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821년 8월 21일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
선종 1846년 9월 16일(25세) 조선 한성부 새남터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1HSZB2fkg1o
https://www.youtube.com/watch?v=nGzGpWXjOPU
https://www.youtube.com/watch?v=7cGtkVbBsgs
https://www.youtube.com/watch?v=MmP6z-qrHQ4
익산 나바위성당(益山 나바위聖堂)은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에 있는 대한제국 시대의 성당이다. 1987년 7월 1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당은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중국에서 조선 헌종(憲宗) 11년 1845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황산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6년에 지은 건물이다. 1906년 베르모렐 신부가 감독과 설계를 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해 지었다. 당시에는 목조건축으로 앞면 5칸·옆면 13칸이었는데, 1916년 건물을 고치면서 일부분을 벽돌로 바꿨으며, 그 뒤 다시 2차례 수리를 하였다. 2층 건물과 비슷하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천장은 판자로 처리했고 바닥에 널판지를 깔았다.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이며 한국전통양식과 서양양식이 합쳐진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베르모렐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가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8C%80%EA%B1%B4
순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24] 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25]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26]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27]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28]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29]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30]의 제번[31]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32] 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33] 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24] 로 처형된 현계흠의 아들이다.
교세 확장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항로 개척이었다.[34]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35]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36]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37]
https://www.youtube.com/watch?v=Yye0Vrwp7XI
1840년 경에 제작된 〈수선전도〉에 사남기라고 적혀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3%88%EB%82%A8%ED%84%B0
정치신념에 따른 죽음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즉, 정치적 신념에 따른 양심수들이 처형당한 곳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천주교 사제들의 죽음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주문모 신부의 죽음
주문모 신부의 입국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천주교 북경 교구는 1795년에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천주교 사제이자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한다.
신유박해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문모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기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피에르 모방과 자크 샤스탕, 주교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의 순교
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교회 처음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병인박해
그리고 20년 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천주교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순교기념지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2]
https://kydong77.tistory.com/21193?category=486747
https://www.youtube.com/watch?v=A8VurXg7V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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