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422- 야생에서 사는 선비 (一書生)

 

한 선비가 혼자 산을 넘다가 길을 잃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선비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 사는 집은 보이지 않고,

근처에는 절도 없는지 종소리도 안 나는구나.

어디 바위틈에서라도 밤을 지낼 준비를 해야겠다.'

이러면서 커다란 바위 밑에 풀을 뜯어 자리삼아 깔고는 앉아 있었다.

 

그렇게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주변의 사물들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때 동쪽 산위로 달이 솟아올라 주위가 조금 밝아졌는데,

자세히 보니 무엇인가가 곁으로 다가와 앉는 것이었다.

 

선비가 정신을 가다듬고 보자사람인 듯하면서도

검은 털로 온몸을 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승인 듯했다.

 

이에 힘이 세고 몸집이 큰 선비는

그것의 다리를 잡고 힘껏 잡아당기자 아프다고 외치는데,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선비가 비로소 사람인 줄 알고 놀라며 물었다.

"너는 사람의 말을 하면서 왜 이런 산속에 있느냐?“

 

"이 다리를 놓으십시오그러면 내력을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선비는 확실히 사람이라 생각하고 잡은 손을 놓았다.

 

이에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내력을 얘기하는데,

그 사정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나는 본래 서울에 살던 양반 가문의 선비였습니다.

40여 년 전 집안에 갇혀 사는 것이 갑갑하여 가출한 뒤

영남 지방을 떠돌면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집에는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5년이 더 지나서 집으로 돌아가 대문 앞에 이르니,

집안에서 곡성이 들렸습니다.

 

잠시 걸음을 돌려 물러나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 보자,

그 집 바깥 주인이 오래 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필시 죽었다 생각하고 의복으로 장사를 치렀으며,

오늘 소상 제사를 지내는 중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들어가면 대혼란이 올 듯하여,

그 길로 산에 들어와 풀뿌리와 나무 열매로 연명하여 살다보니,

몸에 털이 이렇게 많이 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비는 다시 놀라면서

그가 살던 곳이며 서울에 살 때의 일들을 물으니,

그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모두 실제와 잘 맞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자기가 살던 집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내가 오랫동안 산속 생활을 하다 보니이제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밤 선비가 길을 잃고 여기서 밤을 새우려는 것을 보고,

짐승들의 피해를 걱정하여 보호해 주려고 온 것입니다.“

 

이리하여 밤새 함께 있다가 날이 새니,

그 사람은 산을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소리 내어 울면서 떠나갔다.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자니,

흡사 원숭이처럼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나는 듯이 나무들을 건너뛰며 사라졌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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