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3부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mqCYD70PcI

동영상 35분 이후에는 서점과 골동품점이 몰려 있는 유리창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유리창은 중국 각지의 지식인들도 관광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모여 살아 이덕무는 연행시 필담으로 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

元)·이정원(李鼎元) 등의 석학들과 사귀었고 귀국 후에도 서신을 교환하며

그들과 랜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양의 지구설, 지동설 등에 대한 견해도 영정조 시절 북학파들에 의해 조선에 전달되었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여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서양 오랑개들의 상주의나 서양의 지식은 그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이덕무 《입연기(入燕記)》 1778년 연행

1778년(정조 2년)에는 당시 서장관 심염조(沈念祖)를 수행하여 청나라에서 기균(紀均)·

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 등의 석학과 교류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D%95%EB%AC%B4

 

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1778년 포함 4 차례 연행

 1750년 11월 5일 ~ 1815년[1] 4월 25일)는 조선 후기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또는 정유(貞蕤),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2]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1778년 청나라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저자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던 농본억말(農本抑末)과 같은 상업 억제정책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C%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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