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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4번]
41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42 순찰사에게 답함
43 순찰사에게 올림
44 순찰사에게 답함
45 순찰사에게 올림
46 순찰사에게 올림
47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48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49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50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51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52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53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초가을에 집의 아이 혼인을 치르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중씨(仲氏) · 계씨(季氏) 두 분 진사를 만날 수 있어 귀양살이 소식을 대략 들었지요. 내 비록 영해(寧海)를 보지는 못했지만, 추측건대 천하의 동쪽 끝에 처하여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마치 아교로 붙이고 실로 꿰맨 듯이 맞닿고, 낙지나 인어(人魚)뿐일 터이니 누구를 이웃으로 삼으리오? 임금의 은혜를 받잡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할 따름이지요. 옛사람은 그래서 어디에 들어가도 스스로 뜻을 이루었던 것이니, 군자(君子 남에 대한 존칭)께서는 더욱 명덕(明德)을 높여 나가시기 바라오.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닥쳐오매, 바람은 높은 곳에서 불고 서리는 조촐히 내려 그리움이 한창 간절했는데, 뜻밖에 소곡(巢谷)에서 갑자기 친필 편지를 전해 올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는 묵은 학질이 또 발작하여, 이불을 포개 덮고도 추워서 떨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참이었는데, 편지를 받고는 이불을 걷어 젖히고 기쁨이 넘쳐 땀이 나면서, 등이 땅기던 것도 바로 그쳤답니다. 편지로 인하여 객지에서 신령의 가호로 건강히 지내심을 알게 되었으나, 어찌 한(韓) 나라 대부(大夫)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용감하게 갈 수 있으리오.
상자평(向子平)처럼 자녀의 혼사도 이미 다 치렀고, 도연명(陶淵明)처럼 집 정원에는 소나무와 국화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어찌하여 오래도록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어 홀로 텅 빈 관아를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매화가 아내처럼 다정스럽게 안방을 떠나지 아니하고, 또 작은 화분이 있어서 매화 화분을 따라와 그 시녀가 되었지요. 옛사람 중에는 파초를 벗한 이가 없는데, 나는 유독 파초를 사랑하지요. 줄기는 비록 백 겹으로 돌돌 말려 있지만 가운데가 본래 텅 비어 한번 잎을 펼치면 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이 때문에 나의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된 것이라오. 달 밝은 창이나 눈 내리는 창가에서 가슴을 터놓고 마음껏 이야기하니, 중산군(中山君)이 민첩하여 말없이 도망치는 것과는 같지 않소이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에는 식사할 때 이〔齒〕가 있음을 잊어버리고 딱딱한 것 연한 것 가리지 않고, 혀를 놀리기를 바람같이 하고 뺨을 불끈거리기를 우레같이 하면서도, 물고 뜯고 씹어 대곤 하는 것을 각자 맡은 것이 있는 줄을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런데 최근 4년 사이에 잇몸 사이가 요란스럽게 모두 들썩이고, 시고 짜고 덥고 찬 것에 따라 각기 다른 통증이 나타나니, 잠시 뭘 마시고 씹으려 해도 먼저 조심하게 되는구려.
지난가을에 왼쪽 볼의 둘째 이가 갑자기 빠져 나가고, 오른쪽 볼의 셋째 어금니는 안쪽은 빠지고 겉만 간신히 걸려 있어서 마치 마른 나뭇잎이 나뭇가지에 연연하는 것과 같으니, 이야기하고 숨쉬는 사이에도 뒤집힌 채로 들락날락하여 잘그락잘그락 패옥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곤 한다오. 아, 이가 빠진 뒤에도 이는 남아 있지만, 남아 있는 이라 해서 어찌 진실로 내가 소유했다 할 수 있겠소이까.
아침 해가 떴을 때 창가로 가서 빠진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뼈도 아니요 돌도 아닌 데다, 붙어 있는 뿌리가 너무나 옅어서 망치와 끌로도 단단히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대개 온몸의 힘과 원기가 그것들을 단속하고 다스릴 수 있었으나, 급기야 피와 살이 차츰 마르고 진원(眞元 원기)이 그것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어서는, 예전에 나를 위하여 효능을 발휘했던 것들이 얼음 녹듯이 먼저 무너지고 마니, 예로부터 천하의 대세가 본디 대부분 이와 같지요. 내 이제 이 하나가 빠졌으나, 역시 또 어찌하겠소?
최근에 지은 졸작(拙作) 두어 편이 있기에, 이 편에 기록해 보내어 삼가 적막함을 위로하는 바이니 글을 바로잡아 주기를 망녕되이 바라오. 글에 대한 평어(評語)는 모두 중존(仲存 이재성)이 쓴 것이외다.
겨울 날씨가 봄같이 따뜻한데, 대감께서 더욱 조리 잘하시기만을 바라며, 나머지 많은 말은 우선 줄입니다.
[주C-001]이 감사(李監司)가 …… 답함 : 《정조실록》에 의하면 전라 감사 이서구는 1795년(정조 19) 6월 도내의 진휼(賑恤)을 실시한 고을에서 굶어 죽은 자들이 속출한 사건으로 인해 치죄를 당하고 경상도 영해부(寧海府)로 귀양 갔으며, 그해 11월 방면된 뒤 12월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주D-001]초가을에 …… 들었지요 : 연암의 차남 종채(宗采)는 1795년 가을에 처사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이서구에게는 아우로 경구(經九 : 1763~1818)와 소구(韶九 : 1766~1818)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1790년에 함께 진사 급제하였다.
[주D-002]옛사람은 …… 것이니 : 《중용장구》 제 14 장에 군자는 “환난에 처하면 환난 속에서 도를 행한다. 군자는 어디에 들어가도 스스로 뜻을 이룬다.〔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고 하였다.
[주D-003]어찌 …… 있으리오 : 만나러 가기 힘들다는 뜻을 장취(張翠)의 고사를 이용하여 해학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한(韓) 나라 대부(大夫) 장취는 초(楚) 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진(秦) 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러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병을 핑계 대고 날마다 하나의 현(縣)만 행진하였다. 장취가 진 나라에 도착하니, 승상 감무(甘武)는 “한 나라가 급하긴 급하군요. 선생이 병든 몸으로 오시다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戰國策 韓策》
[주D-004]상자평(向子平)처럼 …… 치렀고 : 자평은 한(漢) 나라 때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의 자이다. 상장은 자녀의 혼사를 다 치르고 나자, 다시는 가사(家事)를 묻지 않고 명산을 유람하러 떠나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주D-005]도연명(陶淵明)처럼 …… 있는데 :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정원의 세 갈래 작은 길은 잡초가 우거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그대로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주D-006]매화가 아내처럼 다정스럽게 : 원문은 ‘梅妻卿卿’인데, 매처(梅妻)는 송 나라 은사 임포(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고, 경경(卿卿)은 아내가 남편을 친근하게 부른다는 뜻으로 《세설신어(世說新語)》 중 왕안풍(王安豐)의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부부가 금슬이 좋은 모양을 표현할 때 쓴다.
[주D-007]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 원문은 ‘無表襮邊幅’인데, 옷의 겉이나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듯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주D-008]중산군(中山君)이 …… 것 : 생각을 글로 표현하려고 해도 붓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산(中山)에 나는 토끼의 털로 만든 붓이 가장 좋다고 하여 이를 중산호(中山毫)라 한다.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붓〔毛穎〕은 중산(中山) 사람이며, 그 조상 중에 준(㕙)은 “민첩하여 달리기를 잘한다〔狡而善走〕”고 하였다. 또한 붓은 진 시황 때 중서령(中書令)으로까지 승진하여 황제와 더욱 친근했으므로, 황제가 그를 ‘중서군(中書君)’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순찰사에게 답함
대범 살인 옥사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만, 이 옥사처럼 상리(常理)에 어긋난 것은 없었습니다. 형적이 의심되는 것은 정상으로써 헤아리고, 죄수의 말에 숨김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증인의 말을 참고하는 법이니, 옥사를 신중히 살피는 대체(大體)가 진실로 이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옥사의 경우는, 정상으로 보면 죄수의 공초에 일컬은 바와 같이 친척 관계는 비록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지만 아버지로 부르고 자식으로 기른 처지였고, 형적으로 말하면 검시장(檢屍場)에서 증험된 바와 같이 곧바로 칼로 찔러서 피가 다하자 죽음이 뒤따른 것이었습니다. 죄수의 말은, 몹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로서 진실로 그의 방탕한 마음을 깨우쳐 주자는 데에서 나왔다는 것이고, 증인의 말은, 우물쭈물 횡설수설하는 가운데도 오히려 그자가 칼을 가졌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습니다. 정상과 형적을 참조하여 연구해 보아도 진실로 상리가 아니고, 죄수와 증인의 말을 되풀이해 따져 보아도 더욱 의혹만 생깁니다.
왜냐하면 당초에 판열(判烈)의 아비 조응붕(曺應鵬)이 그 처남 임종덕(林宗德)과 더불어 한 마을에서 수십여 년을 살아 왔는데, 살림이 모두 넉넉하고 서로간에 관계도 아울러 돈독한 처지였습니다. 판열이 어릴 때부터 그 외삼촌에게서 자랐으므로, 종덕은 판열을 자기 자식같이 보아서 그에게 훈계하고 독촉하기를 부지런히 했고, 응붕은 실지로 종덕의 앞에서는 판열이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판열이 장성하여 장가든 뒤로, 몇 년 전부터 주색에 빠져서 남의 꾐에 넘어가 종덕의 집 여종아이에게 현혹되어 정실을 소박놓고 무뢰배와 휩쓸렸습니다. 그 때문에 그 외삼촌만이 깊이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역시 밤낮으로 버릇을 고칠 방도를 생각하였으나, 다만 자식을 사랑하는 정이 지극하여 망나니 자식을 위엄으로 억제하지 못하다 보니 평소에 외삼촌보다 덜 무서워하고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판열을 손수 끌고 종덕에게로 함께 가서 잘못을 자복하도록 강요하면서 정신을 차리라고 맹렬히 꾸짖었던 것이니, 그날 사건의 원인은 이와 같은 데 불과했습니다. 종덕은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한 탓에 일에 임하여 어려워할 줄 모르고, 함부로 가장으로 자처하고 엄준한 역할을 자임하다가, 갑자기 패악한 행동을 저질러 스스로 흉악한 짓을 한 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아, 부자간에 책선(責善)하는 것도 오히려 크게 경계하는 바인데, 하물며 외삼촌과 조카 사이에 은의(恩義)를 상한다는 것은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이가 죄를 지었으면 회초리로 때리면 그만이지 어찌 잔인하게 칼로써 위협하며, 사랑할진댄 살리고 싶은 법인데 어찌하여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 옥사는 죄수와 증인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형적을 가지고서 정상을 따진다면, - 이하 원문 빠짐 -
[주C-001]순찰사에게 답함 : 목록에는 편지의 제목이 ‘함양의 옥사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論咸陽獄書〕’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1792년(정조 16)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부탁을 받아 도내의 의심스러운 옥사를 심리(審理)하면서 경상 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편지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그다음의 ‘순찰사에게 올림’도 마찬가지의 경위로 작성된 편지인 듯하다. 《연암집》 권2에 ‘현풍현 살옥의 진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등 이와 유사한 편지 4통이 수록되어 있다.
[주D-001]부자간에 …… 바인데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부자간에는 책선(責善)하지 아니하나니, 책선하면 사이가 벌어지고, 사이가 벌어지면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없다.”고 하였다.
[주D-002]이하 원문 빠짐 : 원문은 ‘無 缺’인데, ‘無’ 자는 결자(缺字)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지난번 정순기(鄭順己)의 의옥(疑獄) 사건으로써 직접 뵙고 아뢴 바 있었으나, 자세한 곡절은 다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대저 이 옥사는 실로 맹랑한 일에 속합니다. 당초에 재검(再檢)하여 옥사를 마무리할 사건이 아니었는데, 그때 겸관(兼官)이 도임한 지 수일 만에 갑자기 이 옥사를 당하자 겸읍(兼邑)의 하인들이 제멋대로 검시(檢屍)를 행하여, 상처가 어떠한지도 돌아보지 않고 자백과 증언의 유무도 헤아리지 않고서, 대강대강 옥안(獄案)을 갖춘 것이므로 이미 소홀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했습니다. 재검 때에 ‘낙태’라는 한 조목을 특별히 덧붙인 것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전임 순찰사 때에 그 원통한 실상을 살펴서 안 바 없지 않아, 특별히 관문(關文)을 보내 이치를 따져서 여러 추관(推官)들로 하여금 의견을 내어 보고를 올리게 한 것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옥사의 정황을 곰곰이 따져 보니 완성된 옥안과 저절로 어긋나서 역시 앞뒤가 모순되는 혐의가 없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질질 끌어 온 것입니다. 이른바 원범(元犯)이라는 자는 그 생김새를 살펴보니, 평범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지극히 순하고 용렬한 놈입니다. 해가 넘도록 옥에 갇혀 있는데 그동안에 부모는 다 죽고 아내도 또한 다른 데로 시집가 버렸으니, 비단 본 사건이 원통할 뿐만 아니라 인정상으로 또한 몹시 불쌍한데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습니다. 더더구나 지난겨울부터 감옥이 텅 비어 있습니다. 그가 비록 사형수라 할지라도, 텅 빈 감옥에 홀로 둔 채로 돌보고 먹여줄 사람이 없어, 주림과 병이 잇달아 옥중에서 병사하고 말 것이니, 신중히 살필 것을 거듭 당부하는 것 외에는 역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방도가 어찌 있겠습니까. 사실을 낱낱이 들어 보첩(報牒 보고서) 속에 모두 기록하였으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부(附) 보첩의 초본
지금 이 옥사는 군수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에 생긴 것이어서, 검시에 참여하지 못했고 물어볼 만한 관련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초검과 복검의 검안(檢案)을 반복하여 따져 보니, 시친(屍親 피살자의 친척) 김한성(金汗成)은,
“제 처 설운례(雪云禮)가 순기(巡己)와 싸움이 붙어 그자의 뺨을 갈기려 들자, 순기가 두 손으로 꽉 잡고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발길질을 했는데, 3일 동안 앓아누웠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초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저는 출타 중이라서 애당초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라고 공초하였고, 원범 정순기(鄭巡己)의 공초에는
“설운례와 싸움이 붙었을 때 그 여자가 몽둥이를 가지고 달려들기에 두 손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서로 버티고 있을 때 평소에 전혀 모르던 지나가는 사람이 힘껏 당겨서 양편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제 몸을 마구 내던지며 스스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지고 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공초를 보면 모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시친이 비록 ‘목격했다’고 말할지라도 믿을 바가 못 되므로, 관련자들을 잡아다 조사하여 참고가 될 만한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가 이미 애당초 목격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진술했으니, 반드시 전해 들은 긴요한 증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을 한 자는 그의 아들인 일곱 살 난 아이에 지나지 않으며, 한성의 집이 산골짝에 외떨어져 있으니, 싸울 때의 광경과 두들겨 맞을 때의 경중(輕重)은 직접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다른 집의 일곱 살 난 아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이미 차지 못하고 말이 자세하지 못하여 증인이 될 수 없는데, 하물며 딴 사람이 아니고 바로 그의 자식이고 보면 법으로 보아 당연히 물을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감히 증인으로 삼았으니 어찌 사리에 맞겠습니까.
원범에 대하여 논하자면, 둘이 서로 욕을 하다가 차츰 격해져서 몽둥이로 때리려 하였으니, 피해 달아나지 않으면 형세상 맞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장정인 그가 어찌 단지 그 여자의 두 손만 붙잡고 꼿꼿이 멍청하게 서 있었겠습니까. 머리채를 휘어잡고 발길질을 하는 것은 그렇게 아니 할 수 없는 바였습니다. 급기야 흉악한 짓을 한 몸이 되어 죄를 피할 수 없게 되어서는, 극구 발뺌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당초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어찌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손을 붙잡고 때리지 못하도록 막을 때에 만류하여 떼 놓은 사람은 과연 누구였겠습니까? 전혀 모르던 지나가는 사람을 얼렁뚱땅 증인으로 삼았으니, 극히 교묘하고 악독한 일입니다. 이것이 자백과 증언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정상과 형적이 더욱 알 수 없게 된 까닭입니다.
비록 두 검안의 실인(實因 사망 원인)을 들어 논한다 해도, 뜬구름을 잡는 것을 면치 못하여 억지로 상처를 찾아낸 것입니다.
“하나는 불두덩〔陰岸〕에 피멍이 번진 것이고 하나는 아랫배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이니, 마치 외부로부터 입은 상처인 듯하지만, 이미 정수리에 혈흔이 없으니 상처가 그다지 중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했는데, 상처가 과연 중하지 않다면 어찌 목숨을 잃게 되었단 말입니까. ‘마치 …… 듯하다〔宛是〕’란 것은 긴가민가하는 말이요, ‘이미 …… 없다〔旣無〕’라는 것은 분명히 그렇다고 단정하는 말입니다. 아랫배나 불두덩은 모두 급소에 속하는데 또한 어찌 3일 동안이나 연명했으며, ‘마치 …… 듯한’ 상처와 ‘이미 …… 없다’는 증험으로써 어찌 옥안을 충분히 갖출 수 있겠습니까. 요안(腰眼) 위쪽과 등뼈 아래쪽 사이에 찰과상이 이와 같이 확실하다면, 발에 차인 곳은 앞에 있어야지 뒤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스스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졌다’는 순기의 말은 이렇게 해서 발뺌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처가 불분명한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인을 하나는 내상(內傷)이라 하고 하나는 태상(胎傷)이라 한 것은, 결국 억지로 찾아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외상(外傷)이 드러나지 않으면 대개는 내상으로 돌리고, 내상을 알기 어려우면 태상으로 단정하지만, 그와 같이 단정한 것은 더욱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릇 죽은 사람은 대맥(大脈)이 이미 풀어지면 평소에 쌓였던 어혈(瘀血)이 저절로 덩어리져 흘러내리는 수가 있습니다. 출산을 많이 한 부녀자의 경우에는 핏덩이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닌데, 이것으로써 억지로 태상이라고 실인을 정한다면 옳겠습니까? 더구나 그 여자는 출산한 뒤 겨우 열 달이 되었으니, 일 년에 두 번 임신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더구나 제 남편도 모르고 있는데, 볼록 튀어나온 것이 살짝 보인다고 해서 어찌 낙태했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 한성이 3일 뒤에야 억지로 고발한 문서를 보면, 이미 그가 고주(苦主)가 아닙니다. 전임 순찰사가 특별히 공문을 보내어 의문점을 낱낱이 거론하고서, ‘반복하여 자세히 조사해서 의견을 내어 보고함으로써 무고히 재앙을 당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했는데, 그때 갑자기 영문(營門 순찰사)이 교체되는 때를 만나 미처 보고를 올리지 못하였고, 그 뒤에 한성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조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가 넘도록 질질 끌어 온 것이니, 실로 옥체(獄體)를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저 이 옥사는 현저한 상흔이 없고 또 직접 목격한 긴요한 증언이 없으니, 낙태 여부는 끝내 알 수가 없습니다. 원범에 대한 추궁을 중지한 지도 이미 오래이고 시친의 종적도 영원히 끊어져서 다시 힐문할 곳이 없으니, 또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운운(云云).
[주D-001]겸관(兼官) : 이웃 고을의 수령 자리가 비었을 때 임시로 그 고을의 사무를 겸임하는 수령을 말한다. 또한 이웃 고을의 수령이 겸관으로서 다스리는 고을을 겸읍(兼邑)이라 한다. 함양군과 안의현은 본래 겸관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겸관은 연암 자신을 가리키고, 겸읍은 함양군을 가리킨다. 《연암집》 권2 ‘함양 군수 윤광석에게 보냄〔與尹咸陽光碩書〕’ 참조.
[주D-002]추관(推官) : 사죄(死罪)를 저지른 경우 수령들이 회동하여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동추(同推)라고 하는데 그때의 동추관(同推官)을 말한다.
[주D-003]군수 :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을 가리킨다.
[주D-004]싸움이 붙어 : 원문은 ‘爭鬪’인데, ‘爭鬨’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주D-005]정순기(鄭巡己)의 공초에는 : 원문은 ‘鄭巡己之招則’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則’ 자가 ‘內’ 자로 되어 있다.
[주D-006]서로 …… 때 : 원문은 ‘相撑拒之際’인데, ‘互相撑拒之際’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주D-007]잡아다 조사하여 : 원문은 ‘拘覈’인데, ‘鉤覈’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주D-008]지나가는 사람 : 원문은 ‘過去人’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過去之人’으로 되어 있다.
[주D-009]요안(腰眼) : 허리의 뒤쪽 허리등뼈의 좌우 부위를 가리킨다. 급소에 속한다.
[주D-010]태상(胎傷) : 태중(胎中)의 태아(胎兒)가 입은 상처를 말한다.
[주D-011]대맥(大脈) : 한의학에서는 인체의 기가 운행하는 통로로 각 장부(臟部)에 속하는 12정맥(正脈)과 그렇지 않은 8개의 기경맥(奇經脈)이 있다고 보는데 대맥은 기경맥 중 허리를 한 바퀴 도는 경맥을 말한다. 경맥 내부에 정상적인 생리 기능을 상실한 혈액이 풀어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어혈(瘀血)이다.
[주D-012]고주(苦主) : 시친(屍親)으로서 고발하는 사람, 즉 살인사건의 원고(原告)를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순찰사에게 답함
18일의 식희(飾喜)는 온 나라가 다 같이 기뻐하는 일이니, 비록 성대하게 초청하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마땅히 공북루(拱北樓)와 쌍수정(雙樹亭)의 사이로 나는 듯이 달려가서 이 태평만세의 즐거움을 함께 기뻐해야 할 터인데, 저는 지금 더위를 먹어 설사가 나서 음식을 전폐한 채 여러 날 지쳐서,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니 유감되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군(郡) 성곽의 동쪽, 향교의 앞에 둘레가 1056척(尺) 되는 버려진 방죽이 있는데, 둑 아래에 물을 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스무 섬지기 남짓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어 메워져 버려, 둑 안에는 말무덤〔馬塚〕이 옹기종기한 데다가 가시덩굴이 무성하고 뱀과 벌레 따위가 득실대었습니다. 봄에 시원스레 파내고 말무덤을 다 제거하고, 가운데에 조그마한 대(臺)를 쌓고 대 위에다 초가지붕을 씌운 육면(六面)의 정자를 세우고, 세 개의 수문(水門)이 난 긴 다리를 만들어 북쪽 둑에 연결시켰습니다. 구름과 물은 아득한데 줄지은 봉우리들은 멀리 잠겨 있고 질펀한 들은 아스라히 넓으니, 혹은 달빛 아래 배를 띄우며 혹은 난간에 기대어 낚시도 드리우곤 합니다. 그 구조와 배치는 빈약하고 검소함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경물(景物)과 풍치에 있어서는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만합니다.
옛날에 정자 이름을 지은 사람은 늙어 창백한 얼굴에 흰머리를 하고 조금만 마셔도 문득 취한다 하여 ‘취옹정(醉翁亭)’이라 하였으며, 한바탕의 큰비가 사흘을 내리고 그쳤는데 이때 나의 정자가 마침 이루어졌다 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건물로 말하면 실로 두 가지 일을 겸했으므로, 드디어 감히 이름을 짓기를 ‘취옹희우우사정(醉翁喜雨又斯亭)’이라 하였습니다. 이 일곱 자를 새겨서 걸어놓고 싶은데, 비단 저의 필의(筆意 운필의 멋)가 본시 졸렬할 뿐 아니라 여러 해 전부터 오래도록 풍비(風痺 중풍으로 인한 마비 증세)를 앓아서 붓과 벼루를 가까이하지 않은 지 오래였습니다. 저번에 붓을 들어 시험해 보니 먹이 많이 묻은 곳은 묵저(墨猪)가 되고 그렇지 않은 곳은 메마른 등나무 덩굴처럼 되어 종이 수십 장을 바꿔도 끝내 글자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분수에 넘치는 망녕된 짓임을 잊고서 이 일곱 글자를 손바닥만 한 크기로 써 주시기를 청하는 바이니, 혹시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호서(湖西)의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을 터입니다. 다만 하읍(下邑 면천군을 가리킴)에는 각수(刻手)가 없을 뿐 아니라 화공(畫工)도 얻기 어렵사온즉, 빨리 각수에게 맡겨 주시고 화공을 시켜 대충 단청을 하게 하여 이 정자를 완성할 수 있게 하여 주신다면, 이보다 다행이 없겠습니다. 둑을 빙 둘러 버들을 심고 또 살구씨와 오얏씨 대여섯 말을 뿌려 놓았으며, 또 관노비를 시켜 지난가을에 먹고 버린 복숭아 씨를 주워 오게 하여 줄지어 심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물정에 어두운 제 자신을 스스로 비웃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만,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주C-001]순찰사에게 답함 : 연암은 1797년 충청도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부임한 이후 성 동쪽 향교 앞의 버려진 연못을 준설하고 둑을 쌓아 저수지로 만들었으며, 그 연못 중앙에 작은 섬을 만들어 육각(六角) 초가 정자를 세우고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이라 이름 지었으며 부교(浮橋)를 놓았다고 한다. 《過庭錄 卷3》 이 편지는 그 일과 관련하여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보낸 편지로 짐작된다. 이태영은 연암과 한동네 살았던 친구 사이로,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임할 때에도 경상 감사로서 재임한 적이 있는데, 또한 연암이 면천 군수로 재임하던 중인 1798년 음력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충청 감사로 재임하였다.
[주D-001]18일의 식희(飾喜) : 식희는 부모의 경사에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하는데, 6월 18일은 정조(正祖)의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탄신일이었다.
[주D-002]공북루(拱北樓)와 쌍수정(雙樹亭) : 공북루는 충청도 공주(公州)에 있는 공산성(公山城)의 북문이고, 쌍수정은 공산성 내에 있는 정자이다.
[주D-003]늙어 …… 하였으며 :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翠亭記)를 가리킨다.
[주D-004]한바탕의 …… 하였습니다 : 소식(蘇軾)의 희우정기(喜雨亭記)를 가리킨다.
[주D-005]지금 …… 말하면 : 원문은 ‘今此所搆’인데, ‘所’ 자가 ‘小’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주D-006]묵저(墨猪) : 획이 굵기만 하고 힘찬 기운이 부족한 서투른 글씨를 말한다.
[주D-007]이 …… 바이니 : 원문은 ‘仰丐此掌大七字’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仰’ 자 다음에 ‘面’ 자가 추가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인산(因山)이 문득 지나서 왕께서 영원히 떠나셨으니, 하늘을 바라보며 길이 부르짖은들 어느 곳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섣달 추위에 순사또께서는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노병이 날로 깊어가는데도 오히려 다시 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기꺼이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무슨 심보입니까.
지난번 대질 심문할 때에 마침 첫 추위를 만나서 5일 동안 찬 데서 거처한 탓에 다리 부분이 마비된 데다 다시 험하고 먼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오다 보니 마침내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으니, 스스로 가련해한들 어찌하겠습니까.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들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두어 달 지내는 동안에 비로소 바람마저 매우 다른 것을 깨달았습니다.
몰아치는 폭풍과 비릿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하면 곧 기왓장을 날리고, 고래나 악어의 울음 같은 거센 파도소리가 베갯머리에서 들리는 듯하니,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대저 이곳은 한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됩니다.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롭게 살고 있는 신세이리요!
도임한 지 9일 만에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금방 취리(就理)하는 일로 길을 떠났다가 10월 보름 뒤에 병을 안고 다시 왔는데, 갑자기 황장(黃腸)의 역사(役事)를 당하여 차관(差官)을 겨우 보내고 나니 세금 거두는 일이 시급했고, 환곡 받아들이는 일이 겨우 끝나자 또다시 진영(鎭營)에 죄를 지어 날마다 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관(官)에 있은 지 50일이 채 못 되는데, 온갖 사무가 바빠서 두서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며, 진영 장교의 목근적간(木根摘奸)은 간교하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어, 촌민들이 겁을 먹고 올린 소장(訴狀)이 날마다 다시 관청의 뜰에 가득합니다. 진영에서는 아무렇게나 쓴 힐책하는 관문(關文)을 보내 단속을 너무 준엄하게 합니다. 어부 한 사람이 배를 고친 일로 인해 좋지 못한 말이 전관(前官)에게까지 파급되도록 하였으니, 제 마음에 미안함이 응당 또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당초에 진영 장교들이 지나는 길에 함부로 침탈한 것으로서 바로 그들의 수법인데, 뇌물을 토색질한 흔적을 은폐하고자 하여 사감(私憾)을 품고서 고자질한 것인즉, 교졸(校卒)들의 말만을 들어 부당하게 처리한 형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 곧장 먼저 감영에 보고한 것을 노여워해서, 반드시 한쪽 편을 들면서 자기 주장만 우기고자 하여 이렇게까지 일이 확대되어 버린 것입니다. 비단 저의 곤경이 비할 바 없을 뿐 아니라, 이 일이 전임 수령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조사를 행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새로 온 수령이 너무도 어리석어서 사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홀히 다루었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한스러운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앞서 순영(巡營)에서 간사한 상인들이 모여드는 폐단을 염려하여 각 고을에 특별히 관문을 보내어 엄하게 경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찌 유독 양양(襄陽) 일대에만 특별히 진영으로 하여금 따로 목근적간을 하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진영의 장교들이 재삼 와서는, 봉산(封山)의 금표(禁標)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나무 뿌리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많이만 적발하기 위하여 보이는 족족 기록하기 때문에, 산 아래 사는 백성과 다 쓰러져가는 절의 중들이 모두 놀라 도망할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측근의 비장(裨將)을 보내시어 - 이하 원문 빠짐 -
[주C-001]순찰사에게 올림 : 연암은 순조(純祖) 즉위년(1800) 9월에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였다. 이 편지는 그해 연말에 강원 감사 이노춘(李魯春)에게 보낸 것이다. 같은 시기에 족제(族弟) 박준원(朴準源)에게 보낸 편지가 《연암집》 권10에 수록되어 있다.
[주D-001]인산(因山)이 …… 떠나셨으니 : 순조 즉위년 11월에 정조(正祖)의 장례가 거행된 사실을 가리킨다. 원문은 ‘因山奄過 弓劍永閟’인데, ‘궁검영비(弓劍永閟)’는 활과 칼이 영영 감춰지고 말았다는 뜻으로,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승천할 적에 활을 지상에 떨어뜨렸으며 그의 관에는 칼만 남아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주D-002]곱사등이 : 원문은 ‘癃痤’인데 ‘癃疾’의 오류인 듯하다. 융질(癃疾)은 늙고 병약하여 허리가 굽는 병을 말한다.
[주D-003]취리(就理) : 죄를 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문을 받는 일을 말한다.
[주D-004]황장(黃腸)의 역사(役事) : 황장은 왕실에서 관을 만드는 데 쓰는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을 말하는데, 양양에는 황장목 숲이 많았다. 정조가 승하한 뒤 양양에 황장목을 벌채하라는 부역이 내렸으며, 임시로 파견된 차관(差官)이 그 일을 감독하였다. 《過庭錄 卷3》
[주D-005]목근적간(木根摘奸) : 산림의 도벌(盜伐) 여부를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주D-006]봉산(封山)의 금표(禁標) : 봉산은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산이고, 금표는 봉산의 출입 금지를 알리는 푯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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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사에게 올림
새해를 맞이하여 순사또의 건강이 신령의 가호로 만강하시며, 부모님께서도 한결같이 강녕하시리라 믿으며, 위로와 축하를 아울러 올리는 정성을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지난 겨울에 독감을 거듭 앓고부터 두 다리에 힘이 없어지더니, 그대로 무릎이 오그라붙어 펼 수 없게 되어 버려, 안방에서 움직이는 데도 반드시 부축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해가 바뀐 뒤 이처럼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아직도 나아가 새해 인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어찌 그지 있겠습니까.
지금 예조의 관문(關文)에 “신흥사(神興寺)의 잡역을 경감한 뒤로 종이에 먹도 마르기도 전에 불법 징수가 전보다 10배나 더하다.”고 하고, 심지어 ‘수향리(首鄕吏)를 상사(上使)하여 엄형으로 다스리라’는 조처까지 있으니, 그 땅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는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몸 둘 바가 없습니다. 지난해 여름에 잡역 경감에 대한 절목(節目)을 영문(營門) 감영으로부터 반첩(反貼)받아 책자로 만들어서, 하나는 영문에 비치하고 하나는 본부(本府 양양부)에 비치하고 하나는 그 절에 보내어 증빙할 자료로 삼았으니, 설사 탐관오리가 있다 한들 어찌 구구하게 몇 권(卷)의 종이를 절목 이외에 더 징수하려 하겠습니까.
또 관속(官屬)들이 시방 그 절로부터 협박받는 처지가 되어, 조심조심 날을 보내며 오히려 털끝만큼이라도 탈이 잡힐까 두려워하는 판국인데, 또한 어찌 감히 멋대로 10배의 불법 징수를 자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利害)를 놓고 헤아려 보면 절대로 이럴 리는 없습니다. 진실로 관문의 내용과 같다면, 아무 것도 꺼릴 바가 없는 듯이 구는 절의 중들이 어찌 절목을 하나하나 들어 본관(本官 양양 부사)에게 따져 바로잡지도 않고, 또한 어찌 의송(議送)을 순사또에게 올리지도 않고서, 감히 감영과 고을을 무시한 채 단계를 건너뛰어 경사(京司 중앙 관청)에 호소하여 무난히 사실을 날조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하관이 재임한 지 지난해 시월 보름부터 이달 그믐까지 겨우 100일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고을 일에 대해서는 아직 두서를 자세히 알지 못하니, 시행해야 할 모든 일은 단지 문서화된 규정을 살펴 행할 뿐입니다. 이른바 삭납지지(朔納紙地)는 두어 권에 불과한 데다, 비록 명색은 관납(官納)이나 본래부터 넉넉한 값으로 사서 썼으며, 지금은 또 값을 더 쳐주고 있습니다. 그 밖에 감영에서 소용되는 지석(紙席 두꺼운 종이로 만든 자리)과 상사(上司 직속 상급 관청)에 전례에 따라 납부하는 것도 모두 본전(本錢)으로 직접 샀으며 조목에 따라 값이 매겨져 있으니, 한 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세세한 일이라 많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저 본부(本府)에 신흥사(神興寺)가 있는 것은 바로 한 고을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으며, 그 절에 창오(昌悟)와 거관(巨寬)이라는 승려가 있는 것 역시 그 절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놈들이 하찮은 중으로서 여러 해 동안 서울 근교의 산들에 머무르면서, 중들을 꾀고 협박하여 절 재산을 탕진했는데, 말과 외모가 간사스럽고 종적이 수상합니다. 무뢰배와 결탁하고 외람되이 막중(莫重)한 곳을 빙자해서, 오로지 수령을 모함하고 관속들에게 위엄을 세우는 것만을 일삼는 것이 제놈의 수법인즉, 관리가 관리 노릇 못 한 지가 오래입니다. 토호들이 시골 구석에서 무단(武斷)하고 관부(官府)를 쥐고 흔드는 일이 옛날부터 간혹 있었지만, 중들이 이같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지금 처음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번에 내수사(內需司)의 관문 내용을 고쳐 바꾸고 용동궁(龍洞宮)의 수본(手本 손수 작성한 서류)을 첨부하였는데, 제일 먼저 강원도 양양에 있는 신흥사는 바로 열성조(列聖朝)의 구적(舊蹟)이 봉안된 곳이라는 점을 들고 수령이 삼가 받들어 행하지 않은 죄를 나열해 놓았으니, 이는 모두 창오와 거관에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면, 제 한 몸에 갑자기 닥친 재난은 본시 걱정할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고을의 폐해는 어찌하며 나라의 기강은 어찌하겠습니까?
‘열성조의 구적’이라고 한 것은 본부에 있는 낙산사(洛山寺)와 같은 곳을 이름이요, 신흥사가 아닙니다. 세조 병술년(1466)에 낙산사를 임시 숙소로 삼으신 일이 있는 데다, 성종의 친필이 열 겹이나 싸여 보물로 간직되어 있고, 숙종의 어제(御製) 현판은 사롱(紗籠)에 싸인 채 걸려 있어 지금까지도 보배로운 글씨가 하늘을 돌며 빛을 발하는 은하수처럼 휘황찬란하며, 명 나라 성화(成化) 5년(1469)에 주조한 큰 종에는 당시의 명신(名臣)들이 왕명을 받들어 기록한 글이 있어 한 절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으니, 이것들은 모두 낙산사의 오래된 보배인 것입니다. 신흥사의 경우는 명 나라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 새로 창건하여 내력이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역대 임금들이 남긴 글들이 본래 있지 않은데도, 감히 모호하게 막중한 곳을 끌어다가 궁속(宮屬)들을 속여서 부탁하여 수본을 발급받기를 도모하기를 이처럼 쉽게 하였으니, 다른 것은 오히려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감영과 본 고을에서는 비록 실상이 이와 같은 것을 알았지만, 다만 말이 막중한 곳과 관계되고 일이 내수사에 관련되는 까닭에, 감히 드러내놓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서 미봉하여 넘겼으니, 중들이 더욱 패악을 부리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그 절이 본시 전답의 소출이 많아서 부자 절이라 일컬어지는데도,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정초에는 취한 김에 아료를 부려, 떠돌이 걸인들을 묶은 채로 구타하여 거의 살옥(殺獄)을 이룰 뻔한 것이 6명이나 되었습니다. 고한(辜限)이 이미 지났는데, 5명은 겨우 목숨을 건져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게 되었으니 거의 걱정이 없겠으나, 그중 1명은 상기도 위태로운 지경이니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중들의 버릇이 세력을 믿고 완강하고 막돼먹어 못할 짓이 없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원당(願堂)을 다시 설립하는 일은 책임진 곳이 따로 있으며 한낱 중들과 관련된 바가 아니니, 사리(事理)로써 헤아려 보면 실로 ‘쥐 잡다 그릇 깰’ 우려는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러한 사정을 비변사에 보고하거나 장계(狀啓)를 올려 조사해 주도록 청함으로써, 요망한 중놈들이 막중한 곳을 빙자하여 속임수를 일삼는 죄를 속히 시정하게 해 주심이 어떻겠는지요?
현재 병세를 돌아보건대 감기까지 더치는 바람에 묵은 증세가 한꺼번에 발작하여 실로 무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나, 바야흐로 군사훈련에 달려가야 할 때를 당하여 기일이 몹시 촉박할 뿐더러 여러 해 동안 누적된 속오군(束伍軍)의 궐액(闕額 부족한 수효)을 보충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병을 말하고 사무를 폐할 시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 답답한 개인적인 사정을 어찌 이루 다 아뢰겠습니까. 군사훈련이 지난 뒤에는 사면(辞免)을 거듭 간청해야 될 형편이니 하량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주C-001]순찰사에게 올림 : 1801년 음력 1월 강원 감사에게 양양 신흥사(神興寺) 중들의 행패를 바로잡아 줄 것을 청원한 편지이다. 그러나 강원 감사가 미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해 봄에 연암은 병을 핑계 대고 양양 부사직을 사임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3》
[주D-001]상사(上使)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명하여 죄인을 잡아 오게 하는 일을 말한다.
[주D-002]반첩(反貼) : 보내온 공문서에 의견을 첨부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주D-003]권(卷) : 한지를 세는 단위로, 스무 장으로 된 한 묶음을 말한다.
[주D-004]의송(議送) : 백성이 고을 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관찰사에게 올리는 항소장(抗訴狀)을 말한다.
[주D-005]삭납지지(朔納紙地) : 매월 초하루마다 바치는 지물(紙物)을 말한다.
[주D-006]창오(昌悟) : ‘창오(暢悟)’의 오기인 듯하다. 창오(暢悟)는 1797년(정조 21) 거관(巨寬)과 함께 신흥사의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했으며, 1801년(순조 1) 역시 거관 등과 함께 용선전(龍船殿)을 창건하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도 그는 1813년(순조 13) 거관 등과 함께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고, 1821년(순조 21) 거관 등과 함께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하였다.
[주D-007]거관(巨寬) : 1762~1827. 호를 벽파(碧波)라고 하며, 율승(律僧)으로서 많은 제자를 두었다. 창오(暢悟)와 함께 신흥사 내의 건물들을 힘써 중수하였다. 신흥사에 있는 그의 부도(浮屠)에는 강원 감사 정원용(鄭元容)이 찬한 비가 있다.
[주D-008]막중(莫重)한 곳 : 왕실을 가리킨다.
[주D-009]용동궁(龍洞宮) : 명종(明宗) 때 세자궁(世子宮)으로 설치한 궁인데, 한양의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있었다. 명례궁(明禮宮 : 덕수궁〈德壽宮〉) · 어의궁(於義宮) · 수진궁(壽進宮)과 함께 4궁이라 불렸다. 이러한 궁들은 토지를 약탈 · 매입하거나 면세 특권을 이용하여 수세지(收稅地)를 확대하는 등으로 재산 늘리기에 힘써 폐단이 많았다.
[주D-010]사롱(紗籠) : 현판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씌운 천을 말한다.
[주D-011]하늘을 …… 은하수 : 원문은 ‘雲漢昭回’인데,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저 밝고 큰 은하수는 하늘을 따라 그 빛이 도네.〔倬彼雲漢 昭回于天〕”라고 하였다.
[주D-012]고한(辜限) : 보고기한(保辜期限)의 준말이다. 남을 상해한 사람에 대하여 피해자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처벌을 보류하는 기간으로, 이 기간 안에 피해자가 사망하면 살인죄가 성립되었다.
[주D-013]원당(願堂) : 역대 임금들의 명복을 비는 법당(法堂)인데, 궁중에 있는 것은 내원당(內願堂)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창오와 거관 등이 설립을 추진한 신흥사의 용선전(龍船殿)을 가리킨다.
[주D-014]속오군(束伍軍) : 선조(宣祖) 이후 향촌을 지키기 위해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을 혼합하여 편성한 지방군(地方軍)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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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유세차(維歲次) 을해(1755) 11월 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에 반남(潘南) 박지원은 삼가 술과 과일로 제물을 갖추어, 홍문관 교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내 나이 열여섯에 / 余年二八
덕망 높은 집안에 장가드니 / 入贅賢門
형제분이 우애로워 / 弟兄湛樂
화기가 애애했네 / 和氣氤氳
장인께서 이르시되 / 外舅謂我
내 아우 글 좋아하여 / 余季好文
벼슬에는 비록 소홀해도 / 仕宦雖疎
문학에는 몹시 부지런하니 / 文學甚勤
생관에 와 머물거라 / 來舍甥館
내 아우가 너의 스승이니라 / 余季汝師
나에 대한 공의 사랑 / 公之愛我
장인보다 더 깊어서 / 視舅亦深
내게 경서(經書) 가르칠 제 / 授我詩書
엄한 일과 사정없었네 / 嚴課無私
공 모시고 따라다닌 지 / 陪公周旋
이제 어언 사 년일세 / 四年于玆
세상 따라 문학도 쇠퇴해지매 / 文與世降
공이 다시 일으켜 세웠나니 / 公起其衰
산문은 한유의 골수를 취했고 / 文劈韓骨
시는 두보의 속살을 얻었네 / 詩斲杜肌
재주 없는 이 소자는 / 小子不佞
어리석고 노둔한데 / 才魯性癡
공의 유도에 힘입어서 / 荷公誘掖
우공이산(愚公移山) 바랐더니 / 庶幾愚移
내 한창 진취하려는데 / 余方有進
공이 갑자기 별세하시니 / 公奄棄世
갈림길 하많은데 / 茫茫岐路
어느 분을 찾아가야 하리 / 我尙疇詣
옛 전(傳) 한 편 읽자 해도 / 讀古一傳
막히는 곳 너무 많아 / 已多觝滯
두어 줄만 읽어 내려가면 / 數行才下
뭇 의심이 앞을 가려 / 群疑交蔽
책을 덮고 장탄식 / 廢書太息
슬픈 눈물 뒤따르네 / 繼以悲涕
의심나면 뉘게 묻고 / 我疑何質
게으르면 뉘 잡아주리 / 我惰孰勵
생각할수록 슬픈 것은 / 念玆益悲
실은 제 처지가 슬퍼서네 / 實爲我地
지난 여름 장마와 무더위에 / 去夏潦暑
공의 병이 처음 생겼네 / 公疾始祟
아름다운 암벽 맑은 샘에서 / 玉巖淸泉
공은 갓끈을 씻고 / 公于濯纓
기수(沂水)에서 목욕할 제 입을 새옷 / 浴沂新服
그날에 다 지어졌는데 / 此日旣成
이 소자 돌아보며 이르시길 / 顧謂小子
어찌 물에서 보지 않느냐 / 盍觀於水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니 / 盈科而進
뜻 이루는 것도 이 같은 법 / 有爲若是
흘러가는 냇물처럼 바빠야 한다 / 逝水其忙
그 말씀 아직도 귀에 쟁쟁 / 言猶在耳
이제 와서 생각하니 / 而今思之
공의 마지막 가르침이셨네 / 警誨止此
하늘이 우리 공을 낳으시고 / 天生我公
어찌 수명은 짧게 주셨는고 / 年命何屯
거적 자리엔 상주(喪主) 없고 / 苫席無孤
북당(北堂)에는 모친 계시네 / 萱堂有親
모를 것이 이치라서 / 昧昧者理
신에게도 묻지 못해 / 難質鬼神
후사 없고 단명한 건 / 無年無嗣
옛사람도 슬퍼한 일 / 昔人所愍
누가 이를 주장했나 / 孰主張是
그도 또한 잔인하이 / 其亦不仁
장원 급제 일렀으나 / 早擢魁科
집은 몹시 청빈했고 / 家甚淸貧
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歷敭華要
고을 수령되어 부모 봉양 못 했네 / 養未專城
금마옥당도 / 金馬玉堂
공에겐 영화가 아니었어라 / 於公非榮
전에 상소 한번 올렸다가 / 曩進一疏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가고 마셨지 / 遂竄南荒
나는 병으로 송별을 못 해 / 余病未別
고당에 와 절 드리니 / 來拜高堂
벽에 지도 걸어놓고 / 壁掛輿圖
가리키며 눈물지으셨네 / 指示泫然
아스랗다 귀양 가시는 분 / 逖矣遷人
산과 물이 얼기설기 / 鬱繆山川
아무 물 아무 산을 / 某水某山
어느 제 다 거칠꼬 / 何時度越
생이별도 못 참거든 / 不忍生離
사별이야 오죽하리 / 況此死別
전에 공이 귀양 가실 젠 / 昔公謫去
위로드릴 말이라도 있었지만 / 奉慰有說
지금 공이 이렇게 가실 제는 / 今公此行
차마 무슨 말을 하오리 / 忍作何言
이내 가슴 답답하여 / 余懷抑塞
저도 몰래 울음 삼키네 / 不覺聲呑
광주(廣州)라 그 남쪽이 / 維廣之陽
바로 공의 안식처일레 / 卽公眞宅
밤 지나면 계빈이라 / 啓殯隔宵
슬픈 영결 고하오니 / 含哀告訣
문장 비록 졸렬해도 / 文辭雖拙
가슴속에서 우러나왔고 / 腑肺攸出
제물 비록 박하지만 / 奠物雖薄
정례로써 올린 거니 / 情禮所設
밝으신 영령이시여 / 尊靈不昧
이 술 한 잔 받으소서 / 庶歆玆酌
상향 / 尙饗
[주C-001]영목당(榮木堂) : 연암의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의 호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권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주D-001]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 : 고대에는 날짜를 적을 적에 ‘元嘉三年三月丙子朔二十七日壬寅’이라는 식으로 연월(年月) 다음에 반드시 초하루를 뜻하는 삭(朔) 자를 붙여서 삭(朔) 제(第) 몇 일(日)이라 쓰고 또 간지(干支)를 붙였다. 따라서 초하루를 적을 때에도 이 제문처럼 ‘乙亥十一月庚午朔一日庚午’라 하여, 번거롭지만 날짜를 중복해서 적었다. 《日知錄 卷20 年月朔日子》
[주D-002]생관(甥館) : 사위가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주D-003]우공이산(愚公移山) : 우공(愚公)이란 노인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들을 깎아 없애버리고자 결심하고 쉬지 않고 노력했더니 상제(上帝)가 감동하여 그 산들을 딴 곳으로 옮겨주었다고 하는 《열자(列子)》 탕문(湯問) 중의 우화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큰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주D-004]옛 …… 해도 : ‘옛 전(傳)’은 《사기》나 《한서》에 실린 전(傳)들을 가리킨다. 연암은 이양천으로부터 사기를 배웠는데 항우본기(項羽本紀)를 본떠 이충무전(李忠武傳)을 지었더니, 이양천은 사마천(司馬遷)이나 반고(班固)와 같은 경지를 얻었다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1》
[주D-005]기수(沂水)에서 …… 지어졌는데 :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포부를 물었을 때 증점(曾點)은 “늦은 봄이 되어 봄옷이 다 지어지면, 관(冠) 쓴 어른 5, 6명, 동자 6, 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論語 先進》 여기서는 이양천이 연암을 데리고 물가로 놀러 나갔던 일을 가리킨다.
[주D-006]어찌 …… 나아가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물을 보는 데에 방법이 있다. …… 흐르는 물이란 것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觀水有術 …… 流水之爲物也 不盈科 不行〕”고 하였고, 이루 하(離婁下)에 “근원이 있는 물은 용솟음치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 사해로 쏟아진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고 하였다. 쉬지 않고 실천함으로써 차근차근 학업을 성취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주D-007]흘러가는 …… 한다 :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께서 냇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아가는 것은 이 냇물과 같도다.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고 하였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따르면, 이 구절은 쉬지 말고 면학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주D-008]장원 급제 일렀으나 : 이양천은 1749년(영조 25) 춘당시(春塘試)에 문과 급제하였다.
[주D-009]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이양천은 1749년 이후 1755년 작고할 때까지 사간원 정언 · 헌납, 홍문관 부수찬 · 부교리 · 교리, 세자시강원 사서 · 필선 등을 지냈다.
[주D-010]금마옥당(金馬玉堂) : 원래 한(漢) 나라 때 글 잘짓는 신하들이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던 궁중의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키는데, 후대에는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양천이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한림원의 학사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주D-011]전에 …… 마셨지 : 이양천은 홍문관 교리로서 영조 28년(1752) 10월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연암집》 권3 불이당기(不移堂記) 참조.
[주D-012]광주(廣州)라 …… 안식처일레 : 이양천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 돌마면(突馬面) 율촌(栗村)에 있었다.
[주D-013]계빈(啓殯) : 발인을 할 때에 관을 내오기 위하여 빈소(殯所)를 여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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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정유년(1777) 6월 23일 정사(丁巳)일에 사위 반남 박지원은 삼가 술을 올려 장인 유안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아아, 이 소자 나이 열여섯에 선생의 가문에 사위로 들어와서 지금 26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우매하여 선생의 도를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선생을 부끄럽게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제 선생이 멀리 떠나시는 날에 한마디 말로써 무궁한 슬픔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 嗚呼
선비로서 일생 마치는 걸 / 以士沒身
세상 사람들은 수치로 알지만 / 世俗所恥
이를 비천하다 여기는 저들이 / 彼以卑賤
어찌 선비를 알 수 있으랴 / 惡能識士
이른바 선비란 건 / 所謂士者
상지하고 득기하나니 / 尙志得己
유하(柳下)의 절개와 유신(有莘)의 자득(自得)도 / 柳介莘囂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 / 不過如是
이로써 보자하면 / 由是觀之
선비로 일생 마치기도 / 沒身以士
역시 어렵다 하리 / 亦云難矣
아아 / 嗚呼
선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 先生存沒
선비 본분 안 어겼네 / 不違士也
예순이라 네 해 동안 / 六十四年
글을 진정 잘 읽으시어 / 善讀書者
오랫동안 쌓인 빛이 / 積久光輝
온아(溫雅)하게 드러났지 / 溫乎發雅
배부른 듯이 굶주림을 즐기셨고 / 樂飢若飽
과부처럼 절개 지키셨네 / 守節如寡
고고해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 孤不離群
꼿꼿해도 남을 책하지 않으셨네 / 貞不詭物
발언은 정곡을 찌르고 / 發言破鵠
일 처리는 똑부러지게 하셨지 / 制事截鐵
빙호추월처럼 / 氷壺秋月
안팎 모두 툭 틔었지 / 外內洞澈
천박한 세상의 썩은 유자(儒者)들은 / 陋世酸儒
변함없는 선비 절개 부끄러워하는데 / 恥士一節
객기는 진작 다 없애셨고 / 夙刊客浮
만년에는 호걸 기상 감추셨네 / 晩韜英豪
진실만을 바라보고 탄탄대로 걸으시어 / 視眞履坦
심기가 차분히 가라앉으셨지 / 心降氣調
타고난 천성 외엔 / 所性之外
털끝 하나 아니 붙여 / 不著一毫
먹 묻으면 씻어 버리고 / 墨則斯浣
논의 잡초 어찌 아니 뽑으리 / 稂豈不薅
팔을 베고 물 마시건 / 曲肱飮水
좋은 말 사천 필을 매어 놓건 / 繫馬千駟
덜고 보탬 있지 않네 / 旣無加損
사(士)라는 한 글자엔 / 士之一字
운명이란 정해진 것 / 命有所定
때도 만나야 하는 법 / 時有所値
이를 분별할 줄 아는 이만 / 能辨此者
공의 뜻을 알게 되리 / 始識公志
아아 / 嗚呼
대들보 부러진 슬픔에다 / 梁木之哀
강한 같은 그리움으로 / 江漢之思
잔을 올리며 통곡하노니 / 奠斝一慟
만사가 끝났도다 / 萬事已而
공의 모습 빼닮은 / 眉宇之寄
아들 한 분 두셨으니 / 獨有庭芝
즐겁거나 슬프거나 잠깐 사이라도 / 歡戚造次
바라건대 함께 손잡고 / 庶共挈携
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不忘偲怡
알아주신 은혜 보답 잊지 않으리 / 以報受知
아아 / 嗚呼
예전의 어린 사위 / 昔日小婿
이젠 저도 백발이 되었다오 / 今亦白頭
이제부터 죽기 전까지 / 從今未死
허물 적기 바라오니 / 庶寡悔尤
은덕과 사랑으로 / 維德之愛
음조(陰助)하여 주소서 / 願言冥酬
간장에서 쏟는 눈물 / 肝膈之寫
영령께서 아실는지 / 靈或知不
아아 슬프외다 / 嗚呼哀哉
상향 / 尙饗
[주C-001]유안재(遺安齋) : 이보천(李輔天 : 1714~1777)의 호이다. 이보천은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인 계양군(桂陽君)의 후손으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제자인 종숙부 이명화(李命華)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같은 농암 제자인 어유봉(魚有鳳)의 사위가 되어 그에게서도 사사받음으로써, 우암(尤庵)에서 농암으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 처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사위인 연암에게 《맹자》를 가르쳤으며, 정신적으로 큰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주D-001]그래도 …… 않았다 : 이 제문에서 장인을 예찬한 내용이 연암의 사호(私好)에서 나온 아부의 발언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기 위해 한 말이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맹자는 “재아(宰我)와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은 지혜가 성인(聖人)을 넉넉히 알아볼 만하였다. 낮추어 보더라도 그들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汚不至阿其所好〕”라고 하면서, 재아와 자공과 유약이 그의 스승 공자를 극구 예찬한 말을 공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서 인용하였다. 또한 이루 하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하였다.
[주D-002]이를 …… 저들이 : 원문 중 ‘卑賤’이 ‘貧賤’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주D-003]상지(尙志)하고 득기(得己)하나니 : 《맹자》 진심 상에서 제(齊) 나라 왕자 점(墊)이 “선비란 무슨 일을 하는가?”라고 묻자, 맹자는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했다. 또한 송구천(宋句踐)이 “어떻게 해야 이처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가?〔何如斯可以囂囂矣〕”라고 묻자, 맹자는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스스로 만족한다.〔窮不失義 故士得己焉〕”고 하였다.
[주D-004]유하(柳下)의 …… 자득(自得)도 : 유하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 전금(展禽)으로, 유하라는 곳에 살았고 시호(諡號)가 혜(惠)였기 때문에 유하혜(柳下惠)라고 불렀다. 《맹자》 진심 상에, “유하혜는 삼공(三公)의 지위로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하였다. 유신(有莘)의 자득(自得)이란 이윤(伊尹)이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을 때 탕(湯) 임금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자, 이윤이 “스스로 만족해하며 말하기를〔囂囂然曰〕 ‘내가 어찌 탕왕의 폐백을 받아들이리오. 내 어찌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이대로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주D-005]무리를 떠나지 않고 : 동문지간(同門之間)인 벗들을 떠나서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이군삭거(離群索居)라 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失明)을 하자 증자(曾子)가 조문을 왔는데, 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을 주었다고 자하가 하늘을 원망하므로 증자가 이를 나무라며 그의 잘못을 성토하니, 자하는 “내가 벗들을 떠나 혼자 산 지 역시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뉘우쳤다고 한다.
[주D-006]빙호추월(氷壺秋月) :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와 가을철의 밝은 달처럼 마음이 맑고 깨끗함을 말한다.
[주D-007]팔을 …… 놓건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시 즐거움은 있다. 의롭지 못하면서 부귀한 것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고,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은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짓고 살 적에 요순(堯舜)의 도(道)를 좋아하여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거든, 천하를 녹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좋은 말 4000필을 마구간에 매어 놓아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주D-008]대들보 …… 그리움으로 : 《예기》 단궁 상에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을 꾸고는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지고 철인(哲人)이 죽을 것이다.”라고 노래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들보가 부러진다는 것은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또한 《맹자》 등문공 상에 증자(曾子)가 공자를 찬양하여 “강한(江漢)으로 씻은 것 같고 가을 볕으로 쪼인 것 같아서 밝고 깨끗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였다. 강한(江漢)은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말한다. 따라서 강한 같은 그리움이란 작고한 스승을 애타게 추모함을 뜻한다.
[주D-009]아들 한 분 두셨으니 : 빼어난 자제(子弟)를 뜰에서 자라는 지란(芝蘭)과 옥수(玉樹)에 비유하여 ‘정지(庭芝)’니 ‘정옥(庭玉)’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을 가리킨다.
[주D-010]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논어》 자로(子路)에서 자로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선비라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간절하게 서로 책선(責善)하고 화기애애하면 선비라고 부를 수 있다. 붕우간에 간절하게 책선하고 형제간에 화기애애하니라.〔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모년 모월 모일 반남 박모는 삼가 척계지서(隻鷄漬絮)의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올리고 글로써 곡합니다.
아아 / 嗚呼
내가 나서 세 살 되니 / 我生三年
말 비로소 배울 때라 / 自始能言
밤이라 능금이라 / 栗兮楂兮
오천을 노래했지 / 詠言梧川
누굴 자랑한 거냐면 / 云誰之誇
갓 시집온 형수님 집이었네 / 新婦之家
공이 따님 보러 오실 제 / 公來視女
노상 흰 나귀를 탔고 / 常乘白驢
눈은 오목하고 수염 길어 / 深目長髯
위엄 있고 정숙하셨네 / 威儀雅魚
뛰어나가 절 드리며 / 超躍迎拜
기뻐서 글공부도 잊었지 / 喜闕課書
나도 장인이라 부르면서 / 亦呼丈人
형을 따라 같이 했네 / 隨兄而如
어제 아침 일 같은데도 / 怳若隔晨
어언 삼십여 년 / 三十年餘
공의 성품 강직하고 / 公性剛明
사리와 인정에 통달했으며 / 深達事情
고사에 정통하고 예의를 숭상 / 博古好禮
인륜 의리 투철하셨네 / 倫備義精
나라에 못 쓰이고 / 進不需國
산골짝에서 늙었으나 / 守老一壑
운명이니 어찌 슬퍼하리 / 命也何怛
후회도 부끄럼도 없이 사셨노라 / 生無悔怍
아아 / 嗚呼
어머님 같고말고 / 先妣之似
우리 형수 나에게는 / 母我嫂氏
우리 집의 형수님은 / 嫂氏於家
옛 충신과 같아서 / 如古藎臣
힘 다해 죽어서야 그만두니 / 盡瘁後已
공은 제 몸처럼 아프게 여겨 / 公癏若身
정성스레 보살피길 / 綢繆慇懃
마치 옛날 제후국이 / 如古矦邦
이웃 나라 구제하고 백성을 보호하며 / 恤鄰保民
때맞추어 곡물 주어 / 賑糶以時
제 백성을 돌보듯이 하셨네 / 視厥赤子
딸 생각은 그렇대도 / 女固念矣
그 동서까지 염려해 주셨네 / 推及厥娌
부모님을 여읜 뒤로 / 自我孤露
더욱 공의 비호에 의지했네 / 益仰燾庇
길 가다 반백의 노인 보면 / 路見斑白
내 마음 몹시 송구스럽네 / 我心怵惕
더구나 공은 연세와 덕망으로 / 況公年德
아버님과 의기투합한 벗이었거늘 / 父之誼執
어찌 백 년을 못 사시어 / 胡不百年
나를 섧게 만드시나 / 使我深慽
이 소자 와서 곡을 하고 / 小子來哭
뜰과 집을 두루 살펴보니 / 周瞻院屋
국화 피어 향기 짙고 / 菊有剩馨
솔 푸르러 뜰에 가득 / 松翠滿庭
오천의 산은 울울창창 / 梧山鬱鬱
오천의 물은 맑디맑네 / 梧水泠泠
고인의 자취 어제런 듯한데 / 遣䠱如昨
영상(靈床)에서 절 드리니 예전과 다르네 / 拜床非昔
두 줄기 눈물 쏟아지고 / 雙淚磊落
호곡 소리 목이 메네 / 聲苦喉嗌
지칠 줄 모르고 장려해 주셨는데 / 不倦奬掖
이제 어디에 가르침을 청하리 / 今安請益
거듭 당부하신 그 유언을 / 丁寧遺托
감히 어찌 명심하지 않으리오 / 敢不銘臆
혼령이시여 가까이 계시거든 / 尊靈不膈
이 술잔을 받으소서 / 庶歆玆酌
상향 / 尙饗
[주C-001]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 :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의 장인인 이동필(李東馝 : 1724~1778)을 가리킨다. 《연암집》 권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 참조.
[주D-001]척계지서(隻鷄漬絮)의 제수 : 간단한 제수를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 일컬어졌던 사람인데, 그가 먼 곳으로 문상(問喪)하러 갈 때 술을 솜에 적셔서 햇볕에 말리고 그것으로 구운 닭을 싸서 가지고 간 다음 솜을 물에 적셔 술을 만들고 닭을 앞에 놓아 제수를 올린 뒤 떠났던 데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53 周黃徐姜申屠列傳 徐穉》
[주D-002]힘 …… 그만두니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고 하였다.
[주D-003]영상(靈床) : 염을 마치고 입관하기 전까지 시신을 모셔 놓은 곳을 말한다.
[주D-004]혼령이시여 가까이 계시거든 : 원문의 ‘膈’ 자가 ‘隔’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는데, 뜻은 같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대범 사람의 삶은 요행이라 할 수 있는데도 그 죽음이 공교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루 동안에도 죽을 뻔한 위험에 부딪치고 환난을 범하는 것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다만 그것이 간발의 차이로 갑자기 스쳐가고 짧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데다가, 마침 민첩한 귀와 눈, 막아 주는 손과 발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되는 까닭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사람들도 편안하게 생각하고 안심하고 행동하여 밤새 무슨 변고가 없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진실로 사람마다 늘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게 한다면, 비참하도록 두려워서 비록 종일토록 문을 닫고 눈 가리고 앉아 있다 해도,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어떤 망기(望氣)하는 자가 한 여자의 관상을 보고서 소가 들이받는 것을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지게문 앞에서 귀이개로 귀를 후비다 지게문이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에 귀를 찔러서 죽었으니, 귀이개는 소뿔로 만든 것이었다. 또 사주쟁이가 한 사내의 사주팔자를 논하면서 쇠를 먹고 죽게 될 것이라 했는데, 이른 아침 밥을 먹다가 폐가 수저를 빨아들여 죽었다. 그 신기하게 들어맞고 공교하게 증험된 것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일을 당하기에 앞서 간곡하게 조심하라고 당부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쇠는 먹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소도 규방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니, 비록 천명을 아는 선비일지라도 이런 일을 미리 헤아려서 경계하고 조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 “군자는 그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경계한다.” 했지만, 이것이 어찌 소에 찔리고 쇠를 먹는 것을 두고 이름이겠는가. 요컨대 높은 산에 오르지 아니하고 깊은 물가에 다가가지 않고, 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조절하며, 나의 생각이 속에서 생겨나는 바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밖에서 닥쳐오는 환난이야 역시 또 어찌하겠는가.
이몽직의 휘(諱)는 한주(漢柱)이니, 본관은 덕수(德水)로서 충무공(忠武公)의 후손이다. 그 부친은 절도사(節度使)로 휘가 관상(觀祥)인데, 나의 매형(姊婿)인 의금부 도사 서중수(徐重修) 씨에게 외삼촌이 된다. 그러므로 몽직은 어렸을 때부터 내게 와서 배웠고, 그의 매제인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 박제가)은 젊은 나이로 문장에 능하여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였는데 나와 친한 사이다. 몽직은 대대로 장수의 집안이라 비록 무관으로 종사했지만 문인을 좋아하여, 항상 초정을 따라서 나와 교유하였다. 사람됨이 어려서는 곱고 귀엽더니, 장성한 뒤에는 시원스럽고 명랑하여 호감을 주었다. 하루는 남산에서 활쏘기를 익히다가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렇게 죽었을 뿐 아니라 아들도 없었다.
아, 국가가 태평을 누린 적이 오래라 사방에 난리가 없어 싸울 만한 일이 없는데도, 선비가 유독 창끝이나 살촉에 찔려 죽는다는 것은 어찌 공교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릇 사람이 하루를 사는 것도 요행이라 하겠다. 이에 애사를 지어 전장에서 죽은 장사(壯士)를 애도하고, 이로써 몽직의 죽음에 대해 조문하노라. 애사는 다음과 같다.
장사가 몸을 솟구쳐 전장으로 내달리니 / 士踴躍兮赴戰塲
바람 모래 들이쳐라 양편 군사 맞붙는다 / 風沙擊兮兩軍當
목소리가 쉬고 거칠어 도리어 고조되지 아니하고 / 聲廝暴兮還不颺
입으로는 칼을 물고 전진하며 창 휘두르네 / 口含劍兮前舞槍
눈 한번 깜짝 않네 뭇 창끝이 몰려와도 / 目不瞬兮集衆鋩
오른발론 짓밟고 왼발을 날리누나 / 踏右足兮左脚揚
모든 힘을 다 쏟아라 임금님을 위함일레 / 竭膂力兮爲君王
모양 소리 사나워도 참으로 미치광이 아니라오 / 容聲惡兮諒非狂
아아 / 嗚呼
죽은 지가 오래지만 곧게 선 채 쓰러지지 않고 / 死已久兮立不僵
주먹 상기 쥐었어라 두 눈마저 부릅떴소 / 手猶握兮兩目張
자손에게 벼슬 주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며 / 蔭子孫兮表其鄕
역사책에 기록하니 아름다운 이름 길이 전하리 / 史書之兮流芬芳
나는 내 친구 이사춘(李士春)이 죽은 뒤부터는 사람들과 다시 교제하고 싶지 않아 경하(慶賀)건 조위(弔慰)건 모두 폐해 버렸다. 그리하여 평생의 절친한 친구로 이를테면 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 황윤지(黃允之 황승원(黃昇源)) 같은 이들이 험한 횡액을 만나 섬에서 거의 죽게 되었어도, 한 글자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다. 비록 왕래하는 일이 있다 해도, 가까운 이웃에 밥 지을 물과 불을 얻거나 시복(緦服) 이내의 집안 친척을 조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척 원망하고 노여워하여, 꾸지람과 책망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나 역시 스스로 이와 같이 하겠다 감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교제가 끊어지는 것도 달갑게 여겨, 비록 실성하거나 멍청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았다.
대개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는 이것이 원업(冤業)이 되는 것이다. 그 죽음이 사춘(士春)처럼 참혹하고 몽직(夢直)처럼 공교로운 경우에는, 평생 서로 즐거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고통이 혹독하여 뼈를 찔러대니, 이것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쳐져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만약에 몽직과 애당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무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마음이 아프고 참담한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몽직이 나를 종유(從遊)한 것은 비록 사춘의 경우처럼 정이 깊고 교분이 두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달 밝은 저녁과 함박눈 내린 밤이면, 문득 술을 많이 가지고 와서 거문고를 퉁기고 그림을 평론하며 흠뻑 취하곤 했었다. 나는 고요히 지내면서 이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는데, 혹은 달빛 아래 거닐며 서글퍼하다 보면 몽직이 하마 이르렀고, 눈을 보면 문득 몽직을 생각하는데,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면 과연 몽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이다.
내가 그의 집에 가서 곡하고 조문하지 못할 형편이므로, 그를 위해 이 애사를 지어 저 옛날 한창려(韓昌黎)가 구양생(歐陽生)에 대한 애사를 손수 썼던 일을 본떠서, 드디어 한 통을 써서 초정에게 주는 바이다.
[주C-001]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 몽직은 이한주(李漢柱 : 1749~1774)의 자이다. 애사는 한문(漢文) 문체의 하나로, 주로 요절한 사람에 대한 추도사를 말한다.
[주D-001]망기(望氣) : 망운(望雲)이라고도 하며, 구름을 보고 길흉을 예언하는 점술을 말한다.
[주D-002]귀이개 : 원문은 ‘’인데, 이는 우리식 한자이다.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 “음은 ‘도’이다. 귀지를 파내는 도구인데 조선조의 제품이다.〔音滔 取耳中垢之具也 韓代所製〕”라고 주를 달아 놓았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도 유사한 주를 달아 놓았다.
[주D-003]천명을 아는 : 《주역》 계사전 상에 “천도를 즐기고 천명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주D-004]군자는 …… 경계한다 : 《중용장구》 제 1 장에 나오는 말이다. 단 앞뒤 구절의 순서가 바뀌었다.
[주D-005]관상(觀祥) : 이관상(1716~1770)은 충무공의 5세손으로, 그의 친아들 한주는 형 이보상(李普祥)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의 둘째 서녀(庶女)가 박제가(朴齊家)에게 시집갔다. 무과 급제 후 고을 수령과 병수사(兵水使)를 여러 차례 지냈으며,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재임 중 사망했다.
[주D-006]서중수(徐重修) : 1734~1812. 그의 자는 성백(成伯)이고 본관은 대구이다. 연암의 둘째 누님의 남편이다. 《연암집》 권5에 ‘성백에게 보냄〔與成伯〕’이란 두 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주D-007]주먹 : 원문 ‘手’가 대본에는 ‘矢’로 되어 있는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과 《여한십가문초》 등에 ‘手’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주D-008]이사춘(李士春) : 이희천(李羲天 : 1738~1771)으로, 그의 자가 사춘(士春)이다. 호는 석루(石樓)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연암은 그의 부친인 이윤영(李胤永)에게서 《주역》을 배우게 된 것을 계기로, 젊은 시절부터 그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희천은 청(淸) 강희(康熙) 때 남양지부(南陽知府)를 지낸 주린(朱璘)이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에 조선 태조의 세계(世系)를 왜곡 · 모독한 내용이 있는 줄 모르고 그 책을 책 장사로부터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이 문제되어 참수되는 변을 당했다. 《英祖實錄 47年 5月 26日》
[주D-009]유사경(兪士京 ) …… 되었어도 : 영조 48년(1772) 유언호(兪彦鎬)는 노론 청류(淸流)로 지목되어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탕척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황승원(黃昇源)이 사간원 정언으로서 이광좌(李光佐) 등 소론계 대신의 관직을 복구하라는 영조의 특지(特旨)에 항의한 참판 조영순(趙榮順)을 두둔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몇 달 만에 풀려났다.
[주D-010]시복(緦服) : 시마(緦麻)로 된 상복을 입는 3개월의 상을 말한다. 족부모(族父母), 족형제(族兄弟) 등 가장 촌수가 먼 친척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주D-011]원업(冤業) : 악업(惡業), 즉 악한 결과를 받는 행동을 말한다.
[주D-012]한창려(韓昌黎)가 …… 일 : 한유(韓愈)는 요절한 벗 구양첨(歐陽詹)을 위해 구양생애사(歐陽生哀辭)를 짓고 나서 덧붙인 제애사후(題哀辭後)에서 “나 한유는 본래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글을 짓고 난 뒤 단 두 통만을 손수 써서, 그중 한 통은 청하(淸河)의 최군(崔群)에게 주었다. 최군과 나는 모두 구양생의 벗이다.”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유경집의 휘는 성환(成煥)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외모가 훤출하고 건장하며 성품은 순하고 언행은 겸손하며, 기억력이 아주 뛰어났고 문학에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 스물둘에 병에 걸려 죽었다.
아아, 나는 경집의 아버지의 친구로서, 경집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버지를 잘 알았다. 경집의 조부모는 경집의 아버지만을 일찍 기르고서, 뚝 끊기듯이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경집이 태어나자 손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작은 아들로 여겼으며, 경집의 부모 역시 감히 스스로 그 아들을 제 아들이라 하지 못하였는바, 경집도 어렸을 적부터 조부모를 제 부모로 여겼다.
급기야 경집이 죽자 그 부모는 감히 그 아들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늙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조부모는 차마 그 손자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아들의 슬픔을 더 크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두 살배기 아들은 그 아비에 대해 곡하는 슬픔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어미가 슬퍼하는 것 때문에 울어대니, 그 아내 이씨(李氏)는 감히 죽지도 못하고 또한 감히 곡도 못하고 속으로 울었다. 친척과 친구들은 유생(兪生)이 재주와 덕행을 지니고도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 아버지에게까지 조문하고 곡할 겨를이 없었으니, 그 조부모가 다 늙어서 작은 아들과 다름 없는 손자를 잃은 때문이다. 이것이 경집의 죽음을 대단히 슬퍼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애사를 지어 애도하는 바이다.
죽은 사람이 죽음의 슬픔을 모르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과, 산 사람이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함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슬플까?
어떤 이는 “죽은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산 사람이 그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일임을 슬퍼한 줄을 모르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산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이미 아무것도 몰라 슬퍼할 만한 것을 슬퍼함도 없으나, 산 사람은 날마다 그를 생각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하면 슬퍼서, 빨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기를 바라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효자는 더러 부모 여읜 슬픔으로 생명이 위급하기도 하고, 자부(慈父)는 더러 자식 잃은 슬픔으로 실명하기도 하고, 열부(烈婦)는 더러 자결하기도 한다. 이는 다 죽은 자에 대한 슬픔으로 말미암아 혹은 따라 죽고 혹은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슬픔은 함께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유경집의 죽음에 대해서 “산 사람이 슬프다.”고 단언한다.
무릇 사람의 감정으로 볼 때 가장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기로는, 나는 믿었는데 상대방이 속이는 것만 한 것이 없으며, 속임을 당한 고통은 가장 친하고 다정한 이가 문득 나를 등지고 떠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친하고 다정하기로 손자와 할아버지, 아들과 아버지, 남편과 아내 같은 사이보다 더한 경우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기를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또 믿어 의심함이 없기로는, 어느 것이 경집의 재주와 외모로 보아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경우와 같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상식과 이치에 어긋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니 어찌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아, 비록 그렇지만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슬퍼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슬퍼하는지 슬퍼하지 않는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평일에 나처럼 그를 아끼던 자가 어찌 애사를 지어, 한편으로는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이 제 슬픔에 슬퍼하지 못하는 것을 애도하지 않겠는가.
[주D-001]경집의 아버지 : 유정주(兪靖柱 : 1729~1798)를 가리킨다. 유정주는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의 족자(族子)가 되므로, 유한준도 그의 아들을 위해 애사(哀辭)를 지었다. 《自著 卷15 族孫成煥哀辭》
[주D-002]조부모를 제 부모로 여겼다 : 원문은 ‘乃大父焉是母’인데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문맥으로 유추하여 번역하였다.
[주D-003]자부(慈父)는 …… 하고 :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을 하였다고 한다. 《禮記 檀弓上》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사정(師正)이요 / 公諱師正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 潘南人也
자는 시숙(時叔)이요 / 字曰時叔
부친의 휘는 필하(弼夏)이네 / 考諱弼夏
우리 박씨는 / 維我朴氏
신라에서 비롯되어 / 肇自新羅
여덟 망족(望族)으로 갈렸는데 / 分爲八望
반남이 제일 대가 / 潘爲大家
평도공(平度公)은 / 維平度公
우리 태종 도우셨고 / 相我太宗
야천(冶川)께서 상서로운 조짐 일으켜 / 冶川發祥
대대로 번창하게 되었네 / 族世遂昌
금계군(錦溪君)의 공적이며 / 錦溪功業
금양군(錦陽君)의 문장이라 / 錦陽文章
증조 휘는 세교(世橋)이고 / 曾祖世橋
조부 휘는 태두(泰斗)이니 / 祖諱泰斗
추증(追贈)되는 경사 거듭되고 / 榮贈襲休
봉군(封君)이 대를 이었네 / 君封世受
모친 윤씨 부인은 / 妣尹夫人
관찰사 반(攀)의 따님 / 監司攀女
공께서는 숙종대왕 / 公於肅廟
계해년에 출생하여 / 癸亥以擧
기미년에 돌아가시니 / 己未乃卒
향년은 오십칠 세 / 壽五十七
정유년에 정시 급제 / 丁酉庭試
한림이며 옥당이며 / 翰林玉堂
춘방이며 대각이며 / 春坊臺閣
검상이며 전랑을 / 檢詳銓郞
두루두루 거치셨지 / 周歷流轉
산직(散職) 겸직(兼職)도 있고 / 有冗有兼
해읍에도 간혹 보직되고 / 間補海邑
호남도 안렴(按廉)했네 / 亦按湖廉
처음에 흉당들이 / 厥初凶黨
사필 장악할 욕심으로 / 圖秉史筆
외직으로 공 내쫓고 / 絀公于外
효경(梟獍) 같은 자들을 배치했네 / 獍梟峙列
공이 그 간상(姦狀) 파헤쳐서 / 公發其姦
드디어 신치운 · 조지빈을 공박하니 / 遂駁雲彬
누가 저들을 함께 천거했나 / 誰其同剡
그 사람을 알 수 있네 / 可知其人
엄숙한 저 청묘는 / 肅肅淸廟
묘정(廟庭) 배향 장엄한데 / 庭食嚴哉
저 세 정승들은 / 若彼三相
진실로 재앙의 괴수들이라 / 寔俱禍魁
저들 배향 물리쳐서 / 並斥其享
제사 의식 중히 하고 / 以重祀典
몸가짐 고고히 하여 / 持我矯矯
저들의 관리 선발 조소하였네 / 譏彼銓選
네 충신을 함께 제사하자고 / 並祠四忠
공이 처음 의견 내셨네 / 詢謀自公
적신들이 집권하자 / 賊臣執命
국시가 무너지니 / 國是北崩
평피의 회합은 / 平陂之會
또 하나의 사당(私黨)일레 / 又一淫朋
공은 맹종하지 않고 / 公不詭隨
정절이 돌보다 단단했으니 / 貞于介石
사람들은 공의 처신 살펴보고 / 視公進退
영예로운 때인지 아닌지를 예측하였네 / 占時榮辱
왕릉 이전 공사 감독하여 / 董匠遷陵
그 공로로 승지로 승진하고 / 勞陞銀臺
안변 부사로서 치적 드러났나니 / 著治安邊
검약하고 절제하였네 / 廉約自裁
대사간으로 들어온 다음 / 入長薇垣
예조 형조 참의 되고 / 參議禮刑
이조 참의 세 번 되어 / 三入選部
청탁(淸濁)을 꼼꼼히 따졌네 / 錙分渭涇
강화 유수로 발탁되고 / 擢守沁府
한성부의 우윤과 좌윤 거쳤네 / 左右尹京
예조 참판 재임하고 / 再佐秩宗
도승지가 한 번 되니 / 一爲知申
품계로는 가의대부 / 階則嘉義
춘추관과 경연 직함에다 / 春秋經筵
의금부와 오위도총부 관직 겸하고 / 金吾摠管
봉상시 제조 거쳐 / 提擧奉常
비변사 제조 힘껏 사양해도 / 力辭籌司
수석 영광 차지했네 / 首席據光
부인은 이씨이니 / 夫人李氏
본적이 함평이요 / 其籍咸平
부친 휘는 택상(宅相)이며 / 父曰宅相
고조 휘는 춘영(春英)이라 / 高祖春英
공이 세상 떠나시고 / 距公之沒
십구 년 뒤에 별세했네 / 十九年卒
여섯 남매 낳았는데 / 六子是擧
아들 넷에 따님이 둘 / 四男二女
흥원(興源)은 스무 살에 / 興源弱冠
진사과에 합격했고 / 迺成進士
창원(昌源)은 문과 장원이나 / 昌源魁科
벼슬은 정언에 그쳤네 / 正言而止
형원(亨源)까지 일찍 죽어 / 亨源蚤歿
모두 서른 못 넘겼네 / 俱未卅禩
명원(明源)은 부마 되어 / 明源尙主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지니 / 封錦城尉
공이 영의정에 증직된 건 / 贈公議政
실로 그가 귀한 신분 된 덕일레 / 寔用其貴
큰사위는 김기조요 / 女金基祚
둘째 사위는 이도양인데 / 次李度陽
열렬한 이씨 아내는 / 烈烈李妻
남편 따라 자결했네 / 從夫自戕
장남에겐 아들 셋 있으니 / 長派三男
상덕(相德)은 이조 판서 / 相德吏判
상악(相岳)은 사간원 정언이며 / 相岳正言
상철(相喆)은 한성 부윤인데 / 相喆府尹
상악은 형원의 양자 되고 / 岳繼亨後
상철은 금성위의 양자 되고 / 喆爲尉子
족자인 상집(相集)도 / 族子相集
창원의 제사를 받들었네 / 亦承昌祀
공은 풍채 아름답고 / 公美姿度
천품이 곧고 깐깐하여 / 天姿抗簡
남의 부정 보게 되면 / 視人不正
그자의 갓이 기운 듯이 여겼네 / 若攲厥冠
집안에선 위의(威儀) 있고 / 在家獻獻
관에서는 강직하셨네 / 在官侃侃
소생이 묘갈명 지었으니 / 小子作銘
영원토록 마멸되지 않으리이다 / 永世不刊
[주D-001]여덟 망족(望族) : 박씨 중 밀양(密陽) · 반남 · 고령(高靈) · 함양(咸陽) · 죽산(竹山) · 순천(順天) · 무안(務安) ·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른바 ‘팔박(八朴)’을 가리킨다.
[주D-002]평도공(平度公) : 박은(朴訔 : 1370~1422)의 시호이다. 태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주D-003]야천(冶川) : 박소(朴紹 : 1493~1534)의 호이다. 《연암집》 권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주D-004]금계군(錦溪君) :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봉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신이었다.
[주D-005]금양군(錦陽君) :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한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 1592~1645)이다. 뒤에 금양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당대의 문장가로서, 《분서집(汾西集)》이 있다.
[주D-006]한림이며 …… 거치셨지 : 한림(翰林)은 예문관, 옥당(玉堂)은 홍문관, 춘방(春坊)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대각(臺閣)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가리킨다. 검상(檢詳)은 의정부의 정 5 품 벼슬로 문서 검열을 담당하였고, 전랑(銓郞)은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가리킨다. 박사정(朴師正)의 관력(官歷)은 《연암집》 권9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 묘표음기(禮曹參判贈領議政府君墓表陰記)’에 자세하다.
[주D-007]해읍(海邑)에도 …… 안렴(按廉)했네 : 흥양 현감(興陽縣監), 남해 현령(南海縣令) 등에 임명된 사실과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사실을 말한다.
[주D-008]처음에 …… 배치했네 : 영조 즉위 초에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편찬하는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할 때 당상관(堂上官)은 유봉휘(柳鳳輝) · 조태억(趙泰億) · 김일경(金一境) · 이진유(李眞儒) 등, 낭청(郞廳)은 조지빈(趙趾彬) · 신치운(申致雲) 등 소론 일색으로 임명되고, 낭청으로 임명된 박사정은 회인 현령(懷仁縣令)으로 축출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주D-009]누가 …… 있네 : 박사정은 신치운 등이 박필몽(朴弼夢 : 1668~1728)에게 붙어 사관(史官) 자리를 차지한 것을 공박하였다. 박필몽은 소론 강경파로서 영조 즉위 초에 도승지가 되었는데, 실록청을 사사로이 출입한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주D-010]청묘(淸廟) : 종묘의 묘실(廟室)로, 여기에서는 숙종의 묘실을 가리킨다.
[주D-011]세 정승들 : 숙종의 묘에 배향된 소론측의 삼대신(三大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 우의정을 지낸 윤지완(尹趾完)을 가리킨다.
[주D-012]몸가짐 …… 조소하였네 : 영조 즉위 초에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고 탕평책에 순응하는 사람들만 선발하는 데 항의하여, 박사정이 누차 관직에 제수되었어도 취임을 거부한 사실을 말한다.
[주D-013]네 충신 : 노론 사대신인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이들은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 후일의 영조)를 책봉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 문제로 소론의 미움을 사서, 1722년(경종 2) 노론계의 역모사건인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1725년(영조 1) 사충서원(四忠書院)을 건립하여 이들을 제향하고 사액(賜額)하였다.
[주D-014]평피(平陂)의 회합 : 영조의 탕평책은 《서경》 홍범(洪範)에 “치우치지 말고 왕의 의로움을 따르라.〔無偏無陂 遵王之義〕”,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탕평하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라는 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평피의 회합’은 노론과 소론이 뒤섞인 탕평파(蕩平派)를 풍자하여 한 말인 듯하다.
[주D-015]천품이 곧고 깐깐하여 : 원문의 ‘天姿’가 ‘天資’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는데, 뜻은 비슷하다.
[주D-016]그자의 …… 여겼네 :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주D-017]위의(威儀) 있고 : ‘獻獻’는 ‘의의’라 읽으며,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을 나타내는 ‘儀儀’와 같은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지금 임금 14년 경술년(1790) 3월 25일 을사일에 금성위 박공(朴公)이 제생동(濟生洞) 사제(賜第 임금이 하사한 집)의 정침(正寢 몸채의 방)에서 편안히 운명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임금께서는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급히 전교하여 애도하는 뜻을 표했는데, 고굉폐부(股肱肺腑)의 신하로서 한 글자를 얻으면 사후나 생시의 영광으로 삼는 것이, 공에게는 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널은 장생전(長生殿) 비기(秘器 상례에 쓰는 기구)의 여벌을 내려 주고 장례는 1등급의 예(禮)를 적용하게 하였으며, 무릇 봉(賵 수레와 말), 수의(襚衣), 제수로 쓰일 물품은 모두 내부(內府 왕실의 창고)에서 지급하게 하였다. 담당 관원들이 각기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야흐로 분주하게 문하에서 기다리는데, 가족들이 고인의 뜻을 아뢰어 예장(禮葬)을 면해 주기를 빌므로 임금께서 마지못해 응낙하여 그 뜻을 이뤄 주게 하였다. 그리고 바로 호조에 명하여, 그 대신 돈 30만 전(錢), 백미 100섬과 면포와 갈포 1400여 필을 실어 보내게 하였다. 염이 끝나자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게 하고, 공경 대신(公卿大臣)들에게 명하여 모두 조문하게 하였다. 성복(成服)날이 되자 승지를 보내 어제 치제문(御製致祭文)을 읽어 제사 지내게 하였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했던 신하로서 한 글자라도 얻으면 공훈을 기록한 명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공에게는 또 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이에 도신(道臣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도위(都尉)의 장사 날짜가 정해졌으니, 내 장차 비문을 친히 지어 그 신도(神道 무덤으로 가는 큰 길)를 빛나게 할 생각이다. 너는 큰 돌을 채취해 놓고 기다려라.”
하고, 이내 사신(詞臣 홍문관 제학)에게 명하기를,
“어진 도위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것은 정해진 은전(恩典)이다. 너는 그의 덕을 기록하여 봉상시(奉常寺)에 고하라.”
했다. 이에 봉상시 제조가 공의 평생의 대략을 특서한 것을 채집하니, ‘밀찬익호(密贊翊護)’와 ‘건의천원(建議遷園)’이라는 여덟 글자였다. 의정부와 홍문관의 신하들이 모두 건의하기를,
“공은 일찍이 바깥 조정에서 능히 못할 바에 절개를 바치고, 온 나라가 감히 못할 바에 충성을 다하여, 사직에 공이 있으니 시호를 충희(忠僖)라 짓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은 그 건의를 윤허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시법(諡法)에 나라를 생각하느라 집을 잊은 것을 ‘충(忠)’이라 하고, 조심하여 공순하고 삼가는 것을 ‘희(僖)’라 했다. 아아, 공은 그 시호에 합당하다 하겠다.
공의 휘(諱)는 명원(明源)이요 자는 회보(晦甫)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는데, 시조가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에서 성(姓)을 얻었다. 고려 말에 휘 상충(尙衷)이 있어 우리 왕조에서 문정(文正)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이분이 평도공(平度公) 휘 은(訔)을 낳으니, 우리 태종을 보좌하는 정승이 되었다. 그로부터 5대를 전해 내려와, 문강공(文康公) 휘 소(紹)는 세상 사람들이 야천(冶川) 선생이라 일컬었으며, 선조(宣祖) 때의 명신인 충익공(忠翼公) 휘 동량(東亮)은 공훈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문정공(文貞公) 휘 미(瀰)는 선조의 따님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우리 왕조의 문장 대가로 반드시 금양위(錦陽尉)를 손꼽으니, 바로 공의 5세조이다.
고조는 첨정공(僉正公)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군수공(郡守公)은 휘 태두(泰斗)인데 좌찬성 금은군(錦恩君)에 추증되었고, 조부 참봉공(參奉公)은 휘 필하(弼夏)인데 좌찬성 금녕군(錦寧君)에 추증되었으니, 충익공의 적손(嫡孫)인 때문에 모두 훈봉을 이어받은 것이다. 부친은 예조 참판 휘 사정(師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모친은 정경부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학생 택상(宅相)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대왕 원년인 을사년(1725) 10월 21일에 태어났으며, 14세에 영조의 셋째 따님인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처음에는 순의대부(順義大夫)에 제수되고, 품계가 쌓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고 봉상시(奉常寺) · 전의감(典醫監) · 선공감(繕工監) · 사재시(司宰寺) · 장흥고(長興庫) · 제용감(濟用監)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누차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의 글씨를 써서 그때마다 상으로 말〔馬〕을 하사받았고, 사명을 받들고 세 번이나 북경에 갔으며, 임금의 특지(特旨)로 도감(都監)의 당상(堂上)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인데 효창묘(孝昌墓)를 조성하는 데 가장 큰 공적이 있었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천성이 단정하고 선량하며 성실하고 정중하였다. 50여 년이나 대궐을 출입하였으나, 보는 것은 발길 미치는 곳을 넘지 않았고 들은 것은 가족들에게도 말을 옮기지 않았으며, 조정의 논의는 입 밖에 낸 적이 없고 조정 벼슬아치들의 집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임금의 총애와 예우가 여러 귀척(貴戚 임금의 인척)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늙을 때까지 해이해지지 않았다. 임금이 특별히 예외로 전장(田庄)과 노비를 하사하면, 문득 사양하며,
“신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부마로 선택되었으니, 가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완상(玩賞)할 만한 옛 기물(器物)을 특별히 하사해도, 감히 스스로 지니지 않았다. 처음에 저택으로 이현궁(梨峴宮)을 하사했으나, 상소하여 기어이 사양하였다. 화평옹주가 돌아가매 영조가 누차 거둥하여 상사를 살피니, 공은 상소를 올려 기어이 임금의 행차를 중지토록 하였으며,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 어가(御駕)를 부여잡고 완강히 간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한적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았으며, 의원을 맞이하는 일이 아니면 새 얼굴을 대할 길이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 때문에 말하기를,
“누가 그의 마음을 사랴? 차라리 금을 캐는 게 낫지. 그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촌철(寸鐵)도 안 통한다.”
했다. 그러므로 조카 종덕(宗德)이 10여 년 동안 이조와 병조의 판서직을 맡았으나, 세상에 감히 공에게 인사 청탁을 하는 자가 없었다. 몸가짐을 항상 새 옷을 입은 듯이 하면서,
“물건을 남에게 줄 때도 오히려 먼지를 터는 법인데, 하물며 몸을 임금에게 바침에 있어서랴.”
했다.
일찍이 지원(趾源)에게 말하기를,
“부마가 무슨 벼슬인고?”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품계는 높아도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재상의 직책이 아니요, 녹봉은 후해도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는다는 책망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일찍이 수레를 하사하며 타라고 명하시므로, 남성(南城 남한산성)에서 호정(湖亭)까지만 타고 말았네. 십수 년 뒤에 임금이 다시 무엇을 타고 다니는지를 물으셨으므로 황공하여 미처 대답을 못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대신 ‘이 사람은 수레가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대번에 명을 내려 만들어 주게 하셨지. 그래서 또 동대문으로부터 나와 교외의 별장까지만 타고 그만두었네.”
하므로, 내가 묻기를,
“왜 타지 않았습니까?”
하였더니,
“이는 명망과 덕행이 있는 이가 사용하는 것인데 어찌 재상과 나란히 수레를 몰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뒷날에 또 나에게 이르기를,
“의빈(儀賓 부마)이란 어떤 사람인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궐에 들어가면 임금의 일상생활을 시중들고 대궐 밖으로 나가면 임금의 행차를 뒤따라가니 귀근인(貴近人)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공은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비 · 이슬 · 서리 · 눈 내리는 것이 하늘의 조화 아닌 것이 없는데, 만약 다시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며, 망녕되이 비가 올지 볕이 날지를 점친다면 이는 모두 신하로서 죽을죄인데, 하물며 귀근인이랴?”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자취가 왕실과 연결된 자는 마땅히 그 행동을 조심하여 세상 사람들이 의중을 엿보게 하지 말아야 하며, 명성을 지니기보다는 차라리 국민들이 아무개 도위가 있는 줄을 모르게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비록 걷거나 달려가고 한 번 찌푸리거나 한 번 웃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아주 사소한 것도 신중히 하고, 다만 국시에 따를 뿐이요 자기 의견은 개입시킨 바 없었다. 대중들과 함께 듣고 볼 뿐 대중들보다 먼저 하고자 하지 아니하며, 사소한 것까지 신중히 하고 자세히 검토하는 것은 감히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으니, 그 공경하고 겸손하며 신중하고 과묵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우(知遇)를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서 입어, 세자에게 닥친 곤란과 우환을 항상 말없이 살피면서, 공과 귀주(貴主 화평옹주)가 안팎으로 협찬하며 정성을 다해 보호해 나갔으나, 궁중의 일이라서 이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귀주가 일찍 세상을 떠나매 공의 진실되고 외로운 충성은 임금의 마음속에만 기억되어 있었지만, 차마 자세히 드러내 말씀하시지 못하고 누차 귀주의 제문에다 뜻을 나타내셨으니, 이에 비로소 공이 세자를 보좌한 큰 공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공에게 넌지시 묻는 자가 있자, 공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목이 멜 따름이다.”
하였다.
급기야 공이 장헌세자의 예전 장지의 네 가지 해로운 점을 자세히 아뢰자, 위로는 임금의 마음에 맞고 아래로는 여론이 흡족해하였다. 이에 좋은 묏자리를 얻어 나라의 터전을 영원히 굳혔으니, 돌아가신 세자에게 못다 한 공의 충정으로는 이 공사로써 거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바야흐로 이때에 임금은 공을 은인으로 여기셨고, 나라 안에서는 시귀(蓍龜)처럼 믿고 있었다. 공은 병이 심해져 점점 피곤해져서 거의 식사를 끊다시피 한 지가 여러 해였다. 그러나 여전히 길지(吉地)를 살피고 공사를 감독할 수 있었다. 매번 한번 왕명을 들으면 반드시 신속히 왕래하면서 자신이 쓰러질 것도 걱정하지 않았으니, 왕실에 관한 일을 근심하고 염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만둔 것은 역시 그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원(趾源)이 일찍이 공을 따라 국경을 나갔다가 요하(遼河)에서 비로 길이 막혔는데, 하루는 공이 스스로 나가 물을 살펴보고는 드디어 급히 채찍질하여 곧장 건너므로, 사람들이 허둥지둥 놀라서 뒤를 따랐다. 강을 건너고 난 뒤 공이 사람들을 불러 위로하기를,
“오늘 일은 진실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조의 위덕(威德)에 힘입은 자는 물에 빠져 죽을 리가 없고, 설사 빠져 죽는다 해도 이것은 자기의 직분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아무도 감히 다시는 물이 넘실대어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또 길을 다급히 재촉하여 열하(熱河)로 갈 적에도 일을 요량하고 임기응변하는 것이 매번 시의적절하였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대중을 통제함에 있어서는 엄격함이 마치 행진(行陣)하는 것과도 같았다. 비단 사신으로서 왕명을 받든 이 한 가지 일만이 공에게서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밝은 식견과 굳센 지조는 조정에 나아가 엄숙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할 만한데도, 이미 나라의 제도에 제한되어 어찌할 수 없는 일인즉, 실로 한 세상이 모두 다 애석히 여기는 바이며, 임금께서도 조정에 임어(臨御)하실 적에 누차 탄식으로 그런 뜻을 드러내셨다.
임금께서 일찍이 연(輦 가마)을 타고 공의 집에 납시어, 공의 침소가 벼슬이 없는 선비와 같이 쓸쓸한 것을 보고 가상히 여겨 어서(御書)로 ‘만보정(晩葆亭)’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또 시를 하사하여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현륭원(顯隆園)이 완성됨에 미쳐서는 승지를 보내어 전장과 노비를 하사하고, 덧붙여 백금과 구마(廐馬)를 내렸으며, 무릇 금성위의 상소에 대해 비답(批答)을 내릴 때는 반드시 사관(史官)이 어전에서 한 번 읽었으니, 모두 특별한 예우였다.
병이 위급하자 태의(太醫 어의)가 약을 싸가지고 가 밤낮으로 진찰하고 간호하였으며, 액정서(掖庭署)의 사자들은 병세를 묻기 위해 날마다 길에 줄을 이었다. 임금께서 거둥하시는 길에 들러 보고자 하여 먼저 사관을 시켜 가 보게 했는데, 공은 이미 말을 못하는 지경이었고 띠를 걸쳐 놓을 수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임금께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 후 수일 만에 공이 마침내 별세했으니, 향년 66세였다. 5월 16일에 귀주의 묘에 합장하였다. 귀주는 영조 3년 정미년(1727) 4월 27일에 태어나서 무진년(1748) 6월 24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22세였다. 선왕(先王 영조)의 어찬(御撰)인 《효우록(孝友錄)》이 있다. 공에게는 작은 초상화 두 벌이 있었는데, 선왕께서 모두 ‘충효소심(忠孝小心)’이라 찬(贊)을 하셨다.
공은 형의 아들 상철(相喆)을 데려다 양자로 삼았는데, 상철은 문과에 합격하여 부윤을 지냈다. 안동 김간행(金簡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부인은 일찍 죽고, 첩에게 4남 3녀가 있으니, 아들은 종선(宗善) · 종현(宗顯) · 종건(宗蹇) · 종련(宗璉)이요, 딸은 장손(張僎), 서근수(徐瑾修), 이건영(李建永)에게 시집갔다. 상철은 종덕의 둘째 아들 홍수(紭壽)를 양자로 삼았는데, 홍수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을 지냈으나 일찍 죽었다. 그 아들 제일(齊一)이 지금 승중(承重)하였는데, 특명으로 상(喪)이 끝나기를 기다려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보임토록 하였다. 딸은 이희선(李羲先), 홍정규(洪正圭)에게 시집갔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초상 때에 임금께서 공이 이 일에 두루 밝은 것을 살피시고, 빈궁(殯宮) 마련부터 사당 건립에 이르기까지 일을 많이 공에게 위임했다. 공은 이미 피로가 쌓여 병든 상태였는데도 오히려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지내며 깊이 생각에 잠겨 실의에 빠진 모습이 바보와도 같았고, 때로는 말을 잊은 채 저절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로부터 다시는 풍악 소리를 듣지 않고, 후방(後房 소실)의 즐거움도 끊고 정사(亭榭 정자)의 놀이도 끊었으며, 비록 술잔만이 오가는 작은 잔치라도 집에서 베풀지 않았으니, 대개 남모르는 애통함이 마음에 있는 때문이었다.
임종할 때에 조카 종악(宗岳)의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내가 세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티끌만큼도 보답한 것이 없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고, 유서를 초하려다 하지 못해 입으로 불렀는데, 한마디도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공 같은 이는 나라의 충신이라 이를 만하니, 충희라는 시호를 얻음이 역시 합당하지 않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위의 있는 금성위여 / 獻獻錦城
화평옹주 배필 되어 / 作配和平
왕실에 공이 있었나니 / 功在王室
두 분 함께 아름답고 곧았도다 / 匹徽共貞
공(公)을 옛사람과 견주어도 / 公於古人
뉘가 더 위대하리 / 將誰與京
- 이하 원문 빠짐 -
어떤 이본에는 “공경스러운 금성위여, 나랏님의 사위 되어, 왕실에 공이 있었나니, 두 분 함께 아름답고 곧았도다. 천생배필 합장되었으니, 〔翼翼錦城 天家作甥 功在王室 匹徽共貞 天作隨山〕- 이하 원문 빠짐 - ”로 되어 있다.
[주C-001]삼종형(三從兄) …… 묘지명(墓誌銘) : 1790년(정조 14)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이 죽자 정조는 손수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겠노라고 하면서, 아울러 그의 묘지명을 연암이 짓도록 하교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2》
[주D-001]고굉폐부(股肱肺腑)의 신하 : 임금이 자신의 팔다리처럼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를 고굉지신(股肱之臣)이라 한다. 폐부의 신하란 간과 폐가 서로 붙어 있듯이 임금과 가장 친근한 관계에 있는 신하를 말한다.
[주D-002]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 《정조실록》 14년 3월 25일 조에 삼백여 자에 달하는 정조의 하교가 수록되어 있다.
[주D-003]장례는 …… 하였으며 : 예장(禮葬)에 1등급의 널감〔柩材〕을 사용하게 했다는 뜻이다.
[주D-004]예장(禮葬) : 대신이나 공신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예식을 갖추어 치러주는 장례를 말한다.
[주D-005]30만 전(錢) : 엽전 1냥이 10전(錢)으로, 엽전 3만 냥이다.
[주D-006]성복(成服)날이 …… 되었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권21에 정조가 지은 ‘금성도위 박명원의 성복일 치제문〔錦城都尉朴明源成服日致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주D-007]밀찬익호(密贊翊護)와 …… 글자였다 : ‘밀찬익호’는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은밀히 돕고 보호에 힘쓴 공로가 있다는 뜻이고, ‘건의천원(建議遷園)’은 장헌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 공로가 있다는 뜻이다.
[주D-008]순의대부(順義大夫) : 왕의 사위들에게 주는 종 2 품의 품계이다.
[주D-009]수록대부(綏祿大夫) : 왕의 사위들에게 주는 정 1 품의 품계이다.
[주D-010]금보(金寶)와 옥책(玉冊) : 금보는 죽은 임금이나 왕후의 존호(尊號)를 새긴 도장이고, 옥책은 왕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 그 덕을 기리는 글을 새긴 옥 조각을 엮어 매어 책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11]효창묘(孝昌墓) : 정조의 요절한 첫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소이다.
[주D-012]천성 : 원문은 ‘姿性’인데, ‘姿’ 자가 ‘資’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뜻은 비슷하다.
[주D-013]이현궁(梨峴宮) : 한양 동부 연화방(蓮華坊) 즉 지금의 종로구 인의동에 있던 광해군의 잠저(潛邸)인데, 이 부근은 속칭 배고개〔梨峴〕라고 불려 이현궁(梨峴宮)이라고 하였다. 영조도 세제(世弟) 시절에 한때 이 궁에 거주했다.
[주D-014]촌철(寸鐵) : 짧고 날카로운 무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는 짧은 말을 뜻한다.
[주D-015]10여 년 : 대본은 ‘數十年’인데 ‘十數年’의 잘못이다. 《연암집》 권1 ‘족형 도위공의 환갑에 축수하는 서문〔族兄都尉公周甲壽序〕’에 “공의 조카가 10여 년 동안 번갈아 이조와 병조의 판서로 있었으되”라고 하여 ‘十餘年’이라 되어 있다.
[주D-016]호정(湖亭) : 한강 삼포(三浦)에 있던 박명원의 별장 세심정(洗心亭)을 가리키는 듯하다. 《過庭錄 卷1》 삼포는 곧 삼개로 마포(麻浦)를 가리킨다. 《漢京識略 卷2 山川》
[주D-017]귀근인(貴近人) : 임금이 중히 여기고 친근하게 여기는 사람을 말한다.
[주D-018]행동 : 원문은 ‘聲臭’인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하늘이 하시는 일은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上天之載 無聲無臭〕” 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자취가 없어 하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19]세자에게 …… 귀주(貴主)가 : 원문은 ‘常黙審艱虞 公曁貴主’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世子之在艱虞 與貴主’로 되어 있다.
[주D-020]공이 …… 아뢰자 : 사도세자의 처음 장지인 영우원(永祐園)이 본래 협소하여 정조는 즉위 초부터 이장하고자 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박명원이 상소하여 이장해야 할 네 가지 문제점을 거론하므로, 비로소 이장을 결단하고 원래 양주군(楊州郡)의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게 되었다. 《正祖實錄 13年 7月 11日, 15日》
[주D-021]예전 장지 : 원문은 ‘舊園’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永祐園’으로 되어 있다.
[주D-022]나라 …… 피곤해져서 : 이 부분이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委以其事 方是時 公以疾病’으로 되어 있다. 시귀(蓍龜)는 시초(蓍草)를 이용한 주역(周易) 점(占)과 거북 껍질을 이용한 점(占)으로, 이 점괘에 따라 대사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자문(諮問)하는 덕망이 높은 인물을 시귀라 하기도 한다.
[주D-023]거의 …… 해였다 : 원문은 ‘幾絶粒食將數歲’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將’ 자가 ‘者’ 자로 되어 있다.
[주D-024]신속히 왕래하면서 : 원문은 ‘迅往遄反’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遄往迅返’으로 되어 있다.
[주D-025]지원(趾源)이 …… 못하였다 :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 1일부터 6일까지의 기사에 통원보(通遠堡)에서 폭우로 강물이 불어 며칠 지체되었던 사실이 언급되어 있고,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월 5일자 기사에 또 정사 박명원이 결단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사실이 회고되어 있다. 《연암집》 권4에 수록된 ‘통원보에서 비에 막히다〔滯雨通遠堡〕’는 그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시이다.
[주D-026]비단 …… 아니었다 : 원문은 ‘不特啣命一事有足觀公’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公’ 자가 ‘也’ 자로 되어 있다.
[주D-027]조정에 …… 만한데도 : 원문은 ‘可以正色廊廟’인데, 《서경》 필명(畢命)에 주 나라 강왕(康王)이 필공(畢公)에 대해, “엄숙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한다.〔正色率下〕”고 칭찬하였다.
[주D-028]이미 …… 제한되어 : 원문은 ‘旣局邦制’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旣局於邦制’로 되어 있다.
[주D-029]벼슬이 없는 선비 : 원문은 ‘素士’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寒士’로 되어 있다.
[주D-030]구마(廐馬) : 임금이 거둥할 때 쓰는 가마와 말을 맡아보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기르는 말을 가리킨다.
[주D-031]비답(批答) : 임금이 상소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可否)의 답변을 말한다.
[주D-032]액정서(掖庭署) :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왕이 쓰는 필기구, 대궐 안의 열쇠, 설비 등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주D-033]띠를 …… 상태 : 조복(朝服) 위에 띠를 걸쳐 놓지도 못한다는 말로,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논어》 향당(鄕黨)에 “병이 들었을 때에 임금이 병문안을 오면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누워서 조복을 몸에 걸치고 그 위에 띠를 걸쳐 놓았다.”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註)에, “병들어 누워 있어서 옷을 입고 띠를 맬 수가 없으며, 또 평상복 차림으로 임금을 뵐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원문은 ‘莫可以拖紳矣’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이 6자 대신에 ‘矣’로만 되어 있다.
[주D-034]찬(贊) : 한문 문체의 하나로서 인물을 칭송하는 글을 말한다. 서화의 옆에 적는 찬을 화찬(畫贊)이라 한다.
[주D-035]딸은 …… 시집갔다 : 원문은 ‘女張僎徐瑾修李建永’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女長適張僎 次適徐瑾修 次適李建永’으로 되어 있다.
[주D-036]승중(承重) : 장손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주D-037]문효세자(文孝世子) : 정조의 첫아들로, 다섯 살 때인 정조 10년(1786)에 병사하였다. 당시 연암이 박명원을 대신하여 지은 ‘문효세자 진향문(進香文)’이 《연암집》 권9에 수록되어 있다.
[주D-038]나라의 충신 : 원문은 ‘國之藎臣’인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는 ‘王之藎臣’으로 되어 있다.
[주D-039]천생배필 합장되었으니 : 천생배필을 ‘천작지합(天作之合)’이라 한다. 박명원은 화평옹주의 묘에 합장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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