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4월 2일자 2면 동아일보에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 1861~1941)가 보낸 넉 줄의 시가 실렸습니다.
“일즉이 아세아(亞細亞)의 황금시기(黃金時期)에
빗나든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朝鮮)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東方)의 밝은 비치 되리라”
이 시는 아래와 같은 기사와 함께 실렸습니다.
이번 가나다(加奈陀) 려행 중 잠간 동경에 들린 인도시성(印度詩聖) ‘타고아’ 옹은 지난달 이십칠일에 마츰 십 년 전부터 일본에 망명 중인 인도 혁명가 ‘보-스’씨의 숙소를 왕방한 긔자와 서로 맛나게 되었는데 옹은 합장의 례로 흔연히 긔자를 마저주어 한번 조선에 오지안켓느냐 하는 긔자의 물음에 대하야,
네 고마운 말슴입니다. 그러나 래일이면 횡빈(橫濱)을 떠날터인데요…돌아오는 길이라도 와 달라고요? 미국으로부터 오는 길도 아마 일본에 못 들를 터이니 딸하서 조선에도 갈수 업겟습니다. 래일 떠나기 전에 다시 맛납시다.
하며 이튿날인 이십팔일 오후 세시에 횡빈을 떠나는 ‘엠푸레스 오푸 에시야’호에 옹을 작별하러 간 긔자에게 알에와[아래와] 가튼 간단한 의미의 멧세지를 써주며 동아일보를 통하야 조선민족에 전달하야 달라하얏다.
[중략]
미국의 초빙을 받아 도미하였다가 그 나라 관헌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인도로 돌아가는 길에 일본을 다시 방문하고 8월경까지 체재하기로 작정하였든 인도 시성 ‘타골’ 옹은 그간 우연히 심장병을 얻어 일시는 중태에 이르게 되어 동경제국대학 오(吳) 박사의 치료를 받든 중 옹은 주치의와 근친자의 권고로 모든 계획을 다 던져버리고 6월 9일 오전 7시 횡빈을 출범하는 불란서 기선 ‘안제-’호로 비서 ‘쨘다-’씨와 같이 ‘골룸보’에 직행하게 되엇다.
‘타골’ 옹은 지난달 중순 처음으로 기자를 만났을 때 자기는 다년의 숙망인 조선방문을 계획하는데 동아일보사에서 만히 힘써 달라고 말하였음으로 구체적 상의까지 되어 6월 중순에는 옹이 조선에 오기로 결정되었는데 돌연한 귀국으로 이것까지 중지하게 되었음으로 옹은 무엇보다도 제일 조선 못가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듯 일본을 떠나든 전날 기자를 청하야.
다음과 같은 의미의 ‘멧세지’를 주며
최근까지도 될 수만 있으면 조선방문만은 단행하고자 하였든 것이 결국 여의치 못하게 되어 참으로 미안합니다. 이번 조선에 가고자함은 유람차로 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도 백성과 같은 처지에 있어서 신음하는 민족과 동포가 되기를 바랏든 것임으로 조선 못가게 된데 대한 실망은 이천여만의 친고를 일흔데 대한 실망과 비등합니다.
자기 생전에 꼭 조선을 방문하겠다하며 혹 건강이 회복되면 명년에는 조선을 들러 만주 ‘사비예트’ 로서아를 거쳐 구라파에 려행하겠다하더라.
<타옹 멧세지>
조선을 방문하여 동정의 인사를 마치고자 하든 나의 언약을 신병으로 말미암아 지키지 못하게 됨은 내게 당하여 큰 유한이 올시다.
나를 초빙하든 친고들에게 나는 이번 나의 언약을 다시 지킬 수 있는 미래의 조흔 기회에 대한 희망에 부치고 있다는 것을 단언합니다.
1929년 6월 8일
라빈드라나드, 타골
It has caused me very great regret that my ill health prevents me from fulfilling my promise to visit Korea and to offer her my greeting of sympathy.
Let me assure my friends who invited me that I carry that promise with me in the hope of a more fortunate future when it may be redeemed.
Rabindranath Tagore
1929 June 8
그 다음날인 1929년 4월 2일자 2면에는 그 원문이 실렸습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Rabindranath Tagore
28th. March, 1929
“당시 우리 민족의 암담한 처지에 대한 하늘의 깨우침이라고 해서 우리들은 이 시를 읽고 몹시 흥분하였었다.” (조용만, ‘경성야화’, 도서출판 창, 1992년, 355쪽)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처음 소개된 이후 이 시는 ‘동방(東方)의 등불’ 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원래는 제목이 없는 ‘조선에 부탁’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아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던 타고르 옹의 이 넉 줄 메시지가 조선인에게 준 충격과 감동은 실로 컸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며 민족에게 희망을 줄 때면 곧잘 이 시를 인용하고 이 넉 줄 시를 모르는 국민은 없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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