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야심경 해설 10. 照見五蘊皆空 ⑤ 무상/고/무아, 공/무상/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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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고/무아와 삼법인, 그리고 공/무상/무원이라는 삼해탈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과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우선 진제와 속제 즉 이제(二諦)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합니다.

 

1. 진속이제(眞俗二諦)

우선 제(諦)라는 뜻은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제(二諦)이므로 두 가지 진리라는 뜻이며, 그것이 바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입니다.

진제와 속제를 구분하고 불교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구분 못하고 경전을 읽으면, 경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二諦) = 진제(眞諦), 속제(俗諦)...

이런 단어를 접해보지 않은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러나 배워야 합니다.

이제(二諦), 진제(眞諦), 속제(俗諦)는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초기불교에도 엄연히 나와 있는 용어입니다.

니까야에도 나와 있고, 아함경에도 역시 나와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속제(俗諦)란 무엇인가?

이 세간에서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드러난 세상에서의 진리라는 의미죠.

그러므로 속제란 세간의 진리이며, 그러므로 상대적인 진리입니다.

속제(俗諦)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용어가 세속제(世俗諦), 또는 세제(世諦) 등의 용어가 있습니다.

이 속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무상/고/무아입니다.

세간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무상(無常)한 것이며,

그러므로 고(苦)이며,

모든 것엔 독립적인 영원한 실체가 없어서 무아(無我)입니다.

무아(無我)의 뜻은 그냥 덮어놓고 내가 없다는 게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몸과 마음은 있되, 거기에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삼라만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 몸/마음도 변해가고, 삼라만상도 역시 변해가는 것입니다.

 

진제(眞諦)란 무엇인가?

첫째가는 진리, 진실된 진리라는 뜻 입니다.

진제(眞諦)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가 승의제(勝義諦), 제일의제(第一義諦)등이 있습니다.

진제(眞諦)란 쉽게 말하면 출세간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열반, 해탈의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진리, 즉 진제(眞諦)입니다.

진제(眞諦)에 속하는 것이 바로 공/무상/무원의 삼해탈문입니다.

불경을 볼 때는 반드시 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구분해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대승경전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구분을 못하고 대승경전을 읽다간 그야말로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소승경전은 주로 속제(俗諦)에 맞춰서 설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무상/고/무아가 많이 등장합니다.

대승경전은 주로 진제(眞諦)에 맞춰서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물론 속제(俗諦)도 담겨 있습니다만, 주로 진제(眞諦)에 촛점을 맞추어 설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진제인 열반/해탈은 무상(無常)한 게 아닙니다. 거기엔 무상(無常)이 먹힐 게 없습니다.

무상(無常)하게 변해갈 만한 어떤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치 空을 허공, 즉 하늘에 비유하는데,

하늘은 뭔 실체가 있어서 영원한 것도 아니고 또한 무상(無常)하게 변해갈 만한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반드시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불경을 봐야 합니다. 초기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말이죠.

왜 이렇게 두가지로, 즉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로 구분해서 설하신 것일까요?

그걸 명확히 구분해서 알아야만 제대로 해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무상/고/무아는 진제(眞諦)가 아니고 속제(俗諦)이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전혀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무상(無常)을 절대진리로 믿습니다.

소승불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꽤 많고, 대승불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무상(無常)은 절대진리가 아닙니다.

무상(無常)은 속제이지, 진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무상(無常)의 뜻은 곧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멸론입니다. 영원하다는 상주론이고 영원하지 않다는 단멸론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게 바로 무상(無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렇듯 무상은 단멸론인데 부처님께서는 왜 무상(無常)을 설하셨을까요?

중생들은 항상 모든 것에 실체가 있어서 그게 영원하다고 여기는 게 뼈에 박혀서 그걸 깨부수기 위해서 영원하다의 반대되는 영원하지 않다는 걸 설하신 것입니다.

영원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려면, 반드시 그 반대되는 것, 즉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대치법입니다.

이 세간은 반드시 이렇게 상대되는 게 있어서 반대되는 것이 곧 치료약이기 때문입니다.

무상(無常)이 만약 절대적인 진리라면 그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므로 열반/해탈도 무상(無常)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만약 열반/해탈도 무상하다면, 무상은 곧 고통이므로 열반도 고통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과연 열반도 고통입니까?

그러므로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속제이지 진제가 아닙니다.

진제에는 무상(無常)이 먹히질 않습니다.

무상(無常)은 세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지, 출세간에서는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무상(無常)은 속제이며, 진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구분을 명확히 알고 불교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진제 속제 구분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출세간....즉 열반/해탈은 무상(無常)한 게 아닙니다.

고(苦)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苦)는 이 세간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출세간(해탈/열반)에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출세간(해탈/열반)에도 적용된다면 열반도 곧 고통이란 얘기가 되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아(無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즉 연기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거기에는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인 해탈/열반은 무아(無我)라고 따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가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 진제와 속제를 구분해서 아는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삼법인(三法印)은 무상/고/무아이지만,

대지도론에서는 고를 빼고 거기에 멸진열반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무상인[無常印], 무아인[無我印], 적멸인[寂滅印]이 바로 삼법인이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법인(法印)의 의미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 무상인[無常印] : 항상하다는 고정관념도 버리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도 집착하는 않는 것

- 무아인[無我印] : 실체가 있다라는 고정관념도 버리고, 실체가 없다라는 데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 적멸인[寂滅印] : 열반은 모든 것이 멸해 고요하다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영원하다는 관념을 버리고, 영원하지 않다라는 무상(無常)에 집착하는 것은 법인(法印)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불자들이 무상(無常)에 집착합니다.

또 진제와 속제를 제대로 이해 못해서 무상(無常)이 절대적인 진리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무상(無常)은 단멸론입니다.

무상(無常)이 절대진리라면 내생도 없게 됩니다. 영원하지 않아야 되니까 말이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끊임없이 생사윤회하면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상(無常)이 맞다면 죽으면 끝이어야 하므로 윤회도 없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진리,...즉 이 세속에서만이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무상/고/무아를 진리가 아니라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무상/고/무아는 이 세속에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진제와 속제 둘 다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제(二諦)입니다. 두 가지 진리!!!

속제의 실상이 바로 진제입니다.

윤회의 실상이 바로 해탈입니다.

이렇듯 진제와 속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3. 공/무상/무원, 즉 삼해탈문은 진제에 속한다.

삼해탈문은 空, 無相, 無願입니다.

중국에서는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데 無願을 無作으로도 번역했습니다.

삼해탈문의 뜻은 무엇입니까?

바로 해탈할 수 있는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상/고/무아로 해탈하는 아니고,

삼해탈문인 空, 無相, 無願으로 해탈하는 것입니다.

속제로 해탈하는 게 아니고, 진제를 통해 해탈하게 됩니다.

이런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전 글에 설명했듯이 대승이나 소승이나 해탈문은 똑같습니다. 바로 空, 無相, 無願입니다.

그래서 아함경/니까야에도 역시 삼해탈문이 나오고, 그것은 바로 空, 無相, 無願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기불자 중에서 남들이 비방한다고 같이 덤탱이로 이 空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해탈문을 스스로 닫는 꼴입니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空/반야바라밀을 비방하면 안 됩니다.

왜 空인가?

바로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겨났으므로 거기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서 텅빈 공입니다.

왜 無相인가?

텅 비어 있으니 거기엔 그 어떠한 모양(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無願인가?

텅 비고 모습이 없는데 뭘 짓거나 뭘 바란다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게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입니다.

空, 無相, 無願은 결국 다 같은 뜻입니다.

단 하나를 세 가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해탈의 문은 空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해탈문, 즉 해탈의 통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이나 소승이나 할것 없이 모조리 다 이 空을 배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4. 無常/苦/無我 & 空, 無相, 無願

무상/고/무아와 삼해탈문 즉 공/무상/무작은 어떤 관계일까요?

서로 연결되는 고리입니다.

無我 ==> 空

無常 ==> 無相

苦 ==> 無願

無我를 통해서는 空해탈문에 도착하고,

無常을 통해서는 無相해탈문에 도착하며,

苦를 통해서는 無願해탈문에 도착합니다.

인과 연으로 화합해서 모든 것(法)이 생겨났으므로 거기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서 無我입니다.

그래서 텅 빈 空해탈문에 도착하게 됩니다.

인연화합으로 인해 생긴 모든 것엔 실체가 없어서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해가므로,

거기에는 고정불변의 모습이 있을 수 없으므로 無相해탈문에 도착하게 됩니다.

인연화합, 즉 연기법으로 발생된 모든 것은 무상할 수밖에 없는데,

뭘 바라고 그게 영원히 유지되길 바라는 것이 고통인데,

그런 바램을 쉬는 것이 곧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無願해탈문에 도착합니다.

이렇게 무상/고/무아를 관하든 명상하든 하다가

삼해탈문인 空, 無相, 無願에 도착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저 무상/고/무아만을 관하다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은 결국 空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번뇌를 박살내는 게 바로 空입니다.

무명을 박살내버리므로, 모든 번뇌도 역시 자연스레 죄다 소멸되어져 버립니다.

무명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나가 있다고 여기고, 그러므로 인해 나의 것이 있다고 여기고,

그러므로 인해 나의 것에 이득이 오면 탐욕을 내고,

나의 것에 손해가 오면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게 바로 탐진치입니다.

모든 것은 없는 게 아닙니다.

아주 없는 게 아니죠.

다만 존재하되, 거기엔 실체가 없어서 空입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고 여겨서 집착했는데,

알고 보니 모든 것에 실체가 없어 空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집착할 거리나 대상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쉬게 됩니다.

그게 적멸이며, 평안이며, 휴식입니다.

해탈이나 열반을 소멸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無我란 본래 실체가 없어서 無我이지, 있던 실체를 없애서 無我가 아닙니다.

空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뭔 실체가 있던 걸 없애서 텅 빈 空이 아니라, 본래 자체가 텅빈 空일 뿐입니다.

소멸되는 것도 없고, 생겨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도 없고, 바랄 것도 없게 됩니다.

이렇듯 부처님의 진리는 그야말로 위대하고도 위대합니다.

존재에게 모든 고통을 여의게 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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