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821년 8월 21일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

선종    1846년 9월 16일(25세)    조선 한성부 새남터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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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회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성 교회에 대해서는 슐로스키르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로마 가톨릭교회(라틴어: Ecclesia Catholica Romana, 영어: Roman Catholic Church) 또는 천주교(天主敎)는 예수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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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1][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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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24] 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25]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26]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27]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28]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29]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30]의 제번[31]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32] 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33] 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24] 로 처형된 현계흠의 아들이다.

헌종실록》 13권 12년(1846년음력 7월 25일 (무신) 1번째 기사, 《헌종실록》 헌종 대왕 행장
 

교세 확장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항로 개척이었다.[34]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35]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36]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37]

 
 

https://www.youtube.com/watch?v=Yye0Vrwp7XI 

 


https://kydong77.tistory.com/21191

 

익산 나바위성당(聖堂)

https://www.youtube.com/watch?v=7cGtkVbBsgs 익산 나바위성당(益山 나바위聖堂)은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에 있는 대한제국 시대의 성당이다. 1987년 7월 1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taDShxe55BM 

 

순례, 김대건을 만나다 -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57quc7q5dxg 

 

 

순례, 김대건을 만나다 - 2부

https://www.youtube.com/watch?v=GU8-5PbbdvM] 

 

순례, 김대건을 만나다 - 3부

https://www.youtube.com/watch?v=ZmbufbDQlUg 

 

 

https://www.youtube.com/watch?v=zofcR8_6Ewk 

 

 

https://www.youtube.com/watch?v=A8VurXg7V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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