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192화 - 내 말을 들어주면 아무 말 않겠소 (若聽吾言 當無言矣)
영남의 한 군사가
서울에서 번(番)을 서고
한 달의 기한이 차서
시골로 돌아가는데
충주(忠州)에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떤 시골집에 들러
하룻밤을 자고자 하였으나
그 집에서는 이제 막
제사상을 차려놓고
주인인 듯한 여인이
말도 붙일 수 없게
굳이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군사는 마침 울타리 밖에
버려진 헛간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잠시 들어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울타리 안쪽에서
여인이 제사음식인
떡과 밥 생선 과일 등을
보자기에 많이 싸서
헛간으로 던지며
은밀한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돌개 아재 오지 않았어요?"
군사는 그 여인이 과부가 된 후
사통하는 사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하게 속삭이며
응답해 주었다.
"와서 기다린 지
이미 오래되었소."
그 여인이 말하였다.
"먼저 음식 드시면서
요기나 하고 기다려요.
제사 끝나고 나올께요."
군사는 음식을 받아
배불리 먹었는데
만약 돌개 아재라는 사내가 오면
마주쳐 봉변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헛간 한쪽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자 과연 한 사내가 오더니
목소리를 죽여서 묻는 것이었다.
"아줌마, 나왔소."
그리고는 들어와 앉더니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곧 밤이 깊어질 텐데
왜 안 나왔지."
시간이 조금 지나
여인이 다시 나와서
사내에게 과일을 건네주자
사내가 꾸짖었다.
"죽은 남편 제사에
술과 음식이 그득할 텐데
먹을 것이라고는 조금이고,
또 어째서 이렇게 늦게 나왔소?"
"아니 조금 전에
술에 고기 생선 과일을
많이 주었는데
어째서 음식이 적으니
늦게 나왔느니 하는 거예요?"
여인이 대꾸하자
사내가 다시 투덜거렸다.
"나는 지금 막 여기 왔는데
당신이 먹을 것을 주었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요?"
서로 두어 마디 더 따지더니
사내가 말했다.
"여기 어디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당신이 나인 줄로
잘못 알았던 게요.
그러니 함께 찾아봅시다."
마침내 헛간 속을 두루 뒤지는데
군사 또한 일어나 어둠속에서
살금살금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몇 차례 맴돌기를 한 끝에
끝내 서로 마주치지 않았다.
남녀는 헛간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집안으로 들어가
서로 정을 통하더니
닭이 울자 사내가 나가고
그 여인은 사립문에 기대어
사내를 배웅하였다.
사내가 멀리 사라지자
되돌아서는 여인을
헛간에서 뛰어나온 군사가
끌어안으며 말했다.
"당신이 간부(姦夫)와
사통(私通)하다가
나에게 발각되었으니
내가 사방에
소문을 퍼뜨려야 마땅할 것이요.
하지만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면
아무 말 않겠소."
여인이 마침내
군사의 말을 따르기로 하자
군사는 여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환락(歡樂)을 맛본 후 길을 떠났더라 한다.
'고전문학 > 국역고금소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4화 - 음탕한 첩과 음흉한 종 (淫妾凶奴) (0) | 2016.01.12 |
---|---|
제193화 - 마님이 명하시는데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主婦有命 敢不惟從) (0) | 2016.01.08 |
제191화 - 어떠한 벼슬을 주랴? (何官除授) (0) | 2016.01.08 |
제190화 - 박색이었다면 반드시 침을 뱉었을 게야 (若汝妻之薄色 防伯必唾) (0) | 2016.01.07 |
제189화 - 장차 그곳에 뼈를 묻어다오 (將我老骨葬于那裡) (0) | 2016.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