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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동란섭필(銅蘭涉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동란섭필(銅蘭涉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동란섭필(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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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동란섭필(銅蘭涉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동란섭필(銅蘭涉筆)

1. 동란섭필서(銅蘭涉筆序)

2.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섭필서(銅蘭涉筆序)

내가 유황포(兪黃圃) 세기(世琦)를 찾았더니, 책상 위에 무늬 있는 돌로 만든 연병(硯屛)이 놓였고, 연병 옆에는 난() 한 포기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구리를 부어서 만든 것인데, 봉 같은 눈이 바람을 맞으며 자줏빛 이삭이 이슬에 젖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게 만들었다. 나는 며칠 동안 빌려다가 내가 거처하는 방 동쪽 벽 밑에 놓고, 편액(扁額) 동란재(銅蘭齋)’라 하였다.

 

 

[C-001]동란섭필서(銅蘭涉筆序) : 모든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란섭필(銅蘭涉筆)

 

 

건륭(乾隆) 41년 병신(1776), 유구(琉球) 사신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돌아가기를 청했다. 유구 정사(正使) 이목관(耳目官) 상숭유(尙崇猷)와 도통사(都通事) 모경창(毛景昌)이 사정에 따라 빨리 돌아갈 것을 승낙해 달라고 청한 글에,

 

숭유 등은 왕명을 받들고 건륭 39(1774)에 조공을 하고자 복건(福建) 무창(撫昌)으로부터 병패(兵牌)를 발급 받고, 연로(沿路)에서 일행의 호송(護送)을 받아 작년 12 1일에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은혜로운 분부를 내려 반열에 따라 행례하게 되고, 조하(朝賀)할 때와 원조(元朝)와 명절에는 작은 나라의 말직 관리로서 천안(天顔)을 가까이서 뵈었고, 게다가 상급(賞給)과 식사까지 돌봐 주시어, 숭유 등은 감격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공무를 이미 끝내고 한가히 거처하고 있습니다. 유구는 땅이 해외에 속하여 왕래할 때는 오로지 바람만 믿고 있으니, 이때에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귀국할 시기에 알맞기 때문입니다. 숭유 등이 북경에 올 때는 바로 한겨울이라, 강물이 얼어서 부득이 왕가영(王家營)을 거쳐 바로 육로로 왔습니다. 지금 돌아간다면 때가 바로 중춘(仲春)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땅은 따뜻하여 기정(起程)하기에 알맞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간절히 청하오니, 대인(大人)은 황상의 지극한 뜻을 받들고 멀리서 온 자의 사정을 보살펴, 전례에 비추어 육로로 제령(濟寧 산동성에 있다)까지 가서 배를 타고 돌아가도록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치로 하면 응당 미리 대인께 글로 밝혀야 될 일이오나, 빨리 칙서와 병부(兵部)의 문서를 2월 초순 안으로 내리도록 주청해 주시면, 숭유 등은 소식을 듣는 대로 출발하겠사온 바, 실로 이 은혜는 천추에 잊지 못할 것입니다. 건륭 41 1 24일에 갖추어 올립니다.”

하였는데, 그 서술이 솔직하고 말이 간곡하였다. 이것은 옛 당보(唐報 관보의 일종)에 실린 것인데, 이번에 우리나라 사신이 몇 번 올린 글도 응당 당보에 실려서 천하에 유전(流傳)될 것이다.

유구국이 조공을 하는 규례는 유황(硫黃) 1만 근, 적동(赤銅) 1천 근, 석랍(錫鑞) 3천 근이라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이르기를,

 

() 때의 곽리자고(霍里子高)는 조선 사람이다.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젓다 보니, 한 백수(白首) 광부(狂夫)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찬 채 물을 건너려 하매, 그 아내가 말렸으나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는 공후(箜篌)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임은 가람 건너지 마옵소서 하였으나 / 公無渡河

임은 기어이 가람 건너시다가 / 公終渡河

임은 빠져 숨졌으니 / 公淹而死

임이시여 그 어찌할꼬 / 當奈公何

그 소리가 몹시 처절하였는데, 곡조가 끝나자 역시 물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는 집에 돌아와 노랫소리를 옮겨서 그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이야기했더니, 여옥은 매우 슬퍼하면서 공후를 이끌어 그 노래를 본떠서 불렀으니, 이것을 공후인(箜篌引)’이라 한다.”

하였다. 내가 열하에서 태학(太學)에 있을 때 악기를 구경했으나, 소위 공후라는 것은 보지 못했고, 여러 번 사람을 시켜 북경 유리창(琉璃廠)에 가서 보게 하였으나, 이 악기를 얻어 보지 못하여 그 모양을 알지 못하였다.

천비(天妃)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황하(黃河)의 귀신이라 한다. 이제 청()에서 칙령으로 천후(天后)로 봉하였다는 바, 회회(回回) 사람들이 이 교에 많이 들었다고 한다. 천비라는 귀신의 열두 글자의 존호(尊號)는 청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 도포와 갓과 띠는 중국의 중옷과 흡사하다. 그들이 여름에 쓰는 갓을, 혹은 등()으로 만들고, 혹은 종려(棕櫚)로 만들기도 한다. 도포는 특히, 깃이 모가 난 것이 좀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도포는 모두 검정 공단이거나 문사(紋紗)를 쓰고, 가난한 자는 오히려 수화주(秀花紬)나 야견사(野繭紗)로 도포를 만들어 입는다. 나는 변의(卞醫) 관해(觀海)와 더불어 옥전(玉田)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수십 명이 둘러서서 우리들이 입은 베도포 만든 제도를 자세히 구경하다가, 매우 의아하게 여기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저 중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니, 한 사람이 희롱으로 대답하여,

 

사위국(舍衛國) 급고원(給孤園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곳)으로부터 왔겠지.”

한다. 우리들이 조선 사람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도포와 갓을 보고서 걸승(乞僧)들과 비슷하다고 조롱하는 것이다. 대체로 중국의 여자와 승려(僧侶)와 도류(道流)들은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의관은 모두 신라의 옛 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았고, 신라는 처음에는 중국 제도를 본뜬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므로, 민간에서는 중국의 중옷을 많이 본떠서 1천여 년을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변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중국의 승려가 우리의 나라 의관을 본떴다고 말했으니, 어찌 그렇겠는가.

중의 갓이, 등나무 실로 짠 것은 그 빛이 우리나라 초립(草笠)과 같고, 종려나무 실로 짠 것은 우리나라 주립(朱笠)과 같다. 등나무 갓에는 종려나무 실로 무늬를 놓고, 종려나무 갓에는 등나무 실로 무늬를 놓는다. 몽고 사람들도 역시 여름철에 갓을 쓰는데, 가죽으로 만들어 도금(鍍金)을 한 위에 구름 무늬를 그린 것이 많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겨울에도 갓을 쓰고 눈 속에도 부채를 들어, 타국의 치소(嗤笑)를 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향시(鄕試 지방고시) 규정은 첫 번째 사서(四書)로 글짓는 것 세 편과 성리론(性理論) 한 편을 일주야에 마치고, 두 번째로 경문(經文) 네 편과 배율(排律) 한 편을 하루 동안에 마치고, 세 번째로 책() 다섯 편을 역시 일주야에 마치는데, 모두 천여 자씩 된다. 회시(會試) 규정도 역시 향시와 같고, 전시(殿試)는 단번에 책() 한 편을 써서 역시 일주야에 마치는데, 반드시 글은 만여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이 격식에 하나도 틀리지 않아야 한림(翰林)에 들어갈 수 있고 전시 뒤에는 또 조고시(朝考試)가 있어 조( 황제의 지시문)( 황제의 교서)( 논문)() 등을 시험보이는데, 시간은 하루로 계산하여 마친다. 향시나 회시에서, 다섯 편 책() 중 세 조()는 옛날 역사에서 글제를 내고, 두 조는 시무(時務)에서 제목을 낸다. 전시는 시무뿐이요, 한 번 향시에 합격하면 이내 거인(擧人)이 되고, 회시 때마다 직접 응시할 수 있다. 비록 회시에 합격을 못하더라도, 10여 년 뒤에는 고을 한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이탁오(李卓吾 ()의 사상문학가 이지(李贄). 탁오는 자())는 머리가 가려워서 공공연하게 머리를 깎았더니, 중국 사람들은 또한 그를 흉성(凶性)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대체로 중국 사람들이 머리를 깎을 징조라고 할 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의 머리 깎는 풍속은 금원 시절에는 없던 풍속이니, 만일 중국이 낳은 진주(眞主) 명 태조(明太祖) 같은 이가 있다면, 건곤(乾坤)을 맑게 숙청할 것인데, 우민(愚民)들이 이런 습속에 젖은 지도 이미 1백여 년이 지나고 보니, 또한 머리를 묶고 모자를 쓰자면 도리어 가렵고 불편하다고 할 자가 없지 않았다.

내가 중국에 들어오는 연로(沿路) 2천여 리 사이에, 때는 바야흐로 여름과 가을의 중간이라, 지독한 더위로 낮에는 언제나 네댓 번씩 말에서 내려 인가에 들어가 쉬어 가곤 했다. 두 길이나 되는 파초(芭蕉), 태호석(太湖石 태호산(太湖産)의 괴석(怪石))이며, 도미(荼蘼 꽃이름)를 올린 시렁이며, 반죽(斑竹)으로 두른 난간들을 왕왕 보았고, 섬돌을 덮은 푸른 대와 주렴에 가득 찬 푸른 오동나무를 도처에서 많이 보았다.

고려 때는 송의 장삿배들이 해마다 자주 예성강(禮成江)에 닿았으며, 백화(百貨)가 몰려들었다. 고려왕은 예절을 차려서 대우했으므로, 당시에 서적들은 훌륭히 갖추어졌고, 중국의 기물(器物)로서 안 들어온 것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뱃길로 중국 남방과 통상을 하지 못하므로 문헌에는 더구나 캄캄하며, 삼왕(三王)의 일을 몰랐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강남(江南)과 통하므로, ()의 말년에 고기(古器)와 서화와 서적과 약료(藥料)가 장기(長崎) 지방에 폭주(輻輳)하여, 지금의 겸가당(蒹葭堂) 주인 목씨(木氏) 홍공(弘恭)의 자는 세숙(世肅)인데, 3만 권의 책을 가지고 중국의 명사와도 많은 교제가 있다고 한다.

반선(班禪)이 거처하는 자리는, 앞은 평상이요 뒤는 거울이며, 왼편에는 종을 달았고 오른편에는 옥을 걸었으며, 위에는 물을 소반에 떠 놓았고 아래에는 보도(寶刀)를 걸었는데, 진종일 분향하고 있다 하니 아연히 한 번 웃을 일이다.

지금의 호부 상서(戶部尙書) 화신(和珅)은 황제의 총신(寵臣)으로, 구문제독(九門提督)을 겸해서 귀명(貴名)이 조정에 떨치고 있다. 황제의 탄일(誕日)에 내가 산장(山莊) 문밖에 이르렀더니, 공헌(貢獻)하는 물건들이 문 앞까지 폭주하고 있는데, 모두 누른 보를 덮은 것이 금부처가 아니면 옥그릇들이라 했다. 화신이 실어 온 물건은, 진주로 만든 포도 한 덩굴이 그 속에 있었다고 하며, 금과 은오동(烏銅)으로 빛을 내어 덩굴과 잎을 만들고, 화제(火齊 구슬의 일종)와 슬슬(瑟瑟 구슬의 일종)로 포도알을 만들었는데, 이야말로 초룡주장(艸龍珠帳 극단적인 사치품)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강희황제(康熙皇帝)의 만수절(萬壽節) 3월인데, 강희 계미년(1703) 이날은 구경(九卿)이 모두 고옥(古玉)과 서화를 진상하여 축하하였다. 물건은 모두 내부(內府)로 받아들이는데, 왕사정(王士禎 왕사진의 별명)은 당시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있으면서, 역시 자기 집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왕진경(王晉卿 ()의 관리)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 장권(長卷) 뒷장에 미원장(米元章)의 글씨와 동파(東坡)의 긴 시구가 쓰인 것을 바쳤더니, 강희는 분부하여 말하기를,

 

저번에 가져 온 그림들은 대개 옛 물건이 없고, 이 그림 뒤에 있는 미원장의 글씨가 매우 아름다우니, 특히 받아들이고 사정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것으로 강희 시절의 고옥(古玉)이나 서화를 헌납하는 절차가 미상불 겉치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이것이 다시 바뀌어 금부처와 진주 포도로 되고 말았은즉, 신하로서 사사로이 황제에게 물건을 선사하는 버릇은 강희가 처음 열어 놓은 것이다. 화신은 방금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므로, 황제도 역시 말하기를,

 

신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제 집 일은 잊어버리고 내게만 바치는구나.”

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황제는 장차 반드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사해의 부자로서도 이런 진주 포도가 없었는데 화신은 대체로 어디서 이것을 얻었을까.”

그렇게 되면 화신도 위태로운 처지로다.

경직도(耕織圖)는 송() 때 생겼는데, 오잠령(於潛令)으로 있던 사명(四明) 누도(樓璹 ()의 관리)가 지어서 사릉(思陵 () 고종(高宗)의 능)에 헌납했다. ()마다 헌성 황후(憲成皇后)의 제자(題字)가 있는데, 강희 때에 와서 다시 명령해서 모사하였으니, 단마다 강희의 시가 친필로 씌어 있다. 건륭 연간에는 휘주(徽州)의 지방관이 각 단에 먹판각으로 본떠서 정교하게 새겼다. 먹은 모두 네 갑인데, 한 갑에 먹 열두 개씩을 넣어 값이 은 1 30냥이 된다고 한다. 건륭 신묘 연간(1771)에 그 값이 이렇다고 했는데, 병신년(1776)에는 값이 떨어져 80냥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나는 몸소 유리창(琉璃廠)에 와서 두 갑을 찾아내었는데 사람의 솜씨로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서문포(徐文圃) ()에게 값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먹은 절품이 아니요, 또 차서로 보아 먹 두 자루가 빠졌으므로,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지만, 그대로 값은 60냥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라고 하였다.

서황(徐璜)은 내게 말하기를,

 

장서(藏書)를 좀먹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는, 한식(寒食)날 밀가루에다 납일(臘日)날 받은 눈 녹인 물을 섞어 풀을 쑤어서 장황(裝潢)을 하면 좀이 먹지 못하고, 조협(皀莢)의 가루를 책 속에 넣어 두면 역시 좀이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방법은 송의 왕문헌(王文憲 미상)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양필방(養筆方 붓을 보관하는 방법)으로는 유황(硫黃)을 끓여 붓촉을 펴서 담그는데, 소동파는 황련(黃連 한약재)을 끓인 물에 경분(輕粉 한약재)을 섞고 붓촉을 적시었다가 말려서 간수했다고 합니다. 황산곡(黃山谷)은 천초(川椒)와 황벽(黃蘗 한약재)을 달인 물에 붓을 적시어 보관하면 더욱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방사(方士)의 말에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인데, 바다 가운데 있어서 언제나 신선이 왕래하면서 놀고 사는 데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이런 산이 있다 하고, 우리나라는 역시 금강산을 봉래라 하고, 제주 한라산(漢拏山)을 영주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이라 하고 있다. 황여고(皇輿考)에는 이르기를,

 

천하의 명산이 여덟이 있는데, 그 중에 다섯은 중국에 있어 태산(泰山)화산(華山)소실(少室)수양(首陽)이요, 그 외에 셋은 외지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황여고에는 방사의 말을 따라 세 산이 외지에 있다고 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분분하게 저마다 있고 없는 것을 겨루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천하의 명산이 어찌 여덟에 그칠 것이랴. 중국의 명산이 어찌 다섯에 그칠 것이며, 외지의 명산이 또한 어찌 셋에만 그칠 것이랴.

황여고에는,

 

천하에 큰물 셋이 있어 황하(黃河)장강(長江)과 압록강이 그것인데, 압록강은 역시 외지에 있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의 저() 에 이르기를,

 

장회(長淮)는 남북의 큰 한계가 되는데, 장회 이북은 북조(北條)가 되어 모든 물은 황하를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란 이름을 붙인 물은 없고, 장회 남쪽은 남조(南條)가 되어 모든 물은 대강(大江 양자강(揚子江))을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라는 이름을 붙인 물은 없다. 두 가닥 물 이외에 북으로 고려에 있는 물은 혼동강(混同江)압록강이라 하고, 남으로 만조(蠻詔 지명)에 있는 물은 대도하(大渡河)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의 치수 사업 중에 들지 않았다.”

하였으나, 나는 이 말들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과 하()는 맑고 흐린 것으로 구별한 것이니, 내가 압록강을 건널 때 강 넓이는 한강(漢江)보다 넓은 것이 없으나, 물이 맑기는 한강에 비할 만했다. 북경에 이르기까지 무려 물을 10여 차나 건너면서, 때로는 배로 건너고 때로는 발로 건넜다. 물이름은 혼하(混河)요하(遼河)난하(灤河)태자하(太子河)백하(白河) 등인데, 어디나 누른 흙탕물이다. 대체로 들에 흐르는 물은 탁하고, 산골물은 맑다. 압록강의 발원지는 장백산으로서, 국경의 여러 산속을 흘러내리므로 언제든지 물이 맑다. 동팔참(東八站)의 여러 물들은 모두 맑으니, 이것도 이유는 같은 것이다. 나는 비록 장강(長江)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근원이 민아산(岷峨山) 같은 첩첩한 산중에서 발원하여 삼협(三峽)을 뚫고 내려올 것이고 보니, 물이 맑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위 남조(南條)의 물들이 하()라고 이름 붙인 것이 없는 것은, ()의 남쪽은 산도 많고 돌도 많으므로 물이 모두 맑은 까닭이다. 그러니 만조(蠻詔)의 대도하(大渡河)도 필시 평양에서 발원하여 물이 탁하므로 하수라 불렀을 것이다.

양순길(楊循吉 ()의 문학가)의 지이(志異)에는 이르기를,

 

황조(皇朝)의 문신(文臣)으로 가장 높은 품작(品爵)을 받은 자가 몇 명 되지 않는 중에, 위령백(威寧伯) 왕공(王公)이 그 한 사람이다. 공은 궁중 과거 보는 날을 당하여, 글쓰기를 겨우 마치자 갑자기 겨드랑 밑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종이를 불어올려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과거보던 자들은 일제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그 시권(試券)이 점점 높이 구름 속으로 올라가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궁중의 관리들이 이 일을 황제에게 여쭈었더니, 명령을 내려 다른 종이로 다시 써서 올리게 하였고, 뒤에 공은 집헌(執憲)의 벼슬을 거쳐 대사마(大司馬)를 지내고백작(伯爵)에까지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는 곧 왕월(王越)의 사적이다. 우리나라 성종조(成宗朝) 때 경복궁(景福宮) 간의대(簡儀臺) 가에 중국 조정에서 쓰는 시권 한 장이 떨어져 있었는데, 봉함에 왕월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조정은 중국 사절 편에 이 시권을 보냈더니, 천자는 왕월의 사람됨이 남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가상히 여겨서 즉시로 집헌의 직책을 맡겼다. 순길의 기록에는 다만 회오리바람이 시권을 날렸다는 말만 하고 그 시권이 어디에 떨어진 줄은 몰랐으며, 그가 집헌을 거쳐 승진을 한 일은 죄다 말하면서, 실상 우리나라를 거쳐 천자에게 주달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원시비서(原始秘書 저자미상)에 이르기를,

 

고려의 학문은 기자(箕子)로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의 학문은 서복(徐福 진 시황 때의 방사(方士) 서시(徐市). 복은 별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안남(安南)의 학문은, ()의 군현(郡縣) 제도를 세우고 자사(刺史)를 두어 중국의 문화를 펴서 뒷날 오대(五代) 말기에 절도사(節度使) 오창문(吳昌文)의 시기에 와서야 성황을 이루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문화가 외지로 퍼져 나간 지 수천 년 사이에, 그들의 학문이란 모두 이적(夷狄)의 풍습을 면하지 못하고 궁하며 고루해서,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부족함은 대개 그 성음(聲音)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묘하고 심오한 이치야 붓 끝으로 가히 전할 수 없으므로 서로 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가위 절실한 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협음(叶音)의 묘미를 알지 못하므로 유미암(柳眉菴)을 지음(知音)에 능하다고 불렀지만, 그가 언문(諺文)으로 해석한 모시(毛詩)는 협음을 따르지 못하였으므로, ()이 끊어진 곳이 많았다. 예를 들면, ‘왕희지차(王姬之車 시경중의 문구)’란 차() 자를 마() 자 운을 따르지 않고 어() 자 운을 따라서 ()’ 음으로 한 것이 곧 이것이다.

유양잡조(酉陽雜爼 단성식(段成式) ())에 보면,

 

요사이 어떤 바다 사람이 신라로 가는 길에 바람에 밀려서 한 섬 위에 이르니, 산에 가득하게 흑칠(黑漆) 젓가락이 달린 큰 나무가 많았다. 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젓가락들은 모두 칠나무의 꽃이나 수염들이다. 그는 이내 백여 쌍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써 보았더니, 무거워서 쓸 수가 없었다. 뒤에 우연히 이 젓가락으로 찻물을 젓다가 보니, 그대로 녹아 버렸다.”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허튼 소리만 같다. 우리나라 남쪽 섬 속에 만일 이런 나무가 있었다면, 어찌 듣지 못했을 이치가 있으랴.

허항종(許亢宗 미상) 행정록(行程錄)에는,

 

동주(同州)로부터 40리를 가서 숙주(肅州)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면 큰 산이 보이는데, 금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신라산(新羅山)이라 부르고, 이 산중에는 인삼과 백부자(白附子) 같은 약재가 많이 나는데, 그 산이 고구려와 접경해 있다.”

하였으나, 이것은 허튼 소리다. 동주와 숙주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금 나라 사람들이 신라산이라 가리킨 데가 어찌 고구려와 접경이 될 수 있겠는가. 가위 남북의 위치가 뒤바뀐 셈이다.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 작자 미상),

 

세 가지에 다섯 잎이 / 三椏五葉

양지를 등지고 응달로 향했구나 / 背陽向陰

나를 얻고져라 이곳을 오려거든 / 欲來求我

가나무 밑에 찾아와 주려무나 / 椵樹相尋

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문헌에는 이 글을 많이들 싣고 있다. 유자나무 잎은 오동잎과 비슷하면서 매우 넓어서 그늘이 많이 지므로, 인삼이 이런 음지에서 자란다고 한다. 가나무는 곧 우리나라에서 책 판각에 쓰는 이른바 자작나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천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분묘(墳墓)에 이 나무를 많이 심어서, 청석령(靑石嶺 심양과 산해관 중간에 있다) 같은 데는 숲을 이루고 있었다.

대당신어(大唐新語 () 유숙(劉肅) ())에 보면,

 

이습예(李襲譽 () 관리. 자는 무실(茂實))는 성질이 검소하고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베낀 것이 수만 권이나 되었는데, 그는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토록 가난하나, 수도에는 나라에서 하사한 밭이 열 이랑이 있어 밥은 먹을 수 있고, 하남(河南)에는 뽕나무 1천 주를 심어 둔 것이 있어 옷은 입을 수 있고,  1만 권을 베껴 두었으니 넉넉히 벼슬자리를 구할 만하니, 너희들은 함께 이 세 가지에 근면한다면, 무엇을 다른 사람들에게 구할 것인가.’ 하였다.”

하였으니, 나 역시 성질이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으나, 평생에 베낀 책을 점검해 보니 불과 10권이 차지 못하고, 연암 골짜기에 손수 심은 뽕나무가 겨우 열 두 포기로, 긴 가지라는 것이 겨우 어깨에 닿을지 말지 하매, 일찍이 슬픈 한탄을 금할 수 없었던 바, 이번에 요동(遼東)을 지나오면서 밭 가에 둘러선 뽕나무숲을 바라보다가, 끝없이 넓은 것을 보고는 또 망연히 정신만 얼떨떨하여졌다.

중원 사람들은 시경의 소서(小序 복상(卜商)이 지었다 한다)는 반드시 없앨 수 없다고 하는데, 완정(阮亭왕사진의 호)의 말은 아주 공정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자(程子 정이(程頤))가 소서를 일러, ‘이것은 반드시 당시 사람들이 자기 나라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의 자취를 밝혀 전하려고 한 것이다.’ 한 것이 곧 이것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 시편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또 대서(大序 복상이 지었다 한다)는 중니(仲尼)의 저작으로서, 모두 대의를 얻은 것이라 하였는데, 주자는 두 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를 학문의 조종으로 삼으면서도 소서에 이르러서는 의견을 달리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학초망(郝楚望 ()의 학자 학경(郝敬). 초망은 호)이 시 한 편마다 반드시 주자의 주석을 반박한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상숙(常熟) 고대소(顧大韶) 중공(仲恭 고대소의 자())은 책 한 권을 저술하는데 모전(毛傳 () 모형(毛亨) 시전(詩傳))을 주장하되, 모전이 잘 통하지 않는 데가 있어야만 정주(鄭註 한 나라 정현(鄭玄)의 시경 주)를 참고하고, 정의 주가 반드시 통하지 않는 데가 있어야만 주자의 주석을 참고로 하였고, 주의 것이 모두 통하지 않을 때는 여러 학설을 망라해서 자기의 의견과 절충했다. 엄찬(嚴粲)의 시집(詩輯), 주자의 주석이 나온 이후에 특별히 제가(諸家)의 주석보다 우수하다 하나, 대전(大全)이란 것들은 주자의 주석을 부연한 것이므로 아무런 발명도 없으니, 장독 덮개로나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저 중국 사람들이, 주자가 소서를 없앤 것을 배척하는 것은, 이 세상의 한 가지 큰 시론(時論)이 되었다. 주죽타(朱竹坨) 경의고(經義攷)2백 권이다. 에는 주자를 배척하여 목과(木瓜 시경의 편명)에서 제 환공(齊桓公)을 찬미한 것이라든지, 자금(子衿 시경의 편명)에서 학교 폐지한 것을 풍자한 것이라든지, 야유만초(野有蔓草 시경의 편명)와 유왕(幽王)을 풍자하고, 정홀(鄭忽 정 나라의 공자(公子))을 풍자한 모든 시는 경전(經傳)을 깊이 상고하여 모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인데, 주자는 모두 이것을 반대하여 자기의 의사대로 함부로 결정해서 소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그러나, 그는 실상 소서를 많이 이용하면서, 유독 정()()의 시만은 정성(鄭聲)을 버리라(논어에 나오는 구절)는 한 마디 말에 근거하여 모두 음탕한 시의 부류에 남겨 두었으니, 소리는 음탕하지만 시는 음탕하지 않다고 한 말은 서하(西河 모기령의 호) 모씨(毛氏 모기령(毛奇齡))의 학설로서, 대체로 소서를 두둔하는 자의 학설은 모두 이와 같았다. 말로는 이 주석이 주자의 친필이 아니요, 반드시 그의 문인의 손에서 나왔으리라 하지만, 이는 문인이란 명색을 붙여 마음놓고 공격하자는 심산인 것이다. 송사(宋史) 유림전(儒林傳)’ 중에 왕백(王栢)이 말하기를,

 

시경3백 편은 어찌 모두 공자의 손으로만 정착된 것이랴. 추린 시 중에, 혹은 민간에서 부박한 입에 떠돌아다니는 시들 중에서 한()의 선비들이 이것을 주워 모아 보태어 편찬했을 것이다.”

했으니, 이 말이 심히 이치에 합당하다. 그런즉 중국에서 지지(支持)하는 소서 중에 어찌 한()의 선비들이 부회(傅會)한 것이 없겠는가.

내가 일찍이 초 한림(初翰林) 팽령(彭齡)과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과 함께 단가루(段家樓)에서 술을 마시면서 분분히 소서를 가지고 질문을 했다. 내가 큰 소리로,

 

시경 3백 편은 당시의 여항(閭巷)에 떠돌아다니는 풍요(風謠)에 불과할 것입니다. 즐겁고 아프고 희로(喜怒)와 애락(哀樂)이 있을 때에는 이런 소리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니, 후충(候虫)과 철새[時鳥]가 스스로 울고 읊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 풍요를 모아서 글자와 구절을 맞추어 학교에 벌여놓고 악기에 맞춘 것이 소위 열국(列國)의 풍요로서 ()’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생긴 것입니다. 작자의 성명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소서에는 시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시의 저작자가 있다고 하며 이것이 누구누구의 작품이라고 하여 마치 후세의 전당시(全唐詩)와 같이 말하나, 이것은 틀림없이 억측으로서 초중경(焦仲卿)의 아내가 지었다는 것은 엉뚱한 말입니다. 고시(古詩) 19는 언제 작가의 성명이 있었습니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잠잠하였으나 겉으로 보건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대개 소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소자유(蘇子由 ()의 문학가 소철(蘇轍). 자유는 자())로부터 시작하였고, 소서를 공격하기는 정협제(鄭夾際 ()의 문학가 정초(鄭樵). 협제는 호)로부터 시작하였고, 주자의 주석을 공박하기는 마단림(馬端臨 ()의 학자)모기령(毛奇齡)주이준(朱彝尊) 등에게 이르러서 극심했으며, 근세에 와서는 아주 시의(時義)로 되어 버렸다.

오군(吳郡) 풍시가(馮時可 ()의 학자) 봉창속록(篷牕續錄),

 

취두선(聚頭扇)은 곧 겹쳐 개는 부채로서, 영락(永樂) 연간에 중국에 공물로 들어가 국내에 많이 유행되었다. 동파(東坡)는 말하기를, ‘고려의 백송선(白松扇)은 펴면 넓이가 한 자가 넘고 접으면 불과 두 손가락 정도밖에 안 된다 하였으니, 왜인들이 만든 검정대 뼈에 금색으로 면을 칠한 것이 곧 이것이다. 내가 북경에 닿으니 외국 도인(道人) 이마두(利瑪竇)가 나에게 왜선(倭扇) 넉 자루를 보냈는데, 합치면 손가락 하나의 부피도 못 되는데 매우 가볍고 바람이 잘 나고 또 든든했다.’ 하였다.”

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중국에서 처음에는 이런 부채가 없었고, 모두 단선(團扇)으로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미선(尾扇)이었던 것이다. 대개 옛 그림에 보이는 파초잎오동잎흰깃 같은 것으로 만든 것이 이것이다. 우리나라 기물로서 일본의 것을 모방한 것이 많이 있으니, 접는 부채도 고려는 일본에서 배웠고 중국은 고려에서 배워 갔는데, 중국에서 큰 부채를 고려선(高麗扇)’이라 부르면서 만든 품이 질박하고 조선 종이에 기름을 먹여 가는 서화를 그린 것을 자못 진기롭게 여기었다.

구라파 철현금(鐵絃琴)은 우리나라에서는 서양금(西洋琴)’이라 부르고, 서양 사람들은 천금(天琴)’이라 부르고, 중국인들은 번금(番琴)’ 또는 천금이라 부른다. 이 악기가 어느 때 우리나라에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향토 곡조를 여기에 맞추어 풀어 내기는 홍덕보(洪德保)로부터 시작되었다. 건륭 임진년(1772) 6 18일에, 내가 홍덕보의 집에 앉았을 때 유시(酉時 하오 6)쯤 되어 그가 이 악기 해득하는 것을 나는 목견했다. 대개 홍은 음악 감상에 예민해 보였고, 또 이것이 비록 작은 예술이지만 벌써 그것이 맨 처음으로 된 발견이므로, 나는 그 일시(日時)를 자세히 기록했던 것이다. 그것이 전()한 지 이제 9년 사이에 넓게 퍼져서 금사(琴師)로서 이를 탈 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오군 풍시가(馮時可)가 처음 북경에 와서 이마두로부터 이것을 얻어 가졌는데, 구리 철사로 줄을 만들어 손으로 타지 않고 작은 나무쪽으로 건드리면 그 소리가 한층 더 맑았다고 했으며, 또 자명종(自鳴鍾)은 겨우 작은 향합만 한데 정밀한 쇠로 만들어서 하루 열두 시간에 열두 번을 치니 역시 이상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모두 봉창속록(篷牕續錄)에 실려 있었다. 대개 이 두 가지 기계는 명()의 만력 연간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했다고 한다. 내가 있는 산중의 양금(洋琴)은 등에 오음서기(五音舒記)라고 낙인(烙印)이 찍혔는데, 만든 것이 매우 정밀하였으므로, 이번 중국에 온 김에 남의 부탁을 위하여 이것을 구해 보고자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했으나, 소위 오음서기는 끝내 얻지 못했다.

단청기(丹靑記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왕유(王維 ()의 문학가)가 기왕(岐王 미상)을 위해서 큰 돌을 한 개 그렸는데, 붓 가는 대로 휘두르고 보니 아주 천연(天然)의 운치가 있는지라, 기왕 보물로 여겨서, 때로 처마 밑에 홀로 앉아 주시(注視)하면서 산중 생각을 하노라니, 유연(悠然)히 넘치는 운치가 있었다. 그 뒤 몇 해를 지나니 그림에 더욱 정채(精彩)가 돌았는데, 어느 날 아침 폭풍우가 몰아치고 뇌성 벽력이 함께 일어나면서 갑자기 돌이 날려 가고 집도 함께 무너졌다. 웬 영문인지 모르다가 뒤에 보니, 그림 축()에 빈 종이만 남았으므로 이에 그림에 있던 돌이 날아간 것을 알았을 뿐이다. 헌종(憲宗) 때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큰 풍우가 일고 신숭산(神嵩山 개성(開城)의 송악) 위에 웬 이상한 돌 하나가 날아와 떨어졌는데, ‘왕유라는 글자가 박혀 있으므로 중국서 날아온 돌인 줄을 알고 감히 그대로 머물러 둘 수 없어서 사신을 보내어 가져다 바칩니다 했다.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왕유의 수적(手蹟)을 가져다가 비교해 보았더니 터럭만큼도 틀림이 없었다. 황제는 비로소 왕유의 그림이 신묘한 것을 알고 국내에 두루 그의 그림을 찾아 궁중에 간직하고 땅바닥에 닭과 개의 피를 뿌려 돌이 날아가지 않도록 예방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 제해(齊諧 괴담(怪談)을 수록한 글)의 기록들이 허탄하고 틀린 것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고려로 부르는 것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고구려는 당 고종(唐高宗) 영휘(永徽) 연간에 망했은즉, 허종 때에 어떻게 사신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인가. 또 왕씨의 고려는 송악산(松岳山) 밑에 도읍했고, 송악을 신숭(神嵩)’이라 불렀는데, 만약 이것이 왕씨의 고려였다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일으킨 것은 주량(朱梁 주전충(朱全忠)이 세운 후량(後梁)) 우정(友貞 후량의 말제(末帝))의 정명(貞明) 4(918)이니, 헌종보다 1백여 년 뒤 연대이고, 왕유는 또 당 명황(唐明皇) 때 사람인즉 헌종보다 1백여 년 앞섰으니, 그 돌이 날아갔다는 이야기는 본래 황탄하고 기록도 또 심히 틀렸으니, 이는 필시 왕월(王越)의 시권 이야기를 희미하게 본떠 만든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나라가 동파(東坡)에게는 가장 잘못 보였던 모양이다. 고려가 송()에게 서사(書史)를 구하면, 동파는 한()의 동평왕(東平王 동평헌왕(東平憲王))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상소를 올려 준열하게 배척했다. 그가 항주(杭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동파는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

원우(元祐) 5(1090) 2 17일에 왕백호(王伯虎) ()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예방(禮房)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 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하였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동파의 지림(志林)에 실려 있는데, 자첨(子瞻 소식의 자)은 당시 고려를 불러 사귀는 것을 실계(失計)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러 가지 기술(記述)한 것을 보건대 모두 국가를 위한 깊은 걱정이다. 그러나 당시 송()의 사대부들은 유달리 고려가 중국에 향한 정성이 적심(赤心)에서 나온 것을 몰라 주었다. ()와 금()이 견제가 되어 있으므로 송을 섬기지 못한 것이 고려의 역대 조정으로서는 지극히 유감스러웠던 것이다. 송 나라 학자들의 서적을 얻으면 분향을 하면서 공손히 읽는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한갓 중국의 사대부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것은 족히 한심스러운 일이다. 나는 왕혹정(王鵠汀)과 더불어 극히 변명했던 것이다.

명산기(名山記 저자 미상)에 말하기를,

 

강원도 금강산 속에 소[] 하나가 있으니 관음담(觀音潭)’이라 한다. 소 가의 언덕 이름은 수건애(手巾崖)’라 하고 돌 복판에는 오목하게 방아확 같은 데가 있으니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는 관음보살이 빨래하던 곳이라 한다.”

하였다.

숭정(崇禎) 정축년(1637) 11 11일 정조사(正朝使)건주(建州)와 더불어 화해를 한 뒤이다. 한형길(韓亨吉 조선 선조(宣祖) 때의 관리)과 서장관(書狀官) 이후양(李後陽 미상)의 일행이 사절로 갔을 때, 정례의 진상품 외에 별공(別貢)으로 홍시(紅柿) 30바리를 가져다 바쳤더니, 칙사는 또 다시 2만 개를 더 바치라고 독책한다. 당시의 칙사는 영아아대(英俄兒代 만인(滿人))마복탑(馬福塔)대운증(戴雲曾 미상) 등으로 연로에서 말을 달려 사냥을 하면서 고을 기생들의 수청을 강요하여 조금이라도 여의치 못할 때는 매질을 하고 야료를 낭자히 했고, 왜인들도 역시 말 3백 필과 매 3백 마리와 황새 3백 마리를 구하였다. 이번 걸음에 가지고 온 방물(方物)이란 종이와 자리에 불과했으나, 중국은 우리가 유숙하는 비용을 치르는 것만 하더라도 언제나 10여만 냥이 든다고 하니, 청 나라 초기에 비한다면 가위 도리어 중국에 폐를 끼치는 셈이 된다.

서위(徐渭 명 나라 문학가) 노사(路史)에 이르기를,

 

당 나라 시절에 고려는 송연묵(松煙墨 소나무 연기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진상했는데, 이것은 송연(松煙)에다가 사슴의 아교를 섞어 만든 먹으로서 유미(隃麋)’라고 불렀다.”

하였는데, 왕완정(王阮亭)의 고증에 의하면, ()의 고을 이름으로서 유미라는 데가 있는데, 그 땅에서 석묵(石墨)이 나기는 하나 고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을 뿐, 당 나라 시절에는 애초에 고려가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유미에서 난다는 석묵은 필시 요사이 쓰고 있는 석탄일 것이다. 한 나라 시절에는 석탄을 땔 줄은 모르고 석묵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의 만력 9(1581)에 서양 사람 이마두(利瑪竇)가 중국에 들어와 북경에 머무른 지 29년에 중국 사람으로서는 한 사람도 그를 믿는 자가 없었고, 다만 그의 역법(曆法)을 주장한 자는 서광계(徐光啓 청 나라 과학자) 한 사람뿐으로 드디어 그는 만세력(萬歲曆)의 조종(祖宗)으로 되었은즉 만력(萬曆)’이란 연호는 이마두가 중국에 들어올 조짐이었던가.

만력 임진년(1592)에 신종(神宗) 천자가 군사를 크게 내어 동쪽으로 우리나라 난리를 구했는데, 이 당시 내부(內府)의 은을 허비한 것이 8백만 냥이라 한다.

신라 시대 토산(土産)으로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소화어아금(小花魚牙錦)조하금(朝霞錦)백첩포(白㲲布)가 있었다.

왕원미(王元美 왕세정(王世貞). 원미는 자())는 조선 종이를 일컬어 주었고 서문장(徐文長 서위(徐渭). 문장은 자)은 조선 종이로서 돈 같이 두꺼운 것을 심히 사랑했고, 종백경(鍾伯敬 명 나라 문학가 종성(鍾惺). 백경은 자)은 일찍이 조선 종이에 당() 유신허(劉愼虛 당 나라 문학가)의 시 14수를 썼다.

중국에서는 진사(進士) 급제(及第) 출신으로 일갑(一甲)이 세 사람인데, 첫째가 장원(壯元)’이요, 다음이 방안(榜眼)’이며, 또 다음은 탐화(探花)’라 하여, 장원은 즉시로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의 벼슬을 주고, 방안과 탐화는 한림원 편수(編修)를 준다. 이갑(二甲) 890명인데 그 중 첫째는 전려(傳臚)’라 하여 역시 한림의 벼슬을 주고, 삼갑(三甲)은 백여 명 되는데 이갑과 함께 모두 조고(朝考 황제가 친림하여 보이는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바, 혹은 한림 후보도 되고, 혹은 육부(六部)의 주사(主事)도 되고, 혹은 지현(知縣)도 되고, 여기에 참여 못하면 진사로 되돌아간다. 우리나라에서 지벌(地閥)을 따져서 3()에 벼슬을 나누는 규정에는 비할 바 아니다.

옹정(雍正) 임자년(1732)에 역관(譯官) 최수성(崔壽誠)이 고교보(高橋堡)를 지나다가 오광빈(吳光霦)을 만났다고 한다. 광빈은 일찍이 오삼계(吳三桂)의 위조 사령을 받고 이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다가, 그대로 눌러 이곳에 살아 왔는데 당시에 나이 87세로 귀가 먹고 정신이 혼몽하여 아무런 수작도 못하고, 당시의 문적(文籍)들을 내어 보냈는데 그 첫째의 것은,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주왕(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周王 오삼계(吳三桂)의 손자 오세번(吳世璠))은 관직을 올려 임명한다. 우주가 혼몽하여 긴 밤중에 사는 것 같은데, 우러러 천의(天意)를 받들어 의병을 일으켜 백성을 구하고자 하니, 반드시 슬기롭고 용맹 있는 인재를 얻어 함께 승평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여기에 오광빈을 얻게 되어 금오시위유격(金吾侍衛遊擊)에 임명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를 임명하는 본을 보인다. 이 때문에 문건을 출급하는 데 해당 관원은 여기에 따라 일을 맡을 것이다. 너는 이 임무를 맡고 반드시 더욱 분발하고 노력할 것이요, 그 반열에 처하여 공훈을 많이 세워 등용한 책임을 담당하라. 만일 특수한 공로를 세울 때는 자연 특별한 관직과 포상이 있을 것이니 너는 부디 배나 노력할 것이다. 이 문건을 유격 오광빈에게도 준용할 것이다. () 4(1681) 5 27.”

이라 하였고, 그 둘째의 것은,

 

병부(兵部)의 관리를 승임시키는 데 관하여 내리노라. 홍화(洪化 ()의 연호) 원년(1678) 7 16, 병과(兵科)에 뽑힌 이소보(李少保)와 금오위좌장군(金吾衛左將軍) 호제(胡題) 등을 등용함에 관한 문건에 의하면, 이번에 알게 된 시위유격(侍衛遊擊) 오광빈은 사람됨이 노련하여 응당 참장(參將) 직함을 주고, 국내의 일을 맡길 터인 바, 오광빈의 임명장에 의한 비준 문서를 보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협의에 의하여 임용하기로 하였는데 병부에서는 이에 따라 준수할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문건을 갖추어 보내니, 해당 관리는 해당 부서의 지시에 따라 직무를 맡길 것이다. 이상 임명을 받은 오광빈은 이대로 시행하라. 홍화 원년 7 21.”

이라 하였고, 또 하나의 문서는 호부(戶部)에서 관원을 증가하기 위하여 신청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광빈에게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임명한 문건이다. 여기에도 홍화 2 7 26이라 하였고 인장과 수결이 갖추어졌다 하니, 대개 오삼계는 군대를 일으킨 지 4년 만에 연호를 고치고 스스로 구석선문(九錫禪文)을 지은 것은 이극용(李克用 후당(後唐)을 창립한 임금)으로서도 못한 바로서, 그는 죽음을 맹세하고 다음날 당()의 사직(社稷)을 회복하기를 약속했던 것이다. 대명(大明)의 유민(遺民)들이 날마다 의기(義旗)를 바라고 있는데 천하에 누가 주가(周家) 홍화라는 연호를 알까보냐. 오광빈은 오히려 이 문건을 가장(家藏)의 고적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그의 뜻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요, 또한 당시의 정치가 관대했다는 것도 짐작되는 일이다.

흡독석(吸毒石 독기를 빨아내는 돌)은 크기가 대추만 하고 검푸른 빛깔이다. 소서양(小西洋)에 있는 일종의 독사(毒死) 머리 속에 든 돌인데, 이 돌은 능히 사갈(蛇蝎)과 지네 같은 여러 가지 독충들에게 물린 상처를 낫게 하고, 발치와 일체의 독종과 악창을 고친다. 이 돌을 종기 부위에 놓으면 종기 부위에 붙어 떨어지지 않다가 독기를 다 빨아내면 돌이 저절로 떨어지고 종기는 당장에 낫는다 한다. 그러나 반드시 사람의 젖[] 한 종지를 준비했다가 떨어진 돌을 빨리 집어넣어 젖빛같이 약간 노란빛이 날 때까지 담가 둔 후에 맑은 물에 잘 씻고 닦아서 다음 번에 쓸 수 있도록 한다. 만일 너무 오랫동안 젖에 담가 두면 돌의 독이 모두 빠져서 오랜 뒤에는 영험이 없어진다 한다.

산해관(山海關)에 가기 10여 리 전에 강녀묘(姜女廟)가 있다. 새로 행궁(行宮)을 세웠고, 망부석(望夫石) 옆에는 조그만 정자가 있어 진의정(振衣亭)’이라 부른다. ()의 시절에 범칠랑(范七郞)이 장성(長城)을 쌓다가 육나산(六螺山) 아래서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허()(), 이름은 맹강(孟姜)으로, 섬시 동관(同官) 사람이다. 혼자 수천 리를 가서 칠랑의 유해를 간수해 가지고 이곳을 지나면서 쉬었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 한다. 강녀(姜女)는 마침내 유해를 지고 바다로 들어가 죽었는데, 며칠이 못 되어 바다 가운데서 바윗돌 하나가 솟아나 조수가 밀려 와도 물에 잠기지 않았다 한다. 망부석이란 세 글자는 태원(太原) 백휘(白暉)의 글씨요, ‘작여시관(作如是觀)’ 넉 자는 내각수찬(內閣修撰) 하정좌(賀廷佐)의 글씨요, 이반(李蟠)이 지은 사기(祠記)는 고병(高昺)의 글씨다. 사당 뒤에는 비석 네 개가 섰는데, 하나는 장간(張揀)의 글로서 황명 만력 갑오년(1594)에 세운 것이요, 하나는 장시현(張時顯)의 글로서 만력 병신년(1596)에 세웠고, 하나는 정관이(程觀頤)의 글로서 강희 기유년(1669)에 세웠고, 하나는 고제대(高齊垈)의 글로서 강희 무진년(1688)에 세운 것이다. 당의 시절 왕건(王建)이 읊은 망부석은 무창(武昌)에 있는데, 혹자는 이르기를,

 

진의 시절에는 섬()이라 부르지 않고 낭()이란 이름도 없었으며, ()이라는 성을 보아서 제()의 계집일 것이다.”

라고 한다.

왕민호(王民皥)는 청의 건국에서 한 임금 제도를 찬미하여,

 

밖으로는 삼왕(三王)이요, 안으로는 이교(二敎)라 하였으니, 이는 대저 석가와 노자(老子)의 학설에 유교를 섞어서 빛깔을 낸 것입니다.”

한다. 옹정(雍正) 시대에 황제에게 비밀히 청하는 자가 있어, 중들을 모두 배필을 정해 주어 환속(還俗)하도록 하면 직속 군대 백만은 얻을 것이라 했으므로, 옹정은 조서를 내려 통유(洞諭)하기를,

 

불교와 노교는 심성(心性)의 근원과, 선악의 감응(感應), 이기(理氣)의 근본에 두고 있다. 예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윤상(倫常)에 근본을 두고 사업의 공적에 표준하였으니, 이 두 가지 교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의 구역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혹 밝은 교화에 방해될까 두려워서 밝은 임금과 어진 천자는 이것을 소홀히 하여 멀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사람의 성품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것을 없앴다는 일은 듣지 못했다. 요새 나에게 비밀히 불교를 혹독하게 비방하면서 중들을 모두 환속시키자고 청하는 자가 있으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비록 한 지아비 한 지어미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는 바이다. 이제 그들의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속인으로 만든다면,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가 수백만 명이 될 뿐만 아니라, 대체로 중들은 곧 환과(鰥寡)와 고독(孤獨)으로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할 자들이다. 소위 이학(理學)을 한다는 자들은 석가와 노자를 욕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이학자로 자처하고 있으나, 이 습관은 어느 경전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릇 이학이란 궁행 실천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만일 헛되이 석가와 노자를 비방하는 것으로써 이학을 삼는다면, 이는 천박한 생각일 것이다. 국가가 이학을 떠받드는 뜻은 본래 이같은 뜻이 아니니, 만일 요망한 말로써 사람들을 의혹시키고 작간과 범죄를 하는 자가 모두 중이라 한다면, 그들이 자기 교에 실천 궁행이 없음이지 기율을 범하고 법을 무시하는 행동이 어찌 이 교의 책임이라 하겠느냐. 또 요사이 중죄를 범하고 극형을 받은 자가 하필 승려와 도사(道士)들뿐이리요. 법이 공평하지 못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고, 주장하는 이론이 공평하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유시(諭示)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것은 민상(閔相) 응수(應洙 조선의 정치가. 자는 성보(聲甫)) 계축연행록(癸丑燕行錄) 속에 실려 있는데, 왕씨의 말과 서로 부합된다.

건륭 40년 을미년(1775) 11 20일에, 내각은 아래와 같은 황제의 유시를 받들었다.

 

충정(忠貞)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것은 풍속과 교화를 세우고 신하의 절개를 고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조정이 한 번 바뀌어 전조(前朝)의 충신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은 신하들의 기록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이름도 바뀐 것이 있다. 오직 우리 세조 장황제(世祖章皇帝)는 나라를 세우고, 먼저 숭정 말년에 순국한 신하들 중에 태학사 범경문(范景文 ()의 명신)  20여 명에게 특히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전조의 충신들을 생각하는 그의 성스러운 도량을 우러러 볼 때 실로 만고에 뻗칠 만한 광전(曠典)이라 할 것이다. 당시는 겨우 전문(傳聞)에 근거하고 아뢰는 사건마저 두루 알아볼 여가가 없었으므로, 이런 표창을 받은 자의 수효가 이에 불과했으나, 조금 지나서 남은 행적들이 드러나고 또 다시 판정을 거쳐야 할 것은 지금의 명사(明史)에 실린 것을 보더라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가법(史可法)이 외로운 충성을 맹세하고, 망해가는 판국을 붙들려다가 마침내 몸을 바친 일이라든가, 또 유종주(劉宗周 () 학자)황도주(黃道周 () 학자) 등은 조정에 서면 기탄없는 바른말로 뭇 아첨배와 마주 대항하고, 어려운 시기를 만나 나라의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바치니 넉넉히 일대의 훌륭한 인물이 될 만하므로, 이런 인물들은 응당 표창하고 찬양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혹 고성(孤城)을 사수하기도 하고, 전진에서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포로로 붙들려 참살을 당하는 등 죽음을 초개처럼 여긴 자도 있었다. 당시는 임금이 거느린 군사가 진격함에 따라 저절로 범령을 엄하게 펴서 귀순자와 반역자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지난 뒤에 평탄한 심정으로 이런 인물들을 의논한다면, 그들은 모두 질풍(疾風)에 경초(勁草)처럼 부끄러울 바 없는 인물로서, 제 몸을 희생하여 명절(名節)을 온전히 했으니, 그 심정인즉 역시 가긍한 것이다. 비록 복왕(福王)은 창졸간에 한쪽 구석에서 조정을 만들었고, 당왕(唐王)과 계왕(桂王 영력제(永曆帝))이 또 유리(流離)하여 자취를 감추다가 나라를 위하여 다시 성공은 못했다 하더라도 당시 여러 사람들은 갖은 고생을 겪어가면서 함께 따라 목숨을 버리면서도 의리를 취하여 능히 각각 충성을 다했으니, 어찌 이런 일을 인멸시키고 드러내지 않을 것이랴. 마땅히 사서(史書)를 상고하여 모두 시호를 표창해야 할 것이다. 혹 포의(布衣)의 출신으로서 성명도 잘 모를 자들도 강개(慷慨)한 이가 없지 않겠지만, 이들에게 일일이 시호를 주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 역시 저마다 고향에다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들어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우리 태조의 실록(實錄)을 공손히 읽어보니, 살이호(薩爾滸) 전쟁에서 명의 양호(楊鎬) 등은 20만 대군을 끌어 모아 사로(四路)로 나누어 우리 흥경(興京)을 침범하자, 우리 태조와 태종(太宗)과 패륵(貝勒) 대신들은 정병 수천을 거느리고 그들의 군대를 반 이상 섬멸해서, 당시 명의 양장(良將) 유정(劉綎)두송(杜松)양호 등은 모두 진중에서 죽었다. 근일에, 나는 이 사적을 들어 글 한 편을 지어 그들의 충렬을 찬양하여 역사에 전하도록 하였다. 오직 이같이 국가를 창건하는 시기에 있어서 우리 편에 반항하여 선봉으로 오는 자는 응당 용서 없이 무찔러 죽이는 것이 마땅했지만 칼날과 창끝을 무서워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여 싸우는 태도는 적군이라도 가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명이 망할 무렵 손승종(孫承宗 ()의 충신)노상승(盧象昇 ()의 충신) 등은 우리 군대에 저항하다가 몸이 들녘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고, 주우길(周遇吉)채무덕(蔡懋德)손전정(孫傳廷) 등은 목을 내놓고 몸을 짓밟혀 가면서 적을 막다가, 몸은 죽었어도 그들의 늠름한 태도는 오히려 생기가 있었다. 오로지 명의 정치가 해이했던 까닭으로 만력 시대로부터 숭정에 이르기까지 간신(奸臣)이 꼬리를 물고 환관이 횡행하여, 흑백이 뒤섞이고 충신과 양신은 흔적이 없게 되어 언제나 이를 갈면서 불평을 하게 되었다. 복왕 때에 이르러 혹은 시호를 추봉(追封)한 자가 있으나, 이것도 처리가 공평치 못하여 종잡을 수 없었다. 나는 오직 공평 무사하게 그들을 전형하여 무릇 명의 말년에 절개를 완전히 지킨 신하들로 이미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자는 한결같이 우대하고 표창하여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전겸익(錢謙益)과 같이 스스로 깨끗한 듯이 큰소리를 치다가 부끄러운 빛도 없이 항복을 해 왔거나, 김보(金堡)굴대균(屈大均)등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요행히 살아 보고자 거짓 중 노릇을 한 자들은 모두 창자도 없고 수치도 모르는 자들이니, 이런 무리들이 과연 절개에 죽을 자이겠는가. 그들은 오늘 내가 표정(表旌)한 이름 속에도 들어 있는 듯하니, 이에 이미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언어와 문자를 빌려 스스로 살 것을 찾는 시늉을 엄폐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반드시 그들의 진퇴의 절차가 근거 없는 것을 명백히 배척할 것이며, 어둠 속에 표창을 받은 것을 삭탈하여 하나의 상이나 벌을 가장 명백히 밝혀, 천하 만세로 하여금 사리에 비추어 선악을 밝힘으로써 강상(綱常)을 세우고, 이로써 또 잘한 것을 표창하는 나의 뜻을 알게 하여 다오. 시호를 받을 여러 사람들은 아울 명사와 집람(輯覽 저자 미상)에 실린 바를 두루 조사하되 세조 때의 전례에 비추고, 본래의 관직에 따라 시호를 줄 것이다. 시호의 결정을 어떻게 분별하여 처리할 것인가는 태학사와 구경(九卿)경당(京堂)한림첨사(詹事)과도(科道) 등을 모아 협의하여 보고할 것이다. 아울러 여기서 중외(中外)에 이를 통유(通諭)하노니 알아서 시행하라.”

하였다. 이 조서에 보면, 우리나라 삼학사(三學士)와 청음(淸陰)의 사적이 응당 청 태종(淸太宗)의 실록에 실렸을 터인데 아무런 기록도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대체로 외국의 신하로서 중국을 위하여 춘추의 대의를 지킨 일은 천고에 없었던 것으로, 건륭은 천하 만대를 위하여 스스로 공정을 표방하면서 다만 우리나라의 여러 현인(賢人)들에 대하여는 조금도 보인 데가 없으니, 그 일이 외국에 관계되었다 하여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인가. 중국 인사들이 왕왕 청음에 관하여 언급을 했다는 것도 다만 몇 편의 보잘것없는 시구로 기록하는 데 그쳤을 뿐이요, 그의 큰 절의(節義)가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툴 만한 것은 하나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와의 강화(講和)가 실상 관외(關外)에 있었을 때 일이고 보니 중국 사람들로서는 아직 이 사적을 자세히 알지 못한 까닭일까. 그렇지 않으면 수답(酬答)하기를 꺼려서 짐짓 모른 체 함인가. 또는 일부러 감구집(感舊集)에 왕어양(王漁洋) 사정(士禎)이 지은 감구집 중에는 청음 선생의 시가 실렸고, 그 소서(小序)에는 그의 관함과 이름과 자가 기록되었다. 말 못할 뜻을 잠시 표시한 것일까. 내 매양 청음 두 글자를 들을 때마다 미상불 머리털이 움직이고 맥이 뛰어 비록 아무도 모르게 목 속에서 배회하는 말을 입 밖으로 감히 내지 못하지만, 거의 왕혹정(王鵠汀)이 말한 바와 같이 체증이 생기려 하고 있으니 어찌할 것이냐. 어찌할 것이냐.

요동(遼東)에 이르기 전에 동쪽으로 왕상령(王祥嶺)이란 고개가 있고, 고개를 넘어 10여 리를 가면 냉정(冷井)이 있는데, 사행(使行)이 있을 때는 장막을 치고 조반을 먹는 곳이다. 돌로 쌓은 우물이 아니요, 길가에 솟는 샘으로, 물 줄기는 확을 넘고 있다. 물 맛은 달고 맑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다. 우리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흘러 넘치게 솟다가도 조선 사람이 떠나면 즉시 말라 버린다고 하니, 대개 요동은 본래 조선 땅이므로 기운이 서로 감응해서 그렇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난리를 피할 복지(福地)가 열 곳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나라의 명승(名僧)무학(無學)과 방사(方士) 남사고(南師古)가 잡은 곳이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복지란 임금이 파천한 곳만 한 데가 없을 것이니, 비록 포의(布衣)와 미천한 선비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피난처가 될 것이다. 임금을 모시고 그 좌우를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갑자기 병란(兵亂)을 당하면 사녀(士女)가 물 끓듯이 매양 심산 절협을 찾아 바위 구멍에 몸을 감추니, 그 슬기롭지 못한 것이 심하기도 하다. 양식이 이미 떨어지면 반드시 먼저 주려 죽을 것이니 이것이 그 어리석은 것의 하나요, 군사도 못보고 범이나 짐승에게 해를 입을 것이니 그 어리석음의 둘이요, 외간 소식이 끊어져서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니 그 어리석음의 셋이요, 풀과 나무와 안개 이슬에 먼저 병이 들 터이니 그 어리석음의 넷이요, 만일 토적(土賊)을 만나면 반드시 약한 놈이 먹힐 터이니 그 어리석음의 다섯이라. 세상이 불행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고 본즉, 의주(義州)와 남한(南漢)은 모두 복지가 되는 것이다. 당시에 피난 간 사람들은 이 두 곳이 절지(絶地) 고성(孤城)이라 했으나, 나는 왕령(王靈)이 있는 곳에는 천지가 힘을 같이하고 백신(百神)이 보호할 터이니 나라가 있으면 제 몸도 있을 것이요, 나라가 망하면 제 몸도 망할 것이다. 몸을 멀리 초망(草莽) 속에 숨기고 하찮은 충성을 지킨다고 구렁 속에 사는 것은 차라리 살아서 충신이 되고, 죽어서 외로운 귀신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일찍이 송계기행(松溪記行)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지은 것이다. 을 보니,

 

청병(淸兵)이 송산(松山)에 진격하여 포위했을 때 우리나라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봉림저(鳳林邸)에 있을 적인데, 소현세자(昭顯世子 효종의 형)를 모시고 함께 청의 진중에 있었다. 막차(幕次)가 지세로 인해서 불편하여 겨우 딴 곳으로 옮겼던 바, 이날 밤 영원총병(寧遠摠兵) 오삼계(吳三桂)가 기병(騎兵)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에운 것을 뚫고 도망하려던 곳이 바로 처음에 군막을 쳤던 곳이다.”

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군막을 옮긴 것은 하늘이 돕고 귀신이 보살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1백 명이 넘는 종인(從人)들이 만일 왕령(王靈)에 의탁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그들의 습격에 유린당하는 변을 면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불행히 아홉 번 죽을 고비를 당할지라도 임금을 모시고 있는 자리가 곧 복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하에 있을 때에, 반선(班禪)이 거처하는 금전(金殿) 용마루 위에 금으로 만든 한 쌍의 누런 용이 말처럼 일어서서 있었다. 길이는 모두 두 길이 넘는데, 밑에서 보는 것이 이럴 적에야 그 길이와 높이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양이 보통 그림에 보는 신룡(神龍)과는 같지 않았다. 양용수(楊用修 () 학자 양신(楊愼). 용수는 자) 단연록(丹鉛錄)에는,

 

용은 새끼 아홉 마리를 낳는데, 용이 되지 못하면 첫째는 비희(贔屭)인데 모양이 거북 같이 생겨 무거운 짐을 잘 지키는데, 지금의 비석 바탕 돌로 거북 모양을 만든 것이 이것이요, 둘째는 치문(鴟吻)인데 성질이 바라보기를 좋아하므로 지금 지붕 모퉁이에 짐승 모양으로 만든 것이요, 셋째는 포뢰(蒲牢)인데 울기를 잘하므로 지금의 종()에 매는 끈이 되었고, 넷째는 폐간(狴犴)인데 모양이 범과 비슷하므로 옥문 앞에 세웠고, 다섯째는 도철(饕餮)인데 성질이 먹기를 잘하므로 솥뚜껑에 붙이고, 여섯째는 패하()인데 성질이 물을 좋아하므로 다리 기둥 위에 세웠고, 일곱째는 애자(睚眦)인데 성질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므로 칼자루에 새겼고, 여덟째는 금태(金蛻)인데 모양이 사자 같고 성질이 연기와 불을 좋아하므로 향로에 세우고, 아홉째는 초도(椒圖)인데 모양이 소라 같이 생기고 성질이 문을 닫고 잘 숨으므로 문간에 세웠다.”

라고 하였다.

또 금전(金殿) 사각에 있는, 금으로 만든 황룡(黃龍)은 용마루 위에 있는 것과 모양이 또 달랐다. 치미(鴟尾), 치문(鴟吻)이니 하는 말도 전하는 기록이 모두 다르다. 대개 중국에서는 궁전을 이룩할 때는 반드시 치미와 치문을 먼저 만들어서 그 집의 성하고 허물어질 것을 점치게 되므로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대류총귀(對類總龜 저자 미상)에는 말하기를,

 

용이 새끼 아홉 마리를 낳는데, 하나는 조풍(嘲風)으로 모험을 좋아하므로 전각 귀퉁이에 세우고, 하나는 치문(蚩吻)으로 삼키기를 좋아하므로 전각 용마루에 세운다.”

하였고, 박물지일편(博物志逸篇 저자 미상)에는 말하기를,

 

이문(螭吻)은 모양이 짐승 같은데 바라보기를 좋아하므로 전각 모에 세우고, 만전()은 형상이 용과 비슷한데 성질이 풍우를 좋아하므로 지붕 용마루에 쓴다.”

하였으니, 단연록(丹鉛錄) 이야기와 모두 다르다. 한 무제(漢武帝)의 백량전(柏梁殿)에 불이 났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이름을 규()라 하는 바닷고기가 있어 그 꼬리가 치()와 비슷한데 물결을 치면 비가 내리므로 그 형상을 따라 만들어 전각 용마루 위에 얹어 두면 화재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였고, 또 건장궁(建章宮)에 불이 나서 무당은 예방으로 치미(鴟尾) 형상을 전각 용마루에 설치할 것을 아뢰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배 꼬리를 치라고 하는데 치미라는 치인 것 같기도 하다.  박물지일편(博物志逸篇)에는,

 

비희(贔屭)는 성질이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하므로 비석을 지게 하였고, 이호(螭虎)는 모양이 용 같이 생기고 성질이 문채를 좋아하므로 비문 위에 세운다.”

하였고,  대류총귀 에는 말하기를,

 

용의 아홉 마리 새끼 중에 하나는 패하(霸夏)라 하여 무거운 것을 좋아하므로 비석 바탕으로 하였고, 비희는 글을 좋아하므로 비문의 양쪽에 새긴다.”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역시 다 각각 다르니, 용 새끼의 명호(名號)와 성정(性情)을 무엇으로 알 것인가. 옛날 이야기의 부회(附會)함이 이런 것이 많았다.

복희씨(伏羲氏)로부터 지금의 건륭 황제까지 정통(正統)을 이은 천자가 모두 2 50명이다. 만일 여후(呂后 ()의 여치(呂雉))와 무후(武后 () 무조(武曌))와 정통이 아닌 천자 조조(曹操)의 위(), 손권(孫權)의 오()와 남북조(南北朝)로부터 오대(五代)까지 통계(通計)한다면 모두 85명이 될 것이요, 참위(僭僞)한 제왕 후예(后羿)로부터 주()의 홍화 황제(洪化皇帝)인 오삼계(吳三桂)까지 친다면 도합 2 70명이요, 춘추(春秋) 때 임금으로 불린 것이 4 90여 명이다.

산동(山東) 등 여러 곳을 순행하면서 농사를 관리 감독하고 겸하여 군무를 정리하던 도찰원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은 황제의 거룩한 덕이 갖추어 지극하시고 하늘의 어진 마음이 가지런히 높으시어 상서로운 기린(麒麟)이 나서 아름다운 응보(應報)가 밝게 비치고 있는 일을 삼가 보고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옹정 10년 임자년(1732) 6 13일 포정사(布政使) 정선보(鄭禪寶)가 조주거야현지현(曺州鉅野縣知縣) 요개춘(寥開春)의 보고에 근거하여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옹정 10 6월 초 5일 신성보(新城保)지보(地保) 축만년(祝萬年) 등이 말하기를, ‘이 보에 속한 이가장(李家庄) 이은(李恩)의 집에서는 금년 6월 초 5일 진시(辰時)에 소가 기린을 낳았는데, 금빛이 싸고 돌아 진시(辰時)와 사시(巳時) 두 시()를 지낸 뒤에는 원근의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모두들 기이하다고 말하면서 반드시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기린이 난 곳까지 직접 가서 삼가 자세히 검사해 보니, 노루 몸뚱이에 소 꼬리였습니다. 몸뚱이에는 모두 갑옷 같은 것을 뒤집어 썼는데 붉은 털로 기운 것같이 얼룩거렸고, 광채가 찬란하여 실로 성대(聖代)의 상서로운 징조로 보이기에 상부에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본직(本職)이 즉시 사람을 거야(鉅野 산동성에 있다)로 보내어 더 자세히 조사했던바, 그들의 말에 의하면, 기린의 몸뚱이는 길이가 1 8촌이요, 높이가 1 6촌이요, 노루 몸뚱이에 소 꼬리로 머리에는 고깃덩이로 된 뿔이 났고, 이마에는 곱슬 털이 있으며, 눈은 수정 같고 이마는 백옥 같으며, 온 몸에는 비늘 갑옷이 되어 모두가 푸른 빛을 띠었다 합니다. 비늘들은 자줏빛 털로 기운 것 같고, 등은 검정 빛으로서 세 마디로 되었는데, 가운데 마디는 털이 모두 꼿꼿이 섰고, 앞마디는 털이 앞으로 향해고, 뒷마디는 털이 모두 뒤로 향했다 합니다. 가랑이와 배와 발굽과 다리에는 흰 털이 났고, 꼬리 길이는 5 5푼인데 꼬리 끝에는 검정 털 4개가 났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려서 본직에게 보내 왔으므로 본직이 삼가 열람해 보니 실로 즐겁기 짝이 없었습니다. 즉시 공손히 향안(香案)을 설치하고 대궐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려 경축하기를,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도덕이 청녕(淸寧)에 맞으시고, 공훈이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하늘의 뜻을 본받아 정교를 세워서 육부(六府)가 다스리고 삼사(三事)가 조화되었으며, 표준을 세워서 백성에게 펴 주었고, 오전(五典 오륜(五倫))이 도타워지자 구주(九疇)가 펴졌습니다. 그리하여 빛나는 별이 제 궤도에 따르고 상서로운 하늘에는 쌍구슬(해와 달)이 반짝이고, 맑은 이슬이 달에 맺혀서 수놓인 듯한 이 지구에서 방울방울 듣고 있습니다. 황하(黃河)는 조( 산동성에 있는 지명)( 산동성에 있는 지명) 사이에 맑았으니 그 물결이 비단 진( 섬서성)( 감숙성)에서만 맑은 것이 아니요, 상서 구름은 수( 산동성에 있는 수명(水名))( 산동성에 있는 수명)의 가에 나타났으니 어찌 전( 운남성)( 귀주성)에서만 빛났으리까. 이제 거야의 시골에서 다시 상서로운 기린이 나타났는데, 사슴의 몸뚱이에 소의 꼬리로써 이상한 꼴을 지녔고, 외 뿔에 둥근 발은 모두 괴이한 물건이라 하였습니다. 본직(本職)은 삼가 서경(書經) 춘추(春秋)를 상고하여 보니 복건(服虔 후한(後漢)의 학자)의 주()에 이르기를, ‘왕위에 있는 이가 보살핌이 밝고 예법이 다달았을 때에 기린이 나타난다.’ 하였고,  예위(禮緯 저자 미상)의 두위의(斗威儀 예위의 일종)에는 이르기를, ‘임금이 정치와 송사가 없으면 기린이 교외(郊外)에 나타난다.’ 하였고 효경(孝經)의 원신계(援神契 효경의 편명)에 이르기를, ‘임금의 덕이 새와 짐승에게까지 이르면 기린이 나타난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헌원(軒轅 황제(黃帝))의 조정에는 기린이 놀았다는 기록이 있고, 성왕(成王)강왕(康王)의 때에 인지(麟趾 시경의 편명)를 노래하였습니다. 이 신물(神物)이 탄생함을 보아서 더욱이 상서로운 증험을 보았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황제께옵서 그 공경이 사표(四表)에 빛나기를 마치 일월이 내려 쬐는 것과 같으며, 정치가 팔굉(八紘)에 두루 미쳐서 마치 건곤이 널리 덮였음과 같았습니다. 하물며, 이 동성(東省)은 땅이 수도와 멀지 않아서 교화가 더욱 빠르고 길이 강구(康衢)에 접하여 은혜를 입음이 가장 흡족하였으니 이로서도 기린의 상서를 신빙할 수 있겠습니다. 오색의 찬란한 빛은 문명이 크게 열릴 것을 미리 점쳤으며, 사령(四靈 기린거북)의 으뜸이었으니, 다가오는 복록을 예측할 수 있겠습니다. 본직은 외람되이 봉강(封疆)의 책임을 맡아서 이런 성미(盛美)한 일을 만났사오니 하늘로부터 내린 명령에서 완전한 복록이 이르렀음을 알았습니다. 원컨대 승항(升恒)의 찬송을 본받아서 배무(拜舞)의 정성을 펴려 하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이 일을 사신(史臣)에게 내리시어 중외(中外)에 선포하고, 교수(郊藪)에 일러서 천추에 하악(河岳)의 기이한 일을 표하며, 도서(圖書)에 실어서 만고에 규루(奎婁)의 별을 빛내옵소서. 황제께옵서는 친히 보아서 시행하시옵기를 빌면서 이 글을 갖추오니 귀부(貴部)에 자문하시어 대조해 보시옵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니, 이는 예부(禮部)에 바친 글이다. 이 글을 보고한 것은 산동 독무(督撫)()이란 성을 가진 자이다. 이 글은 우리나라 과려(科儷 과거문(科擧文)의 병려체(騈儷體)) 문체에 비교하면 소활하나 화려하고 풍성한 맛이 있어 저절로 고색(古色)이 났다. 윤형산(尹亨山)이 일찍이 말하기를,

 

산동에는 편벽되이 기린이 잘 나서 강희 때는 네 마리를 모두 소가 낳았고, 용정 때는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소가 두 마리를 낳고 돼지가 세 마리를 낳았으며, 금상(今上) 성조(聖朝)에는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사천(泗川)복건(福建)절강(浙江)하남(河南)에서 두 해 동안에 모두 소가 낳았고, 한 마리는 직예(直隸) 양향(良鄕)에서 돼지가 낳았답니다.”

하였다.

순치(順治) 병신년(1656) 10 16일에, 네 공주(公主)가 각각 막북(漠北)으로 돌아갔는데, 그들은 모두 몽고왕의 처인 까닭이다. 길은 옥하관(玉河館) 앞을 거쳐 갔는데, 몽고왕은 부하들을 데리고 약대와 말을 장하게 차리고 달리는데, 공주도 역시 말을 타고 갔다. 번인(番人)과 한인들이 그 뒤를 따라 가는 것은 모두 멀리 전송을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이 본 일이라 한다.

건륭 41년 병신년(1776) 1 25일에 내각이 황제의 유시를 받들었는데, 그 글에는,

 

전에 명의 말년에 순절(殉節)한 여러 신하들이 저마다 각각 그 임금을 위해서 바친 의리와 충렬이 가상할 만하다 하여 시호를 내리기 위해 이를 조사해 밝힘이 마땅하므로 즉시 태학사(太學士)와 구경(九卿)경당(京堂)한림(翰林)첨사(詹事)과도(科道)들에게 명하여 의논을 모아 주문(奏聞)해서 충량(忠良)한 자를 표창함으로써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였던 것이다. 다시 생각건대 건문(建文 ()의 혜제(惠帝). 건문은 연호)이 쫓겨 날 때 그 신하들로서 절개를 지켜 죽은 자로 사책(史冊)에 실린 이는 매우 많았는데, 당시의 영락(永樂 () 성조(成祖). 영락은 연호)은 지위가 본래 번신(藩臣)으로서 모반하여 음모로 나라를 빼앗았으니,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당연히 의리로 보아 함께 한 하늘 밑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제태(齊泰)나 황자징(黃子澄)은 경솔할 뿐 아니라 꾀가 적었고, 방효유(方孝孺)는 식견이 오괴하여 어린 임금을 돕기에 부족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임금을 떠받들고 역적을 베어 없애고자 한 심정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으나 오히려 군사를 모집하여 끝내 저항하면서 목숨을 바치고 일족이 희생되었으되 백절불굴한 그들의 정성은 세상에 교훈할 자료로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경청(景淸)이나 철현(鐵鉉) 등은 혹은 강개 비분하게 자기 몸을 바쳤고, 혹은 잠자코 의리를 지켜, 비록 죽는 방법은 달랐으나 지조와 절개는 늠름하여 모두 대의를 밝혔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이다. 심지어 동호(東湖)의 초부(樵夫)나 솥 땜장이까지도 비록 성명은 없어져 드러나지 못했지만 그 심정들은 모두 족히 가상하다 할 것이다. 특히영락은 성질이 잔학하여 자기 맘대로 음형(淫刑)을 써서 참혹한 도륙(屠戮)을 마치 외 덩굴을 끊듯이 단번에 죽여 없앴으니 사람의 심리라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역사를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미상불 분하고 한스러움을 참지 못했다. 명의 중엽(中葉)에 이르러 비록 조금 법을 늦추었으나 사정에 따르고 곡휘(曲諱)하여 끝내 드러내어 표창을 못했으므로 충신과 의사들의 옳은 행실은 오랫동안 나타내지 못했으니 실로 민망하고 불쌍한 일이다. 무릇 전조의 혁명(革命) 시기에 우리에게 반항하여 온 자까지도 그들의 충성을 생각하여 특히 표창을 해주었는데, 더구나 건문 시대의 여러 신하들은 불행히 내란을 당하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인()을 이루고 의()를 취했거늘 어찌 이를 그대로 사라지도록 묻어 없앨 것인가. 이들에게도 마땅히 모두 시호를 하사하여 어둠을 헤치고 광명을 밝혀야 할 것이다. 공도(公道)를 바로잡아 처리할 것은 전에 지시한 대로 태학사에게 맡겨 한꺼번에 자세한 조사와 의논을 합쳐서 나에게 보고함으로써 충정(忠貞)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나의 지극한 뜻에 맞도록 하라.”

하였다.

황명(皇明) 숭정 11(1638)에 우리나라 장수 이시영(李時英)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건주(建州)로 들어갔더니 청인은 시영을 협박하여 앞장을 세우고 명의 도독(都督) 조대수(祖大壽)와 송산(松山)에서 싸우게 했다. 토병(土兵)들은 모두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중에 하령하여 청병(淸兵)의 머리 하나에는 은 5십 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은 1백 냥을 준다 하였다. 조선 군사 중에 이사룡(李士龍)은 성주(星州) 사람으로서 홀로 차마 총에 탄환을 재지 못하고 무릇 세 번을 쏘아도 아무도 상하지 않았던 바 이는 본국의 심정을 밝히려 함인데 청인이 이것을 깨닫고 드디어사룡을 베어 조리를 돌렸다. 조대수의 군사는 이것을 바라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대수는 이에 깃발 위에 큰 글씨로 조선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이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하였다. 지금 성주 옥천(玉川) 위에 충렬사(忠烈祠)가 있으니, 곧 이사룡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진실로 황제로 하여금 사룡의 이름을 듣게 했다면 특별히 시호를 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나는 송산을 지나면서 글을 지어 사룡의 혼을 조상하였다.

전목재(錢牧齋) 겸익(謙益)의 자는 수지(受之). 그의 신분은 반은 중국이요 반은 오랑캐이며, 그의 문장은 반은 유교요 반은 불교이다. 그의 명절(名節)은 땅을 쓸다시피 되어 마침내는 부랑자(浮浪子)의 칭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위로 스승되는 손고양승종(孫高陽承宗 고양은 손승종이 살던 지명(地名)이다)에게 부끄러울 것이요, 아래로는 그의 제자 구 유수 식사(瞿留守式耜 유수는 벼슬 이름)에게 부끄러울 것이요, 중간으로는 그의 아내 하동군(河東君) 유여시(柳如是)에게 부끄러울 것이다. 수지(受之)가 늙어 죽을 때는 하동군이 아직도 젊었는데, 여러 악소년들이 수지를 질투하던 나머지 유를 욕보이고자 했더니, 유는 자살해 버렸다. 지금 건륭의 조서를 보면 수지를 배척해 말하기를,

 

스스로 청류(淸流)인 듯이 큰소리를 치다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항복을 하고서 거짓 중 노릇을 하여 창자도 없고 수치도 몰랐다.”

하였으니, 가위 전겸익으로서도 부끄러워 죽을 일이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수지의 이 같은 실행(失行)을 모르고 다만 그의 유학(有學 전겸익의 시문집) 초학(初學 전겸익의 시문집) 등 책만을 보고는 그를 미상불 애석히 여길 뿐 아니라, 그의 시문(詩文)을 초출하여 문 승상(文丞相 문천상(文天祥). 승상은 벼슬)이나 사첩산(謝疊山 사방득(謝枋得). 첩산은 호)의 글 아래에 많이 늘어놓기도 한다. 근년에는 자못 그의 책판을 없애고 간직하기를 금하는 영이 있다는 말도 들었지마는 그러나 과거 공부를 하는 속생(俗生)으로서는 반드시 다 알지 못할 것이므로 여기 자세히 기록해 둔다.

소동파가 고려를 미워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당시에 고려는 오로지 거란을 섬기고 있었는데, 특히 중국을 사모할 뜻으로 때로는 송의 조정을 찾았다. 중국 선비들은 고려의 충정(衷情)을 알뜰히 보아 주지 않고 혹은 조정을 정탐하지나 않는가 의심한 것은 전혀 괴이할 것이 없다. 또 그 조공하는 길이 명주(明州)로부터 하륙(下陸)하여 반드시 유신(儒臣)으로 관반(館伴)이 있어, 그 막대한 비용은 요의 사신에 다음 가고 있다. 국가와의 외교도 아니요 속번(屬藩)도 아닌데, 강한 하()를 접대하는 것보다 더 많으니 당시 사대부들이 무익(無益)하다고 말한 것도 마땅한 일이다. 지금 우리 조정이 황명(皇明)에 충순(忠順)한 지도 이미 3백 년이나 되어 일심으로 중국을 사모하기는 고려보다 더 했건만, 동림당(東林黨)의 무리들은 문득 조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목재는 동림당의 괴수인즉 우리나라를 야비한 오랑캐라고 보는 것을 청론(淸論)으로 삼았으니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 있으랴. 더구나 우리나라 시문(詩文)에 이르러서는 말살(抹殺)하기가 일쑤여서 그의 황화집(皇華集)()에 보면,

 

본조(本朝)의 시종(侍從)으로 있던 신하가 칙사가 되어 고려에 갈 때는 으레 황화집을 편찬한다. 이 책은 가정(嘉靖) 18년 기해년(1539)에 황천(皇天) 상제(上帝)에게 태호(泰號)를 올리고 황조(皇祖)황고(皇考)에게 성호(聖號)를 올릴 때 홍산(鴻山) 화수찬(華修撰) ()이 황제의 조서를 반포하면서 지은 것이다. 조선의 문체(文體)는 평연(平衍)한데 여러 사림(詞林)들이 깎고 고치는 것을 아끼지 않고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보배롭고 고운 시구는 극히 적었다. 그 중 배신(陪臣)의 편집(篇什)을 보면 글자 두 자가 일곱 자의 뜻을 포함하였으니, 예를 들면,

나라 안에 창도 없이 한 사람만 앉아 있네 / 國內旡戈坐一人

와 같은 글귀는 그 나라의 소위 동파의 체()일 것이니, 제공(諸公)은 아예 그들과 더불어 창수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나라 문체가 진실로 그의 말과 같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어찌 헐뜯기를 이 같이 할 수가 있었으랴. 나는 짐짓 이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목재가 우리나라를 훼방하는 것이 동파와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증(錢曾)의 자는 준옥(遵玉)이니, 목재의 족손(族孫)이다. 서건학(徐乾學 청 나라 학자)과 함께 경전 해석을 편집하여 당시 오매촌(吳梅村 () 학자 오위업(吳僞業). 매촌은 자)공지록(龔芝麓 () 학자 공정자(龔鼎孶). 지록은 호)과 함께 삼대가(三大家)로 불렸다. 모두 명조의 현달한 관리로서 역시 지금의 청조에 벼슬한 자들이다. 그가 조선에 칙사로 나갈 유홍훈(劉鴻訓)에게 준 목재의 글을 주석한 것을 보면 말이 실상이 아닌 것이 많고, 또 이 제독(李提督 ()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원조한 일에는 더욱 잘못된 기록이 많으니 가히 개탄할 일이다.

지금 황제가 전겸익을 배척한 조서에서 말하기를,

 

오히려 문자(文字)를 빌려 구차하게 살아남은 허물을 덮어 가리려고 하였다.”

한 것은 그의 간사한 심정을 깊이 조감한 것이니, 고려판(高麗板) 유문(柳文 유종원(柳宗元)의 글)의 발()을 쓴 것 같은 유가 그것이다. 그 발에는,

 

고려 판각(板刻) () 유선생집(柳先生集 유종원의 시문집(詩文集))은 견지(繭紙)가 탄탄하게 정치하였으며 자획이 가늘고 빳빳해서 중국에서도 역시 좋은 책이라 할 것이다. 배신(陪臣) 남수문(南秀文 조선 때의 학자)의 발문 앞뒤에는 공손히 쓰기를, ‘정통(正統) 무오년(1438) 여름과 정통 4(1439) 겨울 11월이라.’ 하였으니, 정삭(正朔)을 높여서 천하를 통일하고 있는 뜻이 내왕하는 편지에도 숙연히 나타나 있었다. 대개 기자의 풍교(風敎)가 그대로 남아 있고 명의 문화가 만맥(蠻貊)에게까지 베풀어진 것은 실로 당의 시절에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기울어지다시피 명이 망한 뒤에 고려는 동문(同文)의 꿈을 짓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는 이 책을 어루만지면서 산연(潸然)히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 배신(陪臣)으로서 교서를 받들어 책을 편찬한 자는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최만리(崔萬里), 직제학(直提學) 김빈(金鑌), 박사(博士) 이영서(李永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조수(趙須) 등이요, 남수문의 응교(應敎) 직함을 썼는데, 조산대부 집현전응교 예문관응교지제교 경연검토관 겸춘추관기주관(朝散大夫集賢殿應敎藝文館應敎之製敎經筵檢討官兼春秋館記注官)이라 하였다. 이제 아울러 써서 이로써 조선의 고사(故事)를 보존하려 한다. 조선 사람들이 매양 동문몽(同文夢)이란 한 마디 말을 고실(故實)로 삼아서 과거 때에 시제(詩題)로 쓰고 있으니 더럽기 심하고 심한 노릇이다. 진입재(陳立齋 미상)의 집에는 고문백선(古文百選)과 유문초(柳文抄)가 있었는데, 모두 한구자(韓遘字)로서 이것을 고려판(高麗板)이라 하여 자못 귀중히 여기고 있으니 대개 이 발문에 근본한 것이다.

우리나라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홍류동(紅流洞)에 원융각(元戎閣)이 있어 명의 중군도독태자태보(中軍都督太子太保) 이여송(李如松)이 쓰던 갓과 전포와 당시에 지은 시 한 편을 보관해 두었다. 내가 일찍이 해인사를 유람할 때에 갓과 도포를 구경하니, 갓 모자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니 그 머리통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절에 있는 중 가운데 키가 가장 큰 자를 뽑아 전포를 입혀 보았더니 땅에 한 자나 남게 끌렸다. 만력 임진에 우리나라가 왜인의 침로를 당했을 때 공()은 요계보정산동군무제독(遼薊保定山東軍務提督)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도와 평양(平壤)으로 달려 나와서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을 모란봉(牧丹峰) 아래서 격파시켰다. 장사(壯士) 누국안(婁國安)을 행장의 영채에 보내서 빼앗아 간 왕자 순화군(順化君 조선 선조(宣祖)의 여섯째 아들)과 대신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 등을 빼앗아 왔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지 6년 뒤에 요동에서 전사했는데, 의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조서를 내리고 소보(少保)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불렀다. 공은 우리나라로 올 때에 군사를 몰아 조령(鳥嶺)을 넘어 문경(聞慶)으로부터 충주(忠州)로 돌아왔으므로 그의 갓과 전포가 합천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공은 본래 조선 사람으로 그의 원조(遠祖)는 영()인데, 홍무(洪武) 연간에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가 양평(襄平)에 살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의 근본을 아는 자가 드물지만 일찍이 왕이상(王貽上) 대경당집(帶經堂集)에 실린 청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이휘조(李輝祖)의 신도비(神道碑)에는,

 

철령(鐵嶺) 이씨는 영원백(寧遠伯) 성량(成樑)으로부터 시작하고 문벌이 명의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여 본조에 들어와서는 가문이 더욱 커져서 안으로는 경악(經幄)에 참례하게 되고, 밖으로는 장수의 지위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씨의 선조는 조선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양평에 옮겨 오기는 영이었는데, 영은 처음 군공(軍功)으로 철령위도지휘사(鐵嶺衛都指揮使)를 받았고, 그의 아들은 문빈(文彬)이요, 문빈의 아들 다섯중 맏이가 춘미(春美), 춘미의 아들이 경()이요, 경의 아들이 영원(寧遠)이요, 영원의 장자(長子)가 공이다.”

했으니, 휘조는 춘미의 아우 춘무(春茂)의 후손이다. 이로써 공이 우리나라 출신인 것을 더욱 알 수가 있겠다. 숭정 말년에 공의 아들과 여백(如栢)여매(如梅)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탈신(脫身)해 온 것은 그 부형들이 조선에서 큰 공을 세웠은즉 비단 옛 은혜를 판 것만이 아니라 역시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향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혁명이 나면서 우리나라 역시 기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우리나라에 온 여러 이씨들도 감히 그 소자출(所自出)을 밝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선무문(宣武門) 안 첨운패루(瞻雲牌樓) 앞에서 한 미소년(美少年)을 만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영원백의 후손으로 이름은 홍문(鴻文)이라 하였다. 이튿날 나를 비단 점방으로 찾아와 품속에서 인쇄한 족보(族譜) 두 권을 내놓는데,  철령이씨세보(鐵嶺李氏世譜)로서,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계통을 이어서 곧 조선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가 전에 알던 것과 더욱 들어맞아 의심할 것이 없었다. 홍문의 할아버지 되는 편덕(偏德)은 금년에 나이 82세인데, 풍증으로 기동을 하지 못하고 그 손자로 하여금 두루 조선 사람의 여관을 찾아, 뜻 있는 사람을 만나 이것을 전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살피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더구나 이훤(李萱 미상) 같은 자가 지금 우리나라에 벼슬을 하고 있는 줄 모르고, 나 역시 감히 영원백의 후손으로 누구 누구가 본국에 있다고 분명히 말을 못했다. 날이 저물어 여관으로 돌아와 급히 촛불을 켜고 내원(來源)의 무리와 더불어 보니, 대개 영원백의 장자가 여송(如松)이요, 여송의 한 아들이 성충(性忠)이요, 성충의 아래로는 무후(無後)라 하였는데, 이것은 성충이 달아나서 조선으로 도망해 온 까닭이다. 내 비록 이훤과 일면(一面)도 없으나, 마땅히 조선으로 나가면 전하려 한다.

만력 시절에 형문(荊門 호북성에 있다) 사람 강국태(康國泰)는 법에 걸려 요양(遼陽)에서 귀양을 살았다.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건주(建州)를 칠 때 국태는 종군했다가 전사했고, 아들 세작(世爵)은 나이 17세에 바로 청군(淸軍) 속에 들어가 아버지의 시체를 찾았다. 병부(兵部)웅정필(熊廷弼)이 휘하에 두었더니, 요양이 함락되자 세작은 마등산(馬登山)으로 도망해 들어갔다가 밤에 참호를 헤엄쳐 요새(要塞)를 빠져 나와서 다시 봉황성(鳳凰城)을 지키더니, 성이 함락되자 금석산(金石山)으로 들어가 날마다 나뭇잎을 먹으면서 죽음을 면하고, 의주(義州)로 나와서 드디어 난리를 피하여 회령부(會寧府)에 살았는데, 항상 초() 제도의 관을 쓰고 자기 집을 초책당(楚幘堂)이라 불렀다. 내가 금석산을 지날 때 의주 마부꾼들이 가리키면서 세작이 은신했던 곳이라 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기이한 말이 많았다.

고려 충선왕(忠宣王)휘는 장()이다. 은 원()에 가서 연경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염복(閻復)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우집(虞集) 등과 더불어 교유하면서 서사(書史)를 연구했다. 원에서는 그를 심양왕(瀋陽王)에 봉하고 승상으로 삼았다. 박사 유연(劉衍) 등을 강남(江南)으로 보내어 서적을 사들이다가, 배가 파선하여 당시 판전교(判典校) 홍약(洪瀹)이 남경(南京)에 있으면서 1백 정()을 연에게 주어 서적 1 8백 권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또 황제에게 품하여 책 4 70권을 왕에게 하사했으니, 이것은 모두 송의 비각(秘閣)에 간수했던 책들이다. 심양왕은 원 나라 영종(英宗)에게 강남에 강향(降香)할 것을 청하여, 강소(江蘇)절강(浙江)에 놀아 보타산(寶陀山)에 이르렀고, 이듬해에 또 강향을 청하여 금산사(金山寺)까지 이르렀더니, 황제는 사자를 보내어 급히 불러 군사를 시켜 옹위해 가지고 본국으로 호송(護送)하라 명령했다. 왕은 지체하고 즉시 떠나지 않으니, 황제는 명령하여 머리를 깎고 불경을 공부하라는 핑계로 토번(吐蕃)의 살사길(撒思吉) 땅으로 유배(流配) 시켰다. 박인간(朴仁幹)  18명이 그를 따라 갔는데, 이곳은 연경에서 1 5천리나 떨어진 곳이니, 충선왕이 어찌 한갓 왕의 천승(千乘) 지위를 버리고 서적만 탐혹해서 그랬을 것이랴. 옛날 남월왕(南越王) 울타(尉陀)는 육가(陸賈 () 때의 변사(辯士))를 만나고 매우 기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그와 함께 술을 마셔가며 말하기를,

 

()에서는 족히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이 없더니, 당신을 만난 뒤로 날마다 못 듣던 소문을 듣는 것이 이 같거든 참으로 눈으로 보게 됨이리요.”

했다 하니, 소위 하백(河伯)이 바다를 보고 탄식한 것과 같도다. 당시의 종신(從臣) 이제현(李齊賢)의 무리는 비록 문학과 재망(才望)으로 우리나라 거벽(巨擘)이라 일컬었지만, ()()()()의 틈에 끼었다면 응당 하백이 바다를 본 것처럼 부끄러워 했을 것이다. 옥동교(玉棟橋) 가에서 멀리 오룡정(五龍亭)을 바라볼 때 참으로 이른바 인간의 세상이라 하겠다.

육비(陸秘)의 자는 기잠(起潛)이며, 호는 조음(篠飮)이요, 항주(杭州) 인화(仁和) 사람이다. 건륭 병술년(1766) 봄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과 함께 연경에 와서 홍덕보(洪德保)와 간정호동(乾淨衚衕)에서 사귄 회우록(會友錄)이 있는데, 나는 일찍이 이 책에 서()를 써 주었다. 조음의 집은 서호(西湖)인데 동네 이름은 호서대관(湖墅大關)의 주아담(珠兒潭)이다. 기잠은 말하기를,

 

육계(肉桂 한약 재료)는 교지(交趾 월남(越南)) 산물로 근세에는 구하기 어려우며, 육계는 성질이 화기(火氣)를 이끌고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요, 계피(桂皮 한약 재료)는 숨은 화기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 용처가 아주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망령되이 두꺼운 계피를 육계로 대용(代用)하고 있으니 위험한 일이다. 나는 일찍이 이 이야기를 두루 의원들과 약국에 알렸던 바, 마침 통주(通州) 어느 약국에서 육계를 찾았더니 주먹 만한 놈을 내어 보이면서 값은 은 50냥이라 했다. 범생(范生)이란 자가 나를 따라 오면서 가만히 말하기를,

 

이것도 진품이 아닙니다. 중국에서도 진품이 떨어진 지 이미 20여 년이나 되었답니다.”

하였다.

진택장어(震澤長語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조종(祖宗) 때 세용(歲用)은 황납(黃蠟) 한 가지로만 말하더라도, 국초(國初)에는 일년에 불과 2천 근이던 것이 경태(景泰)천순(天順) 사이에는 8 5천 근이 되었고, 성화(成化) 이후는 12만 근으로 불었으니 그 나머지는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정덕(正德) 16(1521)에 공부(工部)의 아뢴 것을 보면, 건모국(巾帽局)에서 소비되는 내시(內侍)의 신에 드는 삼실과 사모(紗帽)와 가죽 등 재료가 성화 연간에는 20여 만이요, 정덕 89년에는 46만에 이르고, 말년(末年)에는 72만에 이르렀다 하니, 이것으로도 그 나머지는 가히 알 만한 것이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돈 열 푼을 한 돈이라 하고 열 돈을 한 냥이라 한다. 지금 중국에서는 백 60푼이 1() 16() 1()이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돈 한 문()을 한 푼()이라 하고 돈 열 푼을 한 돈()이라 한다. 이형암(李炯菴) 덕무(德懋),

 

이것은 저울과 자에서 나온 것이라 10()가 한 푼이요, 10푼이 한 촌()이며, 10촌이 일척(一尺)인데,  1문의 두께는 10()를 쌓은 두께로 한 푼이 되고, 문의 두께는 10푼의 두께로 일 촌이 되니 백 문의 두께는 한 자이다. 저울로 치면 10리가 1푼이요, 10푼이 한 돈이고, 열 돈이 한 냥이니, 지금 돈의 명수(名數)는 저울에서 딴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돈은 대소와 후박(厚薄)이 고르지 못해서 이를 표준하기 어렵다.

해외기사(海外記事) 1권은 영표(嶺表)의 두타(頭陀) 산엄(汕厂)이 강희 갑술(1694)에 대월국(大越國)에 갔을 때 본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대월국은 경주(瓊州) 남쪽 해로(海路)로 만여 리인데 매일 아침이면 전조(箭鳥)란 새가 바다 가운데로부터 날아와 배를 한 바퀴 돌고 앞으로 향해 날아갔다. 뱃사람들은 이것을 신조(神鳥)라고 하며, 바다 가운데 물결 위에는 여러 가지 괴이한 것이 보였다. 혹은 붉고 혹은 검은 작은 기가 있어 잠깐 잠겼다가 잠깐 뜨곤 하였다. 이것은 한 가지가 지나가면 한 가지가 다시 와서 계속하여 십여 가지씩 오는데, 뱃사람들은 이것을 귀전(鬼箭)이라 하며 보기만 해도 이롭지 못하다고 한다. 풍랑(風浪)이 크게 일고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밀려오면 조룡(鳥龍)이 꿈틀거리며 배 왼편에 나타나는데, 뱃사람들은 급히 유황과 닭털을 태우고 더러운 물건을 물에 뿌리면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했다. 하루 저녁에는 음운(陰雲)이 컴컴하고 성월(星月)이 빛이 없는데 홀연 뒤에서 화산(火山)의 불빛이 돛대 위에 가까이 비치더니 마치 불[]과 석양처럼 밝아 왔다. 뱃사람들은 나무로 뱃전을 두드리며 계속 소리를 내었으니, 이런 지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배의 키가 그 몸뚱이에 걸린 것을 알았다. 배를 조금 옆으로 돌리자 불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으니, 대개 이것은 해추(海鰍)의 눈에서 나는 번갯불이라 한다. 이미 그 나라에 이르니, 모두 나체(裸體)에 머리를 풀고 수건으로 앞을 가렸을 뿐이다. 북상투를 틀고 이빨에는 옻칠을 하고 물 위에는 연꽃이 떴는데, 푸른 잎이 번득거리며 뿌리도 없고 줄기도 없었다. 그 나라에서 전쟁을 할 때는 모두 코끼리를 사용하고 국왕이 연무(演武)할 때는 코끼리 열 마리로 짝을 지어, 등에는 붉은 칠을 한 안장을 얹고 세 사람이 코끼리 한 마리에 함께 타는데, 모두 금 투구에 초록빛 옷을 입고 창을 들고 그 등에 선다. 풀을 묶어 사람을 만들어 축대 위에 벌여 세운 다음 군진(軍陣) 모양으로 동고(銅鼓)를 연해 울리고 화기(火器)를 함께 쏘면, 여러 군사들은 앞으로 돌격하여 코끼리 떼에 부딪친다. 이때 코끼리 떼는 역시 축대를 밟고 올라가 앞으로 달아나는데, 모든 군사들은 물러서서 피하고 코끼리들은 저마다 코로 풀사람을 말아 들고 돌아온다. 국가에서 죄인을 사형할 때는 코끼리를 놓아 사람을 몇 길 위로 던지고 이빨로 받게 하여 가슴과 배를 뚫어 시체가 금시에 썩도록 하기에, 산엄이 이 형벌을 없애도록 권했었다. 국왕은 말하기를,

 

이 나라 산중에는 서우(犀牛)와 코끼리가 떼를 지어 사는데, 산 채 코끼리를 잡는 데는 길들인 암코끼리 두 마리를 써서 숫놈을 꾀어 오게 하여, 굵은 밧줄로 발을 묶어 나무 사이에 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며칠 동안 굶긴 다음 상노(象奴)를 시켜 점점 가까이 가서 먹을 것을 주어, 조금씩 길을 들인 뒤에 두 암놈이 끼고 돌아옵니다.”

라고 하였다. 때는 마침 이른 봄이라 논에는 푸른 모가 이미 이삭을 팼고, 거름도 주지 않는데도 한 해에 세 번 수확을 한다고 한다. 풍토(風土)와 기후는 항상 따뜻하여 그늘이 습기를 돕고 볕이 따가워 쇠라도 녹일 것 같으므로 만물은 가을과 겨울에 피어난다고 한다. 일은 밤에 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지혜가 있고, 나무는 파라밀(波羅密)야자(椰子)빈랑(檳榔)산석류(山石榴)정향(丁香)목란(木蘭)번말리(番茉莉)가 많다. 그 시골 촌락들은 모두 초가에 대 울타리이다.

강희 을미(1715) 연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흑진국(黑眞國) 사람이 여자 하나와 같이 가는 것을 산해관(山海關) 밖에서 만났다. 영고탑(寧古塔) 동쪽으로 수천 리를 가면 빙해(氷海)가 있어 5년에 한 번씩 육지(陸地)까지 얼어붙는데 나라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흑진국이다. 일찍이 육지에 통하지 못한 지 10여 년에 흑진국 사람 하나가 졸지에 얼음을 건너 서쪽 언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무슨 물건인지 분별하지 못하겠더니 자세히 살펴본즉 사람이었다. 온몸을 짐승 가죽으로 둘러썼고 다만 얼굴만 드러냈는데 머리털은 양털처럼 곱슬머리였다. 변방 사람들이 산 채로 붙들어 북경으로 보냈다. 강희 황제가 그를 불러 보고 밥을 주었더니 먹을 줄을 알지 못하고, 생선과 날고기만 먹었다. 여러 가지 물건을 앞에 벌여 놓고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가 보았더니, 끝내 돌아보지도 않았다. 여자를 끌어다가 뵈었더니 즉시 흔연히 끌어안았다. 이에 황제가 총명한 여자를 골라 배필로 삼아 주고 또 영리한 시위(侍衛) 다섯 명을 여자와 함께 보호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오곡 종자와 농사하는 법을 가르쳐 보냈더니, 5년 뒤에 그는 여자와 함께 다시 빙해를 건너 와서 은혜를 사례했는데, 주먹만 한 큰 구슬 몇 개와 길이가 한 길 넘는 초피(貂皮)를 갖다 바쳤다. 여자 말에는,

 

나라는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임금도 어른도 없으며, 키가 큰 사람은 세 길이나 되고 작아도 한 길 넘어 되며, 오직 금수를 사냥하고 생선과 자라를 날로 먹는 것뿐이요, 바다 속에는 구슬이 가득하여 광채가 괴상하여 헤아릴 수 없습디다.”

한다. 이것은 일암(一菴 미상) 연행기(燕行記)에 실려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다가 학지정(郝志亭)에게 물었더니 그의 대답도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이로써 더욱 천하는 넓고 없는 물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소위 군기 대신(軍機大臣)이란 모두 만인(滿人)이다. 일찍이 듣건대, 국중에 기밀(機密)한 큰일이 있으면, 황제는 비밀히 군기 대신을 불러서 함께 높은 누각(樓閣)에 올라가면 밑에서 사닥다리를 치워 버렸다가 누상(樓上)에서 방울 소리가 난 연후에야 도로 그 사닥다리를 가져다 놓는다. 비록 며칠이라도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좌우의 누구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다. 옹정(雍正) 때 군기 대신은 망곡립(莽鵠立)이었는데, 몽고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려 일찍이 강희 황제와 옹정 황제의 초상을 그렸다. 악이태(鄂爾泰)팽공야(彭公冶)는 모두 문무(文武)를 겸한 재사였으며, 김상명(金常明)은 우리나라 의주 사람으로 역시 군기대신의 칭호를 띠고 있었다. 지금 복차산(福次山)은 밀운점(密雲店)까지 따라왔는데 나이는 256세 가량으로 역시 군기 대신이라 불렀다.

옹정 2(1724) 정월 경자에 흠천감(欽天監)이 아뢰기를,

 

해와 달이 벽()을 합하여 함께 밝고 오성(五星)이 구슬처럼 연하여 영실(營室)의 다음으로 돌아드니, 그 위치는 취자(娶訾)의 궁에 해당하옵니다.”

한다. 황제는 칙명을 사관(史館)에 붙여 중외(中外)에 알리게 하였다. 또 옹정 4(1726)에 친히 적전(籍田)에 나가 밭을 가는데 가화(嘉禾)가 한 줄기에 두 이삭으로부터 89이삭까지 나왔었다. 이때 오중(吳中)에서는 상서로운 고치를 바쳤는데 크기가 모자만 했다고 하며, 이 밖에도 기린이 나타나고 봉황이 울고 황하가 맑아지며 경운(慶雲)이 뜨고 단 이슬과 신령스러운 지초가 났다는 등, 이런 상서가 없는 해가 없었다. 사사정(査嗣庭 () 때의 관리)의 일록(日錄)에는 이런 상서는 도리어 재앙이 있을 변으로 삼았고, 혹은 중국에 진인(眞人)이 나올 조짐이라 하였다. ()의 옥사(獄事)가 생기자 옹정 황제는 중외에 조서를 내리기를,

 

너희 한인들이 이미 태평을 함께 누리면서 그 복을 국가에 돌릴 줄 모르고 반드시 진인이 꼭 나온다고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이는 정말 반역을 생각하는 백성들이다.”

운운하여, 이 옥사에 연좌된 수가 수만 호에 달했던 바 70()에서 나타난 상서는 옹정 때 이르러서 더욱 많았으며, 한인이 문득 옛 한( 망한 명 나라)을 생각하다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니, 이는 과연 상서로운 조짐이 아니라 재앙의 조짐인가 보다.

() 경릉(景陵)의 호는 곧 성조인 황제(聖祖仁皇帝). 그 아들은 모두가 명사(名士), 과친왕(果親王)윤례(允禮)의 글씨는 축지산(祝枝山 () 축윤명(祝允明). 지산은 호)에게 비교할 바 아니다. 강녀묘(姜女廟)와 북진묘(北鎭廟)에는 모두 과친왕의 주련(柱聯)이 있었고, 무령현(撫寧縣) 서소분(徐苕芬)의 집에도 역시 과친왕의 글씨가 있기에 나는 모사해 오려고 했으나 길이 바빠서 못하였다.

강희는 아들이 모두 2명이었는데 재자(才子) 이친왕(怡親王) 윤상(允祥), 장친왕(莊親王) 윤록(允祿),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 옹정 황제는 윤진(允禛)인데 넷째 아들이요 팔왕(八王) 윤아(允䄉), 구왕 윤당(允禟), 십삼왕 윤지(允禔), 십오왕 윤우(允祐), 염친왕(廉親王) 윤기(), 십사왕은 윤제(允禵)인데 본명은 윤정(允禎)으로, 이는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중망(衆望)을 모았다. 강희의 병이 위급하자, 한의 각로(閣老) 왕담(王惔)과 함께 고명(顧命)을 받으면서 ()’ 자를 ()’ 자로, 넷째 아들인 것을 열넷째 아들로 잘못 알았다가, 왕담은 죄를 입고 윤정은 역적 괴수로 되었는 바, ‘()’ 자를 ()’ 자로 고쳤다 한다.

우리나라 서해안 장연(長淵)풍천(豐川) 해변의 고기잡이에는 중국 배들이 휩쓸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각화도(覺華島) 사람으로 매년 5월 초에 와서 7월 초에 돌아간다. 잡는 것은 방풍(防風 한약 재료)과 해삼(海蔘)뿐으로 때로는 육지에 내려 양식을 청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황제께 아뢰어 금지할 것을 청했다. 강희 54(1715) 2월에 예부에서 주청하여 문서를 돌려 봉천 장군(奉天將軍)봉천 부윤(奉天府尹)과 산동(山東)강남(江南)절강(浙江)복건(福建)광동(廣東) 등지의 독무(督務)에게 신칙(申飭)하여, 연해 수사영(水師營)에서는 조선에 가까운 해상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하고, 밀항(密航)하여 바다를 건너다가 붙들려 조선에 보낸 자를 엄하게 치죄(治罪)할 것과, 그 지방 관리와 해당 부서는 협의하여 역시 엄격히 신칙하고, 조선 연변을 지키는 관리나 군사들이 불시에 순찰하여, 만일 이런 자를 발견할 때는 즉시 붙들어 압송할 것을 운운하였다. 지금 중국 배가 서해안에 오면 지방 이교(吏校)들이 즉시 지방관에게 보고하지만, 실상은 금지할 방도가 없은즉, 알고도 모른 체하고 있다가 돌아갈 시기를 기다려 멀리서 배 떠나는 날짜를 묻고 그제야 수영(水營)에 아뢰기를, 방금 배가 왔다고 하면 수영은 일변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그 지방 관리에게 그날로 쫓아내라고 명령을 하는데, 실상인즉 모두 귀 막고 방울 도둑질하는 격이니, 우리나라 국경 수비가 실로 한심한 일이다.

()의 제도에 삼공(三公)의 월봉(月俸) 3 50( 곡은 10)이다. 이 밖에 중 이천석(中二千石)으로부터 백석에 이르기까지 무릇 14등급으로 나누었으니, 중 이천석의 월봉은 1 80곡이요, 백석의 월봉은 16곡이다. 후한(後漢) 시대 대장군과 삼공의 월봉은 3 50곡이요, 중 이천석의 월봉은 72곡에 돈이 9천 냥이요, 백석의 월봉은 4 8두에 돈 8백 냥이다. ()의 제도는 품질(品秩)에 있어 제 일등이 1 8백 곡이요, 후주(後周)에서는 구명(九命)과 삼공이 1만 석이요, 하사(下士) 일명(一命)에는 1 25석이다. 당의 제도는 정일품(正一品)이 매년 7백 석에 돈 3 1천 냥이요, 9(從九品)에 이르러는 52석에 돈 1 9 70냥이다. 송의 제도는 41등급인데, 재상과 추밀사(樞密使)가 매월 돈 3 1천 냥(30만 냥)이요, 보장정(保章正)에 이르러는 2천 냥이다. 명에서는 정일품에 매월 쌀 87석을 주고, 9품에 5석을 준다. 대체로 비교해서 춘추 전국(戰國) 시대는 대신의 녹봉이 1만 종( 1종은 10()이다)이라 하였은즉, 한의 삼공의 월봉은 너무 약소한 편이다. 지금 청의 녹봉 제도와 지방관들의 보수를 보면 명의 제도보다 적은 편이다.

고려 중서(中書)상서령(尙書令)과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연봉이 쌀 4백 석이요 조교(助敎)에 이르러는 쌀 10섬이다. 우리 조정에서는 정일품은 연봉 98석에 명주 6, 정포(正布) 15, 저화(楮貨) 10장이요, 9품은 12석에 정포 2, 저화 1장이요, 임진왜란 뒤는 일품 연봉이 60여 석에 명주와 정포저화는 없앴다. 대개 녹봉 제도가 전 시대보다 검약해진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관원이 많아진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겨울철 창살에 종이를 붙이는데 사이에 인물과 화초를 그려 넣은 유리 조각을 끼운다. 방 안으로부터 밖을 보면 작은 것이라도 뵈지 않는 것이 없으나 밖에서 안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원래 구양초(歐陽楚 구양초옹인데 옹()자가 빠졌다)의 어가사(漁家詞)에 나오는 화호(花戶) 유창(油牕)이다. 연로(沿路)의 저자에서 채색 그림을 그린 유리를 파는 자가 아주 많은데 이것은 모두 창살에 끼우는 것이다.

구슬을 목에 거는 제도는 반드시 5품 이상이라야 하였는데, 한림(翰林)들은 7품이라도 거는 것이 허락됐다. 지현(知縣)이 되면 걸지 못하는 법인데 통관(通官) 오림포(烏林哺)와 서종현(徐宗顯)의 무리들도 함께 구슬을 걸 수 있는 것은, 외국 사람에게 영화롭게 보이기 위하여 권도로 걸게 한 것이다.

() 2 70년 간에 세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으니, 태조 고 황제는 중으로서 몸을 일으켰고, 건문 황제는 대내(大內)에서 중으로 늙었으며, 숭정 황제는 머리를 풀고 나라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다.

왕양명(王陽明)의 도학과 척남궁(戚南宮)의 무략(武略)과 왕남명(汪南溟 명 나라 문학가 왕도곤(王道昆). 남명은 자)의 문장으로도, 모두 사나운 아내가 있어 평생을 굽실거리고 감히 제 기운을 내지 못했다 하니, 또한 명의 세 가지 이상한 일에 들 만하다.

강희 연간에 왕사정(王士禎)은 형부(刑部)에 있으면서 매일 원서(爰書 죄인들의 초사를 기록한 책)를 열람해 보니, ()이 묘씨(妙氏)도씨(島氏)반씨(盤氏)민씨(民氏)전씨(纏氏)저씨(杵氏)유씨(劉氏)율씨(律氏)다씨(茶氏)연씨(煙氏)양씨(穰氏)수씨(首氏)비씨(卑氏)위씨(威氏)빙씨(氷氏)감씨(坎氏)탑씨(榻氏)남씨(欖氏)자씨(慈氏)가 있었는데 모두 중국의 희성(稀姓)이다. 내가 심양에 이르니, 빈희안(貧希顔)희헌(希憲) 형제가 있어 모두 강남 대상(大商)이라 했고, 산해관(山海關)에 오니 구승(臼勝)이란 자가 있어 거인(擧人)이라 했다. 우리나라에도 역시 부씨(夫氏)양씨(良氏) 등은 모두 탐라(耽羅)출신이요, 또 불씨(乀氏)궉씨(鴌氏)도 있는데, 비단 성이 드물 뿐만 아니라 글자도 역시 상고할 수 없으니 괴상한 일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옹백(雍伯)이 옥을 심었다 하는데, 지금 내가 지나가는 옥전현(玉田縣)이 바로 이곳이다. 오후청(五侯鯖 저자 미상)에 실린 이야기로, 설경(薛瓊)은 지극한 효자로서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하러가다가 우연히 늙은 농부를 만났더니, 그가 무슨 물건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은실(銀實)인데, 서쪽 벽토(壁土)를 파다가 동분(銅盆)에 심으면 꼭 은을 얻을 것이다.”

하므로, 그 말대로 심었더니 열흘이 되어 싹이 나고 다시 열흘이 되어 꽃이 피는데, 꽃빛은 은색이어서 자개와 같았다 하며, 열매가 맺었는데 모두 은이었다 한다. 고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이 나에게 말하기를,

 

서역(西域)에서는 양의 배꼽을 심는데, 양을 잡을 때 먼저 배꼽을 따서 이를 흙으로 두껍게 심으면 1년 만에 양이 생긴다 하며, 그것이 땅 위에 엎드려 꼭 짐승 모양으로 되었다가 천둥 소리를 들으면 배꼽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원사(元史)에 실렸습니다.”

하니, 양의 배꼽을 심을 수 있다면 은과 옥도 역시 심을 수 있을 것인가.

옹정(雍正) 원년(1723)의 조서에 이르기를,

 

대행(大行) 황제의 서사(書笥) 속에서 아직 반포하지 않은 유지(諭旨)를 찾아내었으니, 그 내용에, ‘명 태조(明太祖)는 포의(布衣)로서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였으되, ()을 경()으로 삼고 무를 위()로 삼기는 한송의 여러 임금이 따르지 못할 바요, 그 뒤로 대를 이은 임금들도 역시 전 시대와 같이 포학하고 음탕하나 나라를 망치던 자취는 없었은즉, 이제 지파(支派) 자손 하나라도 찾아서 관직을 주고 춘추 제사라도 받들고자 한다. 내가 생각해 보니, 옛 역사에는 동루(東樓)를 기록했고, 시경(詩經)에는 백마(白馬)를 노래했는데, 후세에서는 모두 이를 의심하고 기휘해서 역대 임금의 종사(宗祀)가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황고(皇考) 강희(康熙)이다. 의 하늘 같은 마음을 받들고, 멀리 옛 임금의 성한 덕을 본받아서, 삼가 대행황고(大行皇考)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의 유지를 반포하여 명 태조의 지파 자손을 찾아 적당한 직함(職啣)을 주고, 그로 하여금 춘추 향사(享祀)를 하도록 할 것이다 했다.”

하였다. 이때 주씨(朱氏) 한 사람이 성명을 바꾸어 숨기고 외읍에 벼슬을 하더니, 원수의 직고(直告)로 인하여 황제가 그를 불러 그 근본을 자세히 묻고는, 특명으로 국공(國公)에 봉하고 명()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고 한다.

파극집(巴克什)은 만주말로 큰 선비를 일컫는 것이다. 청 태종(淸太宗) 때 파극집 달해(達海)란 자가 있었는데, 만주 사람으로 나이 21세에 죽으니, 제자로서 효복(孝服)을 입은 자가 3천 명이나 되어 신인(神人)이라 불렀다 한다. 신라 사다함(舍多含) 15세에 풍표(風標)가 청수(淸秀)하고 지기(志氣)가 방정해서 당시 사람들이 화랑(花郞)으로 삼았더니, 그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것을 달해의 숙성(夙成)한 데 비했더니 풍병건(馮秉健)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라 화랑의 칭호가 이학 선생(理學先生)보다 훨씬 낫습니다. ()의 육경대(陸瓊臺)는 천자(天資)가 고매해서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선비들을 동림(東林)에 모아 강론을 하는데, 옷을 걷고 허리를 구부리면서 방 안에 벌여 서는 제자가 하루아침에도 8백 명이나 되었답니다.”

하였다.

명의 특진광록대부 전군도독부 좌도독(特進光祿大夫前軍都督府左都督) 남창(南昌) 유공(劉公) ()의 자는 자신(子紳)이다. 그는 대도(大刀) 쓰기를 좋아하며 대도의 무게가 백 20근이나 되니, 유대도(劉大刀)라 불렀다.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에 있는 열무관(烈武觀)은 곧 그가 임진년에 조선을 도우러 왔을 때 군사를 시찰하던 곳이다. 정이 이 제독(李提督)을 따라 진격하여 왜군의 추장(酋長) 행장(行長)을 문경(聞慶)에서 무찔렀다. 제독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정은 혼자 성주(星州)에 주둔하면서, 거성(莒城)에 들어가 도독 진린(陳璘)과 함께 행장을 순천 앞 바다에서 격파하고, 예교(曳橋)를 포위했으나 10여 일에 행장은 도주했다. 그가 동쪽으로 출사(出師)한 것은 전후 7년인데, 공이 가장 컸고 그 뒤 20년에 심하(深河) 싸움에서 죽었다. ()이 출사할 때 정이 보졸(步卒) 5천으로 왜병을 공격하겠다 하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이를 장하게 여겨 허락한 것이다. 명의 사기에는 행장이 가만히 군사 천여 명을 출전시키매 정이 드디어 물러났다 했으나, 이것은 모두 잘못된 사기이다. 사기에 또 이르기를,

 

두송(杜松)의 군사가 패하자, 양호(楊鎬)가 말을 달려 정을 불렀으나, 기병이 가기 전에 정은 이미 죽었다.”

하였다. 지금 청의 천자는 정조(正朝)에 반드시 먼저 종묘(宗廟)에 제사 지내고 친히 당자(堂子)에 참배하는데, 혹은 등 장군(鄧將軍)의 묘라고도 하고 혹은 유대도(劉大刀)의 사당이라고도 하며 중국 사람들은 몹시 이것을 비밀히 하여 기휘한다. 혹은 말하기를,

 

유정이 갑자기 죽자 그의 영혼은 심히 영험이 있어, 천자가 친히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천하에 큰 역질이 돌고 흉년이 들며, 종묘에도 문득 재이(災異)가 생겨 편안하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박송당(朴松堂 송당은 박영의 호) ()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이다. 천자(天資)가 호매(豪邁)하고 또 부후(富厚)하며 나이 17세에 요동에 들어가 집비둘기를 사 가지고 왔다. 내가 요동에 이르렀을 때, 한 전방에서 먹이는 비둘기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저녁이 되면 날아 돌아와 각각 제집을 찾아든다. 전방 안에는 큰 돌 구유에 미리 잿물을 만들어 두었다가 요동 들에 나가 콩을 배부르게 주워 먹은 비둘기가 돌아와 다투어 잿물을 먹고 콩을 모두 토해 놓으면 이것으로 말을 먹였다.

왕원미(王元美) 완위여편(宛委餘編)에는 여자로서 병관(兵官)이 된 자가 실렸는데, 군사마(軍司馬) 공씨(孔氏)는 고침(顧琛)의 어머니요, 정렬 장군(貞烈將軍) 왕씨는 왕흠(王廞)의 딸이다. 당 행영절도(行營節度) 허숙기(許叔冀)의 부하 왕씨당씨(唐氏)후씨(侯氏)는 모두 그 행영에서는 과의(果毅 군관(軍官) 이름) 출신 교위(校尉)들이다. ()의 여자 백경아(白頸鵝)가 거란의 회화 장군(懷化將軍)이 되었다 하였으나, 당 태종이 신라의 선덕 여왕(善德女王)을 추증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고, 또 진덕 여왕을 주국(柱國)에 책봉하여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했으며, 또 왕이 죽자 고종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追贈)한 것은 실리지 못했다. 나는 일찍이 이덕무(李德懋)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이 기록을 보았다. 유리창(琉璃廠)에 있는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능야(凌野)와 고역생(高棫生)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이 말을 했더니, 능과 고, 그 밖의 여러 사람들도, 자못 넓게 안다고 나를 칭찬하였다.

나는 가는 곳마다 낙화생(落花生)과 귤병(橘餠)매당(梅糖)국차[菊茶] 등으로 대접을 많이 받았는데, 모두가 복건절강 지방에서 나는 것이다. 양매(楊梅) 5월에 익으며 그 빛이 붉고 크기는 한 치쯤 되고, 성분이 더워서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한다 한다.

정효(鄭曉 명 나라 학자) 고언(古言)에 이르기를,

 

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수(歐楊修). 영숙은 자)은 계사(繫辭)를 비방하고, 사마군실(司馬君實 사마광(司馬光). 군실은 자)은 맹자(孟子)를 비방하며, 왕개보(王介甫 왕안석(王安石). 계보는 자)는 춘추(春秋)를 잘못되었다 하고, 두 정자(程子)는 옛날 대학(大學)을 고치고, 회암 선생(晦庵先生)은 자하(子夏 복상(卜商)의 자)의 시서(詩序)를 쓰지 않았던 일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나도 적이 여기에서 느낀 바 있었다.

사람은 아는 것을 너무 자랑하고 함부로 책을 기술할 것이 아니니, 강희 연간에 왕사정(王士禎)의 저서가 가장 많았는데, 그의 필기(筆記)에서 말하기를,

 

풍속통(風俗通, 한의 태수(太守)에 뇌선정(先井)그 자주(自注)에 정()의 음은 담()이다. 이란 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되, 자기 성명 석 자에 두 자는 통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이 말을 이무관(李懋官)에게 했더니, 무관은 말하기를,

 

이것은 어양(漁洋)이 잘못 안 것입니다. 풍속통에는 교지 태수(交趾太守)로 뇌선(賴先)이란 자가 있는데 뇌() 자는 뇌() 자의 고자[古文]이고,  옥해(玉海 왕응린(王應麟) )에는, 한에 뇌단(賴丹)이란 교위(校尉)가 있었으니, 이것은 뇌선과 뇌단을 합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 자는 정() 자의 본문(本文)이니, 주를 내어 음이 담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단가루(段家樓)의 술 자리에서 누명재(漏明齋)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누는 이무관의 박식한 것이 어양보다도 낫다고 하였다.

춘명몽유록(春明夢游錄)북평(北平) 손승택(孫承澤)의 저 에 이르기를,

 

그들의 국사(國史) 고려사(高麗史) 를 상고해 보니, ()의 전성 시절에 원 효왕(元孝王 고려의 고종(高宗))이 강화도(江華島)로 옮기니, 원도 어쩔 수가 없어서 다만 그가 육지에 오르지 않는 것만 책망했었다. 그는 필경 원에 복종했지만 마침내 육지에 오르지 않고, 그의 아들 순효왕(順孝王 고려의 원종(元宗))에 이르러 친히 왕주(王主) ()의 공주(公主) 를 맞아 원의 복색으로 함께 가마를 타고 본국으로 들어왔다. 보는 자들이 해괴히 여겼으며, 그때 따르는 종실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다 하여 왕은 이를 책망하였다. 그 아들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르러 재상으로부터 하료(下僚)에 이르기까지 머리를 깎지 않는 자가 없었고, 다만 금내(禁內)에 있는 학관(學館)에서만 머리를 깎지 않았으므로, 좌승지(左承旨) 박환(朴桓)이 집사(執事)를 불러 일러서, 이때에야 관학생(館學生)들도 모두 머리를 깎았다.”

하였다. 청이 처음 일어날 제 한인을 붙드는 대로 머리를 깎았으며, 정축년(1637) 맹약(盟約)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머리는 깎지 않았다. 대개 여기에는 까닭이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는,

 

청인들이 여러 번 한() ()의 태종(太宗) 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를 깎도록 명령하라고 권했으나, ()은 묵연(黙然)히 이에 응하지 않고 가만히 여러 패륵(貝勒)들에게 이르기를, 조선은 본래 예의로 이름이 나서 머리털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그 심정을 꺾는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반복(反覆)할 터이니, 그들의 풍속에 따라 예의로써 얽매어 두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도리어 우리 풍속을 익혀 기사(騎射)에 편리해진다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그만두었다. 우리로서 말하자면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저들로서 계교한다면 우리들의 문약(文弱)함을 그대로 두려던 것이었다.

 

 

[D-001]태평어람(太平御覽) : 송 태조(宋太祖)의 명을 받아서 이방(李昉) 등이 엮었다.

[D-002]배율(排律) : 장편시로서, 글귀마다 운율을 배열(排列)하는 시체(詩體)의 하나.

[D-003]() : 산문으로 문제에 따라 자기의 포부와 실력을 서술하는 문체의 하나.

[D-004]회시(會試) : 향시에서 급제한 자를 수도에 모아서 치르는 두 번째의 고시로서, 합격자에게는 진사(進士)라는 학위를 주었다.

[D-005]전시(殿試) : 황제가 직접 정전에서 보이는 중앙 고시의 일종.

[D-006]삼왕(三王) : ()이 망한 뒤에 남방으로 도망한 왕족으로서, 임시 정부를 조직한 복왕(福王)계왕(桂王)당왕(唐王).

[D-007]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 : 연기가 끼인 강물에 첩첩이 쌓인 산을 그린 것이다.

[D-008]유미암(柳眉菴) : 조선 중종(中宗) 때 학자 유희춘(柳希春). 미암은 호요, 자는 인중(仁仲). ()은 암()이 잘못된 것이다.

[D-009]모시(毛詩) : 시경(詩經)에 모형(毛亨)과 모장(毛萇)의 전()이 있으므로 모시라 한다.

[D-010]()()의 시 : 시경중의 정풍(鄭風)과 위풍(䘙風).

[D-011]초중경(焦仲卿) …… 것은 :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라는 장편 서사시(敍事詩)를 한말(漢末) 여강부(廬江府) 소리(小吏) 초중경의 아내가 지었다 하였다.

[D-012]고시(古詩) 19 : 혹은 매승(枚乘)의 작이라 하고, 혹은 부의(傅毅)장형(張衡)채옹(蔡翁) 등이 지었다 한다.

[D-013]하였다. : ‘원우 5 …… 없겠다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첫째 이야기다.

[D-014]회동제거 …… 아니랴 : ‘회동제거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둘째 이야기다.

[D-015]마복탑(馬福塔) : ()의 장수. 우리나라에서는 흔히들 마골대(馬骨大)라 한다.

[D-016]만력 …… 조짐이었던가 : 만력(萬曆)이란 연호가 만세력(萬歲曆)을 응한 참언(讖言)이라는 것이다.

[D-017]3() : 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

[D-018]구석선문(九錫禪文) : 천자가 제후에게 최고 공훈을 표창하는 아홉 가지의 문건을 내릴 때의 고시문.

[D-019]복왕(福王) : 명이 망한 뒤에 마사영(馬士英) 등이 남경에서 세운 주유숭(朱由崧)의 봉호.

[D-020]구경(九卿) …… 등을 : 도찰원(都察院)의 소속 육과(六科)의 급사중(給事中) 15() 감찰어사(監察御使)의 총칭.

[D-021]삼학사(三學士) : 병자호란에 척화신(斥和臣)으로 이름 높았던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D-022]무학(無學) :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 정하는 일을 도와주던 중 박자초(朴自超). 무학은 승호(僧號).

[D-023]남사고(南師古) : 조선 선조(宣祖) 때 사람으로서 풍수설(風水說)에 가장 저명하였다.

[D-024]육부(六府) :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에 있는 말로, ()()()()()()을 이름.

[D-025]삼사(三事) :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에 있는 말로,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이름.

[D-026]구주(九疇) :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아홉 가지의 정치 요강(要綱).

[D-027]승항(升恒) : 시경(詩經)구여(九如)의 글귀로서, “해가 오르는 듯이 달이 이지러지지 않는 듯이라는 뜻.

[D-028]규루(奎婁) : 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별 이름으로, ‘는 문명을 맡은 별이요, ‘는 원목(苑牧)을 맡은 별이다.

[D-029]모반하여 …… 빼앗았으니 : 연왕(燕王)이던 성조가 조카인 혜제를 축출한 것을 말한다.

[D-030]그의 …… 유여시(柳如是) : 여기에서는 아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첩이었다. 하동군은 봉호가 아닌 별칭. 자는 미무(蘼蕪), 본 성명은 양애(楊愛). 그가 일찍이 전겸익에게 절자하기를 권했으나 좇지 못했다.

[D-031]동림당(東林黨) : 명의 고헌성(顧憲成)이 고반룡(高攀龍) 등과 더불어 무석(無錫)에 있는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시정(時政)과 인물을 논하여 동림당의 지목을 얻었다.

[D-032]최만리(崔萬里) : 조선 세종 때의 학자. ()는 이()의 잘못. 자는 자명(子明).

[D-033]한구자(韓遘字) : 조선 숙종(肅宗) 때 한구(韓構)가 쓴 활자. ()는 구()의 잘못.

[D-034]갓 모자 …… 되니 : 여기서의 아름 단위는 양팔 둘레의 아름이 아니고 양손 둘레의 아름이다.

[D-035]하백(河伯) …… 탄식한 것 : 남화경(南華經)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구절.

[D-036]영실(營室) : 28개 성좌(星座) 중의 하나인 실성(實星) 성좌.

[D-037]취자(娶訾) : 미성(尾星) 16도와 규성(奎星)의 사도에 있는 성좌.

[D-038]적전(籍田) : 황제가 종묘(宗廟)에 바칠 곡식을 친히 경작하는 밭.

[D-039]()의 제도 : 관리의 연봉을 곡식의 석수로 표시하던 한()의 관제(官制).

[D-040]우리나라에도 …… 일이다 : ‘수택본에는, “옛날 이루(離婁)의 이씨(離氏)가 있어서 감씨(坎氏)와 더불어 혼인하고 저씨(杵氏)가 구씨(臼氏)와 더불어 짝이 되었으니, 가히 하늘이 정해 준 배필이라.” 하였다.

[D-041]동루(東樓) : 주 무왕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하우(夏禹)의 후손을 동루에 봉하였다.

[D-042]백마(白馬)를 노래했는데 : 기자가 백마로 조주(朝周)한 일을 읊었다.

[D-043]동림(東林) : 명의 동림당(東林黨)의 학자가 강학하던 동림서원(東林書院).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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