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8. 照見五蘊皆空 ③ 공(空)을 깨닫는 요령/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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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을 깨닫는 방법 및 요령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쉽게 쓰겠습니다.

 

1. 어디에서 깨달아야 하는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말과 같이 바로 나 자신에게서 공(空)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을 아주 크게 나누면 두가지로 나누는데, 바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입니다.

아공(我空)이란 바로 나 자신의 공함을 깨닫는 것이고,

법공(法空)이란 바로 나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 그러니까 내가 접하는 모든 바깥것들의 공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에서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아공(我空)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나 자신의 공함을 깨달아야 하므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인 것입니다.

오온(五蘊)이란 바로 "나"입니다.

나라고 여기는 게 바로 오온(五蘊)입니다.

(오온의 뜻은 나중에 자세히 새로온 항목에서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오온(五蘊)이란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걸 더 세분화한것이 바로 색/수/상/행/식입니다.

몸과 마음 중에서 어디에서 공(空)을 깨달아야 할까요?

바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실체를 몰라서, 업을 쌓아 얻은 것이 바로 이 몸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아니라 이 마음에서 공(空)을 깨달아야 합니다.

 

2. 마음에서 공(空)을 어떻게 깨닫는가?

위에서 써놨듯이 마음의 공(空)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마음 자체의 공(空)함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공(空)함을 깨닫는다라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공(空) 그 자체는 그 어떤 말이나 언어로써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비유해서 설명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空)이란 그 무엇도 없이 ‘비어 있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의 본질/실상을 비유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바로 허공(하늘)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해서 마음의 본질을 깨달으십시오.

허공에 바람이 불면 먼지가 낍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땅바닥의 흙이라는 인(因)이 바람이라는 연(緣)을 만나면 허공에 먼지가 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이 불 때 허공에 있는 먼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인연화합으로 인해 허공에 먼지가 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똑같습니다.

마음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空)인데,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因)이 외부대상인 육경(緣)을 만나면 그때 마음, 즉 육식이 생깁니다.

마음이란 것도 인연화합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낀 먼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객진(客塵)이라고 부릅니다.

객은 나그네라는 뜻이며, 진은 먼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은 하늘에 낀 먼지와 같은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들의 연속을 "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마음/생각이란 게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바로 인연화합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실체가 없고, 공한 것입니다.

[참고] 여기서 마음/생각이라는 의미를 같이 쓴 것은 제6식, 즉 생멸식을 의미합니다. 불성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생이란 바로 이 먼지와 같은 내 마음을 실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전도몽상입니다.

중생은 쉬지 않고 항상 끊임없이 생각하니까, 항상 하늘에 먼지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자체를 못보고 오로지 먼지만 바라보며 집착하고 그 무상한 먼지를 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근데 잘 보십시오.

하늘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하늘에 낀 먼지가 중요합니까?

먼지는 무상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이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의 실체인 空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과 연으로 화합해서 생겨난 마음/생각이란게 마치 허공에 낀 먼지와 같아서 객진(客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의 본체인 하늘과 같은 공(空)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마음/생각이라는 먼지만을 바라보고 그 생멸하고 무상한 생각/마음을 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생멸하는 이 마음은 주인이 아니고 객(客)입니다.

끊임없이 왔다가 가버리니까 나그네/손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엄경에 중생은 주인을 잃어버리고 손님이 주인 행세한다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주인을 찾으십시요.

주인은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게 주인입니다.

반대로 언제나 왔다갔다 하는 게 바로 나그네입니다.

이 생멸하는 마음인 객(客)을 나로 알고 도를 닦으면, 그게 바로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꼴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몽상입니다.

중생은 언제나 모양이 있는 것을 취해서 집착합니다.

모양에 집착하는 것 입니다. 모양/형체에....

그래서 허공에 바람이 불어 먼지가 끼면, 뭐를 바라보는 줄 아십니까?

허공을 안 보고 오로지 허공에 낀 먼지만을 바라봅니다.

마음의 실체...즉 마음의 공(空)을 왜 못 깨닫는 줄 아십니까?

무한한 텅빈 공(空)함을 안보고 오로지 허공위에 떠도는 먼지 같은 그 생각/마음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모습, 즉 相을 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에는 허공과 같이 相이 없습니다.

이제 시야를 돌리십시요.

광활한 텅빈 공(空)으로 눈을 돌리세요. 그때 깨닫습니다.

먼지를 바라보지 말고, 허공 그 자체를 깨달으려고 해야 합니다.

찰라생 찰라면하는 이 마음...즉 육식만 바라보지 말고, 그 육식이 떠 있는 그 무한한 공(空)을 알아채야 합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사띠를 한다라는 것도 바로 이걸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언제나 먼지와 같은 이 생멸하는 마음만 바라보다가는 아무것도 못 깨닫습니다.

 

3. 문득 공(空)을 깨닫는다 - 돈오(頓悟)

깨달음은 한 순간에 옵니다.

문득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頓悟)입니다.

이 생멸하는 마음을 바라보다가 마음의 본질인 공(空)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생멸하는 마음은 무상합니다. 매 변화합니다.

그렇다고 매 순간순간 변화하는 이 무상함만을 관하다가는 아무것도 못 깨닫습니다.

이 생멸하는 마음을 관하다가 텅 빈 공(空)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이 생멸하는 마음을 떠나서 공(空)을 깨닫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생멸심의 실상이 바로 공(空)이기 때문입니다.

공(空)은 다른 말로 불성이나, 진여, 법성 등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멸하는 마음을 관하다가..마음 자체의 텅빈 공(空)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하늘의 먼지를 바라보다가 하늘 자체를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허공)은 그저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유라는 것을 아십시오.

먼지를 보다가 하늘을 봐야 합니다.

그 때 깨닫습니다.

허공엔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뭘 찾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마음을 쉬어야 그때 깨닫게 됩니다.

하늘에 먼지가 다 사라져야 청명한 하늘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4. 공(空)을 깨달으면 끝인가?

그게 겨우 시작입니다.

공(空)을 돈오했다라는 것은 겨우 반야바라밀을 힐끗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시작입니다.

이 공(空)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그 뭔 수행을 한들, 그것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무슨 짓을 해도 허당이라는 뜻입니다.

이와같이 불교수행이란 깨닫고 나서 목적지, 즉 완전한 깨달음을 향해 걸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승도 단계가 있고, 대승도 단계가 있습니다.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단계가 있고, 보살 제1지에서 제10지까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공(空)을 깨닫고 자기는 할일이 끝났다라고 착각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무지함은 버려야 합니다.

그때부터 이 공(空)이 뭔지, 반야바라밀이 뭔지 다시 제대로 배우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가 커져갑니다.

공(空)을 깨달은 사람이 만약 600권 반야경을 본다면, 아무 너무 재미있어서 눈물을 흘리고 보게 될 겁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재미가 없고 이해가 안돼서 몇페이지 보다가 덮어버릴 것입니다.

 

5. 왜 그렇게 공(空)을 깨닫기 어려운가?

위에는 아주 쉽게 하늘에 비유해서 공(空)을 깨닫는 방법을 설명해 놨습니다.

그러나 실제 공(空)을 깨닫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즉 대단한 공덕이 있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고 혹시나 긴가민가, 알듯 말듯하신 분이 계시다면

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고 간절히 기도해보세요.

제발 좀 그게 뭔지 알려달라고 말입니다.

앉아서 도만 닦는다고 공(空)을 깨닫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남을 돕는 공덕도 같이 쌓아야 그 공덕으로 말미암아 깨닫습니다.

 

6. 공(空)도 역시 공(空)한 것이다.

공(空)이란 텅 비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공(空)에 집착해서 공(空)에도 뭔가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그래서 용수보살께서는 공에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병은 중병이며, 그 병은 못 고친다는 얘기까지 하셨죠.

공(空)에 집착하는 게 바로 어리석음, 즉 무명입니다.

공(空)함을 깨닫고도 그 공(空)에 집착하지 않는 게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이 공(空)을 대단히 잘못 착각하고 이해할 요소가 많기 때문에,

반야경에서 부처님께서 구분해서 공(空)을 설하셨듯이 18공(空)이 있습니다.

공(空)을 열더덟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 것이 바로 18공(空)입니다.

공(空)을 깨달았다고 해서 나가 자빠지면 안 됩니다.

그런 이유로 깨달은 보살들께서도 부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7. 공(空)을 깨달은 자,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라.

공(空)을 깨달으신 분들은,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대승의 마음이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다른 중생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나만 알고 있음 뭐합니까?

다른 존재들에게도 알려줘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합니다.

수많은 중생들은 자신의 마음을 실상을 몰라서 거기에 집착하며 끊임없이 고통받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그 대승보살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깊이 반야바라밀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어떤 두려움 없이 중생을 돕는 보살행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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