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생애

1783-1801:벼슬살이 18년에

1801-1818:유배살이 18년이라

욕이 절로 나오네요.

여기다 18년을 더하니 몰년이 되네요.

一表二書의 명저 남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

 

丁若鏞(1762-1836)/

p.416: 호는 茶山, 與猶堂. 학문적으로 유형원, 이익의 학통을 이었고, 사상적으로는 이이의 주자학과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하여 실학을 집대성함.

一表二書: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 저술.

시문학상의 위상은 조선시 선언, 풍부한 상징성에 의한 사회시, 대칭구조에 의한 고도의 우화시 등에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생애]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함.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됨.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됨.

 

세 번째 단계는, 1801년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의 일표이서(一表二書)를 통해 제시함.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

다음은 71세 작품인 <老人一快事>라는 시의 일부이다.

 

其五/(총 其六) 중에서

 

老人一快事

노인일쾌사 노인의 한 가지 즐거운 일은

縱筆寫狂詞.

종필사광사. 붓 가는 대로 미친 듯이 써 내려 가는 것.

競病不必拘

경병불필구 어려운 운자에 구애 받지 않고

推考不必遲.

퇴고불필지. 퇴고하느라 더디지도 않네.

興到卽運意

흥도즉운의 흥이 나면 곧 뜻을 싣고

意到卽寫之.

의도즉사지.

시상이 갖춰지면 곧 바로 시를 쓰지.

我是朝鮮人

아시조선인 나는 조선 사람이니

甘作朝鮮詩.

감작조선시. 달가이 조선시를 쓴다.

卿當用卿法

경당용경법 그대는 마땅히 그대 시법을 쓰야지

迂哉議者誰.

우재의자수. 오활하다 의론하는 자 누구인가.

區區格與律

구구격여율 구구한 중국의 격과 율을

遠人何得知.

원인하득지. 먼 곳 사람(필자주;조선인)이 어이 알랴.

(후12구 생략)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