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YsYwpyXi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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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許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준은 한국의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東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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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정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川)의 읍호(邑號)를 받아 양평군(陽平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셋째, 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評)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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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1539∼1615)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한국의 의학 서적(한의학)을 하나로 모은 백과사전으로서, 1596년(선조 29)부터 편찬하여 1610년(광해 2)에 완성된 의학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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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내과학인 내경편(內景篇), 외과학인 외형편(外形篇), 잡병편, 약방 관계의 탕액편(湯液篇), 침구편 등으로 되어 있으며, 각 편마다 여러 항목이 있고, 각 항목마다 소제목들과 단방(單方), 침구법(針灸法)이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총론

  • 총론
  • 인용서
  • 동의수서보감과 비교
  • 천지운기
  • 심병(진찰)
  • 변증
  • 진맥
  • 용약

내경편(内景篇)(전4권)

  • 1권: 신형(身形), 정(精), 기(氣), 신(神)
  • 2권: 혈(血), 몽(夢), 성음(聲音), 언어(言語), 진액(津液), 담음(痰飲)
  • 3권: 오장육부(五臟六腑), 간장(肝臟), 심장(心臟), 비장(脾臟), 폐장(肺臟), 신장(腎臟), 담부(膽腑), 위부(胃腑), 소장부(小腸腑), 대장부(大腸腑), 방광부(膀胱腑), 삼초부(三焦腑), 포(胞), 충(蟲)
  • 4권: 소변(小便), 대변(大便)

운영자 注) 삼초부(三焦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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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초(三焦)는 한의학에서 주장하는 오장육부 중 육부(六腑)의 하나로서, 상초(上焦), 중초(中焦), 하초(下焦)가 있다. 해부학적으로 삼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상·중·하의 삼초를 주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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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초는 여러 기(氣)가 중심적으로 작용하는 곳으로 인체의 기화 작 용(氣化作用: 기혈의 작용에 의해서 내장기 고유의 기능이 발휘되는 것)을 종합·통제하는 곳이며 또한 원기(元氣)와 내분비물이 운송되는 길이다.

상초는 심장과 폐의 수송 작업에 힘입어 음식물의 에센스를 전신에 보내며, 그로써 피부·근육·골격을 보양한다.

중초의 주된 작용은 음식물의 소화·흡수와 혈액화하는 작용, 즉 영양물질을 혈액으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하초의 주된 작용은 맑고 탁함, 즉 대변과 소변을 분리시키며,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설시키는 일이다.

 

외형편(外形篇) (전4권)

  • 1권: 두(頭), 면(面), 안(眼)
  • 2권: 이(耳), 비(鼻), 구설(口舌), 치아(齒牙), 인후(咽喉), 경항(頸項), 배(背)
  • 3권: 흉(胸), 유(乳), 복(腹), 제(臍), 요(腰), 협(脇), 피(皮), 육(肉), 맥(脈), 근(筋), 골(骨)
  • 4권: 수(手), 족(足), 모발(毛髮), 전음(前陰), 후음(後陰)

잡병(雜病編) (전11권)

  • 1권: 천지운기(天地運氣), 심병(審病), 변증(辨證), 진맥(診脈), 용약(用藥), 토(吐), 한(汗), 하(下)[10]
  • 2권: 풍(風), 한상(寒上)[11]
  • 3권: 한하(寒下)[11], 서(暑), 습(濕), 조(燥), 화(火)
  • 4권: 내상(內傷), 허로(虛勞)
  • 5권: 곽란(霍亂), 구토(嘔吐), 해수(咳嗽)
  • 6권: 적취(積聚), 부종(浮腫), 창만(脹滿), 소갈(消渇), 황달(黃疸)
  • 7권: 학질(瘧疾), 온역(瘟疫), 사수(邪祟), 옹저상(癰疽上)[11]
  • 8권: 옹저하(癰疽下)[11], 제창(諸瘡)
  • 9권: 제상(諸傷), 해독(解毒), 구급(救急), 괴질(怪疾), 잡방(雜方)
  • 10권: 부인(婦人)
  • 11권: 소아(小兒)

탕액편(湯液編) (전3권)

  • 1권: 탕액서례(湯液序例), 수부(水部), 토부(土部), 곡부(穀部), 인부(人部), 금부(禽部), 수부(獸部)
  • 2권: 어부(魚部), 충부(蟲部), 과부(果部), 채부(菜部), 초부상(草部上)[11]
  • 3권: 초부하(草部下)[11], 목부(木部), 옥부(玉部), 석부(石部), 금부(金部)

침구편(鍼灸編) (전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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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허준(許浚, 1539년 ~ 1615년 10월 9일)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을 작성 하였으며, 동의보감 외에도 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종결 후, 각종 중국의서와 기존 의서의 복원,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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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편집]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왕세자 광해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급되었다. 이어 허준은 정2품상계 정헌대부와 중추부의 정2품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가 정헌대부에 오르자 즉시 삼사의 간원들이 나서서 탄핵, 의관들의 가자를 취소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1595년(선조 28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침치료를 시술하였다. 이때 내의원(약방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림)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참여하였다. 1596년 이후 허준은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의서를 편찬,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선조 33년)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수의(실직으로서 내의원의 최고서열)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진왜란 당시 어가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올랐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ㅑ려ㅑ 강격되었다.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종1품상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1606년 이어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정1품하계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가자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유배와 말년[편집]

1608년 음력 2월 선조가 병세가 급박하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종래의 예에 따라 조정 신하들의 갖가지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3월 17일 파직당하고 공암(孔巖)으로 문외출송되었다. 문외출송(門外黜送)이란 유배의 일종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한성부의 사대문 밖, 곧 지방으로 추방하는 형벌이었다. 광해군은 허준을 빠른 시일내에 복귀시키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허준은 이런 와중에도 이미 1596년부터 왕명으로 편찬하고 있던 1610년(광해군 2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15년여의 연구 끝에 편술을 계속, 1609년 11월 22일 광해군이 석방 명령을 내릴 때까지도 계속 집필하였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 해 음력 11월 22일(양력 1611년 1월 5일) 귀양이 풀리고 신원(伸冤)되어 내의원에 복직하였다.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양력 10월 9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다른 설에는 일본인 쓰기무라(三木榮)의 《조선의사연표 (朝鮮醫事年表)》 p.337에는 허준이 1615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1615년 11월 광해군은 허준의 관작을 그의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하계)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TRLwMdd7Bwk 

 

 

 

 

 

 

https://www.youtube.com/watch?v=kDY_VUDnZMc&t=632s 

 

 

 

 

https://www.youtube.com/watch?v=94RL7JqNu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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