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동남부에 자리한 경주는 인구 약 27만 명 정도(2011년 기준)인 소도시이지만,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56명의 왕이 다스리며 천 년 동안 왕조를 이루어온 ‘신라’의 수도이자, 한국 문화의 원형이 되는 신라시대 역사와 문화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주 특별한 도시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사로국(斯盧國, 서라벌)’이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출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루어냈으며, 안정된 국가 기반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매우 화려하고 찬란한 과학·문화·예술을 꽃피웠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일본은 물론 서아시아의 이슬람권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세계를 향해 문호를 활짝 열어 이미 천 년 전에 국제도시의 명성을 만방에 떨쳤다.
전성기 때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무려 ‘17만 8936호’(약 90만 명)가 살았는데, 8세기 무렵인 당시 경주의 도시 규모와 번영의 정도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터키의 이스탄불),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현 이라크), 당나라의 수도 장안(현 중국의 시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번영했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와 박물관일 만큼 숱한 명소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다. 개국 이래 천 년 동안 도읍을 옮긴 적이 한 번도 없다 보니 천 년 왕국 신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한 곳에 집중된 것이다. 도시화되어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긴 했지만, 21세기 경주는 여전히 천 년 전 신라의 유적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경주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유네스코는 신라 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경주에 ‘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을 붙여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크게 불교 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 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고분군 분포 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 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 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나뉘다. 도시 전체에 걸쳐 많은 수의 유적이 산재하니 하나하나 등록하지 않고 지역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역별로 등재하다 보니, 지구로 묶이지 못해 빠지거나 현장을 떠나 있는 이유로 세계유산 목록에 오르지 못한 유물도 상당수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여러 유물들이 그러한 예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문화재의 수는 52개이다.
남산 불곡의 석불좌상. 고개를 약간 숙이고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다소곳한 자태가 한없이 친근하다. 남산에서 가장 나이 많은 부처님이다. |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탑신부의 높이는 비록 4.5미터밖에 안 되지만 남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았으니 세계 어느 곳에도 유례가 없는 가장 큰 탑인 셈이다. |
부처의 세상 그 자체 남산지구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두 봉우리가 중심이 된 남산은 남북(10km)으로 길게 누운 모습으로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골짜기가 깊고 능선이 변화무쌍하여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불상과 탑, 석등, 연화대좌 등 수많은 불교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적들은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두드러지기보다는 남산의 자연경관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며 집단적으로 어우러진다. 산 전체를 기단부로 삼은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대표적인 예이고, 바윗면을 그대로 이용한 마애불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이 밖에도 남산 기슭에는 신라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을 비롯하여 신라의 천 년 역사를 마감하는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鮑石亭)’까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적 장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불교가 신라에 전해진 이후 7세기 전반 경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몇 군데의 석축만 남아 있는 용장사지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데, 자연암석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과 탑신을 올렸다. 곧, 자연암석이 하층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하층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스케일과 상상력으로 보면 세계 그 어느 석탑이 이에 견줄 수 있을까.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스케일에 준하는 불상이 있다. 칠불암 위에 곧바로 선 남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신선암 마애보살상(높이 1.4m)이다. 불상은 마치 구름 위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유희하는 듯 편안한 자세(유희좌)이다. 풍만한 얼굴이지만 표정은 무심한 듯,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인간을 구제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고 할까. 옷자락 역시 구름에 날려 흩어지는 듯 서서히 사라진다. 경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입지도 교묘하지만, 조각수법 또한 하늘을 나는 듯 표현되어 있다.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상.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무심히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편안한 자세의 조각수법도 교묘하지만, 구름 위에 앉아 하늘을 나는 듯 보이는 위치 선정 또한 절묘하다.
천 년 왕조의 궁궐터 월성지구
동서고금을 통해 천 년 동안 왕조를 이어온 나라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경주가 한 왕조의 수도로서 천 년을 이어왔다면, 그 입지와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왕경(王京, 왕이 거처하는 왕궁을 중심으로 그 나라 수도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을 이름)을 지방과 구분하였으며, 도시 구조도 정비하고, 정비된 왕경을 둘러싼 산성도 축조하였다.
신라 왕경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도시 전체가 네모 반듯한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왕복 4차선에 해당하는 폭 15미터의 넓은 도로와 배수로가 나란히 건설되고 배수로 안쪽에 주택가가 들어섰을 만큼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었고, 주택가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을 정도로 쾌적했다. 숯을 피우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이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절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섰을 정도였고, ‘금입택(金入宅)’의 고급 주택도 35채가 있었다고 한다. 귀족이나 일반인의 생활환경과 수준이 이러할진대, 왕이 살았던 궁궐은 어떠했을까?
신라 초기의 왕궁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정확치 않다.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 등에 근거하여 나정이나 오릉이 있는 서남산(西南山) 일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왕이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후 이 월성이 왕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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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리는 월성 전경. 월성의 동북쪽으로는 안압지와 황룡사지가 보인다.
월성은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이라고도 한다. 월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임해전(임해전은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딸린 인공 연못이 안압지이다)·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垓字)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 있다.
근래에는 계림(鷄林)과 첨성대 사이의 건물터와 성동동 전랑지(殿廊址)의 대규모 건물터 등이 발굴되어 그 동안 석연치 않았던 천 년 왕조 신라의 궁궐 규모와 위치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천 년을 한 터전에서 살아왔으니, 그 흔적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 왕경에 대한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감, 대능원지구
경주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들만 보더라도 역사 문화 도시 경주의 정체성은 범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계획된 수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넓어졌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뒤섞이게 된 것이다. 현재 경주 도심에는 높이가 23미터(황남대총)에 이르는 것부터 지상에서는 식별이 어려운 것까지 신라 고분 150여 기가 남아 있다.
특히 시내의 평지에 자리한 황남리고분군(대능원), 노동리고분군, 노서리고 분군은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5~6세기 무렵에 축조된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규모와 출토 유물의 화려함에서 신라 고분을 대표한다. 이들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신구, 유리잔, 토기, 천마도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들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대능원이라 불리는 황남리고분군은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으로,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따온 이름이다. 천마총, 황남대총, 전 미추왕릉을 비롯한 능 20여 기가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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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은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그림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대능원’ 안에 있는 ‘천마총’이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지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땅을 파고 시신을 묻은 것이 아니라 그냥 평지 위에 시신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을 얹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유물 가운데 금관도 출토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봉분 높이 23m). 두 개의 봉분이 잇닿아 있어 마치 표주박을 엎어 놓은 듯 한 모양이다. 발굴 결과 남쪽이 남자, 북쪽의 무덤이 여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남자의 묘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순장을 금한 지증왕 이전에 조성된 능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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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능원에 있는 고분 중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그림(사진)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 |
신라의 명성을 만방에 떨치다, 황룡사지구
신라의 유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황룡사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불에 타, 지금은 건물과 불상의 주춧돌들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폐사지이지만, 지금의 경주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황룡사지는 380,087제곱미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진흥왕 14년(553)부터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을 거쳐 경덕왕 13년(754)에 대종을 주조한 데 이르기까지 창건과 관련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황룡사의 창건이 삼국 통일의 국가로써 신라의 저력과 위상이 집약된 국가 사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경내에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대종이 있었으며, 현대식 건물로 따져 20층은 족히 넘는 높이의 80여 미터짜리 구층목탑, 인도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비로소 신라 황룡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는 약 5미터 높이의 장륙존상(인도의 아육왕이 철 5만 5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서 불상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계속 실패하기에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이것이 신라 앞바다에 당도하여 비로소 황룡사 장륙존상을 조성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룡사의 위용은 폐사지인 지금도 그 장엄함과 웅혼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웃한 아홉 나라에게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성격으로 세운 구층목탑은 경주 도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라 최고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황룡사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분황사 역시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인 원효와 자장이 머물렀던 신라의 대표적인 명찰이다. | | |
분황사 석탑. 돌을 벽돌처럼 잘게 잘라 쌓은 석탑으로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수도 외곽을 방어하라, 산성지구
경주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산성이 많은데, 산성 가운데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경주의 동쪽에 자리 잡은 명활산(266m)에 쌓은 명활산성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더불어 당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으며, 475년 자비왕이 거주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성벽을 쌓았는데, 이는 신라 초기의 축조방식이다.
경주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 천 년을 유지해온 흔치 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와 중세를 거쳐온 역사 도시로서 오늘날의 현대 도시로 이어진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다. 2천 년을 이어온 경주의 이와 같은 역사성, 문화성은 도저히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한국 문화의 원형이 탄생된 공간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경주에 감탄하며 열광하는 이유 또한 경주를 고대와 현대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명품 도시로 가꾸어 나가야 하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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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한국의 세계유산>, 눌와출판사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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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paran.com/blog/post.kth?pmcId=kydong&blogDataId=46779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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