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257화 - 여색에 영웅없다 (無色英雄)
평양에는 이화(梨花)라는 기생이 있어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고,
음률이며 문장, 그리고 시를 지을 줄 알아
문사들 사이에 그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부임하는 감사들이 그에게 혹하여
민정을 그르치고 일신을 망치는 속출하니,
소문을 들은 왕이 크게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왕은 조정 대신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여색에 엄격하기로 소문난
신하를 하나 가려 뽑아서 암행어사로 내려보내,
기생 이화에게 감사를 유혹한 죄를 물어
처치하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왕은 여러 날 동안 조정 대신들의 명단을 놓고
여러 측근 신하들에게 물어서,
가장 강직하다는 의견에 따라
참판 허민(許珉)을 선발해
관서지방 암행어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허민에게 평안 감영으로 내려가
기생 이화를 처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에 허민은 왕 앞에 나아가 인사를 드리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즉시 평양을 향해 떠나갔다.
평양 관내에 접근한 허민은
따라온 서리와 역졸들을 불러 단단히 경계시키고,
내일 평안 감영으로 모이도록 지시해 흩어지게 했다.
그리고 허민은 본색을 숨겨 몰락한 양반으로 위장하고,
혼자 걸어서 평양성을 향해 들어갔다.
성에 가까워질 무렵,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버들가지에 앉은 꾀꼬리 지저귀며 훈풍이 몸을 스치니,
아름다운 경치에 어우러진 풍경이 흥취를 일으키는데,
마침 몸도 지치고 목도 말라 숙소를 찾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저 멀리 숲이 앞을 가린 깊숙한 곳에
주점을 알리는 깃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에 허민이 그곳을 찾아 들어가니,
소년 하나가 평상에 걸터앉아 있을 뿐
손님이 없어 쓸쓸했다.
곧 평상에 올라앉은 허민이 술을 가져오라 하니
소년이 술상을 내왔는데,
그릇 집기가 정결하고 술맛이 좋으며
안주 또한 담백하여 입안에서 녹는 듯했다.
지치고 허기를 느끼던 허민은
가져온 술을 연거푸 대여섯 잔 들이키니,
몸에 술기운이 돌면서 땅거미가 내려깔리는
정경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얘야, 술 더 가지고 오너라."
허민은 이미 얼큰한 상태인데도 분위에 취하여 술을 더 청했다.
곧 소년은 평상 위에 놓인 술병이 비었다면서
방안을 향해 술을 청하니, 비단 휘장이 반쯤 걷힌 뒤
아름다운 여인네가 밖을 내다보며
술 한 병을 내주는 것이었다.
술기운이 돈 눈으로 보는 여인의 얼굴이야
본시 아름다운 법이지만,
그야말로 빼어난 그 미모의 여인은
허민의 정신을 혼란시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에 허민은 술맛이 더하여 그 술병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리고 소년을 불러 술을 더 청하니
소년은 다시 방안을 향해 술을 내달라 하는데,
이번에는 밖을 내다보지 않은 채 이르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 집 술은 모두 떨어졌으니,
네가 속히 성안으로 들어가서 사오도록 하라."
여인은 이렇게 소년에게 시키고는 더 큰 목소리로,
"밖에 계신 손님도 술이 떨어졌으니
다른 주점으로 가소서."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 소년이 빈병을 들고 나가기에,
허민은 여인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고
소년을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얘야, 속히 다녀오렴. 내 여기 앉아서 기다리겠노라.
지금은 날이 어두워 다른 주점도 찾기 어렵단다."
그러고 나서 허민은 평상에 앉아 아무리 기다려도
소년은 돌아오지 않고, 밤은 자꾸만 깊어만 갔다.
이에 허민은 방안에 있는 여인을 향해 간청했다.
"주인에게 청합니다.
밤이 깊고 내 또한 많이 취했으니,
옆방으로 들어가서 하룻밤 묵게 해주소서."
"우리 주점에는 오늘 바깥 주인이 없으니,
남자 손님을 묵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속히 다른 주점을 찾아보소서."
"그렇다 해도 밤이 너무 깊었고
술에 취해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으니,
자고 갈 수 있도록 좀 허락해 주시오."
허민은 재삼 간청하여
겨우 승락을 받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자지 않고 있다가
좀더 밤이 이슥해진 뒤 안방으로 돌입하여,
여인을 붙잡고 여러 가지로 회유해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굳은 약속을 한 다음,
여인과 옷을 벗고 속살을 맞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환애를 느끼며
깊은 정을 나누었다.
사실 이 여인은 정말로 주점 안주인이 아니라,
서울에서 이화를 처치하기 위해
암행어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을 들은
바로 그 이화가 주점 안주인으로 변장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
술책에 걸려든 암행어사와 통정함에 있어
어떤 수로 육신과 간장을 녹여 삶아
허물어지게 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리하여 날이 새고 허민이 떠나려고 하자,
여인은 소매를 부여잡고 울면서 말했다.
"지금 떠나시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사오니,
소녀의 팔에 성명이나 써주고 가시옵소서."
이러면서 팔을 내미니,
허민은 거기에다 큼직하게
'許珉不忘初約'1)이라는 여섯 글자를 써주고 떠났다.
1)許珉不忘初約(허민은 처음 약속을 잊지 않음)
그리고는 부지런히 걸어 곧장 평인 감영으로 가서
정체를 드러낸 뒤, 아무 설명도 없이 곧 바로 엄명했다.
"기생 이화를 대령시켜라. 아울러 처형할 형구를 갖출지어다."
그러자 나졸들이 떨면서 이화를 끌고 와서 그 앞에 꿇어앉혔다.
이 때 이화는 울면서 호소했다.
"평양기생 이화, 수의사또 전에 아뢰옵니다.
소녀 평생 시를 좋아했사오니,
죽음에 임하여 시 한 수 짓게 허락해 주신다면
목숨을 바쳐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통촉해 주소서."
이 청원에 허민이 가엾게 여겨 허락하니,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올리는 것이었다.
梨花臂上刻雖名
이화비상각수명, 이화의 팔 위에 누구의 이름이 새겨 있는고?
墨入深膚字字明
묵입심부자자명, 살갗에 먹물 깊이 스며 글자마다 선명하네.
寧使大同江水盡
영사대동강수진, 차라리 대동강 물을 다 마르게 할지언정
此心不欲負初盟
차심불욕부초맹, 이 마음 처음 맹세 저버리지 않고자 합니다.
앞서 주점에서 허민과 작별한 후,
이화는 그가 팔에 써준 글을 바늘로 찔러 먹물로
살갗에 문신처럼 새겨 놓았으니
이렇게 시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에 허민이 자세히 내려다보자,
엎드려 있는 이화가 어젯밤 백 년을 약속하고
함께 동침한 여인이었다.
곧 이화를 처치해 죽이자니 의리상 그럴 수가 없고,
처치하지 않으려니 왕명을 거역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허민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기록하여
왕에게 주달하고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다.
허민의 장계를 접한 왕은 탄식을 하면서,
"앞서 조정의 중신들이 이화에 혹하여
정사를 그르친 정상을 가히 알만 하도다.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에게 매이게 해야겠다." 라고 말하며
이렇게 회답을 써서 보냈다.
梨花之田 許民耕之
(이화지전 허민경지)
이화의 밭을 백성이 경작함을 허락하노라.
이 글속의 '許民'은
암행어사로 내려간 '許珉'을 뜻하는 것이었다.
왕의 성지를 받은 허민은 이화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벼슬을 버리고 그녀와 함께 한평생 해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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