뒤에 가버릴 제 홍립을 머무르게 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처리를 맡겼으나, 조정에서는 청인의 강함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였다. 홍립이 그의 양화도(楊花渡)에 있는 강정(江亭)에 몸을 붙였으나, 나라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서 방안을 나가지 않고, 다만 길게 한숨을 쉬는 소리만 밖으로 들렸다. 그 후 5,6년 뒤에 그 집 사람이 목매어 죽였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의보감(東醫寶鑑)

 

 

우리나라 서적(書籍)으로서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 극히 드물었고, 다만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이 성행(盛行)하였을 뿐이었는데 판본이 정묘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의술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토산 약품이 옳지 못하였으므로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태의(太醫) 허준(許浚)과 유의(儒醫) 정고옥(鄭古玉 고옥은 정작의 호) ()과 의관(醫官) 양예수(楊禮壽)김응택(金應澤)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국()을 차리고 이를 편찬할 제, 내부(內府)의 의방(醫方) 5백 권을 내어 고증의 자료로 삼아서 선조 병신(1596)에 시작하여 광해군 3년 경술(1610)에 이룩하였으니, 때는 곧 만력(萬曆) 38년이다. 그 간본(刊本) 서문(序文)의 문장이 제법 소창(疎暢)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 동의보감은 곧 옛 명() 때 조선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엮은 것이다. 상고하건대 조선 사람들은 애초부터 문자(文字)를 알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는 또 그 중의 세족(世族)이어서 만력 때 봉( 조선 때의 문학가. 자는 미숙(美叔))( 자는 공언(功彦))( 자는 단보(端甫)) 등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날렸으며, 그의 누이 동생 경번(景樊 허초희(許楚姬)의 자)의 재명(才名)이 더욱 그의 오빠들보다 뛰어났으니, 구변(九邊)의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걸출한 자였던 것이다.  동의(東醫)’라는 말은 무엇일까. 그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의원에서도 동()이라 일컫는 것이었다. 옛날 이동원(李東垣 ()의 의학자 이고(李杲). 동원은 호) 십서(十書)를 지었고, 북의(北醫)로서 강()()에 행세하였으며, 주단계(朱丹溪 ()의 의학자 주진형(朱震亨). 단계는 호) 심법(心法)을 지었고, 남의(南醫)로서 관중(關中)에 나타났더니, 이제 양평군이 비록 궁벽한 외국에 태어났으나, 능히 아름다운 책을 지어서 중국에 유행되었으니, 대체로 말이란 족히 전할 것을 기약하는 것이지, 어떤 지역으로써 한계를 지을 것은 아니리라.  보감(寶鑑)’이란 무엇을 이름일까. 햇빛이 새어나오고 잠든 안개가 풀리듯이 살을 나누며, 갈피를 쪼개어,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들추게 하면 요연히 거울처럼 광명함을 말함이었다. 옛날 나익지(羅益之 ()의 의학자 나천익(羅天益). 익지는 자)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공신(龔信 미상)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지었을 때 모두 ()’이라 이름하였으나, 지나치게 과장하였다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적이 논하건대 사람에게는 오직 오장(五藏)이 있을 뿐이요, 병은 칠정(七情)에 그치는 것이다. 그 사이 천품이 편벽되고, 온전하고, 점염(漸染)함이 얕고 깊음과, 증세의 통하고 막힘에 차이가 있어서 양후(兩候 1후는 5일간) 간의 맥박이 움직이면 부()()() 등의 세 부()가 있으므로, 가만히 살펴보면 마치 저 밭이랑처럼 한계가 있으니, 넘을 수도 없거니와 횃불처럼 밝아서 덮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대황(大黃 한약의 일종)이 체한 것을 내려가게 하는 줄만 알고서 속을 식히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허함을 돕는 줄만 알고, 독을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병이 나기 전에 다스리고 이미 이룩된 뒤에 약을 쓰지 않는 법이니, 병이 난 뒤에 다스림은 가장 하책(下策)임에도 다시금 용렬한 의원에게 맡긴다면 어찌 낫기를 바라리요. 심지어 사리(私利)를 품은 자는 애초에 병 없는 사람을 다스려 공적을 남기려 하고, 처음 이에 종사한 자는 병자를 이용하여 공부하려 함이 일쑤인즉, 역경(易經)중의 약을 쓰지 말라는 점사(占辭), 남쪽 사람은 항심(恒心)이 없다.’(논어에 나오는 구절)는 경계가 마치 이런 무리를 위하여 어떤 덮개를 떼버리는 듯싶었다. 옛날 편작(扁鵲 전국 때의 의학자)이 이르기를, ‘사람들은 병자가 많음을 걱정함에 비하여 의원은 병 보는 방도가 적음을 골치앓는다.’ 하였으나, ( 황제(黃帝)의 별칭. 헌원(軒轅))() 이후로 대대로 명의(名醫)가 있어서 이제 이르러서는 그 저술의 번다함이 거의 한우충동(汗牛充棟)할 만큼 적음을 걱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방문을 써서 맞고 안 맞는 것이 있으니, 어찌하여 옛 사람이 각기 본 바로 학설(學說)을 끼친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선택하는 데 정밀하지 못한 자는 설명이 상세하지 못하고, 하나에 집착된 자는 옳은 길을 해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남의 병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마음을 고쳐주지 않았다든지, 또는 남의 마음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뜻을 통하지 못한 까닭이리라 생각된다. 이제 이 책을 살펴 보면 첫째 내경(內景)을 논하였음은 그 근원을 따름이요, 다음에 외형(外形)을 논한 것은 그 끝을 나눔이었고, 다음에 잡병(雜病)을 논한 것은 그 증세를 분간함이었고, 다음에 탕약과 뜸질로써 마친 것은 그 방법을 정함이었다. 그 중에서 인용한 책으로 말한다면, 천원옥책(天元玉冊 저자 미상)으로부터 의방집략(醫方集略 저자 미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80여 종이나 되는데, 모두가 우리 중국의 책들이었고, 동국(東國)의 책은 불과 3종뿐이었다. 옛 사람이 이룩한 방법을 따르면서 능히 신통하게 밝혀낸 것이 있어서 우주(宇宙) 사이의 결함을 보충하고 4( 바람)에 양기(陽氣)를 베풀었었다. 이 책은 이미 황제께 올려서 국수(國手)임이 인정되었으나, 다만 여태까지 비각(秘閣)에 간직되어 세상 사람이 엿보기 어려웠었다. 얼마 전에 차사(鹺使 염운사(鹽運使)의 별칭) 산좌(山左) 왕공(王公 미상)이 월( 광동광서운남귀주의 총칭)을 맡았을 제, 시속의 의원이 그릇됨이 많음을 딱하게 여겨 사람을 수도에 보내어 이를 베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한 채 곧 그곳을 떠나 버리고, 순덕(順德)에 살고 있는 명경(明經)좌군(左君)한문(翰文)은 나의 총각 때부터의 친구였는데, 개연(慨然)히 이를 간행하여 널리 전하기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3백 민()이 넘는 돈을 소비하였으나 조금도 아끼는 빛이 없었다. 대체로 그 마음은 병든 생명을 건지고 물건을 이롭게 할 마음이었고, 그 일인즉 음양(陰陽)을 조화하는 일인 동시에 천하의 보배는 의당 천하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니, 좌군의 어진 마음이 크도다. 판각이 끝난 뒤에 나에게 서()를 부탁하므로 드디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그 머리에 쓴다. 건륭(乾隆) 31년 병술(1766) 난추(蘭秋 7월의 별칭) 상완(上浣 상순)에 원임 호남소양예릉흥녕계양현사 충경오임신계유병자사과 호광향시동고관(原任湖南邵陽醴陵興寧桂陽縣事充庚午壬申癸酉丙子四科湖廣鄕試同考官)번우(番禺 지명) 능어(凌魚 ()의 학자. 자는 서파(西波))는 쓰노라.”

하였다. 내 집에는 좋은 의서가 없어서 매양 병이 나면 사방 이웃에 돌아다니며 빌려 보았더니, 이제 이 책을 보고서 몹시 사 갖고자 하였으나, 은 닷 냥을 낼 길이 없어서 섭섭함을 이기지 못한 채 돌아올 제, 다만 능어가 쓴 서문(序文)만을 베껴서 뒷날의 참고에 자()하려 한다.

 

 

[D-001]칠정(七情) : ()()()()()()().

[D-002]() : 황제의 신하 기백(岐伯). 황제와 함께 중국 의학계의 시조.

[D-003]내경(內景) : 내과(內科) 계통. 원래에는 도가(道家)의 용어(用語).

[D-004]명경(明經) : 국가 고시에 경서(經書)로써 합격한 자. ()에서는 공생(貢生)을 명경이라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심의(深衣)

 

 

우리나라의 심의(深衣)는 반드시 삼베로 만들고 무명으로 하지 않으니 이는 그릇된 일이다. 삼으로 짠 것은 의당 마포(麻布)라 하여야 하며, 모시로 짰다면 저포(苧布), 무명으로 짰다면 면포(綿布)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방언(方言)에 포()를 베[] 보외(補外)의 번역이다. 라 하므로 포() 자를 보포(保布)라고 읽는다. 다만 삼만을 짜는 이를 오로지 베라 한다. 그리하여 마포(麻布) 저자는 베전이요, 저포(苧布) 저자는 모시전이라 부르나, 다만 면포(綿布)에 대해서 구별 지을 것이 없었다. 방언에 면화(綿花)를 목화(木花)라 하므로 무명베를 목()이라 하나, 그들은 면포가 곧 대포(大布)임을 알지 못하므로 면포를 대포라 부르지 않고도 그 저자를 백목전(白木廛)이라 하였으며, 심지어 두 가지의 세금(稅金)을 대포에 부과하면서 전세목(田稅木)대동목(大同木)이라 하고, 대포는 곧 이와 별개의 물건으로 간주하여 전세목이니 대동목이니 하는 이름이 관가의 문부(文簿)에까지 올려져 온 나라가 쓰고 있었다. 어째서 대포라 부르느냐 하면, 옛날 순수하게 흰 옷에는 포백(布帛)의 무늬가 알맞는다 하였으니 무명은 모든 직물(織物)에서의 바탕인 동시에 오채(五采)의 찬란한 빛을 꾸미기는 어려우나, 그 바탕이 검소하고 빛이 순수하여 무늬 아닌 무늬가 있으므로,

 

대포(大布)의 옷(좌전(左傳)에 나오는 구절).”

이라는 말이 곧 이를 이름이었고, ,

 

완전하고도 아무런 허비가 없음이 선의(善衣)의 감이다(출처 미상).”

하였으니, 완전하고도 허비가 없다는 말은 무명베를 이름이었고, 대포의 옷이란 곧 심의(深衣)를 이름이다. 중국의 삼승(三升) 베는 양털에다 무명을 섞어 함께 베를 짠 것이었는데, 우리나라 장사치들이 삼승을 도매로 떼어다 파는 곳을 유독 청포전(靑布廛)’이라 하고, 아울러 대포를 팔면서 그를 큰 베[大保]’라 하고, 또는 문삼승(門三升)’이라 하여 값을 배로 받았으나, 백목전에서 이를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이름과 실지를 규명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중국의 상복(喪服)은 모두 면포로 한다. 이번에 길에서 만났던 상복을 입은 사람들은 마포 옷이란 하나도 볼 수 없었고, 두건도 역시 면포로 하였다. 때가 바로 한여름 철이라 땀과 기름이 흠뻑 젖어서 두건이 저절로 꺾여졌다. 내가 입고 있는 면포 겹옷을 중국 사람들은 뒤적거려 보고는 올 짜인 것이 매우 정밀함을 진지하게 여겨, 감으로 사기를 요구하는 이가 많았다. 나는,

 

중국엔 어째서 가는 베가 없는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모두 탄식하면서,

 

중국은 대체로 여러 가지의 비단을 입어서 대포(大布)로 옷을 지어 입기를 부끄러워하고 보니, 옛날 성인이 만든 원대하고도 경제적인 제도를 버려 두고 연구도 않은 지가 오래랍니다. 그러므로 비록 포대나 전대를 만들 때는 베를 짜기는 하나, 굵고 거칠어서 이것으로는 선의(善衣)의 감이 될 수 없답니다.”

한다. 나는,

 

선의란 어떤 옷인지요.”

하였더니, 그는,

 

선의란 좋은 옷입니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들 상상품 좋은 옷 한 벌씩은 가지고 있어 무늬로써 귀천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심의란 것은 귀천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고, 길흉의 구별도 없이 꼭 같은 복장입니다. 이를 대포로써 만드는 것은 그 검소함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좋은 옷감이 아니겠습니까.”

한다. 우리나라 유가(儒家)에서는 더욱이 심의를 중난히 여겨 그림을 그린다, 말로 설명을 한다 하여 서로 부산하게 다투기도 한다. 소매와 깃 따위를 두고 내가 옳다거니, 네가 그르다거니, 한 치 한 푼을 서로 고집하고 있지마는 면포와 마포 중에서 무엇이 심의의 옷감인지도 모르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닐까보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나약국서(羅約國書)

 

 

 

건륭(乾隆) 44(1779) 12월에 나약국(羅約國) 가달(假㺚)은 황제 폐하(陛下)께 글을 올립니다. ()이 듣자오니 삼황(三皇)이 처음 나오고 오제(五帝)가 뒤를 이어 하늘을 대신하여 억조 창생 위에 군림할 제 하필, ‘중국에만 임금이 있으라.’ 하고, ‘오랑캐에게는 임금이 없으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넓고 커서 한 사람이 혼자 주재할 바 못 될 것이요, 우주는 광대하여 한 사람의 독차지할 바가 못 됩니다. 천하는 곧 천하 인민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나약 지방에 있어 도시들이란 불과 몇 백 리요, 강토는 3천 리를 넘지 못합니다마는 언제나 이를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로 말하자면 중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만승의 주인이 되어 도성들이 몇 천 리요, 강토가 몇 만 리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족하다는 욕심을 가지고 매양 남의 강토를 병탄할 뜻을 가지니, 하늘이 살기(殺氣)를 내면, 귀신이 울부짖는 법이요, 땅이 살기를 내면 용과 범이 달아나 숨는 법이요, 사람이 살기를 내면 천지가 뒤집혀지는 법입니다. ()와 순()은 도덕이 있으매 온 세상이 조공을 바쳤고, ()와 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니, 만국이 손을 잡고 섬기게 되었다 합니다. 또 진 시황(秦始皇)은 자주 흉노(匈奴)를 정벌하다가 그의 몸뚱이가 썩은 고기가 되었고, 거란은 중원 땅을 한 번 유린하다가 몸이 소금에 절인 제파(帝豝)가 되고 말았다 합니다. 덕은 쌓은즉 저와 같고, 악의 결과는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길흉과 화복은 뿌리와 가지가 서로 맞닿는 것과 같고, 그 믿음직함은 춘동이 제때에 닥침과 같고, 그 힘은 뇌성벽력과 같으니, 어찌 조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치에 순응하는 자라 해서 반드시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며, 역행하는 자라 해서 반드시 멸망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치가 상도에 벗어남이요, 천도가 뒤틀려 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홀로 무슨 마음으로 순천부(順天府 북경의 별칭)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을 것입니까. 비록 폐하가 친히 육사(六師 친위군(親衛軍))의 정예를 인솔하고 초원과 사막 지대에 왕래하다가 우리를 하란산(賀蘭山 감숙성에 있다) 기슭에서 행여 만난다 하더라도, 채찍을 들고 서로 문안을 하고, 말 위에서 천하를 의논할 것입니다. 이때에는 바로 구름 사막 만리 길에 범과 용이 자웅을 겨루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전쟁이란 두 편이 다 이기는 법이 있을 수 없고, 복이란 쌍방에 한꺼번에 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전쟁을 중지하여, 생령들의 질고를 풀고 군사들의 가난을 늦추어 줌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마땅히 해마다 조공을 바쳐서 대대로 신하라 일컫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약국에도 문학으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같은 성현의 경술(經術)이 있고, 무략으로는 강태공(姜太公 명망(命望). 태공은 시호)과 손자(孫子 손무(孫武)) 같은 이의 육도(六韜 여망 저)》ㆍ《삼략(三略 황석공이 지은 병서(兵書))이 있는 이상 어찌 중국에 머리를 숙여 많은 양보를 하여야겠습니까.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익히 살펴주옵소서. 이에 대신 다리마(多里馬)를 보내어 폐하께서 계신 대궐에 배알하여 삼가 충심을 보이옵는 바,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덮고 감격한 눈물은 땅에 사무치옵니다.”

조 역관(趙譯官) 달동(達東)이 별단(別單)을 꾸미려다가 이 글을 서반(序班)으로부터 얻어 밤에 나에게 보였다. 서장관(書狀官) 역시 와서 이르기를,

 

아까 나약국서를 보셨는지요. 세상일이 크게 야단났습니다.”

한다. 나는,

 

세상일이란 원래 그런 것이오. 그러나 세상에는 애초에 나약국이란 없는 것인가 하오. 내가 20년 전에 일찍이 별단 중에서 이 같은 문서를 보았는데, 역시 황극달자(黃極㺚子)는 부질없이 쓴다라고 했습니다. 선배들과 함께 둘러앉아 한 번 읽은 뒤 매우 북방을 우려한 적이 있었죠. 더러는, ()의 정권을 대신할 자는 황극이라고 말하는 이도 없지 않았죠. 이제 이 글을 본즉, 가감 없이 그것과 비슷하오. 서반배들이라는 게 모두 강남(江南) 빈민들의 자식으로서 객지에서 몸 붙일 곳이 없어 이 따위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날조하여 우리 역관들에게 공비(公費) 돈을 받고 속여 파는 것이오. 별단에는 비록 보고 들은 사건을 싣게 하긴 하지만 대체로 모두 길목에서 들은 이야기들이었으니, 어째서 이 신빙할 수 없는 허탄한 소리를 사행 때마다 돈을 주고 사서는 막중한 어전에 여쭙는 자료로 삼는단 말이요. 내 의견으로는 별단 중에 적당하게 짐작하여 취사를 함이 좋겠어요.”

하였더니, 서장관 역시 꼭 그러하여야 할 것을 깊이 납득하였다. 그러나 조 역관은 이에 대하여 퍽 변명하려고 애쓰는 모양이기에, 나는 그에게,

 

그대는 나이 젊어 사리를 잘 모르네.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들은 건성으로 춘추(春秋)만 떠들어서 왕()을 높이며 오랑캐를 물리치려는 공담(空談)을 해 온 지 1백여 년에 중국 인사들인들 어찌 이런 마음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연갱요(年羹堯)사사정(査嗣庭)증정(曾靜) 같은 따위들이 상서스러운 일을 보고는 재앙이라 하고, 좋은 정치 실적을 악정이라고 무함하여 온 세상을 선동하고, 문자로 베껴 전파시켜 마치 위급한 형세가 조석에 박두한 듯이 한 것이지. 그리하면 우리 역관들은 허탄한 소리에 속아 넘어가 저절로 바보 놀음을 하네. 그리고 삼사(三使)는 오랫동안을 깊숙한 여관 속에 앉아 소일할 꺼리가 없어서 울적할 즈음에, 걸핏하면 자네들을 불러 새로운 소문을 물을 때에 길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로써 답답한 가슴을 풀곤 했지. 그러면 사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수염을 추어올리고 부채를 치면서, 오랑캐놈들이 백년 운수가 있으랴 하고는 바로 강개하게 강 복판에서 노()를 치던(조적(祖狄)의 고사)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일세. 더구나 먼저 보내는 군관이 밤낮 없이 질주를 할 때는 절반은 말 등 위에서 잠과 꿈으로 지내는 형편이니, 혹시 문서를 저들 국경 안에서 떨어뜨린다면 닥쳐올 재변을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 서장관은 크게 한바탕 웃었으나 일변 놀라면서 조 역관에게 무어라 경계(警戒)하는 모양이다. 그 뒤 추리고 남긴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D-001]제파(帝豝) : ()의 임금 야율덕광(耶律德光)이 죽었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시체의 배에 소금을 잔뜩 넣은 뒤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제파라 불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불서(佛書)

 

 

불교의 서적이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불과 42()으로서 그 뒤 불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태반이 위()() 시대의 문인들의 손으로 지어낸 것이다. 이런 사업이 요진(姚秦) 때 성행하였고, 소량(蕭梁) 때 극성하였으며 당()에 이르러서 완전히 갖추어져 거의 유가(儒家)의 전적들과 상당하였다. 대체로 상고 이래로 이미 이런 학문이 있어서 황제(黃帝)광성자(廣成子 황제(黃帝)의 스승)남곽자기(南郭子綦 남화경에 나오는 도사(道士))묘고야산인(藐姑射山人남화경에 나오는 도사(道士))허유(許由)소부(巢父)변수(卞隨)무광(務光)장저(長沮 논어에 나오는 은사)걸익(桀溺논어에 나오는 은사) 등은 일찍이 그들을 가리켜 부처라 한 자도 없거니와 또 그들은 일찍이 아무런 저서가 없었으므로 후세에 와서 불교가 외국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만 알고 중국에서 먼저 이런 도가 있었다는 일을 똑똑히 모르고들 있다. 공자(孔子)는 이르기를,

 

우리 도는 하나로 꿰뚫는 거야(논어에 나오는 구절).”

하였고, 노자(老子),

 

성인은 하나를 껴안는 거야(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구절).”

하였는데, 불씨(佛氏),

 

만 가지의 법()이 하나로 귀착되는 거요(불경(佛經)에 나오는 구절).”

하였으니, 그의 이른바 만 가지의 법이 하나로 귀착한다는 말은 곧 우리 유가(儒家)의 이치는 하나이나 만 가지로 달라진다는 말과 그 지닌 뜻은 미상불 비슷한 것이었다. 세상에 떠도는 불교 서적이란 모두가 남화경(南華經)의 주석이요, 남화경은 또 도덕경(道德經)의 풀이에 불과한 것이다. 저들은 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생각들이 다 탁월하였으니, 어찌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이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칙이 되는 줄을 몰랐으리요. 불행히 그들은 망하는 세상에 태어나서,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아 있는데 눈을 찌푸리며 상심을 하다가 본즉, 차라리 태고(太古)의 정치를 연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른바 성인을 없애고 슬기를 버리고 도량형기(度量衡器)를 파괴해야 된다(남화경에 나오는 구절)는 따위의 이야기는 모두 세태와 풍속에 분개해서 나온 말들이다. 3천여 년 이래로 이런 책을 배척한 자가 한 사람뿐만이 아니언마는 이 책들은 필경 보존되어 있고, 또 이런 책이 있다 해서 천하가 조용하고 어지러운 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거늘 저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 창려는 자)는 맹자(孟子)가 일찍이 양자(楊子 양주(楊朱). 극단적인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와 묵자(墨子 묵적(墨翟). 사회주의(社會主義)의 선구자)를 배척함을 희미하게나마 보고 역시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교조로 내세웠다. 맹자의 재능이 다만 양자묵자만을 배척함으로써 아성(亞聖 맹가(孟軻)의 별칭. 공자 다음이라는 뜻)이 된 것도 아니언마는, 한창려는 곧 그의 책을 불사름으로써 맹자의 뒤를 계승하려고 하였으니, 한창려는 과연 그 책을 불사를 능력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D-001]허유(許由)소부(巢父) : 허유와 소부는 철인(哲人)으로 요()가 그들에게 천하를 양보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D-002]변수(卞隨)무광(務光) : ()이 변수와 무광에게 천하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받지 않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인이라 부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명마패(皇明馬牌)

 

 

상서원(尙瑞院)에 보관되어 있는 명()의 마패(馬牌 황제가 친히 발급하는 통행증)는 짙은 누런 빛 무늬 없는 비단에 오목(烏木)을 축()으로 한 두루마리다. 길이는 두 자 네 치요, 넓이는 다섯 치 남짓하고, 가장자리에는 이룡(螭龍)을 수놓은 복판에 안장을 갖춘 붉은 말 한 필이 놓여 있다. 황제의 지시문(指示文)을 썼는데,

 

공무로 가는 인원이 역을 통과하는 데는 이걸 나누어 가지고 가서 맞추어 본 다음에야 마필의 제공을 허락한다. 만일 이것을 맞추지 않고 함부로 역말을 준다든가, 법대로 집행하지 않고 정실에 따라 수응한 자는 함께 중죄로 다스릴 것이니, 마땅히 이 명령을 지킬지어다. 홍무(洪武) 23(1390) 월 일.”

이라 하였다. 글자는 모두 검정 실로 수를 놓았고, 연호(年號) 위에는 옥새(玉璽)를 찍었다. 그 새문(璽文)에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 하였다. 그리고 왼편에는 통자칠십호(通字七十號)’라고 가는 글씨로 썼으며, 아래쪽 연폭(聯幅)에는 작은 옥새의 절반을 찍었다. 또 붉은 말 한 필을 그린 축()에는 통자육십칠호(通字六十七號)’라 하였고, 푸른 말 한 필을 그린 축은 통자육십팔호(通字六十八號)’였고, 또 붉은 말 두 필을 그린 축은 달자삼십호(達字三十號)’라 쓰여 있다. 대체로 홍무(洪武) 경오년(1390)에 군산도(群山島)를 거쳐서 배가 출발하여 금릉(金陵)으로 조회할 때에 내린 마패의 네 종류이다. 또 붉은 말 두 필을 그린 축은 만력(萬曆) 27(1599) 월 일 달자십육호(達字十六號)’였고, 또 붉은 말 두 필을 그린 축은 달자십삼호(達字十三號)’로서 그 지시문과 연호는 검정 실로 수를 놓았고, 네 가장자리는 이룡(螭龍)을 수놓고 그 위에 옥새를 찍은 것이 모두 홍무의 제도와 같았다. 그리고 왼편에 가늘게 쓴 통() 자와 달() 자 등의 몇몇 자호(字號)는 모두 수를 놓지 않았음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 임시로 몇째 자호라고 써서 옥새의 반절을 찍어서 내준 것이리라. 그리고 홍무통자육십칠호의 푸른 말 이하의 여덟 필 말은 모두 안장과 굴레를 그리지 않았으니, 대체로 만력 기해년(1599)에 요양(遼陽) 길이 막히고 보니, 가도(椵島)로부터 등주(登州)에 이르러 하륙하여 북경으로 들어갈 때 하사한 마패의 두 종류이다. 마패 축은 모두 붉게 칠한 가죽통에 넣어서 주석 장식을 붙이고 또 녹피(鹿皮) 주머니에 넣었다. 다만 당시의 사절이 이를 돌리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혹시 명()의 구례(舊例)로서 외국 사신이 수로(水路)로 내왕할 때만 이를 위하여 마패를 나누어 주었는지. 이번 열하 행차에도 역시 말을 내 주라는 황제의 지시가 있었은즉, 응당 이런 마패를 내주었을 듯한데 도중에 서로 어긋나서 그런지 증명을 맞추어 보는 절차를 보지 못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합밀왕(哈密王)

 

 

동직문(東直門)을 나서서 열하를 향하여 몇 리를 못 가서 북경의 교군 30여 명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발을 맞추어 간다. 그리고 회회국(回回國) 사람 십여 명이 뒤를 따르는데 얼굴이 사납고, 코가 크며, 눈은 푸르고, 머리와 수염이 억세게 났다. 그 중 두 사람은 눈매가 맑고 고우며, 복색이 가장 화려하였다. 붉은 전립을 썼는데, 좌우 가장자리 끝을 말아 붙이고 앞뒤 가장자리는 뾰족하여 마치 아직 피지 않은 연 잎사귀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볼 때는 경망스러워 보기 우스웠다. 마두(馬頭)들은 추측만 하고 그를 회회국 태자(太子)라고 불렀다. 앞섰다 뒤섰다 작반을 해서 간 지 사나흘 동안 때로는 말 위에서 담배도 서로 나누어 피우곤 했는데, 그 행동이 꽤 공순하였다. 하루는 한낮이 되어 너무 덥기에 말에서 내려 도중 삿자리 가게 아래서 쉬고 있는데 두 사람이 뒤따라 와서 역시 말에서 내려 마주 대면하여 의자에 앉았다. 나에게 묻기를,

 

만주 말을 하시유, 몽고 말을 하시유.”

하기에, 나는 농으로,

 

양반(兩班)이 어떻게 만주 말이고 몽고 말을 알겠어.”

하며 대답하고는 곧 글로 써서 회회국 내력을 물었더니 한 사람은 머리를 흔들면서 다른 편을 쳐다보는 것이 아주 글은 까막눈인 것 같고, 한 사람은 흔연히 붓을 한참 매만지더니 겨우 한 글자를 쓰는데, 젖먹은 힘을 다 내는 듯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다. 그는 스스로 합밀왕이라 하고 같이 온 사람을 가리키면서 역시 12()의 번왕(蕃王)이라 했다. 그리고 대답하는 말이 전연 문리(文理)에 닿지 않아서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메고 온 물건들은 무엇인고.”

하고 물었더니,

 

모두 황제께 진상하는 옥그릇들이요.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자명종(自鳴鍾)입니다.”

한다. 번왕이라 일컬은 사람이 주머니를 풀더니 차()를 꺼내어, 따르는 사람을 시켜 끓여 서로 나누어 마시면서 나에게도 한 잔 권하는 폼이 아마 색다른 차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그 향내와 빛깔을 보아 역시 북경 거리에서 보통 파는 차나 다름없었다. 화로라든가 찻잔들은 모두 붉게 칠한 가죽으로 집을 만들어서 주렁주렁 허리띠에 달린 장식품같이 허리에 차고 등에 짊어졌는데, 보니 극히 간편해 보인다. 그는 차를 마신 뒤 먼저 일어나 채찍을 한 번 들어 치면서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또 강가에서 만나서 중국말로,

 

합밀왕의 나이는 얼마시유.”

하고 물었더니 그는 역시 중국말로,

 

서른여섯이라우.”

대답한다. 그리고 번왕은 더욱이 중국말이 능하나 다시금 손바닥을 두 번 쥐었다 펴고 또 한 손을 펴서 스물다섯 살이란 것을 표시했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회흘(回紇)의 일명은 회골(回鶻)이다.”

하였고, 원사(元史)중에는 외올얼부[畏兀兒部]가 있는데 외올(畏兀)은 곧 회골이었고 회회는 또 회골의 변한 소리다.  고려사(高麗史),

 

()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

하였으니, 외오얼은 또 외올(畏兀)의 변한 말이다. 합밀은 한() 때에는 이오(伊吾)에 속한 땅이요, ()에 이르러서는 이주(伊州)에 속한 땅이다. 고려 말기에 설손(偰遜)이란 이가 곧 회골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다가 공주(公主)를 따라 동으로 와서 이내 고려에 벼슬을 하였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한 설장수(偰長壽)는 곧 설손의 손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서화담집(徐花潭集)

 

 

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경덕(敬德)이다. 은 수학(數學)이 강절(康節 ()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시호)과 비슷하고, ()와 문() 몇 편이 있어 그다지 볼 것이 없으나 사고전서(四庫全書) 지금 황제가 지은 것이다. 중에 편입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장흥루판(長興鏤板)

 

 

오늘의 오사란(烏絲欄 책을 베끼기 위해 줄을 친 종이)은 곧 옛날의 편죽(編竹)이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두 대쪽에다가 칠로 쓰고 가죽끈으로 엮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간책(簡冊)이다. 그 모양은 오늘의 오사란과 같았다. 이는 곧,

 

공자가 역경(易經)을 읽는데,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

는 기록이 그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하동(河東)으로 갈 때 책 다섯 상자를 잃어버리고 다행히 장안세(張安世 ()의 유신(儒臣))가 외는 것을 힘입어 이를 기록하였다는 말이 전함을 보아서 당시에 각판(刻版)이 없었음을 알 것이요, 후세에 판을 처음으로 새기기는 후당(後唐)의 명종(明宗) 때다. 명종은 오랑캐 지방의 사람으로 글이라고는 알지 못했으나 구경(九經)을 편각으로 새기기는 역시 장흥(長興 후한 명종의 연호) 연간의 일이다. 그 공로야말로 홍도(鴻都 () 때 도서를 간직한 곳)와 석경(石經 () 때 태학(太學)에 경서를 새겨 세운 비석)보다 적다고는 못할 것이다. 명종이 당시의 사대부들이 길한 예와 흉한 예로서 죽은 사람끼리 혼인시키는 것과 복상 중에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가 있음을 보고 탄식하기를,

 

선비가 효도와 공경을 중하게 여김은 그것으로써 풍속을 돈독하게 함이거늘, 이제 아무런 전쟁도 없는 터에 복상 중에 있는 이를 관리로 기용할 수야 있을 것인가. 또 혼인은 길한 예례인데 어찌 죽은 사람에게 이것을 쓸 것인가.”

하고는, 곧 유악(劉岳)에게 명하여 문학에 밝고 고금의 역사에 정통한 선비들을 뽑아서 이 예문을 정리하게 하였으나, 태상박사(太常博士) 단옹(段顒)과 전민(田敏) 등은 모두 야비한 자로서 이 책을 다시 정리한다는 것이 당시의 각 사사 가정에서 내려오는 습속들을 참고하였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취진판(聚珍板 사고전서(四庫全書)판 글자의 별칭)으로 내려오는 이 각본은 호부 시랑(戶部侍郞) 김간(金簡)이 감독 간행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주한(周翰)주앙(朱昻)

 

 

사람이 젊을 적에는 전정(前程)이 멀고 보니 자기는 늙을 날이 없을 듯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노인을 업신여기는 실수를 가끔 범한다. 이것은 비단 철없는 악소년의 경박한 짓일 뿐 아니라 대개는 앞날의 복도 받지 못하는 것이니, 불가불 조심해야 할 것이다. 민 찬성(閔贊成 찬성은 민형남의 벼슬) 형남(馨男)은 나이 칠십이 넘어서 손수 과실 나무 접을 붙이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여러 젊은 명관(名官)들이 이를 웃으면서,

 

귀공은 아직도 백 년 계획을 하시는 거요.”

할 때에, 그는,

 

바로 그대들을 위하여 선물로 남길 것이네.”

하였다. 그 뒤 민공(閔公)은 아흔네 살이 되어 여러 명관들의 제삿날에 항상 손수 과실을 따서 부조하였다.

옛날 양대년(楊大年 ()의 양억(楊億). 대년은 자)이 약관(弱冠)일 적에 주한(周翰)과 주앙(朱昻) 두 사람과 함께 한림원(翰林院)에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었었다. 매사를 의논할 때마다 양대년은 그들을 업신여기어,

 

두 노인의 생각엔 어떻습니까.”

라고 하면, 주한은 매우 불쾌하여,

 

그대는 늙은이를 그리 깔보지 마소. 필경은 이 백발을 남겨 그대에게 꼭 선사할 것이네.”

라고 하였다. 주앙이 있다가,

 

백발을 남겨서 그를 주지 마오. 다른 사람이 또 그를 깔보는 것을 못하도록 해야죠.”

하였다. 그 뒤 양대년은 과연 나이 오십도 못 살았다.

열하태학(太學)에는 늙은 학구(學究)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곧 왕혹정(王鵠汀)이라 일컬었다. 그는 민가(民家)의 어린 아이 호삼다(胡三多)에게 글을 가르쳤다. 삼다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또 만주 사람으로 왕라한(王羅漢)이란 자가 있었는데, 나이 바로 일흔세 살이어서 삼다에게 비하면 한 갑자가 더한 무자생(1708)이다. 혹정으로부터 강의(講義)를 받는데 매일 맑은 새벽이면 삼다와 함께 책을 끼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발걸음을 맞추어 혹정을 뵙는다. 혹정이 혹시 이야기 때문에 틈이 없을 때는 노인은 즉시 몸을 돌려 동자인 삼다에게 고개를 숙이고 주저하지 않고 강의를 한 차례 받고자 가곤 한다. 혹정이 말하기를,

 

저 늙은이는 손자가 다섯, 증손이 둘이나 있는데 날마다 몸소 와서 강의를 듣고서는 돌아가 여러 손자들에게 되돌려 가르친답니다. 그의 근실한 태도가 이같이 놀랍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렇듯 늙은이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린이는 업신여김이 없었으니, 중국의 예의가 장하다는 것은 전날에 들은 바 있으나 이런 변방의 풍속이 이렇게 순박한 것을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호삼다가 붉은 종이 첩지에 은 두 냥을 가지고 와서 그 첩지를 나에게 보이는데 거기에 쓰기를,

 

삼가 동학(同學)이자 동경(同庚)의 아우 호()에게 부탁하여 조선 박 공자(朴公子)에게 청심환 한두 개를 전편으로 청하옵니다. 삼가 변변찮은 예폐를 갖추어 대금으로 삼으니, 물건은 하찮으나 정은 깊고 의리는 가이 없이 온 세계에 무거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돈은 돌려 보내고 환약 두 알을 찿아 주었다. 그의 이른바 동학이자 동경의 아우 호라 함은 곧 호삼다를 가리킨 말이니 더욱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그러나 남달리 스스로 혼후하고 원만한 태도는 주앙이 양대년에게 퍼부은 독설과는 매우 달랐으므로 여기에 함께 기록하여 젊은이들이 늙은이를 업신여기는 데 경계로 삼을까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무열하(武列河)

 

 

역도원(酈道元 후위(後魏) 때의 지리학자) 수경주(水經注)를 보면,

 

유수(濡水)는 동남으로 흐르는데 무열수(武列水)가 거기에서 합한다.”

고 하였다. 유수는 오늘의 난하(灤河), 무열수는 오늘의 열하이다. 열하의 이름은 수경(水經 ()의 상흠(桑欽) )에 나타나지 않았은즉, 아마도 무열의 변한 음인 듯싶다. 그 근원은 세 군데에 있으니 하나는 무욱리하(武郁利河)에서 나왔고, 또 하나는 석파이대(石巴伊臺)에서 나왔으며, 또 하나는 탕천(湯泉)에서 나와 한 곳에 모여서 열하가 되어 산장(山莊)을 안고 남쪽으로 흘러 난하에 든다고 한다. 우리 사행이 줄달음질로 열하에 들어왔을 때 더러는 이 길로 바로 질러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사신은 담당 역관으로 하여금 미리 동쪽으로 돌아갈 노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역관은 통관(通官)에게 이를 알아보았더니 통관배는 깜짝 놀라면서,

 

산 뒤는 모두 달자(㺚子)들이 살고 있는 지방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껴안고 동북으로 돌아가는 길 어간에서 반드시 달자를 만나 겁탈당할 것입니다. 우리네 중국 사람도 이 길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 길로 질러 돌아가는 것이 비록 황제의 뜻이라 하더라도 사신은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이 길을 변경하도록 간청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다. 역관은 다시금 탐문할 자리가 없어 방금 답답해 하던 판에 마침 한 늙은 장경(章京 만주의 벼슬 이름)중에 일찍이 이 길을 가 본 자가 있어서 역력히 말을 할 수 있다 하기에 종이와 붓을 내주며 쓰게 하니, 한자를 전연 몰라 하늘만 빤히 쳐다보다가 땅을 그려 손으로 모래를 모아 산 모양을 만들고 다시금 검부러기를 잘라 배 건너는 시늉을 한 뒤에 붓을 잡고 빨리 글씨를 쓰는데 곧 만주 글자였다. 아무도 이를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깔깔 웃었다. 나는 마침 이 종이를 가져다가 왕혹정에게 보였더니, 혹정 역시 해득하지 못하여 왕나한(王羅漢)에게 보였다. 나한은,

 

제가 비록 이 글을 안다고 하나, 한자(漢字)로 번역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사는 이웃에 봉천(奉天) 사람으로서 손님으로 와 있는 이가 있는데, 그가 이런 것을 알 듯합니다. 내일 그에게 물어 상세히 적어서 갖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이내 종이를 건사하여 품속에 집어놓고 가버린다. 이튿날 그는 과연 자세히 적어 가지고 왔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열하로부터 30리를 가면 평대자(平臺子),  30리에는 홍석령(紅石嶺)이요,  25리에는 황토량(黃土梁)이요,  15리에는 서륙구(西六溝)에 이르는데, 여기가 곧 승덕부(承德府)의 경계로서 경계비(境界碑)가 있고, 여기서부터 20리를 가면 상운령(祥雲嶺)이 있고, 여기서 칠구(七溝)까지 30, 또 봉황령(鳳凰嶺)까지 30, 평천주(平泉州)까지 20, 대묘참(大廟站)까지 35리인데, 여기는 평천주의 경계이다. 여기서 양수구(楊水溝)까지 40, 쌍묘(雙廟)까지 25, 송가장(宋家庄)까지 30, 건창현(建昌縣)까지 30, 장호자(長鬍子)까지 30, 야불수(夜不收)까지 25, 공영자(公營子)까지 20, 담장구(擔杖溝)까지 30리인데, 여기가 곧 건창현의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또 행호자대(杏湖子臺)까지 10, 날마구(喇麻溝)까지 25, 대영자(大營子)까지 15, 조양현(朝陽縣)까지 25, 대능하(大凌河)까지 25리인데, 다시금 강을 건너서 망우영(蟒牛營)까지 25, 장가영(張家營)까지 30, 만자령(蠻子嶺)까지 25, 석인구(石人溝)까지 25리인데 여기가 조양현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육대변문(六臺邊門)까지 30, 최가구(崔家口)까지 30리요,  20리를 더 가서 의주성(義州城)을 지나쳐 대능하를 건너 금주위(錦州衛)로 나와 광녕로(廣寧路)를 거쳐 간다.”

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옹노후(雍奴侯)

 

 

어릴 때에 사기(史記)를 읽으면서,

 

()이 구준(冦恂 동한 때 28()의 하나)을 옹노후(雍奴侯)에 봉하였다.”

는 것을 보고서,

 

()로 봉할 이름이 그다지 없어서 하필 옹노후라 했을꼬.”

하며 적이 괴이하게 여겼었다. 이제 알고 보니 옹노는 곧 지명으로서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에 있었다. 내가 앞서 연()() 길을 들 제, 어양과 북평을 지났으나 오늘은 옹노가 어떤 이름으로 변했는지를 알 수 없겠고, 또 이 땅을 지나왔는지의 여부도 모를 일이다. 옹노는 또 소택에 관한 이름으로서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사면에 물이 둘러 있는 것을 ()’이라 하고, 모여서 흐르지 않는 것을 ()’라 한다.”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청하군(淸河郡)에 사제현(題縣)이 있었다.”

하였는데, 내가 막북(漠北)으로부터 고북구(古北口)로 돌아올 제, 밤에 청하현에서 잤으나 이제는 사제현이 어디 있는 줄을 알 길이 없었다. 요컨대 청하의 근방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안사고(顔師古 ()의 학자)의 주()에는,

 

()는 사()의 옛 글자이다.”

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순제묘(順濟廟)

 

 

동서양고(東西洋考 () 장섭(張燮)의 저)에 보면,

 

오대(五代) 때에 민( 복건성)의 도순검(都巡檢) 임원(林願)의 여섯째 딸은 진( 후진)의 천복(天福 고조 석경당(石敬瑭)의 연호) 8(943)에 태어났는데, 옹희(雍熙 () 태종의 연호) 4(987) 2 29일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으며, 그는 늘 붉은 옷을 입고 바다 위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사당에다 모셨더니, ()의 선화(宣和 () 휘종의 연호) 계묘년(1123)에 급사중(給事中) 노윤적(路允迪)이 사신이 되어 고려(高麗)로 가는 도중에, 바람을 만나서 이웃 배들은 모조리 빠졌으나 다만 노윤적이 탄 배만 귀신이 돛대에 내려서 아무 탈이 없었으므로, 사신을 마치고 돌아와 이 일을 조정에 아뢰었더니, 특별히 순제(順濟)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하였다. 요즘 천주당(天主堂)에 그려 붙인 붉은 옷을 입은 여상(女像)이 구름 바다 사이로 날아다니곤 한다. 이것이 곧 그 귀신인 것 같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해인사(海印寺)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해인사(海印寺)는 신라(新羅) 애장왕(哀藏王) 때에 창건되었다. 이름난 가람이나 큰 절들은 흔히 서로 이름을 답습하여 붙이는 수가 많지마는 이것만은 그렇지 않다. 중국 순천부(順天府 북경의 별칭) 서해자(西海子 동산 이름) 위에 옛날 해인사가 있었다. ()의 선덕(宣德) 연간에 다시금 중건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라 이름을 고쳤다가 뒤에 철폐하여 공장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해인사는 곧 천여 년 전에 이룩된 고찰인즉 북경 안에 있던 해인사는 응당 신라 때 창건된 절보다 뒤의 일일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사월팔일방등(四月八日放燈)

 

 

중국의 관등(觀燈)놀이는 대보름날 밤으로서 14일부터 16일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관등놀이는 반드시 사월 초파일에 하는데, 이날이 부처의 생신이라 하나 이는 아마 고려(高麗) 때의 풍속을 그대로 지킨 것만 같다. 석가여래(釋迦如來)는 애초 정반왕(淨飯王)의 태자(太子)로서 주소왕(周昭王) 24(26년인데 잘못된 것이다) 갑인 4 8일에 나서 42(44) 임신에 그의 나이 19세에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도를 닦다가 목왕(穆王) 3(4년인데 잘못된 것이다) 계미에 이르러 도를 이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오현비파(五絃琵琶)

 

 

양염부(楊廉夫 ()의 문학가 양유정(楊維楨). 염부는 자)의 원궁사(元宮詞)에 이르기를,

 

화림(화령(和寧))에 거둥하니 천막도 장할시고 / 北幸和林幄殿寬

고려의 시녀들이 첩여(여관(女官)의 이름)로 시중드네 / 句麗女侍婕妤官

임금이 좋아라고 명비곡을 부르실 제 / 君王自賦明妃曲

임께서 주신 비파 말 위에서 뜯는고녀 / 勅賜琵琶馬上彈

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를 상고해 보면,

 

악기 비파(琵琶)는 줄이 다섯이다(원전(原典)에는 현사(絃四)로 되어 있다).”

라 하였으니, 그러면 첩여(婕妤)들이 탔다는 비파는 반드시 다섯 줄일 것이다. 온광루잡지(韞光樓雜志)에 있다.

 

 

[D-001]명비곡(明妃曲) : ()의 궁녀(宮女)로 호() 땅으로 시집간 소군(昭君) 왕장(王嬙)을 두고 읊은 노래.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사자(獅子)

 

 

철경록(輟耕錄 () 도종의(陶宗儀) )에 이르기를,

 

나라에서 매양 여러 왕과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 것을 대취회(大聚會)라고 일렀다. 이날에는 여러 가지 짐승을 만세산(萬歲山)에 몰아 내어 범표범코끼리 따위를 일일이 따로 둔 뒤에 비로소 사자가 나온다. 사자는 몸뚱이가 짧고 작아서 흡사 가정에서 기르는 금빛 털을 지닌 삽살개처럼 생겼는데, 여러 짐승이 이를 보면 무서워 엎드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는 기가 질리는 까닭이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만세산에 가 보았으나 기르는 짐승들이란 볼 수 없었으니 이는 모두들 서산(西山 북평(北平)에 있다)과 원명원(圓明苑 북평에 있다) 등지에 둔 모양이다. 그리고 열하에서 본 이상한 새와 짐승들도 적지 않았으나 하나도 그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날마다 길들인 곰과 집에서 기르는 범 같은 것을 보았으나 모두 귀를 드리우고 눈을 감아 언제나 가련한 꼴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자를 못 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백년 이래로는 사자를 가져다 진상한 자가 없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강선루(降仙樓)

 

 

우리나라 성천(成川)에 있는 강선루(降仙樓)의 현판은 미만종(米萬鍾)중조(仲詔)가 쓴 글씨이다. 그의 필법은 미원장(米元章 미불(米芾). 원장은 자)에 못지않을 뿐더러 그가 괴석(怪石)을 좋아하는 성벽은 그보다 더하였다. 간재필기(艮齋筆記 우동(尤侗) 간재잡기(艮齋雜記)인 듯하다)에 보면,

 

방산(房山 하북성에 있다)에 돌이 있는데 길이가 세 자, 넓이가 일곱 자인데 빛깔이 푸르고 윤기가 났다. 중조가 이것을 작원(勺園 하북성에 있다)으로 끌어 올 것을 생각하고, 수레를 겹으로 말 10마리에 메우고 인부 1백 명이 끌어서 7일 만에 비로소 산으로부터 나와 또 5일 만에 양향(良鄕 하북성에 있다)에 닿았다. 길에서 힘이 다해서 움직이지 못한 채 밭두둑 사이에 눕혀 놓고, 이를 담장으로 둘러 싸고 초막으로 위를 덮었으며, 이에 대해 오간 편지까지 있어서 한때는 미담(美談)으로 전하였다.”

하였다. 내가 북경을 구경할 제 어떤 이가 민()에 살고 있던 사람 오문중(吳文仲)이 그렸는데, 미 태복(米太僕 미만종. 태복은 벼슬 이름)이 수집한 괴석 그림책 1권을 팔려고 왔었다. 하나는 영벽석(靈壁石)이요, 하나는 방대석(方臺石)이요, 하나는 영덕석(英德石)이요, 하나는 구지석(仇池石)이요, 하나는 연주석(兗州石)이었으며, 또 다른 이름들로서 비비석(非非石)청석(靑石)황석(黃石) 등이 있는데 모두 기기괴괴한 형상이었다. 그 책에다가 자신이 담원시(湛園詩)를 지어 붙인 것이 있었다.

 

주인의 마음씨는 본디부터 맑고맑아 / 主人心本湛

맑다는 이 뜻으로 후원 이름 지었세라 / 以湛名其園

때로는 여기 앉아 숨은 선비 되었다가 / 有時成坐隱

손님이 오실 제엔 술 항아리 열어 보네 / 爲客開靑罇

한가한 저 구름은 푸른 대 물가으로 / 閒雲歸竹渚

너울너울 지는 해는 솔문에 비치누나 / 落日映松門

높은 대에 다시 올라 묏 달을 맞이할 제 / 登臺候山月

밝은 빛 흘러흘러 친구 대해 말하는 듯 / 流輝如晤言

만종(萬鍾)이 벼슬살이로 사방에 다닐 때도 오직 괴석만을 쌓았을 뿐인즉, 역시 명사(名士)가 아닐 수 없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미원장뿐이요, 미중조는 모르기에 특히 여기에 기록한다. 다만 강선루 현판은 어떤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었는지, 역시 뒷날 연구를 기다릴 일이다.

 

 

[D-001]중조(仲詔) : 명의 서예가(書藝家). 만종은 이름이요, 자는 우석(友石). 중조는 또 하나의 자인 듯함.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영현(李榮賢)

 

 

태학지(太學志 저자 미상)를 보면,

 

융경(隆慶) 원년(1567)에 황제가 국학(國學)에 거둥했는데, 조선 배신(陪臣)으로 이영현(李榮賢)  6명이 각기 제 직품에 알맞은 의관을 갖추고 이륜당(彝倫堂) 밖 문관들이 서는 반열 다음에 섰다.”

하였다. 그 당시 참반(參班)을 했다면, 응당 관()에 머문 사신일 터인데, 어째서 6명이나 그렇게 많이 참석했을 것인가. 또 이영현은 오늘 누구의 조상인지도 모를 일이요, 또 따라 참석한 인원들도 성명을 상고할 수 없다. 선배 되는 이만운(李萬運 선조 때의 학자. 자는 원춘(元春))은 옛날의 일을 많이 아는지라 잠시 이것을 적었다가 한 번 물어 볼 기회를 만들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왕월시권(王越試券)

 

 

왕월(王越 () 때의 관리. 자는 세창(世昌))의 과거 시험지가 바람에 날려 우리나라에 떨어져서 그 종이를 주년사(奏年使) 편에 부쳤더니, 중국에서는 기록하기를 유구(琉球)라고 잘못 기록하였다. 당시 왕월을 풍력(風力)이 있다고 해서 사법관의 직책에 탁용했다 한다. 일찍이 낭야만초(瑯琊漫鈔 () 문림(文林))에 보니,

 

성화(成化) 연간에 태감(太監) 왕고(王高)가 휴가를 얻어서 집에 나와 있을 제 병부 상서(兵部尙書) 아무개가 찾아 갔더니, 때마침 도어사(都御史) 왕월과 호부 상서(戶部尙書) 진월(陳鉞)이 역시 왔었다. 왕고가 이윽고 나와 여러 사람 앞에 읍()하고 앉아서 말하기를,

옛날 왕진(王振 () 때의 관리)이 일을 처리할 때 육경(六卿)이 많이들 사사로이 찾아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치를 제멋대로 전단한다고 뒷말을 하였다 하더니, 이제 여러분들이 이렇게 찾아 온다면 어찌 외인들이 왕고를 걸어 시비하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여러분은 나를 방문하였지마는 묻노니 왕고를 어떤 사람으로 알았단 말이오.’

하였을 때, 병부 상서는,

귀공은 성인이외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고는 얼굴빛을 변하면서,

위대한 교화력을 지닌 이를 성인이라 하므로 공자(公子)께서도 오히려 내가 어찌 감히(논어에 나오는 구절)라고 말씀했거늘, 하물며 왕고가 어떤 사람이건대 감히 성인이라고 일컬을 것인가.’

하였다. 여럿은 이 말을 듣고 숨을 내쉬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 당시 병부 상서는 비록 이름을 숨겼으나 공론은 가릴 수 없었은즉, 소위 왕월의 풍력(風力)인들 어디 있을 것인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순칠년회시 때 공원의 화재[天順七年會試貢院火]

 

 

천순(天順) 7 (1463) 2월에 회시(會試)를 보일 제, 때마침 공원(貢院)에 불이 나자 감찰어사(監察御史) 초현(焦顯)이 곧 대문을 걸어 닫아 출입을 못하도록 하여 응시자로 타 죽은 자가 90여 명이나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신라호(新羅戶)

 

 

북경 동북방의 군현 중에도 고려장(高麗庄)이라는 이름이 많을 뿐 아니라, ()의 총장(總章 당 고종의 연호) 연간에도 신라(新羅) 사람이 많은 곳에 관아를 두었으니, 지금 양향(良鄕)의 광양성(廣陽城)이 바로 거기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증고려사(證高麗史)

 

 

주곤전(朱昆田 청의 문학가. 자는 서준(西畯) 또는 문앙(文盎))은 죽타(竹坨 주이준(朱彛尊)의 호)의 아들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원 순제(元順帝)가 북으로 달아나 응창(應昌)에 와서 머물러 있을 때에 태자(太子) 애유지리납달(愛猷識里臘達)이 그 자리를 이어 화림(和林)으로 옮겨가 선광(宣光)이라고 연호를 고쳤으니, 고려(高麗)에서는 그를 북원(北元)이라 불러 신우(辛禑)는 일찍부터 그 연호를 받았으니, 그때는 명()의 홍무(洪武) 10(1377)이다. 그 이듬해 두질구첩목아(豆叱仇帖牧兒)가 즉위하자 북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이를 통고하였고, 이어서 연호를 천원(天元)이라 고친 뒤 고려에 통고하였는 바, 이것이 모두 정인지(鄭麟趾) 고려사(高麗史) 중에 실리고 본즉, 순제를 이어서 연호를 세운 자는 선광까지만이 아니다.”

하였다. 대체로 순제라는 칭호는 중국이 부르는 이름이요, 혜종(惠宗)이란 묘호(廟號)는 원()이 최후의 임금에게 붙인 시호(諡號)이다. 그 뒤에 겨우 선광의 시호가 소종(昭宗)이라는 것밖에 모르고 본즉 천원의 즉위는 역사 편찬가가 생략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들은 고려사에 의거하여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조선모란(朝鮮牡丹)

 

 

육가화사(六街花事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하포모란(荷包牡丹)은 본초(本草 이시진(李時珍)이 저술한 본초강목(本草綱目)) 중에 일명 조선모란(朝鮮牡丹)이라 부르는데, 꽃은 승혜국(僧鞵菊 부자(附子)의 별칭)과 같고 진자줏빛이다. 모란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잎이 서로 비슷한 까닭이었으며 북경 괴수사가(槐樹斜街)자인사(慈仁寺)약왕묘(藥王廟) 등 꽃 저자에서는 언제나 팔고 있다.”

하였다. 소위 하포라고 부르는 까닭은 중국 사람이 수놓은 둥근 주머니를 서로들 선사하면서 하포라고 하는데 곧 주머니의 이름이다. 승혜국은 어떤 모양인지 모르겠으나, 요컨대 모두 일년초 꽃으로, 이름을 조선모란이라 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애호(艾虎)

 

 

단옷날 공조(工曹)에서는 궁선(宮扇) 애호(艾虎)를 바친다.계암만필(戒盦漫筆 () 이후(李詡) )에는,

 

단옷날은 서울에 있는 관료들에게 궁선을 하사하는데, 댓살에 종이를 붙여서 그 위에는 모두 영모(翎毛)를 그리고, 오색 실로써 애호를 둘렀다.”

하였으니, 단옷날 애호를 바침은 역시 중국의 묵은 풍속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십가소(十可笑)

 

 

대두야담(戴斗夜談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북경 서는 열 가지 가소로운 명물이 있으니 그것은 광록시(光祿寺 궁중의 요리를 맡은 관서)의 찻물[茶湯], 태의원(太醫院 황제의 전속 의원)의 약방문[藥方], 신악관(神樂觀 도교의 절과 음악을 연습하는 곳)의 기도[祈禳], 무고사(武庫司)의 칼과 창[刀鎗], 영선사(營繕司 토목 공사를 맡은 관서)의 일터[作場], 양제원(養濟院 국립 요양원)의 옷과 양식[衣 粮], 교방사(敎坊司 기악(妓樂)을 맡은 관서)의 할머니[婆娘], 도찰원(都察院 최고 검찰(檢察) 기관)의 헌법 기강[憲綱], 국자감(國子監 국립대학(國立大學))의 학당(學堂), 한림원(翰林院 학예술원(學藝術院))의 문장(文章) 등이다.”

하였으니, 이는 곧 한()의 속어에,

 

수재(秀才)에 합격되었으나 글을 모르고, 효렴(孝廉)으로 뽑혀도 애비가 별거(別居)한다.”

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속어에도,

 

관청 돼지 배가 아프다.”

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마치,

 

()이 진()의 야윈 꼴을 본다(서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

는 말과 다름없다. 이들은 모두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다는 의미이다. ()의 효렴(孝廉)도 벌써 이렇거늘 하물며 뒷세상의 일일까보냐.

 

 

[D-001]효렴(孝廉) : () 때 관리를 선발(選拔)하는 시험 과목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자규(子規)

 

 

()의 지정(至正) 19(1359)에 자규(子規 접동새)가 거용관(居庸關)에서 울었다 한다. 이 관은 연경과의 거리가 70리요, 연경의 팔경(八景) 중에서 거용첩취(居庸疊翠)가 그 하나이다. 원의 왕운(旺惲 문학가. 자는 중모(仲謀))은 이르기를,

 

진 시황(秦始皇)이 장성(長城)을 쌓을 때에 역군들을 이곳에 두었다 하여 곧 거용(居庸)이라 일컬었으며, 또는 모용수(慕容垂 후연(後燕)의 세조(世祖))가 모용농(慕容農)을 얼옹새(蠮螉塞)로 내어 보냈다는 데가 곧 거용의 잘못 변한 소리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한 번 거용관에 가고자 했으나, 왕복 1 40리나 되고 보니 하루 동안에 다녀 오기에는 어렵겠으므로 그만두었더니, 지금에는 한스러운 일이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경수사대장경비략(慶壽寺大藏經碑略)

 

 

 

국가에서 불법(佛法)을 숭봉하여 큰 절을 세울 때엔 반드시 불경을 안치한다. 그리하여 천하의 글씨 잘 쓰는 자들을 모아서 금가루를 이겨 불경을 베낌으로써 그 위엄을 보이고 천하에 각자(刻字) 잘 하는 자들을 뽑아 좋은 나무에 판각을 하여 보전함으로써 널리 전하게 된다. 북경에 있는 모든 절에는 날마다 중을 먹여 길러, 단정하게 앉아서 떼를 지어 불경을 외고 종을 치며, 소라 고동을 불어 밤낮으로 쉴 사이 없을뿐더러, 한 해에 한두 번은 칙사를 역마에 태워 보내어 향과 폐물을 바치되 온 천하를 골고루 돌아다니는데, 이렇게 해야만 온 항하사(恒河沙)의 세계가 모두 복을 받게 된다. 아아, 참 지극하도다. 고려(高麗)는 예로부터 시서(詩書)와 예의(禮義)의 나라로 불려왔으므로 원이 천하를 차지하자, 세조 황제(世祖皇帝 홀필렬(忽必烈))는 은혜로 맺으며, 예법으로 대접함이 유달랐었다. 부자(고려의 원종과 충선왕)가 왕위를 이어서 모두 부마(駙馬)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지금 왕은 충선왕(忠宣王)이다. 또 총명과 충효로써 황제와 황태후의 사랑을 받게 되어, 대덕(大德 ()의 연호) 을사년(1305)에는 불경을 경수사(慶壽寺)에 시주하여 황제께 영광을 돌렸었다. 이 절은 유황(裕皇 () 성종(成宗)의 별칭인 듯하다)의 복을 비는 곳으로서 수도의 여러 절 중에 가장 오래된 절이다. 황경(皇慶 ()의 연호) 원년(1312) 여름 6월에 나에게 일러 글을 짓고, 이를 돌에 새기게 하였다. 왕의 이름은 장()인데,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 도덕과 문장을 갖추었다. 그는 세조를 섬기게 되자 황제의 생질로서 세자가 되어 숙위(宿衛)로 입직하여 포상을 받았고, 성종(成宗) 때에는 뽑혀서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또 대덕 말년에는 지금 황제를 따라 내란(內亂)을 평정하였고, 무종(武宗)을 세우는데 공로가 있어서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 개부의동삼사태자태사 상주국부마도위 심양정동행중서성우승상(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太子太師上柱國駙馬都尉瀋陽征東行中書省右丞相)으로 되어 고려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하였고, 지금 황제(() 인종(仁宗))의 즉위 책훈(策勳)으로 태위(太尉)를 더하였다.”

이 비문은 정거부(程鉅夫)가 지은 것으로서 설루집(雪樓集 정거의 저서) 중에 실려 있는데, 그 사연을 보아서 풍자의 말이 많았다. 대체로 외국 것을 저술한다고 빙자하여 약간 자기의 견해를 보인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응당 실려 있지 않을 터이므로 이에 잘라서 그 대략을 소개해 둔다.

 

 

[D-001]항하사(恒河沙) :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말. 사물(事物)의 많은 것을 항하 모래의 숫자에 비하였다.

[D-002]정거부(程鉅夫) : 원의 문학가 정문해(程文海). 거부는 자인데, 무종(武宗)의 이름을 휘해서 자를 이름으로 시행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량대(謊糧臺)

 

 

동악묘(東岳廟)를 한 5리 못 미쳐 황량대(莣涼臺)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글자가 그릇된 것이다. 장안객화(長安客話 저자 미상)에 보면,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할 때 일찍이 군사를 이곳에 주둔하고 거짓 창고를 설치하여 적국을 속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이 땅을 황량대(謊糧臺)로 불렀다.”

하니, 그 말이 옳을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원이학지성(胡元理學之盛)

 

 

중국 이학(理學)이 융성하기는 원()의 때보다 지나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또 두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원이 개국하던 초기에 있어서 도사이면서 유학(儒學)을 논하고, 승려이면서도 유학의 행실을 남긴 것이다.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의 별호) 구처기(邱處機 ()의 도사(道士))의 자는 통밀(通密)인데, 등주(登州) 사람이며, 장춘은 그의 별호이다. ()의 황통(皇統) 무진년(1148) 5 19일에 나서, 정우(貞祐 ()의 연호) 을해년(1215)에 금주(金主)가 그를 불렀으나 듣지 않았고, 기묘년(1219)에 송()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역시 일어서지 않았다. 이해 5월에 몽고 태조가 내만(奈蠻 몽고의 별부(別部))으로부터 근시를 시켜 손수 쓴 조서를 보내 초청을 하여 드디어 응하게 되었다. 철문관(鐵門關)을 넘어 수십 나라를 거쳤으며 1만여 리를 걸어 황제를 설산(雪山)에서 보게 되었다. 그는 첫째, 천하를 통일하는 방법에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데 있다고 대답하였고 대규모의 사냥을 말리며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살리기를 좋아한답니다”.

하고, 정치하는 방법을 물음에 대해서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야죠.”

한다. 몸 닦는 도리를 물었더니, 그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옵소서.”

하고, 죽지 않는 약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는, 그는,

 

위생(衛生)하는 글은 있지마는 장생할 약은 없소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가 그를 불러 자리에 나앉을 때마다 황제를 권하는 말은 모두 자애와 효도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것이 어찌 도사의 입에서 나온 유가의 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때에 몽고가 중원 땅을 유린하여,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이 더욱 심하였다.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살육을 당해도 목숨을 도피할 곳이 없었다. 구처기는 연경으로 돌아와서 그 문도를 시켜 통첩을 가지고 전쟁 중에 유랑하는 자들을 불러 구제하였다. 이로써 남의 종이 되었던 자로 양민의 신분을 되찾은 이도 있거니와, 죽을 지경에 있다가 갱생의 길을 얻은 이도 무려 23만 명이다 되었다. 이 이야기는 원사(元史) 중에 실려 있다. 또 해운 국사(海雲國師)의 이름은 인간(印簡)인데, 산서(山西) 영원(寧遠) 사람이다. 나이 열 살에 능히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하여 많은 악당들을 감화시켰다. 그리하여 금 선종(金宣宗)은 그에게 통원광혜대사(通元廣惠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영원성이 함락되자 그의 스승인 중관(中觀)과 함께 붙들렸다. 원의 성길사 황제(成吉思皇帝) 원 태조(元太祖) 가 사신을 대사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늙은 장로(長老)도 젊은 장로도 모두 좋아.”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젊은 장로라고 불렀다. 해운은 매양 당시 대관인(大官人) 홀도호(忽都護)에게 이르기를,

 

공자(孔子)는 성인이시니 마땅히 대대로 봉하여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요, 안자(顔子)와 맹자(孟子)의 후손과 주공(周公)과 공자의 학문을 배운 자는 모두 부역(賦役)을 면하고 그 학업에 종사하도록 할 일입니다.”

하매, 홀도호는 그 말을 좇았었다. 이것은 왕만경(王萬慶 미상)이 지은 구급탑(九級塔) 비문 중에 쓰여 있다. 이것이 어찌 승려로서 유가의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랴. 아울러 여기에 적어 둔다.

 

 

[D-001]철문관(鐵門關) : 소련과 중앙아시아의 접경에 있는 관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배형(拜荊)

 

 

내가 일찍이 풍윤현(豐潤縣)을 지날 때에 그 동북편에는 진왕산(秦王山)이 있는데, 다만 가시 덤불이 떨기로 나서 있었을 뿐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이 산에 올라 가시나무를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이 가시나무는 우리 동리 훈장이 내게 글 구절 떼는 법을 가르칠 때 쓰던 회초리다.’

하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였는데, 그때 가시나무들은 모두 머리를 드리우고 엎드리는 듯하였다.”

하는데, 지금에도 그 시늉을 내는 듯싶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환향하(還鄕河)

 

 

풍윤(豊潤)과 옥전(玉田) 사이에는 환향하가 있다. 모든 물이란 물은 모두 동으로 흐르는 터인데, 유독 이 강만은 서쪽으로 흐른다. 연산총록(燕山叢錄 저자 미상)에 보면,

 

송 휘종(宋徽宗)이 이 강 다리를 건너서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처량하게 하는 말이,

이 물을 지나면 점차 큰 사막이 가까울 거야. 나는 어찌 이 강물처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꼬.’

하고는 먹지 않고 갔다.”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이르기를,

 

이는 석소주(石少主)가 이름 지은 것을 지금 사람도 그대로 부른다.”

하니 석소주라면 아마도 석진(石晉 석경당(石敬瑭)이 세운 후진(後晉))의 젊은 임금인 중귀(重貴 석경당의 아들)로서 역시 거란에게 포로가 되어 이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계원필경(桂苑筆耕)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 중에,

 

신라(新羅) 최치원(崔致遠)의 계원필경(桂苑筆耕) 4.”

이란 글이 적혀 있으나, 뒷날 저서가들이 이 서목(書目)을 인용(引用)하였지마는 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책이 없어진 지 필시 오래된 모양이다.

 

 

[D-001]책이 …… 모양이다. : 계원필경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연암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불사(千佛寺)

 

 

밀운(密雲)으로부터 덕승문(德勝門)으로 들 제 길이 무척 질고 또 양 떼가 앞을 막아 더 갈 수 없어서, 드디어 말에서 내려 홍 역관(洪譯官) 명복(命福)과 함께 길가에 있는 천불사(千佛寺)에 들러서 잠시 쉬었다. 부처 앉은 자리를 천 개의 연꽃이 둘러싸고, 연꽃을 천 개의 불상이 둘러쌌다. 천존불(天尊佛) 24개와 18나한(羅漢)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바친 것이라 한다. 사실 유동인(劉同人 미상) 경물략(景物略) 중에 실려 있지마는, 녹수잡지(淥水雜識)중에는 이미 교응춘(喬應春 미상)의 비문을 의거하여 태감(太監) 양용(楊用 미상)이 주조(鑄造)하여 만든 부처라 고증하였으나, 모를 일이다.

 

 

[D-001]녹수잡지(淥水雜識) : () 납란성덕(納蘭性德)이 지은 녹수정잡지(淥水亭雜識의 약칭.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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