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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현장경매 > 제 134 회 >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 약칭 '後四家')의 시를 柳琴이 選集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묵서필사본 4권 단책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 약칭 '後四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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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사가들은 세조가 중건한 원각사지 백탑[10층석탑]부근에 살았으며 연암 박지원과 사제관계로 이서구를 제외하면 북학의 선구자들이었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통덕랑(通德郞) 이성호(李聖浩)의 아들로 집안의 당색은 노론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형암(炯庵)·청장관(靑莊館) 등이며 본관은 전주다. 가난 속에서도 평생 서책과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사후 평소 그를 아꼈던 정조의 특명과 도움으로 시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8권4책)가 간행되었고, 초년기, 장년기의 필사본 시문집 및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사소절(士小節)』, 『청비록(淸脾錄)』,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의 저술이 아들 이광규(李光葵)에 의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필사본)로 정리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D%95%EB%AC%B4

 

이덕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덕무(李德懋, 1741년 7월 23일(음력 6월 11일) 출생 ~ 1793년 3월 7일(음력 1월 25일) 서거)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소위 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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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자는 혜풍(惠風)·혜보(惠甫), 호는 영재(齋)·고운당(古芸堂),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본디 집안의 당색은 소북(小北)이나 유득공의 조부, 부친대에서는 달성 서씨 등 소론계와 절친히 교유하였다. 부친 유춘(柳瑃)이 27세로 요절하여, 편모 슬하에서 고학(苦學)하였다. 177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시문에 능하여 청 이조원으로부터 ‘동국의 문봉(文鳳)’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문학 외에 역사·고거학에도 해박하여 저서로 『발해고(渤海考)』, 『경도잡지(京都雜志)』, 『령재집(泠齋集)』,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사군지(四郡志)』,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을 남겼다. 총 3차 연행하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7656

 

영재집(泠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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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자는 재선(在先)·수기(修其)·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 또는 위항도인(葦杭道人), 만년에는 정유(貞)로 고쳤다. 본관은 밀양으로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庶子)다. 당색은 소북이다. 1778년 5월 사은(謝恩) 정사 체제공(蔡濟恭)을 따라 처음으로 연경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이덕무 또한 서장관 심염조를 따라 같이 입연하였다), 명사들과 교유하는 한편 청의 문물 제도와 각종 시설을 세밀히 관찰하고 돌아와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시문집으로는 『정유집(貞集)』 등이 있다. 총 4차례 연행을 하였던 바 1801년을 전후해서는 그의 『정유고략(貞藁略)』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C%EA%B0%80

 

박제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초정 박제가 선생 조선국의 전설서 별제 임기 1785년 ~ 1791년 군주 정조 이산 조선국의 오위도총부 오위장 임기 1794년 ~ 1795년 군주 정조 이산 조선국의 경기도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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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저서

  • 북학의(北學議)
    • 《정유집》(貞否集)
  • 《정유각집》 박제가의 시문집. 정민의 국역서도 출판됨.
  • 明農草稿
  • 武藝圖譜通志》 - 백동수 이덕무와 공저.
  • 韓客巾衍集
  • 정유시고(貞否詩稿)

 

ⓓ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齋)·강산(薑山)·석모산인(席帽山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서구는 선조(宣祖)의 열두 번째 왕자인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후손으로, 부친은 정언(正言)을 지낸 이원(李遠)이다. 당색은 노론이다. 영조 50년(1774)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고 순조 24년(1824)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오희상은 그를 “초년에는 시율(詩律)로 울렸고, 중년에는 정치로 이름을 날렸으며, 만년에는 경술로 자오(自娛)하였다”고 평하였다. 저서로 『강산초집(薑山初集)』, 『척재집(齋集)』, 『강산필치(薑山筆)』, 『청수당필기(淸修堂筆記)』 등이 있다.

ⓔ 유금(柳琴, 1741-1788, 초명은 璉)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편자,
유득공의 숙부로 자는 탄소(彈素), 호는 기하주인(幾何主人)이다. 그는 거문고와 책을 아주 좋아했으며, 천문과 기하학에 정통했다. 정조는 즉위와 함께 규장각을 설치하고 훌륭한 인재를 뽑아 우문지지(右文之治)의 교두보로 삼았는데 1779년에는 서얼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徐理修)를 검서관에 임명하는 전대에 없었던 특채를 하였다. 이들이 이른바 '사검서관(四檢書官)'이다.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은 이 중 서이수를 제외한 3인에 이서구가 낀 것으로, 3인은 모두 서얼이나 이서구는 경화벌열 양반이다. 이들은 모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제자 '북학(北學)'이라는 공동의 학문적·사상적 지향을 가졌다.
유금(柳琴)은 영조 52년(1776)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연행 부사(副使)인 서호수(徐浩修)를 수행하여 연경에 다녀왔다. 그 때 이 네 사람의 시를 선집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가지고 가서 청의 문인들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평어(評語)는 물론 서문까지 받아 귀국하였다.

 

[참고]

한문사대가

https://kydong77.tistory.com/10865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월상계택(月象谿澤)이정구,신흠, 장유,이식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조선 중기 한문학 문장에

kydong77.tistory.com

상계택(象谿澤)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첫째 당송 팔가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아 고문을 쓰려고 노력한 점,

둘째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셋째 화려한 가문의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이들은 중세적인 관료 문학을 대표하는 이들로 보인다.

 

 

북학파 후사가박지원을 따르며 배운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 이 네 사람을 말함.

https://leeza.tistory.com/5889

 

박제가 - 송백영숙기린협서(送白永叔基麟峽序)

기린협으로 떠나는 강직한 무사 백영숙송백영숙기린협서(送白永叔基麟峽序) 박제가(朴齊家) 天下之至友曰窮交, 友道之至言曰論貧. 嗚呼! 靑雲之士, 或枉駕於蓬蓽; 韋布之流, 或曳裾于朱門, 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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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영숙기린협서(送白永叔基麟峽序)

기린협으로 떠나는 강직한 무사 백영숙

ㅡ 박제가(朴齊家)

 

天下之至友曰窮交, 友道之至言曰論貧.

嗚呼! 靑雲之士, 或枉駕於蓬蓽; 韋布之流, 或曳裾于朱門, 何其相求之深而相合之難也? 夫所謂友者, 非必含杯酒, 接殷勤, 握手促膝而已也. 所欲言而不言, 與不欲言而自言, 斯二者, 其交之深淺, 可知已.

夫人莫不有恡, 故所私莫過於財; 亦莫不有求, 故所嫌莫甚於財, 論其私而不嫌, 而况於他乎! 『詩』云: “終窶且貧莫知我艱.” 夫我之所艱, 人未必動其毫髮. 故天下之恩怨, 從此而起矣.

彼諱貧而不言者, 豈盡無求於人哉? 然而出門强笑語, 寧能數擧今日之飯與粥乎?

歷陳平生, 而猶不敢問其咫尺之扃鐍, 則幾微之際, 而至難言者, 存焉耳. 必不得已而略試之, 善導而中其彀, 漠然不應於眉睫之間, 則向之所謂欲言而不言者, 今雖言之, 而其實與不言同. 故多財者, 患人之求, 則先稱其所無, 斷人之望, 則故有所不發. 則其所謂含杯酒, 接殷勤, 握手促膝者, 擧不勝其悲凉躑躅, 而不悵然失意而歸者, 幾稀矣.

吾於是乎知論貧之爲不可易得, 而向者之言, 蓋有激而云然也. 夫窮交之所謂至友者, 豈其𤨏細鄙屑而然乎? 亦豈必僥倖可得而言哉?

所處同, 故無形迹之顧; 所患同, 故識艱難之狀而已. 握手勞苦, 必先其飢飽寒煖, 問訊其家人生産, 不欲言而自言者, 眞情之惻怛而感激之使然也. 何昔之至難言者, 今之信口直出而沛然, 莫之能禦也? 有時乎入門長揖, 竟日無言, 索枕一睡而去, 不猶愈於他人十年之言乎? 此無他. 交之不合, 則言之而與不言同, 其交之無間, 則雖黙然兩相忘言, 可也. 云 : “白頭而新, 傾蓋而故.” 其是之謂乎!

 

吾友白君永叔, 負才氣, 遊於世三十年, 卒困無所遇. 今將携其二親, 就食深峽.

嗟乎! 其交也以窮, 其言也以貧, 余甚悲之. 雖然, 夫吾之於永叔, 豈特窮時之交而已哉? 其家未必有並日之煙, 而相逢猶能脫珮刀典酒而飮, 酒酣, 嗚嗚然歌呼, 嫚罵而嬉笑, 天地之悲歡, 世態之炎凉, 契濶之甘酸, 未嘗不在於中也.

嗟乎! 永叔豈窮交之人歟? 何其數從我而不辭也?

 

永叔早知名於時, 結交遍國中. 上之爲卿相牧伯, 次之爲顯人名士, 亦往往相推許. 其親戚鄕黨婚姻之誼, 又不一而足. 而與夫馳馬習射擊劒拳勇之流, 書畵印章博奕琴瑟醫師地理方技之倫, 以至市井皁輿耕漁屠販之賤夫, 莫不日逢於路而致款焉. 又踵門而至者, 相接也. 永叔又能隨其人, 而顔色之, 各得其歡心. 又善言山川謠俗名物古蹟及吏治民隱軍政水利, 皆其所長. 以此而遊於諸所交之人之多, 則亦豈無追呼得意, 淋漓跌蕩之一人?

而獨時時叩余門, 問之則無他往. 永叔長余七歲, 憶與余同閈而居也, 余尙童子, 而今焉已鬚矣. 屈指十年之間, 容貌之盛衰若斯, 而吾二人者, 猶一日也. 卽其交可知已.

嗟乎! 永叔平生重意氣. 嘗手散千金者數矣, 而卒困無所遇, 使不得糊其口於四方. 雖善射而登第, 其志又不肯碌碌浮沈取功名.

今又絜家屬, 入基麟峽中, 吾聞基麟古𧴖國, 險阻甲東海. 其地數百里, 皆大嶺深谷, 攀木杪以度, 其民火粟而板屋, 士大夫不居之. 消息歲僅得一至于京. 晝出則惟禿指之樵夫, 鬅髮之炭戶, 相與圍爐而坐耳. 夜則松風謖謖繞屋而磨軋, 窮禽哀獸, 鳴號而響應. 披衣起立, 彷徨四顧, 其有不泣下沾襟, 悽然而念其京色者乎!

嗟乎! 永叔又胡爲乎此哉! 歲暮而霰雪零, 山深而狐兎肥, 彎弓躍馬, 一發而獲之, 據鞍而笑, 亦足以快齷齪之志, 而忘寂寞之濱也歟! 又何必屑屑於去就之分, 而戚戚於離別之際也! 又何必覓殘飯於京裏, 逢他人之冷眼, 從使人不言之地, 而作欲言不言之狀也!

永叔行矣! 吾向者窮而得友道矣. 雖然, 夫吾之於永叔, 豈特窮時之交而已哉. 

『貞蕤閣文集』 卷之一

 

[해석]

天下之至友曰窮交,

천하의 지극한 우정이란 ‘곤궁할 때의 사귐’이라 말하고

 

友道之至言曰論貧.

우정의 도에 대한 지극한 말은 ‘가난을 논의하는 것’이라 말한다.

 

嗚呼! 靑雲之士, 或枉駕於蓬蓽;

아! 청운의 뜻을 지닌 선비는 간혹 굽혀 가난한 집【蓬蓽: 쑥이나 가시덤불로 지붕을 이었다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의 집을 이르는 말】에 수레 타고 오기도 하고

 

韋布之流, 或曳裾于朱門,

포의【韋布: 누추한 옷차림이라는 뜻으로, 벼슬하기 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를 입은 부류는 간혹 권세가의 집에서 옷깃을 끌기도 하니

 

何其相求之深而相合之難也?

어째서 서로 구하는 것이 극심한데도 서로 합치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夫所謂友者, 非必含杯酒,

대저 소위 벗이란 반드시 술잔을 머금고

 

接殷勤, 握手促膝而已也.

은근하게 통해 손을 맞잡고 무릎을 대고 마주 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所欲言而不言, 與不欲言而自言,

말하고자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하려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말하는 것,

 

斯二者, 其交之深淺, 可知已.

이 두 가지는 사귐의 깊고 옅음을 알 수 있다.

 

夫人莫不有恡, 故所私莫過於財;

무릇 사람은 인색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사사로운 것은 재물보다 지나치는 게 없고

 

亦莫不有求, 故所嫌莫甚於財,

또한 추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은 재물보다 심한 게 없으니

 

論其私而不嫌, 而况於他乎!

사사롭지만 미워하지 않음만을 논의하니 하물며 다른 건 오죽할까.

 

『詩』云 : “終窶且貧莫知我艱.

『시경』에서 “종일토록 가난하고도 또 가난한데 나의 어려움 알아주질 않네.”라고 말했다.

 

夫我之所艱, 人未必動其毫髮.

대체로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을 사람들은 반드시 터럭만큼도 움직여주지 않는다.

 

故天下之恩怨, 從此而起矣.

그러므로 천하의 은혜와 원한이 이로부터 일어난다.

 

彼諱貧而不言者, 豈盡無求於人哉?

자신의 가난을 꺼려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어찌 다 남에게 추구할 게 없겠는가?

 

然而出門强笑語,

그러나 문에 나가 억지로 웃으며 말하더라도

 

寧能數擧今日之飯與粥乎?

어찌 오늘 밥을 먹을지 죽을 먹을지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는가?

 

歷陳平生, 而猶不敢問其咫尺之扃鐍,

평생의 일을 일일이 진술하면서도 오히려 감히 가까운 곳의 빗장 자물쇠에 대해 묻질 않는 것은

 

則幾微之際, 而至難言者, 存焉耳.

기미가 있는 즈음에 지극히 어려운 말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必不得已而略試之,

반드시 부득이하게 대략 그걸 시험해보려

 

善導而中其彀, 漠然不應於眉睫之間,

잘 이끌어 과녁에 적중했더라도 막연히 눈썹 사이에서 반응이 없으면

 

則向之所謂欲言而不言者,

앞에서 말했던 ‘말하고자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이니

 

今雖言之, 而其實與不言同.

이제 비록 말했다하더라도 실제로는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故多財者, 患人之求,

그러므로 많은 재물을 지닌 사람이 남이 요구할까 걱정하여

 

則先稱其所無, 斷人之望,

먼저 없는 것을 말하며 남의 바람을 잘라버린다면

 

則故有所不發.

발설하지 못하는 게 있게 된다.

 

則其所謂含杯酒, 接殷勤,

그리하면 앞에서 말했던 ‘술잔을 머금고 은근하게 통해

 

握手促膝者, 擧不勝其悲凉躑躅,

무릎을 대고 마주 앉았던 사람’도 대거 슬픔과 처량함과 머뭇거림을 이기지 못해

 

而不悵然失意而歸者, 幾稀矣.

슬퍼하며 실의한 채 돌아가지 않을 사람은 거의 드물리라.

 

吾於是乎知論貧之爲不可易得, 而向者之言,

나는 이에 가난함을 논의함이 쉽게 얻을 수 없으며 앞서 말했던 것이

 

蓋有激而云然也.

대체로 격동함이 있어 말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夫窮交之所謂至友者,

대저 ‘곤궁할 때의 사귐이 지극한 우정’이라 말한 것이

 

豈其𤨏細鄙屑而然乎?

어찌 자질구레하고 비루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亦豈必僥倖可得而言哉?

또한 어찌 반드시 요행으로 얻을 수 있기에 말한 것이겠는가.

 

所處同, 故無形迹之顧;

처한 게 같기 때문에 돌아볼 자취가 없고

 

所患同, 故識艱難之狀而已.

걱정하는 게 같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알 뿐이다.

 

握手勞苦, 必先其飢飽寒煖,

손을 맞잡고 수고할 때엔 반드시 굶주림과 배부름, 차가움과 따스함을 먼저 하고서

 

問訊其家人生産,

그 집사람의 살림을 물어야 하니

 

不欲言而自言者, 眞情之惻怛而感激之使然也.

‘말하려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말하는 것’이라는 건 진정 슬퍼하고 감격하여 그리하게 된 것이다.

 

何昔之至難言者, 今之信口直出而沛然,

어째서 예전에 지극히 어렵던 말이 지금은 입을 따라 곧이곧대로 쏟아져 나와

 

莫之能禦也?

막을 수가 없는 것인가?

 

有時乎入門長揖, 竟日無言,

이따금 문에 들어가 길게 읍하고 날이 마치도록 말 없이

 

索枕一睡而去, 不猶愈於他人十年之言乎?

베개를 찾아 한숨 자고 떠나도 타인과 10년 동안 말한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此無他.

이것은 다른 게 없다.

 

交之不合, 則言之而與不言同,

사귐에 합치되지 않으면 말했더라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고

 

其交之無間, 則雖黙然兩相忘言, 可也.

사귐에 동떨어지지 않으면 비록 묵묵히 둘이 서로 말을 잊었더라도 괜찮다.

 

云 : “白頭而新, 傾蓋而故.”

『설원(說苑)』에서 “흰 머리가 되도록 오래 만났는데도 낯설지만 잠깐 만난 사이인데도 친근하다.”라고 한 것이,

 

其是之謂乎!

이것을 말한 것이로구나.

 

吾友白君永叔, 負才氣,

나의 벗 백영숙은 재기를 자부하고

 

遊於世三十年, 卒困無所遇.

세상에 30년 동안 유람하였는데 마침내 곤궁하여 불우했다.

 

今將携其二親, 就食深峽.

이제 장차 두 친구를 데리고 깊은 기린협으로 나아가 먹으려 한다.

 

嗟乎! 其交也以窮,

아! 사귐은 곤궁함으로 하였고

 

其言也以貧, 余甚悲之.

말함은 가난함으로 하였으니 나는 매우 슬프다.

 

雖然, 夫吾之於永叔,

비록 그러나 내가 영숙에 대해

 

豈特窮時之交而已哉?

어찌 다만 곤궁할 때의 사귄 사람이기만 하겠는가.

 

其家未必有並日之煙,

집에 반드시 이틀 간의 땔감이 없었는데도

 

而相逢猶能脫珮刀典酒而飮,

서로 만나면 오히려 차던 칼을 풀어 전당잡히고 술을 마셨고

 

酒酣, 嗚嗚然歌呼, 嫚罵而嬉笑,

술이 취하면 목청껏 노래를 불렀으며 욕지꺼리하고 웃어재꼈으니

 

天地之悲歡, 世態之炎凉, 契濶之甘酸,

천지의 슬픔과 기쁨, 세태의 따스함과 서늘함, 만나고 헤어짐의 달콤함과 시큼함이

 

未嘗不在於中也.

일찍이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嗟乎! 永叔豈窮交之人歟?

아! 영숙은 어찌 곤궁할 때 사귄 사람이겠는가?

 

何其數從我而不辭也?

어째서 자주 나를 따르면서도 사양하지 않았는가?

 

永叔早知名於時, 結交遍國中.

영숙은 일찍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두루 나라에서 사람을 사귀었다.

 

上之爲卿相牧伯,

위로는 도승지ㆍ재상ㆍ목사ㆍ관찰사가 된 사람과

 

次之爲顯人名士,

다음으론 현달한 사람과 이름난 선비가 된 사람이

 

亦往往相推許.

또한 이따금 서로 추천하여 허락하였다.

 

其親戚鄕黨婚姻之誼, 又不一而足.

친척과 마을에 혼인으로 우의를 다진 사람이 또한 한 둘이 아니었다.

 

而與夫馳馬習射擊劒拳勇之流,

말을 달리고 화살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주먹질 하는 부류들과

 

書畵印章博奕琴瑟醫師地理方技之倫,

화가나 조각가, 국수, 연주가, 의사, 풍수지리가, 점성술 등의 부류들과

 

以至市井皁輿耕漁屠販之賤夫,

저자거리의 수레꾼과 농부, 어부, 상인의 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莫不日逢於路而致款焉.

날마다 길에서 만나면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又踵門而至者, 相接也.

또한 문을 밟고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접대하였다.

 

永叔又能隨其人, 而顔色之,

영숙은 또한 그 사람에 따라 안색을 바꿔

 

各得其歡心.

각각 환심을 얻을 수 있었다.

 

又善言山川謠俗名物古蹟及吏治民隱軍政水利,

또한 산천의 민요나 명물, 오랜 유적 및 관리의 다스림, 백성의 깊은 속, 군정【軍政: 전쟁이나 사변 중에 점령 지역의 군사령관이 임시로 행하는 통치 행위】과 수리【水利: 물을 식수, 관개용, 공업용 등으로 이용함】들을 잘 말했는데

 

皆其所長.

모두 장점인 것이었다.

 

以此而遊於諸所交之人之多,

이것으로 뭇 교유한 많은 사람들과 논다면

 

則亦豈無追呼得意, 淋漓跌蕩之一人?

또한 어찌 뜻을 얻어 땀 흥건하고 질탕하게 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겠는가.

 

而獨時時叩余門, 問之則無他往.

그러나 홀로 이따금 우리집 문을 두드리니 물으면 다른 데 갈 데가 없다고 한다.

 

永叔長余七歲, 憶與余同閈而居也,

영숙은 나보다 7살 위로 나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것을 기억해보면

 

余尙童子, 而今焉已鬚矣.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는데 지금은 이미 수염이 났다.

 

屈指十年之間, 容貌之盛衰若斯,

10년을 손꼽는 사이에 용모의 성쇠가 이와 같지만

 

而吾二人者, 猶一日也.

우리 두 사람은 오히려 어제 만난 것 같다.

 

卽其交可知已.

곧 그 사귐을 알 만할 뿐이다.

 

嗟乎! 永叔平生重意氣.

아! 영숙은 평생 의기를 중하게 여겼다.

 

嘗手散千金者數矣, 而卒困無所遇,

일찍이 손수 천금을 흩은 게 여러 번으로 마침내 곤궁하여 불우하였고

 

使不得糊其口於四方.

그 입에 사방에서 풀칠할 수가 없었다.

 

雖善射而登第,

비록 활을 잘 쏘고 급제했지만

 

其志又不肯碌碌浮沈取功名.

그 뜻은 또한 만만하게 남을 따라 뜨고 가라앉으며 공명을 취하길 즐거워하지 않았다.

 

今又絜家屬, 入基麟峽中,

이제 또한 집사람들을 이끌고 기린협으로 들어가니

 

吾聞基麟古𧴖國, 險阻甲東海.

내가 듣기로 기린협은 예전 예맥국의 땅으로 험하고 좁기가 동해에서 갑이란다.

 

其地數百里, 皆大嶺深谷,

그 땅 수백 리는 모두 큰 고개와 깊은 골짜기로

 

攀木杪以度, 其民火粟而板屋,

나뭇가지를 잡고서 건너며 그 백성들은 화전을 일구고 초가를 엮으니

 

士大夫不居之.

사대부는 살지 않는다.

 

消息歲僅得一至于京.

소식은 한 해에 겨우 한 번 서울에 이를 수 있다.

 

晝出則惟禿指之樵夫,

낮에 나가면 오직 거칠어진 손가락의 나무꾼과

 

鬅髮之炭戶, 相與圍爐而坐耳.

머리 헝클어진 숯쟁이와 서로 화로에 둘러 앉아 있을 뿐이리라.

 

夜則松風謖謖繞屋而磨軋,

밤이 되면 솔바람이 집을 에워싸서 불어 흔들고

 

窮禽哀獸, 鳴號而響應.

배고픈 새들과 슬픈 짐승이 울어대니 그 소리에 모두 응답할 것이다.

 

披衣起立, 彷徨四顧,

옷을 떨치고 일어나 방황하며 사방을 둘러보면

 

其有不泣下沾襟, 悽然而念其京色者乎!

눈물 흘러 옷을 적셔 서글피 서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嗟乎! 永叔又胡爲乎此哉!

아! 영숙은 또한 어찌 이것을 하는 것인가?

 

歲暮而霰雪零, 山深而狐兎肥,

한 해 말에 싸리눈이 내리면 산이 깊어 여우와 토끼가 살찌리니

 

彎弓躍馬, 一發而獲之,

활을 당기고 말을 타 한 번 발사하여 잡고

 

據鞍而笑, 亦足以快齷齪之志,

안장에 앉아 웃으니 또한 악착스런 뜻을 풀어내기에 충분해

 

而忘寂寞之濱也歟!

적막한 바닷가임을 잊을 수 있으리라.

 

又何必屑屑於去就之分, 而戚戚於離別之際也!

또한 하필 거취의 나누어짐에 신경 쓰며 이별의 경계에서 근심하겠는가.

 

又何必覓殘飯於京裏, 逢他人之冷眼,

또한 하필 서울 속에서 남은 밥을 찾느라 다른 사람의 냉대를 만나고

 

從使人不言之地, 而作欲言不言之狀也!

사람에게 말하지 못할 처지에 있으면서 말하려 해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겠는가.

 

永叔行矣! 吾向者窮而得友道矣.

영숙의 떠남이여! 나는 예전에 곤궁함에도 벗의 도리를 얻었다.

 

雖然, 夫吾之於永叔,

비록 그러나 대저 나는 영숙에 대해

 

豈特窮時之交而已哉. 

어찌 다만 곤궁한 때에 사귄 이일 뿐이겠는가.

貞蕤閣文集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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