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사 와불]

반야심경 해설 7.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② 공(空)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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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공(空)이 곧 해탈문(解脫門)이기 때문입니다.

공(空)이라는 해탈문(解脫門)을 통해 열반에 도착합니다.

무엇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일까요?

온갖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번민,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해탈하려면......반드시 이 공(空)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 공(空)의 뜻은 이전에 설명했듯이, 연기법의 실체를 말합니다.

모든 번뇌를 박살내 버리는 게 바로 공(空)입니다.

무명도 역시 박살내 버리는 게 바로 공(空)입니다.

집착하는 이유는 무명 때문이며,

무명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독립적인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공(空)이란 모든 것은 인연화합, 즉 연기적으로 존재하므로 거기엔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집착할 꺼리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무명도 박살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온갖 번뇌도 다 박살나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空)이 곧 해탈문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모조리 다 실체가 없습니다.

인간이건 그 어떤 존재건 사물이건 모조리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조리 다 공한 것입니다.

눈에 보여지고 들려지지만, 그 이면에는 그 어떠한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다 모양이 없습니다. 그래서 無相입니다.

모습이 없으므로 단 하나의 모양입니다. 그래서 一相입니다.

그러므로 一相이 無相입니다.

이것이 평등성입니다. 그 어떠한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분별하거나 따져서 헤아릴게 없게 됩니다.

이걸 알면 마음이 쉬게 됩니다. 더이상 분별하고 따질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쉽니다.

번뇌란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그걸 모두 쉬게 된다면, 바로 이 상태가 해탈이요, 마음의 평안입니다.

마음은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한, 계속 분주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주히 움직이며 이것저것에 집착하고 욕심내고, 욕심이 안이루어지면 화를 내면서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게 다 모든 것의 존재방식인 제법실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게 사실처럼 보여지니까 그걸 실제라고 믿는 건데 여기에 다 속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게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집착해봐야, 생겨나는 것은 결국 고통뿐입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부처님께서 알려주셨으며, 그 핵심이 바로 空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말씀하셨습니다.

삼해탈문이란 空/無相/無願입니다.

대승경전쪽에서는 無願을 無作으로도 한역해 놨습니다. 그래서 空/無相/無作입니다.

空 : 실체가 없이 텅 비었다는 뜻.

無相 : 텅 비어서 거기에는 그 어떤 모습/형체/형상이 없다는 뜻.

無願(無作) : 공하고 텅 비어 형상이 없으니 지음도 바램도 없다는 뜻.

이 삼해탈문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다만 자비로써 각자 중생의 특성에 따라 들어오도록 두개를 더 설명해 놓으신 것입니다.

진리는 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입니다.

空에는 어떤 모습이 없기 때문에 無相이며, 상이 없으니 뭘 바라거나 짓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無願입니다.

無相/無願은 空의 다른 이름입니다.

마치 집안의 가장이 부인에겐 남편으로 불리고,

아이들에겐 아빠로 불리고,

다른 사람에겐 아저씨로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배우려면, 또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이 空을 배워야만 합니다.

空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연기법을 배우는 게 순서입니다.

그리고 나서 실제 내 마음속에서 연기와 공을 직접 깨달아야 합니다.

근래 한국에 남방불교가 들어오고, 남방불교 경전인 니까야 등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부작용이 있는데,

몇몇 소승불자들과 대승불교를 욕하려는 타 종교인들이 空을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인들이야 뭐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만, 소승불자들도 몇몇이 이런데 휩쓸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뭘 모르는 소승불자들이 주로 외치는 게 삼법인, 즉 무상/고/무아로써 해탈하는 줄 착각한다는 겁니다.

무상/고/무아는 삼법인입니다.

해탈이란 삼해탈문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삼해탈문에 도착하게 하는 연결다리일 뿐이지, 그 자체로써는 해탈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진제와 속제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걸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상(無常)이니 이런 망언을 해댑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만,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 곧 진제가 아닙니다.

만약 무상(無常)이 절대진리라면, 열반도 무상하다고 봐야 합니다.

열반도 무상하다면, 무상한 건 곧 고통이므로, 열반이 열반이 아닌 게 됩니다.

또한 무상(無常)하다면 그건 곧 영원하지 않다라는 것인데, 영원하지 않다면 내생도 없고 과보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무상(無常)이란 상대적인 진리, 곧 속제이지, 진제가 아닙니다.

속제라는 것은 인과적으로 돌아가는 우리가 사는 이런 드러난 현실세계에서의 상대적인 진리이며,

진제라는 것은 진실된, 불멸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은 상대적인 이런 세계에서는 백퍼센트 맞는 진리, 즉 속제입니다만,

불멸의 진리, 곧 진제에는 먹히질 않는 것입니다.

차후에 이 진제와 속제 및 삼법인과 삼해탈문에 관한 내용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진제와 속제, 그리고 삼해탈문은 대승이나 소승이나 다 똑같이 공통적입니다.

아함경/니까야에도 역시 지런 진제와 속제가 나와 있고, 삼해탈문도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불교를 공부하려면 대승과 소승을 막론하고 반드시 이 空을 핵심적으로 배워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이 空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집니다.

그야말로 이 空은 모든 번뇌를 작살내 버리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空이 곧 해탈의 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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