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일체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如露亦如電
여로역여전, 풀끝의 이슬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과 같다.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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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有爲,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 팔리어: savkhata, 영어: created, formed, conditioned)에서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다.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과 소멸의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역사이래로 사람이 만든 법은 모두 유위법인 셈이다. 성경, 불경, 코란, 헌법 등등 모두 유위법이다.
무위(無爲,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 팔리어: asavkhata, 영어: uncreated, unformed, unconditioned)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다.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분별하는 마음이 개입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무위법이다.
본질적으로 고요하고 텅 빈 그자리에서 나오는 법이 무위법이요.
감정이나 욕심이 움직이기 이전의 자리에서 나오는 법이 무위법이다.
저절로 이루어지고 그냥 이루어져 있는 법이 무위법이다.
또한 부처님은 봄바람같이 처세한다.
"봄이 되면 봄바람이 분다.“
이 봄바람을 맞으며 벚나무에는 벚꽃이,
살구나무에는 살구꽃이 피어나며,
진달래도 개나리도 꽃을 피운다.
그런데 봄바람은 그냥 따듯한 바람만을 아낌없이 줄 뿐이다.
벚꽃은 예쁘니까 바람을 많이 주고, 개나리는 미우니까 바람을 적게 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차별 없이 바람을 줄 뿐이다. 그리고 나무들은 각각 지닌 법대로 바람의 도움을 받아 나름대로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dwC-KQ_qDo
‘아뇩다라삼먁삼보리’ㅡ 범어를 풀어보면
‘an[否定] uttarā[위] +samyak[적절한] saṁ[동등한] bodhi[깨달음]'이며
*[운영자 생각]
한국어의 '안'도 부정의 의미다. 한국어의 뿌리는 범어다. 뜻글자인 한자는 '無'로 번역했다. uttarā[위]도 마찬가지임.
뜻풀이로는 ‘더 이상의 위가 없는 적절하고도 동등한 깨달음’이다.
더 이상의 위가 없으니 무상(無上)이요, 적절하고도 동등하니 정・등(正・等)이며, 깨달음이니 각(覺)이기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옮긴 것이다.
결국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중심이 되는 단어이자 의미는 ‘bodhi(菩提, 覺, 깨달음)’이며, 나머지는 그 깨달음이 어떤 유형인지를 설명해주는 내용들이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참고]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의 본뜻은
'길상존이시여 길상존이시여 지극한 길상존이시여 원만, 성취하게 해 주소서'
* '사바하' 는 기도문을 끝맺는 관용구, 기도문의 내용을 '성취케 해 주소서'의 의미임. 기독교의 '아멘'과 같은 관용구.
https://chamsonsajeon.tistory.com/398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일체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如露亦如電
여로역여전, 풀끝에 이슬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과 같다.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할지니라.
https://chamsonsajeon.tistory.com/398
사구게(四句偈) /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능엄경, 원각경
1. 화엄경,법화경,열반경,금강경 4구게(四句偈)
2. 4구게(四句偈)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능엄경, 원각경
[화엄경(華嚴經)] 4구게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만약 사람들이
과거현재미래의 모든부처(진리)를 알고 싶거든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비추어 관할지니
“일체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법화경(法華經)] 4구게
諸法從本來
제법종본래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常自寂滅相
상자적멸상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므로
佛子行道已
불자행도이
우리가 이와같이 닦고 닦으면
來世得作佛
내세득작불
내세에는 부처를 이룰 것이다.
[열반경(涅槃經)] 4구게
諸行無常
제행무상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是生滅法
시생멸법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生滅滅已
생멸멸이
이 생멸에 집착함이 없어지면
寂滅爲樂
적멸위락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 4구계 四句偈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皆是虛妄
모두가 허망하다,
若見諸相非相
약견제상비상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卽見如來
즉견여래
곧 여래(진실)를 보리라.
不應住色生心
불응주색생심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진실)를 보지 못하리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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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구게(四句偈)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능엄경, 원각경
4구게란 경전의 사상을 집약해서 짧은 4개의 구절로 이루어진 법문에 관한 한시(漢詩) 형식의 운문체 문장[게송]을 말한다. 대개 4~5자씩을 1구(句)로 해 4구, 곧 16~20자로 된 게송이다. 그러나 더러 이 규칙을 벗어나는 것도 있다.
한권의 경전을 다 읽을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해서 사구게에다 경전의 의미를 함축해서 담았기 때문에 사구게만 독송하고 사경하고 외우더라도 그 공덕은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구게란 글자 그대로 경전에 등장하는 네 글귀로 된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경전의 말씀으로 대개 그 경전의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반드시 네 글귀로만 된 게 아닐 수도 있으므로 ‘네 글귀’란 말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냥 좋은 문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사구게 내용의 핵심은 주로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공성(空性)과 마음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유명한 4구게는 아래와 같다.
1) 금강경(金剛經)의 4구게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해설]
이 사구게는 <금강경>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오는 말로서, 무릇 상(相)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 깨달음을 얻을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상이 있는바 모든 것이란 뜻으로, 두두물물(頭頭物物) 일체 현상계에 벌어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꼭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 ? 이 ? 비 ? 설 ? 신 ? 의(眼耳鼻舌身意) 육근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일체 모든 현상계가 개시허망(皆是虛妄), 즉 일체 현상계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이렇게 상이 있다고 하는 바 모든 것이 상이 아닌 사실을 바로 본다면(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할 것이라고 했다. 즉, 이 참된 이치를 바로 본다면 여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여래를 본다는 말이다. ‘여래를 본다’는 말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탕이 텅 비어 있다. 공(空)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꽉 차서 인연 따라 모든 것이 나투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나무와 나무를 비벼서 불을 얻었다고 하면 그 불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공기 중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비비는 내 손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분명이 이렇게 불이란 상이 나투었다.
이처럼 세상 모든 만물, 범소유상은 다 인연 따라 잠시 나툰 것일 뿐이므로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되는, 그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 · 귀 · 코 · 혀 · 몸 · 뜻'[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으로 접할 수 있는 모든 상(相) 역시 고정된 상(실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드러난 모양과 현상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상이 상이 아님을 여리실견(如理實見) 한다면,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말이다.
[참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342
불교 인식론은 대상을 반영, 인식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 pañca skandha)과 이것을 세분화한 십팔계(十八界, aṣṭādaśa dhātava)로 이루어져 있다.
십팔계는 여섯 가지 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 육경(六境, ṣaḍ viṣayā)과 이것들을 지각하는 기관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인 육근(六根, ṣaḍ indriyāṇi), 그리고 이것들을 인식하는 것에 각각의 식을 붙인 육식(六識, ṣaḍ vijñāna) 등 총 18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해설]
<금강경>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게송으로, 보살이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설한 게송이다. 보살은 반드시 맑고 깨끗한 마음[淸淨心]을 내야하며,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마음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작용이 결코 현상에 꺼들려 집착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즉,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聲香味觸法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청정한 마음을 내라고 했다. 보통 우리가 마음을 일으킬 때는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라는 육근(六根)이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 · 법(法)을 대상으로 해서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눈을 예로 들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있어서 여여하게 아무런 분별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연인을 볼 때와 미워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 마음은 좋다고 집착하고, 밉다고 싫어하며, 대상에 좋고 싫음의 분별을 덮어씌워 놓고 그 대상에 집착해서 좋고 싫은 마음을 일으킨다.
의(意)의 경우도 그렇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 그러나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 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 좋고 싫다는 딱 정해진 상은 없다. 죽고 못 살듯이 사랑한 여인과 결혼해 살다가 나중에 서로 미워하며 이혼하는 숱한 예를 우리는 보고 있다. 이처럼 좋고 싫다는 게 허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이야 말로 모든 수행자들이 추구해야 할 길이다. 수행자의 길은 무집착(無執着), 방하착(放下着)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사구게 형식을 갖추지 않았으나 육조 혜능(慧能) 대사가 이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금강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이기에 보통 사구게에 포함시킨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해설]
이 게송은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게송으로, 상(相)을 염두에 두고 부처를 보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 존자에게 32상(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질문 하니, 수보리 존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러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32상을 가졌으니 여래(如來)라 하겠구나 하고 바로 반박하셨다. 그러니까 수보리 존자는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수정해 대답했다. 그러니까 겉모양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보기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 ― 그릇된 도를 행함이니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깨닫겠다고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많지만 부처라는 대상을 정해 놓고 찾아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육근으로 부처를 만나고자 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형상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귀로서 부처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 길을 든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못한다. 육근으로 접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왁깔리(Vakkali) 비구가 있었는데, 부처님 용모에 반해 가르침을 듣기보다 부처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자신의 육신을 보지 말고 자신의 가르침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말하셨다고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해설]
이 게송은 <금강경>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나오는 것으로 공(空)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일체의 유위법이란 모든 삼라만상 모든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일체의 유위법이 하나도 없다고 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꿈 ? 환영 ? 거품 ? 그림자 ? 이슬 ? 번개와 같다고 관하라고 하셨다. 이게 바로 삼라만상의 공성(空性)을 제대로 관하는 것이다. 번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꿈, 거품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있어도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더 빠르게 사라진다. 그렇게 실체가 없이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영원하길 바라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응신(應身)과 화신(化身)으로 나투시지만 이는 여래의 참다운 법신(法身)이 아니다.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진실이 아닌 망연(妄緣)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오직 법신(法身)만이 청정해 크고 넓어 끝이 없다는 말이다. 상(相)을 떠나야 참다운 여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금강경>은 이와 같이 상을 떠나야 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유위법(有爲法)은 분별망상으로 이루어진 법이다. 즉, 번뇌 망상이 연기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어서 참으로 허망한 것이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이란 다 허망하며, 다만 잠시 인연 따라 생하고 멸할 뿐인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응작(應作)’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뜻이다.
헌데 초기경전인 빠알리어 <상윳다 니까야> 3권에 이런 말이 있다.
“물질은 거품 덩어리와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고, 인식은 아지랑이와 같고, 심리현상은 야자수나무와 같고, 알음알이는 요술과 같다.”
<금강경> 4구게 문장과 초기불교 문장이 아주 비슷하다. 대승경전과 초기경전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대승경전의 뿌리가 초기경전임을 이에서도 알 수 있다.
이상의 <금강경> 4구게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대승의 공(空)을 말한다. 도자기로 된 용기에 모래가 담겨있다면 모래그릇이 되고, 그 용기를 비워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며, 물을 부으면 물그릇이 된다. 즉, 나를 비우는 것은 보다 바른 것을 채우기 위한 선행 작업이며,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팔정도를 채우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공(空)일수록 그 속에 많은 것(유/有)을 담을 수 있으므로 이를 두고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2) 화엄경(華嚴經) 4구게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해설]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게송으로 전체 게송 중 가장 잘 알려진 게송이다. 만약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자기 마음의 체성(體性)을 요달(了達)해 봐라. 모든 것이 마음의 조화임을 알게 되리라고 했다.
첫 구절은 만약 사람들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 싶다면, 다시 말해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두루 통용되는 참된 진리, 참된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하는 말이다. 그리고 참된 근본이란 곧 <화엄경>의 근본, 인간의 근본, 우주의 근본, 삼세일체불의 근본, 나의 근본이기도 하고, 온 우주 산하대지(山河大地) 두두만물(頭頭萬物)의 근본이고, 부처의 근본이기도 하며, 법계(法界)의 근본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삼세의 모든 부처’라는 말은 전적으로 대승불교사상에 의거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법계의 성품 모두가 마음의 조작임을 관찰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둘 째 구절은 (이렇게 참된 근본, 참 진리,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해야 할 것이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했다. 법계의 성품이 바로 나의 성품이고, 법계의 근본이 나의 근본이기 때문에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는 말이 바로 나의 근본을 살피라는 말이며, 나의 참 성품, 즉 불성(佛性)을 찾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근본이 바로 ‘마음’이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4구게는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 마지막에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 <화엄경>의 핵심사상도 다 마음이고, 모든 것들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말이다.
유심(唯心)사상은 <화엄경>의 사상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문제는 근본불교(根本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 선불교(禪佛敎)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중심에 서 있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마음의 이치와 마음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 불교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마음을 깨달았다면 곧 불교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다는 것도 실은 이 마음을 깨달은 것이다.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샐종생 무법이부조)
[해설]
이 게송도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것으로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내고, 오온(五蘊-이 몸뚱이)도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마음은 무엇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화엄경>은 아름다운 삶은 일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설하면서, 우리들 마음의 공능을 화가와 비교해 일체가 모두 오직 마음임을 선명하게 이야기했다. <화엄경>에서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는 의미와 함께 설한 내용이다. 화가가 흰 종이 위에다 그림을 그릴 경우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마음대로 다 그릴 수 있다, 그와 같이 마음은 세상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온갖 능력도 만든다. 그와 같이 만들 줄 아는 능력을 ‘한 물건’이라고도 하고, 진여(眞如)라고도 하고,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마음이라 했다.
若修習正念 明了見正覺 無相無分別 是名法王子
(약수습정념 명료견정각 무상무분별 시명법왕자)
[해설]
이 게송도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것으로 만약 바른 생각으로 닦아 익혀 밝게 올바른 깨달음을 요달(了達)해 보면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 해 법왕자(法王子=보살)라 한다는 말이다.
※법왕자(法王子)---미래에 부처님이 될 자리에 있는 보살. 세간의 국왕(國王)에게 왕자가 있듯이, 부처님을 법왕(法王)이라 함에 대해 법왕자(法王子)라 했다. 특히 문수(文殊) ? 미륵(彌勒) 등의 보살을 가리켜 법왕자라 하지만 때로는 불자(佛子)를 말하기도 했다. 특히 문수보살의 지혜와 덕이 뛰어나서 법왕자(法王子)라는 칭호로 불리며, 그래서 보살들 중 상수(上首:우두머리) 역할을 한다는 말도 있다.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약인지심행 보조제세간 시인즉견불 요불진실성)
[해설] 이 게송 역시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만약 마음이 모든 세간을 만들어내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될 것이고 부처님의 진실성을 알게 될 것이다 - 곧 깨달음을 얻을 것이란 말이다.
3) 법화경(法華經) 4구게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해설---<법화경>의 근본정신인 제법실상의 깊은 도리를 말하고 있다. <법화경>의 다른 이름이 곧 제법실상이다. 제법이라 함은 모든 것을 가리킨다. 있다는 모든 것을 말함이요, 실상이라 함은 모든 것의 참모습이며 중도를 일컫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내세에는 부처를 이룰 것이라는 말이다.
제법(諸法) ―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해 청정한 것이라는 말은 그대로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나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제법’이란 <금강경>에서의 상이 있는바 모든 것, 즉 ‘범소유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은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지만 본래는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이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번잡하며 끊임없이 시비분별을 일으키는가.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 공한 것이고, 본래는 청정하고 고요하다는 말이다. 각기 존재 본연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일체유심조]이므로 허망하고[개시허망], 본래는 청정하다는 말이다[상자적멸상]. 그러니 모든 수행자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부처를 이룰 것이라 했다. 이 말이 그대로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나 <화엄경>의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4) 열반경(涅槃經)의 4구게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해설---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의 법칙이다. 모든 존재는 그 법칙에서 예외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고, 생멸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생멸에의 집착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보고 듣는 모든 현상은 변한다. 곧 생하고 멸하는 법칙이다. 이 생멸이 생멸 아님을 깨달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가 된다는 말이다.
무릇 화두를 들고 있어도 별별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그러면서 그 일어나는 근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이 숱한 망상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찾아 들어가면 일어난 그 자리가 없다. 그 자리가 텅 비어 있다. 그것이 마음의 본체(本體) 자리이다. 생멸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마는, 그 생멸 그 너머. 적멸(寂滅)한 고요한 자리. 부단히 생멸하면서도 고요한 자리가 틀림없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즐거움의 자리다. 부처님은 입멸에 드시기 직전에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생멸멸이(生滅滅已)의 생멸(生滅)은 정신현상으로서의 생멸심, 즉 번뇌의 생멸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생멸멸이’는 번뇌의 생멸을 가라앉히라는 의미이고, 그것은 탐ㆍ진ㆍ치(貪瞋痴)의 소멸이 바로 최상의 행복이라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정의와 일치한다.
5) 능엄경(楞嚴經) 4구게
實際理地 不受一塵 佛事門中 不捨一法
(실제이지 불수일진 불사문중 불사일법)
해설 - 실질적인 진리자리에는 먼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중생을 교화하는 부분에서는 한 법(온갖 잡동사니들)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실제적인 진리란, 이면(裏面)에 있는 본질의 세계이다. 본질의 세계란, 완벽해서 빈틈이 없다. 그런 본체란 공적한 자리이다. 따라서 진실만 취하려 하다가 보면, 실은 아무것도 붙들 것이 없고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먼지 하나 필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란 본질과 현상의 세계가 함께 존재한다. 불사(佛事)란 우리들이 사는 일상사(日常事)를 말한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했듯이, 우리들이 사는 일상사 하나하나가 다 불공 아닌 게 없다는 말이다.
개혁과 쇄신은 실제이지의 바탕에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제도를 고쳐 국정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들이 사는 삶, 일상사 그대로가 다 바로 설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란 이 땅의 어느 생명도 버리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이지(實際理地)란 진리의 본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티끌만한 허물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불사(佛事)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다. 중생이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인 세계이다. 그러나 잡동사니 그들도 모두 우리 백성이니 다 함께 해야 하는 이웃(생명)이다. 그래서 참된 지도자, 좋은 리더는 그 구성원(국민) 누구도 버릴 수가 없다. 어느 누구도 버릴 수 없다는 여기에서 통합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원해야 하겠다.
6) 원각경(圓覺經) 4구게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지환즉리 부작방편 이환즉각 역무점차)
해설 - 모든 것이 환(幻, 꼭두각시)인 줄 깨닫기만 하면, 곧 (헛된 생각을)여의면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幻)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더 닦아갈 것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환(幻)’은 일체의 모든 존재현상은 인연으로 얽혀 있을 뿐 불변의 실체성이 없고, 오직 환상과 같이 거짓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유로 보인 말이다.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모든 것은 환유(幻有)이고, 나타나 있는 사상(事象)은 환술사(幻術師)가 요술을 부려 만들어 놓았듯이 환화(幻化)라는 것이다. 따라서 환을 여의면 바로 깨치게 된다는 말이다.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KO8eGKXKK8&t=428s
http://w3devlabs.net/hb/archives/14211
1. 원시경전의 내용과 설법상
아함경은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부처님의 설법하신 뜻대로 이해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불충분하게 또는 저속한 의미로 받아들이든지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 또 부처님의 직제자들은 부처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했다 하더라도 그 후 수 백년 동안 구송전승(口誦傳承)되거나 다른 언어로 바뀌는 동안에 의식적 무의식적 변괴가 있을 런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아함경 설법 그대로가 불설이라고 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함경에는 부처님의 설법의 모습이 다분히 남아 있다. 또한 대승불교의 원천이 된 것도 포함하고 있다. 아함경을 소승설이라고 본 것은 잘못이다. 원래 부처님 설법 당시의 민중에게 이해되도록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평이하게 말씀한 것이고 높은 가르침도 민중이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물질의 요소로서 4원소를 말씀한 것도 그것이다. 또한 안근(眼根) 등 오근(五根)에 대하여도 일반이 이해될 수 있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감각기관을 말한 것이다. 또한 오온(五蘊)이라는 말의 개념은 우리의 심신의 구성요소를 색 수 상 행 식 (色受想行識)으로 본 것이다. 색은 육체(물질)이고, 수는 감수 작용, 상은 개념표상작용, 행은 수상식이 아닌 마음작용, 식은 인식 판단작용이다. 이렇듯 불교 독자의 오온도 상식적으로 분류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삼계(三界)나 악취(惡趣)를 객관적 존재로 설명하게 된 것은 삼세 인과업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된 부파불교 이후의 것으로서 아함경에는 보이지 않는다. 12연기(十二緣起) 등 연기설에서도 후세에 말하는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로서의 12연기설은 원시경전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그 싹<萌芽> 같은 것을 비유로 말했을 뿐이다.
또한 열반이라든가 무위(無爲)라는 말도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불생 불멸의 객관적 존재가 아니고 불교의 이상에 도달한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를 의미했다.
2. 원시불교의 무아(無我)
오온 연기라는 말이 불교 독자의 용어이듯, 무아도 불교 독자의 용어다. 아함경에서 무아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쓰였을까? 외교(外敎)에서는 대개 자아(自我)의 주체로서 상주불멸의 실체인 아(我: 아트만)를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아를 근본 입장으로 한다. 무아는 「아가 없다」「아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라는 실체가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본체로서의 능력을 인식하거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식하고 증명할 수 없는 실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부처님은 오온의 무아에 대하여 5비구에 대한 최초 설법으로 전법륜경(轉法輪經)을 설하신 다음에 무아상경(無我相經)을 설하셨다. 그런데 이 무아상경에 있는 아(我)나 무아의 의미가 부파에 따라 다르게 전해졌다. 제 1의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있는데 그 어느 것이 부처님의 진의인가는 오늘날 입증할 수 없다. 제1의적인 무아설은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에서 말한 대승의 무아<空>설과 일치한 것이고 통속설은 당시의 민중의 속설인 듯 하다.
먼저 제1의적 무아설은 한역 잡아함에만 보인다. 오온 무아의 경문을 다음에 소개한다.
『색(色)은 유아(有我)가 아니다. 만약 색이 유아라면 색에 병고가 나지 않는다. 또한 색에서 무엇을 어떻게 되게 하고 또는 되지 않게 하고자 하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색은 무아이므로 색에 병이 있고 고가 생긴다. 또 색에 있어 어떻게 되게 하고 또는 어떻게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할 수 있다. 수상행식도 그와 같다.』
여기서는 색(육체)이 상주불변의 본체로서의 我라면 색에 병고가 날 리 없고 색을 이리저리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색이 무아이고 고정성이 없으므로 색에 병고도 생기고 이리저리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통속의 무아설에서는 무아상경<팔리문>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색은 무아다. 만약 색이 아라면 색에 병고가 있을 리 없다. 또한 색을 이렇게 되라 이렇게 되지 말라고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이 무아이므로 색에 병고가 생기기도 하고 색을 이리 되라 저리 되지 말라고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
여기에서 이를 세속적 최고신 · 만능의 자재자의 뜻으로 잡아서 만약 색이 자재자라면 색에 병고가 있을 리 없고 색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이 무아이고 자재자가 아니므로 색에 병이 있고 색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이 통속적 입장에서는 아나 무아의 의미가 바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
현존하는 아함경이나 불전 등에는 대개 통속적인 무아설을 채용하고 있고 다만 한역 잡아함의 무아상경만이 본래 무아설을 취하고 있다. 여러 부파가 전하고 있는 무아상경이 대개 통속적 무아설을 채용하고 있는데 아마 처음부터 잘못 이해되고 있든지 불멸 후에 통속적 설명이 되었든지 그 어느 하나일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의 반야경 공(空)설 <무아설> 이라든가 중론에 공설<무아>에서는 제1의적 무아설을 바르게 설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설이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같은 부처님 설법도 듣는 자의 지혜 근기 우열에 따라 깊게도 옅게도 이해된다. 예를 들면 난타가교계경(難陀伽敎誡經)을 보면 난타가 비구가 오백인의 비구니를 위하여 오온 12처(十二處)의 무아에 대하여 설명하였지만 비구니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은 난타가에게 명하여 그 다음날도 같은 설법을 반복시켰다. 그 결과 무아의 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최후의 비구니까지도 초보의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었다.
3. 아함경의 제1의설과 세속설
부처님의 설법은 상대의 근기에 따라 적당한 가르침을 설하고 최후에는 모든 사람을 최고 이상까지 인도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그리고 지도 방법으로는 일승도(一乘道)로서 설한 것과 차제설법(次第說法)으로 설한 것이 있다. 일승도라 하는 것은 상대가 범부시절부터 성자까지 다시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도록 똑같은 수행방법을 실천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계정혜 삼학은 범부 때부터 수행시킨다. 처음에는 삼학 수행이 철저하지 못하지만 차차 수행이 깊어지면 삼학도 무루(無漏) 성자가 되고 최고의 깨달음에 따라 완전한 삼학이 된다. 또한 사제관(四諦觀)이나 오온관도 범부시대부터 최고 성위까지 수행한다. 처음에는 피상적인 것이지만 마침내는 최1의를 취득한다. 이처럼 일승도 수행에서는 같은 수행법을 닦지만 수행에 따라 그 내용이 심화해 가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차제설법의 교화수단으로 상대방의 근기나 이해력을 따라 다른 설법을 하셨다. 오늘날의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교육이 단계적으로 교과목이 다른 거와 같다.
여기에 특례를 하나 들어보자. 부처님이 난타를 교화하신 이야기다. 부처님이 성도 후 처음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 첫날은 정반왕을 만났고 둘째 날은 난타가 석가국 세자가 되어 그 나라 첫째 미인인 손다리와 결혼하게 되어 있었다. 부처님은 그날 탁발차 난타의 집 앞에 섰다. 난타는 부처님의 발우를 받아 음식을 담아서 나와 보니 부처님이 안 계셨다. 난타는 부처님의 뒤를 쫓아 마침내 교외에 이르고 거기서 억지로 삭발 출가하게 된다. 억지로 출가한 난타는 그리운 손다리를 잊지 못해 수행은커녕 답답한 나날을 보낸다.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난타와 외출하여 도중에 산불을 만나 불에 데인 암 원숭이를 보게 된다. 부처님은 다시 난타를 데리고 도리천궁으로 가서 5백인의 천녀들이 노는 것을 본다. 부처님은 난타에게 물었다. “이 천녀들과 손다리와는 어느 쪽이 미인인가?” “그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그것은 손다리와 좀 전에 본 원숭이와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난타는 천녀에 마음이 끌려 손다리를 잊게 된다. 부처님은 출가수행에 힘쓰면 천국에 난다고 말하니 난타는 천녀를 얻을 욕심으로 열심히 수행한다. 그때의 비구들은 난타가 천녀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은 품팔이 일꾼이 품값 때문에 일하는 거와 같다고 하여 난타의 불순한 수행을 비난하고 멸시했다. 이를 들은 난타는 부끄러워하고 마침내 순수한 무소득의 불도 수행에 힘써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여기 난타에 대한 부처님의 교화방법은 먼저 재가의 욕락의 생활을 떠나게 하고 출가 후에는 욕심을 끊게 하고서 불탄 암 원숭이나 천녀를 보이고 또한 천상에 날 것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잘못을 알게 하여 최후에 진실한 불도수행으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한 것은 차제 설법적 교화법이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재가신자에게는 낮은 가르침을 설하고 출가자에게는 높은 가르침을 설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파사익 왕에게 하신 설법은 대개 세속적 저급의 법이다. 이에 반하여 빈바사라왕에게는 일회의 설법으로 성위에 들게 하였다.
또한 부처님은 상대방의 성격에 따라 지도하였다. 이론이 뛰어난 자에게는 사제나 연기의 도리를 말했고 이론보다도 정서가 풍부한 자에게는 신앙 실천을 지도하였다. 선정 수행의 경우에도 그랬다. 탐욕이 많은 자는 부정관(不淨觀)을, 진에가 많은 자는 자비관(慈悲觀)을, 우치자에게는 연기관(緣起觀)을, 망상이 많은 자는 수식관(數息觀)을, 아집이 센 자는 신체의 부분적 요소를 관찰시켜 아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감하여 깨닫게 하는 계차별관(界差別觀)을 닦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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