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312화 - 이름 있는 선비가 모욕을 당하다 (名士受辱)

 

어느 이름 있는 선비가

마침 남쪽 지방으로 여행할 일이 있어,

한강의 동작(銅雀) 나루에 이르렀다.

마침 배가 나루에 닿아 있어 선비는 배에 올라타고,,

사공을 재촉하여 배를 띄우게 했다.

 

그런데 배가 막 나루에서 떠나 한 발 정도 나아갔을 때,

한 무인이 말을 타고 달려와

떠나가는 배의 사공을 부르는 것이었다.

"사공! 내 갈 길이 바쁘니

배를 멈춰 함께 타고 가도록 합시다."

이 소리에 사공은 앞으로 나아가던 배를 멈추고,

다시 뒤로 저어 나루에 닿게 하려고 했다.

 

이 때 배에 타고 있던 그 선비는 사공을 꾸짖어 말했다.

"이미 나루를 떠난 배를 왜 다시 뒤로 돌린단 말이냐?"

그러자 사공이 멈칫 하고 있는데,

그 사이 무인은 타고 있는 말을 채찍질하여

배 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선비를 보고 화를 내면서 꾸짖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배가 나루에서 멀지 않은데,

함께 건너는 게 무엇이 나쁘다고 그리 못하게 합니까?

천하에 썩은 선비들이 하는 일은

모두 이렇게 편협하단 말입니까?'

 

이에 선비는 비록 화가 치밀었으나,

배 안에서 용맹한 무인에게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무인이 필시 글을 모를 테니, 내 글로써 제압하리라.'

이렇게 마음먹고

선비는 말을 타고 있는 무인에게 말했다.

"오늘 날씨도 좋고 한강 풍경도 아름다우니,

시나 한번 지어 보는 게 어떨는지요?

내 운자(韻字)를 불러 볼 테니

시 한 수 지어 보겠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어디 운자를 불러 보시지요."

무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응수하니,

선비는 곧 '변(邊)'자를 불러 주었다.

이에 무인은 이런 시를 지었다.

 

淸江淸兮白鷗邊 

(청강청혜백구변) 푸른 강물 맑은데 백구 노니는 강변이여

白鷗白兮淸江邊 

(백구백혜청강변) 백구는 희디희고 강변은 푸르구나.

淸江不厭白鷗白 

(청강불염백구백) 푸른 강이 백구의 흰빛을 싫다고 아니하니

白鷗長在淸江邊 

(백구장재청강변) 백구는 오래도록 푸른 강변에 있도다.

 

이에 선비는 그 상대가 되는

시구를 생각하느라 고심을 하는데,

배가 벌써 남쪽 나루에 닿았다.

그러자 무인은 먼저 내리더니 말없이 떠나갔다.

 

선비는 무안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여,

종자를 시켜 그 무인이 사는 곳과 성명을 물어 오라고 했다.

 

이에 무인은 선비의 종자를 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 상전에게 일러다오.

나는 본시 시골에 사는 무인이고 양반 선비가 아니니라.

내 비록 네 상전인 선비와 연락을 하고 교분을 가진들,

어찌 서로 평등하게 사귈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내가 사는 곳이나 성명을 알려줘 봐야

별 의미가 없느니라.'

 

무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표연히 떠나가 버렸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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