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222583052878

 

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반선시말(班禪始末) ...

blog.naver.com

 

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반선시말(班禪始末)

 

1. 반선시말(班禪始末)

2. 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3 중존평어(仲存評語)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는 서번(西番) 오사장(烏斯藏 서장 지방의 일부)의 대보법왕(大寶法王)입니다. 서번은 사천(四川)운남(雲南)의 지경 밖에 있고, 오사장은 대개 청해(靑海) 서쪽에 있는데, 옛 경()에는 당() 때의 토번(吐蕃) 옛 땅으로 황중(湟中)에서 5천여 리 떨어져 있다 합니다. 혹은 반선을 장리불(藏理佛)이라고도 하는데, 소위 삼장(三藏)이 바로 그 땅입니다. 반선액이덕니는 서번 말로는 광명(光明)신지(神智)와 같은 말인데, 법승(法僧)들이 말하기를, ‘그의 전신(前身)은 파사팔(巴思八)이라 하여 그 말에 허탄하고 이상한 것이 많으나, 도술(道術)이 고명해서 때로는 징험(徵驗)이 있다고도 합니다. 대개 파사팔이란, 토파(土波)의 계집이 새벽에 나가서 물을 긷다가 웬 수건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찼더니, 얼마 있다가 점점 기름으로 엉키며 이상한 향기가 나고, 먹으면 맛이 좋으면서 곧 사내의 생각이 나더니 무엇이 감촉되고 파사팔을 낳았는데, 그는 나면서부터 신성했다 합니다. 원 세조(元世祖)가 사맥에 있을 때 그가 어려서부터 능히 능가경(楞伽經 불경의 일종) 등을 1만 권이나 왼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맞아 오니 과연 지혜가 있고 명랑하며, 전신이 향기롭고 걸음걸이는 천신 같으며, 목소리는 율려(律呂)에 맞는지라,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여래를 본 것같이 기뻐했으며, 당시 요()()와 같은 모든 어진 사람들도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했습니다. 능히 소리를 맞춰 몽고의 새 글자를 만들어 천하에 반포하매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호를 하사했으니, 이것은 불교의 존호요, 국토를 가진 왕의 작위는 아니었으나, 대개 법왕의 이름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죽자 황천지하일인지상선문대성지덕진지대원제사(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大元帝師)라는 호를 하사했습니다. 그 뒤에 청산압마(淸繖壓魔)라는 놀이가 있어, 군사 수만 명을 내어 비단 바지와 수놓은 도포를 입고, 수레나 말에는 깃대를 달고 보물로 일산을 만드는 등 모두 금주(金珠)와 보옥과 비단으로 장식하여 황성을 에워싸고, 사문(四門)을 지나고 나서 다시 서번과 한()의 음악으로 산()을 맞이하여 궁중으로 들이는데 이것을 파사팔교(巴思八敎)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는 본래의 교지와는 크게 틀려, 기괴하고 요란해서 귀신의 도까지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황제와 후비와 공주들이 모두 소식(素食)을 해 가면서 산을 맞아서, 막배(膜拜)를 하고 억조 창생들의 복을 비는데, 이것을 소위 타사가아(打斯哥兒)가 파사팔(巴思八)을 만나는 놀잇날이라 하여, 심지어는 집을 파산하고 재산을 기울여, 만 리 길을 와서 보는 자도 있었다 합니다. ()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이로써 일을 삼았으니, 그 교를 숭봉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시에 담파(澹巴)라는 중이 있었고 그 뒤에 가린진(加璘眞)이란 중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번 중으로서 비밀한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파사팔교와는 달라서 능히 딴 사람의 마음을 알고 황제의 마음속까지 알아 맞힌다고 하여, 황제가 그들을 모두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시 남에게 태어난다는 말이 아직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초년에 황제가 서번 여러 나라에 널리 유시를 내리자 이에 오사장(烏斯藏)이 먼저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했는데, 그 왕은 난파가장복(蘭巴珈藏卜)이라는 중으로 오히려 황제의 스승이라고 자칭했습니다. 이때 여러 번지에 있는 황제의 스승과 대보법왕은 이미 자기 나라를 가진 칭호로 되어, ()이나 당()의 선우(單于)극한(可汗)의 칭호와 같았습니다. 황제는 제사(帝師)란 명칭을 모두 고쳐서 국사라 일컫고, 옥으로 된 도장을 하사하는데 황제가 친히 옥의 품질을 보살펴서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었고, 그 글에는 출천행지선문대성(出天行地宣文大聖) 등의 칭호를 썼던 것이나 역사가들이 이것을 생략했었습니다. 이 인()은 옥새와 같이 쌍룡이 얽힌 모습을 그렸는데, 그 뒤로 서번 여러 나라를 법왕이니 제사(帝師)니 하고 불러, 더욱 사신을 보내어 그 이름이 천자의 뜰에까지 들리게 된 자가 무려 수십 국으로서 이들을 모두 국사로 봉하고, 혹 대국사를 더해서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성조(成祖) 때에는 부마를 보내어, 서번의 중 탑립마(嗒立麻)를 맞고자 법가(法駕)를 하사했는데, 반은 천자의 쓰는 것이나 다름없이 참람되었고, 금은 보화와 비단을 하사한 것이 이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고제(高帝)와 고후(高后)를 위하여 절을 세워 복을 빌었는데, 이때에 경운(卿雲)과 감로(甘露)의 상서와 조수화과(花果)의 길조가 나타나니, 성조가 크게 기뻐하여 탑립마를 만행구족십방최승등여래대보법왕(萬行俱足十方最勝等如來大寶法王)에 봉하고, 금으로 짜고 구슬로 꿴 가사를 하사했으며, 그 막리들을 모두 대국사에 봉했습니다. 그가 가진 불가의 비법은 신통하여, 환술과 같은 것이 많아서 능히 조그마한 귀신을 시켜, 경각 사이에 만 리 밖에 있는 때 아닌 얻기 어려운 물건을 가져 오는 등, 그의 술법은 현란하고 괴망해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서장 각지에 대승(大乘)이니 대자(大慈)니 하는 법왕의 칭호를 얻은 자도 있고, 또 천교(闡敎)천화(闡化)라는 다섯 교왕이 있어서, 이 다섯 교왕의 조공 바치는 사신들이 서령(西寧)조황(洮潢) 사이를 쉴새없이 다니니 중국도 또한 일찍부터 그들의 번거로운 비용을 괴롭게 여겼으나, 실상은 넉넉한 대접으로 그들을 어리석게 만들었고, 넓게 왕호를 봉하여 제각기 조정에 조공하게 함으로써 그 세력을 남모르게 쪼개었지만, 서번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더러 또한 중국이 주는 상금을 탐내어 조공하는 것을 오히려 이로운 일로 여겼었습니다. 정덕(正德) 연간에는 중관(中官)을 보내어 오사장 활불을 맞아오는데 황금으로 공물을 하고, 황제황후와 왕비와 공주들은 서로 다투어 패물이나 노리개머리꽂이 같은 보물을 내어 그를 맞는 비용으로 쓴 것이 몇 만 금으로 셀 정도였다 합니다. 그들은 온 지 10년 만에 돌아가기로 했었는데, 돌아갈 기한이 이미 다 되자 활불은 피해 숨어서 찾아 볼 수도 없었고, 가졌던 보옥은 다 없어져 빈손으로 도망했다 합니다. 만력(萬曆) 때에는 또 신승(神僧) 쇄란견조(鎖蘭堅錯)라는 자가 있었는데, 역시 중국에 통하여 활불이라 일컬었다 합니다. 이것이 그 서번 이야기의 대략입니다.”

한림서길사(翰林庶吉士)왕성(王晟)이 일찍이 나를 위하여 그 시말(始末)을 이같이 말했었다. 왕성의 집은 영하(寧夏)로 본래는 채씨(蔡氏)의 아들인데, 자기 말로는 그 숙부가 차()를 팔기 위하여 자주 국경 밖으로 왕래하면서 서번 지방 사정을 익혔다고 한다. 또 왕씨는 대대로 서방(西方)의 관리로 있었는데, 왕성은 어려서부터 자못 오사장의 시말에 밝았었다. 왕성은 금년 초에 평생 처음으로 북경에 들어와 4월 회시(會試)에 몇 째 안 되게 합격했고, 전시(殿試)에 열셋째로 붙었다. 경서와 사기를 넓게 알고 기억하는 정신이 남에게 뛰어난 사람으로 내가 우연히 창중(敞中)에서 만나 그의 뜻을 살펴보니, 자못 자기도 기이한 인연으로 아는 것 같았다. 또 그는 처음 북경에 와서 교유하는 데도 넓지 못하고 기휘(忌諱)할 것도 알지 못하는 터이다. 그 이튿날 천선묘(天仙廟)로 나를 찾아와서 서번 중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는 필담(筆談)도 물 흐르듯 하여 박식함과 문아한 것을 자랑하는 듯하나, 그의 말을 역사와 전기에 고증해 보면 실지 기록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말하기를,

 

파사팔을 비롯하여 중국에 들어온 자 중에 혹 어진 자도 있고 혹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는데, 활불이란 칭호는 없었고 활불의 칭호는 명()의 중년 때부터 비롯하여, 비록 그를 승왕(僧王)이라 불렀지만 모두 처자를 가지고 있어 그 아들로 대를 잇게 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아내는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봉함을 받으려고 요청한 일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하는 중국의 예우가 비록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음에도 특히 이것만을 아니한 것은 대개 그 왕들이 모두 중인 때문일 것입니다. 홀로 오사장만은 법승들이 서로 이어 스스로 왕이 되어 명()의 중년으로부터 그 후 오래도록 중국으로부터 봉호를 받는 번거로움이 없이, 항상 대법왕(大法王)소법왕(小法王)이 있어 대법왕이 죽을 때는 소법왕에게, ‘아무데 아무개의 집에 아이가 날 때 이상한 향기가 날 것이니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부탁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법왕이 이미 죽고 나서 아무데서 난다면 아이가 과연 나게 되고, 아이의 살에서 과연 향기가 나는가를 알아보고 나서 즉시 의장을 꾸미되, 보배로운 일산과 구슬 늘인 양산과, 옥 가마금 수레를 갖추어 가지고 가서 그 아이를 수건에 싸서 맞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애당초 파사팔이 향기로운 수건에 감촉되어 난 때문이라 했습니다. 드디어 이를 길러서 소법왕으로 삼고 전에 있던 소법왕을 대법왕으로 삼는데, 지금의 반선인 대보법왕은 이미 14대째 환생한 법왕으로서 원()() 사이에 있었던 신승들은 모두 그의 전신이라 합니다. 그는 도중에 원의 시절에 타사가아(打斯哥兒)가 파사팔의 교를 맞을 때의 고사(故事)를 역력히 이야기하면서, 이번에 자기를 맞이하는 예식이 간소한 의장과 악기를 써서 위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운휘사(雲麾使)와 난의십이사(鑾儀十二司)에 속한 의장을 모두 내게 하고, 태상시(太常寺)의 법악(法樂)과 청진악(淸眞樂)과 흑룡강(黑龍江)의 고취(鼓吹)와 성경(盛京)의 고취 등의 모든 음악으로서 교외에 나가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태상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자세히 모릅니다.”

한다. 나는 또,

 

청진악은 어떤 것이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회자(回子)들이 뜯는 70줄 대슬(大瑟)입니다.”

한다. 나는,

 

흑룡강 고취란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그는,

 

“12구멍이 뚫린 용적(龍笛)으로 랄와가등(剌窩哥登)이라 하는데, 그 기계는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한다. 나는,

 

운휘사(雲麾使)와 난의(鑾儀)란 어떤 것입니까.”

하였더니, 그는,

 

노마(路馬)에 견주면 어림없습니다.”

한다. 이때 주 거인(周擧人)이 옆에 있다가 훈상(訓象)훈마(訓馬)정편(靜鞭)골타(骨朶)종천(椶薦)비두(篦頭)선수(扇手)반검(班劍) 등을 열서(列書)하는데 그 종목이 수없이 많았다. 그가 이내 먹으로 지워 버려서 알 수 없게 되었다.

왕 한림(王翰林)의 자는 효정(曉亭)이다. 효정은 말하기를,

 

반선은 도중에 내각(內閣)에 대해서 말하기를, ‘조왕(趙王)이 보운전(寶雲殿) 동편 마루에서 나를 위하여 금강경(金剛經)을 쓰던 중, 겨우 29자를 쓰자 때마침 가경문(嘉慶門)에 불이 붙어 조왕은 놀라서 정신이 산란하여 능히 다시 쓰지 못하였다고 하나 천하의 보배가 되었다 하며, 지금 그 글씨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것을 학사(學士)가 전했다.’ 하는데 조왕이라 한 것은 조맹부(趙孟頫)를 말하는 것입니다. 패엽(貝葉) 29자를 옻으로 썼는데, 세상에서는 무슨 까닭에 29자만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처음에 성안사(聖安寺) 부처 뱃속에 감춰 두었던 것을 명() 천계(天啓) 연간에 강남 지방의 큰 장사치 ()’씨 성을 가진 자가 부처 몸뚱이를 고쳐 새기다가 이 글씨를 얻어서 몰래 갖고 갔더라고 합니다. 본조(本朝) 강희 연간에 황제가 남방으로 순행하는데 이과(李果)라는 늙은 선비가 이 글씨를 갖다가 바치매, 드디어 이것이 비부(秘府)에 간직되고 무근전(懋勤殿)에는 황제가 이 글씨를 모사(摹寫)한 것까지 간직해 두었습니다. 창정(滄亭)에 이르자 반선이 글씨를 대하게 되어, 이에 탑본(搨本)을 보였더니 아니라 하면서 글씨의 힘이 고르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패엽에 쓴 진적(眞蹟)을 보였더니 기뻐하면서 이 글씨야말로 진짜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효정은 또 말하기를,

 

영락천자(永樂天子)가 나와 함께 영곡사(靈谷寺)에서 분향을 하는데, 천자의 수염이 아름다워서 그 수염을 쥐어 품속으로 넣다가 갓끈을 건드려 구슬 두 개가 떨어져 없어지니, 천자가 노하여 태감(太監)위방정(魏方庭)을 꾸짖었는데, 이때 유리 국사(琉璃國師)가 흰 코끼리를 타고 따라 와서 육환장(六環杖)으로 절 문지기를 치니 그 문지기가 무서워서 우는데 국사가 손바닥으로 그 눈물을 받자 구슬 두 개로 되었고, 태감도 이로써 꾸지람을 면했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안 것은 유걸(劉傑) 오운비기(五雲秘記)에 실린 말을 읽은 것인데, 역대의 좋은 일, 궂은 일과, 제왕들의 수요를 모두 점괘(占卦)처럼 적어둔 것으로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어, 민간에서는 얻을 수 없고 오직 비부에 간직해 둔 것이 있을 뿐인데, 반선은 어디에서 이것을 알았을까 했습니다. 반선이 또 말하기를, 정덕 천자(正德天子)를 나의 표방(豹房)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정덕 시대에는 소위 활불이 일찍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음은 모두 증거가 있고, 옛 사람들의 전기에도 그렇게 말했으나 수백 년 동안 내력이 끊어졌으니 모두가 황홀한 일입니다. 이로써 반선을 파사팔의 후신이니, 혹은 탑립마이니, 혹은 전대에 있던 활불들도 모두 반선의 윤회로 환생했다고 하는 것은 그 진위를 단정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가 나를 위해 말하기를,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三危 나라 이름) 땅으로 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이 나라는 셋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위()라 하여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오사장이요, 하나는 장()이라 하여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이름도 역시 장이요, 하나는 객목(喀木)이라 하여 서쪽으로 더 나가 있는 땅으로서 이곳에는 대라마(大喇嘛)는 없고 옛날의 강국(康國)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땅들은 사천(四川)마호(馬湖)의 서쪽에 있어 남으로는 운남(雲南)으로 통하고 동북으로는 감숙(甘肅)에 통하여 당의 원장 법사(元裝法師)가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원장이 갈 적에는 이 땅에 사람이 없었고 큰 물을 건너 갔었는데, 그가 돌아올 적에는 물은 말라버리고 촌락이 생겼으며, 당의 중엽에는 갑자기 토번(吐蕃)이란 큰 나라가 생겨서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를 숭상했는지는 알 수 없고, 원의 초년에 불교가 북쪽으로 흘러 들어 번승(番僧)이 생겼는데, 그를 파사파(巴斯巴) ()는 팔()과 음이 같으니 역시 파사팔(巴思八)이다. 라고 불렀으나 이것도 별호요, 그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큰 신통력(神通力)을 갖추어 원의 초년에 제사(帝師)로써 대보법왕을 봉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조카로 대를 잇게 했습니다. 명의 초년에 여러 법왕들이 중국에 왔을 때 성조(成祖)는 당의 예법을 따서 모두 우대하였는데, 그 중들도 역시 환술(幻術)을 할 줄 알아서 더욱 높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라마는 대체로 명의 중엽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중에도 이상한 중이 있었으니 종객파(宗喀巴)라고 하는데, 역시 먼 곳으로부터 서장으로 들어온 자로서 이상한 술법이 있어, 한 번 보면 사람마다 놀라 자빠졌다고 합니다. 그는 또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말도 있었는데 모든 법왕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제자의 반열에 들기를 달게 여겼습니다. 종객파는 두 제자에게 그 대를 전했는데, 첫째는 달뢰라마(達賴喇嘛)이고, 둘째는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라고 했습니다. 달뢰라마는 이제 7대를 거듭 환생했고, 반선라마는 4대째 태어났다고 합니다. 본조의 천총(天聰 청 태종의 연호) 시절에 반선은 동방에 성인이 난 것을 알고 큰 사막을 넘어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해왔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들을 보내서 조공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강희 때에 인조(仁祖)는 그를 중국으로 입조(入朝)시키고자 하였으나 일찍이 오지 못 했으며, 지난해에 만수절(萬壽節) 그는 스스로 주를 내기를 곧 금년이라 하였다. (스스로라는 것은 왕효정을 일컬었다.) 이 오면 입근(入覲)할 것을 청했으므로 우대해 주었으니, 대체로 이교에서 이름은 중이라 했지만, 실상인즉 도교(道敎)였습니다. 정신이나 술법이나 주문(呪文) 같은 것이 도가(道家)와 비슷하고, 그 글의 넓고 깊은 것과 과장해 말하는 것이 또한 도가에 비하여 지나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외에 또 호도(胡圖)와 극도(克圖)란 자가 있으니, 모두 그의 제자로서 역시 56대 이상을 환생했다 합니다. 국왕의 스승으로서 신통력은 없고, 다만 선리(禪理)에 대한 것을 잘 말했다 합니다.”

했다. 경순미는 또 말하기를,

 

중의 이름을 가졌어도 실상은 도교라 하는 말은 곧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분명하지 못하기에 나는,

 

왕성(王晟)의 말과는 많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왕성의 말에는, 명의 중엽에 특이한 중이 있어 종객파라고 했는데, 그 맏제자는 달뢰라마요, 다음은 반선액이덕니라 하고, 그는 또 말하기를, ‘천총 때에 반선이 큰 사막을 넘어 조공하러 왔다.’ 하였으니, 천총은 명의 중엽으로부터 1백여 년이나 되었고, 지금까지는 또 1백여 년이 되니, 한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인가요, 아니면 4대째 환생해서 한 이름을 답습한 것일까요. 그리고 소위 호도니 극도니 하는 자는 또 누구의 제자입니까.”

하고 묻고는 나는 또,

 

국왕의 스승으로서 선리(禪理)를 잘 말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하고 물었으나, 순미는 모두 대답하지 않고 마침내 딴 이야기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장성(長城) 아래에서 어느 손 하나를 만나 서번 일을 물었더니, 손은 대답하기를,

 

서번은 옛날 토번(吐蕃) 땅으로, 장교(藏敎)를 숭상하고 있으니 역시 황교(黃敎)라고도 부르는데, 본래 그 나라의 풍속이 그러한 것으로, 중이란 명칭은 일부러 붙인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중이란 것은 실상 불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한다. 이제 중국의 불교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비록 조정의 귀관(貴官)들이라도 도리어 나에게 반선의 모습을 물어 보았으니, 대개 친왕(親王)이나 부마나 또는 조선 사신이 아니고서는 얻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경(燕京)으로 돌아오자 날마다 유황포(兪黃圃)진입재(陳立齋) 등 모든 사람들과 놀았는데, 그들은 일찍이 한 마디도 반선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혹시 물어보면 번번이 말하기를,

 

그건, 명 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고, ,

 

우리들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여 마침내 한 마디도 즐겨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과 함께 단가루(段家樓)에서 술을 마시다가 고 태사가 반선의 말을 바야흐로 꺼내려 하는데, 그 자리에 풍생(馮生 풍병건(馮秉健))이란 자가 있다가 눈짓을 하여 그치니, 이것을 나는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 오래 있다가 들으니, 산서(山西)에 사는 포의(布衣) 하나가 일곱 가지 조목으로 상소했는데, 그 중에 하나로서 반선의 이야기를 크게 말했다가 황제가 크게 노하여, ‘살을 벗겨 죽이라.’ 했다 한다. 우리나라 역부(驛夫)들이 이것을 선무문(宣武門) 밖에서 많이 보았다 한다. 이로부터는 감히 다시 반선의 말을 물어보지 못했으니 비록 유황포진입재처럼 서로 친한 사이에도 그러했고, 더구나 산서 포의 선비는 성명도 알아볼 수 없었다. 혹은 상소를 올린 자는 거인(擧人) 장자여(張自如)라고 한다. 서번의 시말은 대체로 왕효정의 말만큼 자세한 것이 없는데, 이에 술을 뿌려서 불을 끄고, 물결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난파(欒巴)나 달마(達摩)의 지난 사적이므로 여기에 쓰지 않는다.

 

 

[D-001]황중(湟中) : 감숙 지방으로 흘러드는 서녕하(西寧河)의 좌우 서강족(西羌族)이 사는 곳.

[D-002]토파(土波) : 땅 이름인 듯하나 미상.

[D-003]() : () 때 사씨(史氏) 중에 명인이 많았으나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D-004]청산압마(淸繖壓魔) : 신을 맞아서 마귀를 누른다는 말.

[D-005]정덕(正德) :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D-006]이것이 …… 대략입니다 : “반선액이덕니 …… 대략입니다 이 단락은 왕성이 연암에게 일러준 말이다.

[D-007]노마(路馬) : ()는 큰 수레요, ()는 승마(乘馬). 시경(詩經) 채숙장(采菽章)에 나오는 말.

[D-008]훈상 …… 반검(班劍) : 이 여덟 가지는 황제가 거둥할 때에 동원하는 기물의 명칭.

[D-009]무근전(懋勤殿) : 자금성 대궐 안에 있는 전각. 그림과 글씨를 진열해 두는 곳.

[D-010] …… 보냈다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 한 구절.

[D-011]원장 법사(元裝法師) :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중. 곧 현장 법사(玄裝法師). ()은 청의 어휘를 피한 것이요, ()은 장().

[D-012]난파(欒巴) : 후한 때의 도가(道家). 자는 숙원(叔元).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적이 말하건대, 옛날의 제왕들은 자기가 능히 배운 뒤에 그 사람을 신하로 삼았으므로 더욱 성스러웠고, 천자로써 필부(匹夫)를 벗 삼되 자기의 높은 것이 깎이지 않으므로 더욱 크게 되었으나, 후세에는 이러한 도가 없어졌음에 따라, 다만 호승(胡僧)이라든가 방술(方術)이라든가 비뚤어진 도라든가 하는 이단의 유에 대해서는 자기 몸을 낮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이제 그 일을 목격했거니와, 반선이 과연 어진 자라면 황금집은 지금 황제로서도 능히 거처하지 못하는 터인데, 저 반선이 무엇이기에 감히 안연(晏然)히 점령하고 있었을까. 혹은 말하기를,

 

명 이래로, ()의 토번 난리를 경계하여 반선이 오기만 하면 문득 봉하여 그 세력을 쪼개어 놓고, 그들을 대우하기를 신하의 예로 아니 했으니, 역시 유독 지금에 와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리라. 당시에는 천하가 처음으로 정해진 때로서, 뜻이 일찍이 이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에서 그의 제사(帝師)에게 황천지하일인지상선문대성지덕진지(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라고 호를 주었는데, 일인(一人)이란 천자를 가리킨 말이니, 천자는 만방(萬邦)에서 함께 임금으로 받드는 터에 천하에 어찌 다시 천자보다 높은 자가 있단 말인가. ‘선문대성지덕진지는 공자를 가리킨 말이니, 백성이 생긴 이래로 어찌 다시 공자보다 어진 자가 있단 말인가. 원 세조(元世祖)는 사막에서 일어났으니 족히 괴이할 것도 없겠지만, 황명(皇明) 초년에 맨 먼저 이승을 찾아 귀족들의 자질로 하여금 스승으로 섬기게 하고, 널리 서번의 중을 불러서 높이 대접하면서도, 스스로 중국을 낮추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지존(至尊)을 깎고 선성(先聖)을 욕뵈며, 참다운 스승을 억눌러 나라를 세우는 시초부터 이것으로 자제들을 가르쳤으니, 또 무슨 더러운 짓인가. 대저, 그 술법이란 능히 오래 살고 오래 본다는 것으로 이것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데, 이것으로 세속 임금들의 마음과 귀를 흐리고 말았을 뿐이다. 혹은,

 

()()의 제왕들은 자기 몸을 버리고 불가(佛家)의 종이 되었으니, 중이 천자보다 높아진 지가 오래긴 했으나, 다만 황금 궁전을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네 그려.”

라고 말하는 자 있으리라.

 

 

[C-001]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따라 추록하였다.

[D-001]백성 …… 있단 말인가 :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에 나오는 구절.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가 말하기를,

 

이는 대저 모두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글이나, 다음날 일대의 역사를 쓰려면 부득이 반선을 위해서 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지나가서 이 글만큼도 자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외국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 역사 쓰는 사람의 참고가 되기에는 인연이 없으니, 이것은 가석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C-001]중존평어(仲存評語) : 여러 본에는 이 소제가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