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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노랫말에 얽힌 30년대 문단 삽화

노랫말에 얽힌 30년대 문단 삽화 황 금 찬 | 시인 ‘가곡’이란 말과 ‘가요’란 말이 있다. 이 말들은 어느 정도 구별이 되는 것 같다. 가곡은 시에다 곡을 붙이고 거기에피아노 반주를 더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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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에 얽힌 30년대 문단 삽화

황 금 찬 | 시인


‘가곡’이란 말과 ‘가요’란 말이 있다. 이 말들은 어느 정도 구별이 되는 것 같다. 가곡은 시에다 곡을 붙이고 거기에피아노 반주를 더한 곡을 의미하고 ‘가요’라 함은 노랫말 즉 가사에 곡을 써 대중화한 것(유행가)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노랫말과 시는 엄격하게 구별됐고 시인은 유행가의 노랫말(가사)은 쓰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던 것 같다.

30년대 중반에 김억 시인이 유행가의 노랫말을 쓴 일이 있었다. 그 제목은 <꽃을 잡고>이다. 그것이 작곡되어 가수 선우일선이 불렀다. 그것이 그 당시 말 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문학청년들이 김억 시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이 있었다.
우리의 대표시인이신 선생님이 유행가 가사를 쓰시다니요, 하고 항의하며 떠들어댔다는 것이다.

여기 얘기가 많지만 다 줄이고 김억 시인이 “이 사람들아, 나는 양복 저고리 한 개로 계절 없이 일 년을 입는 사람일세. 그 한 편 써주고 돈 5원 받았네. 그 돈으로 쌀을 다 샀네. 저쪽에서 크게 부탁도 하고 살기도 어렵고 해서 그리 되었으니 이해를 좀 해주게.”

그 말을 듣고는 문학청년들이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고는 다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좀 늦게, 요 얼마 전에 타계하신 윤석중 선생이 가사를 하나 썼는데 그것이 작곡되어 이난영이 불렀다. 그런데 그 가사는 시로 되어 있어서 대개가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어 한 20년 전에 내가 윤석중 선생께 <봄맞이>란 시는 언제 쓰신 것이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그분은 깜짝 놀라며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으셨다. 나는 웃으면서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했다. “선생님, 그 시는 유행가 가사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찾게 해주는 희망의 시였습니다.” 선생님은 웃고 있었다.

“얼음이 풀려 물 위에 흐르니 흐르는 물 위에 겨울인가. 에헤야 봄맞이 가자.” 대충 이렇게 되어 있는 시다. 특히 ‘봄맞이 가자’에 힘을 두고 있다.

'꽃을 잡고'를 쓰신 김억 시인에게는 여러 가지 말도 있었지만 '봄맞이' 경우에는 별 말들이 없었던 것 같다.

1936~7년경에 우리들의 귀를 사로잡은 두 곡의 유행가가 있었다.
한 곡은 왕수복이 부른 <고도의 정한>이요, 또 한 곡은 선우일선이 부른 <조선팔경가>다. 이 두 곡 다 요즘 말로 하자면 히트곡이다. 그리고 왕수복과 선우일선 두 사람 다 평양에서 출발했다.

<조선팔경가>는 금수강산의 명소 즉 아름다운 곳을 전하려고 하는 데 그 노래의 목적을 둔 것 같고, <고도의 정한>은 견우와 직녀를 우리들의 처지에 비교하여 눈물의 애환을 그린 것 같다.

그 무렵 안창호 선생님이 상해에서 일경에게 끌려갔고, 급기야 서울로 이송되었는데 선생님의 병이 깊어 병원 근방에 방을 얻고 일경이 지키는 속에 투병하고 계셨다.

어느날 선우일선이 선생님을 찾아와 돈 50원을 드리면서 “선생님, 적은 것입니다. 어느 날 점심이라도 한번 드십시오.” 하며 드렸다. 선생님은 거절했다. 선우일선이 울면서 간청했다. 선생님은 돈 5원을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셨다. 선우일선이 눈물도 마르지 않은 얼굴로 나오다가 일경에 잡혀 옥고를 치른 일도 있었다. 그들은 가수였지만 나라 사랑의 마음은 한이 없었던 것 같다.

“칠석날 떠나던 배 소식 없더니…”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고도의 정한>이다. 견우, 직녀 그들이 서로 헤어지고 만나지 못하는 것을 우리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으로 비유한, 우리들의 ‘애환’의 삶을 이끌어내는 노래이다. 왕수복은 이 노래로 유명해졌다.

1934년인가 그때 이효석이 평양 숭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38년에 숭실대학이 폐교되었다. 그 무렵 평양에 대동공전이 문을 열었는데 이효석 교수는 그 학교로 옮겼다.

언제부턴지 그리고 누가 먼저 사랑의 문을 열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왕수복이 이효석의눈썹 같은 애인이었다는 것은 그 고장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효석의 친구들도 다 알고들 있었다. 그 대동공전 학생 중에 내 친구가 있었다. 전상순이란 친구였다. 그 친구의 말을 여기에 옮겨 본다.

이 교수와 왕수복의 사랑 이야기는 전교 학생들에게도 다 알려지게 소문이 나 있었다. 친구 전상순을 위시하여 7인의 학생들이 왕수복 가수의 집을 찾아갔다. 왕수복은 학생들을 방으로 들게 한 후 말을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 학생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학생들은 망설이다가 “우리 교수님을 사랑하지 마세요.” 했다.
“왜요, 사랑하면 안 되나요?”
“선생님은 폐가 좀 약하고 해서 사랑하면 안 됩니다.”
“학생들 참 좋으시다, 교수님의 건강까지 근심하시니. 하지만 교수님은 여자가 사랑해야 더 건강해지세요. 학생들 무슨 차를 드릴까요,커피 어때요?”
“예.”

학생들은 처음 맛보는 커피를 마시고 나오면서 이구동성으로 죽어도 저런 여자를 사랑해 봤으면 했다고 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3989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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