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부인전(灌夫人傳)[下]
眞人이 曰,
백수진인이 말했다.
「將軍이 性急如火하매
進銳退速하니 莫如圍而灌之라.」한즉,
“장군의 성질이 불같이 급해서
날쌔게 들어갔다가 재빨리 물러나곤 하니
에워싸고서 물을 대느니만 같지 못하오.”
夫人이 如其計策이 激水浸之어늘
부인이 그 계책과 같이 세찬 물로 (주장군을) 잠기게 했다.
將軍이 濡水露體하고 掀髥自得하야
竭盡死力而 蹂躪內地에
장군은 머리와 몸이 흠뻑 젖었으나
수염을 치켜세운 채 자득(自得)한 모습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내지(內地)를 유린하였다.
勞甚漚血하고 倒戈而還하니,
그러나 피로가 심하여 피거품이 일 정도가 되어
창을 거꾸로 들고 돌아가게 되었다.
夫人이 口角에 流沫하야 大罵曰,
부인이 입 언저리에 거품을 흘리면서 크게 꾸짖었다.
「向與諸公으로 同承君命하고
期得將軍頭하야 以報於天君이러니
使將軍으로 脫走는 咎在諸公이라.」
“지난번에 여러 공들과 함께 천군의 명을 받들어
주장군의 머리를 취하여 천군께 보답하기를 기약했는데
장군으로 하여금 도망가게 했으니
잘못이 제공(諸公)들에게 있도다.”
卽具啓於天君한대
天君이 卽召臍中書等하니
곧장 천군에게 갖추어 장계를 올리니
천군이 즉시 제중서(臍中書) 등을 불러들였다.
四人이 共謁對狀할세,
臍中書가 先對曰
네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알현했는데
제중서가 먼저 천군을 대하여 아뢰었다.
「臣이 潛伏峰頂하야 晝夜로 侯望將軍之動兵也러니
欲燃烽火則 輒爲衾風之所滅하야
此臣이 所以未及擧火也니이다.」
“신은 산꼭대기에 잠복하여 밤낮으로 살펴보다가
장군의 군사가 움직이기에 봉화를 올리고자 했으나
문득 이불자락이 뒤치는 바람에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봉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黃門郞이 繼進曰
황문랑(黃門郞)이 이어서 진언했다.
「臣이 常慮患하야 時ㄷ放砲에
嚴備以待將軍之入關也러니
“신은 항상 환난을 걱정해서 때때로 포를 쏘면서
엄중한 수비를 하면서 장군이 관문에 들어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將軍이 先以生皮囊으로 盛石兩塊하야
亂擊臣耳頰에 使不得措/(p.170.)手足하니
此臣이 所以未及吹鑼也니이다.」
그런데 장군은 먼저 생가죽 주머니에 두 개의 돌덩어리[불알을 가리킴]를 담아다가
신의 귀와 뺨에다가 어지러이 들어다놓아 손발을 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징을 울리지 못하게 된 까닭입니다.”
毛參軍이 前對曰
모참군(毛參軍)이 앞으로 나와 답해 말하였다.
「臣이 整齊羽林하야 持索以侯로되
將軍이 勇銳가 絶倫하야
或進或退에 勢甚神速故로
以臣之綿力으론 實難擊致어늘
非臣이 不能盡心也니이다.」
“신은 우림(羽林)을 가지런히 정비하고서 끈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군은 용맹하고 날래기가 아주 뛰어나서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나고 하는 형세가 심히 귀신처럼 재빨랐던 까닭에
신의 비단결 같이 약한 힘으로는
실로 묶어 잡아오기가 어려웠던 것이지
신이 진심으로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弦防禦가 又進對曰
현방어(弦防禦)가 또 앞으로 나와 대답하여 아뢰었다.
「臣等이 任北門之鎖鑰하야 脣齒相依에 左右控弦이러니
“신등은 북문을 잠그는 일을 맡으면서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좌우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었습니다.
將軍이 馳入壁門에 直犯內閘하야
左衝右突에 神出鬼沒하고
渾身이 流汗故로 滑不能捉하니
그런데 주장군이 벽문으로 치달려 들어오더니
곧장 갑(閘)문의 안쪽을 침범하는데
신출귀몰하듯이 좌충우돌하느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는 까닭에
미끄러워서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以臣菲質로 難可生擒이라.
非臣이 不能用命也니이다.」
신의 보잘것없는 자질로서는
살아있는 채로 잡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명령을 받들지 않았음이 아니옵니다.”
閘御史가 頂朱冠하고 兀然獨立하야
頗有自矜之色曰
이번에는 갑어사(閘御史)가 머리에 붉은 빛깔의 관[陰核]을 쓰고
우뚝 홀로 서 있다가 자못 긍지를 느끼는 얼굴빛을 하고서 말했다.
「將軍이 突入力戰也에
臣이 用朱亥故事하야 狙擊後腦則
將軍이 流骨髓出關而斃어늘
“장군이 깊이까지 들어와 전력을 다하여 싸우고 있을 때
신은 주해(朱亥)의 고사를 써서 그 뒤통수를 저격(狙擊)하였더니
곧 장군은 골수(骨髓)를 흘리면서 관문 밖으로 뛰쳐나가 죽어버렸습니다.
今日之功은 臣이 不足多讓於人也이라.」라 한대,
오늘의 공로는 신이 다른 사람에게 크게 양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天君曰「汝之功 大矣라.」하고
천군(天君)이 말했다.
“그대의 공이 크도다.”
卽命拜謁者僕射하야 常置夫人幕下하니
즉시 알자복야(謁者僕射)의 벼슬을 내리고
항상 관부인의 장막 가운데에서 지내게 하였다.
夫人이 亦愛其峭直하야 全委內事러니
부인 역시 그의 우뚝 솟아 꼿꼿함을 사랑하여
내무 행정 일체를 맡기었다.
及其年老에 嘗一請謁則 夫人이 以手撫頂 歎曰
그러나 그도 나이가 들어 늙고 말았다.
일찍이 알자(謁者)를 한번 청하여 불러들였을 적에
부인이 손으로 그이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탄식했다.
「惜乎라.謁者가 已衰矣로다.
“애석하도다! 알자(謁者)도 그만 쇠약해졌구려.
昔之渥丹이 變成蒼黃하고
曩日光銳가 反爲冗長하니
欲與君으로 食肉富貴하야 共保其樂이 烏可久耶아?」
예전의 그 윤기 있고 불그레했던 모습은
혹 창졸간에 누렇게 변해버리기도 하고,
지난날 날카롭던 서슬은 오히려 늘어져 처지게 되었으니,
그대와 더불어 육고기를 먹으며
부귀의 그 즐거움을 함께 간직하고 싶었는데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오?”
對曰,「臣이 居中에 事多歷年하야
成功之下에 不可久留라.
대답했다.
“신이 여기서 지내고 있던 중에는 일도 많았고 세월도 오래되었는데
공을 이룬 다음에는 오래 머무르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지요.”
遂退居于赤岸兩谷間이러니 終焉에
드디어 퇴거하여 두 골짜기 사이의 붉은 언덕[赤岸]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치었다.
其雲이 仍散하야 處於中國則
夷狄이 其麗不億에 惟居女國者는
寡處不嫁하야 每令女孫으로 承其祀云이러라.」
(부인의) 먼 후손들은 중국에 흩어져 살았으니
이적(夷狄)과 같은 야만인들은 그 빛남을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여인국(女人國)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과부는 시집가지 아니한 채 늘 딸이나 손녀로 하여금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 한다.
史臣曰
사신(史臣)은 논평한다.
夫人之德이 其至矣乎인저.
“부인의 덕은 지극하도다.
溫潤之性이 能使人心歸向하고
生殺之權이 能與春秋匹美하니
따사하고 촉촉한 성품은 능히 사람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 있었고,
죽이고 살리는 엄정한 권도(權道)가 춘추(春秋)와 훌륭한 짝이 될 수 있었다.
開闔則 順陰陽之理하고
含忍則 有容物之度라.
열었다 닫았다 함에 있어서는 음양의 도리를 따랐고
받아들여서 견딤에 있어서는 대상을 용납하는 도량을 지녔으며
其他 承乾主成之德이 有不可殫記어늘
그 나머지 뽀송뽀송함을 이어가다가도
성덕(成德)을 지켜나가는 일 따위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後에 有人이 作夫人小池詩一絶曰,
뒷날 어떤 사람이
‘부인의 작은 연못’이란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兩脚山中에 有小池하니
池南池北에 艸離ㄷ라.
無風白浪이 翻天起하니
一目朱龍이 出入時라 한대
‘양각산(兩脚山) 가운데 작은 연못 있으니
연못의 위아래론 풀숲이 무성한데
바람 한 점 없어도 하늘마저 뒤집을 듯 흰 물결 일어남은
외눈박이 붉은 용이 들락날락하는 때라.’
亦可謂記實也라.
이 또한 여실한 기록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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