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4주년을 맞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해설이 자세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칭 ․ 별칭/ 육이오, 6·25전쟁
전쟁을 일으킨 다음날인 6월 26일에 북한의 김일성은 이 전쟁을 가리켜 남한을 ‘해방’시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하여금 조국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방송하였다.
정치가 불안정한 가운데 무방비상태에 있던 한국에 대한 북한의 기습공격은 6월 27일에는 이미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한편,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한편, 점령지역에서의 북한의 정책은 그들이 내세운 ‘해방’정책과는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중략.....]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는 드디어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그 다음날에는 인천을 함락시켰다.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동진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고, 한반도의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에는 서울에 진입하였고, 완전히 회복한 뒤인 9월 29일에는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9.28수복]
수도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선에 가깝게 계속 북상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으며, 이 기간 동안 공산군 포로는 1만2500명에 달하였다.
[....중략.....]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하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것이 이른바 ‘1·4후퇴’ 이다. 1950년 12월 16일에 트루만이 국가 긴급사태를 선언하였으나 전황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였고, 질서 있는 철퇴작전이 주안이었다.
맥아더는 계속 중공의 공업지대 폭격을 포함한 4개 항목에 달하는 전면 대응을 주장하였으나 본국 정부와의 긴장감만 높아졌을 뿐 그의 의견은 수락되지 않았다.
중공군의 개입 이래 공산군의 남진은 계속되었고 그들의 보급로도 늘었으나 유엔군의 공중 공격으로 저지되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며 전진을 계속하였다.
2월 10일에는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두산백과
6·25전쟁[ Korean Conflict, 六二五戰爭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3118&cid=40942&categoryId=31778
6·25전쟁 [Korean War, 六二五戰爭]한국 역사브리태니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 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으로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키운 북한은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시작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린 국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어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상 이사회가 열려 유엔 군이 파병되었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 군은 서울을 되찾고 [9.28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참고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하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것이 이른바 ‘1·4후퇴’ 이다.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3년 1개월 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하고, 전쟁 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남북한은 평화가 아닌 휴전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행위가 계속되었다.(→ 한국사)
역사 하(조한욱) < 대한민국의 발전 < 대한민국의 수립과 6·25 전쟁 <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 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으로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키운 북한은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시작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린 국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어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상 이사회가 열려 유엔 군이 파병되었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 군은 서울을 되찾고 [9.28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참고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하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것이 이른바 ‘1·4후퇴’ 이다.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3년 1개월 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하고, 전쟁 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남북한은 평화가 아닌 휴전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행위가 계속되었다.(→ 한국사)
역사 하(조한욱) < 대한민국의 발전 < 대한민국의 수립과 6·25 전쟁 <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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