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故 오복녀 명창과 수제자 김광숙, 유지숙

https://www.youtube.com/watch?v=QcyR5NZDP1Y

 

[은자주]서도소리 수심가[아래 주소창 참조]를 한 번 정리한 바 있는데 소리 나는 곳이 없어 다시 찾아 보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13T97SMj3eo

 

'한명순의 예술세계'
이 자 균 / 한국민속연구소

소리꾼 한명순은 충남 청양군 남양면 대봉리에서 한정수와 이예자의 5남 2녀 가운데 다섯 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 한정수는 시조 정도를 부를 줄 아는 이였다고 한다. 여섯 살 무렵 한명순은 벌써 소리꾼의 재질이 보여서 노래도 곧잘 했고, 학교를 오가며 경기 명창 김옥심이나 강옥주의 레코드판을 듣고서 흥얼거렸다고 한다.

한명순이 본격적으로 소릿길로 접어든 것은 열여섯 살, 당시 남산에 있었던 한국방송공사 공개홀에서 있었던 민요백일장에 참가하면서였다. 이때 특별출연을 했던 김정연(1913.6.26∼1987.2.26) 명창이 한명순의 소리를 듣고서 시골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부랴부랴 전보를 쳐서 거처를 물어왔다. 김정연은 부모에게, "학교도 보내주고 모든 것을 다 해 줄 터이니 서울로 가자."고 설득하여, 그 길로 신도 제대로 꿰지 못하고 김정연이 몰고 온 차에 올랐다 한다.
이때부터 한명순은 길고 긴 소리길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꼬장꼬장하여 당호도 빙심(氷心)인 김정연으로부터 인생 공부와 처음 대하는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수심가·엮음수심가·관산융마 등 오늘날 관북지방의 소리들을 제대로 배울 수가 있었다. 한명순은 진짜 소리를 무릎맞춤으로 배우니 어렵기가 한이 없었고, 또한 스승의 성미가 유별난데다 늘 엄하고 어려워 소리속에 대해서도 감히 물어 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한명순으로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이 퉁퉁 붓게 울기도 하였고, 오죽하면 다른 선생을 찾아가서 배울까 생각도 해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무친한 서울에서 오갈 데 없는 처지여서 스승의 집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차차 소리를 터득해 나갔다.
이따금 김정연의 언니 죽사(竹史) 김수영이 와서 위로를 해주어서 조금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정연의 소리 동무나 권번 동기, 선후배들의 모임이 있으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한 대목 불렀는데, 이때서야 비로서 "스승의 소리가 소중하구나." 하는 것을 뼛속 깊게 느꼈다고 한다. 한창 때 쏟아지는 잠을 이기기 위해서 손톱으로 꼬집기도 하며 배운 것을 반복하고 익혔으며, 공연이라고 구경 갈 일이 있으면 두말없이 따라나서 소리속을 귀동냥하기도 하였다.
한명순은 김정연에게 꼬박 삼 년을 배웠는데, 놀량·산염불·앞산타령·뒷산타령·경발림·사거리, 민요는 긴아리·자진아리·긴난봉가·잦은난봉가·수심가·엮음수심가·관산융마를 배웠다. 또한 황해도 연백 출신 지관용(1909∼1986)에게는 1977년에 긴난봉가·경사거리·산타령을 이수하였다. 지관용은 스승이 김형선이고 소리에 능한 사람이었는데, 본디 소리꾼은 아니었으며, 피리·해금을 연주하였다.

1979년 한명순은 다시 김옥선에게 수심가와 민요를 배웠다. 김옥선은 평양 태생이고, 수심가를 다른 이들보다 조금 특이하게 불렀는데, 남자 청이고 '한'이 서린 소리목을 구사한 이었다고 한다. 김옥선은 이반도화·이정열보다는 나이가 적으며, 사리원 출신이자 사리원 예기 조합장이었던 이동벽( ?-? )의 제자이다. 이동벽은 봉산탈춤에서 중추적 구실을 하였고, 십대에 아전을 지냈으며, 신기원( ?-? )의 제자 김명운(1920∼ )과는 동갑 쯤 된다고 한다. 분단 후 나이가 비슷한 이북 해주·벽성·옹진·개성·연백 등지를 고향으로 둔 명기들이 자주 모였는데, 이럴 때 김옥선은 늘 그 수심가 학습을 자랑했으며, 말년에는 안양에 가서 살다가 1984년도 쯤 작고했다. 관북소리를 하는 사람들로는 김밀화주·장학선·장금화·최섬홍·손진홍·백모란·길진홍 등 이른바 '채 맞은 기생'이 있었지만, 김옥선은 이름이 널리 안 났고 학습 연조가 짧아도 결코 그 소리가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는 평을 받았다.

죽사 김수영에게는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들은 기억이라도 추풍감별곡이나 국문뒤풀이를 담담하게 하는 것을 들으면 언제나 저렇게 해보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선생한테 가서 배우는 것을 매우 마땅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유달리 소리욕심이 많았던 한명순은 여러 선생에게 소리를 배웠고, 이것이 지금 소리를 하는데 든든한 재산이 되었다고 한다.

1987년 김정연이 작고하자 동문수학하였던 이들은 각기 자기 길로 가고, 한명순도 소리 공부를 잠시 중단하였다가 1999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태생 이희완(1938∼ )에게 잠시 소리를 맞추었고, 창부타령으로 유명한 고 전태용 명인의 소리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한다.
1999년 11월 22일 국악원 우면당에서 개인발표회에 이어 같은 해 수원시 문예회관에서 있었던 경기민요 경연대회에서는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아 이듬해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한명순 경서도소리 발표회>를 갖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종로구 와룡동에 학원을 내어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고 있다.

한명순의 스승은 김정연이라 할 수 있고 그 문하에서 1986년4월에 이수를 받았다. 김정연은 평남에서 태어났고, 열 살 쯤에 개성에 왔다. 열다섯에 개성 예기조합에서 이승창이라는 사람에게 가곡·가사를 이수하고, 스물한 살 무렵에는 이장산에게 전통춤을 배웠다. 김정연은 여러 차례 걸쳐서 녹음을 남겼는데, 1959년에는 킹스타, 1963년에는 신세계 레코드,1979년의 서도소리 대전집등 1980년초까지 여러 음반을 낸 바있으며 무용도 감등 저서와 함께 1971년에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로 인정받은 바 있다.
본디 남에 판소리요, 북에 수심가라고 하였지만, 관서북 소리를 부르던 원로들은 현재 고령으로 대부분 실연을 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명순의 이 음반은 김정연에게 마지막 서도소리를 배운 제자답게 서도소리의 변천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중요한 음반이 될 것이다. "십리부동속(十里不同俗)"이라는 말이 있듯, 한명순의 부모는 물론 선대도 이북 출신은 아니다. 그러나 스승의 서도소리를 지극정성으로 익히고 다듬은 그의 공력은 참으로 갸륵하다고 할 만하다. 무엇이든 쉽게 힘 안 들이려는 세상에서 이렇게 진득이 서도소리를 배워 후대에 남긴다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방마다 음악적 '토리'라는 것이 있어서 '엇부침'이나 '시김새'가 유효적절하게 나와야 제대로 된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살리는 이는 드물어졌다. 북한에서도 이미 김진명(? ∼199?, 황해도 은률군 장통면 태생)이 타계하고 그 제자 김관보(? -? )만 남아있다고 하지만, 남한처럼 수심가나 산염불 같은 민요, 관산융마 같은 시창을 더 이상 숭상하지도 않고 있는 마당에, 소리꾼 한명순의 이 음반은 서도소리사의 한 장을 멋스럽게 장식하리라 믿는다.


'한명순 경서도소리 음반'
조 유 미 /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원, 이화여대 강사

여름 산야에 흐드러진 망초처럼 소박하고, 울울탕탕 흐르는 여울물처럼 시원하고, 오색 낙엽이 안개비에 촉촉히 젖어 누운 것처럼 애잔하고, 달빛이 서릿발같은 밤 그리움에 사무친 얼굴로 조용히 불러야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때론 익살스럽게, 그러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흥겨움이 넘치는 노래, 바로 그런 노래가 '경서도소리'일 듯 싶다.

그리 넓지 않은 이 땅 구석구석 어디 노래 싫어하는 이들이 있으랴만 유난히 경·서도 지역은 고을마다 노래가 넘쳐흐르던 곳이었다. 이렇게 고을마다 전해 오던 소박한 소리에 많은 명창들이 보다 세련된 가락과 형식으로 옷을 입혀 널리 부르게 되었고 세상사람들은 이를 뭉뚱그려 '경서도소리'라 칭했다.

오랜 세월 이 땅의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기꺼이 듣기를 청했던 노래이니 만큼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주옥같은 노래들이지만 여기 몇 곡을 골라 음반으로 엮었다. 흔히 애틋한 그리움과 이별의 정한으로 대표되는 <수심가>를 비롯한 <제전>, <산염불>, <난봉가>와 같은 대표적인 서도소리뿐만 아니라 <창부타령>과 <노랫가락>, <뱃노래> 등의 신명나고 흥겨운 경기소리도 함께 넣었다. 예전의 명창들은 경기와 서도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어느 것이나 잘 불렀는데,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여서 서도의 명창들은 으례히 경기의 소리도 겸하여 부르곤 한다.

소리의 길을 걷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때를 잘 가려 살피는 것 또한 소리꾼의 기량중 하나일 것이다. 음반을 준비하면서 그저 소리 잘 하는 명창으로 기억되기보다는 노래에 담긴 유영한 아름다움을 진정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가려 구사하는 소리꾼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이 음반은 제 자랑으로 엮은 것이 아니다. 소리꾼 한명순이 가던 소리 걸음을 멈추고, 길은 바로 가고 있는지 또 너무 급하여 행여 놓친 것은 없는지 매무새를 다듬어보는 심정으로 엮은 것이다

1. 수심가

서도음악의 특징을 흔히 '수심가 토리'라고 하듯이 <수심가>는 서도소리를 대표하는 평안도 지역의 민요이다. <수심가>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오랜 세월 관서지방민들의 설움과 애환을 담은 노래로 널리 사랑을 받아온 탓인지 서도의 소리꾼이라면 누구나 즐겨 부르는 노래가 이 <수심가>이고, 그만큼 소리꾼의 기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사설은 옛 시조처럼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앞부분을 부르는 방법도 세 가지다. 즉, 중간 정도의 청으로 내어 시작하거나, 중간보다 약간 높게 또는 아주 높게 들어내는 등 세 가지 형태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연주형태이다. 장단은 소리에 따라 맞춰나가는 불규칙 장단이다.

약사몽혼(若使夢魂)으로 행유적(行有跡)이면 문전석로(門前石路)가 반성사(半成砂)로구나
생각을 허니 님의 화용(花容)이 그리워 나 어이 할까요

아∼친구가 본판(本板)은 남이련만은 어이 그다지도 유정(有情)타 말이오
만나긴 어렵고 헤어지기는 쉬워서 나 어이 할까요

2. 엮음 수심가

<엮음 수심가>는 <수심가>에 이어 부르며. <수심가>에 비해 사설이 장문이다. 옛 고사 같은 서사적인 내용들을 열거하는 경우는 사설이 좀 더 긴 편이고 인간의 생활감정이나 자연의 미를 추구하는 내용들은 전자에 비해 비교적 짧다. <수심가>의 시작처럼 첫 구절을 중간청으로 시작하는 것과 조금 들어서 내는 방법이 있으며, 빠르고 촘촘이 엮어나간다는 뜻의 '엮음'이란 말이 들어가기 때문에 <수심가>에 비해 속도가 빠르다. 장단은 소리에 따라 불규칙 장단으로 치며 매 장절(章節)마다 애련한 곡조의 느린 <수심가> 가락으로 끝을 맺는다.

아∼지척동방(咫尺洞房) 천리(千里)되어 바라보기 묘연하구나 인적이 끄쳤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그곳 아름다운 자태거동 이목(耳目)에 매양 어리워 있어 잊자 하여도 못잊갔구 나 잠을 이루면 잊을까하나 몽중(夢中)에도 임의나 생각 글을 보면은 잊을까 하여 사서 삼경을 펼쳐놓고 시전(詩傳) 일편(一篇)을 외일적에 관관저구(關關雎鳩)는 재하지주(在河 之州)요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호구(君子好逑)로구나 생각을 하니 님의 화용이 그리워 나 어이할까요

덩∼덩그랗게 빈 방안에 홀로 앉았으니 님이 오며 누웠으니 잠이 오나 수다(愁多)하니 몽불성(夢不成)이요 잠을 이뤄야 꿈을 꾸고 꿈을 꾸어야 님 상봉하지 님 사는 곳과 나 사는 곳은 남북간 육십리에 머지 않게도 있건마는 어이 그다지 그리워 사나 춘수(春水) 난 만사택(滿四澤)하니 물이 깊어 못 오시나 하운(夏雲)은 다기봉(多寄峰)이라 산이 높아 서 못 오시느냐 산이 높거들랑 쉬엄쉬엄 넘고 물이 깊거들랑 일엽편주(一葉片舟) 오려마 차마 진정코 임에게로만 당기어 어이 백년을 살까나

 

https://www.youtube.com/watch?v=HFghp8ebpVQ



3. 제전

생자필멸(生者必滅)과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인생무상의 두 가지 주제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노래이다. <제전>은 제일(祭日)을 맞이하여 님의 분묘(墳墓)앞에서 제사 지내는 모습을 묘사한 노래다. 오늘날에는 "백오동풍(百五東風)에 제일(祭日)을 만내어"하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예전에는 "아∼ 어제 저녁 성튼 몸이 금일 위시하야 오한두통에 사지가 아프니 이 일이 가련치 않느냐…"하는 부분의 사설부터 불렀다. 마지막은 <수심가> 가락으로 맺는다.

백오동풍(百五東風)에 절일(祭日)을 당하여 님의 분묘을 찾아가서 분묘앞에 황토요 황토위에 제석(祭席)을 깔고 제석 위에 조조반(祖祖盤) 놓고 조조반 위에다 좌면지(左面紙) 펴고 좌면지 위에 상간지(上簡紙) 펴고 차려간 음식을 버리울 제 우병좌면(右麵左餠) 어동육서(魚東肉西) 홍동백서(紅東白西)에 오기탕(五器湯) 실과(實果)를 전자후준(前煮後樽)으로 좌르르 버리울 제 염통산적 양볶이 녹두떡 살치찜이며 인삼녹용 도라지태며 고비 고사리 두룹채며 왕십리 미나리채며 먹기 좋은 녹두나물 쪼개쪼개 콩나물 놓고 신계곡산(新溪谷山) 무인처(無人處)에 머루 다래 곁드려 놓고 함종(咸從)의 약률(藥栗)이며 연안(延安) 백천(白川) 황밤대추도 놓고 경상도 풍기 준시 수원의 홍시며 능라도를 썩 건너서 참모퉁이 둥글둥글 청수박을 대모장도(玳瑁粧刀) 드는 칼로 웃꼭지를 스르르르 돌리워 떼고 강릉 생청을 주루룩 부어 은동글반 수복저(壽福箸)로다 씨만 송송 골라내어 한 그릇에 한 그릇은 갱(羹)이로구나 술이라니 이백(李白)의 기경(騎鯨) 포도주며 뚝 떨어졌다 낙화주면 산림처사의 송엽주로다 도현명의 국화주며 마고선녀 천일주며 맛좋은 감흥로! 빛 좋은 홍소주 청소주로 왼갖 술을 다 그만두고 청명한 약주 술로 노자작 앵무배(鸚鵡盃)에 첫 잔 부어 산제(山祭)하고 두 잔 부니 첨작(添酌)이라 석 잔 부어 분상묘전(墳上墓前)에 퇴배연후(退盃然後)에 옷은 벗어 남게 걸고 그냥 그 자리에 되는대로 주저 않아 오열장탄(嗚咽長歎)에 애곡(哀哭)을 할 뿐이지 뒤따를 사람이 전혀 없구료 잔디를 뜯어 모진 광풍에 휘날리며 왜 죽었소 왜 죽었소 옥 같은 날 여기 두고 왜 죽었단 말이요 선영(先塋)에 풀이 긴들 절초(折草)할 이 뉘 있으며 한식 명절이 돌아와도 잔 드릴 사람이 전혀 없구료 일부황분(一?荒墳)이 가련하구나 천지로다 집을 삼고 황토로다 포단(布團)을 삼고 금잔디로다 이불을 삼고 산천초목으로 울을 삼아 두견접동이 벗이로구나 심야공산(深夜空山) 다 저문 밤에 홀로 누워있기가 무섭지도 않단 말이오 임 죽은 혼이라도 있거든 나 데려만 가렴아

4. 산염불
5. 잦은 산염불

https://www.youtube.com/watch?v=a5ymJmhy2e0&list=RDa5ymJmhy2e0&start_radio=1



<산염불>은 <긴염불>이라고도 하며 악곡명칭만 놓고 보면 불교와 관련된 노래로 보이지만 후렴의 사설을 제외하고는 불가(佛歌)와 관계가 없다. 주로 황해도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많이 불렸으며 <자진염불>을 이어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산염불>은 중모리 장단에 맞추어 부르고 <잦은 산염불>은 굿거리 장단에 맞춰 경쾌하게 부른다.

※ 에헤에에∼ 에헤∼아미타아 어허야 불이로다

어젯밤에 꿈 좋더니 님에게서 편지 왔소 그 편지 받아들고 가슴 위에 얹었더니
인철지(印札紙) 한 장이 무겁갔소만은 가슴 답답해 못 살갔소

아∼헤야 연수 쳐라 님에게로 편지 쓰자 검은 먹 흰 종이는 님의 옥안(玉顔)을 보련마는
저 붓대 그리고 못 보니 너나 내나 일반이라 긴염불도 좋거니와 잦은염불로 넘어간다.

※ 에헤∼ 에헤야미 타아∼불이로다

석가여래가 원불(願佛)인데 석가여래가 원불인데 칼산지옥만 면합소사

인제 가면은 언제 와요 인제 가면은 언제 와요 오만날이나 일러주오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아갑니다

6. 긴난봉가
7. 자진난봉가
8. 병신난봉가
9. 사설난봉가

https://www.youtube.com/watch?v=V0QLL5simlM



<난봉가>는 <산염불>과 더불어 황해도 지방을 대표하는 민요이다. 가사의 내용은 주로 남녀간의 사랑과 산천경개의 아름다움 등을 담고 있으며, <긴 난봉가>부터 시작하여 <자진 난봉가>, <병신 난봉가>, <사설 난봉가> 순으로 이어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예전에는 <긴 난봉가> 다음에 <중 난봉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중 난봉가>가 바로 오늘날의 <긴 난봉가>에 해당하고, 예전에 불렀다는 <긴 난봉가>는 현재 불리지 않는다. 난봉가류의 악곡은 후렴에 공통적으로 "어럼마 내 사랑아"라는 사설이 들어가고 뒤로 갈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특징이 있다. '난봉'이란 뜻은 난봉꾼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한자의 난봉(難逢) 즉 만나기 어렵다는 이별의 고민을 말한다고 하기도 한다.
<병신 난봉가>는 입창으로 불렀던 노래로 보통 두 패로 나누어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며 부른다. 노래 제목에서 연상되듯 예전에는 익살스런 흉내로 춤을 추며 돌아가면서 불렀다고 한다. 장단은 굿거리 장단에 맞는다.
<사설 난봉가>는 <병신 난봉가>에 이어 부르는 노래로 속도가 빠르고 사설의 길이도 길다. 사설의 내용이 매우 해학적이고 <가이(개) 타령>에서 불리던 사설이 들어가기도 한다. 장단은 대개 볶는타령으로 친다.

※ 아 에헤야 에헤∼ 에헤 어허야∼ 어럼마 둥둥 내 사랑아

정방산성(正方山城) 초목이 무성한데 밤에나 울 닭이 대낮에 운다
에헤∼ 에헤야∼ 어럼마 두둥둥 내 사랑아

오금이 오실오실 춥고 골머리 사지통(四肢痛) 나는건 님자로 연하여 난 병이로구나
에∼ 헤에∼ 에헤로구나 덩기 덩기여라 닐리리 그만 두자꾸나 어럼마 둥둥 내 사랑아

넘어간다 넘어 넘어간다 자주 하는 난봉가 훨훨 넘어간다

※ 에헤에 에헤 에헤야 어야 더야 어허야 어러함마 디여라 내 사랑아

이 몸이 둥둥 떠 저 백운(白雲) 타면 님 상봉하기가 비난지사(非難之事)로다

남산 우에 범나비는 쭉지만 펄펄 나는데 연당(蓮堂)안에 금잉어는 꼬리만 살살 두른다.

※ 에헤 에헤 어허야 어야 디야 내 사랑아

능라도 수양버들 내가 후여 후여 잡고서 가지를 말라고 생야단이라

남의 님이 다정타 속의 속정을 주지마소 일후(日後)에 남 되면은 후회막급(後悔莫及)이라

※ 에헤∼ 에헤∼ 어야 어야어야 디야 내 사랑아 에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고 이십리 못 가서 불한당 만나고 삼십리 못 가서 되돌아 오누나

왜 생겼나 왜 생겼나 요다지 곱게도 왜 생겼나 왜 생겼나 왜 생겼나
요다지 곱게도 왜 생 겼나 무쇠풍구 돌풍구 사람의 간장을 다 녹여내누나

물 길러 간다고 강짜를 말고 부뚜막 위에다가 우물을 파렴
물 길러 간다고 강짜를 말고 부뚜막 위에다가 우물을 파렴아

10. 노랫가락

https://www.youtube.com/watch?v=JwZTa3O7WuM



<노랫가락>은 조선말기에 서울지역의 무속에서 불리던 노래가 민요화된 것이다. 사설과 구성 등 여러 부분에서 시조와 매우 유사할 뿐만 아니라 장단도 시조처럼 친다. 그러나 시조처럼 느리지도 않고 시김새도 다른 경기민요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전의 명창들은 경서도 명창이라 하여 경기와 서도를 특별히 가리지 않고 어느 것이나 구김 없이 잘 부르곤 했는데, 한명순 명창 역시 경기민요인 <노랫가락>을 엇붙임을 많이 사용하여 멋드러지게 부르고 있다.

꿈아 무정한 저 꿈아 왔던 님을 보내는 꿈아 오신 님 보내질 말고
잠든 나를 깨워주지 일 후에 님이 오시면 님을 잡고 날 깨워주게

말은 가자 네 굽을 치고 님은 날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요
나에 갈 길은 천리 로다 벗님아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매렴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면 꽃 속에서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커든 잎에서라도 자고 갈까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을 다 지내고
낙목한천 찬바람에 너만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 뿐인가

11. 창부타령

https://www.youtube.com/watch?v=EcNVn66nc6Q



<창부타령>은 <노랫가락>처럼 서울지방 무속에서 사용되는 음악 중 하나로 서울지역 무당들이 굿을 행할 때 부르는 <제석타령> 등이 세속화된 것이다. 현재는 민요로 부르는 것과 무가로 부르는 것의 두 가지가 전하고 있다. 무가로부터 독립한 창부타령은 당시 유행하던 잡가, 단가 등 여러 사설을 차용하여 이별과 사랑 등을 그리고 있다.
굿거리 장단에 피리, 해금 등의 악기로 흥겨움을 더했다. 경기민요 중 가장 사랑을 받는 노래인 만큼 수많은 경기소리 명창들이 음반을 취입하였는데, 한명순 명창이 부르는 <창부타령>은 일반적으로 경기명창들이 부르는 것과 달리 유난히 엇붙임을 많이 사용하고 극적인 목구성으로 감칠맛을 더하고 있다.

※ 아∼ 아∼ 아니 놀진 못하리라

일각이 삼추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 시름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 봄눈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 되고 눈물은 흘러 비가 되어 우리 임 자는 영창밖에 불면서 뿌려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져 아서라 다 쓸데없다 마자 마자 마쟀더니 그대 생각뿐이로다 인생백년이 꿈이로다

만리창공 하운이 흩어지고 무산십이봉에 월색도 유정터라 임이라면 다 다정하여 이별이라 고 다 설소냐 이별마자 지은 맹세를 태산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히 무너질 줄 어느 가인이 알아주거나

구야 구로구나 백구 백구 백구로구나 백구야 나지 마라 내 너 잡을 내 아니다 승상이 버리웠음에 너를 쫓아 내가 왔노라 강상에 터를 닦고 오만 기술을 알려주고 나물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넉넉할거나 얼시구 절시구 지화자자 좋아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12. 뱃노래
13. 잦은 뱃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l4Ow2ksda44



경기 신민요의 하나인 <뱃노래>는 본래 <한강 시선뱃노래>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형적인 경기민요의 하나이고 보통 <잦은 뱃노래>를 이어 부른다. 장단은 각각 굿거리와 자진모리로 맞춘다.

※ 어기야 디여차 어야 디여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만경창파에 배를 띄우고 술렁술렁 노 저어라 달맞이 가잔다

밀물 썰물 드나드는 새 모래사장에 우리 님이 딪고 간 발자취 내 어이 알소냐

※ 어야디야 어야디야 어기야디야 어기야디야
어기야디야 에헤 에헤∼에헤야

달은 밝고 명랑한데 어야디야 고향생각 절로 난다 어야디야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어야디야 오만함을 일러주께 어야디야

 

https://www.youtube.com/watch?v=2vzFzHBH5-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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