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에 있는 소위 '명성황후 생가'. 너무 호화판으로 복원해놓아 사실성이 없다>

[주]중학동기 홈피에 올라온 남성원 작가가 요약한 글을 세 차레에 걸쳐 올린다.

여우사냥은 민비살해사건의 입본측 작전명이다.

- ‘여우사냥’은 왜놈들의 민비 살해작전 암호명이었다.
청․러․일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며 꿋꿋하게 독립국의 자존을 이어가는 민비,
하루 빨리 조선을 침탈하여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던 왜국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민비가 시해되고 이에 앞장선 우범선을 자객 고영근이 왜국까지 쫓아가 살해하는 근대사의

한 구비,
나는 이 중에서 민비가 살해되는 장면까지만 그리려 한다.
고영근이 우범선을 살해한 일에는 도통 흥미가 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종각의 「명성황후 복수기」를 「여우사냥」으로 제목을 바꾸어3 회에 걸쳐

들여다보려고 한다.
이 부분은 용균아재가 제안한 대원군과 민비의 관계 중 맨 마지막이 될 터이다.
순서 좀 바뀌었다고 경찰에서 소환할 일은 없을 터, 앞부분은 자료를 구하는 대로 다시

엮어볼 참이다.
술 마시다 시간이 좀 남으면. -

뜨는 일본, 지는 청국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1895년)로 일약 아시아의 새 맹주로 부상하면서 조선에 대한 보다

강력한 지배권 행사에 들어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었다.
500년 사직이 무기력한 왕과 세도가의 전횡으로 그처럼 허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었고 이노우에 주한공사는 김홍집 내각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청일전쟁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청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1. 조선을 청국으로부터 독립시킨다.
2. 청국은 3억 엔을 배상한다.
3. 청국은 요동반도․대만․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이 치욕적인 항복조약에 러시아가 발끈하고 나섰다.
시베리아철도 건설에 착수하여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로서는 요동반도를 일본에

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독일과 연대하여 요동반도를 청국에 돌려주라고 요구했다.

(삼국간섭)
당시 러시아는 세계 최강의 극동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군사적 강국이었다.
아직은 러시아와 대적할 군비를 갖추지 못한 일본은 이 요구에 굴복하여 제까닥 요동반도를

돌려주었다.
청국에 요동반도를 돌려주는 대신 일본은 배상금을 높여 러시아를 타도할 대대적인 군비

확충에 들어갔다.

삼국간섭의 위력을 지켜본 조정에서는 민비를 중심으로 친러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각료는 대거 친러파로 교체되었고 친러정책이 속속 입안되었다.
이노우에 공사는 고압적인 태도에서 돌변하여 민비에게 뇌물을 바치고 거액의 차관을

제안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이노우에의 차관 제안은 일본 의회의 제동으로 성사되지 못했으며, 대신 일본 정계는 민비

제거계획에 착수했다.
한편 민비의 외교정책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어느 나라를 등에 업든 독립을 유지하려면 국력이 튼실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국제

관계의 함수를 간과한 일이었다.
민비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군비확충 등 실질적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의지나

계획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일본 총리 이등방문은 주한 공사를 육군중장 출신 미우라로 교체했다.
군 출신을 주한 공사로 내정한 건 민비를 제거하여 조선의 친러정책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이등방문은 전 각료를 참석시킨 대대적인 환송연을 베풀어줌으로써 미우라의 민비 시해

계획을 격려했다.
미우라는 일본의 대표적 낭인 3명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건너왔다.
사무라이의 후예인 낭인들은 일본 정․재계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때 함께 온 낭인 스나가는 우범선과 친교를 맺은 뒤 그가 죽은 뒤에도 유족들과 깊은

관계를 이어간다.
민비는 내각에서 친일세력을 몰아내고 친러파를 대거 기용함으로써 일본에 대립각을 세웠다.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 일본 장교들에게 훈련대 해산계획을 누설한 건 민비 시해

11일 전부터였다.
우범선은 중대한 국가 기밀을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장교들에게 누설했다.
조선훈련대는 친일 성격의 왕실 근위대였다.
주한 일본공사관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내 유일한 일본어 신문인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가 민비를 시해할 낭인 공급을 맡았다.
일본공사 미우라는 아다치를 불러 낭인들에게 줄 보수 6천엔을 전했다.
현재 가치로 약 9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1895년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 공사가 주관하는 ‘여우사냥’ 최종 점검회의가

열렸다.
거사일은 10월 10일로 정해졌다.
우범선은 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의 거취에 대한 최종 협의를 마쳤다.
민비에 의해 마포 별장 ‘아소정’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은 일본이 제시한 4개항에 동의함

으로써 ‘여우사냥’에 동참했다.

10월 8일로 훈련대 해산을 결정한 조정은 10월 7일 군부대신 안경수를 일본공사관에 보내

일정을 통보했다.
미우라는 즉각 10일로 예정되어 있던 ‘여우사냥’ 계획을 앞당겼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힘의 균형이 무너져 계획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도 일본공사관에 찾아와 여러 인사들과 거사계획을 협의했다.
D-day는 10월 8일 새벽 4시 반, 사냥꾼은 일본 낭인들로 정해졌다.
7일 밤, 우범선은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에게 보고하지 않고 야간훈련을 명분으로 병사들에게

실탄을 지급하여 출동시켰다.
같은 시간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차기 궁내부대신에 발탁된 민영준을 위한 축하연이 열리고

있었다.
건청궁에서 친정 피붙이 민영준 축하연의 풍악소리를 들으면서, 민비는 조용히 생애 최후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먼 미래에서 애잔한 노래 한 자락이 바람결에 실려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강은경 작사. 이경섭 작곡. 조수미 노래 <나 가거든>의 일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