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1.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삼전도'라는 곳은 원래 지명(地名 : 땅의 이름)으로 한강상류지역인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의 이름입니다.
17세기 당시 중국대륙에는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 날로 부강해지는 후금(후에 청나라로 국호를 고침)이 서로 중국대륙을 놓고 한창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를 섬겼던 조선은 후금을 적대시하여 후금으로 부터 첫번째 침략을 받게됩니다. 1627년의 이 첫번째 침략이 바로 정묘호란으로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형제의 나라)의 약속을 하고 양국관계는 다시 회복이 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은 겉으로는 후금과 형제지국을 지키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 명나라를 따르며 명나라를 지원하였습니다. 1632년 드디어 후금은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 전투에 쓰일 말) 3,000필과 군사 3만명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1636년 2월에는 후금의 사신 용골대·마부태 등이 조선을 찾아와 조선의 신사(臣事 : 신하의 도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계속 후금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대합니다.
1636년 12월 2일,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친히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청나라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옵니다. 청나라 군대의 침공을 까마득히 몰랐던 조선은 청나라 선봉부대가 개성을 지날때 쯤인 13일에야 겨우 알게됩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14일 밤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12월 16일부터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산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를 지탱할 수 있는 식량밖에 없는 데다가 봉림대군(인조의 둘째아들)이 피해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조선은 결국 1월 30일 항복하기로 합니다. 이때 인조는 남한산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 항복의 의식, 당시 인조는 울면서 청 태종에게 9번 큰절을 하였다고 전해짐.)를 한 뒤 한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행한 항례를 우리들은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부릅니다.
2.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맺었던 강화조약의 내용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의 세자와 둘째왕자인 봉림대군, 그리고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를 따라 청나라에 시행할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 : 공물)를 보낼 것 등.
3. 삼전도비
삼전도비는 삼전도의 지명을 딴 것으로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큰나라 청 황제의 공과 덕을 기리는 비'인 셈입니다. 삼전도 비는 병자호란 3년 뒤인 인조 17년(1639) 12월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병자호란에서의 청 태종의 공적과 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입니다.
이 비석은 청일전쟁까지 세워져 있다가 청일전쟁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치욕스럽다하여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후(1913)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원래 힘이없어 다른민족에게 지배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그후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마자 삼전도비를 주민들은 다시 땅속에 묻어버렸는데 1963년에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치욕스런 역사를 되새기자며 다시 세워놓았습니다.
삼전도비는 3개국 문자가 새겨진 유일한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칠분해서체'이며, 이 비의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오준', 두전은 '여미징'이 썼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인조가 삼전도비의 비문과 글씨를 쓸 신하들을 뽑으면 그 자리에서 다들 사직을 했고 결국 나라를 위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이경석과 오준' 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다고 합니다.
'문화예술 역사 > 역사 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2) | 2018.01.07 |
---|---|
김병기 교수 “일본, 광개토대왕비 변조했다” (1) | 2018.01.07 |
미래사회 10대 트렌드 (0) | 2017.08.18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9 (0) | 2015.05.07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8 (0) | 2015.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