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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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무소득)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야(의반야바라밀다고)
마음에 걸림이 없고 또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결국 모든 전도된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즉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해서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른다.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을 행하여 결국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세부적인 단어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원리(遠離) : 멀리 떠나다.
전도(顚倒) : 뒤집어진, 잘못된
몽상(夢想) : 꿈에서는 그 상황이 진짜라고 생각했으나, 깨보니 가짜더라... 그러니 몽상이란 헛된 생각이란 뜻
구경(究竟) : 궁극의....더 이상이 없는..
열반(涅槃) : 열반!!
구경열반(究竟涅槃)이란 오로지 부처님만이 도착하신 열반이란 뜻입니다.
아라한 · 벽지불도 도착 못했고,
보살도 또한 도착하지 못한 곳이며,
오로지 부처님만이 도착하신 경지의 열반을 말합니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중생은 뒤집어진 헛된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본래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다만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래는 새끼줄인데,
그 새끼줄을 밤에 보니 꾸불텅해 보여서 뱀인줄 착각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의 전도몽상이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다만 착각에 빠져 있으므로
그걸 박살내고 거기서 멀리 떠나는게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입니다.
전도몽상을 완전히 박살내는게 空이며,
그 空에도 역시나 실체가 없어 空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에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사전도(四顚倒)라고 부릅니다.
사전도(四顚倒)란 상락아정(常樂我淨) 이 네 가지를 말합니다.
常 : 중생은 항상(영원)하지 않은데도 착각해서 항상하다고 여긴다.
樂 : 중생은 괴로운 것인데도 착각해서 즐겁다라고 여긴다.
我 : 중생은 실체가 없는데도 착각해서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
淨 : 중생은 더러운 것인데도 착각해서 깨끗하다고 여긴다.
상락아정(常· 樂 · 我 · 淨)은 열반사덕(열반의 네 가지 덕)도 됩니다만,
열반경에서의 상락아정(常· 樂 · 我 · 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완전 오해합니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우선적으로 상락아정(常· 樂 · 我 · 淨)을 사전도(四顚倒)로써 이해하고 배워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점프를 해버리면 오히려 더더욱 이 중생세간에 집착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이 상락아정(常· 樂 · 我 · 淨)이라는 네가지 전도몽상을 깨부수는 것이
바로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입니다.
37조도품에서 바로 첫번째가 사념처 수행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B%AD%EC%B9%A0%EB%8F%84%ED%92%88
37도품(三十七道品)은 깨달음(도, 보리, 각)에 이르는 37가지의 법을 말하는데,
초기불교의 《아함경》 또는 《니까야》 에서 고타마 붓다가 언급하거나 설명하고 있는 37가지의 도품(道品)
즉 수행법(修行法)을 가리키는 낱말로, 사실상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통칭하는 낱말이다.[1][2][3]
도품(道品, 팔리어: bodhipakkhiyā dhammā, 산스크리트어: bodhipakṣa dharma)의 팔리어 또는 산스크리트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깨달음(bodhi, 보리)에 속하는(pakkhiyā) 법(dhammā, 法)', '깨달음의 일부를 이루는 법' 또는 '깨달음에 관계된 법'이다.[4][5][6][7] 이런 문자 그대로의 뜻을 따르면서 'bodhi'를 '보리'라고 음역하여, 37도품(三十七道品)이라는 낱말 대신에 37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이라고도 하는데, 보리분법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보리의 일부를 이루는 법'이다.
한자어 도품(道品)도 문자 그대로의 뜻이 '도(道: 진리, 깨달음, 또는 진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1품' 즉 '도의 한 부분'으로 팔리어 원어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한편, 《아비달마구사론》 제25권에서는 '깨달음 즉 각(覺) 즉 보리에 따르고 보리로 나아가는 것[順趣菩提]'이기 때문에 보리분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보리 즉 각이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8]
37도품 또는 37보리분법을 37각분(三十七覺分), 37각지(三十七覺支), 37도분(三十七道分), 37조도법(三十七助道法), 37품도법(三十七品道法), 또는 37품(三十七品)이라고도 한다.[1][9]
사념처 수행으로써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네가지 전도를 박살냅니다.
그러나 완전히 끝까지 박살내는 것은 空을 관할 때입니다.
아래는 용수보살(나가르주나)의 저서 대지도론에서 발췌한 내용인데,
상락아정과 신수심법 사념처 수행의 관계에 대해서 대단히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
중생은 몸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깨끗하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느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즐겁다 하는 뒤바뀜에 잡착하며,
마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항상하다고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법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나가 있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한다.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몸은 깨끗하지 않다고 관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하며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
위에서 "나"라는 용어는 고정불변의 실체/자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위 말씀을 토대로, 상락아정(常樂我淨) 사전도(四顚倒)와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常 : 심념처로 마음의 무상함을 관함으로써 영원하다는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樂 : 수념처로 느낌은 괴롭다라는 것을 관함으로써 즐거움이라는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我 : 법념처로 법(모든 존재/현상/진리)에는 실체가 없음을 관함으로써 실체(나)가 있다는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淨 : 신념처로 몸의 더러움을 관해 몸이 깨끗하다고 여기던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신수심법 사념처 수행은 대승과 소승 공통입니다.
또한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불교 수행이란 그저 앉아서 마음을 텅 비우는 그런 수행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신수심법 사념처 수행처럼 관찰하는 수행도 있습니다.
편안히 앉아서 눈을 살짝 뜨든 감든 편하게 하고,
아래 네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그저 관찰을 하는 것 입니다. 살펴보는 것이죠.
이 수행은 어렵지 않고 쉽습니다.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그저 덮어놓고 믿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직접 본인이 살펴보고, 분석하고, 따져봐서 정확하게 맞다 싶을 때 믿으면 됩니다.
그런 앎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살펴보는 수행을 해보세요.
1. 신념처(身念處) : 몸을 관찰하라.
우리와 같은 중생들은 이 몸을 대단히 깨끗하다고 여기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화장을 합니다.
그러나 화장을 한다는 것은 더러움을 숨기기 위한 것이죠.
본래가 깨끗하다면 이뻐보이기 위해 화장할 필요가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위 용수보살께서 하신 말씀처럼 중생은 자기의 몸도 깨끗하다고 여기고, 이성의 몸도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 몸에 집착하고, 이성의 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따져보면 깨끗하질 않습니다.
이 몸의 여러 구멍에서는 언제나 더러운 물질이 흘러나오고, 몸안의 물질들도 모조리 다 더러운 것들 뿐이죠.
똥구녕에서는 똥나오고,
눈구녕에서는 눈꼽이 나오고
코구녕에서는 콧물과 코딱찌가 나오고,
땀구멍에서는 시큼한 냄새의 땀이 나오고,
귓구멍에서는 귀지가 나오고,
남녀의 성기에서는 오줌이 나오고.....
이 몸이 죽으면 썩습니다.
썩으면 냄새나니까 안보이게 파뭍어버리거나 또는 태워버리는 거죠.
인간의 몸이 정말 깨끗하다면, 죽은 시체도 그냥 거리에 방치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 몸이 썩으면 그것만큼 더러운 게 없죠.
이것처럼 인간의 몸은 본래 더러운 것입니다.
뱃속에 당장 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걸어다니는 화장실>이라고 표현했죠. 뱃속에 똥이 항상 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바깥에 있는 똥은 쿠리고 더러워서 진절머리를 떨고 끔찍하게 여기면서,
자기 안에 있는 똥은 눈이 어두워 그런 더러운게 항상 뱃속에 가득 차 있는 줄 생각도 못하고 삽니다.
그만큼 제대로 잘 안살펴봐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살펴보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몸이 깨끗하다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게 바로 신념처이며, 이런 신념처가 바로 부정관입니다.
2. 수념처(受念處) : 느낌을 관찰하라.
느낌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중생은 어떻게 착각하는가 하면 중생의 삶에서 즐거운 느낌이 많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질 못하고, 대다수가 괴로운 느낌이고 아주 조금만 즐거운 느낌일 뿐입니다.
스스로 살펴보세요.
나에겐 과연 즐거운 느낌이 더 많은가??? 아니면 괴로운 느낌이 더 많은가???
중생들에겐 대다수가 괴로운 느낌이고, 아주 조금만 즐거운 느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느낌은 즐거운게 아니고 괴로운 것입니다.
또한 즐거운 느낌의 끝이 바로 괴로운 느낌의 시작입니다.
행복 끝 불행시작이죠.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이라고 해도 결코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중생을 윤회에 가장 직접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무명>과 <느낌>입니다.
느낌 중에서도 <즐거운 느낌>이죠.
이 즐거운 느낌으로 인해 온갖 탐욕과 애착이 생깁니다.
탐욕의 종말은 고통이죠. 결국 잃게 되니 말입니다.
누구나 다 죽어서 모조리 잃게 됩니다.
세 가지 느낌 모두가 다 괴롭다라는 걸 알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바로 수념처입니다.
즐거운 느낌은 영원하지 못하니 즐거움의 끝은 곧 괴로운 느낌의 시작이니 괴로운 것이요,
괴로운 느낌은 그 느낌 자체로써 괴로운 것이니 괴로운 것이요,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변화하다가 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이 되니 괴로운 것입니다.
느낌은 무상하니 괴로운 것이며,
그렇게 무상하게 변하는 이유가 바로 느낌 자체에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즉 느낌도 역시나 空한 것 입니다.
3. 심념처(心念處) : 마음을 관찰하라.
우리의 찰라생 찰라멸 하는 이 마음은 영원하지 않고, 항상 생멸을 반복합니다.
즉 변화합니다.
하지만, 중생은 이 생멸하는 마음을 영원하다고 여기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심념처 수행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게 바로 이 생멸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영원(常)하지 않고,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마음엔 이것처럼 생멸식이 있고, 불생불멸식이 있습니다.
생멸식은 허공에 낀 먼지와 같은 것이고, 불생불멸식은 허공 그 자체와 같습니다.
마음의 본질/실체를 깨닫는다는 것은 먼지를 보다가 허공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수관/심념처를 사띠하다가 허공 자체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空을 깨닫는 것이며, 중도를 깨달은 것 입니다. 물론 그게 첫발입니다.
이러한 불생불멸식을 불성/여여/진여 등으로 불리웁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이 생멸하는 마음의 무상(無常)을 관하는 것입니다.
곧바로 空을 깨닫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첫 입구가 바로 무상(無常)입니다.
무상(無常)을 관하다가 空을 깨닫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의 공식이 아함경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고-->무아-->空-->무소유-->염오-->이욕-->해탈-->해탈지견
4. 법념처(法念處) : 법을 관찰하라.
법(法)은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존재, 사물, 상,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물이건, 존재건, 현상이건, 진리건 모조리 거기엔 스스로의 성품이 없습니다.
진리라는 것도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최상의 존재인 부처님도 역시나 공한 것이며,
부처님께서 얻으신 무상정등정각,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역시나 공한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에도 얻을 바가 없고,
반야바라밀의 완성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도 역시나 얻을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중생들은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라는 내용이 반야경에 나옵니다.
중생은 언제나 얻을 바가 있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제법이 공하기 때문에 18空중에 제법공이 있습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11533
내공(內空), 외공(外空), 내외공(內外空), 공공(空空), 대공(大空), 제일의공(第一義空),
유위공(有爲空), 무위공(無爲空), 필경공(畢竟空), 무시공(無始空), 산공(散空),
성공(性空), 자상공(自相空), 제법공(諸法空), 불가득공(不可得空), 무법공(無法空),
유법공(有法空),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제법공이란 일체개공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스스로의 성품...즉 실체가 있다고 여기므로 집착하는 것 입니다.
이걸 완전히 끝까지 박살내는게 연기법이며, 그 핵심인 空입니다.
..................................
전도되었다라는 것은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정신병에 걸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착각병!!!
그러므로 멀쩡한 정신으로 되돌아오게 해줘야 합니다.
그때 쓰는게 바로 대치법입니다.
항상하다는 고정관념은 항상하다의 반대되는 무상(無常)하다로 박살내 주고,
즐겁다라는 고정관념은 즐거움의 반대인 괴롭다는 고(苦)로써 박살내 주고
실체가 있다는 고정관념은 실체가 있다는 반대인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로써 박살내 주고
깨끗하다는 고정관념은 깨끗하다의 반대되는 더럽다라는 것으로써 박살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대치법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곧 치료약이라서 이렇게 반대되는 것으로써 전도몽상을 박살냅니다.
속제의 측면에서는 이렇게 전도몽상을 박살냅니다.
그러나 진제의 측면에서는
항상한 것도 없고 무상한 것도 없으며,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걸 따질만한 스스로의 성품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空( '無常'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空은 희론을 멀리 떠난 것이며, 그것이 바로 中道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게 참으로 멋지지 않습니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kyang2011&logNo=221770188407
이 진성은 상을 떠나고 성을 떠났으니, 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離相)은 허망한 상을 떠난 것이고, 성을 떠났다는 것(離性)은 진성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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